에티오피아 시다모 난세보_2020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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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취향은 과테말라 엘 소코로보다 이쪽이네요. 예가체프 같은 꽃 향과 단맛이 개성적이에요. 설명에 나오는 체리의 맛이 틀린 소리는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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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2020)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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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지 않은 향과 신맛, 단맛. 부드러움은 최강. 차가울 때도 뜨거울 때도 변함없이. 외유내강 커피입니까. 신기한 맛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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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 에티오피아 시다모 디카페인 (원액) - 5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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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구매인데 우유랑 섞어 먹을 때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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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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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비유와 논리도 논리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김수영처럼 글의 기개가 대단한데, 이런 특징이 책의 생명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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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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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 살아남을까.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질문이다. 조지 오웰(1903~1950)은 그런 책을 쓴 작가다. 그의 말기 소설 『동물농장』(1945)과 『1984』(1949)는 70년이 지나서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그는 11권(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의 책을 냈지만 생전에 책으로 묶지 못한 서평과 칼럼도 많다. 이 책은 여러 산문 중 꼭 읽어볼 것을 선별해 모았는데 그의 성장담, 소설 집필 배경, 그의 인간성과 세계관과 문학관, 문학 작법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그는 양차 세계대전을 고통스럽게 통과해야 했던 세대로서 “고약한 양심의 가책”을 초지일관 유지하며 삶에서든 글에서든 인습을 타파하려 한 작가였다. 그는 대학 진학 대신 식민지 경찰직을 하다가 그만두고 부랑자나 접시 닦이 생활도 하고 전쟁에도 참여했지만 글을 통해 세계를 직시하려 했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을 추구한 그의 글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그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나며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밑줄을 긋게 될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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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ㅡ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1946/여름)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점점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오웰의 뜻은 ‘끝없이 고민하고 행동하라’는 각성 촉구라고 봐야 한다. 그가 정치, 사회, 문화를 비판적으로 본 시각은 지금 현실에 대입해도 여전히 유효해서 놀랍다. 세상과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방증이기도 하겠다. 그래서 오웰이 '정치적'이기를 강조한 것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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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를 욕하고, 적을 칭찬하고, 항복을 요구하는 신문들과 팸플릿들이 거의 아무런 간섭 없이 길거리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이는 언론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그 정도야 별일 아니라는 단순한 인식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피스 뉴스》 같은 신문은 팔도록 놔둬도 위험할 게 없다. 국민의 95퍼센트는 읽을 생각도 안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국이란 나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단단히 결속돼 있다. 평상시에는 지배계급이 도둑질도 하고, 관리도 엉망으로 하고, 사사건건 방해도 하고, 우리를 진창에 밀어 넣기도 한다. 그러나 여론이 지배계급 인사들에게 확실히 전달되도록 하면, 즉 그들이 일반의 정서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밑에서 힘차게 잡아당기면, 그들도 반응하지 않기가 어렵다.

ㅡ 영국, 당신의 영국 England Your England (19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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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1900년부터 1920년까지 영어로 책을 쓴 사람 중에 그만큼 어린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없는 것 같다. 웰스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의 정신과 그에 따른 물리적 세계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웰스를 지금과 같은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사상가로 만든 것은 사고방식의 획일성, 즉 그를 ‘에드워드 시대(1901∼1910)’의 탁월한 선지자인 듯 보이게 한, 그 편향적 상상력이었다. 웰스가 젊었을 때는 과학과 반동의 대립이 틀린 게 아니었다. 사회를 지배하는 주체가 옹졸하고 극도로 호기심 없는 사람들, 탐욕스러운 사업가들, 아둔한 시골 대지주들, 주교들, 정치인들이었고, 그들은 호라티우스는 인용할 줄 알아도 대수代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과학은 어딘가 좀 남우세스러운 것이었고, 신앙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전통주의, 우둔함, 속물근성, 애국심, 미신, 전쟁 애호는 모두 같은 편에 속해 있는 듯했다. 때문에 그 반대의 관점을 제시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돌이켜보건대 1900년대에 어린 소년이 H. G. 웰스를 알게 된다는 건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당시 세계는 현학자와 성직자, 골프 치는 사람의 세상이었고, 미래의 고용주는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훈계하고, 부모는 자식의 성적인 발달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아둔한 교사들은 상투적인 라틴어 인용구를 들이대며 바보스럽게 히죽거리던 세상이었다. 그런 시대에 다른 행성과 바다 밑에 사는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었던, 미래가 훌륭한 양반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리란 걸 알았던 놀라운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ㅡ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Wells, Hitler and the World State (19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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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어떤 식이든 거짓이라는 말이 유행인 건 나도 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는 말을 기꺼이 믿는 쪽이다. 한데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 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글을 무의식적으로 윤색하거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실을 애써 추구했다. 단, 어느 쪽이든 ‘사실’은 존재하며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사실이 늘 상당 부분 있었다. … (중략) … 서민들은 공화파가 자신들의 동지이며 프랑코가 적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도 알았으니, 세상이 자신들에게 빚지고 있는, 그리고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을 위해 싸웠던 까닭이다. 스페인 내전을 바로 보려면 그런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의 잔혹함과 더러움과 헛됨을(이 전쟁에선 음모와 박해와 거짓과 오해를) 생각하다 보면 꼭 발설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되는 말이 한마디 있다. “이쪽도 저쪽도 나쁘다. 나는 중립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람은 중립일 수 없으며,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전쟁 같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항상 한쪽은 다소 진보적인 쪽에 서고, 다른 쪽은 다소 반동적인 쪽에 서는 법이다. 스페인 공화파가 백만장자와 공작, 추기경, 한량, 블림프 등등에게 불러일으킨 혐오는 그 자체로 형세가 어떠했는지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서민들의 대의는 어디서나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불로소득자들은 만족스럽게 양손을 비빌 수 있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

ㅡ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Looking Back on the Spanish War (1942/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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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시라는 것 자체가 외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무엇이며, 마치 시를 대중화하는 게 본질적으로 어린아이한테 약을 삼키게 하거나 박해받는 종파에 대한 관용을 세간으로부터 얻어내는 일과 같은 전략적 술책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 문명에서 시는 단연코 가장 불신 받는 예술, 다시 말해 일반인들이 ‘어떤’ 가치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유일한 예술임이 분명하다. 아놀드 베넷이 영어권 나라에서 소방 호스보다 군중을 더 빨리 흩어버릴 수 있는 게 ‘시’라는 단어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런 유의 간극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점 더 시에 반감을 갖게 되고, 시인은 점점 더 거만하고 난해한 존재가 되어, 결국엔 시와 대중문화 사이의 단절이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실은 우리 시대에만, 그것도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일부 지역에만 있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고도로 문명화된 나라들의 평균적인 인간이 가장 미개한 야만인보다 미적으로 열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의식적인’ 행동으로는 대체로 치유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 사회가 좀더 반듯해지면 금방 저절로 나아질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자도, 무정부주의자도, 종교를 믿는 사람도 모두 같은 얘기를 할 텐데, 크게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이 볼품없는 데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원인이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전통이 실종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략)… 지금까지 나는 라디오를 보다 희망적인 매체로서 제시했고, 라디오의 기술적인 장점을 특히 시인의 입장에서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엔 부질없이 들릴 텐데, 그건 라디오가 헛소리 이외의 것을 퍼뜨리는 데 이용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 세상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리는 헛소리들을 듣고 있으며, 그래서 라디오를 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걸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라는 단어 자체가 고함지르는 독재자나, 아군 비행기 세 대가 귀환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점잖고 묵직한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시는 줄무늬 바지 입은 뮤즈 여신들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매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제 쓰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송이 그 모양인 건 마이크와 송신기라는 장치 자체가 본래부터 저속하거나 시시하거나 부정직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전파를 타는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래서 일반인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막으려 하는 정부와 거대 독점기업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ㅡ 시와 마이크 Poetry and the Microphone (1943/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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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민족주의’란 단어를 사용하는 건 더 나은 말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보다 확대된 의미의 민족주의는 공산주의, 정치적 가톨릭주의, 유대주의, 반유대주의, 트로츠키주의, 평화주의와 같은 운동과 경향 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반드시 어느 정부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조국’에 대한 충성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집단이 실제로 꼭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분명한 예로 유대민족, 이슬람, 기독교계, 프롤레타리아, 백인종을 들 수 있는데, 모두 열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중대한 의문점일 수 있으며, 그중 어느 하나에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정의가 없다.

ㅡ 민족주의 비망록 Notes on Nationalism (19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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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및 언론의 자유는 대개 고민할 가치도 없는 주장들의 공격을 받는다. 강연이나 논쟁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을 잘 안다. 여기서 나는 자유가 환상이라는 친숙한 주장이나 민주주의 국가보다는 전체주의 국가가 더 자유롭다는 주장을 다루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가 바람직한 게 아니며 지적인 정직성은 반사회적 이기심의 한 형태라는, 훨씬 더 그럴싸하면서 위험한 주장을 짚어보려는 것이다. 언론 및 보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은, 대개 겉으로는 딴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바람직한 게 무엇인지 또는 거짓말을 해도 되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중략)… 지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지하의 전설처럼 떠도는 얘기가 있다. 러시아 정부가 지금은 거짓 선전이나 조작된 재판 같은 것들을 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을 몰래 기록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그것을 공포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심성은, 과거란 바뀔 수 없으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당연히 값진 것이라 믿는 자유주의 역사가의 심성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배우기보다는 창조해야 하는 무엇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사실상 신정神政국가이며, 그 지배계급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실수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중략)… 전체주의의 요구에 맞서 지적 자유를 지키려고 하다 보면 앞서 열거한 유의 논박들과 어떤 식으로든 부딪치게 된다. 그러한 모든 질문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왜’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작가를 단순한 엔터테이너로, 아니면 거리의 악사가 곡을 바꾸듯 쉽게 선전 내용을 바꾸는 타락한 글쟁이로 여긴다. 하지만 책이란 게 과연 어떻게 씌어지는 것인가?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단순한 저널리스트와 가장 ‘비정치적’이고 창의적인 작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저널리스트는 허위 기사를 쓰거나 자기가 보기에 중요하다 싶은 뉴스를 덮어버려야만 할 때, 자유롭지 못하며 부자유를 의식하게 된다. 창의적인 작가는 자신의 관점에서는 사실인 주관적인 감정을 조작해야만 할 때,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 자기가 싫어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자기가 믿지 않는 걸 믿는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면, 결과는 그의 창의력이 고갈되는 것뿐이다. 그가 논란이 될 만한 주제를 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치적인 문학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유형의 공포, 증오, 충성이 모든 사람의 의식의 표면 가까이에 떠올라 있는 우리 시대엔 더더욱 그렇다. 자유롭게 떠오른 생각 하나가 금지된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금기도 지성을 완전히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ㅡ 문학 예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 (19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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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ㅡ 행락지 Pleasure Spots (1946/01)

 

 

 

 

 

강한 어조의 주장은 반감과 반박을 불러일으키기 쉬운데 그의 글은 그 단단함과 비유가 쉽게 깨질 만한 것이 아니다. 그의 문예론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글을 쓰는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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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종류의 글에서, 특히 예술비평이나 문학비평의 경우, 거의 의미 불통인 긴 구절과 마주치게 되는 게 보통이다. ‘낭만적인’, ‘조형적인’, ‘가치’, ‘인간적인’, ‘죽은’, ‘감상적인’, ‘자연적인’, ‘활력’ 같은 단어들은 예술비평에서 쓰이는 경우 확실히 무의미하다. 알아볼 만한 대상을 지시하지 않을뿐더러, 독자 역시 그런 기대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 비평가는 ‘X씨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살아 있다는 점이다’라고 하고, 다른 비평가는 ‘X씨의 작품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특유의 죽어 있음이다’라고 평했다고 하자. 독자는 둘을 단순한 견해차로 받아들일 뿐이다. ‘죽어 있는’과 ‘살아 있는’ 같은 상투적인 말 대신 ‘검은’과 ‘하얀’ 같은 단어를 쓴다면 언어가 부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게 당장 눈에 띌 것이다. 정치와 관련이 있는 많은 단어들도 비슷하게 남용되고 있다.

ㅡ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1946/04)

 

 

 

 

 

요즘 나는 읽은 책에 의무적으로 리뷰를 쓰기보다 꼭 남기고픈 리뷰만 쓰려고 한다. 시간적 정신적 에너지를 아끼려는 계획인데 무엇보다 좋은 책을 읽을 여유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오웰의 조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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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책은 이런저런 독자에게 열띤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격렬한 반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생각은 시큰둥한 전문 필자보다 확실히 값질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편집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편집자는 언제나 자신이 관리하는 일군의 꾼들, 즉 업계 용어로 ‘선수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평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내가 보기에 최선의 방법은 대부분의 책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000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곧 나올 신간 서적에 대해 한두 줄 정도의 짧은 소개를 해주는 건 유익할 수 있되, 흔히 하듯 600단어 정도의 중간 길이로 쓰는 서평은 서평자가 정말 원하는 작업이라 해도 무익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서평자는 대개 그런 글은 쓰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매주 자잘한 서평만 쓰다 보면 이 글 앞머리에 나오는, 가운 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 신세가 되고 만다.

ㅡ 어느 서평자의 고백 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 (19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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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거나 나쁜 속성이 예술 작품 자체에(그것도 보는 사람보다는 보는 사람의 기분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어느 시에 대해 월요일에는 좋고 화요일에는 나쁘다고 평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옳을 리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가 불러일으키는 감상感想에 따라 판단한다면, 그 말은 분명 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감상이나 향유는 주관적인 상태이며, 남이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아무런 미적 감정 없이 보내며,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너무나 간단히 훼손될 수 있다. 공포나 허기에 시달리거나 치통이나 뱃멀미를 앓을 때, 『리어 왕』은 『피터 팬』보다 하등 나을 게 없을 수 있다. 지적으로는 더 낫다는 걸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야 기억하는 사실일 뿐이다. 『리어 왕』의 장점을 ‘느끼게’ 되려면 정상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 미적인 판단은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인 의견 차이 때문에 마찬가지로 극심하게(이 경우 원인을 알아차리기가 더 어려우므로 더 심할 수 있다) 뒤바뀔 수 있다. 어떤 책 때문에 노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놀랄 경우, 책의 장점이 무엇이든 즐기지 못할 수 있다. 책이 자신에게 대단히 해롭거나 남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보인다면, 그 책에 아무런 장점도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미학 이론을 세울 수도 있다. 오늘날의 문예비평이란 주로 그런 두 가지 기준 사이를 교묘히 오가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즉, 즐거움이 견해차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한테 해로운 걸 즐기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스위프트처럼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별난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엄청난 인기가 있는 작가가 바로 그런 예다. 우리가 자신은 야후가 ‘아니’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우리가 야후라 불리는 걸 개의치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스위프트는 물론 옳지도 않았고 사실 제정신도 아니었지만 ‘좋은 작가’이긴 했다는 익숙한 답으론 충분하지 않다. 어떤 책의 문학적 질은 다소간은 주제와 분리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승부를 읽는 타고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있듯, 언어를 다루는 재주를 타고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재주란 주로 타이밍의 문제, 그리고 강조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아느냐의 문제다.

ㅡ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Politics vs. Literature: An Examination of Gulliver's Travels (1946/09~10)

 

 

 

이 책에서 오웰은 인간의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어떤 책이나 작가가 좋고 나쁘다는 평은 누구나 남길 수 있다. 단, 자신이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책임질 자세도 있어야 한다. 오웰은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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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치적인 시대다. 전쟁, 파시즘, 집단수용소, 경찰봉, 원자탄, 등등은 우리가 매일같이 생각하는 주제이며, 그래서 대놓고 거론하지 않더라도 상당 부분 우리가 쓰는 글의 주제가 되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가라앉는 배에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가라앉는 배에 관한 것이 될 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제는 협소해졌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우리가 적어도 이따금은 비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충심에 완전히 물들어 있다. 만일 나는 시절이 아무리 좋을 때라도 문학평론은 사기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왜냐하면 공인되다시피 한 기준 같은 게(어떤 책이 ‘좋다’ 또는 ‘나쁘다’는 진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외부’의 참조 대상) 없는 한 모든 문학적 판단은 본능적인 선호를 정당화하기 위한 규칙을 꾸며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책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반응이란 게 있기나 하다면) 주로 ‘나는 이 책이 좋다’거나 ‘나는 이 책이 싫다’는 것이며, 그 뒤에 따라붙는 것은 합리화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나는 이 책이 좋다’는 것이 비문학적 반응이라 생각지 않는다. 비문학적 반응이란 ‘이 책은 우리 편이니까 장점을 발견해내야 한다’는 식의 태도다.

ㅡ 작가와 리바이어던 Writers and Leviathan (1948/03)

 

 

 

 

식상하고 진부한 평에 우리 맘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심혈을 기울인 분석이더라도 기반이 부실하면 공격이 무효가 되고 악의만 드러낼 뿐이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비판하며 쓴 팸플릿이 그랬다. 오웰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Lear, Tolstoy and the Fool (1947/03)」에서 톨스토이가 자의적인 가정과 모호한 용어들(‘진정한’, ‘중요한’)을 사용하며 “셰익스피어에 대한 그릇된 찬미”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은 명백한 허위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든 다른 어느 작가든 ‘훌륭한’ 작가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나 논거 같은 것은 없고, “궁극적으론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왜 하필 톨스토이가 많은 희곡 중 『리어 왕』을 특정 표적으로 삼았는가를 추적하며, 리어 왕과 톨스토이가 사실 비슷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는데 타당하고 재밌었다. 책에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 책은 딱딱한 주제의 에세이만 있지 않다. 소박한 삶에 대한 판타지적 에세이 「물속의 달 The Moon under Water (1946/02)」, 그의 어린 시절을 절절히 담은 「정말, 정말 좋았지 Such, Such Were the Joys (1947/05)」도 놓치면 아까운 글이다. 어떤 책은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인용만으로도 충분히 리뷰를 대신할 수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스탠리 피시는『문장의 일』(2019, 윌북)에서 '윤리와 미학'에 관한 존 밀턴의 글을 인용하며, 진정한 글의 상태는 외부에서 기술할 수 없는 '내면의 특징'에서 온다는 것에 동의했다. 오웰의 견지에서 보면 '진정한'이란 전제와 '글'과 '내면-인격'의 직선적 연결이 따져볼 게 많지만 우리는 그 함의를 수긍한다.

 

 

우리는 단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 없이 살 수 없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것도 그런 의미 부여가 있을 테고 결국 책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남기는 것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린 게 아닐까. 내가 좋은 책을 찾아 읽으려는 것은 장점을 배우고 싶어서고,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사람들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꽃이 피고 지는 동안에도 꽃보다 책을 더 가까이하는 내 시간에 대한 평가도 시간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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