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책으로도 굿~

이 책이 장소(런던)와 매체(물감)로 범위를 한정한 게 득이 된 것인지 실이 된 것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호크니 전시회에서도 느꼈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시기(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70년 대 초)가 확실히 물감을 사용한 회화의 가장 극단까지 간 게 아니었나 싶다. 뒤샹 같은 개념 미술의 현실 모형, 워홀 같은 팝 아티스트들과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기계 활용, 디지털 문화로의 돌입은 표현의 세계를 확 바꿨다. 회화를 신화의 차원으로 밀어내게 된 거라고 할까. 이젠 회화에서 예전 같은 천재를 바라는 건 무리다.











이 책은 ‘그림은 사회적, 지적 변화뿐 아니라 개인의 감수성과 성격의 영향도 받는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베이컨의 출현에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없었다. 사실 어떤 지점에서 그의 심리적, 미학적 기질은 매우 특이했고 낮설었다. 그래서 그의 출현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베이컨이 없었다면, 또는 프로이트, 라일리, 호크니의 기여가 없었다면 이후의 런던 화단의 상황은 분명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모든 역사는 그 경계가 어느 정도 임의적이기 마련이다. 시간은 연속적이어서 특정 일자에 칼로 자르듯이 깔끔하게 시작되거나 끝나는 일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제멋대로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을 피하고자 책은 종종 말끔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70년대초에 이르는 시기의 연대적 범위 설정은 정치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잘 알려진 영국사의 전환점과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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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14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붓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아닌데도 대부분 사람은 여전히 붓으로 그려진 그림을 선호하고, 붓이 필요 없는 요즘 미술을 어려워해요. 제 생각인데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회화과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

AgalmA 2019-10-14 22:41   좋아요 0 | URL
그런 태도도 일종의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생각해요. 회화 하면 화가, 캔버스, 물감 그런 걸로 익숙했으니까요.
저도 타블렛 툴로 그리는 그림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창작이 잘 안 익혀져요^^;;
디지털이 워낙 표현 영역이 넓으니 창작자들이야 당연히 도전해보고 싶죠. 다만 전자책과 종이책의 병행처럼 종이 그림도 계속 이어가리라 봅니다. 사람의 습성이 워낙 질기잖아요ㅎ 아무리 디지털화가 되어도 손맛이라는 게 있어서 붓질 그림을 쉽게 버리진 못할 겁니다. 모두 디지털로 간다면 나는 아날로그다! 할 반동적 창작자가 나오는 게 또 예술이고ㅎ
 

카를로 로벨리가 친절한 대중 과학서에 힘을 쏟고 있듯 제임스 M. 러셀는 쉽고 친절한 대중 인문서에 힘을 쏟고 있다. 깊은 내용은 아니지만 알쓸신잡 같은 쏠쏠한 재미와 정보가 있다. 2~3페이지로 짧고 쉽게 전달하는 인문학 기초상식 책이라고나 할까. 내가 좋아하는 사물들 얘기 가득~ 공부 열심히 하려고 알람 시계를 발명한 플라톤 얘기도 재밌다. 기원전 4세기 일이니 알람 시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영국 사람인 것도 그렇고 케임브리지 철학 전공인 것도 그렇고 버트런드 러셀 가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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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거짓의 이면 - 『인간 본성의 법칙』 & 《립반윙클의 신부》

 

"이런 지식은 다소 유행이 지났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수준이 높고, 기술적으로 발전했고, 진보적이며, 계몽된 상태니까 말이다. 원시적 뿌리를 벗어난 지 한참이고, 심지어 인간 본성을 다시 쓰는 중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가 지금처럼 인간 본성의 노예가 되었던 적도 없다. 인간 본성의 잠재적 파괴력이 지금보다 더 컸던 때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하며 위험한 불장난에 빠져 있다.

소셜 미디어만 봐도 그렇다. 감정이 서로에게 전염될 일은 오히려 늘었다. 소셜 미디어상에서는 바이럴 효과(viral effect, 소문 등이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 - 옮긴이)를 따라 새로운 이슈가 끊임없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조작에 능한 지도자들이 우리를 이용해먹고 뜻대로 휘두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가상 세계에서는 공격성을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뒷일을 생각지 않고 우리의 어두운 이면을 펼쳐놓기가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과 순식간에 소통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시기심을 느끼고, 주목을 받아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성향 역시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족 본능을 보면 이제는 그 성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완벽한 도구가 생긴 셈이다. 나와 동일시할 집단을 찾아내고, 서로의 메아리만 주고받는 공간에서 내 부족의 의견만 계속 증폭시키고, 누가 되었든 외부인은 철저하게 악마로 몰아서 떼로 몰려가 겁을 준다. 인간 본성의 원시적 측면 때문에 아수라장이 벌어질 가능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어느 개인이나 기관, 기술적 발명보다 인간 본성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결국에 가면 인간 본성과 그 원시적 뿌리를 반영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장기판 위의 말처럼 우리를 가지고 논다. 인간 본성의 법칙을 무시한다면 그 사람의 손해일 뿐이다. 인간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패턴 속에 빠져 계속해서 혼란과 무력감을 느끼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나나미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와지 슌지 《립반윙클의 신부》 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나나미는 내내 타인에게 휘둘렸다. sns로 인터넷 쇼핑을 하듯 남자친구를 고르고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거짓의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부터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녀의 성격 문제도 크다. 학생들이 자신을 놀리는 걸 파악하지도 막지도 능청스레 넘기지도 못했다. 그녀의 소극성 때문에 교사 직업에서 결국 퇴출당한다. 그리고 결혼으로 도피한다. 자신이 정의롭다 생각하는 자들은 나나미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고 말하겠지.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극 속의 나나미는 스스로를 지킬 정도로 이성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는 함수가 사회에서 어떤 쓰임이 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하다는 과외 학생에게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데 안도할 정도의 미약한 자존감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립반윙클도 죽음을 코 앞에 두고도 타인의 성욕을 채워주는 AV 배우 역할로 자존감을 채웠다. 행복에 돈을 지불하는 게 더 편하다고 말했던 립반윙클은 자신의 충동과 비이성에 휘둘린 채 삶을 마감했다. 세상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말을 바꿔,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행복은 없다. 세상은 우리 심리의 반영인 셈이다. 나나미와 립반윙클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세울 생각도 용기도 없이 타인의 틀에서 적당히 살아왔다. 아무로는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았고 그들은 손쉽게 그의 먹잇감이 된다. 그는 나나미에게 은근히 경고도 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은 1시간 만에 빠져들걸요. 자신감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이 저한테 빠진다면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빠져드는 거니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거나 마음이 안 채워진다거나 그런 느낌을 조심해야 합니다."

 

집안에서 낯선 귀걸이를 발견한 나나미는 자신의 의심을 더 신뢰했다(확신 & 확증 편향). 나나미는 남편에게 사실 확인을 하기보다 어떤 사람인지 더 모를 아무로를 더 신뢰해 남편의 외도 조사를 의뢰했다(겉모습 편향). 그는 나나미를 유혹할 수도 있었고 죽일 수도 있었다(실제로 죽이려고도 했고). 적당하게 이용했고 그에게 그녀는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 나나미에게 급여를 정확히 전해주고 그녀의 새 집에 가구를 선물한 걸로 그가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일 거라 생각한다면 우린 스스로의 순진함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어떤 진실도 몰랐다. 립반윙클과 나눈 투명 결혼반지를 생각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쓰다듬는 나나미의 모습은 불안스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나나미는 아무로의 제안에 어디론가 또 보내질 수 있다. 많은 관객이 립반윙클의 생의 마지막 친구가 되어준 나나미의 순수와 낭만성에 취했을 테지만 이와이 슌지는 잘 속는 나나미의 답답할 정도의 수동성, 나약함, 무능력을 끝끝내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실수와 교훈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 아무로가 알려주는 정보만 믿고 남편과 남편의 집안 탓만 하며 자기 연민만 했다. 이혼 후에도 타인이 원하는 역할을 반복하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헤매며 그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간다. 그녀 결혼식에 온 가짜 하객들에 끼어 그녀도 가짜 하객 행세를 했듯 제목처럼 그녀는 죽은 자의 신부로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우리에겐 디폴트 값이 많은데 죽음과 비이성도 그에 해당한다. 순수는?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듯이 순수와 그 대립쌍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그게 적절히 발휘되고 있는 걸까. 니체가 지적한 우월한 입장에서 가지는 '연민과 동정'처럼 우리는 '순수'도 그렇게 치장하고 있진 않은지 고찰해 볼 일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는 교훈을 배워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그다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자기 성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럴 때 자연스러운 반응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 혹은 순간적 오판을 탓하는 것이다. 탓하기 편향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들여다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수를 저지르면 내가 느끼는 이 우월감이 정당한가라는 의심이 생기고, 자존심에 금이 간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한 일을 반추하는 척 시늉만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쾌락 원칙이 다시 부상하고 실수 중에서 내 탓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부분마저 잊어버린다. 그러면 또다시 욕망과 감정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수박 겉핥기식 반성 과정을 거쳐, 잊어버리고, 죽는 날까지 같은 패턴을 반복할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면 세상에 실수는 거의 없을 테고, 누구나 승승장구할 것이다."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자신과 문학 중에 택한 샐린저 - 《호밀밭의 반항아》 & 『호밀밭의 파수꾼』


J. D. Salinger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 유명세 때문에 내게 더 별점을 깎인다. 이 정도가 영미문학의 대표작? 사람들이 호들갑 떨며 순위권에 넣는 책은 내게 우선순위가 아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야겠기에 읽기도 한다. 때론 수긍되고 때론 그냥 그렇다. 이 소설의 인기는 사춘기라는 공감대, 전후 비트 세대를 알리는 선두, 잭 케루악, 찰스 부코스키, 커트 보니것 등의 소설이 그랬듯 주인공의 삐딱함과 거침없음 그런 다양한 것들이 인기에 일조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나왔을 때 유명세는 완성된다.

번역 문제보다 문장 자체가 정말 내 취향 아니다. 사춘기 소년의 심리를 재현했다고 해도 읽는 내내 쳐내야 할 문장들이 계속 보여서 정말 데뷔작 답군, 나는 툴툴대며 읽고 있다.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2017)를 보며 샐린저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작가 사생활에 관심을 안 두는 내 습관이 작품 파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뭐 살다 보니 이래저래 알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으나 잘 안 풀리던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처럼 여러 학교를 쫓겨나다 컬럼비아 대로 가서 글쓰기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다. 문학잡지 편집자이기도 한 위트 버넷 교수는 그에게 창작의 포인트를 잡아주며 격려와 채찍을 아끼지 않는다. 작가 목소리가 앞에 나오기보다 스토리에 녹아들게 하라는 조언은 백 번 지당하셨지. 버넷 교수는 샐린저에게 묻는다. 아무 대가 없이 혹은 모든 걸 버리더라도 평생 글쓰기에 매달릴 자신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넌 작가가 될 운명은 아니라고. 그때 샐린저는 도망쳤었다. 작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던 버넷은 샐린저의 글 속 목소리를 칭찬하며 '홀든 콜필드' 캐릭터로 장편 쓰기를 권한다.

버넷이 칭찬한 샐린저의 글 속 목소리는 '분노' 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는 예술작품들을 한번 보라. 그 이면에 절제된 분노를 느끼거나 읽어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모두가 너무나 조심스럽고 옳은 말만 하기 때문에 영화나 책이나 혹은 어딘가에서 주도면밀하게 방향을 잡은 분노가 느껴지면 신선한 한 줄기 바람을 쐰 것 같다. 우리의 모든 좌절과 원망을 끌어 모아 펼쳐놓은 것 같다. 우리는 그게 진실이고 진정성이 있음을 알아본다."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단편 몇 편으로 작가계에 들어선 샐린저는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유나 오닐과 사귀는 기회도 잡게 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샐린저가 참전한 사이 허영심 많은 유나 오닐은 늙은 찰리 채플린과 결혼한다. 18세 여성과의 결혼이라니 잘 알려진 찰리 채플린의 성적 취향을 여기서 또 확인. 샐린저의 이후 삶을 보면 유나 오닐이 그와 결혼을 안 한 건 그녀에겐 다행이었다. 샐린저는 여러 차례 결혼하고 이혼하게 되는데 그게 다 그의 글쓰기 종신 결혼 때문.

 

전쟁 중에도 샐린저는 내내 홀든 콜필드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펜이 없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 전쟁이 끝났어도 샐린저는 외상 후 장애가 심해 방황하게 되고 명상을 접하면서 글쓰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단편소설로 인지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샐린저가 어렵사리 쓴 첫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판사마다 출판하길 꺼린다. 독특한 캐릭터인 홀든 콜필드에게 공감이 잘 안된다는 게 큰 이유였다. 얘, 혹시 미친 건가요? 소리를 들으며;;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가 전쟁에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다고 말하며 어떤 수정도, 타협도 거부한다. 책이 출판되자마자 대중의 폭발적 인기를 얻은 샐린저는 광적인 팬과 유명세에서 멀어지고자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다. 출판에 목매는 상업 작가가 아니라 글쓰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창작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즈음 약물, 알코올 중독과 기행으로 자살이나 요절한 작가가 많았는데, 뉴에이지, 명상 문화를 받아들인 샐린저는 구도와 글쓰기의 조합으로 건실히 살아남았다고 해야 할까. 모르긴 몰라도 『호밀밭의 파수꾼』만 읽은 사람이라면 샐린저가 요절했을 거라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63년 이후부터 91세로 사망하기까지 어떤 책도 출판하지 않았다.

 


샐린저의 은둔적 삶 때문에 더 세간의 관심을 받았겠지만, 이런 삶을 살게 된 사람의 첫 장편이 『호밀밭의 파수꾼』인 건 참 의외다. 전쟁을 겪은 뒤에 30대에 쓴 소설이 이렇다는 것도.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학교를 쫓겨난 사춘기 소년의 도시 방황.

이후 작품을 더 읽어봐야 할까. 이 책의 어떤 점이 어떤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추측하고 발견하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샐린저는 내게 매력을 주는 작가가 아니란 걸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으며 알게 됐는데-_-)...






 





● 진실과 기만 사이에서 - 《체르노빌》

《체르노빌》은 NBO에서 제작한 역사 드라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경위와 수습 과정을 에피소드 5편에 촘촘히 담았다.

"우리의 기밀과 거짓말이 그 원인이에요. 사실상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정의하죠. 진실이 맘에 안 들면 우린 거짓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러다 진실이 존재한단 사실조차 잊어버리죠.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이 쌓입니다. 머잖아 그 빚을 청산해야 하죠. RBMK 노심이 폭발한 게 그 대가였습니다."


ㅡ 핵물리학자이자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발레리 레가소프의 대사, <에피소드 5>

결함을 은폐한 채 가동한 RBMK 원자로의 작동 과정과 폭발 원인에 대해 저 문장이 모든 걸 함축한다. 드라마처럼 그가 재판에서 저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저 문장은 매우 진실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알면서도 거짓을 일삼는 인간들이 만든 인재였다. 그리고 그 모든 잘못을 대신 겪고 바로잡으려 했던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이 드라마에서는 돋보인다. 피폭 상태였던 발레리 레가소프는 진실 규명과 사고 수습을 위해 노력하다 사건 발생 2년 뒤 자살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부소장이자 수석 엔지니어였던 아나톨리 다틀료프는 사고 발생의 가장 큰 책임이 있었는데 재판에서 겨우 10년 형을 받았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와 이후 대처를 보면 인간에겐 치러야 할 대가가 아직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모두가 치러야 할 문제다.

 








프리피야트 생존자 증언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많이 참고되었다고 한다.





● 사진으로만 가능한 것 -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선택받은 사람,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초월한, 자기보다 우월한 어떤 기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내적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그 기준의 도움을 만끽한다… 보통 사람과 뛰어난 사람을 구별할 때 우리는 전자가 자신을 닦달하고 후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지금 상태와 자기 자신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뛰어난 사람은… 사실상 노예 상태로 산다. 무언가 초월적인 것에 인생을 바치지 않는 이상, 삶이 무미건조해진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탄압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쩌다 그런 필요성이 사라질 경우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스스로를 강제할 수 있는 더 어렵고 시급한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원칙을 따르는 삶, 고귀한 삶이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한 사람이 평생 다 전하지 못할 이야기를 사진에 담은 비비안 마이어. 그래서 그녀에겐 인화하지 못한 필름이 그렇게나 많았는지도 모른다. 미처 따라잡기도 전에 또 다른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들이닥친다. 창작을 해본 사람은 이 진퇴양난의 상황을 잘 알 것이다. 그 예술 행위에 알맹이가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자기 시선과 색깔을 담는 자에게 우리는 예술가라는 호칭을 붙인다. 그러나 마이어는 평생 자신의 작업을 숨겼다. 그녀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그저 취미생활이라 했다. 요즘의 '예술', '예술가'의 의미는 참 남루해졌다. 대중의 눈에 띄어 유명해지길 바라고 명예와 부까지 얻는 '직업' 같이 여겨질 때가 많다. '예술'이 '구도'와 비슷했다는 건 잊히고 있다. 타인의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자신의 작업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파악할 척도가 오직 자신뿐이라면 내가 흔들릴 때 그것들은 다 무가 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진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의심하지 않았다. 작업에 관해서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

사진에는 그 고집이 시선에서 느껴진다. 상처, 비밀, 위험, 경멸, 모욕 등 피사체가 드러내는 부정적 감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셔터를 누른 순간이 사진에 각인되어 있다. 사진은 여러 상황을 감당하면서 순식간에 잡아내야 해서 고도의 소양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감수 없이 편안히 찍은 자신의 사진을 예술적이라고 흡족해하는 이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마이어의 사진에는 열정적인 탐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많이 알려진 사진보다 사진집에는 더 좋은 사진이 많았다. 비비안 마이어 다큐를 봤을 때와 다른 생각의 시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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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5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8-25 21:42   좋아요 1 | URL
샐린저도 처음엔 출판 한 번 해보겠다고 그렇게 기를 썼지만ㅎ; 정작 작가가 되니 이게 아니라는 갈등에 휩싸이죠. 부나 명예, 외부와의 타협없이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 작가든 예술가든 그게 제일 난관인 거 같아요. 요즘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라는 요구도 많잖아요. 먹고 살려니 원고 청탁, 마감에 휘둘리기 일쑤고. 예술도 돈 있는 자가 할 수 있단 소리까지 나오고.
《호밀밭의 반항아》 에서도 아무 대가 없이 혹은 모든 걸 버리더라도 작가가 될 수 있겠는가란 질문에 샐린저는 처음에 도망쳤었죠^^;

겨울호랑이 2019-08-25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취미로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직업으로 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으니, 좋을 것도 같지만 동시에 직업이 되면 무슨 일이든 부담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가장 좋은 것은 생계걱정없이 마음껏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하는지 아니면 연애를 해야하는 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정답은... 상상하시는 그것이 될 듯 합니다.ㅋ

AgalmA 2019-08-25 23:07   좋아요 1 | URL
또 다른 딜레마가 있지요.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먹고사니즘 일을 하는데 정작 일 하느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매진을 못 하는 아이러니ㅎ;; 그래서 직장 때려치고 자기 꿈을 찾자는 자기계발서 넘쳐 나잖아요ㅎ; 생계 걱정없이 자기 꿈을 실현해줄 일을 찾자니 일확천금을 노리게 되고 <부의 추월차선> 같은 책들이 거듭 하는 소리죠.

제 경험상 사람은 죽고 못사는 꿈 없어도 살긴 살아진다는 건데, 그게 없음 사는 의미를 못 느끼겠다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 복잡하지요-,-);;
사랑인든 일이든 자신, 재능, 라이프 스타일과 맞는 걸 찾아야지 꿈은 이뤄진다!로만 덤벼든다면 삶이 공허해질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타인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도 있으니깐요. 그런 의미에서 ‘롤모델‘ 같은 것도 그리 자랑스럽게 말할 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러다 삶의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경우 많이 보잖습니까.

겨울호랑이 2019-08-25 22:36   좋아요 1 | URL
아직 인생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부족함이 많습니다만, 자신의 계획과 꿈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아야하겠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을 보며 힘들어하기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해봅니다.그러다 보면 또 누가 알겠습니까, 잘 될지 ㅋ ^^:)
 

(※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바예호적으로 : 우리는 무엇을 나누는가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노동의 결과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며,

상사이며, 부하인 존재.

세월의 도표는 상사의 명패에

빠짐없이 투시되지만,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백성의 굶주린 방정식에 대해

상사의 눈은 반만 열려 있음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 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기는 하나,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가진 물건, 변기,

절망, 자신의 잔인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 하루를 지우는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세사르 바예호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시 전문

 

 

 

봉준호 《기생충》을 보고 나서 바예호의 시를 떠올렸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슬픔과 기침을 숨길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숨길 수 없는 게 참 많다. 이 영화에서는 가난의 징표 '냄새'를 가장 숨길 수 없었다. 전원 백수 가족은 외양, 신분, 표정 등 거의 모든 걸 감출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반지하 집 냄새가 체취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송(박사장 집 아들)의 여유롭고 호화로운 생일 파티장을 바라보며 기우(전원백수 가족의 장남)는 다혜(박사장 집 딸)에게 묻는다. 내가 이곳에 어울리느냐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지만, 기택(전원백수 가족의 가장)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을 더 많이 겪어본 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냄새)의 모욕에서 결국 폭발하고 만다. 끝까지 숨기고 싶어서 수석(水石)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던 기우와 끝까지 숨길 수 없어서 칼을 들고 지상에서 돌진하던 기택. 기우의 계획은 실패했기에 다시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지만 기택의 무계획은 사건을 일으키며 언제 지상으로 올라갈지 모르는 더 깊은 지옥이 주어졌다.

※ 아이들 이름에 한자 뜻을 담은 듯.

부유한 집 아이들(다혜, 다송) 이름 돌림자엔 多(많을 다)

백수 가족 아이들(기우, 기정) 이름 돌림자엔 飢(굶주릴 기)

 

 

 

이들의 삶은 돈의 유무로 영향을 받지만 각각의 죽음은 완전히 다른 연유에 기인한다.

수석 보물이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거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는 돌처럼 인간도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분류된다. 서로를 공손히 떠받들기도 하지만 발길질로 처박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끼리도 서로의 가난과 양심을 저울질한다. 격차는 전 세계적 고민거리다. 봉준호 감독의 관점은 사람을 단순한 이분법 도식으로 나눠서 보지 않는 미덕이 있다. 흙수저/금수저 운운하며 자신을 구획 짓는 사람들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똑같이 1남 1녀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 관계 속에는 다양한 결이 있다. 부와 가난의 척도로 살고 바라볼 때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빈약해지는가. 부유해서 성격이 좋고 가난해서 성격이 나쁘다고 재단할 때 우리는 세상을 더 나쁘게 몰아가는 거다. 냄새 같은 특정한 이유로 즉각 혐오와 차별을 만들 때 우리는 세상을 더 극도로 몰아가는 거다(인종 차별에서도 냄새가 얼마나 강력한지 생각해보라). 기택은 아내 사랑의 질문으로 부로써 가릴 수 없는 박 사장의 치부를 꼬집기도 한다. 전원 백수 가족은 죄책감과 연민으로 문광(전 입주 가사도우미) 가족을 틈틈이 걱정한다. 하지만 상황 타개가 여의치 않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을 부와 권력으로 제압하려는 박 사장처럼 우리의 소통 기력도 점점 고갈되어 가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수직으로 붕괴되어가는 세상에서 가족 서사로 세상에 대응하는 전략을 여러 전작들에서 보여 줬다. 두 사람만의 관계(연애)에 천착 일색인 영화 서사에서 더 고심하는 발화다. '그들은 만났고 헤어졌다'가 아닌 봉 감독은 '이렇게 다른 우리들이 모여 사는데 어떻게 조화로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다자 관계의 기본인 가족조차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이 세계는 여러 다자 관계의 불화,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구 입장에서는 많은 걸 파괴하고 고갈시키는 인간 종 자체가 기생충이다. 돈을 주고 의식주의 모든 부분에서 도우미를 쓰는 이들은 기생하는 게 아닌가?

 

 

 

파탄 후 기우는 괴로움을 넘어 웃겨서 웃고 또 웃는다. 기택은 더더 지하로 내몰려 그의 웃음과 울음은 표출조차 힘들어진다. 이게 인간의 진짜 빈곤 아닌지. 우리의 웃음은 기반이 불안하고 슬픔은 물속 돌처럼 묵직해진다. 인간의 삶은 대책 없는 떠내려감, 치솟는 역류, 숨 막히는 지하 속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인간 됨을 얼마나 더 놓치려 하는 걸까. 감동에 겨워 얼싸안을 수 있는 존재를 우리는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나 자신도. 당신은 자신 있나.

 

 

 

 

 

 

 

 

 

 

● 도스또예프스끼적으로 : 어떤 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끝내지 않았기에

 

"내가 자신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 전생애를 통해 어떤 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지상도 겨우 반만 볼 수 있는 창을 통해 우리는 반지하에 사는 전원 백수 가족의 시점으로 이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저렇지 않다는 우월감을 누리며. 공짜 와이파이를 찾으려 분주한 아이들과 일감을 손에 놓지 않는 아내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어기적 일어나는 기택은 관계에서도 공간에서도 자기 내면에서도 지하생활자다. 볼품없고 능력 없는 중년이든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물어오는 가장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타인에게 협력하거나 기대는 게 최선이다. 기우의 과외 채용을 위해 기정이 위조한 증명서를 보며 잘못을 가리기보다 위조문서학과에 합격할 실력이라며 칭찬하고, 아들에게 계획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무기력한 자다. 피자 박스 접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재주로 뭘 해도 안 되니 어쩌란 말인가.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부양할 가족도 없었고 유산이라도 받아 칩거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기택이 가족에게 기생하듯 가족에게도 기생할 대상이 나타났다. 기우부터 차례차례 백수 가족은 박 사장의 집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다혜의 일기장부터 다송의 트라우마까지 백수 가족은 숙주의 속속들이 파악해갔다. 다혜가 동생 다송의 천재병 흉내를 비난하지만 전원 백수 가족의 음흉한 사기와 서로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박 사장 저택에 비밀스럽게 기생하는 가족은 백수 가족만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더 처참히 기생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숙주를 뺏긴 분노와 뺏기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기생하는 자들끼리 사생결단 혈투가 벌어진다. 한바탕 숙주 쟁탈전을 치르고, 돌아온 숙주가 잠들 때까지 수치를 뒤집어 쓴 채 쥐 죽은 듯이 기다렸다 검은 발바닥으로 기어서 오물 속을 떠내려가듯 헤집고 돌아가지만 백수 가족을 기다리는 건 물속에 잠긴 집이다. 그들에게는 누추하고 냄새나는 집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만약에 젖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라면” 닭장이든 궁전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사람들이 단지 그것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으며, 만약 사람이 살려고 한다면 그는 저택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은 “두 다리를 가진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 “가장 큰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 그에 더해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기택은 마조히스트적인 “무기력”에 사로잡혔다는 것. 

 

 

 

"그래서 나는 바보 같은 기행에 몰두하게 되었다. 정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신 자신들을 봐라, 신사 양반들, 그러면 당신은 그렇군, 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삶 비슷한 것을 살기 위해, 나는 모험들을 생각해 냈으며, 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 냈다. 얼마나 많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모욕감을 느끼곤 했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유 없이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고, 일부러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내가 당신에게 확언하건대, 끝내 그는 진짜로 모욕감을 느끼는 데까지 다다른다. 인생 내내 나는 어째서인지 이 같은 재주를 부리는 데 끌려 있었다. 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심지어 두 번까지도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통을 받았다. 신사 양반, 확신한다. 내 영혼 깊은 바로 그곳에서도 나는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고통을 받았고, 정말 진짜로 그랬다. 나는 시기하게 되었고,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신사 양반, 모든 것은 권태, 바로 그 권태 때문이었다. 무력감이 억누른다. 의식의 직접적이며 당연하고 솔직한 결말은 정말 이 무기력이다. 즉 의식적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다."

                  

ㅡ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책과 낭만주의 사상에 빠져 현실과 대인 관계에서 모두 실패한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그의 모욕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려 한 유일한 구원자 창녀에게 화대로 5루블을 쥐여주며 모욕한 뒤 자신의 지하로 자발적으로 숨어들었다. 아들 기우가 계획을 묻자 무계획에 대한 장광설을 쏟는 기택은 자신의 모욕을 다른 이에게 투사해 살인으로 대갚음하고 타인이 만든 지하로 숨어들었다. 숨을 곳조차 내 것이 아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20년을 지하에서 살았고(현재 40세)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택은? 기우가 저택을 사지 않는 이상 그가 자발적으로 나올 의사는 없어 보인다. 지하생활자가 세상의 가치, 이성과 싸우며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스스로를 정화하는 미치광이 수정궁을 완성했다면 기택은 무엇을 완성할 것인가. 열정이 실패로 돌아오고 실의를 비겁으로 바꾼 뒤 삶 전체를 무기력의 지하 세계로 끌고 들어가 이제 마지막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기생하는 방법을 끝없이 연구할 것인가. 생각이 있어도 없어도 자신의 몰락을 배태하는 두 사람. 사실 이것은 많은 인간의 모습이지 않은지. 최소한 나는 여기서 예외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렇기에 도스또예프스키와 봉준호 같은 예술가들이 내세우는 반(反) 주인공들을 거듭 목도하게 되리라. 모르스 부호로, 수기로, 소설로, 영화로 질기게 이어지며.

 

"〈수기〉를 바로 여기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내내 부끄럽게 느끼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니라 교화시키기 위한 처벌이다. 결국 구석에서의 도덕적 타락과 적당한 환경의 결핍,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지하에서의 자신의 과장된 악의 때문에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을 소진했는가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신에게 맹세코 흥미롭지 않다. 소설은 주인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부러 반(反)주인공의 모든 특징들을 모아 두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불쾌한 인상들을 남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며, 우리 모두는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정도에 따라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참된 〈실제의 삶〉에 대하여 사람들이 상기시킬 때, 때때로 참된 〈실제의 삶〉에 어떤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참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속으로 책에 씌어진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때때로 소란을 피우며, 왜 변덕을 부리며, 왜 바라는 것일까? 우리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만약 우리의 변덕스러운 소원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나쁘게 될 그런 위인들이다. 그래, 한번 시험해 보자, 우리에게 예를 들면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손을 풀어 줘 봐라, 우리의 행동 영역을 확장시켜 봐라, 감독을 약하게 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감독받게 해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말 때문에 당신이 내게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내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 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이 〈살아 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이, 진정한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그런 인간들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가 없는 일반적인 인간 같은 것이 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아버지들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취향을 발전시키고 있다. 곧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러나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 〈지하에서〉 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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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기생충」은 스포에 유의하라 했는데 안 봐서 모르지만 치명적인 스포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유쥬얼 서스펙트」에서 범인과 「식스 센스」에서 누가 귀신인지 알고 본 경험이 있다보니, 이번에도 그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ㅋㅋ

AgalmA 2019-06-22 14:26   좋아요 1 | URL
영화는 잘 보셨는지요. 제겐 <기생충>이 스토리보다는 미장센으로 보는 영화여서 스포를 알아도 장면에 폭 빠져 볼 수 있는 영화요^^

겨울호랑이 2019-06-22 14:54   좋아요 1 | URL
AgalmA님 오랫만이에요. 저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지냈습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못 봤습니다ㅜㅜ 추석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네요 ㅋ

AgalmA 2019-07-07 18:56   좋아요 0 | URL
한결같은 모습ㅎ;; 그 말씀에 저는 왜이렇게 웃음이 나는지ㅎㅎ;;
15세 이상 관람가여도 공중파에서는 좀 부적절한 장면(섹스 씬)이 있어 추석 때 나올까 싶어요ㅎ;
멋진 장면이 많아서 극장 관람이 더 좋을텐데....
 
한번은, -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시간 속의 뭔가를 도려내 다른 형태로 지속될 수 있도록

전이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으로부터 도려낸 그 무엇이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사진 찍기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하나는 앞에서, 또 하나는 뒤에서.

그렇다. '뒤'와도 상관이 있다.

이러한 비유는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마치 사냥꾼이 눈 '앞'의 맹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듯,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나듯,

사진을 찍는 사람 역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튕겨 나간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이중적인 상을 갖게 된다.

사진은 찍히는 피사체를 보여주게 마련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뒤에 있는 것'도 보여준다.

.

.

'시간을 붙잡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을 통해 매번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른다는 점이 새로이 증명된다는 데 있다.

모든 사진은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기억이다.

모든 사진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포착된 모든 영상은 고귀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고,

사진을 찍는 이의 시선 그 이상의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시간의 저편에서, 신의 시야 밖에서

이루어지는 창조행위다.

.

.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란 속담이 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땐 이 말이 꽤 명쾌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적어도 사진에 있어서 이 말은 옳지 않다.

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을 의미한다. 

 

 

빔 벤더스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일곱 살 때 처음 사진을 찍었고 열두 살에 자신만의 암실을 만들 정도로 열정적인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첫 번째 사진 전시를 1986년에 열었고 『Written in the West』로 1987년 첫 사진집을 낸 뒤 1992년까지 세계 순회 사진전을 가졌다. 이 책은 그의 두 번째 사진집으로, <파리, 텍사스>(1984, 칸영화제 그랑프리),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칸 영화제 감독상) 이후 정체기를 겪다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으로 다시 각광을 받기 전인 1994년 출간했다.

그가 보여주는 황량함과 기이함, '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것'(p10)을 나는 내내 사랑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다. 그 시선은 꼭 내가 보는 풍경 같았다. 그런 것을 잡아내는 사람이 예술가다.

 

"일정한 속도로 걷다 보면 멈춰 서는 것마저 부담스러워진다"(p140)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애리조나 주의 길라 벤드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명의 손님도 찾지 않았던 낡은 호텔을 발견하는 눈썰미며, 그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길의 왕'답게 그는 1978년 발리섬의 우붓을 처음 갔다. 1990년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낙원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발리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다고 했다. 난 가지도 못했는데 낙원이 그렇게도 빨리 사라지면 😭

 

벤더스가 교우한 감독, 작가, 연예인들의 사진과 작업 풍경을 보는 것도 재밌다. 러시아 공항 화장실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을 우연히 만나고, 그랜드캐년 사막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우연히 만나는 것도 인연이어서 가능한 거겠지ㅎ

10대부터 미국 대중문화에 깊이 빠졌던 벤더스는 그의 <미국인 친구>(1977) 영화를 본 코폴라 감독의 초청으로 할리우드에 가게 된다. 소설가이자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 대실 해밋에 대한 영화 제작에 열정을 쏟았는데, 해밋이 살았던 건물에서 살다가 밤마다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리에 놀라 결국 이사를 했다거나, 해밋 베이커리의 시계를 보고 애걸복걸하며 사려 했지만 실패해 사진만 찍고 만 일(사진을 보니 갖고 싶어 할 만도ㅋ 굿즈 마니아로서 매우 공감됨ㅋ), 해밋의 단골 식당이었던 곳에서 그도 단골이 된 일 등 재미난 일화가 많다. <해밋>(1982) 영화 제작은 순탄치 않아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의 삭막한 영화제작 환경을 성토한 <사물의 상태>(1982)를 찍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가 느낀 미국의 인상(자아 도취에 빠진 채 고향을 잃은 사람들(덴버),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형상인 늙은 카우보이들(텍사스), 레고 도시(휴스턴))은 지금도 적확하다. 1997년에는 15년 만에 할리우드로 돌아가 할리우드의 거물급 제작자가 납치당하는 이야기를 통해 상품화된 폭력과 현실의 폭력 사이를 다룬 <폭력의 종말>을 제작하기도 했다. 쇠락하고 황량한 미국 서부 풍경에 대한 그의 사랑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샘 셰퍼드를 주인공으로 한 <돈 컴 노킹>(2005)으로 남겼다.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자신이 묵었던 수많은 호텔은 정확히 기억한다고 말하는 그이기에 2000년 <밀리언달러 호텔>을 영화화한 것도 당연한 결과이겠다.

이 책의 옮긴이가 당부했듯이 이 사진집에 담긴 사진작가로서의 벤더스는 영화로 재현되기도 했다. 2008년 벤더스는 유명 사진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회의를 담은 <팔레르모 슈팅>을 제작했다.

 

그의 사진은 관찰자의 권력적 시선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순간을 마주한 지구 여행자의 자유 추구와 인간미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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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5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6-05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이라는 이미지만으로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언어 아닌 언어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AgalmA 2019-06-22 14:25   좋아요 1 | URL
우리는 온몸으로 배우는 존재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