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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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멈추기 위함인가 굴러가기 위함인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은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랍비 치유사에게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이라는 상자를 건네받았다. 상자에는 태고 마을이 중앙에 있는 지도와 함께 태고 마을에 있는 것과 유사한 사람, 동물, 물건들의 모형과 팔면 주사위 한 개가 들어 있었다. 포피엘스키는 게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전쟁이 닥치든 사회주의 정권에 재산을 몰수당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런 상징적인 물건이나 상황과 엮여 있다. 미하우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돌아올 때 가져온 커피 그라인더가 그녀의 아내 게노베파, 딸 미시아, 손녀 아델카에게 차례차례 옮겨가게 되는 상황도 끝없는 시간과 게임의 연속성과 닮았다. 인간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바꿔왔던 주사위와 마찬가지로 커피 그라인더도 중요한 상징이다. 아델카가 태고에서 이 사물을 가지고 나가는 결말은 또 다른 태고로 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소유하고 싶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오르기 때문이다.”(6쪽)

 

「그라인더는 ‘갈아낸다’라는 관념으로부터 도려낸 형상의 조각이다.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54쪽, 「미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 

 

사물들의 완결성만큼 이 세계는 닫혀 있다. 동물, 식물, 인간은 사물의 생명력에 비해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우리는 공간, 질서와 법칙이 지배하는 경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 상상, 관념 같은 것들은 그래서 더 자라난다. 가끔 변화가 찾아오기도 하니까.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의 배경을 1910년에서 1990년대까지 설정하고 니에비에스키 가족 삼대(미하우와 게노베파 부부, 그들의 자녀 미시아와 이지도르, 손녀들)를 중심으로 태고 마을 사람들, 그곳에 머무르는 신과 악귀의 시간까지 신화적으로 그렸다. 크워스카가 안젤리카 식물과 사랑을 나눠 딸을 수태한다거나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마법 같은 일뿐 아니라 ‘太古’라는 가상 마을 설정부터 삼대에 걸친 가족사, 역사적 사건(1·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과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경,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민주화 운동과 체제 전환) 속에 신비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 등에서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마술적 리얼리즘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토카르추크의 변별점이라면 심리학과 융, 철학과 종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종교적이면서도 신화적인 색채, 여성 인물을 부각하면서도 모두를 평등하게 다루는 페미니즘 성격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의 시간’이라는 소제목의 84편의 단락은 기승전결이라는 전통적 소설 플롯으로 묶이지 않는다. 니에비에스키 가족, 태고 마을 사람들, 외부인, 동식물, 神, 사물, 짐승으로 변한 나쁜 인간, 죽은 자들은 각각의 주체로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들의 이야기는 출생에서 죽음까지 태고라는 공간 속에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몸이 떠나더라도 마음이나 영혼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는 브라질로 떠났지만 이지도르에게 편지를 보내며 태고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물까마귀’라 불린 소작농 익사자는 신과 비슷한 상태로 이곳에 머물렀다. 토카르추크는 번뇌와 고독 속에 스스로 깨달아간다는 점에서 사람과 신과 악귀도 평등한 선상에서 그렸다.

 

「어느 날 이지도르는 다락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조각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무심결에 ‘하느님 맙소사’라고 감탄사를 내뱉다가 이지도르는 순간적인 깨우침에 눈을 떴다. 바로 이 단어 속에 신의 성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루’, ‘하얀색’, ‘하천’, ‘하품’, ‘하지만’, ‘하하하’처럼 남성형도 여성형도 아닌 중립적인 단어였다. 이지도르는 흥분해서 자신이 발견한 참된 신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불러보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부를 때 ‘ㅎ’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하느님 맙소사’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지만, 동시에 태초부터, 아니 그보다도 먼저 존재해왔다(마치 ‘하염없이’나 ‘한결같이’처럼). 만물을 포용하는 조화로운 존재였지만(마치 ‘하모니’처럼), 특별하고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마치 ‘하나’처럼).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마치 ‘해’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마치 ‘하늘’처럼), 막상 찾아내려 하면 그 어디에도 없었다(마치 ‘허상’처럼). ‘하느님 맙소사’는 사랑과 기쁨이 넘쳤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위협적이기도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성향과 속성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공간과 대상을 아우르고 이었다. 창조하고 파괴했다. 아니면 창조한 대상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어린아이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예측 불가능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반 무크타와 비슷했다. ‘하느님 맙소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282쪽, 「이지도르의 시간」)

 

「안개에서 힘이나 형상을 빼앗아 올 수도 있고, 자욱한 먹구름을 움직여 해를 가리거나 수평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밤을 늘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익사자는 스스로가 ‘안개의 왕’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자신이 ‘안개의 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개의 왕은 물속에 있을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여름 내내 유사(流沙)나 썩은 잎사귀로 만든 침대에 누운 채 수면 바로 아래에서 지냈다. 물 밑에서 찰랑거리는 물 밖을 내다보며 계절이 바뀌는 걸 보았고, 해와 달의 유랑을 보았다. 물 밑에서 내리는 비와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고, 여름철에 나방이 춤추는 모습과 멱을 감는 사람들, 야생 오리와 주황색 다리를 보았다. 이따금 뭔가가 나타나 꿈인지 뭔지 모를 상태에서 그를 깨우기도 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버텼다.」(102~103쪽,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빛이 스스로 움직였고, 타올랐다. 빛의 기둥이 갈라져서 어둠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질료(質料)를 발견했다. 그 속에서 신이 눈을 뜰 때까지 빛의 기둥은 온 힘을 다해 그 질료를 강타했다. 신은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자기 말고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자신이 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를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도 없었기에, 신은 자기 자싱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상세히 살펴보다가 문득 ‘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다는 건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고 신은 생각했다.

(중략)

신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잡을 수 없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만이 신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신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바위를 통해 자신을 보고, 태양을 사랑하는 식물들을 통해, 그리고 여러 세대의 동물들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인간이 처음 나타나자 신은 계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과 밤과 낮을 가르는 가녀린 선을,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그때부터 신은 인간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가면과 다름없는 그 얼굴들을 마치 배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일순간 가면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입으로 스스로에게 기도를 하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 비친 상(像)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상 속에 투영되었다.

신이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혹은 신이면서 인간인가, 아니면 신도, 인간도 아닌가? 내가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나를 만들어냈는가?”

인간이 그를 유혹하자 그는 은밀히 연인의 침대로 들어간다. 거기서 사랑을 발견한다. 노인의 침대로 남몰래 들어가서 무상(無常)을 발견한다. 죽어가는 자의 침대로 숨어 들어가서 죽음을 발견한다.」 (113쪽, 「게임의 시간」)

 

 

 

신이 그랬(다고 말하)듯 인간도 이름을 붙여가며 창조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주사위가 게임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듯 커피 그라인더가 커피를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이나 마음이 세계를 결정짓는 것도 아니고 아이도 어른을 결정짓거나 완성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합과 분리 과정의 우연적 시간 속에 있으며 공통적으로 무지하다.

 

「더러워진 눈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빨간 장갑은 상속자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뭔가가 변화하고 나아질 거라는 생각, 모든 것은 발전한다는 확고한 믿음,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는 결국 청춘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가 언제나 독약처럼 은밀히 지니고 다니던, 절망으로 가득 찬 그릇이 그의 내부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상속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러움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고난, 죽음, 부패를 목격했다.」(43쪽,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미시아는 어른이나 아니나 모든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든 어른이든 전부 일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미시아는 자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주의깊게 관찰했지만, 사실 이러한 변화의 목적이나 의도가 무엇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49~50쪽, 「미시아의 시간」) 

 

 

우리의 무지와 “실현되었고 흘러갔고 끝났고, 또 시작”(39쪽)되는 삶과 욕망의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전쟁을, 잘못을 되풀이한다. 또한 현실이 꿈이길 바라거나 상상이 현실이 되길 바란다. 어디서 어디로 가길 바라지만 목적과 이유는 간밤의 꿈처럼 묘연해지고, 이지도르의 편지들처럼 증발한다. 어떨 때 우리의 삶은 백지 편지 같거나 아무도 모르게 돌 밑에 남겨둔 손자국 같다.

 

「미하우가 보았던 건, 지금 이 전쟁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의 전쟁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횡단했던 광활한 대지가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이것은 꿈이리라. 모든 게 후렴구처럼 되풀이되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하니까. 그는 언제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 광대하고 고요하며, 마치 군대의 끝없는 행렬이나 고통 속에 잠잠해진 폭발처럼 끔찍한 꿈이었다.」(171쪽, 「미하우의 시간」)

 

이 무지는 시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놓고, 과거와 미래를 고통으로 가득 채우며 절망을 거듭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 중 그런 고통 속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던 인간은 그런 번민에서 벗어난 인간이었다. 성녀와 창녀, 영매의 특징까지 가진 크워스카,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상속자 포피엘스키, 감정과 관념까지 모두 버리고 죽음을 맞았던 이지도르. 전쟁 혼란 속에 집단 강간 기억의 고통과 증오 때문에 이지도르가 아닌 우크레야와 결혼을 했던 루타도 모든 걸 버리고 탈출하고 나서야 자유로워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불신자가 아니었다는 점인데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두 번의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고, 가족을 모두 잃고도 살아갈 수 있으며, 과거의 삶을 완전히 바꾸더라도 우리는 결국 죽는다. 인간의 삶은 매 순간 어렵고 깨달음은 늘 늦다. 어떤 시공간 속에 살더라도 우리의 숙명이다. 삶도 죽음도 단 한 번이기에 이 시간은 유일무이하게 빛난다.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131쪽) 태고의 신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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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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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은 기적이면서도 같은 이유로 불행 같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고 사랑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경계와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한 벽도 나눠가진다. 1972년 발표한 『소망 없는 불행』(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쓰게 된 「소망 없는 불행」과 아내의 가출로 인해 홀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담은 「아이 이야기」)과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여러모로 한 쌍을 이룬다. 그의 어머니는 자살하기 전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를 보게 된 건 어머니가 사망한 뒤였다. 두 작품집이 동시에 쓰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내의 이별 편지를 받고 그녀를 찾아 나서는 페트케의 심정ㅡ"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나의 체계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누군가의 자살뿐이다."(※페이지 표시는 종이책 기준, 129쪽)ㅡ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벌써 접한 듯한 상황이 느껴져서다. 소설로 쓰기 전 긴 회상 시기를 가지는 그의 작법 스타일로 봐서 가능한 얘기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다. 한트케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의 심리 상태는 “누가 전화를 받든 괜찮아.”(34쪽)였기도 했다. 아내의 이별 편지를 받고 그녀가 있을 만한 곳에 전화를 걸어보면서도 그는 클레어와 시간을 보내며 아내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다. “욕실로 들어가 나 자신보다 거울을 더 들여보”(14쪽)고 혼잣말을 반창고로 여기며 “제대로 전화하는 법을 배우는 날이 오기는 올까”(35쪽) 말하는 한트케의 ‘존재 불안과 소통 불능’ 딜레마는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에서도 강하게 드러났었다. 이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클레어와 보내는 시간은 아내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도 않았으며 나 또한 사람들이 그녀를 화제로 삼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생기 찬 모습은 별도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주로 나 자신 아니면 창밖의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이 우리가 애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었다.(62쪽)」

 

 

그와 아내 유디트가 함께 할 때는 서로를 적수로 여기고 비난과 조롱을 일삼으며 서로를 배제하는 괴물이 되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라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사랑하는 데도 서툴지만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꺼내는 이별의 몸짓”(127쪽)도 어렵다.

 

「“그런 식으로라도 계속 살아갈 수는 있었을 거야.” 내가 말했다. “그 감정은 엽기적이면서도 달콤한 소외감이었지. 증오할 때는 그녀를 사물로 여기다가도, 긴장이 해소되면 존재라고 여기는 그런 적당한 거리감 같은 거. 나는 유디트도 나처럼 생각하리라 믿었어.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무관심했음을 곧 알아챘지.…(중략)…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 증오심과 비열함에 짓물린 탓에 감각이 마비되어 누워 있기 일쑤였으니까. 나는 더 이상 여자와 함께 있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어.…(중략)… 한 번은 그녀가 몇 년 전에 궁색하게나마 조립한 서가를 보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어. 서가가 어디 한군데 망가지지도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유디트를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로 여겨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 그녀의 얼굴은 점점 사려 깊게 변해갔지만 정작 나는 사려 깊음을 읽어내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135~137쪽)」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것을 상대에게 행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상대는 이미 떠나고 없을 때가 많다. 우리 삶이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미궁으로 빠지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소설에는 페터 한트케가 동질감을 느끼는 두 자전 소설이 계속 등장한다. 고트프리트 켈러 『녹색의 하인리히』,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에서 일인칭 서술자가 회상하는 형식과 성장 소설의 특징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과 유사하다. 자전소설은 노란빛을 띤 회상과 문장을 통해 이 세계에 등장한다. 페터 한트케는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라고 『소망 없는 불행』에서 밝힌 바 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회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여러 차례 거론된다.

 

「하늘만 칠했던 여자의 손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손은 색이 없는 어둠 속에도 노란 빛깔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금방 기억해낼 수 있는 색깔이 바로 노란색이죠.” 남자가 말했다. “노란색은 오래 들여다보면 볼수록 기억할 수 없는 먼 옛날까지 떠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계기가 됩니다. 사람들이 그 앞에 서서 꿈을 꾸는 것이죠.” “바로 황금의 시절을 말이에요.”하고 갑자기 여자가 끼어들었다. 방 안의 불은 꺼졌지만 그대로 눈부시게 남아 있는 잔상을 우리는 바라보았다.(145쪽)」

「유디트에 대한 첫인상, 그것을 왜 나는 더 이상 회상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떠올려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나를 들뜨게 하면서 새털처럼 가볍게 만들어주던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런 다음부터 우리는 늘 찡그린 얼굴로 서로를 뜯어볼 수밖에 없었다.(191쪽)」

                                       

「“나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라고 할 때면 난 왠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 포드가 대답했다. “나만의 경험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회상할 만큼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차라리 사람들이 내가 보는 앞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하길 좋아합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나는 내가 직접 경험했던 일보다는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에 대한 향수가 큽니다.(197쪽)」

 

회상은 의식의 흐름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인과율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이나 그 표현도 “본모습을 숨기려는 강박관념”(21쪽) 속에서 비유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페터 한트케의 회상은 다르다. 페터 한트케의 회상은 존 포드가 말하는 회상(“내가 직접 경험했던 일보다는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에 대한 향수”)에 가깝다. 한트케는 데뷔 때부터 전통적 소설 방식을 완강히 거부해왔다. 『관객 모독』은 전통적 희곡 양식을 철저히 배제해 전위성을 극대화했다. 이후 소설에서 전통적 서사 방식을 가져오면서도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 않았다. 살인자 블로흐의 부조리한 내면 심리극 같았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전기(傳記)와 에세이, 소설이 혼합된 『소망 없는 불행』도 전통적 플롯 구성의 소설과 달랐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도 사실과 허구가 묘하게 섞여 있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다른 얘기를 좀 해야겠다.

현대에서 ‘아내 상실’은 주목되는 메타포다. 빔 벤더스는 페터 한트케와 1987년 《베를린 천사의 시》 대본을 공동 작업하고 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전 작품인 샘 셰퍼드 각본으로 《파리, 텍사스(Paris, Texas)》를 찍어 198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트레비스는 기억을 잃고 실어증까지 걸린 상황에서도 가출한 아내를 찾아 사막을 방황하며 악전고투했다. 트래비스는 환락가에서 아내를 발견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직접 대면할 수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도 아내의 가출이 소설을 끌고 가는 주요 사건이었다. 와타나베 도오루는 현실에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하루키는 판타지적 시공간을 통과한 뒤에야 서로를 성찰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구성했다.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인셉션》에서도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내 맬(마리오 코티아르)을 꿈의 공간 림보로 인해 잃으면서 모든 상황이 꼬였다. 인 가구 시대가 점점 늘어나는 세태에서 보면 '아내 상실'은 가장 가까운 이와도 소통할 수 없는 인간 고독의 딜레마가 강하게 드러나는 모티프다. 예전에는 결과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 모티프를 많이 썼다면 최근 동향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처럼 공간을 아예 바꾸는 추세가 많다. 페터 한트케의 이 소설 2부 시작에는 이런 제사(題詞)가 붙어 있다.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ㅡ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111쪽)」

 

한트케는 존 포드라는 실제 인물을 픽션에 등장시켰다.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함”(196쪽)을 강조하는 ‘나’ 중심의 유럽이 아니라 ‘우리’ 중심의 미국을 성찰의 장소로 설정했다. '팍스 아메리카나' , '반지성주의' 등등 많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미국을 과연 그런 희망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나 싶지만 한트케에게는 미국이 무언가 바꿀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미국에 오면서 그는 “불안과 동경이 다시 도지고”(99쪽) 자신의 오래된 결핍과 과잉들을 되돌아봐야 했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국인과 인디언의 추격전이 펼쳐지는 존 포드의 서부극처럼 자신과 유디트에게 서로를 추적하는 역할극을 주었다. 유디트가 그가 어디에 있든 엽서를 보내고, 전기 충격기가 든 소포를 보내며, 소년 갱단을 시켜 그가 강도 당하도록 모의하고, 호텔 수도꼭지에 산 성분을 몰래 설치해 테러를 가하려 했으며, 총을 들고 그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 모두를 당신은 사실이라고 믿는가. 유디트가 연극배우이긴 하지만 FBI 첩보요원은 아니다. 한트케와 유디트가 존 포드의 저택으로 가 인터뷰를 하고 서로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당신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세한 미국 관찰기, 자신의 트라우마와 고백, 다양한 인물들과 실측백나무를 통해 얻는 깨달음 등은 상당수 사실이지만 나는 유디트와의 저 스토리는 거의 픽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트케의 미국행은 아내와 이혼 후였다.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사 기법으로 한트케는 파괴적인 이별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해를 도모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서른에 완성한 이 소설은 그가 직접 밝혔다시피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한 노력이었다.

 

「“예전에는 단지 고통스러운 기억만 떠올렸지만 이제야 활력이 넘치는 추억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 내가 말했다. “기억을 되살려서 경험 전체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느꼈던 최초의 작은 희망을 다시 몽상 같은 것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가령 아잇적에 나는 물건들을 묻어서 감추어놓고는 나중에 다시 파보았을 때 그것들이 보물로 변해 있기를 바라곤 했지. 지금 나는 그런 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곤 했던 예전과는 달라. 그런 일을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장난으로 여기지 않아. 오히려 일부러라도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려고 하는 편이지.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결코 타고난 내 본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감각이 둔감해진 탓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순간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임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야. 마술사인 척하고 놀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기억해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당시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든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했다기보다는 마법으로나 스스로를 변신시키기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고리를 돌리는가 하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쪼그리고 앉아서 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둔갑하도록 주문을 외워대곤 했어. 물론 이불을 걷어냈을 때 원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야 하지. 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때 더 중요한 건 실제로 그곳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던 짧디짧은 한순간이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감정을 단순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쁨으로 해석하고자 해. 그 미래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어. 매일같이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단 하루일지언정 얼른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난 정말이지 시간이 흘러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어.” (80~81쪽)」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별은 만남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사실일까, 환상의 도취가 끝나고 우리가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일까. 편지는 진실을 말하는 허구의 기호일까, 환상을 겨우 전달하는 현실의 기호일까. 한트케에게 현실과 환상의 요소들은 ‘나’에서 ‘우리’로 넘어갈 정도로 치유와 극복의 재료들로 날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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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0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찍은 아갈마님의 이 감각 보셔요 햐...

AgalmA 2019-11-13 16:17   좋아요 1 | URL
격찬을^^)>;; 감사합니다👏
 

안타까운 안나, 선량한 레빈.
지루한 사냥 씬은 재미난 사냥개 묘사 때문에 봐준다.

˝‘글쎄, 주인이 하라니까 하겠다만 여기에 내 책임은 없는 거다.’ 개는 이렇게 생각하고 네 다리를 힘껏 뻗어 언덕 사이로 돌진했다.˝

ㅋㅋㅋ




1.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웃으며 레빈이 말했다. "형에게는 약점이 없어. 사랑에는 그게 필요한데 말이오······. 난 항상 형을 부러워했소. 심지어는 행복에 겨운 요즘도 어쨌거나 형이 부럽다오."

"아주버니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게 부러워요?"

"형이 나보다 훌륭하다는 게 부럽소." 웃으며 레빈이 말했다. "형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오로지 의무에 헌신하는 삶을 산다오. 그래서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거요."

4.
안나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확신시킨 결론을 끝까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불행한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게 하는 데 이성을 쓰지 않는다면 대체 왜 이성이라는 것이 주어졌겠어요?"

그녀는 돌리를 쳐다보고 대답을 듣기 전에 말을 이어갔다.

"난 언제나 그 불행한 아이들 앞에 죄지은 심정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불행하진 않죠. 그리고 그 아이들이 불행하다면 그건 다름 아닌 나 한 사람의 잘못이에요."

5.
그리 말하고 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한 손에(다른 손으로는 손가락만을 이용해 꼼지락대는 뒷통수를 받쳤다.) 그 기이하고 꼼지락대며 포대기 가장자리에 머리를 파묻는 핏덩이를 들어 레빈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코도 있고, 곁눈질을 하는 눈도, 쪽쪽 소리를 내는 입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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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안나 카레니나 2 펭귄클래식 1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톨스토이의 아내는 레빈이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했지만, 2부를 읽으니 안나의 남편 카레닌이 더 불가능한 인물로 보이네ㅎㅎ
2권 후반부에 가서야 톨스토이 의도ㅡ오블론스키의 외도, 셰르바츠카야 가족, 키티와 레빈의 설정ㅡ가 정확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가 미하일로프 같은 인물이 과연 필요했는가? 레빈의 결혼 같은 감동적 순간이 있었지만 온갖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톨스토이 때문에 너무 루즈한 이야기 전개가 된다는 게 1권에 이어 계속되는 실망이다. 톨스토이가 뛰어난 장편 소설가라는 생각은 안 든다. 도스토옙스키에 비해서도!

6.
‘이렇게 사람들이 미치는 거로구나.’ 그가 거듭 말했다. ‘이래서 자살을 하는 거구나······.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브론스키는 문으로 가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시선을 고정하고 이를 악물고는 책상으로 다가가 권총을 꺼내 살펴본 후에 자물쇠를 풀고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숙이고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약 이 분간 권총을 손에 들고 미동도 없이 서서 생각했다. ‘물론이지.’ 그는 흡사 논리적이고 연속적이며 명확한 추론 과정을 통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결론에 이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가 확실하다고 여긴 ‘물론이지’란 말은 단지 족히 열 번은 되풀이해 회상하고 연상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 행복의 기억도 마찬가지였고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도 그랬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의 순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이지.’ 세 번째로 그의 생각이 예의 홀린 듯한 기억과 사고의 회로를 향하자 그가 반복해 말했다. 그리고 권총을 가슴 왼편에 대고는 갑자기 주먹을 쥐려는 듯 손아귀 전체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그는 총이 발사되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가슴을 치는 강한 일격에 휘청거렸다. 책상 가장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권총을 떨어뜨리고 휘청대다가 주위를 놀란 눈으로 둘러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아래에서 올려다 보이는 책상의 휜 다리며 종이 담는 바구니, 호랑이 가죽 등을 쳐다보면서도 자기 방을 알아보지 못했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재빨리 응접실을 따라 다가오는 하인의 발소리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생각하려고 애쓴 결과 자신이 방바닥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고 호랑이 가죽과 자기 손에 묻은 피를 보고서야 자신이 총을 쏘았음을 알아차렸다.

8.
‘안나는 브론스키와 살림을 차리겠지만 이 년쯤 지나면 그가 그녀를 버리거나 그녀가 새 남자를 찾을 것이다.’ 카레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비합법적인 이혼에 동의해 준 나는 그녀를 파멸시켰다는 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수백 번은 하고 나서 그는 이혼 건이 처남이 말하는 것처럼 아주 쉽기는커녕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오블론스키가 하는 말은 하나도 믿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반론을 펼 수 있었지만 그저 듣기만 했다. 자신의 말에는 그의 인생을 조종하고 복종해야만 하는 광포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9.
"그러니까," 학교를 다닐 때 체득한 습관대로 말을 길게 잡아 끌면서 카타바소프가 말했다. "우리의 벗인 콘스탄틴 레빈은 정말 유능했답니다. 저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없거든요. 대학을 졸업할 때는 학문을 사랑하고 인간 문제에 관심이 있더니만, 이제 그의 반쪽은 자신을 기만하는 데 쓰고 다른 반쪽은 그 기만을 정당화하는 데 쓰고 있단 말입니다."

"결혼의 적으로 치자면 당신보다 더한 사람을 본 적이 없군요." 코즈니셰프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결혼의 적이 아닙니다. 저는 노동의 분배에 찬성합니다. 아무 일도 못 하는 사람은 사람이라도 만들어야지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힘을 모아 그들이 깨치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게 제가 이해하는 바입니다. 많은 망상가가 이 두 가지 일을 혼동하지요. 저는 그런 족속이 아닙니다."2)

"자네가 사랑에 빠지면 정말 기쁠 걸세!" 레빈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꼭 나를 결혼식에 부르게."

"난 벌써 사랑에 빠졌는걸."

"응, 오징어 말이지. 형, 있잖아요." 레빈이 형에게 말을 걸었다. "미하일 세묘니치는 영양 섭취에 관해 글을 쓴답니다. 그리고······."

"아니, 혼동하지 마십시오! 아무려나 상관없습니다만 문제는 제가 정말 오징어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네가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잖나."

"하지만 아내가 방해를 하지."

"왜?"

"이제 두고 보게. 자네는 농사짓는 걸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지. 하지만 이제 두고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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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목이 <안나와 레빈>이 아닌가!
2권에서도 레빈이 분량 반을 차지하는데^^;
레빈만 나오면 이광수 농촌 계몽소설 분위기;;;

1.
"유럽에서 자생하는 숲과 닮아 보이게 하려고 자작나무를 꽂지만 난 그런 자작나무에 기쁜 마음으로 물을 주거나 믿을 수가 없어요!"

코즈니셰프는 그저 어깨를 들썩거림으로써 그들의 논쟁에 왜 자작나무가 등장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아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잠깐만. 이 일을 그렇게 재단해서는 안 된단다." 그가 지적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레빈은 스스로 인정해 버린 결점, 즉 공공선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고 싶었기에 말을 계속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콘스탄틴이 말했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면 그 어떤 활동도 견고하지 않아요. 이건 일반적인 진실, 철학적인 진실이에요." 그는 ‘철학적’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반복했는데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처럼 철학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는 걸 과시하려는 투였다.

코즈니셰프는 다시 한 번 빙그레 웃었다. ‘아우에게도 자신의 취향을 떠받치는 모종의 철학이 있군그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철학은 놔두렴." 그가 말했다. "역사를 통틀어 철학의 주된 과제가 바로 사익과 공익의 필연적인 관계를 찾아내는 것 아니니. 그렇지만 핵심은 이게 아니야. 핵심은 내가 너의 비유를 정정해야 한다는 거지. 자작나무는 꽂은 게 아니라 씨앗을 뿌려 심은 거란다. 그러니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해. 중요한 제도를 존중하고 아끼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에만 미래가 있단다."

3.
"그때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행복은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느끼기에는 가장 큰 행복이 이미 뒤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 보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쁜 쪽으로 변해 있었다. 살이 많이 쪘고, 여배우 얘기를 할 때는 악한 표정이 떠올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꽃을 꺾어 죽여버리고 그 꽃에서 예전 아름다움을 좀처럼 찾아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꺾은 후 시들어가는 꽃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랑이 더 강렬했을 때에는 만일 강력히 원하기만 한다면 이 사랑을 마음에서 떼어내 버릴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이 순간에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음을 알았다."

4.
"그래,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그만둔 건 아닐세." 레빈이 말했다. "정말이지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릴없다고 보고. 자네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난 내 사상과 일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네도 이걸 생각해 보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 사실은 작은 행성에 돋아난 조그만 곰팡이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사상이며 사업 같은 대단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 실은 다 모래알에 불과한데 말이야."

"그렇지만 이보게, 그건 이 세계처럼 진부하고 오래된 얘기야!"

"오래됐지, 하지만 그걸 명확히 이해하면 갑자기 모든 것이 부질없어진다는 말일세. 오늘이나 내일 죽는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없지 않나! 내 사상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설사 그 사상을 실현한다 해도 부질없단 말일세. 이 곰을 잡듯이 말이지. 그러니 사냥이나 일을 즐기며 사는 거야,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오블론스키는 레빈의 말을 들으며 희미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5.
"의무는 권리와 결부되어 있으니까요. 권력, 돈, 명예, 여자들도 그걸 추구하는 겁니다." 페스초프가 말했다.

"어쨌거나 이건 뭐 내가 유모가 될 권리를 추구하는데 여자에게는 보수를 주고 내게는 안 주려 한다고 화를 내는 꼴이겠구려." 노공작이 말했다.

투롭친이 큰 소리로 웃어댔고 코즈니셰프는 그 말을 자기가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심지어는 카레닌까지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남자는 젖을 먹이지 못하지요." 페스초프가 말했다. "반면 여자는······."

"그렇지 않소. 한 영국인 남자는 배에서 자기 아이를 먹여 키웠다오." 노공작이 딸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유를 마다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영국인 남자 수만큼 여성 관리도 생기겠지요." 코즈니셰프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가정이 없는 여자는 대체 어떻게 하지요?" 오블론스키는 줄곧 치비소바를 염두에 두고 페스초프에 동조하며 그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질문을 던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연을 잘 들여다보면 그 여자가 자기 가정이나 언니네 가정을 내박친 걸 알게 될 거예요. 거기서 여자가 할 일을 찾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예기치 않게 대화에 끼어들며 돌리가 가시 돋친 말투로 말했다. 오블론스키가 어떤 여자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짐작한 눈치였다.

"우리는 원칙을, 이상을 지지하는 겁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저음으로 페스초프가 반박했다. "여자는 독립할 권리, 그리고 교육받을 권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에 주눅 들고 상심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보육원에서 유모를 하고 싶은데 안 받아줘서, 그래서 주눅 들고 상심하고 있다네." 다시금 노공작이 말했고 이 말에 투롭친은 크게 웃다가 아스파라거스의 통통한 끝 부분을 소스에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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