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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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자기 몸에 대해 뭘 말할 수 있을까. 성인의 뼈대는 총 206개이고 1,000억 개에 달하는 신경 세포를 가지고 있다는 기계적 설명이나 인간 유전자 지도(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에 대해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우리 자신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없이 하고 각종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리종의 아버지는 말한다.

 

「요즘 의사들은 몸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더군. 의사들에게 몸은 아주 단순한 것, 세포들의 조합일 뿐이지. X선 촬영, 초음파 검사, 단층촬영, 피 검사의 대상, 생물학, 유전학, 분자생물학의 연구 대상, 항체를 생성해내는 기관. 결론을 말해줄까? 이 시대의 몸은 분석을 하면 할수록, 겉으로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덜 존재한다는 거야. 노출과 반비례하여 소멸되는 거지. 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 2010년 8월 3일 리종에게 보내는 편지」

 

흔히 일기를 내면의 기록으로 쓰지만 리종의 아버지는 요동치는 정신의 상태를 반추하기보다 몸이 정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외부 환경과 몸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변화를 더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아주 작은 상처에도 신경이 쓰이고 팔이나 다리를 못 쓰게 될 때는 세상의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나이 들어가며 예전 같지 않은 몸의 상태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멸을 곱씹게 된다. 우리의 일기가 그러했듯 리종의 아버지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깊은 혜안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어릴 적 그가 가상의 동생이자 자신의 페르소나 도도를 만들어 불편한 가정에 적응해보려 했던 것처럼 일기도 자신의 삶에 적응해보려는 투쟁의 기록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회생시키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보고자 그를 낳았던 어머니는 가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두 사람을 증오했다. 쌀쌀맞은 어머니에게서 애정을 바랄 수 없었고 죽어가는 아버지에게서 애정과 교육을 받으며 자란 소년은 정신적으로는 조숙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아버지를 흉내 내며 유령 같은 모습으로 살려 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아버지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린 어머니 때문에 그는 거울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유령 고아 행색이었다. 그때 가사도우미로 나타난 비올레트 아줌마가 그의 구원자였다. 비올레트 아줌마와 소년의 이야기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릴 정도로 감동적인 대목이 많다. 몇 번을 울게 만들었는지……. 비올레트 아줌마의 동생 마네스 아저씨와 올케 마르타 아줌마, 그들의 자녀들(티조, 로베르, 마리안)은 소년에게 실제 가족과 같았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비올레트 아줌마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은 그의 트라우마로 오래 남는다. 아줌마의 죽음 뒤 단식투쟁으로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기숙학교로 갈 수 있었고 이후 이 일기에는 어머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고로 실종된 어머니에 대한 기술은 아주 짧게 처리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그는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되었고 거기서 팡슈도 만났다. 죽음이 목전에 있는 전쟁은 우리를 진정 몸으로 있게 만든다.

 

「은밀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신의 건강 문제에 관해 조금이라도 신경 써본 자가 과연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건 정말 한 번 연구해볼 만한 주제다. 동지들 중에서 아픈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거든. 온갖 시련을 다 겪으면서도 말이야. 배고픔, 목마름, 불편함, 불면, 기진맥진, 두려움, 외로움, 감금, 지루함, 상처. 그런데도 몸은 잘 버텨냈다.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어쩌다 이질에 걸리는 것 정도. 냉기를 느끼다가도 수행해야 할 과업을 생각하면 금세 몸이 데워지는 식이었지. 심각할 게 없었다. 우리는 배가 텅 빈 채 잠을 잤고, 발목을 삔 채로 걸었고, 몰골은 추했지만, 병에 걸에 걸리진 않았으니까. 내 관찰이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지는 모로만, 어쨌든 내가 주변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반면 STO(비시 정부에 의한 대독협력 강제 노동국)에 팔려간 청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처럼 쓰러졌다. 노동 재해, 우울증, 전염병, 온갖 종류의 감염, 그곳을 벗어나고픈 자들의 자해 등으로 작업장은 점차 비어갔다. 그 무상의 노동력들은 그들의 몸만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에 건강을 갖다 바친 거지. 반면 우리의 경우엔 정신이 동원된 셈이고. 저항 정신, 애국심, 점령자에 대한 증오, 복수의 욕구, 정쟁에 대한 취향, 정치적 이상, 박애, 해방에 대한 기대, 이름을 어떻게 갖다 붙이든, 그게 무엇이었든, 그건 우리 건강 상태를 좋게 해주었다. 우리 정신은, 전쟁이라는 위대한 몸을 위해 우리 몸을 기꺼이 써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없었던 건 아니지, 각자 자기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평화를 준비했고, 자기 식대로 해방된 프랑스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지만, 레지스탕스는 그 양상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침략자에 대한 투쟁 속에선 언제나 단 하나의 몸일 뿐이었다. 평화가 돌아오자 우리 각자는 그 거대한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금 세포들의 덩어리로, 다시 말해 모순 가득한 존재로 되돌아왔다.

- 21~26세(1945~1960)에 대해 리종에게 남기는 말」

 

그가 비올레트 아줌마에게 배웠던 청각 마취술(부상자를 치료할 때 요란한 소리를 질러 부상자의 정신을 빼놓는 것)을 팡슈에게 가르쳐줘 부상자 치료에 도움을 줬는데, 이 기술은 그의 자녀, 손자, 증손녀 (미친 사람 같았다는 소리까지 들으며ㅎ) 의 가정 치료 요법으로도 자리잡는다. 팡슈의 입김으로 레지스탕스 폭파전문가였던 쉬잔과 23세 생일에 처음 가진 성관계에서 자신이 성불능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계급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심판받는 첫 구직. 24세 발견한 비용종(콧구멍을 가로막고 있는 혹)이 그를 계속 괴롭히게 되는 사연. 25세에 첫 치과 방문과 첫 정장 맞춤. 맞지 않는 여러 교제 끝에 몸과 영혼의 동반자라 할 모나를 만나 27세에 결혼.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그의 생이 이어진다.

 

「난소도 역시 어지럼증의 척도 역할을 하냐고 모나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그런데 모나가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걸 보면서 내 고환은 또다시 조여들었다. 난 그녀 대신에 어지럼증을 느낀 것이다. 불알에도 감정이입이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산책하다 절벽에서 떨어진 어떤 사람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돌 더미 위를 몇 미터 굴러떨어지며 허공 속에서 허우적댔다. 친구들은 겁에 질려 계속 소리를 질러댔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한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자기가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공포도 떠나간 것 같단다. 그는 그 뒤로 평생 동안, 희망을 잃었던 그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그가 목숨을 건진 건 나뭇가지에 걸린 덕분이었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공포도 또다시 되돌아왔다고 한다.

- 28세 4일(1951년 10월 14일 일요일)」

 

불안한 현실과 편안한 잠을 오가며 살듯이 공포와 희망은 우리 인생을 돌리는 양면의 동전이다. 홉스의 고백처럼 ‘두려움은 내 인생의 유일한 열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자신의 과거와 아이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시간도 갖지만, 내면 일기를 쓰든 외면 일기를 쓰든 일기는 결정적인 걸 포착하지 못한다. 그의 일기에는 임신한 아내에 대한 묘사, 첫아이 브뤼노를 만난 순간도 기록되지 않았다. 일기를 쓰며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선택, 자기 역사의 단편을 바라볼 뿐이다. 현실에서는 몸을 둘러싼 끝없는 비교가 벌어진다.

 

「집 앞 공터에서 브뤼노와 걔 또래의 사내아이가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두박근 자랑, 작은 두 팔을 직각으로 굽힌 채 주먹을 쥐고, 이두박근을 팽팽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녀석 다 힘을 주느라 얼굴을 연극배우처럼 찡그리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평생 우리의 몸을 비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단 유년기를 벗어나면 그 방식이 은밀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열다섯 살 때 나도 해변에서 내 또래 남자애들을 상대로 이두박근과 복근 시합을 벌였었다. 열여덟 살인가 스무 살 때는 수영복 아래쪽이 얼마나 불룩한지를 자랑했다. 서른 살, 마흔 살이 되면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비교한다(대머리에겐 불행이다), 쉰 살 때는 배(배가 안 나와야 한다), 예순 살 땐 치아(빠진 게 없어야 한다). 이제 소위 원로라 불리는 늙은 악어들의 모임에선 등, 걸음걸이, 입을 닦는 방식, 일어나는 방식, 외투를 걸치는 방식을 비교한다. 한마디로 나이, 나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아무개가 나보다 훨씬 늙어 보이지, 안 그래?

- 36세 11개월 21일(1960년 10월 1일 토요일)」

 

 

「여럿이 어울려 있을 때 우리 얼굴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메시지는, 그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거기 속하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다. 그걸 교육이나 맹종 혹은 주관 없는 성격 탓으로 돌리는 게 보통이지만ㅡ그게 티조의 가설이었다ㅡ난 거기서 오히려 존재론적 고독에 저항하는 시원적(始原的) 반응을 본다. 본능적으로 유배의 고독을 거부하고, 공동체에 끼어드려는 몸의 반사적인 움직임이랄까. 심지어 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러하다. 공공장소에서ㅡ살롱, 공원, 술집, 복도, 지하철, 엘리베이터ㅡ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놀랍게도 우리 몸의 움직임에선 우선 동조하고 보자는 그 성향이 나타난다. 그럴 때 우리는 기계적으로 찬성하는 새 떼가 된다. 나란히 걸어가며 네, 네, 하고 있는 비둘기 떼와 흡사한 것이다. 티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표면적인 동조가 개인의 주관을 손상시키는 건 결코 아니다. 비판적 사고가 곧 뒤를 따를 테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비판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 부딪치기 이전에 우선 집단에 확실하게 들러붙고자 하고, 우리 몸은 그 본능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 37세 13일(1960년 10월 23일 일요일)」

 

 

「남들 앞에선 억지로 감추는 악취도 혼자 있을 땐 은밀하게 즐긴다. 생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이 이중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요한 속성이다. 테니스 치던 그 여자나 나나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가면 각자 자기 식으로 긴 방귀를 즐길 것이다. 악취의 파동이 이불에 흔적을 남긴 뒤 콧구멍까지 올라오도록 숙련된 기술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 40세 7개월 13일(1964년 5월 23일 토요일)」

 

건강염려증이 생기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병의 이름을 들으며 몸은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가장 힘든 건, 주위 사람들에게 이 피곤함을 감추기 위해 쏟아야 하는 정신적 노력이다. 식구들에게(피곤 때문에 가족도 낯설다) 똑같이 다정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겐(피곤 때문에 이상하게 낯익다) 전문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세상은 원래 무게보다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면 피로 속에 불안이 침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 자신, 무능하고 헛되고 거짓된 내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친 내 의식의 귀에다 대고 불안이 속삭이는 말들이다. 그러면 난 결국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아이들은 날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정한 기질을 가진 아버지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난 운명을 탓하기엔 인생은 매일 바쁘고 책임질 일로 가득하다.

 

 

기억력은 떨어져도 잊히지 않는 마음의 의지처들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마네스 아저씨의 죽음, 13살에 기절놀이로 서로 죽어보는 체험도 하며 같은 성장기를 보낸 똑똑한 친구 에티엔이 치매로 맞는 죽음, 그가 병나지 않게 돌봐줄 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손자 그레구아르의 황망한 죽음, 그보다 어렸지만 어른스러울 때도 많았고 매번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던 티조의 죽음, 그가 백내장 수술까지 하며 말년에 마지막 사회 참여를 하게 만들었던 팡슈의 죽음. ‘함께한다’는 말이 무슨 소린지 너무도 절절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도 지나간다. 그토록 묘사하고 싶었던 내 몸도, 생의 기록도 80세가 넘어보니 그저 피상적으로만 기록했을 뿐이라 깨닫게 된다.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나는 나였을까. 평생 열렬히 사랑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표현하지 못하고 이 일기장으로 딸 리종에게 마음을 전하는 그처럼 우리는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끝까지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이 세계에서 짐 졌고 온통 수수께끼 같던 '자기'라는 정체성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자기’를 너무 무거운 짐으로 지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삶도 죽음도 슬픔도 덜 무거울 것이다. 그렇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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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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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보다 더 내 질문 시냅스를 자극하는 분야가 있다. 첨단 과학 지식이나 SF물을 접한 뒤에는 블랙홀 같은 질문에 휩싸인다.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신경과학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인간은 신경 세포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결국 뇌다! 같은 극단적 정의도 나오지만 그것을 진정 수용하려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각자의 감각과 체험과 역사가 유일무이한 고유한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는 이것을 ‘정체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타자와 세계가 차별, 억압, 소외, 고통을 주는 대상이기도 하면서 사랑, 이해, 행복도 주기에 우리는 늘 딜레마에 처한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자기만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역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과정은 아름답고 슬픈 인상을 준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삶의 이런 모습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작품집에 담긴 7편의 수록 소설도 그랬다.

 

처음 이 소설집을 읽었을 때는 약자이자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해방을 향한 선택에 초점을 두고 읽어 나갔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우주 전쟁이 벌어지는 스펙터클한 미래 전망이 아니라 미래에도 여전할 인간의 고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한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조우했을 때 인간은 어떠할 것인가 하는 사고 실험들이다. 두 번째로 읽을 때는 작가가 탐지하려는 큰 그림의 보편 질문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대체로 ‘윤리’였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라는 존재와 차별과 배제가 없는 유토피아라는 공간이 공존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는 행복의 근원을 아는가’, ‘삶을 증오할지언정 자신의 존재는 증오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 ‘우리가 어떤 존재에게 죽고 살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가’, ‘간극으로 가득한 세계를 바꾸지 않고서 완전한 행복이 가능한가’. 릴리, 올리브, 데이지 3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속에서 그들이 투쟁하고 희망을 찾아나가는 선택을 그렸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존 문제에 이어 「스펙트럼」과 「공생 가설」은 외계지성체와는 어떻게 소통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를 다뤘다. 특히 「스펙트럼」은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와 (칭찬의 의미로) 아주 유사했다. 언어학자가 외계지성체의 언어를 습득하려는 노력과 천기누설 같은 비밀을 자신만 간직하는 설정이 그랬다. 두 단편은 다른 행성의 존재가 지구 생물의 결정적 근원이라는 가설과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변형으로 재밌게 꾸렸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은 자의식, 경험, 감정, 가치, 기억을 전달하는 색채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외계지성체를 만난다. 그녀는 인간의 사고 언어와는 다른 소통을 경험한다. 「공생 가설」에서도 류드밀라의 그림이 색채언어와 비슷하게 작용한다. 류드밀라의 그림이 사라진 행성을 묘사한 것이고 그곳에서 온 외계지성체가 7세 미만의 아이들 의식에 존재하며 인간의 윤리 의식을 형성했다는 설정은 우리가 ‘의식’의 본질을 파악하기에 역부족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기억과 상실의 생각 메커니즘, 그리움과 외로움 등의 정서가 존재의 삶의 방식인 것도 보여준다. "광대한 우주에서 고독한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조우를 갈망하는 그 자체가 고도의 자기 인지 능력을 요구"(「스펙트럼」) 하는 것이라 우리는 외계지성체를 이토록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류가 외계지성체와 만나는 게 바람직할까. 그래서 김초엽 작가는 외계지성체가 인류와의 접촉을 거부하거나 숨어 있는 설정으로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약 20만 년 전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정복자로 군림하는 이 모습이 긍정적인 공존이 아니란 걸 모두 인지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찌 변화해 나갈지.

 

2018년에 나온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은 기술과 인간 정서가 어떤 식으로 관계해 나갈지를 묻는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우주개척시대 워프 항법에 이용되는 냉동 수면 딥프리징 기술을 연구하던 여성과학자가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슬픈 사연이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100년 넘게 동결과 각성을 반복하며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그러므로 그녀는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향한다. 「감정의 물성」은 가장 가까운 미래 트렌드를 소재로 해 인간의 소통 문제를 다루고 있다. 행복, 침착, 공포, 우울과 같은 감정을 조형화한 제품인 ‘감정의 물성’을 통해 결혼이 아닌 동반 관계를 모색하는 보현-정하 커플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된다. 육체의 연약함 만큼이나 감정과 환경에 쉽게 휩쓸리는 인간이 타인의 감정을 얼마나 잘 살필 수 있을까. 이성과 감정은 분리된 게 아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정의 물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싶어 하지만 ‘감정의 물성’ 제품은 플라시보, 집단 환각 같은 결과로 드러난다. 우리는 끝없이 물성에 사로잡히지만 실체를 소유할 수 없다. 변화무쌍한 타인이야 오죽할까! 「관내분실」은 《블랙 미러》 같은 SF 드라마에서 각광받는 소재인 인간의 의식을 이동 전송하는 마인드 기술을 통해 인간 간 소통에 긍정적인 면을 보여줬다. 산후 우울증과 사회생활의 단절 등으로 가족과도 멀어지게 된 엄마의 ‘마인드’가 도서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을 알게 된 딸 지민이 엄마의 마인드를 찾아 접속해 이해의 뜻을 전한다. 사후에도 불멸하는 의식의 존재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이런 게 가능하다면 상대의 죽음으로 화해할 수 없는 절망 상황일 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스템이 가능하게 되면 우린 두 번 죽게 된다. 육체의 죽음과 의식의 죽음. 두 죽음을 고민하는 상황은 더 어려운 미래일 거 같다.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대해 김초엽 작가가 고심을 많이 하며 썼다는 인터뷰(《악스트 Axt 2019.11.12 – no.027》)를 봤는데 수긍이 갔다. 여성이자 동양인 소수자였던 최재경과 가윤이 신체를 완전히 개조하는 우주비행사 과정을 거치며 각각 선택하게 되는 결과는 내가 늘 재귀하는 질문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에 부합했다. 기술이 인류의 진보보다 스스로를 초극하는 방법으로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최재경과 가윤의 선택은 보여준다. 가족이었고 존경하는 앞 세대로서의 재경의 선택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선택을 하는 가윤은 요즘 화두로 떠오르는 밀레니얼 세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재경 때문에 가윤은 심해로 간 최초의 사이보그가 될 기회를 잃었다. 이제 가윤은 재경의 전적을 뒤쫓는 대신, 터널 너머로 간 최초의 인간이 될 예정이었다.”

 

삶이 끝없이 윤회한다는 불교 교리처럼 우주 뒤에 또 다른 우주가 펼쳐지는 인간의 우주 탐사는 인류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동안 이 세계의 차별, 억압, 소외, 고통도 계속될 것이고, 사랑, 이해, 행복, 자유, 의미를 찾는 우리의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이미 지금의 기술과 지식에서도 그렇듯 앞으로의 그것도 우리에게 자유의 풍요를 주는 만큼 부정적인 효과도 낳을 것이다. 우리는 선택할 것이고, 우주 어느 공간에 있든 의식이 있다면 묻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그렇게 선택한 매 순간을 단지 타인을 짓밟고 살아남는 데만 골몰한다면 우주, 삶, 우리가 인간이라는 의미가 무슨 소용일까. 빛의 속도를 가지지 못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빛난다. 우주 속 별들이 그렇듯 우리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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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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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국에서 이런 시가 나오긴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다행일까. 적당한 관계, 적당한 관조, 적당한 환멸, 적당한 어휘 타협을 하는 시절로 우리는 진화해왔으니. 어쩌면 최선일까. 홍상수의 첫 영화와 지금 영화의 온도 차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연주와 달리 그가 남성이었다는 게 도움이 안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집은 이연주 시인(1953~1992)의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1)과 1992년 10월 12일 타계 후 출간된 『속죄양, 유다』(1993)와 동인지 발표 시들 묶음이다. 책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그녀의 시들은 깊은 장막 속에 있다. 유복했다면 사랑으로 충만했다면 그녀의 삶과 시는 달랐을까. 자살하지 않았을까. 다를 수 있었을지라도 결과는 우리 앞에 이렇다.

 

 

「풀어진 길」

 

 

구급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해갔다.

사이렌 소리가 공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몸에서 어떤 핏톨들이 튀어올랐다.

나는 음습한 구석으로 가서

담벼락을 향해 오줌줄기를 뿌리며

무지개, 무지개…… 그렇게 중얼거린다.

구급차가 남긴 경적을 마신 공기들은

더욱 차갑고 쓸쓸하다.

모든 별들이 하늘 뒤에 숨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세상의 많은 것을 움직인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쁨조차 갖고 있지를 않으나ㅡ

벌써 오래 전부터 일이다, 한꺼번에 많은 것들이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변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나는 외투를 추켜올린다.

내 앞을 걸어가던 사내 하나가

어두운 골목길 저쪽으로 사라진다.

어깨에 쌓인 슬픔의 무거운 짐을

저 사내도 감추며 살아가는 걸까.

 

 

또 한 대의 구급차가 지나간다. 경적소리는 남는다.

무지개, 무지개…… 내가 중얼거린다.

의미 없는 낱말들이 차바퀴를 쫓아가 달라붙는다.

치유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나도 가고 싶다.

그러나 먼저, 유배지로 가는 내 방문의 열쇠를

누가 받아 간직해 주겠는가.

모든 별들은 하늘 뒤에서 빛난다.

나는 밤의 둥근 공기들을 육모, 팔모로 깎는다.

킥, 킥 웃음소리를 내며 모가 난 공기들이 나를 찌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연주의 하늘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지, 하늘, 시컴하기는……”(「커피를 마시는 쓰디쓴 시간」) 하는 먹장 하늘이고, 생활공간은 “월셋집 문간 담벼락 아래/당신 구두 발길질 아래”(「잡초」) 쥐와 거미와 바퀴벌레들을 지켜보는 곳이다. “0.8평 감옥에서 농촌에서 학교에서 도시에서 시큼한 냄새를 피우고 죽어가는”(「죽음을 소재로 한 두 가지의 개성 2」) 배고픔과 죽음이 등치인 위험한 시절이다. 살아간다 한들 의미 없는 비와 불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바람 속에 살면서 “오늘 오후엔 뭘 하지?” (「우리는 끊임없이 주절거림을 완성한다」) 주절거리며 일상도 빈곤하다. 이 시집의 여러 진료실에서는 “아가야, 태 안에서 죽으렴”(「성 마리아의 분만기」)이라고 말하며 사산한 아이만 낳길 원한다. 불모의 시간만을 겪는 이연주는 “오늘도, 자살골의 시를 남기면서”(「연애에 있어서」) 백지 위로 투신하는 것 외에는 선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이란 다만 허식에 불과할 뿐”(「구덩이 속 아이들의 희미한 느낌」) 세상은 이미 파놓은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삶이나 사랑이나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유효하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시간 아래 삶과 죽음은 대척점에 있지 않다.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의 초점일 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죽이고 죽는 일은 쉼 없이 일어난다.

 

 

「긴다리거미의 주검」

 

 

간단한 일이었다

허공을 향해 헛발길질 몇 번

볼품없이 긴, 그것을 다리라고 할 수 있었을까, 발이라고……

쭉, 뻗어 누웠다

그랬다

스프레이 에프킬라 한 방으로

죽였다

 

 

숨이 다 끊어지는 동안 아주 짧은 몇초

흉한 것을 곁눈질로 보듯

시큼한 토사물 곁을 못 본 척 비켜가듯

죽음을 맞는 그놈에 대한

내가 차린 예우였다

 

 

에미의 생식낭에서 부화하고 나와

허망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단순한 종교적 삶

절망은 유물을 남기지 않는다, 하찮은 거미 한 마리의 주검엔

그래서인지

그놈에게선 부패의 냄새가 없다

 

 

나는 두루마리화장지를 조금 풀었다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내듯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게 끝이다

삶과 죽음 사이가 실은

이토록 쉽고 간단한 것을……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 치욕적인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속죄양, 유다』는 처연한 실의(失意)가 가득하다.

 

 

 

「겨울나무가 내 속에서」

- 위험한 시절의 진료실·2

 

 

겨울날이었을 게야.

털 빠진 살가죽 외투를 추켜올리며

좁은 골목길 걸어 너를 만나러 가던 해질녘,

나는 보았지.

햇살 방울을 공중에 흩뿌리는 겨울나무에서

그 종소리ㅡ

페허의 사원을 기웃거리는 것을.

 

 

나는 생각했네.

먹잇감과 살 터를 찾아 눈먼, 인간 에어리언들의 공중전과

그 버팀목이 되는 가슴 없는 세계.

 

 

햇살 방울들이 갈등이 심한 공중으로부터

지상으로 추락하며 흔적 없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리번거리면서 나는, 아마,

다시 한 번 살가죽을 끌어올려 목을 움츠렸을 게야.

너를 만나러 가던 좁은 골목길.

 

 

내 숨소리의 저장소, 그 밑바닥에서

암종의 살점들 터지고 있는지 툭,툭, 소리 들렸네.

나무가 내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을까?

겨울날이었을 게야, 종소리였지.

초록빛 종소리.

 

 

유다가 홀로 완성되지 않듯이(「속죄양, 유다, 그리고 외계인-위험한 시절의 진료실·8」 우리 삶도 그렇다. “자꾸 잊어버려서 그렇지 어떤 책자를 들여다보면/아직도 그것은 진리로 쓰이고 있”(「성자의 권리·6」)듯이 이연주의 시에서도 진실들이 있다. 우리의 “반항과 복종”, “도망치는 보상 없는 내 하루”(「독재자」)에 대해서. “아프지 않고 견디기란 어렵”(「무덤에서의 기침」)고 기쁨이 아니라 “살아남는 조건은 슬픔뿐”(「무정부주의적 미립자의 고뇌」)이지만 “제대로 살고 싶다는 치욕이어도 좋을 용기”(「점·선·면」를 갖고 싶은 삶에 대해서. 삶을 앓는 병자들의 세계라 이연주의 시의 음정은 으시시하게 하강만을 향한다. 신께 속죄양을 바치던 시절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속죄양만 계속 바뀌고 있다. 과연 ‘제자리’가 현실에 존재한 적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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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2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2-0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죄양 유다, 이 시집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집 앞으로 나오기 힘들죠...

AgalmA 2019-12-11 21:39   좋아요 0 | URL
시전집 나오고 또 품절되어서 아쉽더니 다시 정상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이런 시집은 사라지지 말아야죠.

추풍오장원 2019-12-11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측의농간 출판사 참 좋습니다. 이런 re-issue 출판사 좀 많아지면 좋겠어요...

AgalmA 2019-12-11 22:18   좋아요 0 | URL
네. 달출판사, 읻다출판사 시집도 희귀성 있으면서 그들만의 색깔을 가져서 좋아합니다^^
읻다출판사가 죄다 절판 상태인 프랑시스 퐁주 시집을 내줘서 얼릉 샀지요♡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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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희지의 세계』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데 「건축」이란 시는 황인찬 시의 원형이 담겨 있다.

 

 

「건축」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는 지난여름 그와 보낸 마지막 날로부터 시작된다

 

 

"이리 나와 봐, 벌집이 생겼어!"

​ 그가 밖에서 외칠 때,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서 한낮의 빛이 들이닥쳐서 여러 가지 무늬가 바닥에 일렁였고

"어쩌지? 떨어뜨려야 할까?"

그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벌집은 아직 작지만 벌집은 점점 자란다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날 것이다 그가 말했지만 큰일이 무엇인지는 그도 나도 모른다

한참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벌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그것들이 벌집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고 육각형의 방은 조밀하게 붙어 있고 그의 목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

"하지만 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멸종한댔어"

돌아온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쯤 여름이 끝났던 것 같다

 

여름의 계곡에 두 발을 담근 두 사람이 맨발로 산을 내려왔을 때,

늦은 오후에 죽어 가는 새의 체온을 높이려 애썼을 때,

창을 열어 두고 외출한 탓에 침대가 온통 젖어 어두운 거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었을 때,

 

 

혹은 여름날의 그 어느 때,

마음이 끝났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숲길을 걸으면서 그가 결국 벌집을 깨뜨렸던 것을 떠올렸다 걸어갈수록 숲길은 더 어둡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때는 아름다운 겨울이고

나는 여전히 친척의 별장에 있다

 

 

잔뜩 쌓인 눈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서 아주 고요하다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친척, 여름과 겨울, 숲, 물, 꿈, 죽음, 새, 학교, 창밖의 나’  표현과 ‘아이로 머물고 있는 나, 마음의 끝, 관계의 끝, 장면의 끝’ 설정은 영화 《인셉션》의 토템처럼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번 시집의 「죄송한 마음」 시에서도 ‘지난겨울, 친척의 별장’이 또 등장했다. 비밀스러운 이 슬픔은 ‘동성애’에 대한 것일까. 죽은 사람들, 과거, (지금은 앞으로도) 없는 사람이 계속 등장하고, 무엇을 먹든 빈 찻잔이나 까맣게 타버린 것으로만 보는 이 상실감에 대해 내가 안다거나 이해하겠다는 말은 못 하겠다. 이것은 “사건 이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마을은 돌아”(「재생력」) 가는 영화가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반복될 억압이므로.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그의 시의 “서정적 일면”이고,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아카이브」) 알아차리는 순간처럼 그의 시는 돌연 끝난다. 끝없는 리플레이 속에 이탈되는 그는 목격자처럼 이야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어 “이야기의 주인공”(「사랑을 위한 되풀이」)으로 말하길 원하지 않는다. 죽음, 꿈, 문학적 공간(詩)에서나 재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는 시간, 장소도 모호한 공간에 그와 내가 대화하게 하지만 그나마도 잠시 머물다 휘발된다. 또 대부분의 시들에서 부정문으로 흔적을 닫아버린다(“너는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다”「비역사」, “거기에는 영혼은 없습니다.”「시계가 없는 주방」, “그러나 미래는 오지 않았다”「화면보호기로서의 자연」, “앞으로 문은 십년 동안 열리지 않습니다”「깨물면 과즙이 흐르는」, “그러니 앞으로는 이 집을 나가지 말자”「현관을 지나지 않고」, “네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어두운 숲의 주변」, “그것은 이야기가 안 되겠지요”「보도와 타일」,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일은 없습니다”「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빛은 어둠의 속도」) . 너는 여름에 있고 “나는 불안/나는 망각 나는 모과”(「말을 잇지 못하는」) 같다고 읊조리며 “왜 자꾸 우리는 숲으로 오는 걸까? 여기서 뭘 하는 것도 아니면서”라는 알아차림은 계속되지만 “이렇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채로 숲속을 헤맸던 어떤 여름날의 이야기”(「어두운 숲의 주변」)를 끝낼 수도 없다. 은유로 채울 수 없어 무덤으로 가득한, “아무것도 없는 곳을 비추려는”(「요가학원」) 이 시집의 집요함 앞에 우리는 무력하게 바라보는 입장일 뿐이다.

지워지고 싶으면서도 영영 탈출하지 못하는 시가 되고 싶고, 시이면서 시가 아니기도 바라면서, 사랑만 남는 시이길 바라면서도 사랑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양가감정 속에 그의 시는 앞으로도 계속될 거 같다. 하나의 시는 끝낼 수 있지만 시가 시작되려는 순간을 “어떻게 끝내야”(「부서져버린」) 할지 막을 수 없는 시인인 거 같으니까.

 

 

‘시인의 말’은 물속에 잠겨 있던 쌀이 모락모락 밥이 되어 있는 것을 본 것처럼 비장하기보다 귀여웠다(?) 내 지나친 곡해일까.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

이 시집을 묶으며 자주 한 생각이었다.

ㅡ 2019년 가을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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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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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죽는 날까지 모든 순간은 다르다. 우리는 특별한 행복이 오거나 불행이 빗겨갔다고 생각하면 지금을 감사히 생각하면서도 대부분 일상에 매여 있다고 감옥 같다고 여기며 매일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재미, 몰두할 대상이나 취미를 찾으며 삶의 중압감과 권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길 원한다. 삶이 이미 여행이지만 우리는 다른 여행을 꿈꾼다. 삶이 이미 고역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장 고약한 업무인 글쓰기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듯이.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라는 문장은 여행의 순간을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사물과 장소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도 있지만 100편이 넘는 이 에피소드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면 우리가 이 여행을 이토록 흥미로워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아무것도 만나지 않는 여행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신드롬’을 앓는 존재이자 ‘호기심의 방’이라 이야기와 구경과 수집에 열광한다. 전쟁, 전염병, 재난, 시체마저도 적당한 거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은밀한 혹은 노골적인 관객이 된다. 여행 중에는 타지의 쓰레기마저도 흥미롭지 않던가!

 

 

관광객이 되긴 쉽지만 유랑자나 순례자가 되는 건 어렵다. 여기 ‘재발성 해독 증후군’(어떤 이미지를 향해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의식의 작용,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에 빠진 화자가 몸소 기록한 여행 지도가 있다. 희귀하고 괴상하고 기이한 것에 끌리고 전통적인 수집가들의 기호나 취향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외로운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들에게 건네는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어떤 여행이든 가능하다. 우리는 섬처럼 만나고 섬을 떠나듯 멀어진다.

「여행 심리학에 따르면, 섬은 사회화 이전의 가장 이르고 가장 원시적인 상태를 말한다. 에고가 어느 정도의 자의식은 획득할 정도로 개별화되었지만, 아직 주변과 만족스러울 만한 관계를 구축하지는 못한 상태. 섬의 상태란 외부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영역 안에 머무르는 상태를 말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자폐증이나 자기도취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나’만이 현실로 느껴지고 ‘너’나 ‘그들’은 희미한 망령, 아니면 저 멀리 수평선에서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이것은 시야를 상하로 명확히 가르는 직선에 익숙해져 버린 눈이 만들어 낸 평범한 허상일지도 모른다.」 ㅡ 「섬의 심리학」

「그러다 갑자기 대상을 바라보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첫 번째 방법은 사물, 즉 인간이 사용하는 물건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경우 해당 물건의 사용법과 용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파노라마로, 더 일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 개체 사이의 연관성과 서로에 대한 반응을 네트워크로 파악하게 된다. 사물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뭔가에 기여하고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은 이제 중요치 않다. 그것은 피상적인 가치일 뿐이다. 신호나 기호가 되어 사진 속에 없는 뭔가를 지칭하면서, 사진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선을 유지하려면 극도로 집중해야 했다.」 ㅡ 「쿠니츠키 : 대지」

                   

 

 

일관된 인과관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각자의 궤변과 저마다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세계는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겪고 본다. 아파트가 계속 허물어지고 고래가 뭍에 올라 자살을 하며 플라스틱이 온 대양을 누비는 동안 우리도 각양각색으로 떠돌다 어느 순간 멈춘다.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지 않는 욕망을 엔진으로 삼고 있는 우리는 도처에 있다. 쿠니츠키는 섬 여행에서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어 찾아야 하는 고생을 겪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아내와 아들은 다시 사라져버렸고 그도 새로운 길을 떠나야 했다. 에릭은 『모비 딕』의 모험적 삶을 실제로 살아본다. 아누슈카는 병든 아들과 과묵한 남편과 억압적인 시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거리의 삶을 살아보다가 결국 돌아간다. 독재적인 아버지의 시체 표본 수집 일을 도맡던 샬로타는 선원으로 떠나는 꿈도 꿔 보지만 현실에 안주한다. 여성 생물학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옛 연인의 안락사를 돕기 위해 30년 만에 폴란드로 와 007 첩보전 같은 행보 뒤 떠난다. 18세기 제임스 쿡은 남쪽으로 탐사를 떠났고 20세기 토머스 쿡은 최초의 여행사를 만들었다. 17세기 해부학자 프레데릭 라위스 교수와 21세기 외과 의사 블라우 박사처럼 인체가 여행지인 사람도 있다. 박제된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요제피네 졸리만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보낸 비난 편지도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 쿠니츠키에게는 ‘카이로스’가 그리스신화 속 존재라는 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리스 문명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교수에게 ‘카이로스’는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순환의 시간, 장소와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적절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아주 짧게 열리는 순간, 무에서 무로 달려가는 직선이 원과 맞닥뜨리는 지점’을 뜻했다. 교수는 그리스 문명에 열광하다 그 속에서 임종을 맞는다. 교수가 죽음을 맞는 의식의 여행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압축한 대목이어서 인용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교수를 데리고 먼지 낀 도로를 달렸다. 광고판과 창고, 경사로와 지저분한 차고, 고속도로변을 지나치면서.

그러나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 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아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그가 임대해서 지내던 방, 싸구려 호텔,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점도 모조리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그 수면은 그가 너무도 사랑하던 도서관의 첫 번째 서가를 공격했다. 책장들이 물에 퉁퉁 불었다. 표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혓바닥이 문자들을 핥았고 검게 인쇄된 활자를 지워 없앴다. 자녀들이 졸업장을 받은 학교의 계단과 마룻바닥도. 교수 임명을 받기 위해 자랑스럽게 달려가던 도로도 전부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렌이 함께 누워 늙고 노쇠한 육신을 처음으로 결합했던 침대 시트도 붉게 물들었다. 붉은 빛의 그 끈끈한 점성 액체는 그가 자신의 신용 카드와 비행기 표, 손자들의 사진을 넣어 둔 지갑의 칸막이도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이고,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수면은 끈질기게 상승했고, 말과 개념과 추억을 모두 집어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꺼지고 전구들이 터져 버렸다. 전선은 끊어지고 네트워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거미줄이 되어 버렸으며 전화기는 먹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느리고 무한한 대양이 마침내 병원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아테네 전체가 핏물에 잠겼다. 신전들, 성스러운 길과 수풀들, 이 시각엔 늘 비어 있는 아고라, 여신의 빛나는 조각상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올리브나무까지 모두.

그녀는 계속 그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불필요한 장치를 그에게서 떼기로 결정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리스 간호사가 단 한 번의 능숙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시트로 덮는 순간까지.」 ㅡ 「카이로스」 

 

       

            

쇼팽은 죽어서 프랑스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조국 폴란드에 묻혔다. 이 소설에서 떠다니는 유령섬처럼 등장하는 시체 표본들처럼 우리는 죽어서도 여행을 한다. 죽어서도 ‘나’는 나일까. 우리는 시간 속에 변화하는 모습일 뿐.

이 소설에 또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여기 내가 있다”이다. 일상에서 ‘인간은 왜 살까’ 하는 물음처럼 여행지에서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나는 여기 왜 있을까?’ 늘 답은 ‘모르겠다’이다. 여행 심리학의 궁극적 최상ㅡ목적지가 어디건 간에, 우리는 항상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다. 여기 내가 있으므로ㅡ 단계는 우리가 삶에 임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계속 죽음을 품은 채 죽음과 함께 할 것이다. 또 다른 순례자가 “지금 플렉시 글라스 속에 담겨 있거나, 아니면 다른 방에서 플라스티네이션 처리가 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잊힌 이야기 혹은 지금 태어나는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삶과 타인을 계속 만날 것이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우리의 물음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무엇에 대해 묻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안 가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저울의 눈금을 기울게 할 수 있는, 속담에 나오는 딱 한 줌일지도 모르겠네요.”」 ㅡ 「블라우 박사의 여행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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