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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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현재의 느낌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토록 긴 과거에 대한 평가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내려 한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말)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면 웃음과 씁쓸함에 휩싸인다. 가끔은 놀랍고 끔찍하다. 우리는 이런 공통점도 가진다. 첫인상을 매우 신뢰한다는 것.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인상과 직감에 더 기운다. “감정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촉발되는 게 아니”고(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 “얼굴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슷한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지만 “만약 사회가 얼굴 읽기에 근거해서 낯선 이를 이해하기 위한 규칙을 만들었다면 큰 문제가 된다.” 제대로 소통까지 못한다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말콤 글래드웰의 이 책 『타인의 해석』은 그런 문제점과 사례들을 전방위로 다뤘다.

 

 

 

글래드웰이 권하는 타인을 대하는 자세는 이렇다. 우리는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해석하는 것에 지독하게 서툴다는 것을 인정할 것. 낯선 사람의 말과 행동에만 집중해 곧바로 결론 내리지 말 것.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는 대화 내용보다 맥락을 고려할 것.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역사적으로도 현재까지도 이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타인을 잘못 해석하는 첫 번째 요인은 지나친 확신이다. 우리는 코르테스가 이끈 에스파냐(스페인) 군의 멕시코 침략에서 아즈테카인이 백인을 예언된 신으로 받아들여 아즈텍 문명이 몰락했다고 알고 있지만 역사학자 매슈 레스탈은 전혀 다른 맥락을 제시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코르테스와 아즈텍 제국의 몬테수마 왕은 여러 통역자를 거치면서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 그들이 사용한 '신'이라는 단어는 파악하기 어려운 낯선 존재에게 쓰는 것이기도 했고, 몬테수마가 한 말은 항복한다는 게 아니라 에스파냐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있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들은 히틀러를 직접 만나고도 그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했다. 글래드웰은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만나려고 애쓰기보다 차라리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읽었더라면 더 나은 판단을 내렸을 거라고 말한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하듯이 말이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을 피하려는 자신의 계획과 행동을 확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 쿠바 부서의 간부들은 스파이를 간파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플로렌티노 아스피야가, 애나 몬테스에게 감쪽같이 속았다. 우리는 거짓말을 제대로 맞히는 데 우연보다 훨씬 무능하다. 심판들이 거짓말쟁이를 정확히 짚어내는 확률은 54퍼센트인데 운에 맡기는 것보다 약간 높은 수치다.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초탐지자’들이 있다고 해도 매번 성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모순의 함정에 빠진 사실을 낌새조차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자 프로닌은 이런 현상을 ‘비대칭적 통찰의 착각illusion of asymmetric insight’이라고 규정한다. “남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남을 더 잘 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없는 그에 관한 통찰을 갖고 있을 수 있다(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는 확신이 있으면,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이야기를 하고, 또 남들이 자신이 오해를 받거나 부당한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표명할 때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보다 인내심을 갖지 못하기 쉽다.”

 

 

타인을 잘못 해석하는 두 번째 요인은 우리가 진실을 기본값으로 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고(미심쩍은 부분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경향),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가정하는 데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밀그램의 실험이다. 권위자의 지시에 따라 일반인이 실험 대상자에게 살인에 가까운 전기 충격을 주는 것에 동조했던 실험이다. 지원자의 40퍼센트 이상이 실험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심리학자 팀 러바인의 ‘진실 기본값 이론Thuth-Default Theory(TDT)’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 것은 그에 관해 아무런 의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믿음은 의심의 부재가 아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는 것은 그에 관한 의심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버니 메이도프의 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풋불팀 코치 제리 샌더스키의 아동 성학대 피해가 더 컸다. 이들은 태도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은 거짓말쟁이였기에 많은 이들을 우롱할 수 있었다. 이 불일치로 불의의 피해자도 생긴다. 아만다 녹스는 자기 룸메이트가 살해된 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평가와 언론·여론 몰이로 죄를 뒤집어쓰고 이탈리아 교도소에서 4년을 보낸 끝에 석방되었다. 한국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제도적 심판의 결함과 부정확성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실수는 무작위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팀 러바인의 연구는 그것이 무작위적인 게 아님을 시사한다. 우리는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투명성에 관한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관념에 위배되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차별하는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타인을 잘못 해석하는 세 번째 요인은 상황의 결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다. 전도 유망했지만 요절한 시인으로 회자되는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 요인으로 우울증이나 불우했던 가정사를 주로 언급하지만 사회적 환경도 따져볼 수 있다. 가스 오븐으로 자살한 정황이 꽤 충격적으로 거론되는데 “플라스가 자살한 1960년대 초, 영국에서 같은 연령대 여성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10명이라는 경이적인 수치에 도달했다. 비극적으로 많은 가스 중독 사망자 때문이었다. 영국 여성 자살률로 역대 최고치다. 천연가스로 전환이 완료된 1977년에 이르면 같은 연령대 여성의 자살률은 절반 정도로 떨어졌다. 플라스는 정말 운이 나빴다. 10년 뒤에 태어났더라면 그가 "달콤하게, 달콤하게 들이마실" 일산화탄소 같은 구름이 없었을 것이다.” 실비아 플라스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앤 섹스턴은 이듬해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살했다. 요즘 자동차는 일산화탄소가 거의 배출되지 않아 시동을 걸고 문을 닫아 자살하기 어렵다. 한국도 연탄 사용이 줄면서 일산화탄소 사망은 많이 줄었지만 번개탄 자살은 종종 일어난다. 글래드웰이 이 사례를 가져온 것은 초점에서 좀 벗어난 것 같았다. 그들이 자살을 마음먹은 이상 그것은 방법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금문교 예는 적합했다. 자살 명소로 유명한 금문교에 자살 방지 구조물을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다리가 개통하고 80년도 더 지난 2018년이었다. “존 베이트슨이 저서 『마지막 도약』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 사이에 교량 관리 당국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다리를 건너는 자전거를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금문교에서 운전자가 자전거 이용자 사망 사고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또한 ‘공공 안전’을 이유로 양방향 차로를 가르는 중앙분리대를 만드는 데 수백만 달러를 투입했다. 다리 남쪽 끝에는 다리 밑에 있는 예전 군 시설인 포트베이커에 쓰레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막는 약 2.4미터 높이의 사이클론 펜스를 세웠다. 처음에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에는 노동자들의 추락사를 방지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보호 그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물 덕분에 19명이 목숨을 건졌다. 공사가 끝나자 그물은 철거되었다. 그런데 자살에 대해서는 어땠을까? 80여 년 동안 아무 조치도 없었다. 자, 왜 이렇게 된 걸까? 다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비정하고 냉혹하기 때문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이 어떤 장소와 그렇게 밀접하게 결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해에 걸쳐 교량 관리 당국은 자살 방지 구조물 설치를 지지하는지 정기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물었다. 답변지는 대체로 두 범주로 나뉘었다. 찬성하는 쪽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한 경험이 있어서 자살의 심리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이들이었다. 나머지(사실상 다수)는 결합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다른 결합의 문제가 있었다. 미국 경찰이 민간인에게 다가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듯 샅샅이 뒤지는 전술을 바꾼 뒤 노스캐롤라이나주 고속도로 순찰대의 차량 검문 건수는 7년 만에 40만 건에서 80만 건으로 증가했다.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 타고난 성향을 무시하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미국에서 백인 경찰이 무고한 흑인을 총격해 살해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데 시스템이 인종차별을 더 부추겼을 것이다. 래리 셔먼은 심각한 우려를 밝혔다. “우리가 담낭이 좋지 않은지를 알아보려고 의사들한테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절개해보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중략) 우리는 경찰이 하는 모든 일이 어떤 면에서는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사실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경찰을 범죄 빈발 지점에 투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범죄 안심 지점에서는 자유 침해를 딱 필요한 만큼만 하고 그 이상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의 첫머리와 끝머리에 제시된 샌드라 블랜드의 자살 사건은 낯선 이와 이야기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대화가 틀어졌을 때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블랜드는 위에서 말한 아만다 녹스처럼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교통 범칙금으로 이미 경제적인 곤란을 겪고 있었고 낯선 지역에 면접을 보러 온 상황에서 오자마자 환대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만난 것이었다. 백인 경찰 브라이언 엔시니아와 흑인이자 여성이었던 샌드라 블랜드의 만남은 인종 문제나 성차별, 위계의 문제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서로 배려하지 못했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했으며 상대에게 적개심만 표출하고 말았다. 사소한 정차 지시에서 비극적인 죽음으로 치닫게 된 이 사건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이다.

 

 

글래드웰은 이 책을 3년에 걸쳐 썼다고 했다. 타인에게 조심스럽고 겸손함을 갖추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변함없는 예의다. 나도 때론 실수하는 것 같지만 이런 상식을 베스트셀러 저자가 강조해야 하는 세태가 서글프다. 타인을 불신하고 소통하기 어려운 시대에 함께 고민하고 타인에 대한 자세를 재점검해 볼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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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Sur) - 세계 여성 작가 페미니즘 SF 걸작선 세계 여성 작가 페미니즘 SF 걸작선 오디오북
어슐러 K. 르 귄 (Ursula Kroeber Le Guin) / 아작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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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이라 기대하고 봤는데 심심했습니다.

1911년 아문센이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기 이전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도 없는 여성 탐험대가 이미 도착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분량이라 스펙터클한 전개를 기대하기 무리였지만 다큐 같은 지루한 전개, 여성 대원의 출산 등 진부한 소재, 콩트 같은 결말로 이어져 반전의 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페미니즘적 접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소재라면 에베레스트 일반인 등반대 조난 사건을 쓴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 난파 당해 식인 행위 등 혼란스러운 여정 끝에 설경의 미지의 세계에서 괴물을 만나던 애드거 앨런 포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읽는 게 훨씬 낫죠. 여름으로 넘어가는 지금 읽기에 딱이고요.

 

오디오북은 글로 볼 수 없어 낭독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요. 이 오디오북 낭독자는 많이 아쉽더군요. 문성근 같은 배우들이 낭독한 오디오북에 비하면 성량, 완급 조절, 분위기 조성 등등 아마추어 같았습니다. 최근 읽었던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오디오북에 비해서도 낭독자의 역량이 비교되더군요. 세계 여성 작가 페미니즘 SF 걸작선 오디오북 여럿 있던데 또 실망할까 봐 다른 거 살 생각을 접었어요. 한국 오디오북 시장 갈 길이 멀다 싶습니다. 글로 볼 수 없는 답답함과 더불어 리뷰 쓰려면 내용 요약하기도 쉽지 않은데 품질도 만족스럽지 않아 오디오북은 까다롭게 골라야겠어요. 종이책으로 읽었다면 더 나았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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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20-05-14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오디오북은 또 다른 영역같아요. 책이 재미없더라도, 나레이터에 따라 책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AgalmA 2020-05-28 06:17   좋아요 0 | URL
ebook에 비해 오디오북 적응하기 너무 어렵네요^^;;
 
N.P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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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요시모토 바나나를 처음 만나게 됐는데, 이 작가를 왜 좋아하는지 왜 비판하는지 알겠다. 비판에 대해서는 하루키에게 그러하듯 비슷한 지점이 있다. 짧고 가볍게 밀고 나가는 필치. 그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어투와 결합된 일본 문화 특유의 휘발적인 단상조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이 자주 담는 기담과 공포까지 포함해서.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 이 소설에 대해 자세히 말하진 않겠다. 이 소설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는 [작가의 말]이 다 전하고 있다. 재능이나 결손에 얽매여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고 한 것과 작가가 선호하는 테마들을 최대한 실험해보고 싶었다는 것.

 

시원치 않은 작가 생활과 삶을 산 다카세 사라오라는 작가가 마흔여덟 살에 자살하고 그가 미국에서 낸 단 한 권의 단편집을 둘러싸고 이 소설의 인물들이 엮인다. 작가의 자녀들인 쌍둥이 남매 사키와 오토히코, 스이, 다카세 사라오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다가 자살한 쇼지, 쇼지의 어린 연인이었던 가노. 이들의 삶도 비슷비슷하다. 부모의 이혼으로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겪었고 여전히 그 영향 속에서 살고 있는 사키, 오토히코, 스이, 가노. 재능은 있었지만 삶 속에서 무너진 다카세와 쇼지. 이들은 "미행당하고 있다는 망상에 젖어 있는 분열증 환자처럼은 아니라 해도 무언가에 홀려 있지 않은 때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해는 할 수 있어도 시간의 무게는 나눌 수 없는" 사람 삶이 대체로 그렇지 않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삶은 흘러가지만 그 자체로도 사실 버겁다. 작가였던 다카세, 번역가였던 쇼지의 처지와 심정도 비슷했던 것 같다.

 

*

「엄마가 웃었다.

"쇼지 씨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하겠어. 수십 년을 하다 보면, 지칠 때도 있는걸. 번역이란 거, 지치는 양상도 좀 독특하거든."

디저트와 에스프레소가 나와 얘기가 중단되었다. 엄마의 생각을 요즘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 신기했다. 엄마가 하는 일도.

"다른 사람의 문장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더듬어 가야 하잖아. 하루에 몇 시간이나, 마치 자신의 글을 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사고회로에 동조한다는 거, 그거 참 묘한 일이야. 거부감이 없는 선까지 들어갈 때도 있잖아. 그러면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타인의 사고가 일상생활에까지 파고들기도 하고. 영향력이 강한 사람의 글을 번역하다 보면, 그냥 읽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끌려 들어가게 돼."

"……엄마 정도의 베테랑도?"

"최근에는 엄마도 터득하게 되었지만, 번역 일을 시작했을 처음에는, 그게 아마 이혼한 그쯤일 거야. 잘 안됐어. 일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고 할까. 아이를 키우면서 혼자 헤쳐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런데 종일 타인의 문장과 씨름을 하고 있으니…… 아, 그래, 고독이라고 해야 하나? 고독에 거의 짓뭉개질 것 같았어. 그리고 기분 전환 거리는 뭐든 상관없었어. 사고를 완전히 중단할 수만 있으면."

"자식을 키우는, 그런 거?"

"자식을 키우는 건 시행착오의 연속이야."

엄마가 웃었다.

"엄마는 겐타마였어."

"응?"

나는 되물었다.

"겐타마(십자 모양의 손잡이에 끈으로 매달린 나무 공을 탁탁 치며 노는 놀이 기구). 아하하,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에는 심각했어. 엄마가 자주 했잖아, 왜."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의 방 닫힌 문 너머에서 '탁, 탁'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곤 했다.」

 

**

「하지만 나를 만나기 전부터, 인생의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 그의 내면에 지속적으로 쌓여 간 피로감을 덜어주는 역할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 인격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 내게는 매력으로 비쳤던 어두운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나는, 만났을 때 이미 전구가 거의 꺼져 가던 그의 마음속 방에 날아든 나비였다. 위로는 되겠지만, 어둠 속에 낮의 반짝거리는 잔상을 끌어들여 그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을 뿐이다.

그래서 꿈에 그가 등장할 때면 언제나, 지금의 내가 옛날의 그를 만나는 설정인 것이리라. 지금의 나라면 조금은 반짝임 이외의 것을 줄 수도, 즐겁고 고요한 시간을 함께 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것도 힘든 일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후회하고 있다. 지금의 나로 만나고 싶었다. 마음속 어딘가에는, 그런 생각이 남아 있다. 자신에게 과도한 가치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가노의 어머니가 탈출구를 원했듯이 쇼지에게 여고생 가노, 다카세에게 스이가 그런 역할이었겠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의 삶의 무게만으로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다음 세대의 극복에 집중한다. "무언가를 은닉한 사람만의 강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는 듯 보이는" 사키는 심리학을 공부하며 자살 같은 저주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뭇사람들과는 어긋나는, 자립해 있는 재능의 자기 충족적인 무언가. 다른 사람과는 절대 공유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내면의 고뇌 같은 것. 몇몇 사람에게만 통하는 강력한 신호"를 가지고 있는 스이는 관계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 아버지처럼 창작 재능이 있는 오토히코는 스이와의 관계가 끝나며 아버지의 그림자와 광기 어린 삶에서 빠져나와 독립적인 작가로 전환할 시기를 맞이한다. 가노는 이들을 통해 쇼지와의 아픈 기억을 극복한다.

***

「"요즘 사람과 얘기를 안 한 탓도 있으려나."

"불 때문일까."

"이 바람 때문인지도 모르지."

"바다 앞에 서면 사람은 마음을 연다고 하잖아."

"아무리 하찮은 일도 좋은 일인 것 같고 말이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파도에 실려서 멀리 떠밀려 가고."

"이게 해방감이란 거야."

.

.

.

밤이 깊어 가면서 침묵을 에워싼 파도 소리가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풍경이 마음속에 쌓인 울적한 것들을 말끔하게 쓸어가고 그 자리에 맑은 대기가 차올랐다. 그런데도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빛나는 것은 남아 있었다. 고요했다. 영원히, 이제 세계가 끝나는 듯한, 순결한 밤이었다.

.

.

.

오토히코를 보았다. 눈물에 번진 하늘과 바다와 모래와 흔들리는 불길을 보았다. 아찔한 속도로 한꺼번에 머리에 들어와,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아름답다, 모든 것이. 이 여름에 일어난 모든 일이, 미치도록 격렬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매년 여름을 겪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인생의 순간들도 맞는다. 욕망과 꿈 실현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상처도 주지만 우리는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두 마음속에 여름 같은 열정과 바다 같은 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작가와 함께 나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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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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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과 ‘어두워지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르다. ‘어두워진다’는 말이 현재 진행을 보는 관찰의 자세라면 ‘어두워지겠다’는 말은 앞으로의 방향 또는 결의까지 담고 있다. ‘어두워진다는 것’의 의미는 동명의 시도 있지만 이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의 자서가 가장 명확한 설명을 담고 있다.

 

 

 

 

양립되어 보이는 두 성질이 사실은 상관 관계이자 본질을 더 밝혀주는 역할이라는 뜻을 전한다. 삶 속에 깃든 명암(明暗)과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집중하며 암전(暗電)을 읽어내겠다는 시인의 방식과 의지는 분열된 자기모멸로 향하지 않고, 쉽사리 초월로 향하지도 않으며, 시간의 흐름처럼 엄격하다. 계절의 순환, 생로병사, 희로애락 속에 있으면서 그 흐름을 단단히 의식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이렇게 한데 묶으면 그래서 슬픈지 모르겠다. 상처 아닌 것이 없으니 神도 들킬 것만 같다.

 

 

 

 

 

 

 

 

 

 

 

 

 

 

이 세계는 "이만하면 세상을 다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小滿」) 있고, "제 빛남의 무게 만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고 있던 별들"(「일곱 살 때의 독서」)도 있으며, "검은 빛으로 빨아들인 몇 개의 풍경"(「음계와 계단」)으로 음을 울리는 피아노도 있어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지만 참 알 수 없"(「흔적」)는 것 투성이라 나의 찢김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다. 봄도 겨울도 아닌, 행복도 불행도 분간 없이 섞여 있는 것 같은 어지러운 때, 시인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반성의 시간을 마련하는 시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반갑다. "새들은 무슨 힘으로 날아가는지 알 수 없"(「돌로 된 잎사귀」)지만, "흩어지는 잔디씨에도 그림자가 있다"(「그림자」)는 것을 알고,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매보다 더 무거울 것"(「사과밭을 지나며」)이라 보는 시인이라 ‘완성’이나 ‘결말’을 안다고 말하지 않아도 겸손하고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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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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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자기 몸에 대해 뭘 말할 수 있을까. 성인의 뼈대는 총 206개이고 1,000억 개에 달하는 신경 세포를 가지고 있다는 기계적 설명이나 인간 유전자 지도(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에 대해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우리 자신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없이 하고 각종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리종의 아버지는 말한다.

 

「요즘 의사들은 몸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더군. 의사들에게 몸은 아주 단순한 것, 세포들의 조합일 뿐이지. X선 촬영, 초음파 검사, 단층촬영, 피 검사의 대상, 생물학, 유전학, 분자생물학의 연구 대상, 항체를 생성해내는 기관. 결론을 말해줄까? 이 시대의 몸은 분석을 하면 할수록, 겉으로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덜 존재한다는 거야. 노출과 반비례하여 소멸되는 거지. 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 2010년 8월 3일 리종에게 보내는 편지」

 

흔히 일기를 내면의 기록으로 쓰지만 리종의 아버지는 요동치는 정신의 상태를 반추하기보다 몸이 정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외부 환경과 몸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변화를 더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아주 작은 상처에도 신경이 쓰이고 팔이나 다리를 못 쓰게 될 때는 세상의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나이 들어가며 예전 같지 않은 몸의 상태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멸을 곱씹게 된다. 우리의 일기가 그러했듯 리종의 아버지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깊은 혜안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어릴 적 그가 가상의 동생이자 자신의 페르소나 도도를 만들어 불편한 가정에 적응해보려 했던 것처럼 일기도 자신의 삶에 적응해보려는 투쟁의 기록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회생시키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보고자 그를 낳았던 어머니는 가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두 사람을 증오했다. 쌀쌀맞은 어머니에게서 애정을 바랄 수 없었고 죽어가는 아버지에게서 애정과 교육을 받으며 자란 소년은 정신적으로는 조숙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아버지를 흉내 내며 유령 같은 모습으로 살려 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아버지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린 어머니 때문에 그는 거울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유령 고아 행색이었다. 그때 가사도우미로 나타난 비올레트 아줌마가 그의 구원자였다. 비올레트 아줌마와 소년의 이야기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릴 정도로 감동적인 대목이 많다. 몇 번을 울게 만들었는지……. 비올레트 아줌마의 동생 마네스 아저씨와 올케 마르타 아줌마, 그들의 자녀들(티조, 로베르, 마리안)은 소년에게 실제 가족과 같았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비올레트 아줌마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은 그의 트라우마로 오래 남는다. 아줌마의 죽음 뒤 단식투쟁으로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기숙학교로 갈 수 있었고 이후 이 일기에는 어머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고로 실종된 어머니에 대한 기술은 아주 짧게 처리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그는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되었고 거기서 팡슈도 만났다. 죽음이 목전에 있는 전쟁은 우리를 진정 몸으로 있게 만든다.

 

「은밀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신의 건강 문제에 관해 조금이라도 신경 써본 자가 과연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건 정말 한 번 연구해볼 만한 주제다. 동지들 중에서 아픈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거든. 온갖 시련을 다 겪으면서도 말이야. 배고픔, 목마름, 불편함, 불면, 기진맥진, 두려움, 외로움, 감금, 지루함, 상처. 그런데도 몸은 잘 버텨냈다.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어쩌다 이질에 걸리는 것 정도. 냉기를 느끼다가도 수행해야 할 과업을 생각하면 금세 몸이 데워지는 식이었지. 심각할 게 없었다. 우리는 배가 텅 빈 채 잠을 잤고, 발목을 삔 채로 걸었고, 몰골은 추했지만, 병에 걸에 걸리진 않았으니까. 내 관찰이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지는 모로만, 어쨌든 내가 주변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반면 STO(비시 정부에 의한 대독협력 강제 노동국)에 팔려간 청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처럼 쓰러졌다. 노동 재해, 우울증, 전염병, 온갖 종류의 감염, 그곳을 벗어나고픈 자들의 자해 등으로 작업장은 점차 비어갔다. 그 무상의 노동력들은 그들의 몸만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에 건강을 갖다 바친 거지. 반면 우리의 경우엔 정신이 동원된 셈이고. 저항 정신, 애국심, 점령자에 대한 증오, 복수의 욕구, 정쟁에 대한 취향, 정치적 이상, 박애, 해방에 대한 기대, 이름을 어떻게 갖다 붙이든, 그게 무엇이었든, 그건 우리 건강 상태를 좋게 해주었다. 우리 정신은, 전쟁이라는 위대한 몸을 위해 우리 몸을 기꺼이 써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없었던 건 아니지, 각자 자기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평화를 준비했고, 자기 식대로 해방된 프랑스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지만, 레지스탕스는 그 양상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침략자에 대한 투쟁 속에선 언제나 단 하나의 몸일 뿐이었다. 평화가 돌아오자 우리 각자는 그 거대한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금 세포들의 덩어리로, 다시 말해 모순 가득한 존재로 되돌아왔다.

- 21~26세(1945~1960)에 대해 리종에게 남기는 말」

 

그가 비올레트 아줌마에게 배웠던 청각 마취술(부상자를 치료할 때 요란한 소리를 질러 부상자의 정신을 빼놓는 것)을 팡슈에게 가르쳐줘 부상자 치료에 도움을 줬는데, 이 기술은 그의 자녀, 손자, 증손녀 (미친 사람 같았다는 소리까지 들으며ㅎ) 의 가정 치료 요법으로도 자리잡는다. 팡슈의 입김으로 레지스탕스 폭파전문가였던 쉬잔과 23세 생일에 처음 가진 성관계에서 자신이 성불능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계급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심판받는 첫 구직. 24세 발견한 비용종(콧구멍을 가로막고 있는 혹)이 그를 계속 괴롭히게 되는 사연. 25세에 첫 치과 방문과 첫 정장 맞춤. 맞지 않는 여러 교제 끝에 몸과 영혼의 동반자라 할 모나를 만나 27세에 결혼.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그의 생이 이어진다.

 

「난소도 역시 어지럼증의 척도 역할을 하냐고 모나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그런데 모나가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걸 보면서 내 고환은 또다시 조여들었다. 난 그녀 대신에 어지럼증을 느낀 것이다. 불알에도 감정이입이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산책하다 절벽에서 떨어진 어떤 사람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돌 더미 위를 몇 미터 굴러떨어지며 허공 속에서 허우적댔다. 친구들은 겁에 질려 계속 소리를 질러댔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한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자기가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공포도 떠나간 것 같단다. 그는 그 뒤로 평생 동안, 희망을 잃었던 그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그가 목숨을 건진 건 나뭇가지에 걸린 덕분이었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공포도 또다시 되돌아왔다고 한다.

- 28세 4일(1951년 10월 14일 일요일)」

 

불안한 현실과 편안한 잠을 오가며 살듯이 공포와 희망은 우리 인생을 돌리는 양면의 동전이다. 홉스의 고백처럼 ‘두려움은 내 인생의 유일한 열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자신의 과거와 아이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시간도 갖지만, 내면 일기를 쓰든 외면 일기를 쓰든 일기는 결정적인 걸 포착하지 못한다. 그의 일기에는 임신한 아내에 대한 묘사, 첫아이 브뤼노를 만난 순간도 기록되지 않았다. 일기를 쓰며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선택, 자기 역사의 단편을 바라볼 뿐이다. 현실에서는 몸을 둘러싼 끝없는 비교가 벌어진다.

 

「집 앞 공터에서 브뤼노와 걔 또래의 사내아이가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두박근 자랑, 작은 두 팔을 직각으로 굽힌 채 주먹을 쥐고, 이두박근을 팽팽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녀석 다 힘을 주느라 얼굴을 연극배우처럼 찡그리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평생 우리의 몸을 비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단 유년기를 벗어나면 그 방식이 은밀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열다섯 살 때 나도 해변에서 내 또래 남자애들을 상대로 이두박근과 복근 시합을 벌였었다. 열여덟 살인가 스무 살 때는 수영복 아래쪽이 얼마나 불룩한지를 자랑했다. 서른 살, 마흔 살이 되면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비교한다(대머리에겐 불행이다), 쉰 살 때는 배(배가 안 나와야 한다), 예순 살 땐 치아(빠진 게 없어야 한다). 이제 소위 원로라 불리는 늙은 악어들의 모임에선 등, 걸음걸이, 입을 닦는 방식, 일어나는 방식, 외투를 걸치는 방식을 비교한다. 한마디로 나이, 나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아무개가 나보다 훨씬 늙어 보이지, 안 그래?

- 36세 11개월 21일(1960년 10월 1일 토요일)」

 

 

「여럿이 어울려 있을 때 우리 얼굴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메시지는, 그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거기 속하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다. 그걸 교육이나 맹종 혹은 주관 없는 성격 탓으로 돌리는 게 보통이지만ㅡ그게 티조의 가설이었다ㅡ난 거기서 오히려 존재론적 고독에 저항하는 시원적(始原的) 반응을 본다. 본능적으로 유배의 고독을 거부하고, 공동체에 끼어드려는 몸의 반사적인 움직임이랄까. 심지어 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러하다. 공공장소에서ㅡ살롱, 공원, 술집, 복도, 지하철, 엘리베이터ㅡ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놀랍게도 우리 몸의 움직임에선 우선 동조하고 보자는 그 성향이 나타난다. 그럴 때 우리는 기계적으로 찬성하는 새 떼가 된다. 나란히 걸어가며 네, 네, 하고 있는 비둘기 떼와 흡사한 것이다. 티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표면적인 동조가 개인의 주관을 손상시키는 건 결코 아니다. 비판적 사고가 곧 뒤를 따를 테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비판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 부딪치기 이전에 우선 집단에 확실하게 들러붙고자 하고, 우리 몸은 그 본능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 37세 13일(1960년 10월 23일 일요일)」

 

 

「남들 앞에선 억지로 감추는 악취도 혼자 있을 땐 은밀하게 즐긴다. 생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이 이중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요한 속성이다. 테니스 치던 그 여자나 나나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가면 각자 자기 식으로 긴 방귀를 즐길 것이다. 악취의 파동이 이불에 흔적을 남긴 뒤 콧구멍까지 올라오도록 숙련된 기술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 40세 7개월 13일(1964년 5월 23일 토요일)」

 

건강염려증이 생기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병의 이름을 들으며 몸은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가장 힘든 건, 주위 사람들에게 이 피곤함을 감추기 위해 쏟아야 하는 정신적 노력이다. 식구들에게(피곤 때문에 가족도 낯설다) 똑같이 다정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겐(피곤 때문에 이상하게 낯익다) 전문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세상은 원래 무게보다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면 피로 속에 불안이 침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 자신, 무능하고 헛되고 거짓된 내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친 내 의식의 귀에다 대고 불안이 속삭이는 말들이다. 그러면 난 결국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아이들은 날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정한 기질을 가진 아버지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난 운명을 탓하기엔 인생은 매일 바쁘고 책임질 일로 가득하다.

 

 

기억력은 떨어져도 잊히지 않는 마음의 의지처들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마네스 아저씨의 죽음, 13살에 기절놀이로 서로 죽어보는 체험도 하며 같은 성장기를 보낸 똑똑한 친구 에티엔이 치매로 맞는 죽음, 그가 병나지 않게 돌봐줄 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손자 그레구아르의 황망한 죽음, 그보다 어렸지만 어른스러울 때도 많았고 매번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던 티조의 죽음, 그가 백내장 수술까지 하며 말년에 마지막 사회 참여를 하게 만들었던 팡슈의 죽음. ‘함께한다’는 말이 무슨 소린지 너무도 절절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도 지나간다. 그토록 묘사하고 싶었던 내 몸도, 생의 기록도 80세가 넘어보니 그저 피상적으로만 기록했을 뿐이라 깨닫게 된다.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나는 나였을까. 평생 열렬히 사랑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표현하지 못하고 이 일기장으로 딸 리종에게 마음을 전하는 그처럼 우리는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끝까지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이 세계에서 짐 졌고 온통 수수께끼 같던 '자기'라는 정체성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자기’를 너무 무거운 짐으로 지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삶도 죽음도 슬픔도 덜 무거울 것이다. 그렇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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