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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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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북쪽 거실>(2009), <서울의 낮은 언덕들>(2011)에 이어진 삼부작 완결이라고 봐야 할 텐데, '고아 낭송 배우' 모티프가 결국 서울에서 완결이 되었다. 대체로 배수아의 이 작품들을 꿈(환상)의 초대로만 해석하는데 그건 일차원적인 해석이다. 낭송=꿈으로의 초대~ 거참 책 꿈 잘 꿨다? 그걸 바라고 썼겠어? 환상을 문학으로 가져와 그것들이 섞인 곳에서 무엇이 떠오르는지, 그 작업을 들여다보는 게 배수아 작품 독해법이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에서 나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p151
사진은, 본래의 의도나 목적과는 다르게, 유령으로서의 인간을 증명하는 유일하면서도 강한 선언이다, 하고 볼피는 생각했다.
 
 
p182~183
"그러니까 실제 범인도 이십 년 전의 그 범인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범인도 이미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죠. 사실 이런 구상은 조금 전에 사진 전시회에 가서 <신혼여행>이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 거예요. 그래서 아직 구체적으로 스토리를 구축한 건 아닙니다. 책을 쓸 때 나는 머릿속에 동시에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그걸 모두 글로 표현하려고 시도를 해요.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 버전을 갖게 되지요. 그렇게 써놓은 모든 버전을 직접 읽어보고 그중에서 한 가지로 선택을 해요.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이 이야기는 내가 서울에 와서 생각한 최신 버전인 셈이지요."
"아, 그렇군요." 아야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채택되지 않은 이야기는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볼피는 불확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는 거겠죠."
 

 

p188
"대규모 정전도 기억력의 감퇴와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징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욱 정확히 표현하자면 점점 희박해져가는 징후이겠지만." 극장장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무엇이 희박해지고 있단 말인가요?"
"글쎄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 우리를 꿈꾸고 있는 자의 잠이?"
"아케이드 상점의 불빛이 꺼져버렸던 그때 갑자기 생각이 들기를, 나는 당신의 꿈속에 등장한 상상의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나는 이제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나를 꿈꾸고 있는 자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면, 내가 당신 상상의 산물이라면."
"우리가 서로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건배."
 

 

 

§§ 

예술가나 작가들의 비운은 자신이 바로 자신의 내부 고발자라는 데 있다. 다행히 각자 암호를 쓰는 요령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언어라는 암호를 쓴다. 배수아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신, 죽음, 꿈같은 것들과 세계와의 인력을 보여준다. 작가도, 독자도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다. 그건 태초부터 밝혀지지 않은 인류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하려면 이야기는 혼돈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데, 보통의 3차원의 세계만을 인식하며 사는 이들에겐 무리한 이해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꿈이니 환상이니 섣불리 갈무리 짓고 만다.

 

 

갑자기 <그것이 알고 싶다>가 생각났다. 홍천강 괴담과 관련해 치밀히 계획된 살인사건 이야기였다. 10여년 전 한 여인이 홍천강에서 익사한 이후 해마다 유사한 의문의 익사사고가 많아 마을사람들은 여인의 저주로 생각하고 굿까지 지냈다고 한다. 2010년에는 한 부부가 이곳에 와서 아내가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부부에겐 두 딸이 있었다. 첫째딸은 엄마쪽, 둘째딸은 아빠쪽에서 데려온 의붓형제사이다. 첫째딸은 묘한 꿈과 함께 사고에 대한 강한 의혹으로 부검을 요청했다. 부검 결과 익사 사고로 보기 힘든 목주변의 손자국이 결정적 증거로 떠올랐다. 익사로 보이기 위해 누군가 뒤에서 일시에 목을 눌렀다는 주장이다. 그순간 보험금을 노렸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랬다. 사건 정황과 모의실험, 남편의 진술서와 태도, 막대한 사망보험금, 이전의 보험수령사례 등이 남편을 향해 유죄라고 가리켰다. 드라마틱한 이 사건에 대한 구구절절함은 검색을 통해 알아보시고,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작가가 소설로 탄생시키는 크레바스가 이 사건에서도 가장 강력한 지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홍천강 괴담과 익사사고로 위장된 살인사건과의 인력, 우리가 그것을 단순처리할 뻔한 관성에 대해서. 남편의 자백은 없을 것 같고 이 사건의 진실은 어디까지 밝혀질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알려지지 않은 채 수장되었을까 하는 아득함.

 

우리가 불러오고 끌려다니는 많은 일들. 알려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긴 매우 어렵다. 다만 그것들에게서는 왜 죽음의 냄새가 짙은지 미스테리다. 그리고 이 코스모틱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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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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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일이 이렇게 풀려오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한 달간 <범죄의 해부학>을 2번 읽고, 미국 중산층 살인범의 탈옥 이야기 <팔코너>를 읽고, <범인은 바로 뇌다>를 읽고,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기들을 읽고,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멸>에서 오스트리아에서의 나치스 얘기, 로맹 가리와 밀란 쿤데라의 신간에서도 빠지지 않던 살인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보았고, 중간중간 보았던 영화들(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카페 드 플로르, 헝거, 바시르와 왈츠를, 뱅뱅클럽)에서도 온갖 살인과 죄악들을 목격했다. 이 지긋지긋한 범죄와 죽음의 이야기에 질려 하면서도 나는 액셀레이터를 밟듯 <죽음의 집의 기록>이란 제목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우선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고전이자 작가를 원해서였지만 결정적이게도 이 선택은 옳았다. 최근 책 읽으면서 웃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두 번 미친 듯이 웃었으며(목욕탕, 바를라모프와 불낀 이야기)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공감의 미소를 거둘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재밌는 책을 그간 멀리하고 있었던가 곰곰이 짚어 보았다.
 
1.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 자체(대문호 답게 책이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
2. 무시무시한 제목과 표지..... (쾌적한 교양쌓기 일환으로 고전주의 미술이라도 관람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정체불명의 시체로 가득한 인체 해부 관람을 하러 들어가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아우라를 뿜고 있다)
3. 생각의 스트레스를 불러오는 도스토옙스키 다른 작품(가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독서기억
4. 책을 펼쳤을 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라면, 낯선 러시아 지명과 인명에 대한 껄끄러움과 감옥으로 들어가는 시작이 마치 독자가 감옥에 입소하는 듯한 심상에 젖어들게 해, 독서 진입을 울적하게 만든다.
 
작품 내용의 무게를 떠나, 내가 읽었던 도스토옙스키 책 중에 가장 유쾌하고 읽기 쉬운 작품이었다.
19세기 감옥 안 인간 군상들과 그 스토리들이  21세기 현재의 인간들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기막히게 우습기만 했다. 
문체, 플롯, 화자, 캐릭터들의 조합 어느 것 하나 소설의 모범이 되지 않는 게 없다.
이 현실 감옥에 죄수로 존재하고 있는 내 현재의 절망적 무게와 내 발목의 가냘픈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마무리까지, 멋진 작품이었다.

 

ㅡ Agl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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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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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자마자 사놓고 이제야 다 읽었다. 9개월이 걸린 셈이다.... 단편 하나씩 읽을 때마다 아득해졌고 속도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해안가 구불구불한 멋진 길을 드라이브할 때 스릴감과 감탄을 서둘러 끝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또한 인물들의 상황과 마음의 우물들을 들여다보다가 어떤 반대편 출구로 한없이 파고들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 반대편은 막혀 있으면서 뚫려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음?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그것은 거기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거기'가 어디인지, 오로지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몫.
앨리스 먼로와 같은 1931년생이었던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 생각도 스쳤다. 어느 경지에 이른 작가의 글에서 감지되는 침향을.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읽으면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 200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선정 평은 적확하다. 단편마다 나는 반드시 이제껏 보지 못했던 특별한 것들을 발견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하려고 했으나 노벨상 수상으로 어쩌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니 차후 기다려볼 일일까.
소설, 특히나 단편소설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가라타니 고진 얘기까지 구구절절 꺼내고 싶진 않다.
2~3시간의 영화나 즉각적 게임의 시대에서 문득 든 생각, 소설을 읽는 시간만큼이나 깊고 긴 감성의 시대는 점점 아니게 돼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어쩌면 단편소설이 여전히 빛날 수도 있다. 인간의 감수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물론 문장과 플롯, 감성 치중에 길들여진 한국문학판 현실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끝으로, 이 작품집에서 토마스 만 <마의 산>이 두 번 언급되는데, 아마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음 읽을 책이 결정될 지도 모른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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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 닿기를
*(Agalma) 객차 사이 공간에 갇혀 있던 케이트의 경험을 나는 오래오래 상상해 보았다. 이 부분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상당히 밋밋했을 것이다.
 
 
 
 
「아문센
*(Agalma) 이 소설집에서 가장 처음 접한 인상깊은 부분이었는데, 책을 덮고 나서도 이 부분이 가장 깊이 남았고 제일 먼저 다시 읽고 싶어지는 부분이었다.
 
p 82
 앨리스터의 차 앞에 세워진 트럭은 전쟁 전 모델로, 발판이 달려 있고 펜더 가장자리는 녹슬었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철물점에서 나와 트럭에 올라탄다. 엔진이 툴툴거리더니 트럭이 제자리에서 덜컹덜컹 요동치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이제 가게 이름이 적힌 배달 트럭이 그 빈 공간에 들어오려 한다. 공간이 충분치 않다. 운전사가 트럭에서 내려 앨리스터의 차로 걸어오더니 차창을 톡톡 두드린다. 앨리스터가 놀란다 ㅡ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던 중이 아니었다면 그도 문제가 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앨리스터가 차창을 내리자, 남자가 우리에게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고 차를 거기 세운 것인지 묻는다. 그게 아니라면 자리를 좀 비켜줄 수 있겠는지?
 "곧 떠납니다." 내 옆에 앉은,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나 이제 하지 않겠다고 하는 남자 앨리스터가 말한다. "우리는 곧 떠날 겁니다."
 우리. 그가 우리라고 말했다. 잠시 나는 그 단어에 매달린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우리 안에 내가 들어갈 마지막.
 
*(Agalma) 영미 문학권의 훌륭한 작품들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고 앨리스 먼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데, epiphany. 일상적 삶 속에서 주인공 당사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반짝, 하고 빛난다. 제임스 조이스, 포크너, 레이먼드 카버....최근엔 앤드루 포터 작품 등등.
 
 
 
 
 
「메이벌리를 떠나며
*(Agalma) 리아와 레이의 인연. 운명적 인연이란 평생 잊히지 않는 시작점과 마지막 지점이 연결된 굴곡선일 것이다.  
 
 
 
 
 
 「자갈
*(Agalma) 앨리스 먼로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비밀스러운 스릴러가 늘 내재되어 있다는 점인데, 그중에서 이 작품이 가장 아름다웠다.
 
p 134~135
 마음속에서 카로가 블리치를 들어 물속에 집어던지는 모습을, 블리치가 카로의 코트에 매달리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카로는 몇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물로 달려든다. 뛰어간다, 뛰어오른다, 어느 순간 물속에 몸을 던진다. 하지만 개와 카로가 잇따라 수면에 첨벙 부딪히는 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소리도 큰 소리도. 어쩌면 나는 그때쯤 트레일러를 향해 돌아섰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 꿈을 꿀 때마다 나는 늘 달린다. 꿈속에서 나는 달리지만 트레일러가 아니라 다시 채석장을 향해 달린다. 나는 블리치가 허우적거리는 것을, 카로가 블리치를 구하려고 헤엄치는 것을, 힘껏 헤엄치는 것을 본다. 카로의 옅은 갈색 체크무늬 코트를 보고, 격자무늬 목도리를 보고,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 물에 젖어 끝부분이 짙어진 불그스름한 곱슬머리를 본다. 나는 그저 지켜보면서 행복하게 서 있으면 된다. 어쨌거나 내가 할 일은 없다.
 
 *(Agalma) 이 부분이 이 단편의 클라이막스구나 했는데 마지막 3페이지에서 반전이 또 숨어 있다. 정말 멋진 작품이다.
 
 
 
 
「안식처 
*(Agalma) 마지막 돈 이모부의 상황이 없었다면? ​
「자존심
p 189
 그 말에는 내가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었다. 그래야 어린 시절에 머무르면서 모두를 내 옆에서 지내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는 너무 간단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내 학창 시절은 내가ㅡ내 얼굴이ㅡ어떻게 보이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 가버린 것 같다. 내가 새로운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대끼지 않고도 이곳에서 살아남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이곳에서 용케 버텨낸 것을 나는 승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우리 모두를 다시 초등학교 4학년으로 데려가는 것을 원하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고맙지만 그건 사양하겠다.
p 197
​ 오래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된다고. 선택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모임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장애를 가지고 살았건 그 시기에 이르면 많은 문제들이 상당수 해결된다. 모두의 얼굴이 고통을 경험했다. 당신의 얼굴만이 아니라.
「코리
*(Agalma) 멋진 추리소설. 코리-편지-하워드
「기차
*(Agalma) 잭슨의 떠나는 방식이 이 소설의 모티프. 일리, 벨, 보디 던디라는 이름의 건물에서의 세 밤. 메노파 교회의 어린 소년들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부르는 노랫소리. 시대의 활동사진처럼 흘러가던 인물들의 삶.
 
「호수가 보이는 풍경
*(Agalma) 파킨슨병이었던 앨리스 먼로의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깊은 이해
 
「돌리
p 322​
 그 어떤 거짓말도 결국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p 329
시인의 시에 대해 시인에게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당히.
 
 
​※ 피날레
*(Agalma) 앨리스 먼로가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자전적이지만  때때로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고 밝힌 자전소설​

 

「시선
p 355
내가 다섯 살 때 난데없이 남동생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그것이 내가 늘 바라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나도 몰랐던 생각을 어머니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어머니는 그 생각을 상당히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모두 꾸며낸 것이었지만 반박하기 힘들었다.
*(Agalma) 이​렇게 시작되던 것이 '세이디'로 집중되던 절묘함. 그리고 멋진 피날레.
p 351
​ 그런데도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할 때면, 나는 그날 내가 보았다고 생각한 장면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부자연스러운 시체 분장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고 생각했다. 한때 있던 젖니가 빠지고 새 이가 나도 당신은 젖니가 실제 존재했었다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처럼, 나는 그 일을 그렇게 쉽게 믿었다. 어느 날, 아마 십대였을 때, 마음 속에 어두운 구멍을 간직한 내가 지금의 나는 더이상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까지.
「밤
*(Agalma) 감수성 예민하던 시기의 먼로가 겪은 가정사 비극을 '불면'으로 풀어낸 작품
「목소리들
*(Agalma) 性에 눈 뜬 청소년기 환상의 편린을 잔잔하고 섬세하게 연결해내는 이 문단에 감탄.
p389
얼마나 오래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춥고 어두운 내 침실에서 그들이 나를 살살 흔들어 잠재웠다. 나는 스위치를 켜듯 그들을 불러내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의 목소리는 나와 상관없는 제삼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이 내 가는 허벅지를 축복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나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들 중 몇몇이, 대부분이, 영원히 떠나버렸다.
「디어 라이프
*(Agalma)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인간으로서 '어머니'들을 되돌아본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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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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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p 15

  마지막 구급차가 다 떠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밤늦게 사람들이 모두 잠든 후에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탈의 부모님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분들이 내게 말을 걸었더라면, 나는, 때로 내가 꾸는 꿈속에서의 진실을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꾸는 꿈속에서 잔디 봉지를 구멍에 빠뜨리는 것은 탈이 아니라 나라고.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고. 한 번은 내가 녀석에게 내려가 보라고 부추겼다고.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Agalma) 우리가 꿈(무의식)에서 좋아하는 성질 중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다는 것. 의식 또한 무수히 자기 암시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음에도 부족한 것이다.

 

 

 

「코요테」

p 18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뿐이었다.

 

p34

  "나와 같이 갈래?"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런 초대를 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수영 팀에 있어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팀이라."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그렇구나. 물론 그래야지."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영원히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Agalma) 길들여지지 않는 코요테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 94~95

  "그런데 뭐에 홀려서 우리한테 그런 문제를 내신 거예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가장 큰 방해요인이지요." 그는 스토브에서 주전자를 들어 도자기 포트에다 뜨거운 물을 옮겨 부으며 말했다.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p96~97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도, 보어조차도 그 지점에 도달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음악과 같아요. 재능과 연습은 음악가를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굴드의 열광적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상승으로 가는 아르페지오, 굉음을 향해 가는 크레셴도. "내 말을 이해하겠어요?"

 

p127~129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ㅡ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ㅡ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지경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을 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 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Agalma) 연애조언에서 빠지지 않는 말 중 내가 양 팔뚝을 감싸 안은 채 입술을 삐죽하는 것이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라는 말,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금의 주저라도 있다면 거기서 멈추라고. 실패와 후회를 감당할 마음이 확고할 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 무슨 말을 듣든, 사랑의 교통사고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외출」

p 170~171

  레이철은 맨발로 그 다리의 널판들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좋아했다. 널판은 60센티미터 정도 간격으로 고르게 놓여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쉬웠다. 발을 디디는 곳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러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했다. 한마디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강이뼈가 뚝 하고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점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Agalma)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그 지점, 대책없던 시절. 

 

 

 

「머킨」

p 187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진행성 양쪽 귀 난청으로, 그 말은 태어날 때는 아무 이상이 없거나 한쪽 귀에만 문제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양쪽 귀가 다 안 들리게 된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 애초 태어날 때부터 귀가 다 안 들리던 아이들, 자기들의 청력이 언젠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힘겹다. 그러나 이런 모습, 자기들이 읽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나마 입 밖으로 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p198

  "안돼." 나는 그 아이들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그 녀석이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 녀석에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짓지만 나 역시 그 아이들이 호세의 모습을 보는 게 차마 괴롭다는 것을, 자기들 가운데 최고의 시인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시를 들려줄 수 없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들 마음에 낙담을 안긴다는 것을 안다.

 

*(Agalma)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해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못하게 되었어도 소통은 늘 힘든 일이다. 많은 말이 없이도 따뜻한 소설. 사실 온통 말을 글로 바꿨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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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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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보 속 리듬을 듣듯이 따라가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시냇가의 디딤돌을 건너듯  단상을 거치는 소설이 있고,  돌이 쌓여 성벽이 만들어지는 걸 목격하는 소설도 있다. 백과사전은 소설이 될 수 없지만 소설은 백과사전이 될 수 있다. 이 말의 핵심은 제대로 된 백과사전 같은 소설쓰기란 백과사전이 소설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 백과사전이 소설보다 재밌는 사람에겐 다 난센스 같은 말이다.  더욱 절망적인  술주정,  동냥짓,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소매치기 같은 소설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런가 하면 거울을 보듯 문장을 보는 독자가 있고, 총구를 마주한 듯 느끼는 독자도 있으며, 잃어버린 일기장을 대하듯 하는 독자, 책을 집 삼아 파묻혀사는 중독자도 있다.

 

독자라 할 수 없는 부류도 있다. 독자로 가장하고 정복엔 필연적으로 약탈이 뒤따른다고 행하는 도둑, 독서를 비타민이나 음료수 정도의 소비재로 여기는 상인,  자신의 내·외적 가난함을 가리기에 적합한 저렴한 값의 악세사리로 책을 필요로 하는 속물, 생경한 이국요리나 해외여행처럼 기대심리로 다가가는 관광객, 꿈같은 소리라며 외면으로 대결하는 외골수, 장르국한주의자, 문학사절주의자 등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걸 겪고난 뒤에야 우리는 어른 독자가 되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독자란 사랑에 빠지는 존재다. 몇 시간 혹은 평생. 소설의 효용이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숲속에 도착한 이후처럼 그저 읽을 뿐.

 

다소 장황한 이 이야기를 왜 했나면, 이 소설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끔 만드는 백과사전 같은 소설이라서다.

 

 

 

 

 ㅡ Agalma

 

 

 

 


 

 

 

 

p 10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의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조그만 어휘록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p10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그것이 지닌 순간성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심판도 내릴 수 없었다. 순간적인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지는 해를 받아 오렌짓빛으로 변한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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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강렬하네요. 책에 담긴 작가의 사유만큼..^^

AgalmA 2015-06-09 16:25   좋아요 0 | URL
님 덕분에 조금 고쳤어요. 고마워요ㅜㅜ 종종 체크하는데 오늘도 영락없이....
위의 생각과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는데, 문제는 엉성한 문장들.... 🐧
언제나 지금의 한계를 느껴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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