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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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는『철학사전』(1764)에 '죽음'이란 항목을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한다(국내에 원문 번역으로 출간된 책이 없어서 직접 확인하긴 어려웠다). 백과전서(百科全書) 운동을 도모한 철학자가 그러했다는 것은, 대단히 신중하고 윤리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평범한 삶과 사유 속의 개인이 그런 평형을 유지하긴 힘들다. 우리는 매일매일 많은 것들에 대해 강박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러가지로 치환하고 있지만 그 말들 속엔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오래된 물음이 정확히 담겨 있다.

(p58)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 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 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틈새였다. 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 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 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유료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는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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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볼테르 같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생각한다. (p162)"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는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처럼 느껴졌지만ㅡ청년기를 넘겨버린 인간이라면 누가 감정이입을 안 할 수 있을까ㅡ무게추를 놓치지 않으려는 필립 로스도 느껴졌다.

(p86)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서서 일을 하러 간다.

(p89) 그녀의 그림이 반의 다른 누구의 그림과도 달랐던 것은 단지 스타일이 달라서가 아니라 사물을 느끼고 인식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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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몰입 속에 있는 자에게는 정신도, 이성도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 몰입에는 삶이라고 죽음이라고 말할 대상도, 장소도, 정서도 없다. 삶을 말할 때 우리는 비켜서서 조금 더 비겁해지고, 죽음을 말할 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며 조금 더 비굴해진다. 우리의 감정은 늘 현재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 과거들.

최근 정치들이 가져오는 과거들, 한국영화들이 가져오는 과거들, 소설들이 가져오는 과거들, 말들이 가져오는 과거들이, 겹겹이 죽음을 부르는 것을 보며 나는 자주 생각한다. 문제는 과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끌어들이고 대입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다. 적당한 과거란 없다. 과거를 순리대로 처리 못 해 우리는 삐뚤어진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걸 누가 모르나. 모르는 것보다 너무 빨리 잊어서 과거가 더 빨리 순환되고 있다.

 

(p65~66)  흙을 다 옮기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친척이나 친구들 가운데 나이가 들어 삽질을 할 수 없는 사람은 흙을 몇 줌 집어다 관에 뿌렸다. 그 자신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결국 힘든 노동은 하위와 하위의 네 아들과 그의 두 아들에게 돌아갔다. 여섯 아들은 모두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초반의 다부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흙더미 옆에 서서 한 삽씩 흙을 구덩이로 옮겼다. 몇 분마다 다른 팀과 교대를 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그는 이 일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중략) …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그러나 그들은, 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추려 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이제는 어떤 것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냥 계속해나갈 터였다.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도 묻어버릴 태세였다. 하위는 옆으로 물러나 이마에 땀범벅이 된 채 사촌형제 사이인 젊은 남자 여섯 명이 운동선수처럼 일을 마무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끝이 눈에 보이자 엄청난 속도로 삽질을 하고 있었다. 고래(古來)의 제의를 담당하는 조객이 아니라 용광로에 연료를 퍼 넣는 구식 일꾼들 같았다.  

 

 (p72)  해안에 간 처음 몇 달 동안은 딸과 딸의 자식들이 테러 공격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러나 일단 해안으로 가자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은 사라졌으며, 그 엄청난 참사가 모든 사람의 안정감을 뒤집어버리고 일상생활에 지울 수 없는 불확실성을 끌어들인 이후로 매일 그에게 붙어다니던 느낌, 무의미하게 위험을 무릅쓰며 살아간다는 느낌도 사라졌다. 그는 그저 살아 있기 위해 그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늘 그랬지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종말이 꼭 와야 하는 순간보다 일 분이라도 더 일찍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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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이 정말 거창한 원리, 원칙, 자유 그런 것들일까.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아주 작은 것들, 어느 순간 절실히 필요한 마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심장 가까이 품고 다니던 보석감정 도구들과 루페,

그의 왼쪽 가슴 가까이 심어놓은 제세동기,

그의 딸 낸시가 조건 없이 베푸는 선함,

그가 그림 수업을 시작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원한 다른 사람과의 접촉,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처구니없이, 간단히 짓뭉개기도 한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신 내의 문제다.

(p126)  "뭐든지 견딜 수 있어." 피비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설령 신뢰가 깨져도 말이야. 솔직하게 말만 한다면. 그때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파트너가 되겠지만, 그래도 파트너로 남는 건 가능하단 말이야. 하지만 거짓말……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 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당신처럼 능숙하고 집요하고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상대한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아마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거야. 거짓말이 섹스도 안 하는 가여운 짝의 감정을 고려해 주는 친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지. 자기 거짓말이 미덕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얼간이를 향한 관용의 행동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이건 그냥 이거야. 빌어먹을 거짓말이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빌어먹을 거짓말이란 말이야. 아, 이런 짓을 계속할 필요가 뭐가 있어. 이런 일은 다 너무 잘 알려진 거잖아." 피비는 말했다. "남자는 결혼생활을 이어갈 뜨거운 마음이 식어버렸는데, 그런 뜨거움이 없으면 살 수가 없지. 아내는 실용적이지. 현실적이야. 그래, 뜨거움은 사라졌어. 아내도 나이가 들어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거든. 하지만 아내는 육체적 애정이 있는 걸로 충분해. 그냥 침대에 남편과 함께 있는 거. 아내는 남편을 안고, 남편은 아내를 안고. 육체적 애정, 부드러운 태도, 동지애, 친밀함…… 하지만 남편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남자는 없으면 살 수가 없거든. 그래. 하지만 이봐요, 당신은 이제 진짜로 없이 살게 될 거예요. 많은 것 없이 살게 될 거야. 없이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제대로 알게 될 거야! 아, 제발 나한테서 떠나줘, 제발.

 

§§§§§

늙음과 죽음이 왜 외로움이고 두려움인가. 그 감정은 시간의 당위보다 우리가 잊고 버렸던 것들의 결과다. 왜 뼈 속에 갇혀 떨기만 하는가.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보석처럼 바다처럼 태양처럼 모든 것이 함께 일 텐데. 죽음이 오든 안 오든 사실 아무렇지도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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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내게 보내는 편지로, 여기 남겨둔다.

Nat King Cole - Smile도 잊지마.  

 

 

ㅡAgalma

 

(p81~82)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비참하게 실망할 수 있는지 알고는 깜짝 놀랐다. 사실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두 아들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들은 계속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전무후무한 일인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모로 보나 최고인 자식이 있다니. 때로는 낸시를 제외한 모든 게 실수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딸 걱정을 했다. 지금도 여자 옷 가게를 지날 때면 늘 딸이 떠올라 안에 들어가 딸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어딘가에서는 선한 것이 생길 수밖에 없어. 바로 그애에게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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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1-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짧고 강렬한...
문제는 과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끌어들이고
대입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라는 글에 동의합니다...

AgalmA 2015-01-05 23:03   좋아요 0 | URL
공감 말씀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게도 과거가 정말 큰 문제인데요. 잘 아시겠지만 순간이 지나버리면 이 하나로 모일 것 같던 생각들이 모두 파편화되어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정말 끔찍하고 절망스럽게요. 그래서 이 글도 얼개만 대충 잡은 정도지 설득력까진 담보하고 있진 못하죠.
저는 여전히 우주 속을 유영하고 있는데요. 입자들이 서로의 중력으로 합병되어 하나의 행성으로 커져가는 광경을 보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건데! 하며 탄식하는 와중입니다.
이 책과 우주를 함께 보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인간이 자식을 낳는 건 종족 보존이라는 시니컬한 생물학적 논점보다 입자들이 모여 서로 합병되었다가 떨어져 나가면서도 서로를 돌며 우주를 구성해가듯 그런 것이겠구나...하는 것. 그 속에서 필연적인 진리를 찾겠다고 하는 우리의 인식과 행동들이 오히려 우연들을 더 만들어내는 작동기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

올해 마지막 날, 제가 이 글을 쓰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말하고 사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제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그렇다고 설마 축하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니죠? (그런데, 나는 어딘가 불편하다. 뜬금없이 경어체를 쓰고 있다. 프로이트의 실언 분석들을 참고해 주세요).

먼저 이 글은 로쟈님 <자네트가 아픈 날>(http://blog.aladin.co.kr/mramor/7310515) 때문이라는 걸 밝힙니다. 로쟈님은 그 글의 시작이 '자네트'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에서 촉발되었다고 말합니다. 전달받은 '박상순 시인' 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분명 뭔가를 봤습니다.

언젠가 어떤 후보가 "미래는 이미 와있습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윌리엄 깁슨『뉴로맨서』)를 인용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전 그 책을 아직 못 봐서 더 짜임새 있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미리 사과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이 뭔가 있을 거 같은 말을 하면서 저는 정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뭔가 팔기 위해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주섬주섬, 부스럭부스럭, 팔라락팔라락.....프로이트의 병리학 임상실험 또 나오게 생겼군. 끙)

아, (서랍을 닫으며) 그렇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있었습니다. 단지 널리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죠. 언제나 말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말입니다. 오래 전부터 말해진 말. 변형되는 말. 전달되고 버려지는 말.

미래, 우리가 그토록 떠들지만 나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詩'. 나타나도 깨닫기 전엔 모르는 '詩'. 이미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아서 '미래'라고 성급히 말했던 '詩'. 언제나 무엇이 와있다고 말하는 '詩'.

한국에서 지금 미래파로 지칭하는 詩는 1996년에도 이미 와 있었습니다. 그때의 박상순은 참 외로운 위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상순이 쓰던 '항아리'는 이제 '서랍'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마라나' 보다는 이제 '시코쿠'라는 이름이 더 선호됩니다. 우리는 왜 더 새로운! 더 세련된! 이름들이 이토록 많이 필요한 걸까요. 뭐, 늘 그런 식이잖아요. 코 시큰해할 필요 없어요. 지나치게 지나칩시다!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을 다시 펼쳐며 이미 와 있는 걸 깨웁니다. 2015년엔 또 뭐가 오려나 저는 모르고서 기다립니다. 우리가 외롭고 시끄러운 건 이미 와 있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지 마요. 마라나.

 

 

ㅡ Agalma

 

 

 

  박상순「소녀를 만나다, 스탬프를 찍다」

 

 

  1

  …(생략)…

 

 

   2

   …(생략)…

 

   3

  나는 다시 편지를 썼다

  우체통을 찾아갔다

  우체통은 내게 챙이 긴 모자 끈이 긴 가방을 선물했다

  나는 우체부가 되었다

  밤의 우체국에서 흰 줄과 검은 줄의 스탬프를 찍었다

  손바닥에 찍었다

  내 손바닥에

  밤의 스탬프를 찍었다

 

  손바닥에 흐르는 강물

  물 위로 떠나는 조각난 스탬프의 줄무의

  흘러가는 스탬프의 잉크

  나는 그 거대한 강물 위에

  못을 박았다

 

  손바닥에 못을 박았다

 

  편지 쓰지 않기, 구멍 내지 않기, 뚜껑을 열지 않기, 팔을 뽑지 않기, 내장을 꺼내지 않기, 고양이 수염을 자르지 않기, 스탬프를 찍지 않기, 머리에 바퀴 달지 않기, 두 귀에 불지르지 않기, 가위로 목자르지 않기, 기차 타지 않기, 빵 먹지 않기, 못박지 않기, 빈 욕조에 들어앉지 않기, 피 뽑지 않기, 물통을 쓰지 않기, 굴뚝에 올라가지 않기, 항아리를 깨지 않기, 가로수를 먹지 않기……

 

  구멍 난 손바닥을 들고 소리쳤지만

  소녀는 오지 않았다

 

  검은 머리, 흰 얼굴, 검은 눈, 검은 입술

  흰 줄과 검은 줄이 가로로 이어지며

  만들어진 소녀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박상순「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1년 뒤」

 

 

 

 겨울, 기차는 나를 싣고 뚱뚱한 어둠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발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두 귀를 꼬옥 막고 나는, 몸 속으로 울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놓여 있었습니다. 겨울. 그 곳이 물 속이라면 비단옷에 지느러미를 단 내 어머니가 흘러가고 있겠지요. 내 동무들도 퉁퉁 불어 흘러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나도 퉁퉁 불은 소년, 한 소년이 될 수 있었겠지요. 흘러간 어머니를, 흘러간 내 동무들을 김 서린 차창을 통해서라도 알아볼 수 있겠지요. 만나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겨울. 내 몸 속의 겨울.

 

 그곳이 물 속이라면 흘러가는 내 목소리도 들리겠지요. 하지만 오늘 나는 아버지를 만나서 고백해야 합니다. 강변의 어머니를, 강변의 동무들을 내가 몽땅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 기차에 깔린 아버지의 식은 얼굴을 향해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겨울. 겨울. 기차는 나를 싣고 멈춰 있을 겁니다. 나는 아직도 내 목소리를, 내 두 손을 찾지 못한 채 기관실에 이렇게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박상순 「불멸」

 

 

 

    새벽 다섯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밥먹는 놀이를 한다

 

    아빠 A가 한 개 먹고

    내 폭탄은 아직 안 터졌어

    아빠 B가 한 개 더 먹고

    내 밥도 아직 안 터졌어

    아빠 C가 또 먹으며

    내 밥도 폭탄이야

    아빠 D도 아빠 E도

    내 폭탄도, 내 폭탄도

 

    새벽 다섯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폭탄 먹는 놀이를 한다

    아빠 A가 먹는 것이

    하나 터져

    배가 펑 늘어나고

    아빠 B도 하나 터져

    등뼈가 펑 솟아나고

    아빠 C도, 아빠 D도

    하나씩 펑, 하나씩 펑

 

    아빠 E는

    그 중 하나도 터지지 않아

    한 개 더 줘, 한 개 더 줘

 

    우리 것도 터졌으니

    그만 자자, 그만 자자

    A, B, C, D 모두 누워

    아빠 잘 자, 아빠 잘 자

    아빠 E는 밤새도록

    내 폭탄은 왜 안 터져

    아빠!

    아빠!

    아빠!

 

 

 

 

   박상순「고독의 이미지」

 

 

 

금요일엔 갈 거예요. 시를 썼어요. 제목이 사막의 초록색 눈물이에요. 다 쓰게 되면 그렇게 할 거예요. 매일 열 시간씩 공부를 해요. 일곱 살 떄에도 그랬어요. 부모님은 몹시 걱정했어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시월부터 옛 소르본에서 강의를 해요. 삼 개월 되었어요. 서울에 온 지. 미국에도 갔었어요. 프랑스어를 가르쳤어요. 대학에서요. 노래방에 가볼래요. 당신이 그리워질 때라는 드라마 주제곡을 잘 부를 수 있어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인연이에요. 사막에 가보았어요. 아주 넓은, 아니 광막한, 미국에서요. 나는 몇번쯤은 밤새워 울었어요. 당신도 그렇지요. 인연이에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당신이 본 것처럼 그래요. 영화처럼 그래요. 사막에서는. 태양의 빨간색이 초록색, 초록색 그리움을 낳아요 사막에서는. 나는 쪼끔, 아주 쪼끔 눈물 흘리다 금요일엔 갈 거에요. 금요일에는.

 

목욕탕에 갈 거에요. 금요일에는.

 

 

 

 

 

 

  황병승 「서랍」


 


  나는 지금부터 서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관심이 없거나 혹은 까맣게 잊고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서랍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침착함이 마음에 든다.


  서랍은 바로 지난주 금요일이다
  나는 서랍을 열었고 흰 종이를 꺼내었다
  흰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쥐, 계단을 뛰어오른다……그저 놀랍다!


  그렇다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이며 또한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나는 서랍 속에서 검은 종이를 집어들었다
  검은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나의 방심을 미끄러뜨려다오……제발 달아나는 흰 스타킹아
  고백하건대, 나는 서랍을 닫으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이며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결국 소란스런 밤의 장르인 것이다


  나는 다시 서랍을 열었고 흰 종이를 꺼내었다
  흰 종이의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계단을 처음 만든 작자는 누구인가 어쨌든 쥐는 아니다 나는 밝다


  나는 흰 종이를 집어넣고 이번에는 서랍 속에서 검은 종이를 다시 꺼내었다
  검은 종이의 뒷면에는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오래전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은 나의 머리칼을 격렬한 갈등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의 항복……백기들……처참하다
  나는 모든 면에서 느리고 그러나 시간을 재며 흰 뱀은 재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그날은 평범한 금요일이었고 계단에 한쪽 발을 올려놓는 순간이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발기하였다. 분명한 것은
  흰 뱀이 나를 지나고 있구나! 그것이 머리 위를 꾸물꾸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한꺼번에 늙고 저 계단을 뛰어오르는 쥐!
  지난주 금요일 결국 집 앞에서 흰 스타킹을 놀래키고 말았다


  읽고서, 나는 그만 검은 종이를 구겨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만 않았다 검은 종이를 서랍 속에 던져 넣고 시끄럽게 닫았을 뿐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새 종이를 꺼내었다 그리고 적었다


  호두보다 느리게 걷는 자들을 나는 경멸한다 

 


  서랍을 열고 새 종이를 넣었다 새 종이는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나를 뜻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서랍은 소란스런 밤의 한 장르이고 또한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그렇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 오후까지는 당신의 것이었다
  나는 서랍 속에서 붉은 종이를 다시 꺼내어 뒷면에 이렇게 첨가했다


  나는 서랍을 많이 가지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당신의 것이다 당신은 호두고 당신은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서랍의 수만큼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쓰고 나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는 새 종이를 던져 넣고 서랍을 닫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헝클어질 입술들, 내 입술은 붉은색이다.


  서랍을 잠그자 하나의 서랍이 새로 열리는, 오늘은 화요일


  나는 서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지루해하거나 혹은 까맣게 잊고 있어서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서랍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미소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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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미래파 시를 읽으면 항상 옥타비오 빠스가 생각납니다.

AgalmA 2014-12-31 19:52   좋아요 0 | URL
전 옥타비오씨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요. <활과 리라>가 니체 <비극의 탄생>분위기였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20:47   좋아요 0 | URL
시어 불, 도마뱀, 이런 거 옥타비오 씨 전매특허 시어 아닙니까. 오타비오 빠스 책이 출간이 잘 안되는 게 좀 아쉽습니다.

AgalmA 2014-12-31 20:51   좋아요 0 | URL
저 시 서랍에는 온갖 게 다 있지요. 저는 하루키도 보이는데요.
앙리 미쇼의 변변한 번역물이 없는 건 더 충격이에요.
 

 

 

 

 

 

 

 

 

 

 

 

 

 

 

 

 

#

두 시인 다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이준규 시인은 이승훈 시인의 산문 정서에, 이제니 시인은 오규원 시인의 운문 정서에 더 가깝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 즉 선대의 시인들은 죽은 문장을 원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후대 시인들은 시적 사디즘 세대? 시적 네크로필리아 세대인가. 너무 비약하지 않도록 하자. 살아있는 동안 내 인내심은 리필 가능하니까.

이준규, 이제니 시인과 연계해 함기석, 이수명 등 기타 혐의점이 보이는 시인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전자 시인들의 공통분모가 워낙 강해서 맥락이 많이 달라진다. 미래파 시풍보다는 확실히 이쪽의 사유 개진이 더 불온한데 관심을 안 가지는군. 미래파의 확장세가 사그러드는 것을 보고 어차피 다 한때의 시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들이여, 더 치명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기를. 이 흐름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산될지, 과연 이 접전에서 무엇이 살아남을지 궁금하다. 이제니 시인의 변모된 등장은 새 구원투수의 등장 같다고나 할까. 소설쪽 황정은 작가의 등장처럼 흥미로운 일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들의 공통된 화두가 '사라짐'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들은 언어를, 문장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한다(더불어 나도 사라지면 더 좋고!)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실험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모리스 블랑쇼다.

어쨌거나 내가 논문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비교들도 다 무의미하다. 그들이 그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사라지겠다는 사람의 뒤를 캐고 싶진 않다. 그 성취가 어찌 될 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독자들도 자기 취향이 아니면 덮어버리면 끝인 세계 아닌가. 풍경화를 감상하듯, 가구를 갈아치우듯. 유홍준의 우리시 경계터답사기가 필요한지도.

에잇, 커피나 마시자. (커피를 마시다 문득), 두 시인이 함께 있는 시집이 있다면 아주 독특할 거 같다는 생각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낸 「냉정과 열정 사이」같은 거 말이다. 시(詩)니까 시도(試圖)가 더욱 어울리지 않겠는가! 번역은 안 할테니 더욱 간편하다.

 

ㅡAgalma

 

 

 

   이준규「겨울」

 

  …(생략)… 담배를 피우며 세상을 바라본다. 귀신과 참새의 무게는 같다, 라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간다. 귀신과 남천의 무게는 같다. 귀신과 딱새의 무게는 같다. 귀신과 테니스공의 무게는 같다. 귀신의 무게는 모든 것의 무게와 같다. 그는 빵가게의 진열창을 현기증 속에서 본다. 귀신과 에그 타르트의 무게도 같다. 겨울이다. 그는 집에 있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차단된 겨울의 실내에 앉아 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본다. 노란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진 은행나무가 있고 그 은행나무 아래에는 …(후략)…

  

 

  이제니 「달과 부엉이」

 

  달과 부엉이는 가깝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모자와 사과는 가깝다. 꽃과 재는 가깝다. 모래와 죽음은 가깝다. 나무와 열매는 가깝다. 수풀과 슬픔은 가깝다. 눈물과 바람은 가깝다. 구름과 어둠은 가깝다.

 

  밤의 부엉이는 날아오른다

  멀어지는 달을 보는 부엉이의 눈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은색

  한순간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수풀

 

  …(후략)…

 

 

 

 

  이준규「겨울」

 

  …(생략)…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 너의 눈꺼풀을 적신다. 차갑게. 뜨겁게. 눈이 내린다. 눈은 오지 않는다. 겨울. 너의 눈은 송어다, 라는 문장을 읽다. 겨울이다. 혼신을 다한 겨울이다. 다른 배열을 필요로 하는 계절이다. 겨울엔, 필요없는 문장을 태우고 겨울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헐벗고 죽은 문장으로 가야 한다. 겨울이다. 어지럽게 얼어붙은 겨울이다. 새가 날면, 가지는 흔들린다. 새가 날아와 앉아도 가지는 흔들린다. 그때는, 가지 위의 새는 줄 위의 광대 같다. 겨울의 줄 위의 광대라는 이미지. 집중된 이미지가 필요했다. …(후략)…

 

 

  이제니 「가지와 앵무」

 

   가지가 있다

   가지가 하나 있다

 

   하나의 가지 뒤에 또 다른 가지 하나가

   또 다른 가지 뒤에는 앵무가 하나 온다

 

   앵무가 날아온다 날아와서 앉는다

   가지 위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가지 위에

 

   가지 위에 앵무 하나

   가지 위에 앵무 둘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 이곳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두 발을 얹고서

 

   추위도 더위도 얼음도 눈물도

   이 가지 위에서는 모두 똑같다

 

   가지 위에 빨강 하나

   가지 위에 빨강 둘

 

   마중인지 배웅인지 모를 얼굴로

   앵무는 가지를 가지를 흔든다

 

   나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무 뜻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지 위에 얼굴 하나

   가지 위에 얼굴 둘

 

   누군가 손가락을 들어 나무를 가리킨다

'  무수한 가지들 위에는 무수한 앵무들이

 

 

 

 

  이준규「너」

 

  …(생략)… 너는 이제 새로운 잠으로 들어간 너를 바라보며 하나의 불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너는 바람인가, 너는 흐르는 잔광인가, 너는 그림자인가, 너는 그늘인가, 너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봄날의 이파리인가, 너는 무엇이냐, 너는 어지러운 과잉일 뿐이고, 너는 아무리 슬퍼해도 소용없는 그것일 뿐이다, 너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너는 전적으로 무용하다, 너는 무용의 쾌락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사용했을 뿐인데, 그 사용도 적절하지 못했고, 철저하지 못했다, 어디에 적절함이 있고, 어디에 철저함이 있겠는가, 다시 말해 너는 아무 형식도 없었다, 너는 너 자신에게도 겁을 내는 탁월한 겁쟁이이어서, 너는 아무런 곳으로도 가지 않았다, 네가 달아날 곳이 있느냐, 불쌍한 자여, 너의 노출엔 아무 모습이 없다, 너는 쓰는 기계일 뿐이며, 그것도 잘못된 기계일 뿐이다, 네가 낭비한 삶을 너는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느냐, 너는 진짜 실패이고, 진짜 헛발이다, 너에겐 영혼이 없다, 너는 죽음을 향해 다가갈 뿐이다, 너는 너의 잠을 엿보는가, 너는 누구인가, 그런데, 너는 누구인가, 너는 너의 이마인가, 너는 너의 비듬인가, 너는 너의 눈물인가, 너는 너의 콧물인가, 너는 너의 정액인가, 너는 너의 똥인가, 너는 흐른다, 너는 마른다, 너는 증발한다, 너는 사라진다, 너는 없어진다.

 

 

  이제니 「그곳에서 그곳으로」

 

   후회하지 않기로 하면서 후회한다. 눈 어두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서. 다시 보면서. 나무가 있고. 거리가 있고. 벤치가 있고. 공허가 있고. 어둠이 있고. 고요가 있고.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들판이 있고. 묘비가 있고. 꽃이 있고. 시가 있고. 눈물이 있고. 네가 있고.

  …(중략)…

   이해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해한다. 가지 못한 그곳으로 가면서. 그곳으로 다시 가면서.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고. 강물이 있고. 잿빛이 있고. 희망이 있고. 한낮이 있고. 침묵이 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다시 네가 있고.

 

 

 

 

 

  이준규「문장과 슬픔」

 

  그는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옮겨쓴다. 그는 하나의 새소리를 듣는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멈춘다. 그는 펜을 떨어뜨린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펜을 줍는다. 그는 비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는 창밖을 본다. 숲은 매미 소리로 꽉 찬다. 그때 비가 쏟아진다. 그는 다시 책상 앞의 의자에 앉는다. 그는 하나의 둘의 셋의 넷의 새소리를 듣고 무수한 무한이라고 감각되는 무수한 무수하지는 않지만 무수한이라고 말하는 아니 그저 많은, 이라고 말해야 하는 그래야 하는 매미들의 소리를 듣는다. 매미들은 날개를 이용해 저 소리를 내는 것인가.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비교적 바른 자세로 앉아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 문장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 문장의 형식 때문이 아니다. 그 문장을 이루는 언어의 모양 때문이 아니다. 그는 문장을 읽으면 슬퍼질 뿐이다. 세상의 모든 문장은 그것이 문장일 때 슬프다. 그는 다시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다시 하나의 문장을 베낀다. 그는 다시 해가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지 어떤 하나의 문장을 쓸 것인지 망설인다. 그는 울 수 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정면을 본다. 정면에는 그가 있다. 어두운 얼굴. 치통을 앓는 소녀의 얼굴. 늙은 소녀. 갑자기.

 

 

  이제니 「나선의 감각 ㅡ 목소리의 여행

 

  이것은 흐릿한 목소리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공간 속에서 솟아오르는. 더없이 날렵한 선분들. 회오리치는 빛의 뿔. 뒤섞이며 자리를 바꾸는 문장들. 등장인물은 여럿이다. 장면은 파열한다. 거울은 어둡다. 먼지는 흩날린다. 그림자는 무모하다. 천은 부드럽다. 하늘은 흔들린다. 나무는 아름답다. 의자는 낡아간다. 의지는 단호하다. 거리는 길어진다. 상상은 끝이 없다. 시간은 저항한다. 구름은 증발한다. 기억은 모호하다. 손가락은 명료하다. 열매는 익어간다. 말은 줄어든다. 나는 이동한다. 너는 사라진다. 이것은 회전하고 이것은 끝없이 모양을 바꾼다. 공간은 확장된다. 속도는 증가한다. 너는 낡고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 나서는 순간부터 네 자신의 죽음과 동행한다. 어둠은 짙어진다. 목소리는 가까워진다. 너는 전진한다. 너는 비약한다. 너는 비상한다. 너는 휘돌아나간다. 몇 겹의 눈동자. 몇 겹의 동심원. 몇 겹의 그림자. 몇 겹의 목소리. 무수한 겹과 겹을 통과하여. 시간과 거울과 얼음과 물음을 두 손에 쥐고. 날아갈 수 있는 한 높이높이. 나뭇가지들이 자라나듯이. 넝쿨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듯이. 끊이지 않는 노래들처럼. 뒤돌아보지 않는 마음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되어. 순간을 잊는 방식으로 순간을 살아가듯. 더없이 검은 말을 따라. 한없이 희미한 걸음으로. 방향 없는 방향을 향해. 기억을 버리듯 기억을 되살리며. 위로 위로 마음의 위로. 휘날리는 깃발처럼. 흔들리는 눈길처럼. 달려나가는 속도를 넘어. 사라지듯이 다만 사라지듯이. 목소리는 떠돈다. 창문은 열린다. 심장은 뛴다. 담은 허물어진다. 골목은 발견된다. 낱말은 교환된다. 일요일은 반복된다. 사물은 암시한다. 회상은 이어진다. 울음은 진동한다. 이미지는 증식한다. 회전하면서. 멀어지면서. 너는 이동한다. 나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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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0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4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9-15 20: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제니 시인과 이준규 시인은 등장했을 때부터 눈여겨 본 시인였는데, 두 사람이 ‘루‘ 동인 활동하며 이제니 시인이 이준규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초기 시와 많이 달라졌죠.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로 이준규 시인이 큰 타격을 받았죠. 여성에 대한 대상화, 부정성 등 그의 시에서 느껴지지 않던 건 아니었지만 가시화되어 나타나니 좋은 소리 해주고픈 맘이 안 나요. 작가와 작품을 따로 볼 수 있는 창작 스타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더라도 그의 시는 계속 읽고 있습니다. 언제 시집이 또 나올지 모르지만 나온다면 읽을 생각이고요.
현재로선 이들에 대해 글을 쓸 여유는 없습니다. 갈 길이 너무나 많고 멀어서요.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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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시적 구동이 중첩될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글쓰는 자의 굴레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중첩의 괘(卦)를 만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기쁘지 않고 슬픈 것일까.

 

 

 

「기린이 그린」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림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그린 속의 기린은 구름이 될 수 있다

그림 속의 구름은 기린이 될 수 있다

 

 

「나무의 나무」

나무의 나무는 곧고 나무의 나무는 휘어진다

나무의 나무는 어둡고 나무의 나무는 혼자다

 

 

「분실된 기록」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거실의 모든 것」

 …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개가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어떤 것 안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

이 무수한 교체와 해체 속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매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방식은 매초마다 우리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나또한 충분히, 모든 것을 생각한 사람도 아니다.

어쨌든 시인의 뜻이므로 이렇게 시를 구동하는 것에 동의는 한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문장도 의미도 아닌 음절, 음소로까지 나뉘어져 급기야 음(리듬)만 남는다. 오로지 시인의 숨결만이 남는 셈이다. 그것은 시인의 선명한 의지였을 것이다.

시가 어떤 정언(定言)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무수한 리듬들이 그저 떠돌기만 하고(시인의 뜻이 그렇더라도) 어떤 음악으로도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이것은 인간인 내 욕심이다.

시 속의 보이지 않는 무수한 빗금들과 재들을 보며, 나는 그 在들이 이미 죽어있는 것들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고, 그 무수하고도 협소한 일상적 재들을 후 불어버리고 독자적인 재들을 가져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 형식을 완성시켜 줄 재들을. 그리고 소용돌이쳐 날아올라 정말 무한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욕심이고 요구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이른 바 논리적인 명제들은 언어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주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말을 떠올려보며, 이준규 시인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네모』시집과 이 시집을 비교해보고도 싶지만 능력되는 평론가에게 일임한다.

 

ㅡAgalma 

 

 

내가 당신에게 화답할 시는 바로 당신의 시입니다. 당신의 기다림들을 재로 만들지 말아요.

 

 

 

 

 

 

 

「초다면체의 시간」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거나 이제 막 끝났는지도 모른다. 이제 막 가슴에 매단 작고 빛나는 훈장 혹은 누군가의 마지막 유품처럼. 언젠가 너는 내게 편지했다. 겨울에는 나에게로 여행 오세요. 이를테면 이런 여행.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는 사막 위를 낡은 캐딜락을 타고 홀로 달려가는. 지평 저 너머로 희미한 모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가는. 사막에는 사막밖에 없지. 나에게는 나 자신밖에 없듯이. 내 성질에 맞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미치도록 살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말하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구원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갈망하고, 시시한 일을 떠벌리거나 말하지 않고, 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황금빛 양초처럼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길 위에 나란히 서서 잭 케루악을 읽었지. 너는 아주 어릴 적부터 기타리스트가 되기를 은밀히 소망해왔다. 하지만 기타리스트가 되기엔 네 손가락은 너무 작고 어두웠다. 너는 남몰래 탁자 밑에서 강박적으로 손가락을 늘리곤 했었지. 너는 불운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다만 조금 자주 울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들판 위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춤을 추는 야윈 몸의 요기가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우리의 팔과 다리가 부드럽게 휘저어놓은 공기의 입자를 느낀다. 어제저녁 나는 팔차원 초다면체를 아홉 개나 찾아냈어요. 그것들은 속이 빈 채로 서로 맞물려 있었죠. 나는 콕세터라는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우리들은 마치 만화경 속의 풍경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며, 무한히 흔들린다. 달린다. 날아오른다. 내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유리잔 바닥을 떠도는 녹차 찌꺼기. 내겐 언제나 사소한 것에 쉽게 감동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우리는 한배에서 태어난 두 개의 머리 같구나. 그리고. 그러나. 어느 날 무언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순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입을 다문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죽어 있었다. 빛이 사라진다. 어떤 빛이. 어떤 빛이 어둠 곁으로. 어둠 뒤로. 사라진다. 나 혹은 너는 검은 색 혹은 흰색이 된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망설였던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너에게 여행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나.

 

 

*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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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과 겉>은 20대 초반였던 까뮈(1935~1936)의 첫 출판물이자 그의 평생의 지표들이 묘비명처럼 여기저기 박혀 있다. 그가 이 책의 재판을 왜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가 표현하고 싶은 본질들이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한낮의 태양빛 속에서가 아니라 심연의 저녁 그늘 속에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고액으로 거래되는 초판을 보고 독자들을 위해 개정판에 동의했다고.

개정판에 이처럼 확고한 [서문]을 달아놓은 것은 일종의 (할喝) 장치였으리라. 독자의 동조심리를 막고, 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이 책을 보라는.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매일 자기 전에 읽는다면 그 날의 삶이 정리될 것 같다. 천국과 고독을 하나로 묶는 그 의지와 열정을 생각하며 말이다.

 

 

 

[서문]
p25  극장의 객석......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서로 결합시켜주는 것이다.

 

 

[아이러니]

p38  젊은이는, 그가 여태껏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참담한 불행ㅡ영화관에 가기 위하여 버려두어야 하는 늙은 불구 여인의 불행ㅡ앞에 놓인 자기의 처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떠 빠져나가고 싶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손을 뽑으려고 했다. 한순간 그에게는 노파에 대한 잔인한 증오심이 일어나 그녀의 뺨을 힘껏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긍정과 부정의 사이]

p54  가난 속에는 어떤 고독이 있다.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고독이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하늘도, 별이 가득 찬 밤도 예사로운 자연의 재화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하류 계층에선 하늘이 본래의 모든 의의를 되찾아 가지게 된다. 즉 그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인 것이다.

 

p63  "따지고 보면 그편이 차라리 나았지. 소경 아니면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테니. 그랬더라면 그 가엾은 사람은……." "하긴 그렇군요." 사실 이 방안에 그를 붙잡아두는 것은 언제나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확신,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이 이 방안에 깃들여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영혼 속의 죽음]

p74  방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푸른 칠을 한 커다란 벽만이 보였다. 앞서 말한 침침한 광선이 그 스크린 위에다 침대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의 그림자와 시체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관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 빛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 빛이야말로 진실한 빛, 삶의 진정한 빛, 기울어가는 삶의 진정한 빛,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삶에의 사랑]

p87~89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우리말로 인쇄된 신문 한 장, 저녁 때 우리가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쳐보기를 원하는 곳, 그런 것들 덕분에 우리는 제 고장에서 자기였던ㅡ 그러나 먼 곳에 갖다 놓으면 그렇게도 낯설어 보이는ㅡ 그 사람의 낯익은 몸짓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ㅡ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일까지 꾸며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져버린 채 (전차의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앓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다가 그 기적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는 여자, 커튼 뒤로 보이는 테이블 위의 술병ㅡ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요약되는 만큼 삶은 거기에 송두리째 반영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자연이 내려준 이 모든 산물에 민감해진 나머지 우리가 맛볼 수 있는(명철의 도취감에 이르기까지) 모순된 도취감들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인가. 아마 지중해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어느 나라도 나를 이렇게까지 나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시켜준 일은 없을 것이다.

 

p91  나는 왜 그때 내가 도리아식으로 새겨진 아폴론의 시선 없는 눈, 또는 지오토가 그린 불타는 듯 응결된 인물들을 생각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스 조각의 퇴폐와 이탈리아 예술의 해체가 시작된 것은 미소와 시선이 미술 속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마치 정신이 시작하는 곳에서 아름다움은 끝난다는 듯이.) 그러한 순간에 나는 그러한 나라들이 나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삶의 확신과 규범을 찾아내고 또한 이성을 만족시키며 낙관주의와 사회적 감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인간의 척도에 맞추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이 나의 질문들에 대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가 나의 질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NADA(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안과 겉]

p99~100  1월의 어느 날 오후가 이렇게 나를 세계의 이면과 대면시켜준다. 그러나 싸늘한 기운이 대기 속에 남아 있다. 도처에 덮여 있는 태양의 얇은 막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곧 터져버릴 것만 같지만 그래도 그것이 만물을 영원한 미소로 감싸주고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뭇잎들과 햇빛의 희롱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담배가 타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이 광선이 되어버리고 공기 속에 감도는 이 다사로운 맛과 이 은은한 정열이 되어버리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광선 속에서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맛보려고 애를 쓴다면 그때 우주 저 깊숙한 곳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서 나를 무대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말이다. 

  아까는 인간들과 그들이 사들이는 무덤 같은, 다른 것들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시간이라는 옷감에서 이 한순간을 오려내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은 책갈피 속에 한송이 꽃을 접어 넣어 사랑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어느 산책의 기억을 그 속에 간직한다. 나도 산보를 한다. 그러나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은 하나의 神이다.

 

p101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여름] 수수께끼

내가 관심을 가졌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쓰기도 했던 경험 속에서 부조리는, 설령 그 기억과 감동이 그 후의 내 사고방식에 따라다닌다 할지라도,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지적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차이점은 신중히 고려해서 생각해야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방법론적인 것인 데카르트의 회의가 데카르트를 회의론자로 만들어놓기에 충분하지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은 없다든가 만사에 절망해야 한다는 사상에만 어떻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유물론이란, 그냥 그 말을 성립시키고자만 해도 이 세상에는 물질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만큼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전적인 허무주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사물의 밑창에까지 파고들어가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만한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의미 있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세계에 대하여 일체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가치 판단을 말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산다는 것, 예컨대 영양을 섭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판단이다. 스스로가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는 계속해서 사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리하여 삶의 어떤 가치를, 적어도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절망의 문학이란 결국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절망은 말이 없는 법. 게다가 침묵조차도, 두 눈이 말을 하고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절망은 죽을 때의 고통, 무덤, 혹은 심연이다. 절망이 말을 하고 따지고 특히 글까지 쓰게 되면 즉시 형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나무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랑은 태어난다. 절망한 문학이란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중략)……우리의 허무주의 중에서 가장 암담한 것과 만났을 때도 나는 그 허무주의를 극복할 이유들만을 모색했다. 그것도 무슨 미덕의 소유자라서거나 보기 드문 영혼의 숭고함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태어났고 수천 년 전부터 그 속에서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조차 삶을 찬양하도록 배워온 그 빛에 대한 본능적 충실성 때문에 그건 그랬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도 그는 빛을 발하고 다시금 우리를 따뜻하게 해준다. 그의 세계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메마른 무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 다시 말해서 눈이 부셔서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깡마른 세기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희랍의 못났지만 악착스럽게 충실한 아들들에게는 우리 역사의 화상(火傷)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을 견디어내게 된다. 비록 어두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성취하는 과업의 한가운데에는 오늘 들과 산들에 걸쳐 절규하는 그것과 똑같은 어떤 굴복할 줄 모르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

 

 

 

§§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인간적인 까뮈의 생각들 ... 어떻게 보면 불교사상과 상치되어 보이다가도 어느 맥락은 맞닿아도 보이는 ... 까뮈가 우파니샤드를 탐독했었다는 일화와도 연관이 있을까,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도 불교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니 이러저러 그럴지도 ......어쨌거나 깨달음도 인간으로서의 방식이라고 할 때....존재함 그 자체가 굴복일 수가 없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이자 최후까지 태양과 대지를 생각하는 존재.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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