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모네 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
성동혁 지음 / 봄날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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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6』(2014, 민음의 시 204)을 읽고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퍽 기대했다. 『아네모네』(2019, 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를 펼쳤을 때 예상된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詩의 위치는 묘하다. 이계의 언어 같으면서도 독자의 귓가에서 바로 속삭인다. 소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특성이다. 유서나 기도문보다는 일기, 일기보다는 편지나 에세이를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詩는 어디에 해당할까. 성동혁의 시는 유서>기도문>일기ㅡ성동혁ㅡ편지>에세이 중간쯤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끌어온다. 80년대 중후반 태생인 황인찬과 성동혁을 (굳이) 비교해 황인찬의 시는 그토록 인기 높은데 성동혁의 시는 왜 그렇지 않을까. 독백 같지만 편지 같기도 한 그들의 목소리 초점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황인찬의 시는 현실에 더 가까이 있고 불특정 다수에게 더 열려 있다. 그런 유혹자 서술은 연애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성동혁에게 당신도 그러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의 개성을 바꾸라는 무례니까. 절절히 아플지언정 선뜻 붙잡지 않겠다는 그의 결은 존중받아야 한다. 성동혁의 시는 검고 부드럽게 흐른다. 어떤 시인은 사람보다 시와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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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4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성동혁 시인 새 시집 덕분에 읽어봐야겠어요!

AgalmA 2020-08-25 02:42   좋아요 1 | URL
오늘 성동혁 땡쓰투 적립금 들어왔던데, 혹 하나 님이?? 그렇다면 매우매우 감사하지요🥰
우리가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시집은 월리스 스티븐스! 입니다. 어제 추천마법사가 똭 보여주는데 감격의 눈물이😭😭😭 이번 주 내로 살 거 같은데 하나 님도 매우 좋아하실 시집이죠!

하나 2020-08-25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아갈마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얼른 사야죠! ㅋㅋㅋㅋ 성동혁은 저 맞아여 어제 아침에 주문했는데 벌써 왔어요~ 좋은 자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복 에세이집도 같이 주문했는데 왠지 지금 감이 왔어요 ㅋㅋ 그 여름의 끝을 읽을 계절이라는 :)

AgalmA 2020-08-25 04:52   좋아요 1 | URL
이성복 시인은 글 쓰는 자세도 그렇고 글감도 참 많이 잡아주시는 정말 선생님 같은 분이죠. 계절 바뀔 때마다 찾게 되는 분이기도 하고^^
땡쓰투 해주시는 분을 제대로 알수 없으니 감사 인사 묵념만 했는데 이번에는 똭! 감사합니당👏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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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스트(harukist, 무라카미 하루키 팬의 통칭), 무라카미언(murakamian, 프랑스)이란 조어가 생길 정도로 하루키 팬층은 두텁다. 창작 생활 40년이 넘어서도 청년층의 인기도 여전하다. 북플 통계를 보면 하루키는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작가다. 하루키가 책을 계속 내는 한 이 순위는 변함없을 거 같다. 하루키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한 권만 읽을 수 없고 한 번만 읽지도 않는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에세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골라 마음껏 빠져든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하루키 팬들도 그럴 것이다. 독자들은 하루키식 (때론 오글거리는) 청춘형 문장과 (‘봄날의 곰’이나 ‘100퍼센트 소녀’ 같이 기발한) 비유와 유머, 그의 라이프 스타일(마라톤 같은 열혈 운동가, 영화와 음악 등 박학다식한 교양인, 요리와 다림질 등 만능 가사맨, 문화마저 멋지게 섭렵하는 매력 만점 여행가)에 반해 그의 소설에 쉽게 접근한다. ‘재밌다’, ‘이전보다 어렵다 or 별로다’, ‘여성을 도구적으로 쓴다’ 등의 인상평으로 그치기도 하고, 그가 뿌려놓은 메타포와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보려 머리를 쥐어짜기도 한다. 하루키 소설은 어렵게 읽고 싶으면 어렵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읽고 싶으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나카무라 구니오, 도젠 히로코 『하루키의 언어』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소확행'이란 조어는 하루키, 안자이 미즈마루 & 하루키의 아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림과 사진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1993~1995년 미국 체류기)이란 수필집을 통해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열거한 하루키에 대한 전반적 호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가라타닌 고진을 인용하며 "재패니메이션, 하루키, 요시모토가 쉽사리 세계화되는 이유는 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독자든 비평가든 하루키가 영향받았다고 언급한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샐린저, 피츠제럴드 같은 후광 효과로 작품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하루키는 오히려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스타워즈》에 더 영향을 받았다며 신화적 구조('모험으로의 부름 - 조력자(여신)와 만남 - 모험 - 역경 - 변모 후 귀환')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하루키 작품을 쭉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소설에서 신화의 특성을 읽는 건 어렵지 않다. 남편이 저승의 나라로 죽은 아내를 찾으러 가는 오르페우스 신화(『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비롯해 기타 등등), 아버지 살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해변의 카프카』) , 고대의 죽임을 당하는 왕(『1Q84』) 등등 말이다. ‘구조밖에 없다’라고 질타하는 에이지가 전말을 제대로 파헤친 걸까. 그 또한 캠벨, 《스타워즈》 같은 대단한 기표들로 폼 나는 비평을 했다는 느낌이다. 이계(異界)와 현실을 오가는 신화적 구조로만 읽을 때 소설의 매력은 휘발된다. 주목할 것은 구조 자체가 아니라 왜 이런 구조를 가지느냐이다. 하루키가 자주 다루는 '실종', '가출', '상실', '죽음'이 오히려 이런 구조를 부른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일층은 모두가 모여서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공동 공간이다. 이층은 개인 공간으로 나뉘어 각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지하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쟁여두거나 이따금 들어가 넋 놓고 있다가 나오기도 한다. 일반 소설이라면 이런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실은 지하 일층 아래에는 또 다른 지하가 있다. 그곳에는 특수한 문이 있어서 평소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어쩌다 들어가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평소 집 안에서는 하지 못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건 자신의 혼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몰라 복귀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는 의식적으로 그 지하 이층의 방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밀의 문을 열고 캄캄한 어둠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체험하고, 다시 문을 닫고 현실로 복귀한다. 그것이 직업적인 작가이고, 진짜 작가다.’

ㅡ 유카와 유타카, 고야마 데쓰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하루키가 정의한 작가론처럼 그는 지하 이층형 작가다. 아기자기한 재미 가득한 그의 에세이나 소설 속 일상 묘사는 일층의 모습이다. 정체성을 찾는 근대적 교양 소설의 면모는 그의 모든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지하 일층의 모습이다. 주체가 해체되고, 선악의 기준도 없고,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질적인 게 뒤섞여 경계가 없는 어둠의 세계는 지하 이층의 모습이다. 실제 소설에서도 지하에서 한 단계 더 내려가야 하는 지하 세계나 우물, 문 너머 문, 벽 너머 거울 등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암호를 2차 암호화하는 ‘셔플링(인간의 잠재의식을 이용한 정보 변환술)’도 지하 이층의 표현형이다. 하루키는 가능하다면 더 깊숙이 더 복잡하게 엮고 싶어 한다. 신화적 구조에 혼령의 세계나 노몬한 같은 역사적 사건까지 곁들여 지하를 아주 두텁게 만든다. 그럴수록 주인공이 돌아오는 현실세계와 일상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루키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보수적이고 도식적이면서 가장 문제가 선은 올바르고 강하며, 악은 언젠가 멸망하는 ‘선악이원론’에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도식을 부조리의 세계에 가져왔다는 데 스티븐 킹의 성공비결이 있지만 바로 그래서 그는 제2의 러브크래프트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무라카미 하루키 「동시대로서의 미국 1: 피폐 속의 공포-스티븐 킹」, <바다> 1981년 7월 호. 오쓰카 에이지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인용) 스티븐 킹의 허점 파악은 하루키의 이야기론에 분명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키 이야기 속에는 선과 악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 저 세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선택 속에 이야기가 달라질 가능성을 항시 담고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하루키 소설을 게임 문화와 많이 연결하지만 소설과 영화 속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하루키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 늘 격찬했다. 그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도 좋아했다. 하루키는 초기 소설부터 지금까지 쭉 미스터리·스럴러 장르 소설의 특징을 고수해왔다. 이 속성은 감춰진 비밀과 욕망, 민낯, 악을 뒤쫓는 액셀레이터로 작동한다. 최근 하루키의 소설 경향을 보면 지하 이층의 규모를 더 키워 판타지 세계로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이 관계 맺지 않는 거리 두기(detachment)에서 적극적인 관계 맺기(commitment)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나 줄곧 고수해온 1인칭에서 다른 인칭으로 시점 변화를 준만큼의 효과는 낳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가 일반 연애소설 『노르웨이의 숲』(1987), 르포 『언더그라운드』(1997) 만큼 하루키 소설 연보에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초기 쥐 3부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1988년 『댄스 댄스 댄스』 추가)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이계로 가는 연대기를 진행했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양립하도록 SF적 소재와 패러럴 월드로 분위기를 바꿨다. 이 소설 같은 평행세계는 2009년 『1Q84』의 ‘1984’와 ‘1Q84’로 다시 만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져 있는 소박한 가상 공간 '세계의 끝'과 철저히 인공적이고 어두운 현실 공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나뉘어있는데 많은 것들이 뒤틀려 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소리를 뽑거나 사람이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현실이다. 주인공 ‘나’는 조직에서 ‘계산사’로 일하며 중요한 암호를 숨길 수 있는 능력자이지만 그저 보통 사람이다. ‘세계의 끝’에서도 ‘꿈읽기’라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무력하긴 마찬가지다. ‘계산사’나 ‘꿈읽기’는 인생의 메타포다.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말했다. “내가 이 뼈에서 오래된 꿈을 읽어 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런 다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럼 일하는 의미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 일에는 뭐든 목적이 있을 테니 말이야. 예를 들어서 그걸 어딘가에 베껴 쓴다든지, 어떤 순서에 따라 정리하고 분류한다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설명할 수 없어요. 오래된 꿈을 계속 읽다 보면 당신 스스로 그 의미를 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차피 그 의미란 당신의 일 자체와는 별 관계가 없어요.”

(중략)

“읽기로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한번 테이블에 놓인 두개골을 들고 손안에서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 같으니까.”

ㅡ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계의 끝’으로 들어오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림자를 떼어낸 ‘나’는 과학에서 정의하는 ‘자아’와 완전히 다르다. 신경 뇌과학에서는 ‘기억’이 ‘나’를 형성한다고 본다.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도 가지 못해”라고 말하는 ‘나’의 대화처럼 하루키는 ‘마음’, ‘혼’을 ‘나’의 본질로 상정했다. 이걸 이해하면 ‘세계의 끝’에서 ‘그림자(기억)’와 이별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설 속 두 세계에 다 존재한 ‘일각수’는 이와 비슷한 상징성이 있다. 일각수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지만 동서양이 다르게 해석하는 가공의 동물이다. 동물이나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존재이자 남근적 상징을 가지면서 처녀만이 잡을 수 있는 신화적 특징(‘세계의 끝’), 홀수의 뿔로 인해 자기방어가 취약한 기형의 고아로 도태될 진화적 특징(‘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양면성을 가진다. 진화의 세계에서 일각수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의식 프로그램을 나도 모르게 ‘나’에게 프로그래밍한 박사는 과학의 모습을 한 신(神)이었다. '나'가 만든 '세계의 끝'은 그것을 받아들여 붕괴의 숙명에 처한다.

 

 

 

“맞아요. 사고 시스템이란 그야말로 그런 것이야. 한 마디로 할 수 없어.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자네는 강단이 있거나 겁이 많은 두 가지 양극 중에서 어느 하나를 거의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것이야. 그렇게 세밀한 프로그램이 이미 자네 안에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 프로그램의 자세한 내역과 내용에 대해서 자네는 거의 아무것도 몰라. 알 필요가 없거든. 그걸 몰라도, 자네는 자네 자신으로 기능할 수 있어. 이거야말로 블랙박스 아닌가. 다시 말해서 머릿속에는 인류가 아직 발을 내딛지 않은 거대한 코끼리 무덤 같은 것이 묻혀 있는 셈이지. 대우주를 제외하면 인류 최후의 미지의 대지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아니지. 코끼리 무덤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군. 왜냐, 그곳은 죽은 기억의 집적장이 아니기 때문이야. 정확하게는 코.끼.리. 공.장.이라고 해야 가깝겠어. 그것에서는 무수한 기억과 인식의 칩이 선별되고, 선별된 칩이 복잡하게 얽혀서 라인을 만들고, 그 라인이 또 복잡하게 얽혀서 번들을 만들고, 그 번들이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 정말 ‘공장’이지 않은가. 그곳은 생산을 하고 있어요. 공장장은 물론 자네지만, 안타깝게도 자네는 그곳을 방문할 수 없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그곳에 숨어들려면 특별한 약이 필요하지. 루이스 캐럴의 그 이야기는 참 잘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그 코끼리 공장에서 떨어지는 지령에 따라 우리의 행동 양식이 결정된다는 말이군요.”

“그래요.” 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잠깐만요.” 나는 노인의 말을 막았다. “먼저 질문할 게 있습니다.”

“그래요, 어서 해 봐요.”

“얘기의 맥락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현실적으로 행동 양식을 표층적 행위의 결정까지 확대할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 빵과 함께 우유를 마실 것이냐 커피를 마실 것이냐 홍차를 마실 것이냐, 그건 기분에 따른 것 아닐까요?”

“옳은 지적이에요.” 하면서 박사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인간의 그 심층 심리가 늘 변화한다는 것이지. 비유하자면, 매일 개정판이 나오는 백과사전 같은 것이에요. 인간의 사고 시스템을 안정시키려면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어요.”

“문제요?” 나는 말했다. “그게 왜 문제죠? 인간의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잖아요.”

ㅡ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쯤 되면 하루키가 이런 실험, 이런 질문을 소설에 담은 배경이 궁금해지지 않나.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하는 물음은 변하지 않는 탐구 주제인데,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968년)를 원작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스릴러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1982년에 개봉했다. 1984년에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가 개봉했다. 공교롭게도 1985년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디스토피아 SF 영화《브라질》은 하루키의 이 소설과 매우 유사하다. 하루키의 이 소설은 그 시대를 빼고 말할 수 없을 거 같다. 박사는 인간이 시간을 확대해서 불사에 이르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분해해서(사유 속에서) 불사에 이른다는 걸 깨닫게 되자 과학자의 지적 호기심에서 계산사 ‘나’를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고, 불사의 세계와 그의 세계(세계의 끝)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운명을 내놓는다. 스스로 사고하는 AI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되묻듯 인간을 프로그레밍된 생존 본능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로 해석할 수 없다.

아무도 비를 그치게 할 수 없고 아무도 비에서 벗어날 수 없어 모두에게 공정하게 내리는 빗속에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가 흐르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닫히는 풍경은 《블레이드 러너》의 포크 풍 같다. '나'가 만든 세계인 ‘세계의 끝’은 문지기가 지키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열리던 그로테스크한 알레고리 소설 카프카 『법 앞에서』의 낭만적 오마주였다. 소설의 역사가 그렇듯 이 모든 것은 이야기만을 좇는 모험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루키를 우리의 ‘꿈읽기’로 여겨 읽고 또 읽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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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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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책을 죽 읽다 보면 전작들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이제껏 나온 그의 모든 소설을 읽어온 바 이번 소설은 그의 소설 중 가장 역동적이다.
(※ 국내 출판된 우엘벡 책 중 완독하지 못한 건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 뿐이다.)

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성, 일의 성취와 자발적 포기, 권태, 무기력, 은둔 등을 다루는데, 이 책 초반은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중산층 서구 엘리트의 모습으로 『투쟁 영역의 확장』, 『소립자』, 『지도와 영토』, 『복종』과 더 가깝고, 중반은 68세대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와 섹슈얼리즘, 과거 연인들과의 관계 고찰의 모습으로 『소립자』, 『어느 섬의 가능성』, 『플랫폼』과 닮았다. 후반부터 전개가 독특해진다. 직전의 전작 『복종』이 정치적 목소리가 강하긴 했지만 적극적인 저항까지 담지 못했다면 이번 『세로토닌』은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는 평을 들을만큼 사회 비판이 격렬하다. 점점 더 개판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자니 당연했던 걸까. 물론 실패의 엔트로피로 향하지만. 자본주의 시대 ‘노동의 종말‘을 향하고 있는 지금이 어떤 꼴인지 자비 없이 보여준다.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벨 에포크(좋은 시절)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건 먹고살기 좋았던 중상위층에게나 해당했다. 빈부 격차나 각종 차별이 더없이 치솟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참조), 지금 우리도 그런 역사 속이다.


섹슈얼리즘을 문제적으로 다루는 솜씨는 조르주 바타유와 비슷하지만 바타유보다 우엘벡이 더 저돌적이다. 섹슈얼리즘과 계몽주의와 냉소주의가 뒤섞인 D. A. F. 드 사드가 20~21세기에 살았다면 미셸 우엘벡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자살할 듯 말 듯 한 허무주의적이고 신랄한 문체는 에밀 시오랑이나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비슷하다.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를 많이 드러내는 미셸 우엘벡의 글이 불쾌한 부분이 많음(이번 소설엔 아동 관련 범죄까지...)에도 그의 글에 매료되는 건 절망의 끝까지 가보는 그의 적나라함이 폭력성과 환멸만으로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모든 것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하는 한편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고 굴레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는 걸 비감히 고찰한다. 끝까지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 ‘사랑‘을 강조하며 끝나는(에로스적 사랑- 낭만적 사랑에 국한된 게 한계이지만 : 동성애를 혐오했던 바타유와 역시 닮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우엘벡답지 않아 더 뭉클했다. 그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가장 지독한 상실은 ‘사랑‘이다


˝우리가 생의 단 한순간도 어떤 신이 됐든 신의 개입이나 존재조차 느껴본 적이 없으면서도, 심지어 우리가 신의 호의적인 개입을 특별히 누릴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삶에 누적된 허물과 과오들을 고려할 때 다른 이들보다도 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바라는 어떤 것˝이 있는 게 인간의 삶이다. ˝지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이 달랑 여행가방 하나로 압축˝되고 ˝인간관계를 맺는 시기는 이제 만기˝가 되었으며 이제부터는 ˝폐를 끼친 일에 사과하는˝ 일만 가득할 거라고 판단한 46살의 플로랑클로드는 같은 나이에 죽은 네르발과 보들레르를 떠올리며 결코 쉬운 나이가 아니라고 자조한다. 그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미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무런 추억도, 다가올 기적에 아무런 기대도 없는 감정의 동절기로 조금씩 진입하고 있었고, 이 무력감은 직무 영역에서도 무산되는 사업이 늘어감에 따라 배가되었다.˝ 똑같은 한 주 한 주가 반복되면서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았고˝, 직업인의 삶은 ‘아무런 쾌락도 선사하지 않는 창녀‘처럼 생각되었다. 윗세대부터 우리 세대까지 파괴된 것을 재건하는데 철저히 무능했으므로 인류 문명에 대한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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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래가 활짝 열려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유일한 시절. 이후로 펼쳐지는 성인의 삶, 직업인의 삶은 느리고 점진적인 정체와 다름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젊은 날의 우정, 학창시절에 맺었던 유일하게 진실한 우정은 성인의 삶의 문턱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의 좌절된 꿈의 산증인들, 명명백백한 추락의 산증인들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친구들과의 재회를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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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간단하나 실질적으로는 이제 더는 그렇지 않으며, 바로 그렇게 인류 문명은 요란하지 않게, 위험도 비극도 없이, 아주 미미한 유린만으로 거꾸러진단. 문명은 무기력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으로 거꾸러진다. 사회민주주의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고, 혹여 있다면 오직 영원한 그리움과 망각에의 호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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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도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조수간만은 살아오는 동안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육지를 뒤덮으러 조용히 밀려 올라오는 저 거대한 액체를 느껴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토크쇼 <우린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가 왁자하게 흘러나왔고 느리게 밀려오는 대양과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패널이 너무 많았고 다들 너무 크게 떠들었다. 이 오락 프로의 볼륨이 전체적으로 과도하게 높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으나 이내 후회했다. 현실세계에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고 이야기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어쩌면 핵심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게스트들의 캐스팅은 완벽했고 스튜디오엔 소위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바닷물이 이제는 불안할 정도로 더한층 가까워진 듯 보였다. 다음엔 우리가 바다에 잠길 차례인가? 그 경우라면 약간의 기분전환이 되리라. 결국 나는 커튼을 닫고서 텔레비전을 다시 켠 뒤 볼륨을 죽였다. 이내 탁월한 선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딱 좋았다. 오락 프로그램의 왁자지껄함은 그대로인 채로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즐거움이 더해졌다. 약간 정신 나간 듯하면서도 재밌는 미디어 인형들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것들이 분명 나를 잠들게 해줄 터였다.˝



현재의 일본인 연인 유주는 집단 성교에 빠져 있고 플로랑클로드의 의미는 그녀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파트너일 뿐이다. 그녀를 죽일까도 생각하다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끊고 자발적 실종을 택한 플로랑클로드는 인생을 결산하려는 의지 속에 의미 있었던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가지만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 과거 연인 클레르는 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이 남은 희망이다. 유일한 친구 에메릭을 찾아간 플로랑클로드는 그와 마찬가지 처지인 에메릭의 몰락을 목도한다. 그는 ˝정말이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정도 연민도 정신분석도 이성적인 판단도 전혀 유용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한 부풀˝려 질병 같은 그 메커니즘 속에서 죽음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같았던 카미유를 찾아가 몰래 훔쳐보기만 하다가 미혼모로 사는 것 같은 그녀에게 자신보다 아들이 더 중요할 거란 생각에 관계 회복을 포기한다. 세로토닌이 든 캅토릭스 부작용인 발기 부전은 남성으로서의 사형 선고였지만 그에겐 사형 선고의 추가 사항이었을 뿐이다. 사회적 관계는 모두 끝장났고 풍족할 줄 알았던 재산으로는 물가 상승으로 10년 밖에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살을 계획한다. 그가 고골 『죽은 혼』이나 토마스 만 『마의 산』을 읽듯이ㅡ365일이 다 그렇겠지만ㅡ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와 미셸 우엘벡 『세로토닌』을 읽는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는 40대 중후반이라면 엄청난 공감과 더 치명적일 것.

관계를 원하고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망치기 일쑤여서 도덕과 윤리, 법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끝없이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거기서 오지 못한다. 경계를 허무는 사랑을 생각해보라.

실패한 인생을 반추하는 주인공보다 주인을 잃고 전날부터 먹이도 먹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젖소들이 더 마음 아팠다ㅜㅜ

전 세계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외로운 자는 구강기로 퇴화해 요리에 열광하는 탐닉형 비만자, 약에 의존하는 건강염려증자, 흡연과 알콜중독 같은 중독자가 되기 십상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화려한 요리, 항우울제 캅토릭스 약도 아닌 플로랑클로드가 시종일관 마시는 칼바도스가 마시고 싶었다. 온갖 실망 속에 사람보다 사랑보다 그의 우울이 더 가깝게 느껴져서다. 정말이지 인간은 다양한 증상의 병리 병동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난날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원히 일어난 것이고,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닫힌 영원, 닿을수 없는 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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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07-28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앞부분을 며칠 전에 미리 보기로 읽었습니다. 앞부분만 읽었을 때는 이 작가의 자가복제(혐오와 환멸만 늘어가는 서구 엘리트 남성의 넋두리)가 갈수록 심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구매를 보류했는데 아갈마님의 리뷰를 읽으니 반드시 사야겠다는 판단이 서네요.
우엘벡은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가에 대해서 험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나라에 이런 글쟁이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ㅡ기껏해야 왕년의 장정일 정도만이 생각나네요ㅡ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누가 뭐라고 하건 간에 내가 하고픈 얘기를 다 하겠다‘보다는 ‘나는 윤리적, 정치적으로 아주아주 올바른 사람이다‘라는 강박을 몇몇 소설가의 글을 볼 때마다 느껴지고는 합니다.

AgalmA 2020-07-28 13:35   좋아요 1 | URL
책날개에 (골초라 더 그랬을) 폭삭 늙어버린 우엘벡 사진에 먼저 심란해지죠. 그 인상이 퍽 강해 주인공 46세 플로랑클로드에 바로 겹치더군요. 초반은 수다맨님처럼 ‘또 이 상태냐-_-...에효‘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요. 스릴러적인 게 있어서 초반 넘어가면 늘어지게 느껴지지 않아요. 재미 면에서도 메시지 면에서도 좋은 소설입니다.
이쯤 되면 우엘벡은 ‘서구 백인 엘리트 남성 넋두리‘ 대표 주자로 그게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도 같고요;

장정일, 마광수가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런 문화가 한국에 들어오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고 봐요. 두 사람 다 작품이 세련되지 못해서 더 그랬던 거 같지만 대중은 받아들일 준비조차 안 되어 있었죠. 지금 자본주의와 엮여서 팔릴 만 하니까 파는 거지 문단의 경직성과 배타성, 한국 대중 문화 경향은 크게 달라진 거 없다고 생각합니다. 풍부한 교양이 뒷받침되어야하고 좀 세련되어야 하는데, 한국 작가들에게 이게 참 부족해요. 등단과 작법에 몰두하고 등단하면 밥벌이로 글을 쓰니 뭐가 제대로 나오기 힘들죠. 나이 들면 지치고. 이제야 퀴어 문학도 관심을 좀 받나 했는데 거기도 악재가 겹치고...

한국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문화가 강해서 내면적으로 외부적으로도 자기검열이 심하죠. 요즘처럼 속사포 공격받기 쉬운 환경에서는 더 몸사리게 되고요. 상과 상금이라는 물질적 욕심도 더러 보이고요. 전업작가로 먹고살기도 힘든데 대중의 눈밖에 나면 작가 생명 끝나니 눈치 안 볼 수 없죠. 장정일도 다른 쪽으로 방향 틀어 겨우 기사회생 했고, 마광수는 철저히 몰락.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문화의 문제라고 봐야죠. 역량 있는 작가들의 싹을 한국 문화 전체가 자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일본 경우, 다니자키 준이치로 같은 작가들의 외설적인 소설이 저는 작품적으로 크게 뛰어나다고 보지 않거든요. 하지만 일본 문화는 그런 걸 다 품는 건 한국과 비교됩니다.

수다맨 2020-07-28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경직성과 배타성, 한국 대중 문화 경향은 크게 달라진 거 없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등단과 작법에 몰두하지만 교양의 풍부함과 작품의 세련미는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역시나 동의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에는 한국 문화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 변화를 이끌 만한 근본적인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창작 주체는 물론이고 이들을 인정(문단)하고 소비(독자)하는 집단에게도 나름대로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난망하네요.

프랑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지만 우엘벡과 같은 (여기저기에서 돌팔매 맞기 딱 좋은) 작가를 그럼에도 인정하고 소비하는 경향이 저쪽에는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복종˝을 우엘벡의 작품군에서 가장 밀도가 떨어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책을 읽고 나니까 이런저런 걱정도 들더군요. ‘이런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가는 작가가 테러 당하는 거 아닌가‘ 헌데 우엘벡은 ‘정의‘나 ‘옳음‘ 같은 것들을 재인식시키는 소설보다는 ‘반동‘의 혐의가 붙는다고 하더라도 도발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작가 같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저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들고요.

AgalmA 2020-08-01 00:04   좋아요 2 | URL
‘정의와 옳음‘을 말하는 소설은 많고 많아서 아예 그게 소설의 주제이자 지향점으로 굳어진 경향이 있죠.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까진 글이 큰 사회적인 (고발) 목소리가 되어 왔으니까요. 지금 언론이고 미디어고 기레기 수준이니 <도가니>, <82년생 김지영>처럼 문학은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작가들이 당면한 좁은 틀은 섬세하게 잘 다루지만 넓은 스펙트럼으로 작품을 구축하고 있는가 하면... 글쎄요. 그런 소재 자체가 희박하고 감상적인 애국주의로 마무리되는 거 같거든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프랑스 경우였다면 김봉곤 작가 일이 그의 모든 책 절판 처리되는 데까지 가지 않았을 겁니다. 미셸 우엘벡이 실존인물을 가져다 죽이고 살리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는 데도 다른 걸로는 소송까지 갔지만 명예훼손 소송까지 가지는 않았죠. 김봉곤 작가를 두둔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의 포용성에 대해 저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의 큰 줄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겠는데요.
1. 미투 운동, 페미니즘
요즘 보면 프랑스 공포정치 분위깁니다. 기존 남성질서의 반성 없음과 권력 선점을 뺏기지 않겠다는 저항이 커서 더 그렇죠.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싸움이죠.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취지와 활동에 동의하나 이 움직임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실린 거 같아 우려가 많이 됩니다. 그만큼 남성들과 반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니 갈등은 더 커지겠죠.

2. 인터넷 문화, 반지성주의
온통 몰려다니기 바쁜 sns 파이터, 유튜브 & 검색엔진 순례자 모습으로는 교양지식인은 커녕 나은 발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 같은데 디지털문화가 앉은 채로 교양인 만들어 줄 거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 한숨이 절로 납니다. 배우려는 노력이 너무나 부족하죠. 먹고살기 바빠 책 볼 시간이 없다 말하는 건 지금 세대에겐 면피거리가 못 됩니다. 책이 편한 휴식거리로만 소비되어선 안 되는데 소비자, 출판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진화처럼 변화도 느리게라도 진행되는 거겠으나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수다맨 2020-07-28 14:52   좋아요 1 | URL
아갈마님의 고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요즈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 심란했는데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 든든하기도 합니다.
이 블로그에 ThanksTo를 누르고 ˝세로토닌˝을 구매했습니다. 아갈마님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AgalmA 2020-07-29 12:17   좋아요 1 | URL
제 부족함을 알아서 ‘고견‘이라 하실 만한 건 아닌 거 같고요^^; 덕분에 저도 이런저런 생각 정리 기회를 가지게 돼 고마웠습니다. thanks to도 감사하고요!
저 때문에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시면 어쩌나 살짝 걱정도 되지만 우엘벡 작가 좋아하는 독자라면 큰 실망없이 읽을 책이라 생각합니다. 수다맨님 경우 <복종>보다는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추풍오장원 2020-07-31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분의 대화만 봐도 배울 점이 많군요..^^
김봉곤 전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지만, 국가권력도 아닌 시장에 의해 책이 절판당하는 사회는 뭔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AgalmA 2020-08-01 00:43   좋아요 1 | URL
사회가 기준을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과정이고 숙의를 모은다면 좋은 결과도 낳겠지요. 장단점이 있겠습니다만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가 여론 형성으로 거칠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 같아 많이 답답합니다. 페미니즘이 피해자의 위치에서의 접근법이 되는 거 같아 그 또한 우려되고요.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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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와 시인

치자의 외양은 고혹스러운 자태와 꽃 향을 내뿜지만 만지면 소년 같다. 흙투성이로 돌아온 아이처럼 건드리면 먼지 더께와 제 흔적을 우수수 떨어뜨린다. 가지는 탄력 있고 작은 잎은 말랑말랑하며 단단하다. 이 개구쟁이 식물을 나비보다 거미가 더 좋아한다. 아이를 씻기듯 여러 번 거미줄을 걷어내고 내가 불렀던 아이를 만난 듯 갑자기 커버린 아이의 향을 매년 맡는다. 치자는 가장 뛰어난 치자로서가 아니라 가장 치자 다운 치자로 산다. 거기 결심은 없다. 자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외심의 대부분은 이 점에서 나온다. 키우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 치자와 시인이 우리에게 부가한 위치. 향처럼 경계 없으며 결계가 있는 이 위치, 이 소년은 소녀도 뼈도 될 수 있지만 당분간은.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의 구성으로 살듯이 우리는 노래 자체도 될 수 없다. 꽃향기 음표로서 이 삶을 떠돈다. 치자 향 속에서 시를 읽는 잎이 살짝 흔들린다.

 

Nevermore

Nevermore

Nevermore

 

 

 

 

§ 거룩함이 없는 24시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구내식당」) 사람 만나는 걸 피하고 새벽 4시에 24시 해장국집을 가서 밥을 먹었다. 사람이 없는 곳도 소식이 없는 곳도 없다. 음식을 기다리고 음식을 먹는 내내 들어야 하는 그놈이 어떻고 저놈은 어떻다는 궁색하고 비굴한 사내들의 대화. 해장국을 반쯤 먹었을 때 제발 조용히 좀 드실 수 없냐고 쏘아붙이고 귀가 멀어 태어났더라면 했다. 비겁한 자가 비겁한 자에게 가장 비겁하게 굴 수 있다. 당신을 이겼다고 내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연인들의 테이블은 더욱 숨죽였고 사내들은 사과의 말을 건네며 처음엔 조용히 대화하다 슬슬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시종일관 연장자의 우위를 즐기는 자가 여길 숱하게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계산서를 요청했다. 삶의 욕심만큼이나 끝까지 잦아들 수 없는 비굴한 자존감. 지긋지긋하게 익숙하고 결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게 당신들이 만드는 이 세계의 24시다. 24시 해장국집에서 이른 새벽까지 술과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모든 테이블에서 이만 일어나야지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먼저 나왔다. “마신 물이 다 눈물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절창」) 미련은 이런 데 이런 시각에 쓰는 게 아니므로. 어느 삶 기슭에서 완벽하게 죽어 있기를 바라며 너무 이른 시각 집으로 돌아왔다. 시를 읽으며 오늘 치의 생을 가여워하기 위해. 자조 섞인 "나쁘게 늙어가기"(「십일월」)를 말하지만 마음속은 늘 "도망치고"(「슬픈 버릇」) 싶은 시들. 삶은 "처지가 정해져"(「트램펄린」) 있는 추락의 詩라서 눈을 떼지 못하는 毒이라서. “지옥은 오는데 / 아직 그는 오지 않았다.”(「지옥에 관하여」)

 

 

어떤 거리

 

 

서쪽으로 더 가면

한때 직박구리가 집을 지었던 느티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7년째 죽어 있는데

7년째 그늘을 만든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는 거리와 닮았으니까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보통은 별이 떠야 알 수 있지만

강 하구에 찍힌

어제 떠난 철새의 발자국이

그걸 알려줄 때도 있다

마을도 돌고 있는 것이다

 

 

차에 시동을 끄고 자판기 앞에 서면

살고 싶어진다

뷰포인트 같은 게 없어서

나는 이 거리에서 흐뭇해지고

또 누군가를 기다린다

 

 

단팥빵을 잘 만드는 빵집과

소보로를 잘 만드는 빵집은 싸우지 않는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커다란 진자의 반경 안에 있는 듯한

안도감을 주는 거리

 

 

이 거리에서 이런저런 생들은

지구의 가장자리로 이미 충분하다

 

 

 

 

 

중심에 관해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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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 - 몸에 밴 상처에서 벗어나는 치유의 심리학
다미 샤르프 지음, 서유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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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로 활동한 다미 샤르프의 첫 책 『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의 원제는 ‘오래된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 Auch alte Wunden konnen heilen’이다. 흔히 트라우마를 쇼크 트라우마, 즉 한 번의 충격적인 경험으로 생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저자는 그런 경우를 ‘발달 트라우마’라고 명명한다. 만성적으로 존재감을 무시당하거나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것도 트라우마로 남는다. 어린 시절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경험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잔혹함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무지, 선입견, 능력 부족 때문에 벌어진다. 어떤 사건의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위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야 한다.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를 가장 먼저 지배하는 것은 본능이고 이 때문에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생존 메커니즘으로부터 나오는 반사 행동은 투쟁, 도피 반응, 제압당할 때의 경직 반응 등이다. 

                            

[쇼크 트라우마가 유발하는 행동]

* 교감 신경계의 과잉 활성을 암시하는 증상들

●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무엇인가를 하거나 움직인다.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 신경과민

● 집중력 저하

● 분노 발작

● 불면증

● 긴장

● 다른 사람을 잘 신뢰하지 못함

● 의심

● 많은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림

● 일중독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

●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환각 상태’를 갈망

● 초점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낌

● 진정시키는 약물 자가 처방

 

* 부교감 신경계의 과잉 활성을 암시하는 증상들

● 우울증

● 무의미하다는 느낌

●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

● 멍한 상태(예를 들어, 텔레비전 시청 중이나 컴퓨터 앞에서 또는 책을 읽을 때)

● 무기력과 에너지 부족

● 혼자이고 단절된 느낌

● 삶이 유리벽으로 차단된 느낌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롤러코스터 효과 때문에 삶의 기쁨과 편안함을 느끼는 단계가 거의 없어 삶이 더욱 힘들다. 쇼크 트라우마의 이면에 발달 트라우마가 감춰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쇼크 트라우마나 발달 트라우마는 감정 기복이 심하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다. 불면증과 불안, 불안과 공황,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노 발작, (집중하는 것을 힘들어하기에) 변덕, 쉽게 놀라기, 과잉 행동, (긴장 이완과 다른) 흥분 저하, 탈진, 우울 등이다. 과잉 흥분 상태와 과잉 이완 상태를 오락가락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저녁에 집에만 돌아가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낮에는 무기력하고 멍한 상태지만 밤에는 내적 동요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자가 처방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인위적인 진정제(음식, 술, 컴퓨터, 텔레비전, 흡연 등등)를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이렇게 신경계가 자가 조절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은 엄청난 피로감을 느낀다. …… 스트레스를 받으면 간은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아 해독 작용을 한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간은 언젠가 완전히 지쳐버리게 된다. 너무 자주 아드레날린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신장도 과도하게 일을 하면 만성적으로 싸워야 하는 상태가 되어 더 많은 아드레날린을 통해서만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받게 된다. 이런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만성 피로 또는 번아웃 증후군에 이른다.” 고통의 핵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기 조절’이다. 심리 치료를 통해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한다고 해도 원하는 대로 자기를 조절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뇌의 오래된 부위와 자율 신경계의 조정을 받지만 내분비계의 조정을 받기도 한다. 이때 자율 신경계는 각성 상태와 이완 상태에서 우리의 흥분을 조정하고 조율한다. ‘자율’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절되기 때문이다. 자율 신경계는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로 나뉘는데, 교감 신경계는 흥분을, 부교감 신경계는 이완과 안정을 담당한다. 즉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는 서로 제어하고 활동과 휴식 주기를 조정하는 역할로 둘 다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의 반응에 무디거나 바람직한 기분 전환법을 모른다. 일상생활 중에도 기분 전환할 수 있는 활동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표면적인 생동감이 그 사람의 자아 상이나 열정적인 성격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진정한 변화는 쉽지 않다.

 

신체 심리치료 한계에서는 사람에게 다섯 가지 인생 과제가 있다고 분석했다.

인생과제 1. 나는 안전한가?

인생과제 2. 나는 내 욕구를 충족하고 있는가?

인생과제 3. 나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가?

인생과제 4. 나에게는 ‘자기효능감’이 있는가?

인생과제 5. 나는 사랑과 성에 관대한가?

 

학습 과제, 자기 조절, 애착 관계는 생각에만 반영되지 않고 몸과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우리의 성격과 태도를 만든다. 우리 몸이 곧 나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몸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몸을 느끼지 못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공허해질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심리 치료에서는 인식보다 몸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생과제 1 나는 안전한가]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몸을 통해 감정을 느껴야 자기 자신에게 편안해져서 남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데 이들은 몸으로 뭔가를 잘 느끼지 못한다. 항상 모든 상황에서 어떤 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몸을 통해 생생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신경 심리학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뇌의 변연계가 손상을 입어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차를 마시고 싶은지 커피를 마시고 싶은지도 결정하기 힘들어한다고 한다. 사람이라는 것이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려면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내부 감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니 벌어지는 일이다.

유명 신경 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우리가 좋고 싫은 것을 구분하는 것을 ‘체감각 표지’ 또는 ‘보디 마커body marker’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우리가 몸의 어떤 감각을 통해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바탕에는 몸의 감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만약 내 가슴이 펴지거나 목이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 몸의 감각은 내면에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감정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몸의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매우 중요한 정보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죄책감과 수치심의 원천」

“예전에 신체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베개나 매트리스에 주먹질을 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것 때문에 종종 해리 증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갖고 있는 격분의 감정은 상상 이상으로 강렬한 것이어서 컨트롤할 수가 없다. 육체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결과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신체 증상은 얕은 호흡인데 이를 ‘절약 호흡’이라 부른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저장하기 힘들어하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뺏긴다.

이들의 대부분은 죄책감과 수치심이 강하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긴 과정을 거친다.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배신하고 계속해서 부모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살았던 자신을 깨닫는 것은 심리치료의 아주 중요한 발걸음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굴욕감을 주거나 무시하고 때리거나 심지어는 성적 학대를 가해도 사랑을 갈구한다. 명백하게 가해 행위를 한 부모여도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이런 오래된 상처에 맞서기 힘든 이유는 기억이 구조화되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 머릿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끔찍한 기억과 현재 나의 감정이 어떤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는지, 그것을 구조화하는 데만 한참이 걸리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나는 사람들이 이 용서라는 또 다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타인(부모도 타인이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용서’가 최선의 수단이 아니다. ‘용서’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완전히 다 극복하는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스스로 해야 한다. 가해자를 용서할지 말지는 제삼자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에 의해서 용서를 강요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이 경우가 더 위험하다. 분노 표출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내면에 잠재돼 있는 상처는 분노를 유발하고 이 감정은 어디론가는 향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인생과제 2 나는 내 욕구를 충족하고 있는가?]

「태어나서 충분히 관심받지 못한 사람들」

“태어나서 처음 2년 동안은 아이의 욕구와 정황성情況性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 아이는 서서히 욕구와 감정의 차이를 구분하기 시작하고 구체적인 말로 감정을 표현한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고 이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예’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고 이 단어의 의미를 구분한다. 이 단계에서 만약 계속 결핍을 경험하면 이후 뚜렷하게 특별한 패턴이 만들어진다.”

ㅡ《2장 인생의 다섯 가지 과제》

 

 

어린 시절에 관심이 결핍되면 어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결핍감을 느낀다. 관심이 결핍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부정적이며 체념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 어떻게 해도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욕구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계속 갈구하는 사람과 자기의 욕구를 아이 때부터 이미 포기해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다시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립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태도는 완전히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이어진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익숙했던 상황으로 다시 만들어버리는데, 거절을 당했을 때 빨리 체념하거나 뭔가를 미리 포기해버린다. 공허함과 무력감이 만들어내는 결핍감과 고립감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꺼려 하게 돼 더 악순환이다. 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말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여기서 자기가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인식과 행동에는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인 메커니즘이 있다. 과거 경험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과 해석하는 것에는 ‘프라이밍 효과 priming effect, 시간적으로 먼저 떠오른 개념이 이후에 제시되는 자극의 지각과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 즉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우리는 지각을 통해 상황을 해석한다. 또한 갈등이 생겼을 때는 자신을 반응하는 사람이라 설정하지, 행동하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갈등 유발자로 인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여길 뿐이다. 이런 맹점 때문에 멀리 있는 것보다 바로 옆에 있는 자극을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프라이밍 효과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했던 좋았던 일은 망각하고 계속해서 같은 경험, 부정적인 경험을 반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어른이 된 이후 매를 맞거나, 거부당하거나, 불친절한 대접을 받지 ‘않는’ 경험을 천 번도 넘게 했다.” 좋은 경험들을 되돌아보는 것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회피, 설탕, 담배, 쇼핑, 게임, 섹스, 일, 스포츠 등 모든 것에 대한) 중독은 대부분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모호한 갈망을 만났을 때 나타난다. ‘자기 조절의 결핍’은 우울증의 원인 중 하나인데, 감성적인 내성이 떨어져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게 되는 증상이다. 호불호의 욕구를 잘 느끼지 못하고 명확히 표현할 수 없게 되니, 슬픔과 기쁨도 제대로 표출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행복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을 잘 돌보고 배우는 것이다.”

 

‘거울 반응’이란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와 나의 태도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는 행위다. 아이가 잘못된 거울 반응으로 자란다면 잘못된 자아상을 갖게 된다. 뭔가를 성취할 때만 칭찬받는다면, ‘존재’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만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니 행동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런 가면적 행위들을 현실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방임’으로 만들어지는 거울 반응도 있는데, 양육자가 아이가 그린 그림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피드백을 받은 아이는 자신의 행위뿐 아니라 존재가 무가치하다고 느낀다(아, 이거 내 얘기다ㅜㅜ). 이렇게 잘못된 거울 반응을 받은 사람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이들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가 굴욕을 당할까 봐 두려워해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못된 거울 반응이 내면에 고착화돼 있어 타인을 잘 믿지 않으며 깊은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그런 관계가 생긴다 해도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쉽게 상처를 주고 만다. 이들이 지닌 상처의 뿌리는 매우 깊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기 혁신을 이룬다 해도 무력감과 허탈의 기본 정서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숙지해야 할 것은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연습하기,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기, 힘들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이다.

 

네 번째 인생과제 ‘자기 효능감’은 한 살 반에서 네 살 사이에 주어진다. 자기효능감을 배우는 시기는 아기가 모든 일에 ‘네’라고 답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아니오’라고 대답하게 되는 시기와 겹친다.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는 시기로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자기감정을 갖게 된다. “자기 효능감은 주변을 자신의 힘으로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감정이자 능력이며 행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자기 효능감의 반대는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이다. 이 개념은 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이 만들어낸 것인데 그가 개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 실험은 유명하다.” 자기효능감이 없이 성장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시련이나 사건에 맞서서 싸워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효능감’이 생겨날 시기에 양육자가 “지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 같은 말과 좋지 못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아이는 양육자의 눈치를 보며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채 죄책감을 기본 정서로 가지게 된다. 수치심은 생후 14개월 정도부터 느끼기 시작하고 죄책감은 사춘기와 청소년기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죄책감을 부추기는 “양육방식이 반복되면 “내가 나를 부인해야만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심리 구조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사람도 많다. 중요한 것은 그 이면에 어마어마한 분노와 반항심이 잠재돼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네’라고 해놓고서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이다. 이들의 장점은 인내심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미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도 이들은 묵묵히 잘 견뎌낸다. 그 반면에 단점은 자기 안에 자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기를 속인다.” 이들이 숙지해야 할 것은 ‘타인을 배려하느라 정작 자신을 놓치지 말 것, 마음속으로 항상 평가하는 습관 내려놓기’ 이다.

 

다섯 번째 인생 과제는 만 세 살과 여섯 살 사이 남근기에 시작된다. 이 시기에 아니는 부모에게 선을 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이 감성적 존재이자 성적인 존재하는 것을 피력한다. 여러 가지 역할을 시도하고 자신의 감정을 훨씬 세분화해서 인지하고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성적 감각을 거부당하거나 성적인 부분을 강요받게 된다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많은 여성들이(때로는 남성들도) 성적 폭력을 당했음에도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이들은 왜 이런 어른으로 자랐을까? 아이들에게 성적 가해를 한 사람들 대부분은 잘못이 아이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을 한 채 어른이 되면 많은 경우 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어려워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감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성적 폭력을 당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 심각하게 신체적인 가해 행위를 하는 것이 성적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대부분 혼자 있는 경우에 당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아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아이는 솔직하게 말했을 때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양육자에게 심리적 단절감을 느끼고 고립된다.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이것이 ‘2차 트라우마’이다. (중략) 성추행은 30초도 채 걸리지 않지만 당한 사람은 평생 동안 그 기억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끔찍하고 부당한 일일뿐 아니라 당사자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비싼 개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즘 페미니즘을 싸잡아서 욕하는 사람들은 성추행, 성폭행이 사람을 평생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이건 정말 공감의 영역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깝다. 친밀함과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고 성적 욕구에도 무감각 내기 거부감을 가지게 된 이들은 사랑과 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거절당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강한데 이것은 관계의 주도권이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못해 성취를 하고 효능을 발휘해야만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느낀다. 이들이 숙지해야 할 것은 ‘효용 가치가 없어도,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신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으며 성과 사랑이 동반된 관계라는 것을 알아가야 한다.’

 

저자는 치유를 ‘통합’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벌어진 이야기는 바꾸거나 지워버릴 수 없다. “트라우마 치유라는 개념은 내가 더는 과거에 내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트라우마 경험을 성공적으로 통합했을 경우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부른다.” 예술가나 창의적인 사람 중에는 자신이 겪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예술이나 취미로 승화시킨 사람이 많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고 했지만 저자는 ‘행동이냐 존재냐’가 변화의 핵심 키워드라고 본다. 자기 조절력의 결핍은 내면의 불안으로 자주 나타난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큰 변화도 대개 며칠 동안만 유지되고 또다시 예전 패턴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매일 조금씩 지속적으로 발걸음을 떼어나갈 때 가장 잘 변할 수 있다. “특히나 트라우마는 뇌에서 특별한 자리, 뇌간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기억은 반사 작용을 일으키고 이성을 배제해버린다. 트라우마 경험은 두려움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강렬한 학습 효과를 발휘한다. 뇌는 이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보니 그 상황을 반복하게 되고 이는 좌절과 고통스러운 기억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잘 바뀌지 않는 건 뇌의 구조 때문이다]

「뇌의 구조와 트라우마」

“삼부 뇌 가설은 미국의 뇌 과학자인 폴 매클레인Paul McLean이 만들었으며 트라우마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가설에 의하면 우리 뇌는 각각의 부분이 독립적으로 기능하고 서로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달한다. 이것은 우리 뇌의 각 부위가 다른 부위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인데 우리의 삶과 어린 시절의 상처, 트라우마의 결과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해부학상 뇌는 뇌간, 중뇌, 소뇌, 변연계, 신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조는 수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뇌간은 약 5억 살로 가장 오래됐고 신피질과 대뇌피질이 10만 살로 가장 어린 부위다. 대뇌는 우반구와 좌반구로 나뉘고 두꺼운 신경 섬유 다발인 뇌들보로 연결되어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정신적인 건강과 우리의 성격에 중요한 모든 과정은 눈 바로 뒤에 있는 아래 전두엽에서 관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신경 심리학자인 대니얼 시걸Daniel Siegel4 박사는 주먹을 쥐면서 엄지를 손으로 감싸면 뇌의 모양을 가장 간단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했다(엄밀히 말하면 양손 주먹을 엄지가 맞대게 해야 좌반구와 우반구를 잘 볼 수 있다). 손바닥 안쪽을 자신을 향해 돌리면 뇌의 앞부분 앞부분을 볼 수 있다. 손목과 손바닥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모든 본능과 신체 반응을 조정하는 뇌간을 보여준다. 손가락은 대뇌피질인 셈이다. 손톱과 손가락 첫 번째 마디는 전두엽 피질이 되는 것이다. 그 밑에 있는 엄지는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를 나타낸다.

전두엽 피질에 대해서는 15년 전만 해도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성격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전두엽이 잘 발달할수록 방해 요인들에서 자유롭다. 좌반구와 우반구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좌뇌와 우뇌가 얼마나 다른 기능을 하는지는 뇌 연구가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 박사의 영상에서 잘 볼 수 있다. 테일러 박사는 좌뇌 부위에 뇌졸중 증상을 겪은 적이 있다.”


조기 경보 시스템, 뇌간」

“뇌간은 모든 기본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심장 박동과 호흡을 조절하고 수면과 깨는 것을 담당한다. 그 밖에 투쟁, 도피, 경직과 같은 우리의 생존 반사를 담당한다. 뉴로셉션이라는 위험을 감지하는 부분을 이용해서 뇌간은 변연계와 함께 주변을 감지하고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외부 자극을 스캔해서 위험이 감지되면 생존 반응을 일으킨다. 트라우마와 어린 시절의 상처에 대해 이해하려면 뇌간의 작동 방식을 알아야 한다. 뉴로셉션이란 뇌가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계속 우리 주위를 스캔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낯선 집에서 잠을 잘 때 이상한 소리에 갑자기 깰 때가 있는데, 이는 뉴로셉션이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활동하면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신호다.

실제적인 위험이든 상상 속 위험이든 뇌간은 작동이 가능하다. 전혀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생존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미하지만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암시가 있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생존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특히 다중 미주 신경계의 일부인 등쪽 미주 신경이 조정하는 사태 반사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반응이다.”


감정의 본부, 변연계」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는 뇌간을 마치 옷단(라틴어로 림부스)처럼 감싸고 있는데 약 2억 년 전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넘어갈 때 발달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런 진화적인 단계를 통해 유대감, 감정, 기억이 생겨났다. 시상하부도 변연계에 속하는데 시상하부는 호르몬 조절을 담당한다. 호르몬 시스템은 자율신경계와 함께 우리의 동기를 조정할 뿐만 아니라 유대감, 욕망 등을 담당하며 몸과 뇌를 연결해준다. 변연계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편도체와 해마다. 편도체는 불안과 감정 조절에 매우 중요하다. 편도체는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와 밀접하게 작동한다. 만약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이 시스템에 부담을 줘서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고통을 느끼게 된다.”

 

통합센터, 신피질」

“신피질은 가장 최근에 진화한 부위로 약 10만 년 전에 생겨났다. 이곳에서 인지, 집중, 논리, 계획과 같은 모든 복잡한 일을 관장한다. 이 뇌 부위는 출생 때 가장 덜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신피질을 살펴보면 주름이 가장 눈에 띈다. 이런 주름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뉴런 신경 회로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주름 덕에 면적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주먹 쥔 손 모양으로 뇌의 모양을 짐작했던 것을 다시 떠올려보면 신피질의 뒷부분(손등 쪽)은 세상을 인지하고 앞부분(손가락 부분)은 추상적인 부분을 담당한다고 대략 말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하는 포유동물의 경우 안와 전두 피질(이마와 안구 뒤쪽)이 더 강하게 발달했다고 한다. 전두 피질에는 동작성 계획에 관여하는 전운동 피질도 있다. 흥미롭게도 공감의 중요한 구성 성분으로 통하는 이른바 거울 뉴런도 여기서 발견되었다.

우리 뇌에서 가장 많이 발달한 부분은 이마 바로 뒤에 있다(주먹 쥔 손으로 보면 엄지손톱 아래에 있는 첫 번째 손가락 마디다). 여기서 심리적인 건강을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능들이 대부분 통합된다. 이 부분들이 오래된 뇌 부위이고 서로 아주 가까이 자리 잡고 있으며 뇌, 몸, 감정, 이성을 통합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부분은 우리가 상상 속에서 시간 여행을 떠나거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든다.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도덕적인 사고를 하고 우리의 생각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전전두엽의 기능, 작업 기억력」

“신피질의 측면을 배외측 전전두엽이라고 하는데 이 부위는 정보를 임시로 저장하는 기능인 ‘작업 기억력’을 담당한다. 가령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문장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업 기억력이 필요하다. 문장의 끝쯤에서 문장의 시작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 기억력은 자기 조절과 순간 집중력에 달려 있다. 자기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뭔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면 기억력은 떨어진다. 전전두엽 부분은 뇌의 깊은 부위에서 전하는 정보를 평가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동기와 행동을 예측해서 그 사람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게 해준다. 이것이 바로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다.

이런 기능은 우리 자신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관찰하고 사회생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비언어적인 힌트를 알아채는 기능이다. 심리, 인간관계 전문가들은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이 기능을 발달시키고 높은 수준의 통합을 이뤄내는 데 큰 영향을 준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뇌 부위가 잘 발달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느끼고 그와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뇌에게 생각할 시간 주기」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처할 때 뇌는 크게 두 가지 결정 과정을 거치는데 첫 번째는 신피질에서 정보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더 높은’ 의사 결정 과정이고 두 번째는 뇌간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더 낮은’ 의사 결정 과정이다. 후자의 경우 짧고 빠르기 때문에 인간의 생존에 몹시 중요하다. 뇌간과 변연계의 조정을 받는 이 과정은 몸이 위험을 느꼈을 때 재빠르게 지휘권을 행사한다. 그렇게 되면 ‘더 높은’ 의사 결정을 하는 뇌 부위를 덮어버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새로운 행동 방식을 몸에 익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체로 이완된 상태에서만 새로운 행동 패턴을 익힐 수 있다. 심한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사실상 학습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기억에 반응한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소위 절차적 기억이다. 여기에 우리가 아주 일찍이 무의식적으로 배운 모든 행동 방식이 저장되어 있다. 우리는 머릿속에 이미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기억으로 현재의 사건에 반응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현재가 아니라 기억에 반응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밥을 먹거나 길을 걷거나 일을 할 때에도 우리는 절차적 기억에 따른다. 하지만 이 안에는 어린 시절에 배운 행동 패턴들이 다 녹아들어 있다. 행동 패턴은 우리가 말을 배우기 전에 경험한 것들 혹은 어렸을 때 겪은 인상적인 경험 등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어린 시절의 상호작용은 우리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 기준을 정해준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행동 패턴으로 살아간다. 문제는 이런 패턴 중 잘못된 것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현실에 대응하는 내면의 적절한 반응이라고 여길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썹을 치켜들면서 나에게 강하게 모욕감을 주었다고 치자. 그러면 친한 사람이 눈썹을 치켜들면서 재미있는 농담을 던져도 나는 화들짝 놀라서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남들이 그런 나에게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여도 나는 부당한 현실에 정당하게 대응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몸을 제대로 관찰하기]

몸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르트의 명제가 약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뭔가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이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지적인 인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식은 긴 변화의 첫 번째 발걸음일 뿐이다. 머리로 뭔가를 이해했다고 해서 행동이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 그 자체이다. 몸을 통해 느끼고 파악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모든 형태의 트라우마는 항상 자기 자신과 몸을 분리하며, 다른 사람들과도 분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력 있는 삶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또 주변 사람들과도 분리되면서 도움받는 것을 힘들게 만들고 만다.

그러므로 몸을 버리고 사고할 수는 없다. 몸으로 감정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느끼고, 결속감을 느껴보자. 혀로 음식의 맛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의 피부에 접촉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일.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몸이 꼭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몸을 통해 잘 관찰하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각도 변하게 된다. 자신만 소외되어 있다는 감정도 줄어들고 불편했던 마음도 훨씬 잦아들 수 있다.”

ㅡ 《3장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다》

 

우리가 계획했던 일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마음과 달리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는 건 오래된 뇌 부위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뇌가 나다’ 같은 환원론으로 섣불리 단정하진 말자. 자극과 반응 사이에 시간을 주면서 변화해나갈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생존 반응이 과활성화 되면 위기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도 오작동하는 일이 발생한다. 뇌 속 ‘오래된 고속도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하루에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약 15분이라고 한다. 이 순간을 아침 일찍 현명하게 사용하면 나머지 하루도 순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인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한 하향식 통제보다는 자기 조절력이 잘 작동해 거의 힘을 쓸 필요가 없는 상향식 통제를 해야 한다. 이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친숙하게 느끼고 편안해져야 하고, 감정 조절과 관계 맺는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몸을 고통의 그릇으로 여기기 때문에 몸으로부터 자신을 해리시킨다. 몸을 하찮게 여기면 인생의 질은 현격히 낮아진다. 과거의 그림자들이 뛰쳐나와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마음의 지하실을 미리미리 청소해 새로운 감정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몸을 대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믿고 따르는 친구나 연인을 대하듯 자기 자신을 대해 몸과 잘 교류해야 한다.

 

‘회복 탄력성’은 어떤 재료에 압박을 가했을 때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부하 용량을 나타내는 것인데, 심리학적 개념으로는 ‘사람의 심리적 저항력’을 설명하는데 쓰인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트라우마 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회복 탄력성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전두엽이 강화되어야 하고 쓰지 않았거나 기능이 저하된 뇌 영역들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불안과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연결되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감정을 신속하게 알아차리면서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 이 논리는 수백 년 전부터 명상법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심리치료 과정의 일부분이다. 이때 자신이 감정이나 느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자기 계발서, 유발 하라리를 포함한 많은 명사들은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쯤 되면 기초 교육 과정에 ‘명상’ 수업이 따로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학교 다닐 때 그와 비슷하게 고요하게 집중하던 서예 시간이 무척 도움됐다고 문득문득 생각한다.

 

집단을 이루는 모든 생물은 중요한 정보를 빠르게 전달해서 공동체에 위험을 알리며 진화했다. “기본 감정의 대부분이 불편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인 것도 이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생존에 필수지만 긍정적인 감정은 생존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이런 삶이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는 다른 문제지만 애초에 그 감정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불안’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갖고 있는 원래 취지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이것은 인종, 계급, 언어, 지역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가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이 소통의 기본이다. 감정은 우리의 기억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용보다 감정만 기억하거나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평가할 때 감정에 좌우되는 일은 기본이다. 만약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뭐냐고 물으면 자신에게 가장 강한 감정을 남긴 사건을 이야기할 것이다. 아마도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경험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강의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에 와닿은 내용은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많은 내용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절대 중립적인 정보로 저장되지 않고 그 사건이 심어준 감정의 색깔로 저장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립적이기 힘든 이유이다.”

 

악인조차도 관계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지 못할 때 그 삶을 파괴된다. 사람이 어렵다면 동물, 식물, 책 어떤 대상이든 내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해보자. 기분 좋은 관계를 갖게 되면 그 사람의 세계는 변한다. 사회 문제로 터져 나오는 대부분의 뉴스들은 인간관계의 실패들을 보여준다. 정부의 노력이나 법의 심판을 촉구하기보다 우리 각자의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감각적인 재미나 뉴스로 소비하고 비판할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세계와 삶을 바란다면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자기와 사람으로서의 타인을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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