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기술 - 권력보다 강력한 은밀하고 우아한 힘
로버트 그린 지음, 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통 유혹자를 여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적 곡절이 있다. 오랜 세월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수단은 폭력과 힘이었으므로 정치, 사회, 가정에서까지 여성은 남성과 경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남성의 최대 약점이 성욕이라는 것을 파악한 여성에게 유혹은 권력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남성 유혹자를 상징하는 ‘카사노바’에 비해 여성 유혹자 ‘팜 파탈’이 더 치명적으로 여겨진다.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간주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물리적 영역과 심리적 영역 모두 압도하는 그 파괴력에 더 주목해야 한다. 뛰어난 유혹자는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목표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꿰뚫고 있기에 통제자로서의 능력도 탁월하다. 그래서 유혹의 기술은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한다. 오비디우스와 같은 로마 시인이나 중세 서정 시인들 경우가 아니면 유혹의 기술은 남성들에게 사소한 것이었다. 17세기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남성들과의 섹스를 거절하는 여성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혹의 기술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정치가들이 대중들을 휘어잡기 위해 유혹의 방법들을 동원했다. 유혹의 기술이 카리스마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현실보다 환상과 놀이를 더 추구하고 물리적 힘보다 심리적 힘이 크게 작용하는 요즘 유혹의 기술은 더 부각된다.

 

 

그린은 아홉 가지 유형으로 유혹자를 분류한다. ①성적 에너지가 풍부하고 사용 방법에 정통해 상대에게 깊은 해방과 자유를 느끼게 하는 ‘세이렌(Siren)’의 대표적 인물은 클레오파트라, 메릴린 먼로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처럼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력을 기울여야 비참한 몰락을 피할 수 있다. ② 지칠 줄 모르고 유혹하는 ‘레이크(Rake)’는 ‘세이렌’과 비슷한 남성 유혹자로 돈 후안, 리슐리외 공작, 파블로 피카소, 배우 에롤 플린,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에 해당한다. 사회 규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채워줌으로써 여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지만 동성 남성이나 도덕주의자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③인내심과 세밀한 관찰력,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디얼 러버(Ideal Lover)’는 상대의 낭만, 모험, 환상을 채워주는 존재로, 대표적 인물은 카사노바, 퐁파두르 부인, 존 F. 케네디이다. ④자신을 연출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의 매력을 발산하는 ‘댄디(Dandy)’의 대표적 인물은 살로메다.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동시에 초연함을 유지해 많은 남성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뻔뻔스러움에도 절도가 있어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 ? 어린아이처럼 자발적이고 열린 자세를 지닌 ‘내추럴(Natural)’은 천진난만, 개구쟁이, 신동, 개방적인 특성으로 상대를 유혹한다. 찰리 채플린이 그런 유형인데, 성인과 어린아이의 매력이 동시에 묻어나는 삶을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천진난만한 모습을 버리고 자유로운 태도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기 충족적(나르시시즘)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차가운 매력을 발산하는 ‘코케트(Coquette)’ 유형에는 나폴레옹의 배우자 조제핀, 앤디 워홀, 프로이트가 해당되는데, 상대의 증오심을 부추기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능숙하고 상대방에 맞추는데 능란한 ‘차머(Charmer)’에는 빅토리아 여왕을 사로잡은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 예카테린 여제 등이 있다. 교활한 아첨꾼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인맥을 넓혀 입지를 굳히고 웅크릴 때와 행동할 때를 구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탁월한 존재로 비치는 ‘카리스마(Charismatic)’ 유형은 기본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열정, 신비감, 웅변술, 무대기질, 자유로움, 대중이 열광하게끔 만드는 의존성, 모험심,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 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에서는 여러 카리스마 유형들이 있었다. 예언자적 카리스마(잔 다르크), 동물적 카리스마(라스푸틴), 악마적 카리스마(엘비스 프레슬리), 구원자형 카리스마(레닌), 정신적 지도자형 카리스마(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성녀형 카리스마(에바 페론), 해방자형 카리스마(멜컴 엑스), 뛰어난 연기자형 카리스마(드골 대통령). 카리스마 특성은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이 피로를 느끼게 되므로 특성을 통제하며 관대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적을 만들기도 쉬운 특성이라 적을 무자비하게 제압할 수 있는 잔인함도 갖추어야 한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타(Star)’는 페티시즘적 매력을 발산한 마를레네 디트리히,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감정과 불멸의 욕구를 자극하는 신화적 스타 존 F. 케네디 등이 해당되는데, 아버지가 영화제작자이기도 했지만 배우들과 교제하며 스타들의 성공 비결과 매력을 모방한 케네디는 유혹의 기술을 제대로 터득한 셈이다. 이 유형은 인간적 약점을 많이 노출해서는 안 되고 유희를 즐기듯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휩쓸리지 않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아홉 가지 유형에 겹치는 인물도 있듯이 누구나 이런 속성을 조금씩 지니고 있으므로 그린은 자신의 주된 본성을 파악하고 강점으로 발전시킬 것을 강조한다.

이와 대비되는 反유혹자의 특성은 조급함, 아첨, 도덕주의, 구두쇠, 소심함, 수다쟁이, 과민함, 속물성 등이 있다. 유혹자가 되고 싶다면 이런 특성을 죽이고, 이런 유형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다. 또한 자기와 다른 유형의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유혹자의 희생양이 되는 유형도 18가지 나온다. 퇴물이 된 변형된 레이크 혹은 세이렌, 좌절한 몽상가, 응석받이, 내숭쟁이, 좌절한 스타, 세상 물정에 어두운 풋내기, 정복자, 색다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 삶을 비극적인 드라마로 엮어가고 싶어 하는 비극의 주인공, 지나치게 분석하고 비평하려는 교수, 칭찬에 익숙한 미인, 성장을 거부하는 철부지, 구원자가 되려는 사람, 방탕아, 우상 숭배자, 매사에 예민한 감각주의자, 고독한 지도자, 양성애자 등.

 

짧은 인생을 낭비할 수 없으므로 “진정한 유혹자는 자신에게 없는 특성을 지닌 대상을 선정한다.” 유혹의 대상을 선정하면 상대가 안심할 수 있는=을 만큼 접근해 관계를 차츰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상대가 헷갈리도록 애매한 태도를 취해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게 한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행동하며,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부각시키면서 저 사람이라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의 내면의 결핍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한다. 상대가 마치 자기 의견인 것처럼 믿게끔 생각을 심는 ‘암시’적 화법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방어본능을 허물고 유혹자에게 끌려오도록 상대방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야 한다. 이런 거울 효과는 유혹의 오기 단계에서만 유용하다. 릴케는 이 단계에서 실패해 상대에게 의존적인 모습으로 비쳐 살로메에게 버림받았다. 상대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호기심은 불안을 동반하므로 상대가 불안을 느끼게 되면 조종하기가 쉬워진다. 직접적 표현은 금물이면 사소한 부분(미묘한 몸짓, 무심코 하는 행동, 표정이나 태도)을 통해 상대에게 끝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표시를 줘야 한다. 그런 다음 태도나 행동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상대가 환상을 키워나가도록 한다. 때론 약점을 드러내어 연민을 끌어내야 한다. 심리적, 육체적 고립 속에서 유혹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단계 설명은 배가 끊겨 돌아갈 수 없는 둘만의 여행, “오빠 믿지?” 등의 숱한 일화가 나오게 된 메커니즘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알리 칸은 미모의 여배우 리타 헤이워스를 이 기술로 통해 얻었다. 상대가 넘어왔다고 생각되면 가속화해야 한다. 기사도 같은 입증 행동, 상대의 보호본능 자극, 유대감을 키울 수 있는 둘만의 은밀한 일 공모, 정신적이고 고상한 것을 나눈다는 유대의식 형성, 에로틱한 감정을 고조할 수 있는 적절한 공포 조장 등이다. 유혹에서 최후의 일격은 사태 역전이다. 희생자 자신이 유혹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줘 상대가 더 적극적으로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무심한 듯한 태도로 상대 스스로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야 한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는 과감한 행동으로 상대를 무장 해제해야 한다. 유혹 뒤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나면 권태, 불신, 실망과 같은 정반대 감정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별을 하려면 짧고 신속하게, 관계를 지속하려면 부재 전략으로 상대를 애타게 해 마음을 뒤흔든다. 


 

「유혹은 궁극적으로 주도권 싸움이다. 유혹에 항복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주도권을 내준다. 그들이 적의를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신이 어떤 책략을 사용하든 그들은 모두 용서한다. 당신이 그들에게 세상에서 아주 희귀한 상품인 쾌락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 싸움에 능통하다면 무수한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 군중이나 유권자, 나아가 국가 전체를 유혹할 때도 방법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유혹할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점과 긴장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성을 유혹할 때 사람들은 일부러 불안과 고통을 야기한다. 대중을 상대로 한 유혹은 이보다 좀 더 부드러울 뿐이다.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쾌락을 제공하면 그들은 넘어오게 되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p598)

 

 

이 책을 쓴 뒤 그린이 『전쟁의 기술』을 쓴 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유혹의 기술은 이제 더 큰 대상을 공략하고 있다. 부드러운 판매 전략(광고보다 뉴스 활용, 감정에 호소, 시각적 장치 이용, 상대방에게 친근한 언어 사용, 다른 이에게도 인기가 있다는 연쇄 반응 유도, 그들이 동일시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 제공)은 수백만 명을 유혹한다. 유혹의 힘은 사람들을 BTS처럼 성공적 신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게 만들고, 의식 있는 새로운 운동의 선봉장이 되고 싶게끔 만든다.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인생 드라마도 매일 탄생하고 지루함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삽시간에 끈다. 이 세계에서 유혹하지도 받지도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그런 욕망을 투사하고 다시 현실로 끌어온다. 이 유혹의 기술을 찬찬히 훑어보며 마음이 참 복잡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유혹의 세계는 진실된 사랑뿐이라고 나는 자신할 수 없으니. 이 유혹의 늪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9-08-12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그린의 3부작이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AgalmA님 덕분에 좋은 저자 소개받아 갑니다.^^:)

AgalmA 2019-08-14 03:44   좋아요 1 | URL
그린이 주로 자기계발서로 분류돼 제 주제도 모르고ㅎ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는데요;; 읽어볼만 한 가치는 있는 책들이었어요. 그가 가진 세계관에 호감은 들지 않았지만(글이 너무 냉정, 인간미 없엉ㅜ,ㅜ;;) 사람 심리에 꽤나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건 인정해야겠더군요. 뒷마무리 하는 뒷심이 좀 부족하고 중복되는 걸 좀 더 타이트하게 쓴다면 아주 강력한 글쟁이이실 거 같더라는(여전히 내 주제도 모르고 망발ㅎㅎ;;)

겨울호랑이 2019-08-13 09:43   좋아요 1 | URL
AglmA님과 같은 독서가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재한다면, 아마 알라딘 서재에서 하루에 올라올 글은 몇 편 안 될 것입니다.^^:)

2019-08-1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8-13 05:14   좋아요 0 | URL
두 책 다 번역이 아주 깔끔했습니다. 등장인물들과 인용이 외국인이어서 그렇지 한국인이 쓴 걸 본 것처럼 읽기 편했습니다^^
 
세계미래보고서 2019 - 세계적인 미래연구기구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2019 대전망!
박영숙.제롬 글렌 지음, 이희령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어떤 미래가 빨리 실현되길 바란다. 이상적인 미래 실현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저 세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영영 놓치는 평행 우주를 떠올릴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

『세계미래보고서 2019』를 읽는 중에 [문재인 정부 2년 특집 대담 - 대통령에게 묻는다]를 시청했다. 기술이 있어도 현실 장벽 때문에 실용화가 더딘 경우처럼 현 정부의 노력도 지금 상황에서 최선인지도 모르겠지만 미래 대비에 대한 한국인의 총체적 인식 부족이라면 더 우려스럽다. 내가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제조업 강대국 타이틀의 재탈환'이라는 기치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압박 속에 국민 눈높이에 부응하고자 한 표현인지? 이 표현은 현 정부 출범부터 계속 나왔는데 정부의 실제 인식과 방향성이 정말 이렇다면 굉장히 문제다. 공유 경제(제품이나 서비스를 대가로 주고 소유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쌍방이 공유하는 활동)와 자율 주행 자동차 도입이 활성화되면 대리운전기사 직업은 바로 아웃이다. “앞으로 20년 이내에 약 절반에 해당되는 일자리들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화된다.” 제조업이 관건이 아니라는 소리다. 빅 데이터 기술이 생활 전반에 적용되면서 우리는 점점 자신이 얻고자 하는 정보만 추려서 보고 있다. 어디를 가든 자동화 기기나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환경이다. 광고로 물건을 사고파는 식의 경제 활동은 점점 힘을 잃고 있으며 제품 중심의 소매 산업은 인공 지능, 가상현실, 증강현실, 3D 프린팅 같은 기술을 활용한 경험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소비자가 재빨리 온라인 고객이 된 것처럼 생산도 스마트 공장(설계와 개발, 제조, 유통 등 생산 전체 과정에 정보통신 기술ICT을 적용하는 지능형 공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 흐름의 핵심 키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다. 인간 두뇌를 단순화해 두 개의 신경망 형태를 취한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생성적 적대 신경망) 인공지능 기술을 고작 가짜 이미지, 가짜 뉴스를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곧 지나게 될 것이다.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려는 동향을 뉴스 기사로 봤다. 가상현실을 활용해 알코올 중독환자, 자폐증 어린이, 시각장애인을 치료하고 가상현실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효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석 파악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인간의 선형적 관점이 과학 기술 변화에 따른 기하급수적 속도 차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세기 전체에 걸쳐 일어났던 발전이 1980~2000년에 일어난 발전과 비슷하며, 이 20년간의 발전은 2000~2014년의 14년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면 단 1년 만에 20세기 전체의 몇 배에 이르는 발전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재앙인가 호재인가. 알파고 제로 같은 인공지능이 머신 러닝(기기들이 서로 지식을 주고받는 시스템), 강화 학습 등을 통해 급진적으로 개선되는 걸 우리는 미아처럼 휘둥그레 바라보고 있는 신세일까. 현재 온라인 상호작용에서 ‘휴먼 봇’이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데, 화면으로 더 자주 만나듯 우리는 점점 더 본모습보다 봇 대 봇으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의료 목적으로 몸속에 투입될 소재 로보틱스, 유기농 농산물 자급 생산과 여가 활동 시간을 마련해줄 농사 로봇 등 미래의 우리는 사람보다 로봇과 더 많이 접촉하며 살 것으로 보인다. 싫다고? 너무 먼 얘기라고?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 평균 2,500번 스크린을 터치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미 그 세계 속에 있다.

『세계미래보고서 2019』는 가시화된 기술 혁신이 많아서인지 『세계미래보고서 2018』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종합하면 7D(디지털화되고Digitized, 눈에 띄지 않으며Deceptive, 파괴적이고Disruptive, 비물질적이며Dematerialized, 무료화되고Demonetized, 민주화되며Democratized, 해고되는Dismissed)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프레임워크로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총장 조지프 아운Joseph Aoun은 ‘문해력’(데이터 문해력(빅데이터를 관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 기술적 문해력(기하급수적 기술을 이해하고 컴퓨터적 사고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인간 문해력(상호 소통하고 사회적, 윤리적, 실존적 영향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 네 가지 인지능력(자동화에 저항력을 가지려면 비판적 사고, 시스템 사고, 기업가정신, 문화적 민첩성)을 갖출 것을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비트코인으로 블록체인을 대규모 사기나 일시적 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블록체인에 힘입어 암호 화폐에 이어 블록체인 국가('비트네이션' 같은 온라인 가상 국가, 공해상에 세워진 인공섬 국가, 개인이 만든 마이크로 국가 등)까지 탄생하고 있다. '국가'의 개념이 영토, 주권을 뛰어넘는 시대가 바야흐로 오고 있다. 이러한 블록체인의 위력 때문에 활성화를 막는 것도 있으리라 짐작하는데, 일반표준과 명확한 규제 등 신뢰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갖추는 국가적 협업이 언제쯤 제대로 될지.

많은 SF 소설들이 미래를 전체주의 국가 운영 체제로 본 건 그 시대적 영향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선견지명이기도 했다. 현재 중국의 경제 약진은 공산주의 국가이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조리 시간과 주문자 수와 교통 상황까지 감안해 계산하는 모바일 푸드 플랫폼이 뛰어난 모바일 기반의 O2O 서비스, 사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사고 발생 시 당국에 통보하는 기술이 장착된 세계 최초 스마트 고속도로 건설, 세계 최초 태양광 패널 고속도로 추진 등. 한국은 어떤 개발이나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면 시위에 결사반대 투쟁에 난항을 겪는 걸 생각할 때 중국의 중앙 집권식 빠른 추진력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렇다고 중국 공산주의를 옹호하긴 어렵고 다른 대안을 고려할밖에.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투명 태양전지를 창문 안쪽에 설치해 모든 창문을 태양광발전소로 만드는 일, 인공 광합성 기술, 고령화에 따른 빈집 대책 등을 제대로 도입해도 한국의 경제 지평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불평등과 격차 문제의 대안은 양날의 칼인 기술일지 모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5-21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5-23 02:04   좋아요 1 | URL
제조업을 뒷받침할 소프트웨어 개발이 활발해야 하는데(샤오미 같은) 한국에서는 그런 게 잘 안 보인다는 게 제 체감입니다. 제가 제대로 못 본 거라면 지적해주셔요^^

겨울호랑이 2019-05-23 06:08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많이 부족합니다만, AgalmA님 말씀처럼 한국 대기업에서 상대적으로 위험을 피하고 안정적으로만 가려는 성향이 강하다 생각합니다. 1960년대 이후 후발자 이익으로 성장해온 한국경제의 한계가 아쉽게 느껴집니다...
 

 

 

★ 숨 가쁘게 달려온 4월 내가 산 책

 

 

 

 

 

 

 

 

[인문학]

1. 모리스 블랑쇼 『지극히 높은 자』

ㅡ 모리스 블랑쇼 『지극히 높은 자』 정말 폼 난다😍 이 달 산 책 중 가장 멋지다😎

블랑쇼의 초기작으로 난해한 그의 책 중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텍스트.

 

   

 1장의 인상은 릴케 『말테의 수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 어쩌면 그들에게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거리가 너무나 텅 비어 있었다. 거리의 공허는 심심하던 차에 내 발밑의 걸음걸이를 낚아채더니 이리저리 다니며, 나막신을 신었을 때처럼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그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손에서 떼어 냈는데, 그 동작이 얼마나 빠르고 급했던지, 그녀의 얼굴이 두 손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움푹한 형태를. 시선을 그 두 손에만 두고, 거기서 떨어져 나간 것은 보지 않으려니, 너무나 힘들었다. 나는 한 얼굴의 속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그보다 얼굴이 없는 상처 난 맨머리를 볼까 봐 훨씬 더 무서웠다.

ㅡ 릴케 『말테의 수기』(열린책들)

 

 

"그렇지만 당신은 그 걸인에게 돈을 주었지요?"

"네, 그래서요?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나는 두려웠고, 바로 그게 진실입니다. 난 그 상황이 거북스러웠죠. 구구절절 변명 늘어놓는 걸 입막음하려고 그에게 그 적은 액수를 건넨 겁니다. 개인적 반응이라는 사항 역시 고려에 포함해야 할 테죠."

"당신은 신경질적인 사람이로군요. 그렇죠?"

"만약 내가 거절을 했다면, 그 경우 나는 그에게 특정 부서를 방문하도록 권유하거나 그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들에 대해 자세히 물었어야 했겠지요. 그를 설득하려고 애써야 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설득한다는 겁니까?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나는 그의 말에 복종함으로써 사안을 최소한의 경비로 매듭지었습니다."

ㅡ 모리스 블랑쇼 『지극히 높은 자』, 1장

 

 

 

2. 미셸 앙리 『물질 현상학』

3. 루스 베네딕트 『문화의 패턴』

4. 유디트 살란스키 『머나먼 섬들의 지도』

ㅡ 이런 독특한 접근의 인류학 책 좋아한다.

5. E. E. 커밍스 『이것은 시를 위한 강의가 아니다』

 

 

 

 

 

 

 

[과학]

6.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ㅡ 말 많은 인공지능에 대해 대표 주자로 꼽을 수 있는 마빈 민스키 책을 안 읽을 수 없겠기에.

7. 대니얼 샤모비츠 『은밀하고 위대한 식물의 감각법』

ㅡ 식물을 좋아해서 식물 연구 책은 특히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안 살 수 없징!

8. 이종관  『포스트휴먼이 온다』

ㅡ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인공지능 책 읽을 때 참고할 게 있을 거 같아 소장용으로 구입. 이 책 좋다고 추천했었는데 58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학술 부문 수상하셨더군요^^

9. 김동규 / 김응빈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

ㅡ 김상욱 교수 등 최근 한국 과학자들 책이 맘에 들어서 관심을 가지고 읽기로 했다. 이 책은 주제도 흥미롭기도 해서.

 

 

 

 

 

 

 

 

 

[시]

10. 아틸라 요제프 『일곱 번째 사람』

ㅡ 아틸라 요제프 시집 이제야 영접.

11.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12. 알렉산드르 블로끄 외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13. 세사르 바예호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ㅡ 내가 가진 구판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 지성사)와 비교하기 위해 구매.

14. 기형도 시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ㅡ 결국 삼ㅎㅎ;

15. 이영주 『차가운 사탕들』

ㅡ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여러 책을 리스트에 넣어뒀는데 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와 이 시집도 꼭 소장하고팠던 목록.

16. 김상혁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어쩌다 보니 그의 시집을 다 가지게 되었다.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민음사),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문학동네 시인선) 두 시집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기록을 남겼는데 이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도 좋았다.

거기서 뽑은 오늘의 시

 

「고치지 않는 마음이 있고」

 

엄마가 필요한 때가 있고

아빠가 필요한 때가 있다

어제는 책 몇 권이 필요해 서점에 갔다

서점에서 책에 빠진 친구가 빛나는 때가 있고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욕심껏 담아 온 내가 더 빛나는 때가 있다

그렇게 쌓아둔 물건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렇게 방치된 집이 부모와 물건보다 더 필요한 때가 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대문 앞에서 인사하고 돌아섰는데

내 속에 너무 사랑이 없어서 놀라는 때가 있고

그럴 때 필요한 좋은 음식점이 중심가에 있다

막히는 길 뚫고 차로 몇 시간을 달려서

먹어요, 그럼 먹을게요, 퇴근길 식탁은 가끔 이렇게 다정한데

엄마, 아빠, 친구 모르게 두꺼워지는 어둠이 있다

두꺼워지는 침묵이 있다 하지만 두꺼운 침묵이라니? 에이, 그게 뭐야

섭섭해진 친구가 뾰족하게 내민 입술처럼

어색한 시간을 뚫고 다가오는 그 뾰족함처럼

제때 아닌 도착이 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부모가 모르는 키스가 있고

책에서 배운 적 없는 포옹이 있다 하지만 너무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 고치지 않는 마음이 있고

내가 더 무너지게 되는 때가 있다

 

(♪ 오늘의 음악 / BGM : 김상혁 시와 잘 어울리는, 룸 402 "FIN")

 

 

 

 

 

 

 

 

 

 

 

 

 

 

 

 

 

 

 

 

 

 

 

 

 

 

 

 

 

[소설]

17. 파스칼 키냐르 『눈물들』

ㅡ 키냐르 책은 안 살 수 없다. 없는 돈도 만들어서 사고픈 작가!

18.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ㅡ 드로잉노트를 주길래 냉큼ㅎ

19~20. 민음 북클럽 에디션 : 안톤 체호프 『베로치카』 , 어니스트 헤밍웨이 『빗속의 고양이』

21. 베르코르 『바다의 침묵』

22. 앤절라 카터 『피로 물든 방』

23. 오노레 드 발자크 『루이 랑베르』

ㅡ 『나귀 가죽』과 함께 꼭 읽고 싶었던 발자크의 소설. 그의 유년 시절이 담긴 자전적 소설이라 더 기대.

24~25.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1, 2

ㅡ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얘기가 나와 가지고ㅜㅜ... 이 책 잊고 있었는데 상기시켰어! 이것이 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읽기.

『보바리 부인』이랑 『감정교육』(1, 2권)도 다 읽었으니 얘도 이젠 읽을 때가 되었다. 다행히 책값이 싸다! 권당 정가 6900원! 요즘 나오는 시집보다 싸잖음! 그런데 너희들은 새 책인데 왜 헌책 느낌이냐; 얼마나 사람들이 안 찾았으면... 오구오구, 불쌍한 것들. 아무튼 다음 달 문학 분야 독서 1순위.

 

 

26~27. 조지프 헬러 『캐치-22』 1,2

28.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폭력적인 삶』

29.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ㅡ 예전 책으로 1~2부만 읽고 끝을 못 봤다.

30. 로베르트 무질  『생전 유고/어리석음에 대하여』

ㅡ 그의 문체가 맞는 사람은 그의 책을 계속 사보게 된다.

32. 정지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ㅡ 밀리의 서재 오리지널 단편 정지돈 <무한의 섬> 재밌게 읽어서(그의 소설답지 않게 꽤 서사적) 워크룸 프레스에서 나온 그의 단편 모음집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구매. 언제 읽어도 이렇게도 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거군 싶은ㅎ 에세이 스타일 제프 다이어 소설과 비슷한 구석도 있고.

33. 『2019년 제 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ㅡ 매년 읽다 보니 건너뛸 수 없는 소설집. 한국인, 한국 소설가들의 시대 정서를 읽는 바로미터이기도.

34. 너새니얼 호손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ㅡ 호손을 읽으면 에드가 앨런 포처럼 독특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에세이]

35. 김영하 『여행의 이유』

ㅡ 알쓸신잡에서 다 못 보여줬을 김영하 작가의 여행하는 맛과 매력을 제대로 보고 싶어서.

김영하 작가 그림도 잘 그리시네요^^♡

 

 

 

 

[그림책]

36. 죠앤 슈워츠(글) / 시드니 스미스(그림) 『바닷가 탄광 마을』

ㅡ  바다 보고 싶을 때 급처방용.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가 본 풍경을 한 장 한 장 정말 잘 표현했다.

 

 [E BOOK]

37.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

ㅡ 밀리의 서재랑 어떻게 대적하실라옹? 했더니 오디오북이랑 교양 팩 e book으로 대적하시는 알라딘ㅎㅎ 환영할 일입니다🎉 계속해주세요~🐝

38. 승현준 『커넥톰, 뇌의 지도』

ㅡ 종이책 완독 못 한 상황에서 반갑게 e book 등장. 김영사 참 내 취향ㅎ

 

말일에 e book 몇 권 더 구입할 생각이라 이 달 책 구입은 40권을 넘을 듯.

마구 뽑아서 아무 페이지나 보는 사치를 누리기 위하여~

 📎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네.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

ㅡ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그럼요. 그럼요.

 

 

★ 도서관 일지

앤드류 솔로몬의 우울증 치료 자전적 어드벤처 이야기 『한낮의 우울』 을 유익하게 읽었기에 이번에 나온 『경험수집가의 여행』도 꼭 읽어 보고 싶었다. 이 작가는 왜 늘 벽돌 책이냐😭

읽다가 진도 안 나가면 알라딘 e book 특가 30일 2900원 교양팩 2에 이 책이 있으므로 그걸 살 예정.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ㅡ 처음 나왔을 때 좀 궁금했는데 최근에 2019년 퓰리처상 받았다니 안 읽어 볼 수 없겠음.

에드윈 A. 애벗 『주석 달린 플랫랜드』

ㅡ 소장하고 있는 『플랫랜드』와 비교하기 위해 대출. 확실히 좀 더 촘촘한 해설로 이해를 돕는다.

 

 

 

 

 

 

 

 

 

 

 

🌵 2019 민음 북클럽 9기 🌵

올해는 어디에도 안 얽매이고 자유롭게 책을 읽고 싶었으나 민음 북클럽 굿즈를 보자마자 와장창 무너짐oTL

가입선물로 받을 책 고르는데 내가 찜한 책은 전부! 선택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참 신기한 일.

다른 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없는 책이라 더욱 민음사에서 사야 하는 책인데 내부 방침상 팔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휴, 고르는데 정말 애먹었다.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조지프 헬러 『캐치 22』1, 2권

• 민음 세계 시인선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짧고 강렬한 울림!

<국에 관한 노래>

1

네가 국 한 그릇조차 먹을 수 없다면

너는 어떻게 싸워야 하겠는가?

너는 나라 전부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전복시켜야 한다

네가 국을 가질 때까지.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의 손님이 된다.

2

네가 일자리 하나조차 찾을 수 없다면

그때 너는 정말 싸워야 한다!

그때 너는 나라 전부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전복시켜야 한다

네가 자기의 고용주가 될 때까지.

그다음 네 일자리가 존재하게 된다.

3

사람들이 너의 약점에 대해 비웃어도

너는 시간을 잃어서는 안 된다.

네가 관심 둬야 할 것은

약한 사람들 모두가 행진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대들의 권력은 크다.

그다음 누구도 비웃지 않게 된다.

(1931년)

... 국을 가지고 이렇게 비장미 넘쳐도 촌스럽지가 않네.

역시 브레히트!

개인적으로 브레히트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 시집이 더 좋습니다. 그건 이미 갖고 있으므로. 헤헤

• 북클럽 에디션

어니스트 헤밍웨이 『빗속의 고양이』

안톤 체호프 『베로치카』

• 세계문학전집 북 커버

시집도 쏙 들어가서 좋네요^^

but 책이 두꺼우면 북 커버 씌워 에코백 앞주머니에 넣기 어려움ㅜ

• 독서기록 노트

스티커 없어서 시무룩. 모아야 되는 거구나... 흑흑

• 포켓 에코백

가장 기대했던 북클럽 에코백!

예쁘긴 한데 짐 많은 제가 평소에 들고 다니기는 작아요. 텀블러 넣을 데가 없어 그냥 나옴ㅜㅜ;;

보조 가방으로 매일 들고 다닐까.

짐이 별로 없을 땐 딱 좋은 크기! 끈도 도톰해서 어깨 결리지도 않고^^

주머니 크기가 왜 다르지 했더니

오른쪽은 쏜살 문고

왼쪽은 민음 시인선 & 세계문학전집

😆😆

제 옷, 소품과 잘 어울려서 좋아요😊

회색 마니아 이번에도 성공ㅋ👍

 

 

 

 

 

책쟁이들을 위한 수납 Tip

 

 

이 달 책을 또 왕창 산 여파로 어떻게 하면 공간을 잘 활용해 책을 더 수납할 수 있을까 골몰하다가 문걸이 선반을 보고 바로 이거다💡 했다.

원래는 굿즈 정리대로 쓰려고 했는데 책을 하나둘 담다 보니 어어, 이거 괜찮은데... 하다가 책 선반 됐어요😁 여기다 책 가득 담은 사람 아직 나 밖에 못 봤어요ㅋ 눈물겹다 진짜😂

폭과 길이를 맞춘 문걸이 책 선반으로 아예 만들어줬으면 싶다! 금손들이여, 도전!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 효자ㅎ 좁은 가로폭이라 딱 맞음! 깊은 선반이 2개밖에 없는 게 아쉬울 정도~

작은 선반은 쏜살 문고 쏙~ 쏜살 문고 사면 이제 다 여기다 꽂아야지. 케헤헤.

문지 시집도 잘 담긴다. 문지 시집은 따로 두는 데가 있어서 새로 산 시집만 꽂아두는 걸로.

양장은 넣고 꺼내기가 힘들므로 반양장 책들 꽂는 게 좋다.

예쁨 포기. 책 수납이 관건📚

책장에 이중으로 꽂다 보니 안쪽 책은 눈에 잘 안 띄는 상황이 가장 골칫거리.

현재 약 70권 수납.

오오, 방문마다 이걸 다 달까. 방문 살려~🚪💦

이러다 현관문에도 달게 생겼음ㅋ

문 열 때마다 역기를 드는 기분으로💪

요즘은 책 많다는 사람이 부럽기보다 안쓰럽다. 책 건사가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수납도 한계가 있으니 역시 e book이 🤔

 

 

 

★ 데이비드 호크니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3층, 2019년 3월 22일~8월 4일

바다 가고 싶었으나 비 와서 전시 관람.

 

※ 관람 참고 사항

1. 금요일 낮이면 사람 없겠지? 천만의 말씀. 혹여 문화가 있는 마지막 수요일 50% 할인 관람 생각하신다면 사람 지옥을 볼 거라 예상됩니다. 언제 한산할까요. 곧 더워지면 시원하다고 또 전시장으로 사람 몰릴 텐데^^;

2. 데이비드 호크니 관련 책을 읽고 가는 게 아니라면 2~3 전시실 사이에 있는 비디오 상영관 두 곳(각각 50분)을 보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는 게 감동과 이해가 증폭됩니다. 이 동선으로 충분히 즐기려면 혼자 가야겠죠. 저는 비디오 상영 두 개 다 보고 전시실 재입장이 안 되므로 여유롭게 감상하니 4시간 30분 걸렸어요. 춥고 배고파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돌아갑니다ㅋㅜ

3. 유명한 <더 큰 첨벙>(1967, 캔버스에 아크릴릭)보다 <더 큰 그랜드 캐니언>(1998, 60개의 캔버스 유채)이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전시 안내 소책자에도 없고 기념 굿즈로도 없어 아쉬웠습니다! 하긴 이 작품은 직접 봐야 실감.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2007, 50개의 캔버스에 유채)가 벽면 가득 채운 걸 보면 다들 감격스러울 겁니다. 이 작품에 대해 데미언 허스트가 시니컬하게 얘기한 게 일견 이해도 되고요ㅎ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는 말년의 호크니가 초심으로 돌아가 작업한 것이지요. 화법상으로 특별하지 않다는 허스트의 평에 저도 동의하거든요. 허스트는 457.5 X 1220cm 작품을 집에 걸기 좋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고 디스를 많이 넣은 칭찬을ㅎ;;

여하튼 기대할 만한 전시입니다👍

전시에 대한 정식 리뷰는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10여 년간 데이비드 호크니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다시, 그림이다』 읽은 후 정리할 생각입니다.

 

 

 

 

 

 

 

 

 

 

덕수궁 참새는 붙임성도 좋고 넘 귀여웡💘

사람 보고 피하기는커녕 먹이 달라고 종종종...😻

우중충한 날씨에 호크니 그림 보니 뽀송~

호크니 굿즈 잔뜩 사 들고 집에 돌아갑니다~ㅎ

 

곧 떠날 봄날, 즐거운 계획으로 잘 보내시길^^/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슬비 2019-04-27 2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일 1책 이상 구입하셨네요~^^
저도 처음으로 국내 오디오북 굿즈 때문에 구입했는데, 영어 오디오북 듣는거랑 좀 다른 느낌이예요.

일부러 빨리 들으려고 대여식 구입했어요. 안그러면 언제 들을지 몰라서 ㅎㅎㅎㅎ

AgalmA 2019-04-28 17:48   좋아요 2 | URL
저도 대여로^^ 소설은 재독을 잘 안 하게 돼 읽고 싶을 때 바로 읽을 수 있고 저렴한 ebook 대여가 더 좋더군요. 재독도 ebook이 더 편하고요.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 오디오 북은 알라딘굿즈 받기도 쉬워서 더 좋았죠^^

보슬비 2019-04-28 09:33   좋아요 1 | URL
책 팔고 사고 좋은 순환이라 생각되요 ㅎㅎㅎㅎ 요즘 저는 집에 있은책 뿌셔먹기하고 있어요. 이사 계획이 있는데, 다행이도 책이 별로 없더라구욬 ㅋㅋㅋㅋㅋ

AgalmA 2019-04-28 11:08   좋아요 1 | URL
한달 열심히 팔아서 그 권수 만큼 다시 책장이 채워지니 이거야 원^^;; 봄 되니 이사 or 집꾸미기에 바쁜 분들 많으시네요. 대거 처리를 하자면 이사가 제일이긴 한데 이사하면서 처분하고 아차, 한 일도 많아서ㅜㅜ... 없다 하셔도 보슬비님 댁 어련하시겠어요ㅎ;; 책 많으신 분들 이사하신다 그러면 제가 다 안쓰러울 지경.

보슬비 2019-04-28 13:55   좋아요 1 | URL
ㅋㅋ 그런데 오히려 저희집에는 큰 책장이 없어서 책이 많지 않더라구요. 읽을책들만 책장에 꽂아둔 상태이고, 소장하고 싶은 책들은 동생과 친정에 둬서 ㅋㅋㅋㅋㅋ

초딩 2019-04-27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사십권~~~ 끝없이 스크롤하다 탄복합니다

AgalmA 2019-04-27 23:36   좋아요 0 | URL
어쩌다 책구매 폭주하는 달이 있는데 이 달이 좀 그랬어요ㅜㅜ)...중고책 많이 팔아서 더 신나게 샀는지도요;;;

겨울호랑이 2019-04-27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걸이 선반이라... 잘못하면 문이 어긋날 듯해서 선뜻 도전하기 어려울 듯 해요^^:)

AgalmA 2019-04-28 17:47   좋아요 1 | URL
양쪽을 지지하는 문고리가 철제고 바구니가 가벼운 선반이라 하중을 분산시키는 거 같아요. 그래도 무거운 책은 안 넣는 게 좋겠죠ㅎ; 저도 혹시나 해서 가벼운 책 위주로 담았어요ㅎ;

겨울호랑이 2019-04-28 00:12   좋아요 1 | URL
호크니전 관람 포인트를 잘 정리해 주셔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겠네요. 다만, 관람 시간 등을 보니 연의를 데려가는 것은 훗날로 미뤄야겠습니다 ㅋ

AgalmA 2019-04-28 00:15   좋아요 1 | URL
색감이 화려하고 규모가 커서 연의도 보면 분명 좋아할 텐데 겨울호랑이님이 생각을 잘 하셔야 할 듯ㅎ;; 사람도 많고 집중해서 보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동성애 작품도 꽤 있어서 15세 미만 감상은 자제를 요하는 구역도 있고ㅎㅎ;;

겨울호랑이 2019-04-28 00:16   좋아요 1 | URL
^^:) 연의와는 뽀로로 대모험 극장판 관람으로 결정했습니다 ㅋㅋ

AgalmA 2019-04-28 00:17   좋아요 1 | URL
ㅋㅋ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cyrus 2019-04-28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가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자치통감> 1~10권입니다. 출판사 말로는 30권 출간을 목표로 한다네요... ㅎㄷㄷ <자치통감> 30권을 꽂아둘 공간이 없는데다가 다 산다고 해도 다 안 읽을 것 같아서 책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ㅎㅎㅎ

AgalmA 2019-04-28 17:3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봤어요ㅎ 10권이면 생각 좀 해보겠는데 30권...저렴한 가격이라 탐나긴 해도 분명 다 읽지도 못할 거 같아 저도 아예 포기를. 정 읽고 싶다면 올재 클래식도 ebook을 차차 병행해서 내니까 ebook으로 읽는 게^^;
 
카메라 루시다 - 열화당미술선서 56
롤랑 바르트 지음, 조광희 외 옮김 / 열화당 / 1998년 6월
평점 :
절판


 

 

롤랑 바르트는 그의 기호 이론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나는 그를 ‘어머니’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그가 ‘사랑과 죽음’을 논할 때 ‘어머니’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처럼 그의 글 여기저기에 떠돈다. 그의 후기 저작에 해당하는 『애도 일기』는 1977년 10월 25일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10월 26일부터 1979년 9월 15일까지 쓴 일기다. 1980년 처음 출간된 『밝은 방 La Chambre Claire(=camera lucida)』도 같은 시기에 쓴 사진에 관한 에세이다. 이 책에서도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온실 사진>은 2부 전체를 할애할 만큼 중요한 오브제이자 푼크툼이다.

 

예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어머니’에 집중해 읽었는데 이번 재독에서는 좀 다르게 살펴볼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명제인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을 사진 비평에 도입한다면 바로 이렇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구경꾼으로서, ‘감정’에 의해서만 사진에 흥미를 느꼈다. 사진에 질문(주제)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의 상처로서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나는 눈으로 보고 느낀다. 그러므로 구별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생각한다.”(『카메라 루시다』, p27, ※별도 표기 없으면 모두 이 책에서 인용)

 

 

그는 "나 자신이 사진에 관한 ‘앎’의 척도”(p16)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진은 분류할 수 없다.

 

 

“사실상 사진을 분류하는 방식은 경험적이거나(전문가/아마추어), 수사적이거나(풍경/정물/인물/누드), 미학적이지만(사실주의/회화주의), 어떻게 하건 간에 이러한 분류는 대상과는 무관하며, 대상의 본질과도 관계가 없다. 본질이란(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근원이 되는 ‘새로움’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류는 오래된 다른 표현 형태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이란 분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무질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중략)…사진은 철학적으로 변형될 수(말해질 수) 없으며, 완전한 우연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p12~13)

 

 

바르트는 사진이 거대한 무질서 속에서 어느 특정한 사건을 표지(標識)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유동하는 기호들’이라고 했다. 사진의 세 가지 실천(만들기, 받아들이기, 바라보기)에서 그는 ‘바라보는 사람’의 역할밖에 할 수 없으므로 사진의 특성(보편성)을 자신의 개인적인 방식에 의거해 살펴보기로 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스투디움-푼크툼’이 나온다. 스투디움이 촬영자의 의도와 정보(욕망, 흥미, 취향)가 담긴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문화적인 요소ㅡ약호화, 개념화ㅡ라면, 상처나 뾰족한 도구에 의한 낙인을 가리키는 라틴어인 푼크툼은 촬영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성, 세부성, 비개념성을 나타낸다.

 

 

 

 

 

바르트는 사진에서 ‘푼크툼’적인 것을 집요하게 찾는다. 그의 방법론에 따라 ‘푼크툼’은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도 있다.

 

“(나는 <온실 사진>을 보여줄 수 없다. 그 사진은 나만을 위해서 존재한다. 독자들에게는 흥미 없는 한 장의 사진,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수많은 표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학문의 명백한 대상이 될 수 없고, 객관성ㅡ이 용어의 실증적인 의미에서ㅡ의 근거를 줄 수 없다. 기껏해야 시대·의상·촬영효과 등 독자의 스투디움에 흥미를 주겠지만, 독자는 거기에서 자신과 관련되는 어떤 대상도 찾지 못할 것이다.)”(p76)

 

바르트의 푼크툼은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 대해 서술할 때 이미 예견한 바 있다.

 

“사진사가 인위적인 조작을 하고 또 모델의 태도도 계획적으로 조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러한 사진에서, 미미한 한 줄기의 불꽃 즉 현실이 그것에 의해 사진의 영상을 골고루 태워냈던 우연과 현재적 순간을 찾고 싶어 하고, 또 그 속에서 이미 흘러가 버린 순간의 평범한 삶 속에 미래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얘기를 하면서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과거를 뒤돌아보면서도 미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눈에 띄지도 않는 미미한 부분을 찾고 싶어 하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대신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들어선 점에서 그러하다.”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중)

 

 

벤야민과 바르트의 차이는 흥미롭다. 두 사람 다 인간의 지각 작용에 의문을 던지는 사진의 재현·폭로적 기능에 주목하지만, 벤야민이 사진의 정치적 가능성(혁명적 사용 가치)에 집중했다면 바르트는 사진에서 미래 지향성을 부인하며(“사진은 부동성으로 말미암아 현전화(現前化)로부터 과거의 정체성을 향해 역류한다”(p91)) 사진의 기호적 특성(대상물과 공존하는 사진)에 집중한 게 변별된다.

 

“우선 나는 사진의 대상물이 어떤 점에서 다른 표상 체계의 그것과 같지 않은가를 잘 생각해야 했고, 가능하다면 말로 잘 표현할 수 있어야만(비록 간단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했다. 내가 사진적 대상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영상이나 기호가 참조하는, 임의적으로 현실적인 사물이 아니라, 렌즈 앞에 놓인,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사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을,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사물이다. 그림은 현실을 보지 않고서도 현실을 가장할 수 있다. 담론(discours)은 분명히 대상물을 가진 기호들을 결합하지만, 그러나 이 대상물은 '공상'일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대개는 공상이다. 이러한 모방과는 달리, 사진에서 나는 그 사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진에는 현실 및 과거라는 두 위치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강제는 사진을 위해서만 존재하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진의 본질 자체, 그 노에마(noème, 현상학에서 사유 작용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역주)로 간주해야 한다. 한 장의 사진에서(아직 영화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고) 내가 의도하는 것은 '예술'이나 '전달 체계'가 아니라, '대상물'이며, 그것이 바로 사진의 기반을 이루는 질서이다.”(p79)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자적인 면모는 여러 분석에서 볼 수 있는데, 그의 문장은 언어유희, 모순적인 역설이 많아서 전면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 (사진에는 프루스트적인 것이 없다.) 사진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사라진 것(시간에 의해, 거리에 의해)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p84)

“나 자신이 모든 사진의 지표이며, 바로 그 점에서 사진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를 놀라게 만든다. 그것은 왜 나는 여기에,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분명히 그 어떤 예술보다도 사진은 세계를 향해 하나의 즉각적인 현전(現前)을ㅡ하나의 공존을ㅡ제시한다. 그러나 이 현전은 정치적 차원일뿐 아니라(‘영상을 통해 현대의 사건들에 참여하는 것’), 형이상학적인 차원이기도 하다.”(p85)

 

사진은 찍은 뒤에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을 보는 행위는 소급하는 사유를 거칠 수밖에 없기에 사진이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는 그의 표현은 모순이다. 또한 사진은 기술적 특성상 무수한 감상자를 낳으므로 지표의 준거점이 없고 현전의 진위를 논할 수도 없게 된다. 바르트는 “자신의 확실성을 증명할 수 없음은 언어의 불행”(p87)이라고 말했지만 사진도 예외가 아니다. 발터 벤야민이 파악했듯이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은 기술 복제로 인해 교란 받는다. 바르트의 비평적 태도도 영화관의 관객이 그렇듯 그런 복제 기술에 의해 도출되는 자세다. 감상자가 발견하는 푼크툼이 촬영자의 의도를 다 빗겨 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내가 바르트의 사진 비평을 데카르트 ‘코기토 에르고 숨’에 비유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체를 나로 상정했을 때 빚어지는 혼란이 바르트의 분석에서도 이렇게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가 제시한 푼크툼은 다른 특성도 있다. 형태는 없지만 강도를 지닌 ‘시간’이 그것이며, “노에마(‘그것은-존재-했음’)의 애절한 강조법”(p95)이자 순순한 표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1865년 미국의 국무장관 시워드의 암살을 기도한 청년 루이스 패인의 초상 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청년(스투디움)ㅡ그가 곧 죽으리라는 사실(푼크툼)ㅡ그의 죽음은 실현될 것이고, 실현되었다는 사실(전미래全未來, ‘시간’을 담은 푼크툼)의 등가 관계를 설명했다. 바르트는 사진의 미래 지향성을 부정했지만, 위에 내가 가져온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인용문처럼 “과거를 뒤돌아보면서도 미래적인 것을 발견”하는 푼크툼은 우리가 사진을 볼 때의 보편적 특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푼크툼을 보려고 하는 ‘나’가 있어야 된다는 점이다. 이쯤 되니 나도 순환논증에 빠진 기분이다.

광기를 가두고 진부하게 만드는 사진 예술은 허위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이미지다. 스투디움에 안주할 것인가, 푼크툼으로 뻗어갈 것인가의 선택은 감상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며 바르트는 글을 마친다.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의 문명화된 약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완강한 현실성의 깨어남과 맞설 것인가는 나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 1979년 4월 15일 ㅡ 6월 3일”(p118)

 

롤랑 바르트는 1980년 3월 26일 사망했다. 이 책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고심했던 주제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는 저작이다. 사랑, 죽음, 언어, 시간, 의식과 육체, 대상과 의미 등등. 기호학자로서 언어의 불투명성, 대상의 불투명성 앞에서 그러했듯 그는 “사진의 깊이를 파고들어갈 수도, 그것을 꿰뚫어볼 수도 없다”(p106)고 인정했다. 어둠의 통로(camera obscura)를 통해야 대상이 드러나는 사진은 육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너와 나의 무한한 평행선처럼, 있음과 없음의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공존과 다르지 않다.

 

 

 

※ 현재 이 책은 절판이라 동문선에서 나온 『밝은 방』으로 읽어야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9-04-27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르트의 사상에 대해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galmA님 덕분에 많이 배워 갑니다^^:)

AgalmA 2019-04-27 23:34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 최근에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읽으셨으니 더 이해가 잘 되실 듯^^ 저도 겨울호랑이님 리뷰 도움 받는 걸요^^)>
 
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삶을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인류의 위대한 지성이라 불리는 작가, 사상가, 학자의 죽음의 순간을 재구성한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를 보면 그들의 유언은 소박하다 못해 원초적인 감각을 좇는 모습으로 덩그렇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으로 살다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간다. 시공간이 다를 뿐 우리 삶은 그래서 본질은 비슷하다. 소문과 폭력과 억압이 가득했던 소설 속 소도시 핸래티는 특별한 곳이 아니다. 1970년대에도,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이 꾸리고 사는 장소다. 저마다의 아랫도리가 내는 목소리, 폭발적인 순간뿐만 아니라 은밀한 한숨이나 으르렁거림이나 애원이나 단순한 진술까지도 익숙해지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서 목적 없는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핸래티의 풍경이 낯설기만 한 사람이 있을지. 비교하고 비교 당하며, 폭력을 당하고 폭력에 동조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만들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거지 소녀에서 기꺼이 다시 거지 소녀로 돌아간 로즈처럼. 왜? 우리 삶은 배우고 버리는 끝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자주적으로 허물어지는 걸 선택한 사람은 로즈가 유일하다. 로즈의 아버지를 도피처로 생각하며 결혼한 의붓어머니 플로, 다시는 학생들을 보지 않아도 되고 스펠링 책을 들추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교직 생활을 한 선생, 가난을 그저 불우함이나 결핍 정도로 생각하며 가난한 여학생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품위 있는 중산층 생활을 유지해온 독신녀 헨쇼 박사, 물질적 풍요가 있으니 거짓 유대조차 없이 악의로 서로를 대하던 패트릭의 가족, 가족의 부와 속물주의를 비판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 생활을 꾸렸던 패트릭, 사람들의 통념을 깨려 하고 비웃었지만 남편 클리퍼드의 성공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려 했던 조슬린 등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현실 세계의 우리는 서로에게 착취적이고 기만적이다. 패트릭의 열정을 받아준 것처럼 자조했지만 로즈도 가난하고 혼란스러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결혼으로 도피했을 뿐이었다. 단지 가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골 수재로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갈 정도의 지성을 갖춘 로즈였지만, 교내에 생리대가 떨어진 것만으로 풍기 문란죄로 범인을 색출하려 했던 핸래티 학교, 도덕을 핑계로 술에 취한 청년들이 노인을 찾아가 집단 폭행해 숨지게 만드는 사건 등을 보면 그녀도 마을 정서, 피로, 교활함, 기만성, 심술처럼 어떤 계층의 공통적인 성향 같은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속에서도 공포와 매혹을 느꼈던 그녀가 스스로의 균열을 도모한 중대 사건이 성적 일탈이나 외도 등이었던 걸 보면 말이다. 로즈가 클리퍼드에게 끌린 것도 계층의 공통적인 성향(‘둘 다 의뭉한 물건들’) 때문이었다.

 

“당시에 그녀는 술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진정제를 복용하지 않았고,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때는 그런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괴로움. 그건 무엇이었을까? 모두 낭비였을 뿐,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너무도 불미스러운 슬픔. 짓밟힌 자존심과 웃음거리가 된 환상. 마치 망치를 들고 의도적으로 제 엄지발가락을 박살 낸 것과 같았다. 그것이 때로 그녀가 하는 생각이다. 다른 때 드는 생각은, 그것은 꼭 필요한 사건이었다는 것, 파괴와 변화의 시작이었으며, 패트릭의 집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있는 곳에 오게 한 과정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으레 그러하듯, 인생은 작은 효과를 위해 엄청난 소동을 피우는 법이다.”(「장난질」, p237)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게 대단한 일탈이고 금기를 깨는 행위처럼 여겨지는 시대, 장소, 나이가 있었지만 인생을 되돌아볼 때 그것은 치기 어린 헛소동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방향 키를 잡지 못하고 그대로 돌진해 자신의 인생을 소진해버리는 이들도 많다. 로즈는 배우라는 직업으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적절히 배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즈의 모습에서 시골 여자의 특징을 읽어내고 첫 캐스팅된 일화처럼 로즈는 자신의 치부를 배우라는 가면 속에 숨기고 또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적절하다는 건 어디까지일까?  현실 속 로즈의 모습을 누구도 제대로 볼 생각이 없다.

 

“시기나 하는 빌어먹을 기득권층.

로즈는 그 말을 들었다, 혹은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흘낏 보았다, 혹은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바로 보지 못했으므로. 기득권층. 그것이 로즈였다. 그런가? 로즈가 기득권층인가? 배우 일로는 먹고 살 수 없어 교직을 택했고, 무대와 텔레비전에서의 경력 덕분에 교직을 구할 수 있었으나 학위가 부족해 급여가 깎인 로즈가?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싶었다. 일을 해온 오랜 세월, 피로, 출장, 고등학교 강당들, 긴장, 지루함, 다음 급여는 어디에서 받게 될지 모르는 형편. 로즈는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같은 편으로 받아달라고 그들에게 간청하고 싶었다. 자신의 주장을 지지한 거실의 무리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편에 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원칙이 아니라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두려웠다. 그들의 박절한 도덕관념과 냉정하고 경멸이 서린 얼굴, 그들의 비밀과 웃음, 음담이 두려웠다.”(「사이먼의 행운」, p288)

 

 

 

사실 우리는 모두가 모두에게 그렇다.

 

 

“브라이언은 로즈와 같은 계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본인을 면전에 두고 여러 번 말했었다. 하지만 그가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배우, 화가, 언론인, 부자(자신도 부자라는 사실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의 예술 계통 교직원 전체, 관련 계층과 범주 전체가 다 쓸데없는 낭비. 죄목은 모호한 사고와 과시적 행동, 부정확한 말, 도를 넘는 방종.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누이 앞에서 일부러 하는 말인지 로즈는 알 수 없었다. 브라이언이 경멸조의 낮은 목소리로 미끼를 던지면 그녀는 덥석 물었다. 남매는 싸웠고 누이는 눈물을 머금고 그 집을 나왔다. 그런데 로즈는 느꼈다, 그 모든 것의 한꺼풀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주, 아주, 오랜 경쟁─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누가 더 좋은 직업을 선택했는가?─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갈구한 것일까? 그것은 상대방의 인정, 아마도 둘 다 기꺼이 줄 의향은 있지만 아직은 아닌 인정이었다.”(「스펠링」, p323~324)

 

로즈의 존재를 알아봐 주고 그녀가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로 생각한 사이먼과의 어이없는 사별도 삶이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의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이 일은 그만큼 자주 일어나고 이미 늦을 때가 많다. 어린 시절 흉내를 잘 내던 랠프 길레스피와 만났을 때도 그녀는 동류의식을 느꼈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소년처럼 수줍어하고 환심을 구한다고 느꼈던 첫인상은 수정되어야 했다. 그것은 그의 껍데기였다. 그 껍데기 아래에서 그는 자족적이었고 당혹감 속에서 사는 삶을 받아들였으며 어쩌면 긍지를 느끼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그가 바로 그 차원에서 말을 건네주길 바랐고 그 자신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가 그들을 막았다.

그러나 뭔가가 부족한 듯했던 이 대화를 나중에 떠올렸을 때, 로즈는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공감과 용서가 흘렀다고, 비록 분명 누구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이 물결이 되어 흘렀다고 회상했다. 그녀가 늘 떨쳐내지 못했던 이상한 수치심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연기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허튼 것에만 주목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만 전달했던 건 아니었을까, 항상 그 이상의 어떤 것, 섬세한 결이나 깊이나 빛 등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비단 연기와 관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때로는 실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랠프 길레스피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처럼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랠프에 대해 생각할 때는 자신의 실수들이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그녀 역시 그 시대가 낳은 자식이었으므로 랠프에 대한 느낌이 단순한 성적 호기심이나 정감이 아닌지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번역을 통해야만 말해질 수 있는 감정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감정들은 번역을 통해야만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번역은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하기도 하고.”(「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67)

 

 

이 소설에서 로즈는 의붓어머니 플로와 학교 선생에게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란 훈계를 듣는다. 사랑과 관계가 강요와 책임으로 자주 변질하듯이 한 사람의 정체성도 상대에 따라 사랑스러운 거지 소녀가 되기도 하고 경멸스러운 기득권층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잘 나갈 수 있는 존재인지 증명해야만 하는 관계도 있고, 변함없이 잘해줘야 하는 역할을 요구받을 때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이야기에 담지 않아도 번역하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도 있다. 로즈는 랠프 길레스피를 통해 그런 관계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결혼 같은 관습도 인연의 절차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관계!

플로가 묵고 있는 요양원에서 노인들이 아이 때처럼 스펠링 맞추기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단어가 되어 의미가 되기 전의 스펠링. 스펠링은 아직 미래가 비밀스러운 인간의 아이 때 모습이기도 하다. 노인은 많은 스펠링이 담긴 책처럼 완성된 것인가. 잘못된 지식과 편견과 실패와 악의로 가득하다면 그 책을 누가 볼 것인가! 그러나 삶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먼로에 의해, 로즈에 의해 드러난 이 책의 많은 인간 군상들이 그것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도 자신을 다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사는 존재다. 우리의 모습, 시선, 마지막 말 모두에 우리 자신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게 다 인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