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과학 - 복잡한 세상의 연결고리를 읽는 통계물리학의 경이로움
김범준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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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매일 실생활에 긴밀한 도움을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거리감을 많이 느끼는 학문이다. 어렵고 생소한 개념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지적하게 되는 학문 특징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정다운 인사와 음악으로 채소를 키우면 무럭무럭 자란다는 얘기는 거짓, ‘사랑’이라고 적은 물통 안에 물을 담으면 물 분자의 형태가 예뻐져 건강에도 좋다는 것도 거짓, 게르마늄 팔찌가 혈액 순환을 돕는다는 것도 거짓, 집 아래에 수맥이 있어 잠을 못 잔다는 것도 거짓, 조상 묘의 위치가 후손의 성공을 결정한다는 것도 거짓, 혈액형과 성격이 관계가 있다는 것도 거짓, 태어난 시점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주팔자도 거짓, 뇌호흡과 텔레파시, 지구 나이 6000년이라는 창조과학도 황당한 비과학적 주장이라고 과학은 연신 비판하는 역할이다. 기술과 지식이 좇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늘어가는 현대에서 과학만큼 검증과 비판으로 바쁜 학문도 없을 것이다.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 종교 등 어느 것 하나라도 믿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좋은 꿈을 꾸면 로또를 사 볼까 생각하는 게 한국 사람의 흔한 심리 아니던가. 과학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과학을 꺼려 하는 사람은 오해까지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지식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유의 방식”이고, “수많은 시험결과와 관찰 자료를 모아, 현재 내릴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최선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완벽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에 열려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거다.” 만물을 통제하는 상상적 존재(神)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두려운 진실의 맨얼굴을 용감하게 이성의 눈으로” 마주하자는 게 과학의 취지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아름다움은 결국 누적된 체험의 결과”이듯이 과학도 그런 과정 속에서 성장해왔다.

 

 

생물학 공부를 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숫자가 있다. 우리 몸에는 1,000억 개(정확히는 860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우주 관련 책이나 물리학 책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숫자가 있다. 우주에는 1,000억 개 정도의 은하가 있다. 신경세포 수를 포함해 우리 몸에 100조 개에 달하는 세포가 있듯이 각 은하는 수천억 개가 넘는 별들을 품고 있다. “지구가 우리은하 전체를 한 바퀴 도는 것을 한 해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12월 31일 밤 11시 30분쯤이고, 우리 모두는 우리은하의 1년 중 한 4초쯤 살다 가는 셈이다. 공간적인 면에서나 시간적인 면에서나 우리는 정말로 티끌과 같다.” 존재는 별의 먼지로부터 와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지만 이 세계는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게 없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두루 살펴보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인간은 참 대단하면서 참 하찮게도 느껴지는 양가감정이 든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는 공부’라는 점에서 기쁨과 좌절도 동시에 느낀다. 성과가 아니라 ‘알고자 함’과 ‘나누고자 함’이 인류를 성장시킨 진정한 동력이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중서적 출판보다 논문 한 편 더 써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쪽이 훨씬 이득일 텐데도 김범준 교수가 이 책을 쓴 것도 그런 동기에서 나왔다.

 

 

 

이 책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현실의 빅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복잡계 과학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설명하고 이해하는 호기심-추동 연구(curiosity-driven research)’에 기반한다. 물이 얼음이 되는 온도의 문턱값이 있듯이 문턱값 예측은 지진과 같은 재난을 대비하는 방법이 된다. 과학은 ‘운’이라고 눙치는 게 아니라 ‘구라모토 모형’ 등으로 현상들이 상호작용하며 때맞음(synchronization)으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한다. 정확하게 이용한다면 통계물리학은 세계를 더 명확히 볼 수 있는 지표를 제시할 수 있다. 2016년 한국의 촛불혁명처럼 “비폭력 저항운동이 폭력적인 저항운동에 비해 무려 2배 이상의 성공률을 보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누적확률분포 도표로 소득세와 재산세를 부과하는 것이 부의 편중을 막는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세기 프로젝트에서 촛불을 들지 않아 사진 분석으로는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을 ‘암흑물질’로 설정한 것에는 웃음이 절로 터졌다.

 

 

 

 

같은 데이터로도 방법이 달라지면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선택치우침’이 있으면 역설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과학은 경고한다. 선거 개표 시 실제 지도에 정당을 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구비례지도(키토그램)로 표시하면 더 명확히 상황을 볼 수 있다.

 

 

 

 

개미 한 마리가 그렇듯 인간 개인의 힘도 미미하다. 그러나 집단이 되면 개미도 인간도 놀라운 창발현상(개별 구성요소는 가지고 있지 않는 새로운 거시적인 특성을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을 보여준다. 유머가 넘치는 김범준 저자는 차은우와 본인 비교로 중력파를 설명했는데, 기생충학자 서민이 “저자가 차은우를 닮았다는 대목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책”이라는 평을 달기도 했다(ㅋㅋ). 이세돌과 알파고 승부전에서 저자가 읽어낸 의미도 좋았다.

                            

“사실 내가 이번 승부에서 느낀 것은, 인간의 직관력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근거 없던 자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인간의 위대한 직관도 결국은 프로그램으로 구현 가능한 유한한 단계의 계산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가슴 아픈 깨달음이다. 인간의 위치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인간도 진화의 연속선상에 놓여 다른 생명체 모두와 기원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경험한, 이번에는 우리가 신비롭게 여겼던 인간의 지성에서 다시 발견한, 익숙하지만 다른 연속성의 깨달음이다.

‘집중’과 ‘직관’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에 빠져 자랑스러워했던 인간 지성의 엄청난 능력이 아니라, 결국 어쩔 수 없이 한계 지워진 가여운 인간 지성의 두 약점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얼마든지 넓고도 깊게 볼 수 있는 지성은 ‘집중’과 ‘직관’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집중’ 없이 한 번에 모두 다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직관’ 없이 끝까지 계산해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인간의 ‘집중’과 ‘직관’ 없이 모든 것을 ‘계산’으로 환원해 처리할 수 있는 미래의 지성 앞에서, 사람의 연약한 가여운 지성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의 정보를 0으로 수렴하는 시간 안에 계산으로 처리하는 것은 인공지능에게도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이런 한계에 맞서, 인공지능도 ‘집중’과 ‘직관’을 배울까. 그럼 인공지능이 갖추게 될, 인간보다 더 넓은 ‘집중’과 더 깊은 ‘직관’은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성이 만든 지성이 만들 지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지수함수로 한국의 성씨 분포와 카톡방의 데이터를 비교해 ‘버스트(burst, 잠잠하다가 다시 어떤 일이 후다닥 여러 번 일어나는 현상)’를 설명하는 것과 영화 생태계의 불공평을 비판하는 것도 호기심 많은 물리학자 다운 분석이었고, 분포함수를 통해 득점이나 신기록 경신이 인과적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건이라는 도출, 과학책과 소설책의 판매량 비교로 “우리나라에서 출판하는 책들의 판매량의 반감기가 두 달이 채 못 된다는 결과로부터 대부분의 출판된 책들이 1년이 지나면 가장 많이 팔렸을 때에 비해 판매량이 1%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흥미로웠다. 브라운 운동(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운동)을 만취자의 이동에 비유해 설명하는 것도 재밌는 발상이었다. 영화 《컨택트》를 고전역학으로 볼 때의 해설도 유익했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미래를 보는 시각은 정반대다.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 고전역학이라면, 양자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정확히 결정될 수 없다는 ‘불확정성원리’와 아주 작은 변수로도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카오스이론’으로 대치한다. 인과론과 목적론적인 고전역학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양자역학이 말하듯 우리가 정확히 입증할 수 없는 영역도 분명 이 세계에는 존재한다. 과학자들은 늘 말한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국이 노벨상을 받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반어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은 조천호 저자가 『파란하늘 빨간지구』에서 밝힌 소회와 다르지 않았다. 학계의 문제도 개선되어야겠지만 한국인의 인식도 상전이(물질의 상이 변하는 것)가 일어나야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더 배울 수 없다.” 자본주의와 각종 카르텔로 돌아가는 세태, 황색 언론과 가짜 뉴스, 기레기 욕을 하긴 쉽지만 각자가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 들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이상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투명성, 합리성, 객관성을 방법으로 한 과학적 사유 방식이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길. “공통의 기반에 함께 동등하게 서 있어야만 합리적인 추론을 통한 합의도 가능”하고 건강하게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목에 ‘과학’보다 ‘관계’를 더 앞에 둔 이유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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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1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19-12-31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AgalmA 2020-01-01 20:37   좋아요 0 | URL
초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0-01-24 0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9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조천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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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인류의 태동을 말하는 책의 시작은 비슷하다. 138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났고 태양계가 은하수의 알맞은 위치에 자리 잡아 원시 지구는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적당한 환경이 되었다. 지구 나이를 현재 약 46억 년으로 보는데 35억 년 전 엽록소를 가지고 광합성을 하는 세균인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 지구상에 출현해 단순 원시 생명체가 고등 생물로 진화하는 데 필수 요소인 산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산소가 있으면 자외선으로 쪼개진 수소가 지구 중력 밖으로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 지구의 물이 손실되지 않는다.” 또 기후 안정에는 달의 역할도 컸다. 원시 행성이 원시 지구와 충돌해 그 과정에서 달이 만들어졌다. 달은 지구 자전축의 흔들림(세차 운동)을 안정시켰고, 지구의 하루를 정하는 역할을 했다. “달이 없었다면, 지구 자전축의 변화가 지금보다 더 커서 날씨 변화가 극심했을 것”이고, “극심한 기후에서는 인류 문명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고, 인류는 1만 년 전에야 농업을 시작했으며, 7000년 전에야 문명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문명에 대해 지겨워하며 외우(고 뒤돌아서면 까먹)는 학습에 그쳤지만 여기서 조천호 저자의 관점이 돋보이기 시작한다. “인류가 오랫동안 문명을 탄생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빙하기에는 혹독한 기후에 맞춰 살아야 했기에 사냥꾼이자 채집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기온은 10만 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 크게 요동치다가 최근에야 평온해졌다. 유발 하라리도 깊게 헤아리지 못한 점인데,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세계로 확산된 것은 기후 요인이 크다. 7만 3,500년 전에 인도네시아 토바 화산 폭발로 지구 평균 기온이 12도나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멸종에 가깝게 갔는데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삶의 조건이 그나마 나았던 에티오피아 북부 고원에 몰려 있었다. 이후 인류는 해안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5만 년 전에 아시아와 호주에 도달했고, 약 3만 년 전에는 시베리아 동북부, 빙하기가 후퇴한 2만 년이 지나고 1만 5,000년 전에는 북미 대륙에 다다를 수 있었다. 1만 2,000년 전에 현재의 따뜻한 간빙기인 홀로세 Holocene(인류가 자연과 조화로운 ‘완전한 시대’라는 뜻)가 시작되었다. 농업이 시작되고 식량 저장과 보호를 위해 사회조직이 필요해졌고 군대도 조직했다. 재산 관리를 위해 수학, 문자가 발명되었다. 우리의 자부심과 달리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서는 거래 장부였다. 그러나 문명은 홀로세 가 들어선 후 약 5000년이 지나서야 탄생했다.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변화하면서 해수면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해수면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강 하구에 대규모 농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해수면 높이가 안정화된 이후에야 4대 고대 문명이 꽃필 수 있었다.

 

「우리는 인류 문명이 인간 지성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역시 좋은 기후 조건을 만난 덕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일 뿐이었다. 산업 혁명 이후 인류는 수억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태워 오늘날의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이 번영은 과거 7,000년에 걸친 문명을 지탱해왔던 안정된 기후를 붕괴시킬 정도로 위협이 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자연적인 기후변동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되었다. 지구 미래는 새로움이 아니라 지속에서 찾아야 한다. 홀로 세는 우리가 아는 한 인류가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홀로세를 지켜내야 할 절박하고 충분한 이유다.」

ㅡ 1장 「기후,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세까지」

 

 

기후는 고대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인류 문명의 변화 요인이다. 태양에너지 변화와 화산 활동으로 인해 14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소빙하기가 있었다. 혹독한 날씨, 흉작과 전염병을 신이 내린 벌이라 생각하든 사회 체계의 문제로 보든 기상 이변은 언제나 인간 사회를 뒤흔들었다.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라는 말이 돌았다.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힌 군중들이 유럽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수백 명씩 죽였다. 또한 사람들은 소빙하기 시기 몰아닥친 고통이 마녀 때문이라고 믿었다. 17세기까지 대략 20~50만 명의 사람이 마녀사냥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중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던 때는 거의 언제나 소빙하기에서 춥고 가혹했던 기간과 일치한다.

(중략)

소빙하기에 각종 재난이 닥치고 수확량이 떨어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영농 혁신의 선두 주자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였다. 휴경지 농법을 고안하고 농작물 재배를 다양화했으며 기상 이변에 대비해 댐을 쌓아 간척지를 개척했다. 영국도 이를 따라 했으나 프랑스는 대혁명 전까지도 이 방법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영농 혁신에 뒤처지면서 기근에 더 시달렸다.

(중략)

1788년에서 1789년에 걸친 매우 추운 겨울,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경제활동이 중단되어 재정 위기가 찾아왔다. 루이 16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삼부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삼부 회의를 구성하는 성직자와 귀족은 특별과세를 거부하고 이를 평민에게 전가하려 했다. 평민들은 이에 반발해 국민회의를 발족했다. 국왕이 무력으로 국민회의를 해산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날 곡물 가격이 가장 높았다.

계몽된 사회는 기상 이변, 흉작과 전염병의 원인을 신의 분노나 마녀의 저주에서 찾지 않고 그 사회 체계의 문제로 보았다. 즉, 기상 격변에 따른 기근은 지배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넘어 종교적·정치적 위기로 치달을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 결국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중략)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1650년 이후 가뭄과 홍수를 극심하게 겪었다.…(중략)…대기근 당시 양반층은 늘고 평민·노비층은 줄어드는 인구 비율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누가 대기근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냈는지 보여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신앙이 퍼졌다.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사회안전망이 어느 정도 갖춰진 한양으로 몰렸고, 일부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중략)…영조와 정조 시대에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7세기 대기근으로 빚어진 위기를 수습하면서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ㅡ 1장 「기후,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세까지」

 

 

냉방과 난방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봉준호의 화제작 《기생충》(2019)을 날씨와 환경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자 박 사장 가족은 피크닉을 포기하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와 한우를 넣은 짜파구리를 먹으며 쉬면 그만이었지만, 기택 가족은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난민 신세가 되었다. 빛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지하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 기택은 모든 인간다움을 박탈당하고 만다. 물론 모든 인류는 지구에서나 인간다움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환경을 주어진 것으로만 보고 제대로 돌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몰랐을까. 모른 척한 게 아니라? 마크 트웨인은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자연재해가 나를 비켜가기를 맘속으로 빌기만 한다면 원시 시대 인류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오늘 일용할 식량과 한 치 앞만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제대로 알아보자. “‘지구온난화’는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 배출량의 증가로 인해 20세기 초반부터, 특히 1970년 후반 이후 뚜렷한 기온 상승을 의미한다.” 공기 중에 약 0.04퍼센트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온실가스는 지구온난화의 급소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와 에어로졸(미세먼지)의 증가, 태양 활동 변화나 화산 폭발 같은 외부요인(기후 강제력 climate forcings)과 일어난 변화를 증폭시키거나 상쇄시키는 내부 되먹임이 함께 작용해 기후를 변화시킨다.

“산업혁명 이후 증가한 이산화탄소로 인해 1초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네 개의 폭발 에너지, 즉, 하루 동안 약 35만 개의 원폭 에너지가 대기에 방출된다. 하지만 그 에너지양에 비해서는 지구온난화가 크지 않다. 이 에너지는 바다에 90퍼센트 이상, 육지에 5퍼센트 정도 흡수되고 대기에는 2퍼센트 미만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지구온난화는 수십 년 전 온실가스 농도에 대한 반응이다. ‘이미 저질러진 온난화’의 미래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예방과 대비에도 미온적이다. 탄소 배출은 태풍을 강하게 만드는데, 우리나라에서 태풍은 재산 피해 규모로는 자연재해 1~2위를 차지한다. “2002년 태풍 루사는 5조 1400억 원, 2003년 태풍 매미는 4조 7,000억 원의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북극 해빙도 그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북극 해빙의 변화는 먹이사슬의 붕괴뿐 아니라 해류 순환의 교란으로 지구촌 수산자원의 생산성에 불리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북극 해빙의 변화는 제트기류의 변화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극한 날씨 현상이 발생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빙하 크기는 늘 변화했지만, 오늘날처럼 변화하진 않았다. 2만 1,000년 전에 현재보다 2.5배 큰 빙하가 육지를 뒤덮고 있었다. 여기서 간빙기로 변하는 과정이 1만 년 거렸다. 현재 인류는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진입할 때보다 스무 배 이상 빠르게 지구를 데우고, 이에 따라 해수면을 상승시키고 있다.” 기후변화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극지방과 지대가 낮은 섬에서 주로 일어나서 문제를 간과하거나 그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후일로 미루기 쉬운데 우리는 지금껏 그래왔다. 앞으로는?

 

 

 

 

 

「‘지구위험한계 Planetary Boundaries’는 그 영향력에 따라 세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범주는 기후변화, 성층권 오존층의 파괴, 해양 산성화다. 이 요소들은 이구 전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두 번째 범주는 토지 이용 변화(산림 파괴), 민물 이용, 생물 다양성 감소, 질소와 인의 과잉 공급이다. 이들은 지역 규모에 작용해서 지구 전체 규모로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범주는 대기 에어로졸과 신물질(화학 오염과 방사능)이다. 이는 구성 성분, 지리적 위치와 기상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복잡하다. 이는 구성 성분, 지리적 위치와 기상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복잡하다. 대기 에어로졸과 신물질의 위험한계는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아 수량화하지 못했다.

(중략)

지구온난화를 1.5도 이내로 막으면 2도 상승하는 것에 비해 인류에 닥칠 기후변화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해수면 상승이 10센티미터 낮아져 피해를 볼 사람이 1,000만 명이나 줄어들 것이다.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와 열대지방의 옥수수 생산량 손실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극심한 폭염에 노출되는 사람도 약 4억 2,000만 명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그리고 세계 전체의 어획량은 2도 상승할 때 연간 약 300만 톤 감소하는데, 1.5도에서는 그 절반인 150만 톤만 감소한다.

(중략)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각국이 자발적으로 서약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지킨다 해도 2100년에는 기온 상승이 3도가 될 예정이다. 2도 안정화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1.5도로 제한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IPCC 특별 보고서는 0.5도 더 낮추려는 목표는 모든 측면에서 광범위하며 전례 없는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며 향후 10~20년 이내에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0년대가 지구의 심각한 파괴를 막을 수 있는 인류의 마지막 기회이며 그 책임이 우리 세대에 맡겨졌다.

지구 규모는 아니지만, 이미 국가 규모로 짧은 기간에 전체 시스템을 바꾸어본 역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시 체계가 그 성공적인 예다. 이에 견준다면 기후변화 대응 대전환에 필요한 10년은 불가능한 시간이 아니다.

(중략)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면 지구적으로 해양 증발량이 많아져 강수량도 증가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은 대기와 해양 간의 물 순환을 더욱더 빠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정하게 내리는 비는 줄어들고 집중호우는 많아진다.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하천 유출량이 커져, 물을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효율이 낮아지고 경작지의 토양 침식이 커진다. 반면 공기가 하강하는 지역인 건조지역은 더욱 건조해져 가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중략)…세계은행은 20세기가 석유 분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물 분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석유는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지만, 물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니 더 심각한 셈이다. …(중략)…우리나라는 일본,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 이은, 세계 5위의 가상수(농축산물의 생산·유통·소비·폐기 과정에 간접적으로 들어가는 물) 순수입국이다. 즉, 우리의 생존은 다른 나라의 물에 달여 있다.

(중략)

식량이 부족해지면 곡물 생산국은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고 소비국은 수입 확대 노력을 기울이면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이는 다시 추가 수출 제한과 수입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식량 확보 경쟁이 격화되고 식량 자원 민족주의가 발발하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와 같은 식량 수입국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과 정치적·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질 우려가 높다. 이미 지난 2010년, 러시아는 가뭄이 일어나자 밀 수출을 중단했다. 이에 따른 밀 가격 상승은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에서 식량 폭동과 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중략)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흉년이 와도 기근을 겪지 않지만, 권위주의 체제라면 쉽게 기근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기아가 발생하는 까닭은 식량 부족보다 식량을 확보하고 통제할 능력이 부족한 데 있다. 20세기 말에 기아를 겪은 북한과 아프리카 수단은 모두 독재국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지만 지배자가 죽는 일은 없다. …(중략)…민주주의의 수준이 재난 대응의 수준을 결정한다. 이것이 기후 변화 시대에 최저 자원 빈국에 초과다 인구밀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절박하게 필요한 이유다.

(중략)

세계 인구의 40~44퍼센트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해안 지역에 살고 있다. 해수면 상승은 저지대를 침수시키고 태풍이나 폭풍, 해일에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든다. 세계의 강 하구 삼각주 비옥한 땅에 3억 명 이상이 거주한다. 이들 상당수는 개발도상국 사람이므로 식량과 물 부족으로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이는 해수면이 상승하면 환경 대 이주가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

ㅡ 3장 「위기, 파국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우주를 떠도는 먼지들이 서로 뭉쳐 태양, 지구, 달도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사람도 우주에서 날아온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바다 먹이 사슬에서 필수적인 식물성 플랑크톤 번식의 영양분 철분, 미네랄 등은 사막에서 날아온 흙먼지에 기인한다. 비를 내리는 구름도 먼지 주위에 응집한 작은 물방울의 집합체이다. “황사 같은 사막 먼지는 태양 가시광선을 막는 냉각 효과와 지구 적외선 흡수라는 가열 효과”를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는 먼지 없는 세상을 바라지만 먼지마저도 이 세상에 훌륭한 쓸모다. 우리가 증폭시키는 오염과 무책임이 문제다.

 

「세계에서 매년 700만 명이 대기오염에 노출돼 목숨을 잃고 있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정에 따라 화석연료 사용을 감소시키면 기후변화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대기오염도 줄여 매년 100만 명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세계보건기구는 분석했다.

(중략)

2016년 과학 저널 《네이처》에 호주 과학자들이 「온실가스 배출량과 기후변화 피해 간의 세계적 불일치」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 기후변화 원인을 제공했지만, 그 피해를 적게 받는 기후변화 ‘무임승차’ 국가는 일반적으로 온대와 아열대 지역에 있다. 반면 적은 온실가스를 배출했으면서도 큰 피해를 보는 ‘강제 승차’ 국가는 주로 열대지역에 위치한다. 우리나라는 기후변화 무임승차 국가에 속한다. 즉, 기후변화에 책임이 큰 나라다.

저위도 국가가 기후변화에 취약한 이유는 단지 가난 때문만은 아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보고서는 저위도 지역에서 기후변화가 빨리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저위도 지역은 계절과 날씨 변동이 작아서 다른 지역보다 기후변화가 빨리 드러나기 때문이다.

(중략)

위험은 권력과 자원이 분배되는 위계와 질서에 따라 분배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저소득 국가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7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G20 국가들은 세계 온실가스의 약 80퍼센트를 배출한다. 기후변화의 원인 제공자는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이지만,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난의 위험은 엉뚱하게도 가난한 자들을 덮친다.

(중략)

빈곤층을 줄이려면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후변화와 불평등도 해결해야 한다.

기후변화가 자연에서 사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정의 justice’를 고려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원인 제공자와는 다른 세대와 다른 지역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중략)…기후 변화 대응은 ‘적응’과 ‘저감’을 통해 수행된다. ‘적응’은 이미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해 기후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부정적인 결과를 줄이는 정책이다. ‘저감’은 기후변화의 원인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정책이다. 두 대응 정책에서 지리적·세대적 불균형을 줄이기 위한 정의를 고려해야 한다.

(중략)

미국 CIA 출신들이 중심이 된 국제전략연구소 CSIS는 2007년에 「결과의 시대」라는 보고서에서, 앞으로 기후 변화 때문에 이주와 이민이 대거 증가하면서 인종과 종교, 식량 갈등이 새롭게 조성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 예로 21세기 들어 최악의 인종 청소가 자행됐던 ‘다르푸르 사태’를 최초의 ‘기후 전쟁’으로 꼽았다.

(중략)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시대였지만, 현대는 위험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노출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재화의 분배’를, 현대사회에서는 ‘위험의 분배’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사회에서 위험은 우연히 발생하는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원치 않았고, 또 택하지도 않았다. 결국 아무도 위험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온실가스와 오염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라는 무책임성이 기후변화와 지구환경의 위험을 ‘외재화’한다.」

ㅡ 5장「대응, 기후변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 효과는 인간 사회의 복잡계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 가뭄이 아랍의 봄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되었고 시리아 내전과 수백만 명의 난민 발생에도 연관되는데, 즉 기후변화는 기존 갈등 요인을 더욱 증폭시킨다. 위험이 커질수록 부유하고 힘 있는 자도 위험을 벗어날 가능성이 적어진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적했듯이 “위험은 무지가 아니라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지식에서,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산업 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체계에서” 일어났다. “현대의 위험은 우리가 모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류 문명에서 비롯한다,”

저자는 ‘18세기 말, 이마누엘 칸트가 자유롭고 이성적인 시민으로부터 세계주의가 확대되는 역사 과정을 예견했지만, 정작 세계 시민으로서 함께 협력하도록 이끄는 동력은 세계 시민 의식이 아니라 기우 변화와 지구환경의 위험’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인류의 문명, 세계 불평등과 분배, 민주주의를 비롯한 각종 의식 수준의 척도까지 되는 걸 망라해 보여주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지구공학 또는 기후 공학ㅡ태양 복사에너지 조절,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성층권 에어로졸 주입’, ‘이산화탄소 포집·저장’ 방법 등ㅡ이 주목받고 있기는 하나 섣부른 기후 조작이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기에 실현 가능성이 현재 희박하다. 지금 최선은 “만병통치약을 찾을 게 아니라 지구를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이다.

 

저자가 30년간 근무했던 국립기상과학원을 나오며 소회를 밝힌 글이 말미에 있다. 한국 과학기술 정책에서 창의적일 수 없는 관료적 위계 체계, 기술 개발이 아닌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전락, 인력 투자와 연구 여건에 인색하면서 성과만을 기대하는 심보, 정책 결정자의 실적을 위한 국가 도박이 되는 문제점을 꼬집고 있는데, 짐작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주요 실무자였던 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정말 심각하다 싶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과학의 가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한국 정부의 꼴이 경제 성장을 위해 기후가 망가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던 인류의 모습과 판박이다. 우리는 나쁜 것마저 속속들이 닮아 정말 인류 공동체라 할만하다-_- 이런 인류가 과연 지구를 살리고 지킬 수 있을지. 히어로가 우릴 구원할 거라는 믿음 속에서 재난 영화를 앞다투어 보며 우리 스스로가 이미 재난이며 재난을 만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닌지 그 생각에 추운 겨울 그리고 앞으로가 더욱 오싹해졌다.

 

 

「국가 기술 시스템을 만들어본 사람은 압니다. 한 줄 공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과학법칙과는 달리 기술은 끝없는 시행착오, 실패의 연속,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 작업의 반복을 통해서만 겨우 조금씩 실질적인 가치를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열역학 원리는 후진국에서도 알 수 있지만, 자동차 엔진은 아무 나라나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스템적인 속성을 가진 국가 과학기술 혁신은 통합, 연결, 누적이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국가 연구개발은 통합된 틀에서 과학기술 성과를 서로 연결하여 누적해가는 과정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혁신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단박에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겁니다. 연구기관의 자체 시스템으로 결정한 전략이 아니기에 통합, 연결, 누적으로 겨우 이루어놓은 시스템이 파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도 없이, 항상 고만고만한 새로운 주제에 허덕이는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뭔가 요란스럽게 뛰어다니지만, 항상 제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결과가 축적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혁신은 불가능합니다.

(중략)

이것을 이상이라고 치부하면, 현실의 모든 제약이 ‘지금 이곳’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곳으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가치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 스스로 냉소로 상황을 견디게 됩니다.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벽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모두를 살리게 될 겁니다.」

ㅡ 나오는 말 「국가 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은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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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2-11 2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신제품을 시장에 쏟아내고, 이를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긍정적인 경제활동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의 위기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듯 합니다. 미래의 자원을 현재 소비하려는 의식을 고쳐야 비로소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AgalmA 2019-12-12 06:57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이시죠. 근데 우린 옳은 길을 알면서도 딴길로도 새는 이상한 종족이라서ㅜㅜ
자본주의 아래 소비 지향주의가 쉽게 꺼질까 싶어요....
 
신 없음의 과학 - 세계적 사상가 4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김명주 옮김, 장대익 해제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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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교회 분들이 거리에서 티슈나 사탕, 팝콘 등을 나눠 주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예수 믿으세요” 하는 것을. 그 행위의 심리를 따져 볼까. 로버트 치알디니가 『설득의 심리학』에서 소개하는 ‘상호성의 원칙’에 해당하는데, 제품 홍보인 척 공짜 샘플을 나눠주면서 자연스러운 부채의식을 심어 제품 구매를 유도하는 판촉 행위와 같다. 받을 건 받고 안 믿으면 그만이라고? 이 고도의 부채 시스템은 인류 문명의 독특한 특징이다. 종교가 이 세계에 뿌리내리는데 그런 심리 공략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는 호의 뒤에 숨어 전도가 목적인 그분들을 향해 “용기를 갖고 무신론을 공부해 보세요”라고 늘 말하고 싶었다. 전도는 당당할 수 있는데 무신론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조건적인 신념을 방패로 삼고 모순적인 순환논리 속에서 종교를 모든 것에 적용하는 이와 대화는 제대로 되지도 않는다.

 

 

「종교인과 말할 때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아도 논쟁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의 가장 멋진 점은 깊은 신앙으로 내면의 불신에 도전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크리스토퍼 히친스)

 

「우리가 신에 대한 직관력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묘한 형태의 증거라는 거죠.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점화 현상’입니다. 즉, 증거 없이 시작해도 된다고 일단 말해놓고 나면 그대로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미묘한 형태의 증거가 되고, 그러면 추가 증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경계해야 할 지적 능력의 타락, 또는 유혹이 됩니다. 이런 논리를 작동하면 자기기만의 영구운동기관을 얻게 됩니다.」(샘 해리스)

                                       

「일전에 학식이 높은 생물학자와 논쟁을 했어요. 그는 뛰어난 진화 해설자이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죠. 제가 말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비결이 뭡니까?” 그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저는 당신의 합리적인 논증 전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런 다음에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했어요.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했어요. 공격적으로 들릴 정도였죠.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상대를 쓰러뜨리는 결정적 한 방이었죠. 그런 말은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니까요. 게다가 그는 그 말을 일종의 변명투가 아니라 단호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리처드 도킨스)

 

 

비종교인조차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라고 양비론으로 치부하고 공격하는데, 종교를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곤경에 처한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네 기사’가 도착한 걸 환영한다. 원래는 삼총사였는데 마지막에 합류했던 히친스가 2011년 사망해 무신론의 훌륭한 기사를 잃은 게 안타깝다.  

이 책의 원제 『네 기사Four Horsemen』는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기사에 빗댄 말로, 기존의 무신론과 구별되는 그들을 ‘신무신론’으로 평가한 언론의 논평에서 나왔다. 2001년 911 테러 공격 이후 2004년에서 2007년 사이 나온 그들의 저서(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2004)와 『기독교 국가에게 보내는 편지』(2006),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2006)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2006),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7))는 금기시되는 종교를 과학적 관점으로 비판 분석함으로써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열기 속에 2007년 이들이 모여 자유토론을 한 것을 담은 게 이 책이다. 이들 네 기사의 과학적 회의주의 분석들로 인해 무신론자들이 주장을 펴기 훨씬 수월해졌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소수 종교인 몰몬교보다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낮다. 종교적 이유 때문에 진화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40%나 되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선 때마다 대선 주자가 표를 얻기 위해 각 종교계를 찾아가는 게 관행인데 내겐 늘 씁쓸한 풍경이었다.

 

종교 논쟁의 핵심인 ‘신은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신자든 무신론자든 물러설 수 없는 주제이므로, 네 기사는 연결되는 차선의 문제부터 신중히 격파해나간다. “절대적이고 도전할 수 없고 영원한 권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가 모든 종교에 내재되어 있다”(히친스)는 데에 네 사람은 모두 동의한다. 이들 네 기사는 논리와 입증할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해 주장을 검증하고 합리적·경험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권유한다. 도킨스는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 아무리 불가능하게 들린다 해도, 신학적 대안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이성의 도약을 위해 무신론적 세계관의 지적·도덕적 용기를 갖출 것을 제안한다. “과학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모르는지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담론 형태”(해리스)이다. 자신의 어려움과 구원의 버팀목으로 갖는 종교, 은유로 가득한 종교 이야기, 명백한 난센스 속에서 비합리적이고 진실하지 않은 종교적 충성을 현실의 틀로 갖는 태도야말로 정당한 이유 없는 오만이자 자만이다. 종교 전도자들과 달리 합리적 무신론자들은 “옹호하는 입장이 타당한 증거를 대야 하는 ‘입증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결코 《성경》이나 권위 있는 선언으로 도망치지 않는다.”(데닛) “종교도 제약 산업이나 석유 산업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기를”(데닛) 바란다. 신의 말씀을 따랐다며 온갖 불합리한 행위를 하는 이들이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자유의지를 내세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에 따른 악과 불행의 결과도 신의 뜻과 책임으로 떠넘기면서? “신이 없을 때 우리는 희망과 위안의 진정한 원천을 발견한다. 예술, 문학, 스포츠, 철학은ㅡ다른 형태의 창의성과 묵상과 더불어ㅡ즐기는 데 무지나 거짓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도 있다. 과학은 내적 보상 외에도,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진정한 자비를 제공할 것이다. 지카 바이러스를 물리칠 백신 또는 치료법이 마침내 발견되어 무수한 비극과 죽음을 막을 때, 신자들은 그 일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까?”(해리스) 우리는 신비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혼동하지 않는 이성의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노엄 촘스키는 이 세상에는 ‘문제와 ’신비‘라는 두 종류의 질문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질문이고 신비는 그렇지 않은 질문이죠. 우선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인정하는데, 과학에는 신비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문제, 난해한 문제가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존재해요. 어떤 것은 결코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개념을 미화하는 것은 과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데닛)

 

 

믿음을 옹호하는 어떤 논증이나 반론으로 생각되는 게 있느냐는 해리스의 질문에 대한 도킨스의 답변에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신의 설계론으로 설명하게 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저는 우주 상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상적이라는 개념이 그런 상황에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빅터 스텐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적 지능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창조적 지능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죠.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 우주 상수를 미세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지적인 지능이라면, 그 자신은 훨씬 더 미세 조정되어 있어야 하고…….」(리처드 도킨스)

 

히친스는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인간의 인지부조화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필수적인 시스템인 것에 기인하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처리하기 위한 무의식의 작용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 그래서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인식론, 철학, 생물학 등에 관한 모든 논증의 토대로 간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몇 가지 문제에서는 종교인을 설득할 수 있지만 비판을 공평하게 사방으로 펼칠 때 무신론은 난처해진다. 비이성은 언제든 돌아서기 쉽기 때문이다. 이 네 무신론자들은 종교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 바라는 파괴론자가 아니다. 신전과 신상과 신자들을 무참히 없애는 행위은 오히려 신자들끼리 자행해왔다. 도킨스는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성경》 은 필독서라고 말한다. 크리스마스 문화나 예술, 결혼이나 장례의례에서도 종교는 유의미한 역할을 해왔다. 물질적인 것, 하찮은 것, 늘 딴 데 정신이 팔린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인간의 삶을 지적하고 문제를 보게 만든 것이 종교의 큰 힘이었다는 데 네 기사는 동의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사실 문제에 집중한다면, 히친스는 달라이라마는 세습 군주이고, 헬레니즘 유대교가 메시아닉 유대교에 패배한 순간이 패악의 순간이었으며, 종교는 밈과 감염의 문제라고 생각해 종교의 해악에 더 집중한다. 종교가 인류의 살육 사건에 가장 큰 요인이었던 건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 최근까지도 가톨릭교회가 파시즘과 동맹하는 등 패착이 있었지만, 교황 제도처럼 하향식 통제가 불가능한 이슬람교는 지금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비이성을 허용하는 자유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시돼온 무신론 논쟁에서 무신론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지고 있고, 지적으로는 이기고 있다”(히친스). 그러나 네 사람 다 미래를 크게 낙관하고 있지는 않다. 도킨스와 해리스는 사상의 유의미한 변화로도 무신론자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긍정적 입장이라면, 히친스는 “그들은 결국 문명을 파괴하고 말 겁니다”, 데닛은 “그것은 현존하는 단 하나의 재앙”이라고 탄식하며 이 논의는 끝난다.

인간의 역사에서 신앙이 힘을 가진 이념이자 권력이 된지 꽤 오래다. 네 기사가 신무신론을 논한 때보다 지금은 더 상황이 안 좋다. 각종 미디어로 인해 더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합리적 의심과 이성적 판단은 더 힘을 모으기 어려운 상황 같다. 내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은 내 합리적 판단에서 나왔다. 누군가 종교적 믿음을 갖는다면 그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소통은 그러할 때 가능할 것이다.

 

「가장 강경한 노선을 걷는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인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비주의 노선을 취하는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을 취하는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옮긴이의 종합 요약) 

 

 

 

이 책의 대화는 리처드 도킨스 이성과 과학 재단에서 녹화한 영상으로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n7IHU28aR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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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1-23 0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이 종교의 필요조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제 자신이 신을 믿고 있지만, 종교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말이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겠지요. ^^:)

AgalmA 2019-11-24 21:31   좋아요 1 | URL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감 기타 등등 종교적인 걸 받아들이는 게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인격체로서 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종교를 가지게 되는 연유와 계기가 교조적 과정이 끼어 있기 때문에 더 문제적이죠. 종교를 자유와 선택의 문제처럼 얘기하지만 어떤 종교든 복종과 억압의 교리와 시스템을 강요합니다. 그것이 현실 시스템까지 조종하려는 것도 문제적이죠. 종교끼리의 파워 게임도 웃기는 일이고요.
인간이 합리적 이성체라고 할 수 없기에 합리적인 사고로 종교와 대항하자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의 좋은 기능 때문에 허용하자고 하기엔 핵폭탄으로 핵폭탄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소리로밖에 안 들립니다. 종교는 신의 범주가 아니라 끝없이 사람의 문제로만 남게 되겠죠.

유발 하라리가 명상을 선택한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죠.

2019-11-23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4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19-11-23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자유가 비이성을 허용하는 자유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공감합니다. 솔직히 종교가 추구하는 이념(사랑,자비와 같은 선)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니까요.

부채의식이 싫어서인지 사탕이나 물티슈 주면서 믿으라고 하는 거 절대 안 받아요. 모르고 받았으면 쫓아가서 돌려줍니다.

AgalmA 2019-11-24 21:12   좋아요 1 | URL
합리적 이성도 인간이 만든 허상적 관념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성이든 종교든 허점투성이로 우리 곁에 있게 되네요.
강압적인 전도가 아닌 봉사정신으로 믿음을 실천하시는 분도 많겠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한숨나는 모습이 너무나 많습니다. 종교에 대한 불신은 다른 무엇이 아닌 종교가 만들고 있다는 걸 반성해야 할 겁니다.

21세기컴맹 2019-11-24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더 확신이 필요할 때 전쟁과 우리나라의 전광 머시기 목사를 보고 존재유무를 선택했지요.
이 책 만지작거리기 전여 더 한방이 필요했는데 ...

AgalmA 2019-11-24 21:17   좋아요 1 | URL
목사들이나 스님들 혐오스러운 일도 속세 뉴스로 좀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도킨스 <만들어진 신>보다 소프트해서 무신론 관심있는 분이 가볍게 읽으시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이 책 읽고 크리스토퍼 히친스 책이 가장 관심이 가더군요.
 

48년 전 담론인데도 현재에도, 한국 사회에도 여전한 사실들.
의견 차가 있어도 푸코와 촘스키의 맑시즘 비판에 나도 동의. 그래서 알랭 바디우나 지젝의 프롤레타리아 운운은 지식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적 노스탤지어이자 한계라고 느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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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신 없음의 과학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김명주.장대익 옮김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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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데닛의 《주문을 깨다》,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2000년대 초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장하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잔인한 지하디즘Jihadism이 세를 불리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 임금님은 약 400년 동안 행진해왔는데,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임금님을 가리키며 벌거벗었음을 상기시킬 때였다.

추기경이 바티칸궁전에서 전달하는 교의, 펠리시테에게 무릎을 꿇게 하는 교의, 와인으로 가득한 바티칸궁전, 터무니없는 칙령과 내세에 대한 위협에 시달리는 대중……. 이것은 공격받을 만하고 공격받을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공적 영역으로 흘러나와 교육, 법 제정,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장의 정당성을 조사할 때는 상처 입은 감정을 고려할 의무가 없다.
신의 존재 여부가 1급 문제이지만, 그것은 네 기사의 논쟁에서 곧 빠지고 그 자리를 2급 질문들이 대체한다.

신성과 내세에 대한 믿음은 설령 그것이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주장에 근거한다 해도, 선을 위한 힘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그것은 세계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소가 되지 않도록 도덕적 나침반과 도덕률을 제공하는가?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삼는 것은 대부분 은유이다. 종교적 이야기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구조와 위계, 의미가 사라져버린 이 상대주의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틀로 받아들이면 왜 안 되는가?
모든 곳에 편재해서 우리 모두가 느끼는 영성과 신비는 또 어떤가? 당신은 이성과 숫자와 망원경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

두려움 없는 네 기사는 이 2급 주제들로 풍덩 뛰어든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만족스럽지 못한 명제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겹치지 않는 교도권. "과학의 일은 과학에, 나머지는 종교에 맡겨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를 고려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네 기사는 세계, 우주, 인간의 불안은 신비the numinous를 드러내고 경험한다는 점에 기꺼이 동의한다. 이것은 일종의 양보가 아니다. 왜냐하면 뉴먼numen(정신적·창조적 에너지)은 (몇몇 사전에서 설명하는 뜻에도 불구하고) 루멘lumen(빛)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덜 매력적인 현상인 잔인함, 암, 살을 파먹는 박테리아만큼이나 신성의 존재를 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 : 나는 그 모든 것을, 대개는 그의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종교적 조직에서 받는 무조건적 환영이 없다면 인생이 황량하고 외로워질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나는 거의 모든 종교가 감싸고도는 비합리주의의 잔재가 유감스럽지만, 구제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잘해내는 국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인도적 임무를 인계받을 세속의 기구를 찾을 때까지는 교회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나는 이러한 종교 조직들이 명백한 난센스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진실하지 않은 충성에 빠지지 않도록 돕겠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 종교인과 말할 때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아도 논쟁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의 가장 멋진 점은 깊은 신앙으로 내면의 불신에 도전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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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11-17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닛 말이 현명하지만 또한 무책임 하기도 합니다.

AgalmA 2019-11-18 22:16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현명하면서도 적당한 선에서의 마무리죠.^^;
그래서 네 무신론자 중 가장 온건주의 무신론자라고 불리지요.
프로이트는 종교를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신경증˝이라고 했죠. 이 책에 나오는 샘 해리스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종교적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은 한 아이가 또 다시 신과 내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스켑틱》 vol. 17(마이클 코헨 <무신론 연대기>)라고 하기도 했고요.
종교학을 조금만 깊이 읽어봐도 종교는 단순한 신념이 아닙니다. 엘리아데를 읽고 있는데 인간이 이미지와 상징을 연결하는 순간부터 종교성은 태동합니다. 인간은 참 신기한 포유동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11-18 22:15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인간이 종교를 버리고 인본주의에 들어선 순간 뜻 모를 나락에 빠진 것도 있는데요. 신을 믿는 일에도 장단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인류 측면이든 개인 측면에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