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감각 자체가 아니다. 감각에 매몰되어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이 천상의 신들의 회전을 보고 그것을 본받아 우리 내면에 다시 질서와 조화를 가져오는 데에 쓰일 때, “야만적인 진흙탕 속에 묻힌 영혼의 눈”은 비로소 천상의 신들이 사는 저 영원한 세계를 향할 것이다.˝
ㅡ <06. 불을 뿜는 눈: 플라톤>

현대시를 ‘그들만의 리그‘라고 자주 말하는데 철학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위의 저 문장이 21세기에 어울리는지. 차라투스트라 빙의라도 보는 거 같아 내 눈이 민망할 지경.
예술에 국한된 미학을 새로운 위상으로 쓴다는 취지는 좋지만 이 글들이 효과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야마구치 슈가 철학 등반에서 독자들이 초반에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고 한 제 1 경고대로 서양 철학의 계보와 개념들의 지루한 연결, 고답적 수사... 오랜만에 펼쳐든 진중권 저자 책인데 무척 실망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감각‘의 역사를 처음부터, 세세히 짚어보는 건 좋지만 현재의 다양한 학제 간의 지식과 적극적인 연계, 독자의 호기심 자극 등이 부족해 나로선 근본적으로 답답하다. 3부작으로 기획된 책이라는데 이런 식이라면 적극적으로 따라갈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한 건 친절한 대중서는 아니라서 저자의『미학 오디세이』3부작 정도로 기대한 독자라면 그보다 어려울 거라는 각오를 하시길-,-)))










시대의 전환기마다 권력은 구성원들의 신체를 뜯어고치는 생체공학을 발동한다. 가령 감각을 불신하고 정념을 억압하는 데카르트형型 아이스테시스는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을 근대 국민국가의 합리적 주체subject이자 신민으로 길들이려는 기획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아이스테시스의 유미화는 서구에서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유미화의 결실인 미적 예술문화를 파괴하려 한 모더니즘 예술은 산업혁명, 특히 산업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시민사회에 던져준 정치미학적politico-aesthetic 충격의 미학적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데카르트주의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그동안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이성주의의 패러다임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감각지각, 즉 아이스테시스를 구제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미학(감성론)이라는 학문은 바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근대미학(감성론)이 구제한 아이스테시스는 신체활동으로서 감각sensation이 아니라 정신의 하위활동으로서 지각perception이었다.
지각이란 감각이후post-sensory와 이성이전pre-rational의 인지능력이다. 이 영역을 대륙의 이성주의자들은 ‘유사이성’으로,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유사감각’으로 여겼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미학에서 다루는 감성의 영역이 대체로 과거에 ‘내감’이라 부르던 영역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한동안 망각되었던 중세와 르네상스의 내감 이론이 미학을 통해 다시 부활한 셈이다. 공통감, 상상력, 판단력 등 과거 내감의 목록을 이루던 능력들은 18세기에 일어난 감각의 유미화를 통해 새로이 정위定位된다. 근대미학에서 아이스테시스는 ‘지각’으로서만, 그것도 미적 지각으로서만 구제된다.
한편 과도한 이성주의를 수정하는 또다른 방식이 있다. 아예 그것의 토대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근대철학의 완성자 헤겔은 미학이 애써 복원한 감성의 영역을 다시 증발시켜버렸다.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감성의 영역은 자연으로 ‘외화外化’했던 정신이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궁극적으로 ‘지양止揚’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급진적인 이성중심주의의 근원도 데카르트주의다. 따라서 아이스테시스의 영역을 온전히 복원하려면 데카르트주의 자체를 거부하고, 신체와 정신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근원적 체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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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름다움의 진화 - 연애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 갈등의 자연사
리처드 프럼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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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획일성에 대한 욕구가 현대의 과학적 설명 속에 숨어 있는 ‘일신론monotheism’의 망령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이 말은 정말 명치를 때린다. 토드 로즈가 지적한 ‘평균주의‘ 상황과도 비슷하지.
과학 안팎에서 스트리트 파이팅이 활발해야 한다. 안다며 누르고 몰라서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비록 성적 아름다움이 관능적 쾌감을 유발하더라도 성선택은 자연선택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며, ‘갈라파고스핀치의 부리에 작용하는 진화의 힘’과 ‘최고극락조의 구애행동을 형성하는 진화의 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은 ‘아름다움의 본질 및 유래’에 대한 나의 견해와 전혀 다르다. 약간 망설여지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과정은 다소 무미건조하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진화생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이 자연계에서 널리 작용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힘이라는 점을 잘 알며, 그 무한한 중요성을 부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과정은 진화 자체와 동의어가 아니다. 진화과정과 진화사를 살펴보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진화는 종종 변덕스럽고, 기이하고, 우발적이고, 개별적이고, 예측과 일반화가 불가능하므로, 적응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라는 점을 강조할 생각이다.
진화의 결과 탄생한 성적 장식물은 배우자의 자질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호 전달자’와 ‘선택자’의 생존능력과 생식능력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진화는 심지어 퇴폐적decadent이기까지 하다. 간단히 말해서, 개체들은 자신의 주관적 선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적응적인maladaptive 선택을 내릴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생물과 환경 간의 부적합worse fit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류 진화론자(적응적 진화론자)들이 미적 진화 이론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적 진화 이론의 선전善戰에 위기의식을 느낀 적응적 진화론자들의 자기 보호 본능’에 기인한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이 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내 딴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장식물의 다양성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라고 자부했던 것이, 그에게는 절망적인 세계관으로 보였던 것이다. 만약 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삶의 목적의식이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배우자선택으로 인해 진화한 장식물이 배우자의 자질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건 우주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고 뭐냐는 거였다. 나는 그 순간 “진화에 관한 다윈의 미학적 견해를 완전히 소화하여,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설명하는 게 절실히 필요하겠구나”라고 되뇌었다.
나의 과학적 견해는 조류학자로서 새를 객관적·주관적으로 관찰하고, 자연사학자로서 자연계를 포괄적으로 개관한 경험에서 직접 유래한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엄청난 지적·감정적 기쁨을 누렸다. 과학자로서의 내 인생은 늘 흥미롭고 영감이 넘쳤으며, 새의 아름다움이 진화한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돋곤 했다. 나는 이 책에서 “미묘한 미적 진화 이론이 결정론적인 적응적 진화 이론보다 자연을 더욱 풍부하고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성선택을 통해 진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유와 선택으로 가득한, 전율 넘치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적 진화’를 가리켜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라고 한 바 있다. 그것은 다윈의 첫 번째 걸작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의 주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다윈의 정말로 위험한 생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1 그것은 ‘성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라는 개념으로, 다윈의 두 번째 걸작인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의 주제다.
다윈이 제안한 성선택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위험한 것이냐고? 무엇보다도, 다윈의 성선택은 신다윈주의자들에게 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성선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연선택의 힘을 진화의 (유일한) 원동력으로 간주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생물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도 부족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주장한 것처럼, 자연선택은 진화의 유일한 원동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우리가 생물계에서 보는 장식물의 엄청난 다양성을 전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이 딜레마와 씨름하느라 오랜 시간을 들였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으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유명할까! “나는 공작의 꽁지에 있는 깃털을 들여다볼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네!” 공작의 깃털은 자연선택의 결과로 진화한 다른 유전성 형질들과 달리, 생존가치survival value 면에서는 완전히 낭비 그 자체다. 이것은 그가 『종의 기원』에서 내세운 원리들과 완전히 배치된다. 그래서 그가 고심 끝에 최종적으로 얻은 통찰은 ‘뭔가 다른 진화적 힘이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의 정통파 적응주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변절’로 간주했다. 결과적으로, 다윈의 성선택 이론은 그 후 억압되고 오해받고 재규정되어, 끝내 잊히고 말았다.
‘성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는 너무나 위험한 이론이어서, 자연선택의 전능한 설명력을 지키기 위해 다윈주의에서 배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자연계에 나타난 아름다움의 다양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윈의 미적 진화 이론을 생물학과 문화의 주류에 복귀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생물학적 아름다움을 설명할 길이 없다.

『종의 기원』이 발간된 후 맹렬한 공격에 시달리는 동안, 세 가지 문제가 다윈의 마음을 옥죄어왔다. 첫 번째 문제는 쓸 만한 유전학 이론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의 연구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자연선택 메커니즘의 기본이 되는) 유전 이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려고 노력해봤지만 헛수고였다. 두 번째 문제는 인간의 진화적 기원, 인간의 본성,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였다. 인간의 진화적 기원에 관하여,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일부러 힘을 빼고 이렇게 적당히 마무리했다. “이 책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기원과 역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될 것이다.”
다윈이 세 번째로 직면한 큰 문제는 ‘실용성 없는 아름다움’의 기원이었다. 만약 자연선택이 유전성 변이heritable variation의 차별적 생존differential survival에 의해 추동된다면,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수컷 공작 꽁지의 정교한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꽁지가 수컷 공작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며, 굳이 효과를 따져본다면 오히려 방해될 뿐이다. 거대한 꽁지 때문에 행동이 굼뜨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 쉽기 때문이다. 다윈을 특히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한 것은 공작 꽁지깃에 아로새겨진 안점eyespot이었다. 그는 일찍이 “인간의 눈은 수많은 점진적 진보incremental advance가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되어 진화한 것으로 설명된다”라고 주장했다. 각각의 점진적 진보는 빛을 감지하고, 빛과 그림자를 구분하고, 초점을 맞추고, 상像을 맺고, 색깔을 구별하는 등의 능력을 미세하게 향상시키는데, 이 모든 것들이 집합적으로 동물의 생존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작의 안점이 진화하는 중간단계에서는 어떤 합목적성이 충족되었을까? 오늘날 공작의 완벽한 안점이 실제로 무슨 역할을 수행하긴 하는 걸까? 인간의 눈이 진화한 이유를 설명하는 게 지적 도전intellectual challenge이라면, 공작의 안점이 진화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지적 악몽intellectual nightmare이었다.

오늘날의 적응주의자들은 이렇게 자문自問해야 한다. “우리는 왜 모든 자연을 강력한 단일이론이나 과정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는 걸까?” “과학적 획일성에 대한 욕구가 현대의 과학적 설명 속에 숨어 있는 ‘일신론monotheism’의 망령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이것은 ‘다윈의 정말로 위험한 생각’에 함축된 또 하나의 시사점이다.
진화생물학이 진정한 다윈적 견해를 받아들이려면, 다윈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선택과 성선택이 각각 독립적인 진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적응적 배우자선택은 성선택과 자연선택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는 이 책에서 ‘성선택과 자연선택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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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책이 으레 그렇듯 예화도 많지만 타당성 있는 논리적 추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설득의 달인들이 상대로부터 ‘네’라는 응답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책략은 수천 가지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책략이 여섯 가지 기본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범주는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온갖 책략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심리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책은 그 여섯 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앞으로 이 여섯 가지 원칙(상호성의 원칙, 일관성의 원칙, 사회적 증거의 원칙, 호감의 원칙, 권위의 원칙, 희소성의 원칙)이 사회에서 담당하는 기능과, 설득의 달인들이 상대방에게 구매나 기부, 허락, 투표, 동의 등을 요청할 때 그런 원칙들을 능숙하게 적용해 그 엄청난 힘을 활용하는 방법 등을 살펴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최근 연구에서, 우리가 일상적인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의사결정의 지름길을 밝혀냈다(Kahneman, Slovic, &Tversky, 1982; Todd & Gigerenzer, 2007). ‘판단의 휴리스틱스(heuristics, 모든 경우를 고려하는 대신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발견한 편리한 기준에 따라 일부만 고려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옮긴이)’라는 이 지름길은 ‘비싼 것이 좋은 것’이라는 원칙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고 과정을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효과를 발휘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해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믿고 따르게 하는 휴리스틱스이다. 예를 들어 ‘전문가의 말은 진실’이라는 지름길 원칙을 생각해보자. ‘PART 6’에서 살펴보겠지만, 우리 사회는 특정 분야의 권위자로 여기는 사람의 발언과 지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은 경향이 있다. 전문가의 주장을 스스로 검토한 후 납득하는(또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과는 상관없이 ‘전문가’라는 지위에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주어진 하나의 정보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이런 경향이 바로 ‘누르면, 작동하는’ 방식의 자동반응이다. 반면에 모든 정보를 철저히 분석한 후 반응하는 경향은 ‘통제반응(controlled respond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Chaiken & Trope, 1999).

인간의 인식과 관련한 원칙 중에 ‘대조 원리(contrast principle)’라는 것이 있다. 두 개의 대상을 차례로 제시할 때 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원리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 번째 대상이 첫 번째 대상과 차이가 심할 경우에는 그 차이가 실제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먼저 가벼운 물체를 들었다가 이어서 무거운 물체를 들게 되면, 무거운 물체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낀다. 대조 원리는 정신물리학(psychophysics, 인지현상과 자극의 물리적 성질과의 관계를 조사하는 학문 분야-옮긴이) 분야에서 정립된 원리로 무게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인지 과정에 적용 가능하다. 모임에서 매우 매력적인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변변찮은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면, 두 번째 사람이 실제보다 훨씬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상호성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뭔가를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누군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면 우리도 호의로 갚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생일 선물을 받으면 우리도 상대의 생일을 기억했다가 선물을 해야 하며, 누군가 우리를 파티에 초대하면 우리도 파티를 열어 상대를 초대해야 한다. 상호성의 원칙은 타인의 호의나 선물, 초대 등이 미래에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중략) 사실 상호성의 원칙에서 비롯된 고도의 부채 시스템은 인류 문명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저명한 인류학자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핵심을 상호성의 체계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의무감으로 이루어진 명예로운 네트워크 안에서” 식량과 기술을 공유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Leakey & Lewin, 1978). 문화인류학자들은 이 ‘부채의 그물망’을 인류만의 독특한 적응 메커니즘으로 평가하며, 각 개인을 대단히 효율적인 집단의 일원으로 만드는 분업,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 상호의존성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Ridley, 1997; Tiger& Fox,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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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9-15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인상적이었고 몇가지는 유용하게 씁니다 ㅎㅎ 조삼모사 같은 것들..
나머지 시리즈도 사서 읽었는데 이 책이 그중 나은것 같아요 ㅎㅎ
좋은 밤 되세요

AgalmA 2019-09-15 23:11   좋아요 1 | URL
이 시리즈가 너무 많아서 이걸 다 읽어야 하나 고민되던데 초딩 님 말씀 듣고 이 책 하나로 끝내야 겠네요ㅎㅎ🙏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일까봐 안 읽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연휴가 끝나는 밤이네요. 독서보다 가을 만끽 많이 하시라는 말씀 전하고 싶네요🍁🍂🍁🍂 저도 그러고 싶은 희망에^^/

초딩 2019-09-15 23:43   좋아요 1 | URL
ㅎㅎ 넵 가을이요~
계절을 너무 잊고 산것 같습니다~ 말씀 너무너무 감사해요~ ㅎㅎㅎㅎ
좋은 밤 되세요~
전 운전한 발목 부여잡고 이제 자려합니다.

2019-09-15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5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간의 종류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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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렉의 난이도 높은 책에 비해 이 에세이는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형식인데, 그의 저작을 이해하기 좋은 양방향의 지도다.
페렉의 ‘질문하기와 생각하기, 분류하기와 기록하기, 기억하기와 상상하기‘ 능력 발휘를 조망하기 쉽다.

📎
˝즉 우리에게 좀더 가까이 있는 분명한 무엇, 세계는 더이상 계속해서 다시 가야 하는 도정 같은 것도, 끝없는 경주나 끊임없이 재개해야 하는 도전 같은 것도 아니며, 절망적으로 쌓아올린 것들을 위한 유일한 구실 같은 것도, 정복을 위한 환영 같은 것도 아니다. 세계는 하나의 의미를 되찾는 일, 지상의 글쓰기에 대한 지각이자, 우리가 그 저자임을 잊어버린 어떤 지리학에 대한 지각 같은 것이다.˝
ㅡ<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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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춘이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현상이 나에겐 씁쓸하다. 그들의 행복한 기억이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타인의 과거,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미디어가 제공하는 과거로부터 공급되는 것 같아서다.
ㅡ<푸른색 이야기>

일상생활에서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산책을 하다 발아래 꽃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꽃을 피해 발을 내디디는 게 보통이다. 그때 걸음을 멈추고 ‘흠, 고민이군. 이 꽃을 밟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라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웃기는 사람이다. 별생각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정상적인 것 아닌가?

일상생활에서 깊이 생각해야만 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까? 있다. 아니 이 시대에는 너무 많다. 우리가 꽃을 밟느냐 마냐, 혹은 앞사람을 밀치냐 마냐를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은 산책할 때가 아니라 급히 달려가야 할 때다. 〈화차〉의 여주인공은 생계의 벼랑 끝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자신과 처지가 같은 이를 죽이고 그 사람 행세를 했다. 이때 그녀가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대단한 성찰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나와 같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악을 생각하다>

열다섯이 지나서도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종교인, 예술가, 지식인이었다. 종교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강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답을 구하는 편이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좀 별나서 남을 괴롭히다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굳이 어렵게 답을 찾았는데, 이제 이들에게조차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소위 `쿨`하지 않은 것이 돼버렸다.
ㅡ<삶의 의미? 지금 삶의 의미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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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2 0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2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19-09-12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참 오랫동안 북풀에서 뵜네요~ ㅜㅜ 제가 라이크만 주로 해서 ㅎㅎ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언제나 해박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날 되세요~

AgalmA 2019-09-12 18:39   좋아요 1 | URL
세월이 그새 꽤 되었죠^^; 밥벌이로도 모자란 시간 쪼개가며 읽기와 쓰기를 양질로 균형맞춰가며 진행하기 참 어렵다는 걸 느낍니다.
초딩님 독서와 일상의 평안을 저도 빌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