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케스는, 존 허시『히로시마의 증인들』을 위대한 저널리즘 작품으로, 대니얼 디포 『역병이 돌던 해의 일기』 (국내 번역 제목 『전염병 연대기』 , 신원문화사, 2006)를 위대한 저널리즘 소설이라고 꼽았다.
세월호에 있어, 우선적으로 저널리즘 기록이 다양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마르케스는 저널리즘과 소설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말했지만, 시의 모호한 함축성소설의 영역성(단편은 국지성, 장편은 완성까지의 시간 · 작가의 한계)을 생각할 때, 사태의 엄중함을 직시하기에 나는 세월호에 대한 저널리즘 기록들이 시나 소설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진술이라면, 저널리즘 기록결정적 증거일테니 말이다.


어딘가를 찾아갈 때 나침반과 직관 중 어느 게 더 나을까. 이런 비교는 효용성의 문제일까. 문학은 너무 뒤늦은 탐지 기록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이 사건들을 모으고 해석하고 정리하여 보고하는 식은 유사하지만, 문학은 점점 더 느려지고 정체되어 가고 있다. 물론 많은 예언적 문학도 있어 왔지만 그걸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었고 현실에서 방책이 되는 것은 최소한의 영역이었거나 엉뚱한 곳이었거나 아주 나중 일이 되기 일쑤였다. 최근엔 저널리즘과 소설이 합쳐진 형태의 영화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부러진 화살>, <도가니> 등등. 헌데 다이빙 벨과 천안함에 대한 다큐들의 부진한 호응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전달의 방법을 고심하게 된다.

 

문학은 언제나 문학 속에서만 빛났고 계승되었다. 문학이 작금의 사태에서 뇌관으로 제대로 작용하여 터져 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을 읽는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변수와 작가의 능력 중 어느 게 더 선행되는 것일까. 무엇이든 기다리고만 있기엔 세월호 사태는 매우 긴급하다.
저널리즘과 소설을 같이 본 마르케스도 이러한 사태의 어려움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쿠바 사태에 관련해 그 당시 그곳의 소설들은 시대의 수행자 역할을 자처하고자 했고, 오히려 소설의 힘은 더 한계에 봉착했고 더 빈약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많은 후일담 소설들이 과연 무엇을 성취했는지 생각해보라. 그때는 그랬구나, 잊지 말자, 기억하자, 그리고 나서 이 나라는 뭐가 그리 달라 졌나.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경우는 어떤가. 그 소설을 읽고 누가 그렇게 역사성에 대해 고민했나. 온통 토마시와 테레사,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 또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소설, 소설의 칭송만 가득할 뿐 역사는 읽을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마술적 사실주의라 칭송되는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실제 역사성을 곱씹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p415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은 요즈음은 글로벌 의류 회사 갭에서 만드는 바나나 리퍼블릭이라는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어두운 출생 배경을 갖고 있다. 20세기 초 온두라스, 과테말라, 콜롬비아 등 중남미의 바나나 생산 국가들을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라는 기업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때에 나온 말이다. 가장 끔찍한 비극은 1928년 콜롬비아에 있는 UFC 바나나 농장에서 파업하던 노동자들이 대량 학살된 일이다. 당시 미국 해병대가 UFC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 군대를 파견해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를 죽였다. (정확한 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콜롬비아의 위대한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명작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소설화되기도 했다. 미국의 초국적 기업들은 미국 군부 우파 및 CIA와 손잡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남미의 좌파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적극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계를 볼 때 우리는 비유나 이상 세계를 바라는 게 아니다. 어떤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해도, 시계를 보는 행위 자체와는 사실 무관하다. 행위는 행위 자체의 목적성이 있다. 욕망에 충실하든 저버리든 선택은 그 이후다.
현실에서는 반드시 당면한 명시성이 대두되어야 할 사안이 있다. 저널리즘은 분야가 아니라 모든 이의 정신 속에 있어야 한다. 그때 현실은 정상적인 작동이 가능할 것이다. 헌데 계속되는 이 깜빡거리는 초침. 시간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곳은 현실인가, 지옥인가.

분명한 것은 세월호를 바닷속에, 세월호 피해자들을 현실 속에 부식되어 가게 놔둔 채 끝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문학이든 기록이든 한탄이든 무엇이든 계속 나와 달라. 온 나라 사람들이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내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란다. 꿈속에서까지 모두가 지옥에서와 같이 시달리길 바란다. 잠에서 깨고도 망각하지 못하도록.

대선 비리와 연루되었던 국정원을 비롯 각종 정부기관이 한국이라는 바다를 유유히 순항하도록 놔두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반성의 반성을 거듭해도 사무친다.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죽음의 단계를 보통 부정(거부)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이라고 한다지?  세월호에 있어선 오로지 진상 규명 밖에는 없다. 그것이 과연 해결일까도 가늠하기 어렵다.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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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1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보니 오늘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사망날(2014.4.17)이다. 그것도 작년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이었다. 이럴 때 나는 너무도 놀란다. 세계와 수많은 우연의 만남들에 대해서...

cyrus 2015-04-1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흑사병이 퍼지던 시절에는 흑사병 환자와 시체들만 남아있는 도시 주변에도 얼씬거리지 못했는데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는 당시 흑사병 시대를 알 수 있는 문헌이라서 진짜 저널리즘 소설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최고의 저널리즘 소설은 무엇일까요? 제가 한국문학에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겠군요. ^^;;

AgalmA 2015-04-18 00:59   좋아요 0 | URL
cyrus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다들 칭찬이 자자하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까뮈 <페스트>도 덩달아 읽고 싶어졌다는. 한국문학에 대해서 말하는 건 참 껄끄러운 일이라 최근 소설들은 빼고요. 저는 최인훈 선생의 작품들에서 그런 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cyrus 2015-04-19 17:26   좋아요 0 | URL
아직 안 읽었어요. 인터넷 서점에 나온 책 소개만 봤을 뿐이에요. ^^;;

돌궐 2015-04-17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에 한수철님 말씀처럼 대안이 막연하긴 하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단호하게 의지를 갖고` 말을 하고 글을 써야겠죠. 지난 대선 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한 판 거하게 논쟁을 했는데 그 이후 저와 제 세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신 걸 느꼈습니다.
일단 `다르다`는 걸 아셨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ㅎㅎ

AgalmA 2015-04-18 01:35   좋아요 0 | URL
ㅎ 저는 말로는 도저히 안 넘어오시려고 해서 빅딜을;
젊은 세대들은 주로 네트워크로 소통한다면, 중장년층은 카톡, 병원, 경로당, 공원, 시장 기타 등등 각종 장소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계시더군요; 젊은 세대보다 훨씬 다양한 접촉을;; 종편방송 코멘터리를 따라하시면서;
말이 안 통한다고 척을 질 게 아니라 조심조심 꾸준히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더군요. 용돈과 함께ㅎ;
정치가 이렇게 극명하게 세대차이로 갈라지는 건 이번 대선이 처음이어서 여러가지로 당혹스러웠어요.

꾸준히, 차근차근 대화를 하며 서로 신의를 쌓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부분의 문제를 너무 쉽게 돈으로 결론지으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대화부족 문제가 제일 큰 거 같아요.

만병통치약 2015-04-17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염병연대기에 눈길이 팍 꽂였습니다. ^^ 전염병 연대기를 검색해보니 ˝격리˝라는 비슷한 책도 있더군요. 조만간 읽겠습니다.

AgalmA 2015-04-18 01:10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에서 팍 꽂혔는데, 마르케스까지 극찬하니 정말 궁금하더라고요. 알라딘에 리뷰도 별로 없어서 신기하기도. 네, 만병통치약님 리뷰 저도 기다립니다^^

오쌩 2015-04-17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아무리 참혹해도 이성적인 전망과 그 실현가능성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더 나은 상황이 만들어질까 싶습니다.

문학은 흐름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할 수는 있어도 혁명의 불씨 자체를 만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사실을 바로보고 기록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과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게 중요한데.......

AgalmA 2015-04-18 01:37   좋아요 0 | URL
저도 동감합니다. 지금 이 상황도 제대로 된 데이터, 팩트들이 모아지지 않아서 - 저들이 조작하고 감춘 것 때문이겠지만- 모든 게 소모되고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여기저기 각개격파로 하고 있어서 안타까운 게 한둘이 아니죠. 음모론으로 몰아간다고 비난들 하지만 김어준씨 비롯 많은 이들이 꾸준히 끈을 놓치 않고 파헤쳐주는 거 저는 고마워하고 있어요. 능력만 된다면 저도 좀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외국어도 약하고; 하여간 이래저래 답답한 나날입니다
 

내일(4/15) jtbc 뉴스룸은 여러분과 같이 보았으면 합니다.

pm 8 ~10(1/2부)
http://jtbc.joins.com/onair/onair.aspx

 

로그인 절차 없이 무료로 바로 보실 수 있어요. 
8시부터 하는 메인 첫번째 뉴스부터가 중요하니 꼭 8시 처음부터 보십시오.
9시부터 하는 2부 처음도 중요한 사안을 쟁점화 하니 보시고요.


세월호 문제가 제일 시급하지만, 최근 누군가의 죽음이 물꼬를 틀어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매일 뉴스를 봅니다. 오늘 jtbc 단독 특종 보도 보니 내일도 뭐가 더 나올 것 같더군요.

세월호 뿐만이 아니라 대선 의혹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을지...

 

좋아요 버튼 누르지 마시고, 내일 뉴스를 봐주세요.
좋아요로 서재에 오픈되면 혹여 글 차단처리 될까봐 그래요. 

지난 번에 미셸 우엘벡 새 책 관련 썼다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어서;

종편인 거 알지만, 단독 보도 내용이 심상치 않고, 누구든 사실을 같이 봐주길 바라는 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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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영계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들 인식하는 자들도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를 탐구한 일이 없다. 우리가 어느 날 우리를 찾는 일이 어떻게 당연히 생길 수 있는가? 사람들이 다음처럼 말하는 것은 옳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복음>, 621)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다.우리는 본래부터 날개 달린 동물이며 정신의 벌통을 모으는 자로서 언제나 그 벌통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원래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서 진심으로 염려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 밖의 삶, 체험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중에서 누가 그것에 대해서 충분하리만큼 진지한가? 아니면 누가 충분한 시간을 가졌는가? 그러한 일들에서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몰두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곳에는 우리의 마음도 없었고 우리의 귀도 일찍이 없었다! 오히려 신적으로 마음을 풀고 자기 자신에 탐닉하여 있는 사람의 귀에 정말 온 힘을 다해 정오를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렸을 때 그가 단번에 깨어나서 도대체 몇 시 종을 친 거야?”라고 묻는 것처럼, 우리 역시 때때로 훨씬 뒤에 귀를 비비며 매우 놀라고 매우 당황해 다음처럼 묻는다. “우리는 원래 무엇을 체험했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는 본래 누구인가?” 이미 말한 것처럼 뒤에 가서 우리는 우리 체험의, 우리 삶의, 우리 존재의 모든 진동하는 열두 번의 종소리를 헤아린다. 아차! 우리는 그것을 잘못 센다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바로 필연적으로 이방인으로 남아 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는 분명히 우리 자신을 혼동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가장 먼 존재다라는 명제는 영원히 우리에게 의미 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하등의 인식하는 자가 아니다.

(서문 )

 

 

 

 

 

  §  

 

 세월호의 기적(汽笛)소리가 울렸고,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깨어났다. 더불어 자신의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연인, 이웃도 제대로 못 챙겼다는 것 또한 알람으로 들었다. 불시에 날아든 놀람을 간밤의 악몽으로 털어내고 싶었고, 하나 둘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밥을 먹고, 일상을 시작했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타인이란 의지와 상관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짐이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얼굴은 무표정한 바로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타인보다 그들에게는 온갖 치장과 먹을거리, 물건들이 더 소중했고, 더 가까웠으며, 더 위안을 주었고, 더 확실히 좋았다’! “허버트 스펜서는 좋은이라는 개념을 유용한’, ‘합목적적인이라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세월호 가족들은 팽목항, 청운동, 광화문, 전국을 돌아다녀도 좋은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니체는 자연이란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식의 문과 창을 끊임없이 닫는 망각의 인간이 그 대표적인 동물이었다. 능동적 망각. 인간은 사회성과 풍습의 윤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서 그 나무에서 주권적 개인이라는 열매를 따서 먹지만, 그것은 매트릭스의 파란 알약(가짜약)에 지나지 않았다. 망각에서 깨어났을 때 사람들은 다시 파란 약을 먹거나, 양심(Gewissen)이라는 징계용 채찍을 들었다. 이때 니체는 말한다. 그것이 과연 본인의 양심이 맞느냐고. ‘양심개념에 그 배후에 이미 오랜 역사와 형태 변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되지 않느냐고.

 

 인간에 있어 기억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피와 고문과 희생 없이 일이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희생과 제의 형태의 모든 종교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잔인성의 체계, 금욕주의(그 관념들을 잊을 수 없게만들기 위한 수단), 끔찍한 형벌들 그 같은 모습과 선례들 덕에 드디어 사람들은 사회생활과 편익 아래 살기 위해서 자신이 약속했던 것과 연관하여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를 기억 속에 지닌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이 같은 종류의 기억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성에 도달했다! , 이성, 진지함, 정서의 통제, 숙고라고 일컬어지는 이 전체의 음울한 일, 인간의 모든 특권과 사치. 이것들을 위해서 얼마나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던가! 모든 좋은 것들의 바탕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는 것인가!”[****]

 

 니체는, 합리주의와 교의(敎義)로서의 도덕의 몰락은 진리를 향한 의지의 자기의식화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

 

나는 교육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세월호 관련 일들을 보는 구경꾼이고 싶지 않다. 세월호가 뭍으로 완전히 끌어 올려 지길 바란다. 그것은 인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보여줄 이 시대의 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사람들의 눈물을 한없이 쏟게 만들며, 그것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가버렸는지를 보여줄 (Nichts)”로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도덕과 윤리의 가치 판단은 그 이후 다시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지라도.

 

망각에서 깨어날 때마다 먹는 의 알약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해야 하리라.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ㅡAgalma 

 

   

 

 

 

 


 

[*] 도덕의 계보학:하나의 논박서첫 번째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p39

[**] 도덕의 계보학:하나의 논박서두 번째 논문: ‘’, ‘양심의 가책’, 그리고 유사한 것들 p51

[***] 도덕의 계보학:하나의 논박서두 번째 논문, p58

[****] 도덕의 계보학:하나의 논박서두 번째 논문, p60

[*****] 도덕의 계보학:하나의 논박서세 번째 논문: 금욕적 이상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p 116~117

 

* 이후 다시 읽어볼 책

 

 

 

 

 

 

 

 

 

『도덕의 계보학:하나의 논박서』는 <<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Friedrich Nietzsche, KSA 5, Munchen, 1988)를 원전으로 삼아 옮긴 것입니다. 이 책은 원문의 약 3분의 1을 발췌해 번역한 것으로, 『도덕의 계보학』의 요점을 쉬우면서도 잘 전달해 줍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뒤 원문 또는 전문을 보는 것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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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4-13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밭길에 들어서신 것인가요?
정성스런 리뷰입니다..
문제는 항상 원문이지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도 무엇인가를
바란다는 의미? 아니면 없음을 의도하는 것도
바람의 일종이라는 의미인가요?

AgalmA 2015-04-13 15:52   좋아요 1 | URL
이상하죠? 지치면, 더 지칠 줄 알면서도 니체에게 자연스레 향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잘 가고 있는 건지도 늘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의 이정표들을 참고할 여유도 없습니다. 그냥 묵묵히 갑니다.
염려 말씀 감사드려요 :)

제 소견으로는, 그 문장은 문장 자체에 뜻이 있지 않고 니체의 전작들에서 끊임없이 말해지고 있는 것들, 그 전후를 조합해볼 때 니체가 말하는 바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해석한 바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실을 부르짖지만 사실 의미를 원하기 때문에 진실을 갈구하는 걸 겁니다. 금욕적 이상은 (강압이든 무의식적이든 착각이든) 흠결없는 최상의 의미인 것처럼 의미되었던 거고요.
이 모든 걸 종합해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기보다(무의지) 무수한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고일 수 없는 무로 가고자 한다(의지)는 말로, 지금의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레 <힘에의 의지>생각되지 않으십니까? ~_~

비로그인 2015-04-13 18:3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게는 공부 거리입니다. 참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위안부’ 문제의 횃불이 세상에 언제 등장한 지 아십니까?

1992년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발언의 근거가 된 위안부관계 문서를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이렇게 말했다.

 

“19918월 한국에서 김학순 씨가 처음으로 본명을 밝히고 나왔다. 199112월에 일본군 위안부였던 두 분과 전 군인 군속 및 그 유족들이 함께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 지방 재판소에 제소했는데, 그 단계에서 일본 정부는 관여를 부정했으며 자료도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연히 내가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조사해 19921월에 아사히신문에 싣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부정할 수 없게 된 정부는 관여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주석 p292, 이하 페이지 언급들은 모두 이 책에 기반함)

 

 

양국(일본/한국) 정부의 회피만큼이나 한국 대중 또한 현실문제에 있어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그게 묻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위안부문제는 단순히 전쟁피해에 대한 배상차원의 과거사문제가 아니다. 저자 우에노 지즈코의 다음 말은, 역사 앞에 낱낱이 흩어져 있는 우리의 허점을 정확히 찌른다.

 

 

젠더사의 관점에서 위안부문제는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역사 방법론과 관계된 근원적 물음과 연결되고 있다. 그것을 위안부문제만큼 절실하게 나타낸 예는 없다. 단지 사실이라는 점에서 위안부’의 존재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변화한 것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그 자체가 매춘(이라는 사실)에서 강간(이라는 사실)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성범죄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데 반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p141)

 

 

실증 사학 아래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파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구술이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문서 사료가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일축했으나, 앞서 소개한 요시미 요시아키 씨 같은 역사의 진실에 대한 사명감을 가진 이가 있어 사료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고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었다. 사료가 있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도 아니다. 지배 권력 측이 요구하는 정통 사료를 피해자가 입증해야 되는 또 다른 시스템이 기다리고 있다. 이거 지금 이 사회에서도 많이 느껴지는 점 아닌가?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합친 사람들이 찾아낸 증거들, 난항이 거듭되고 있는 세월호 특위 · 특별법과도 연결되지 않는지?

이제 법리 싸움은 다음을 말한다. “법리는 위정자(강자) 측 사정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때 법적 투쟁이란 사전에 '상대방의 씨름판'에 올라갈 것을 강요받는 불리한 싸움”(p149)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쟁 당시에는 (납치, 강제에도 불구하고) '공창제'가 합법이었다는 것과 거슬러 올라가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리상의 벽에도 막혀 있다. 이미 박정희 정권일 때 알량한 배상금까지 받아 챙긴 마당 아닌가(※그 돈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어디로 간 건지 행방도 묘연하다). 또 세월호 생각이 겹치지 않는지? 피해보상금도 주는데 국민 세금 낭비해서 굳이 선체 인양은 왜 하는가, 말하는 자들의 논리 말이다.

 

 

이런 역사적 인식의 문제들은 어느 나라든 현재적인데,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입구에 있는 테오도어 루즈벨트 동상에 대해서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p150, 주석 p293)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동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사진을 찍은 게 인터넷에 아주 많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느끼며 코멘트를 달고 있는 글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내 글에 누군가의 사진이 언급되는 게 실례일 것도 같고, 저작권 문제도 있어서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한번 찾아보시길. 얼마나 이상한 동상인지. 루즈벨트는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고, 그 양편으로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이 수행자처럼 있다. 식민주의적인 표상이라고 원주민 단체가 항의하고 있음에도, 이 동상은 미국의 노예제, 정복사(“원주민 관점에서는 학살”)에 대한 반성의 허위성을 보여주며 굳건히 거기 서 있다.

 

 

저자는 위안부문제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었던 것으로,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여성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억압해 온 고통의 기억과 침묵의 시간을 깨고 증언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1961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에 유대인 피해자들이 증언하기 위해 나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피해의 기억은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과 그것을 들으려 하는 귀가 존재함으로써 처음 현실로 떠오른 것이며, 그곳(아우슈비츠-Agalma 해석)에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죄-Agalma 해석)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p158)고 말이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위안부문제도 과거의 사실이 아니며, 1년 전 세월호의 억울한 죽음과 피해자 가족의 억울함도 결코 과거의 사실이 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다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시대의 피해자분들의 아픔도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아닌 것을 아니었다로 끝내고 넘기지 말아야 하며, 끊임없이 역사와 사실을 재심해야 한다. 진실이 하나인 것처럼 믿고 싶어 하지만, 역사는 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그 역사를 만들어 온 우리 자신처럼. 어제의 고민과 내일의 고민을 동시에 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처럼.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가 단순히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쟁점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반세기가 지나 용기를 갖고 싸우려 나섰음에도 별다른 해결도 보지 못한 채 한 사람씩 숨을 거두는 이 사태가, 얼마나 더 지속될까, 나는 아득하다. 그녀들이 끌려나갈 때 말리지도 못했고, 돌아왔을 때 안아주지도 못했던 현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그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힘은 다 어디로 간 건가. 그 뜻을 이을 형제자식도 없이 다 굶어 죽었나. 위안부 할머님들이 1991년 그렇게 나선 지 올해로 벌써 24년이 지났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비참했던 이 1년을 생각해보건대, 반세기 이후에는 세월호 참사 문제도 해결되었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 이 횃불들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책은 역사라는 허위, 가부장제 권위주의 사회의 허위, 국가와 국민화의 허위 속에 창부로 끌려 나간 여성만의 문제를 담론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일본 작가지만 오히려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문제를 더 잘 직시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자는 취지가 아니라, 이 책은 인권,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는 책이라 모두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세월호]와 관련된 책들 또한 마찬가지다.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것으로 끝내지 말자. 읽고 그다음엔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생각하고, 알리고, 외치고, 모이고, 일어서 나가야 한다. 내 속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 어디 있든 출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만난 듯 사람을 향해.

 

 

 

 

Agalma

 

 

 

 

 

 

 

Jan Garbarek [Officium] ( ECM 2125,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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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4-10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처음부터 잘못접근했고 일본의 힘이 생각보다 쎄서 쉽지 않네요. 세월호, 자원비리문제, 고위직 청문회 등을 보면 우리나라에 진정한 청문회, 조사라는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이듭니다. 정파를 초월한 조사,청문회는 불가능한가 봅니다. 공격하는 자도 방어하는 자도 모두 마음에 안들어요....

AgalmA 2015-04-10 14:58   좋아요 0 | URL
네, 그렇지요. 아마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힘은 여론을 크게 일으켜 물살을 만들어야 하는 것일텐데 `(그들에 의한) 언론 탄압` `잘못된 언론` 탓을 하며 무력해지진 말아야 할 문제겠지요.

네오 2015-04-1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깐 세월호도 위안부문제처럼 해결돼지 않고 길어질수 있단말이죠?

AgalmA 2015-04-10 15:06   좋아요 0 | URL
안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자원외교문제, 총선 등등 국직한 사안 생각해서 눈치보기 밑밥만 계속 던질 공산이 크지요. 천안함도 사실 덮힌 거잖습니까

네오 2015-04-1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뭐,.이번에 세월호특위도 그런유형이겠죠, 시행령이 유족의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 못해서요,.전 그런의미에서 국회의원정수를 좀늘려으면 해요, 다양한 민의를 좀더 전파하도록 거 왜, 2등도 국회에 진출할수만 있다면 괞잖은데 말이죠,

AgalmA 2015-04-10 16: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지지부진했던 특위 과정 보면서 누가 그렇게 생각 안했겠습니까(보수x통 빼고)
저도 국회의원 정족수 늘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놈이 그놈이다, 세금먹는 식충이라 할 게 아니라 제대로 일할 국회의원을 뽑으면 되는 거죠.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데, 의지하고 전가하기만 할 시대가 아니라는 걸 국민 모두가 깨달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네오 2015-04-10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일할이라는 말에 격하게 동의할수밖에 없군요,. 그런데 이글 끝에 행동하라고 요청했는데 그 실천적 방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냥 직설적으로 진보정당에 가입을 권하고 싶군요, 혼자만의 게토화로 머물지말고 정당정치가 제대로 운영되도록이요,

AgalmA 2015-04-10 19:00   좋아요 0 | URL
네, 동의합니다. 진보쪽이 너무 흩어져있어 개인이 다 추스리기 어려운 감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가입, 언론의 바로 세움을 위해서는 뉴스타파, 국민Tv, 여러 팟캐스트 등 후원의 형식도 소극적이지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저도 동참하고 있어요.
그 언론이 죽었으면 이 언론으로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거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4-10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회의원 수는 늘리고 대신 월급은 깎아야죠. 제가 알기로는 국회의원 세비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입니다. 우리보다 부자나라인, 보수들이 복지병에 걸렸다고 그렇게 씹던 북유럽 복지 강국은 오히려 한국보다 1/2배, 1/3배 세비가 낮습니다. 비례대표를 늘려야 합니다. 그래야 얼굴 마담들만 국회 진입하는 걸 막을 수 있고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국회의원을 국회에 진출 시킬 수 있으니깐 말이죠. 세비 70% 삭감하고 대신 국회 의원 수 늘리면됩니다. 그러면 비용 부담이 늘지 않으니 말이죠.

AgalmA 2015-04-10 16:09   좋아요 0 | URL
네, 국회의원 한 사람당 1억 3천인가? 연봉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서 등 수행원 월급은 별도인지 확인은 못했습니다만 지금의 급여 상당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월급 깎는 거 동의합니다 ㅎ! 월급 적어서 싫다 그러면 국회의원 하지 말라죠. 국민이 월급주는 사장 아닙니까ㅎ
저는 공무원 연금도 실적에 따라 차등분배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MB는 혜택을 받을 사람이 아니고, 손해배상을 해야 할 1순위고요.

양철나무꾼 2015-04-10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심오한 페이퍼에 또 음악 얘기를 하는 불초한 소생을 용서해 주새요.전 얀 갸바렉을 그냥 간과할 수 없었다는~--;

AgalmA 2015-04-10 23:55   좋아요 0 | URL
심오는 제게 붙일 게 아니라 역사 자체겠지요. 이런 글은 책임감이 많이 느껴져서 맘이 참 무거워요.
얀 갸바렉 음악 들을 때마다 차렷 자세하게 하는 엄중함이 있죠^^...들을 때마다 감상용은 정말 아니다 합니다ㅎ
양철나무꾼님 뽐뿌 덕분에 작가란 무엇인가 당장 빌려 읽고 있어요ㅎ! 유용하면서도 재밌는 책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시, 영화, 이미지 - 시의 주제를 넘어 민예총문고 9
함종호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제1장 시는 회화적인가 - 시 이미지의 동적 구조

 

시어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 그것이 다른 시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의해 시적 의미가 구현된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시는 명사보다는 동사나 형용사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p17)

 

시를 명사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고정된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라면, 시를 동사나 형용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시어의 의미가 특정한 것으로 고정되기 이전의 이미지의 발생과 그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7~18)

 

시에서 이미지(혹은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는 정서 상태)가 특정한 것으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변주된다면, 그것은 이미지의 본질이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는 시의 구조가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p19)

 

1. 재현의 위반 - 시 이미지의 발생 차원

시의 기능이 주로 정서 전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의 이미지가 객관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해 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p19)

 

서정주 「국화 옆에서」경우 '꽃'과 '누님'의 동일시와 이를 통해 발생하는 이미지는 이들의 형태적 유사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어떤 느낌으로 서로 연결된다. …… 이들은 각각이 지닌 외형적인 형태의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시어가 내포하는 속성의 유사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속성의 유사 관계는 반드시 그 유사 관계가 성립할 수 있도록 다른 시어가 그 연결 고리를 제공해야 한다.

…… 이미지의 발생에 있어서 외형적 형태보다 내재적 속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은, 이미지는 실재 세계를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실재 세계를 기초로 하여 허상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19~22)

 

에코의 '거짓말 이론'에 의하면, 기호는 수많은 기의의 '미끄러짐'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실하게 세계를 표상할 수 없다. …… 이미지는 대상을 재현하고 구체적인 감각을 동원하며 진실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비재현적이며, 무규정적이고, 무한한 변화와 변형을 낳는 … 상징적 상상력의 산물. (p22)

 

"한마디 한마디의 말은 각각 한 개의 객관적 사물을 대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사물에 대하여 있는 것이다. …(중략)…말을 소재로 써야 하는 시는 결국은 그러한 말들이 대표하는 사물의 세계(자연=객관세계)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관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객관세계에 대한 시의 관계」, 『김기림 전집 2』,심설당, 1988, 117쪽 (p23)

  

▣ (Agalma)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김기림의 발언은 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작가 플로베르 '일물일어설'과 똑같지 않은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원으로 인정되는, 김기림이 "이미지의 발생을 객관세계와의 닮음을 전제로 한 재현의 원리로 이해한 태도"는 이미지의 규정할 수 없는 차원의 움직임을 간과했고, 이후 평단에 (의도치 않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 비평가들은 1940년대 한국 시문학사의 중요한 위치 '청록파' 시들의 이미지들을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리'로만 바라보았고, '자연성, 향토성, 서정성', '회화시'라고 규정하는 오류와 한계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독자와 사회 또한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어 시험을 쳤지.

오, 묘사의 악령들이여! 

들뢰즈가 파악한 언어의 '무한소급'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가치 평가는 늘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도망친 詩들이 앨리스가 만드는 이상한 후추 공장으로 이미 보여지고 있듯이.▣

 

 

2. 시는 영화적이다.

일찍이 중국 송나라 때 소식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일컬어 '시를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또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상호 연관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송·원 이후 동양 예술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시화 일치론'으로 대표된다. 서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모니데스가 시와 회화의 상호 연관성을 주장한 이래 여러 시대를 거쳐 시와 회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시와 회화는 '자매 예술sister's art'(*마리오 프라즈, 『문학과 미술의 대화』, 임철규 역, 연세대출판부, 1986,3쪽)로 불릴 정도이다. 그러므로 문학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이 다다, 쉬르, 미래파, 입체파 등의 일련의 미술 사조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 발전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p28~29) 

<시와 회화의 차별성- 시는 동적 구조, 회화는 정적 구조>

- 시는 회화보다 시·공간에 대한 묘사가 보다 더 자유롭다.

- 시는 단편적인 영상들이 조화 혹은 병치되는 과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공간 이동 등의 변화 양상을 묘사하기에 보다 용이하다.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 단편적 영상들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ㅡ 발터 벤야민 『문예 이론』

 

 

제2장 시 이미지의 운동성

 

1. 이미지의 상호 작용 - 질적 변화

 

영화 형식에 내재된 운동, 혹은 지속의 특성은 영화의 이미지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잠재되어 있는 차이를 일깨워 현실을 다양하게 인식하고 이를 제시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 시의 이미지들이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시 이미지의 전개 양상은 영화처럼 이들 단편적인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지며, 시에서 이미지의 역동성, 운동성은 주로 시각 이미지의 지속과 병치를 통해 나타난다.(p52~53)

 

 

 

 

 

 

 

 

 

2. 이미지의 지속-시점 변화

일반적으로 회화 특히 풍경화에서는 풍경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점과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의 시점은 일치한다. 그러므로 회화에서는 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화가=감상자) 사이에 2차원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점을 달리한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에서는(이를테면 '쇼트-역 쇼트 shot-reverse shot'와 같은)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시점, 그리고 대상과 등장인물이 놓여 있는 공간 너머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점(감상자의 시점-'잠재적 응시자'-이 되기도 하는) 등이 나타난다.(p62~63)

 

……영화에서 부분들의 결합 양상은 그 나름의 카메라 기법과 편집 기법에 의해 결정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시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p64)

 

……원근법은 객관세계를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뤼미에르와 르누아르의 영화들에서 특히 주로 사용된 방식이다. (p71)

 

 

 

 

 

 

제3장 시 이미지의 시간성

1. 이미지의 현재성-공간의 지속과 시간의 교차

 

시간이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볼 수 없는 시간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대상화하려 한다면, 시간을 공간적 성질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 시간의 '공간적 성질'이란 구체적으로 사물의 변화이자 곧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영상인 영화 공간에서는 시간적 성질이 참으로 농후하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의 운동을 볼 때 시간성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사진 공간이란, …(중략)… 사물의 어떤 순간의 상태이다. 그러나 회화 공간에서는 그것이 어떠한 순간이었던가 하는 '상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화 공간에 시간적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운동을 그린 회화도 있고, 역사화歷史畵와 같이 역사적 시간을 현재화한 회화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일지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특히 현실 시간을 의식하는 법은 없다. 그것은 회화 공간에서는 시간적 성질이 내재화內在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ㅡ 시게모리 고엥 『사진예술론』, 홍순태 역, 해뜸, 1994, 90쪽

 

……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영화는 어떤 순간의 상태를 연속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시간성을 가장 잘 표현하며, 이때 표현되는 시간성은 시간의 변화와 운동을 내재하는 '공간적 성질', 혹은 공간적 상태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다.(p84~85)

 

 

▣ (Agalma) 이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문학 침체의 내부 주요 원인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을 즐기는 존재이면서, 반복되는 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 즉 관객과 독자가 되면 대다수는, 내부에 골몰해 시간이 정체되어 있는 작품을 원하지 않는다. 오, 멋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 인기도 요즘은 그닥), 따분한 베케트! 하면서.

캐릭터, 아이디어, 잔재주(트릭) 만으로는 더이상 작품의 완성도를 확보할 수 없다. 긴 시간을 다루는 문학과 영화들이 점점 더 스토리에서 추리와 미스터리쪽으로 기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의 경쟁력이자 장점은, 빠른 시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두통약 효과처럼 즉각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그토록 자폐적인 시·소설을 공격하는 것은, 사회·문단이라는 외부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근원·보편에 기반한 내부 반감에 더 기인한 것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2. 이미지의 종합, 혹은 과거의 현재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를 조합하여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재현해 내는 것은 회화에서는 찾기 어렵다. 이는 영화적인 특징인 동시에 시의 특징이다. (p98)

 

 

 

 

 

 

3. 순수 시간의 구현

들뢰즈에 의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진행 방향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종합 과정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에 관한 그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시간은 오로지 어떤 근원적 종합 안에서만 구성된다. 순간들의 반복을 대상으로 하는 이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순간들을 서로의 안으로 수축한다. 이런 종합을 통해 체험적 현재, 살아 있는 현재가 구성된다. 그리고 시간은 이런 현재 안에서 펼쳐진다. 과거와 미래도 모두 이런 현재에 속한다." 그리고 이때 나타나는 종합은 수동적인 것이다. 시간은 인간 주체 너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신에 의해 능동적으로 종합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은 인간 주체 정신 안에서 저절로 종합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세 가지 수동적 종합의 형대로 구성된다. 그것은 각각 '기억의 형식', '습관의 형식', '시간의 텅 빈 형식' 등으로 나타난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순간들의 수축을 통해 시간을 현재로 구성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현재는 늘 지나가 버린다는 점에서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순수 과거를 구성하고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들긴 하지만, 과거 시간은 네 가지 역설과 마주한다. 그것은 '현재는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아니고서는 결코 지나갈 수 없다'는 동시간성의 역설, '만일 각각의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면, 과거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지금 거리를 둔 새로운 현재와 공존해야 한다'는 공존의 역설,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한다'는 선재의 역설, '동시간성과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순수 과거와 관계한다'는 순수 과거의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라는 역설이 그것이다. …(중략)… 시간은 현재와 과거처럼 설명 불가능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재현적이고, 무규정적이며, 무한한 변화와 변형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결국 시간은 두 개의 범주를 갖는다. 하나는 운동을 참조해서 파악되는 간접적인 이미지로서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현존하지만 그렇다고 재현되지는 않는 직접적인 이미지로서의 고유한 순수 시간이다.(p99~101)

 

들뢰즈에 의하면 묘사는 '유기적 체제(운동적 체제)'와 '결정체적 체제(시간적 체제)'로 구분된다. '유기체적 체제'는 "대상의 독립성을 전제하는 묘사"를 지칭하며, 이에 반해 '결정체적 체제'는 "대상을 대체하고 창조함과 동시에 지우며, 이미 나타났던 것들을 반박하고 전치시키거나 혹은 변경시키는 또 다른 묘사들에 끊임없이 대체되는 묘사를 지칭한다. 이와 같은 들뢰즈의 논의를 참고한다면, 김춘수의 '서술적 이미지'는 운동-이미지로서의 '유기적 체제'에서 시간-이미지로서의 '결정체적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p106)

 

 

 

 

 

 

 

 

▣(Agalma) 여기서 나는 저자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데, 통일된 관념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적 자아의 관념과 서술(묘사)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피할 수 없이 통일(이미지, 관념)의 관점으로 모아진다는 것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끝에는 또한 비평의 마굿간과 채찍질이 기다리고 있다.

관념을 벗어나려 한 김춘수의 시를 무의미 시로 평가하지만, 그 무의미 속에는 오히려 해석할 수 없는 의미가 넘쳐난다. 최종적 수신자가 없는 이미지-의미의 편지들, 詩 ▣

 

 

 

 

제4장 영화 기법 수용에 따른 시 이미지 전개 방식

 

시와 영화는 공통적으로 단편적인 영상들을 병치시키는 방법을 통해 구조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p113)

 

영화의 몽타주 기법은 문학과 시각 예술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사물(대상)의 배열 방법이었다. (p117)

 

 

이 책에서는 영화와 문학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대한 논의가 여러 곳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단편적인 예를 한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시와 영화의 실제적인 관련은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즘이라는 시 운동에 영향을 미친 몇몇 발견과 쟁점들은 작지만 확실한 영향을 영화에 미쳤다. 이 중 하나가 페널로사의 뒤를 이어 파운드가 유행시킨 상형 문자에 대한 매료이다. 위대한 동양학자인 어니스트 페널로사는 한자가 회화적으로 문자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어떤 개념이 표의문자라는 정교한 그림문자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중략)… 단어의 기능을 이용하여 그림을 만들고, 전통적인 구문이 아니라 병치를 통해 단어를 연결시키는 기법을 전위 시와 영화가 동시에 발견하고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군중 속의 얼굴들의 환영/젖은 검은 가지에 달린 꽃잎'이라는 두 행으로 된 파운드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와, 군중들이 분노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쇼트 다음에 바로 빙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쇼트를 보여 주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시퀀스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중략)…(이것은) 단지 두 이미지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 설명 없이 보여 주는 병치만이 있을 뿐이다."

ㅡ 로버트 리처드슨 『영화와 문학』, 이형식 역, 동문선,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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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졸리운데,,,,,,,,,, 詩고,  영화고, 시간이고 간에 … 언제나 결과는 잠(Zzzam)

Zzzam을 들으며 잠을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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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시와 영화를 비교분석한 논문 스타일은 있어도 완성도있는 저서가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중요한 자료이긴 하다.

이 책의 의의와 열의에는 당연 박수를 보낸다. 다만 들뢰즈 이론에 너무 기대어 그 이상은 찾지 못한 분석이었지 않나 조금 아쉬웠다.

이 책은 아주 조그만 한데, 읽고 나면 읽을 책이 산더미처럼 늘어난다.

또 베르그손과 들뢰즈와 부딪혔어! 어딜 가나 피할 수가 없다네ㅎ;;;

 

 

 

 

ㅡ Agalma

 

 

 

 

 

 

 

 

 

 

 

 

 

 

 

 

 

 

 

 

 

 

 

 

 

 

 

 

 

 

 

 

 

 

 

 

바둑판에 놓인 하나의 돌은 다른 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 가치와 의미가 생긴다.…… `왕`은 왜 그 비좁은 사각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지 하는 의문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채 장기를 두었듯이, 우리의 교실에서도 시를 그 비좁은 사각의 테두리 밖에서 생각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서문 中)

들뢰즈에 의하면, 관념이란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재현된 `개념적 차이`에 불과하다. (p103)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중략)… 나에게 이미지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행行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 이미지가 되어 가려는 과정에서 하나는 또 하나의 과정에서 처단되지만 그것 또한 제3의 그것에 의하여 처단된다. 미완성 이미지들이 서로 이미지가 되고 싶어 피비린내 나는 칼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살아남아 끝내 자기를 완성시키는 일이 없다. 이것이 나의 수사修辭요 나의 기교라면 기교겠지만 그 뿌리는 나의 자아에 있고 나의 의식에 있다. …(중략)…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김춘수 시론 전집 Ⅰ』(현대문학, 2004, p537~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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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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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17: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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