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용기의 정치학 -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준형 옮김, 이택광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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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 속에 “진정한 용기는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지젝의 말처럼 대안이 안 보이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며 이 책을 재차 읽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수시로 한탄이 터져 나온다. 세상은 왜 이따위로 돌아갈까.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하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라고 비정하면서도 종교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의 아우성에서 이런 문장은 힘이 없다. ‘개가 자신의 고환을 핥는 이유는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더 현실적인 표현이지만 내 답답함은 1%도 해소되지 않는다. 악 속에서 나오는 선보다 선 속에서 나오는 악이 더 많다고 말하는 지젝은 나보다도 답답할 거 같다. 제대로 실현되지도 못하고 나쁜 인식만 박힌 ‘공산주의’의 재창조를 알랭 바디우와 함께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펼치고 있는 그가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이념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공산주의’야!

 

원저가 2017년에 나와 코로나 시국이 된 지금과 동떨어져 보일 여지도 많지만 이 책의 함의는 여전히 크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자본주의 블랙홀 상황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21세기 자본이 가진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민주주의가 가진 문제”(조지프 스티글리츠 「21세기의 민주주의」)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스티글리츠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으로 확대하면 ㅡ 소득세와 상속세 상향, 교육 투자, 엄격한 반독점법, 기업의 구조 개혁, 금융권을 강력히 견제할 정부 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젝은 생각이 다르다. “단순한 민주주의 정치는 비자유의 형태로 이어지기 쉬운데,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노예를 만드는 법적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노예를 자처한다.” “실질적인 자유를 위한 열쇠는 시장에서 가족까지 정치와 관련이 없는 다양한 사회관계의 네트워크에” 있으므로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즉 “혁명적인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1937년 조지 오웰이 “계급을 폐지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말했듯 지젝은 현재 ‘급진 좌파’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진단한다. “민주적인 메커니즘은 자본이 재생을 방해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의 규제에 속할 뿐이다.” 성공을 위한 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위기야말로 새로운 기회를 잡을 타이밍이라고 소리 높이지만, 대부분은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라 방황과 절망의 비정규직 울타리 안에 있다. 민주주의로 꾸며진 세계 자본주의 농장에서 우리는 사료를 먹으며 미래를 꿈꾼다. 권력이나 돈이 있어야 안락함이든 생존이든 가능하다는 생각이 팽배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자신이 문명의 등불이라고 인식하는 서양 중산층의 패권적인 주체성, 서구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주체성, 서양에 대한 열망에서 오는 좌절감으로 파괴적인 허무주의로 변환된 주체성”과 가족주의와 전통주의가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세계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ㅡ 원리주의 테러 위협, 난민과 이주민 문제, 파산 상태인 나라의 해방 운동,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의 전쟁 도발 우려, 기술 발전으로 인한 실업 ㅡ 등으로 ‘적대감’이 전방위로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진짜 문제는 ‘압도적인 자본주의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세계 자본주의는 적대감의 확대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적대감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적대감은 무형의 자본인 문화의 공유에 대한 적대감이다. 무형의 자본은 통제되지 않은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불합리한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의사소통과 교육의 주요 수단)로 대표되는 인지적인 자본의 즉각적인 사회적 형태를 뜻한다. 두 번째 적대감은 인간이 생산한 오염으로 위협받고 있는 외부 자연의 공유에 관한 것이다. 지구 온난화, 해양 파괴 등 자연에 대한 모든 위협은 지구 위 생명의 재생 시스템을 흩트리고 있다. 세 번째 적대감은 내부 자연의 공유와 관련이 있다(인간의 고유한 생물 발생적 특성에 관한 적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 발생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본래의 모습을 바꾸어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행위에 대한 반감이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인간 자체, 사회와 정치적 공간의 공유에 대한 적대감이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세계를 분리하는 벽과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늘고, 내부와 외부의 사람을 분리한다. 여기에 새로운 지정학적 블록 간의 갈등이 증가하고 있다(즉 문명이 충돌한다). 이 네 가지 적대감에서 ‘공유’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 개념의 부활이 정당화될 수 있다. 공유가 제한되면서, 삶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배제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영토를 벗어나는 현상은 국가의 개입이나 법을 비롯한 다른 기능과 함께 공존하고, 더 큰 개입에 의존한다. 덕분에 개인의 자유주의와 쾌락주의가 국가의 복잡한 규제 메커니즘과 공존하고, 이로써 지탱되는 사회가 나타나고 있다. 국가는 사라지기는커녕 강화되고 있다. (중략) 평판의 순효과를 인정한다고 치고, 그렇다면 과연 평판은 어떻게 생겨날까? 등급은 어떻게 정할까? 공유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복수심을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미국의 유토피아An American Utopia』에서 질투심이 자본주의 경쟁을 상기시키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즐거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행동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공산주의 낙관론을 일축했다. 그는 이 낙관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더욱 공정한 공산주의 속에서는 오히려 질투와 분노가 폭발한다고 주장했다. 왜일까? 사회정치학자인 장 피에르 뒤피Jean-Pierre Dupuy는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을 제시했다. 공정 사회에 관한 롤스 모델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용인되려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계층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불평등, 다시 말해서 특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 불평등이 유발되어야 하고, 또 계층의 사다리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롤스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는 조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가 정당화되고, 개인적인 실패가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 때문이라고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롤스가 제안한 사회적 모델은 계급이 자연적인 이유에 따라 정당화되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남긴 주요한 교훈을 간과한다. 하이에크는 불평등을 무작위적인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 더 수용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장의 부조리나 자본주의 내에서 성공과 실패가 가진 장점은 ‘나는 잘못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실패한 것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은 운명과도 같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시장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 지젝은 서방 세계 최초로 국가 권력을 잡은 급진 좌파인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가 내부 제도의 틀을 어떻게 바꿔 나갈지 주목하고 있다. 스탈린주의(국가 사회주의)의 관료주의적 병폐, 새로운 경제 조직과 일상을 재편하지 못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좌파가 가진 진짜 문제는 실질적인 사회주의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가 무너진 후 사회의 재정비에 관한 진지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조화로운’ 위계 사회의 반대는 제한된 개인주의가 아니라 평등사회이며, 여기에 가장 잘 맞는 모델은 기독교의 성령이다.” 마오쩌둥의 평등주의는 이 같은 점을 잘 흡수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세속적인 서구사회가 윤리와 정치 모두에서 공백, 비일관성, 불능을 취할 때 전통적인 사회는 대타자의 권위(일본-황제의 신성화, 중국- 유교)를 내세워 사회 안정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전통 사회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자본주의로 발전해나가는 폭발을 일으켰다. 종교는 정치적 요소로 활발히 작동한다. 마호메트 만화를 처음 공개한 출판사는 덴마크의 이슬람 혐오 보수주의자들이었는데, 이교도적인 덴마크에 대한 이슬람의 항의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전체주의에서는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항상 내부의 적에 대한 싸움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타인의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그들이나 우리나 같다’는 거짓된 생각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이상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공산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을 가진 미치광이이고, 다른 삶의 방식이 공존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 내부의 문제로 ‘성의 정치’도 빠질 수 없다. “60년대의 관대함, 성적 해방, 반문화적, 마약의 정신은 유토피아적이면서 정치적인 운동의 일부였다. 1970년대에는 이런 정신의 핵심이 사라지고, 패권 문화와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것을 줄이자는 노력이(탈정치화) 훨씬 더 심각한 것을 내놓는 것으로(패권 이념으로의 통합) 이어졌다.” 우리는 우리 행위의 한계와 양면성에 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양성평등과 여성이 가슴을 노출할 권리’를 홍보하는 세계 토플리스의 날 시위는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고정된 아름다움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운동은 보편적인 해방 운동이 아니라 특정 이념의 짜인 관계”로도 분석된다. 진정한 정치는 개인의 욕망과 환상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지젝은 개인적 선호의 영역을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자유를 위한 해방적 투쟁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개인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는지를 의심”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많은 문제들이 이런 ‘유사 투쟁’이다. 성 차이로 인한 적대감과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많은 다문화 이론가들이 ‘성-인종-계급’을 논하지만 계급투쟁이 다뤄지지 않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이런 투쟁들은 소통의 문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로 접근하기 보다 급진적 변화의 수용이 관건이다.

 

“문서화되지 않은 예의 바름이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효율적으로 규제하지 못하면서 시작된”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사실상 “윤리의 해체와 같은 맥락”이다. 인터넷 곳곳에서 내적 도덕성과 외적 도덕성 사이에서의 예의 바름과 PC의 충동이 일어난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소셜 네트워크 영향으로 토론이나 논쟁이 아니라 짧은 문장, 비난, 비꼬는 말, 격양된 표현으로 가득한 온통 소음의 전쟁판이다. “뭔가 꺼림칙한 기미만 보여도 자동적으로 대응하며 PC를 적용”하고,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규범을 거부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박원순 시장 사건에서도 정치 사회적 인물로서의 치적과 예우 vs 혐오스러운 이중인격자이자 성폭력 가해자로서의 비판 &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모론이 한창 충돌 중이다.

 

“다른 관점에 대해서 공식적인 관용과 극단적인 개방이 조합하는 이런 문화는 오히려 비판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맹목적 포퓰리즘을 추구하는 트럼프와 같다. 특히 유럽에서 좌파가 우파 포퓰리즘의 공세에 비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이유다. …… 분노가 포퓰리즘의 힘으로 번져가는 상황에서, 무서운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온건한 진보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문제시되는 좌파의 대응 방식은 또 있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전략을 변형한 방법이다. 그리스에서 프랑스까지, 그나마 남은 급진 좌파 사이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민족주의의 재발견이다. 보편주의는 한순간에 세계 자본과 금융 자본가에 대응할 수 없는 무력한 정치, 경제적 도구로 전락했다. 기껏해야 온정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했던 하버마스Jurgen Habermas와 비슷한 정도의 이념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민족주의가 재부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구에서 우파 민족주의 포퓰리즘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며, 정치적 열정을 부활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좌파는 민족주의 열정을 급진적인 우파에게 양보해야 하며, 프랑스의 극우주의 정당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에게 조국을 되찾아서는 안 되는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급진 좌파는 정처 없이 떠도는 금융 자본이 증가하는 지금, 중요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동원할 수 있을까? 반이민 포퓰리즘은 정치에 열정을 불어넣으며, 그들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와 ‘그들’을 분리한다. 좌파는 우파의 열정적인 접근 방식을 활용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들은 ‘르 펜이 했다면, 우리도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라며 반문한다. 정말 우파의 열정적인 민족주의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할까? 방향을 잃은 어리석은 투쟁이다.”

 

“사회 전체를 구성하고 폐쇄하는 메커니즘, 다시 말해서 개인을 사회적 공간에 잡아두는 메커니즘은 ‘영향의 모방imitatio afecti’이며, 그 지위는 보편적이다. 이는 자기 폐쇄적인 조직이 다른 조직을 배제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인 ‘폐쇄와 배제’다. ‘영향의 모방’은 개인의 이익에 맞게 연결 고리를 만드는 진보적인 개인주의적 개념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이다. 스피노자의 출발점은 개인이 아니라, 집중화(한 가지 대상에 대한 복종)에 저항하는 혼란스러운 상호 연결의 광범위한 분야다. 다수와 군중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전자는 하나의 집단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비이성적인 폭발인 ‘폭도’를 가리킨다. 이들은 ‘영향의 모방’을 통해서 성장하고 번영한다. 스피노자의 깊은 통찰력은 오늘날의 다양한 이념 속에서 길을 잃었다. 후자는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 사회적 연계를 위험하게 만드는 특정 메커니즘을 만들고, 이 메커니즘은 다시 인종차별적 폭력의 폭발적인 확산을 지지한다. 스피노자의 주장을 한층 더 발전시킨 들뢰즈의 지적처럼, 영향은 주체에 속하지 않고 다른 주체로 넘어간다. 영향은 전개체pre-individual의 수준에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미치지 못한 채로 순환하며, 기능을 수행한다.

다음 철학적인 결과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거부 때문이다. 각 객체는 완전한 현실화를 위해 노력한다(모든 장애물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객체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내부로부터 어떤 것도 파괴될 수 없다. 모든 변화는 외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로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열정의 충돌은 축소할 수 없지만, 외부에 남게 된다. 즉 공통의 ‘conatus(고통)’로 전체화된 그룹 사이에 존재한다).

권력과 권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극단적인 방정식을 강화시키는 것은 확신이다. 정의는 모든 객체가 내재적인 힘의 잠재성을 자유롭게 배출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 내가 가진 권력이 같을수록 정의가 실현된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결국 율법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율법은 차별화된 네트워크와 힘의 관계를 무시하는 추상적인 법을 뜻한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행동할 권리’이다. 그런데 이 행동할 권리는 소유를 위한 법적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할 권리’이다.” 

 

 

스피노자는 『국가론』에서 남성을 지배하지 못하는 여성은 권리를 구성하는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보았다. 폭력과 위계, 권력으로 쟁취하는 남성의 권리 획득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결과로서만 보는 이런 분석은 대단히 잘못되었다. ‘공동체’를 통해 소속과 투쟁을 벌이는 모든 운동은 언제나 딜레마에 빠진다. 정치 철학자 샹탈 무페의 분석에 따르면, “좌파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합리적인 주장, 활력을 잃은 보편주의, 오래전의 열정적인 이념적 투쟁의 종말에 대한 공격적이지 못한 자세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공동체가 탈출구가 될 것인가.

 

“세계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결핍’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범국가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200년 전 칸트는 국제사회의 부상에 기반을 둔 범국가적 법적 질서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여러 공동체가 발전함에 따라,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권리 침해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세계적인 시민권의 개념은 허황되거나 과장된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신세계의 질서’를 위한 원칙에 위배될 수는 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 일치하는 국제적인 정치 질서를 찾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만약 경험적인 한계뿐 아니라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세계적인 민주주의 혹은 대표적인 세계 정부가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는 전 세계적인 선거를 통한 세계적인 민주주의로는 시장 경제를 통제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정치 분야에서 억압된 국제 경제가 귀환하고 있다. 여러 집착이 존재하고, 특히 인종, 종교, 문화적 정체성이 관건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이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다. 상품은 자유롭게 유통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만들어진 벽 때문에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영국 제국이 패권을 잃었던 1900년대와 미국이 패권을 잃고 있는 지금이 묘하게 닮았고, 새롭게 부상하는 러시아와 중국, 지정학적으로 발칸반도와 유사한 중동이 조성하는 사회적 긴장감으로 지젝은 3차 대전의 우려도 표하고 있다. 브렉시트 등 유럽연합도 무너지는 마당에 범국가적인 기관이 만들어질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만들어진다면 인류는 진정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국지적 투쟁으로 서로를 고갈시키는 짓을 멈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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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법칙 (블랙 에디션) - 전2권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지음, 이지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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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될까. 최근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차승원 씨가 “친구 없으시죠?”란 물음에 “하나 있어. 유해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대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친구가 많고 적음은 문제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분명 좋은 인생이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깊은 관계는 불가능하다. 인맥 쌓기의 많은 관계보다 적더라도 진정한 친구가 간절하다. 그렇지 않은가. 성공의 관점에서 보면 답답한 소리인가. 로버트 그린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뛰어난 공감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자기몰두와 자기도취에 빠져 세상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기술과 인터넷 발달로 더 가속화되었다. 외부로의 관심은 자꾸 차단되고 스마트폰 속에서 수박 겉핥기로 사람들과 교류하니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사람은 인연의 관계가 아니라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도구에 가까워졌다. 타인과의 사회적 교류가 줄어들다 보니 뇌에 부정적 영향이 생기고 사회성이라는 근육은 위축되며 자기몰두는 더 강화되었다. 그린은 너무 부정적인 해석만 제시한 것 같지만 인터넷으로만 소통하는 관계가 쉽게 끊어지고 쉽게 반목하는 걸 생각하면 전면 반박하기는 어렵다.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고 니 편 내 편 가르며 상대를 심판하는 상황을 세계 곳곳에서 보니 더욱 그렇다. 소통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거 같다.

 

 

그린은 인간 본성을 논하는 이런 지식이 결코 유행 지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술적으로 발전했고 이전보다 지적 수준이 높아졌지만, 인간 본성의 잠재적 파괴력은 더 커졌다. 가짜뉴스나 소셜 네트워크상의 바이럴 효과(소문이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 각종 광고와 콘텐츠가 매일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감정에 기울고 즉각적 쾌락과 오락거리를 찾으며 저항이 가장 작은 길을 택하는 ‘저차원적 자아’와 제어하고 생각하는 ‘고차원적 자아’ 사이에서 오늘 하루 우리는 어느 쪽에 더 가까웠나 생각할 때 자신 있어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린은 대표적인 예로 투기 광풍을 꼽는다. 1987년 및 1929년 시장 붕괴, 1840년 영국의 철도투자 열풍, 1720년대 영국 사우스시컴퍼니 투기 사건, 2008년 금융위기 때 사람들은 투기 광풍에 빠져 있었음을 시인하기보다 외부 요인만 탓하며 광기의 근원을 도외시했다. 인류 최고 천재라고 손꼽히는 뉴턴도 세계 3대 버블 파동(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 영국 사우스시컴퍼니 투기 사건, 프랑스 미시시피 투기 사건)에 빠졌었다는 건 인간 본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다. 

 

 

그린이 제안하는 인간 본성의 1번째 법칙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정신적 편향, 심리적 방아쇠를 파악해 이성적 자아를 끌어내는 일이다. 인간 본성의 2번째 법칙은 자기도취의 네 가지 유형(통제광 자기도취자-스탈린, 과장된 자기도취자-1967년 수녀 잔 드 벨시엘, 자기 도취 커플-톨스토이와 소냐, 상대의 기분을 읽는 건강한 도취자-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헨리 세클턴)을 소개하며, 자기도취는 공감의 부족 때문이므로 공감력을 키워 사회성을 높일 것을 강조한다. 인간 본성의 3번째 법칙은 밀턴 에릭슨이 심리학자가 된 과정을 설명하며 전략적 관찰자로서 사람들의 비언어적 소통 형태를 파악할 것을 권한다. 

 

“인간이 나누는 모든 의사소통 중에 65퍼센트 이상이 비언어적 소통이지만 그중에 사람들이 인지하고 내면화하는 정보는 겨우 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추정된다.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기울이는 주의력은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말’에 쏠려 있다. 실제로 말은 사람들의 진짜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되는데 말이다. 비언어적 신호는 상대가 말로써 강조하려는 내용과 메시지의 숨은 뜻, 그리고 의사소통의 뉘앙스를 알려준다. 그리고 상대가 적극적으로 숨기는 내용과 정말로 바라는 일을 알려준다. 비언어적 신호는 사람들의 기분과 정서를 아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이 정보를 놓친다는 것은 눈을 감고 활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는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것 혹은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일부러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적대감을 알아볼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 하나 있다. 상대가 나를 대할 때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보디랭귀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해보면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에 띄게 다정하거나 따뜻한 태도를 보이다가 당신을 대할 때만 공손한 가면을 쓸 수도 있다. 또 대화를 하다 보면 참을 수 없거나 짜증난다는 듯한 눈빛이 잠깐 스칠 텐데 오직 당신이 말하고 있을 때만 그럴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술에 취했거나 잠이 올 때, 자포자기할 때, 화가 났을 때, 혹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자신의 진짜 감정, 특히 적대적인 감정을 더 많이 누출한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상대는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나중에 사과를 해오겠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다.

이런 신호를 찾아볼 때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테스트를 해보거나 덫을 놓는 것이다. 루이 14세는 이 방법의 달인이었다.”

ㅡ 「law 03. 역할놀이의 법칙 ? 가면 뒤에 숨은 실체를 꿰뚫는다」 

 

 

상대의 성격은 그의 과거에서 드러나는 패턴, 그가 내리는 의사결정, 문제 해결 방식, 권한을 이양하고 협업하는 모습 등 수많은 신호에서 드러나는데, 인간 본성의 4번째 법칙은 그런 행동 패턴을 통해 나와 상대의 본성을 발견하고 비극을 피하는 일이다. 미국의 비즈니스 사업가 하워드 휴즈, 닉슨 미 대통령의 성공과 몰락 사례는 많은 사람이 상대의 대외적 이미지나 명성에 쉽게 현혹되는 것을 보여준다. 긍정성으로 포장한 파괴적 유형의 사람들(지나친 완벽주의자, 그칠 줄 모르는 반항아, 모든 게 인신공격인 사람, 드라마 퀸, 떠벌이, 모든 걸 성(性)적으로 만드는 사람, 응석받이 왕자님/공주님, 아첨꾼, 구원자, 겉으로만 성인군자)을 피할 수 있어야 삶이 덜 고달프다.

욕망의 대상은 우리의 판타지로 투영된다. 인간 본성의 5번째 법칙은 사람들의 억압된 판타지를 자극해 내 주위를 약간의 미스터리로 만들어 내 약점을 극복하는 일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통념과 다른 것, 진보적인 것으로 연상시킨 샤넬, 존 F. 케네디는 이런 전략가였다.

 

“젊음이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대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이상화시키고 더 없이 푸르게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뇌가 가진 특징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유도(誘導)’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무엇은 그와 대조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머릿속에 만들어낸다. 이것을 가장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은 시각을 통해서다. 빨강이나 검정 같은 색상을 보고 나면 주변에 그와 반대되는 녹색이나 흰색 같은 것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빨간색 물체를 보고 있으면 그 주위로 녹색 후광이 생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대조’라는 것을 이용해 작동한다. 우리가 어떤 것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게 뭔지 알기 때문이다. 뇌는 이렇게 대조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무언가를 보거나 상상하면 머릿속으로는 어쩔 수 없이 정반대되는 것을 보거나 상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사는 문화권에서 특정한 생각이나 욕망이 금지되어 있다면, 터부시된다는 사실 자체가 즉시 그 금지된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 돼’라고 할 때마다 ‘돼’가 떠오른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시대에 포르노를 금지하자 사상 처음으로 포르노 ‘산업’이라는 게 생겼다. 마음속에서 이렇게 반대되는 것들이 계속 교차하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갖지 못한 바로 그것을 자꾸 생각하고 욕망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무언가에 안주하는 것은 인간처럼 의식이 있는 동물에게는 위험한 특성이 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 조상들이 현재 상태에 쉽게 만족하는 성향이었다면, 겉으로는 안전해 보여도 어디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위험 요소들에 충분히 예민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으로 경각심을 갖고 위험을 의식한 덕분이지만, 그 때문에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부정적 요소를 생각하고 상상해보게 됐다. 우리는 더 이상 목숨을 위협하는 포식자나 자연 재해가 득실대는 사바나나 숲속에 살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뇌는 아직도 그런 환경에 맞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게 종종 의식적으로 표현되면 불평이나 불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제인 것과 상상의 소산은 뇌에서는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통해 뇌 속을 살펴보면 사람이 무언가를 상상할 때는 그것을 실제로 체험할 때와 놀랄 만큼 비슷한 전기적, 화학적 활동이 일어난다. 때로 현실은 아주 혹독하고 수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매일매일 우리는 조금씩 늙고 약해진다. 성공하려면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우리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온갖 가능성을 즐길 수가 있다. 상상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그리고 상상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만큼의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언가 지금보다 나은 것을 상상하고, 그렇게 상상을 할 때면 현실에서 놓여난 해방감에 약간의 기쁨을 느끼는 존재가 됐다.”

ㅡ 「law 05. 선망의 법칙 -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욕망의 대상이 되라」  

 

인간 본성의 6번째 법칙은 사건을 뒤흔드는 더 큰 흐름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18세기 초 영국회사 사우스시컴퍼니 투기 사건이 자세히 소개되는데, “지금 보고 듣는 것, 이를테면 최신 뉴스, 트렌드, 주위 사람들의 의견과 행동, 아주 극적으로 보이는 온갖 것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당신의 본성 중 동물적인 부분이다. 빠르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손쉬운 돈벌이를 약속하는 반짝거리는 미끼에 당신이 걸려드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과잉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불충분한 정보로 즉흥적으로 대처하거나 생각 없는 반응 수준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근시안적 사고를 보여주는 신호를 인식해야 극복도 가능하다.

 

인간 본성의 7번째 법칙은 상대를 긍정해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연구한다. 미국의 정치인 린든 베인즈 존슨의 스토리가 보여주듯이 “영향력과 권력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관심의 초점을 상대에게 넘겨줘라. 상대가 이야기하게 만들어라. 이 쇼에서 상대방이 스타가 되도록 하라. 상대의 의견과 가치관은 내가 따라 할 가치가 있으며, 그가 지지하는 대의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말하라. 요즘 세상에 이런 관심은 워낙에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관심에 굶주려 있다. 이렇게 상대를 긍정해 주면 그는 방어막을 내리고 뭐가 되었든 당신이 암시하고 싶은 그 아이디어에 마음을 열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박근혜 씨를 둘러쌌던 세력들이 취한 게 이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인간 본성의 8번째 법칙은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태도가 내 지각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안톤 체호프는 불우했던 가정사 속에서도 세상을 다르게 보고 태도를 바꿈으로써 발전했지만 우울과 자기혐오라는 감정까지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 자유는 타인과 나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 또는 반응하려는 정신의 준비” 과정을 우리가 의식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우리는 그저 뇌의 이런 발화와 예민함이 일으킨 ‘효과’를 경험할 뿐이다. 이 효과들이 합쳐져서 우울함이나 적대감, 불안함, 열정, 모험심 등으로 부르는 전체적인 기분이나 정서적 배경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기분을 경험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적대감이나 원망 같은 하나의 감정 혹은 여러 감정의 조합의 지배를 받는다. 이게 바로 우리의 태도다.” “태도는 우리의 지각에 색칠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태도는 우리의 건강,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성공까지 결정한다. 태도는 자기실현적 특성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내 태도를 즉각 관찰하기 쉽지 않은데, “당사자가 자리를 떴을 때 당신이 그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보면 된다. 당신은 그의 부정적 성향과 형편없는 의견에 곧장 주목하는가 아니면 상대의 결점도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용서하는가? 태도의 확실한 신호를 볼 수 있는 것은 역경이나 저항을 만났을 때다. 당신 쪽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경우 당신은 금방 잊거나 잘 둘러대는가? 뭐든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은 본능적으로 남 탓을 하는가? 모든 종류의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예기치 못한 일이나 이례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해 늘 하던 대로 하는 경향이 있는가? 당신의 아이디어나 가정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발끈하는가? 남들이 당신에게 반응하는 모습, 특히 비언어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에서도 태도의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 당신과 있으면 사람들이 초조해하거나 방어적이 되는가? 당신은 어머니나 아버지 역할을 해줄 사람을 잘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는가? 당신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있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각각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나면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적대, 초조, 회피, 우울, 원망이라는 대표적 부정적 태도 유형은 누구라도 꺼리기 마련이다. 

 

인간 본성의 9번째 법칙은 내 안의 어둠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똑똑하고 정치적 재능이 있었지만 본인 성격의 어두운 면을 가늠하지 못할 때 닉슨 대통령 같은 비극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그림자 특징이 눈에 띄는 유형이 있는데, ‘남다른 자신감, 유난히 착하고 상냥함(수동적인 공격성을 가진 매력남과 매력녀), 대단한 도덕적 청렴성(광신도), 성인군자 같은 아우라, 터프 가이, 어마어마한 지성(완고한 이성주의자), 트렌드세터이자 허영꾼, 극단적 사업가’ 같은 강한 특징들은 ‘정반대의 특징 위에 놓여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그 밑에 놓인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인간 본성의 10번째 법칙은 상대의 시기심을 건드리지 않는 현명함이다. 이 장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가 친구인 줄 알았던 제인의 시기심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사례가 소개된다. 시기심이 가장 흔하게 발동되고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인데, 역설적이게도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처음부터 친구가 되려는 경우가 많다. 시기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독이 되므로 시기하는 자는 시기 대상 가까이에서 친절한 가면을 쓰지만 머릿속에서는 상대를 부정적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런 사고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에 대한 우호감이 적대감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상대에 대한 나쁜 행동을 합리화한다. 우정이 깨지는 배신의 원인은 대부분 시기심이다.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시기심을 겪는다. 재산, 지능, 매력, 재능 등 나보다 우월한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인데, 약간의 조롱이나 퉁명스러운 발언 같은 ‘수동적 시기심’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시기심을 드러내는 미세 표정(특히 첫인상에서 가장 노골적), 독설 같은 칭찬, 험담(시기심을 숨기기 위해 흔히 동원되는 위장술), 칭찬하면서도 약점을 건드리는 밀고 당기기 등 ‘능동적 시기심’의 신호는 파악해두는 게 좋다. 남보다 시기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까기 인형, 자기도취형 게으름뱅이, 지위 집착, 권력자의 껌딱지, 높은 지위에서 초조해하는 상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지위가 바뀌었을 때 시기심이 가장 발동하게 되는데, 자조적인 농담을 늘어놓고 남들이 성공을 잘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연예인과 유명인들은 피할 방도가 없다는 게 난관이다. 세월호 가족의 단식 투쟁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는 이들까지 나올 정도로 ‘샤덴프로이데(남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기쁨)’가 넘쳐나고 있는데, ‘미트프로이데(함께 기뻐하기, 니체)로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 본성의 11번째 법칙은 자신이나 타인에게서 과대망상의 신호가 없는지 살피고 자신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 ‘훌륭하다는 감정은 오직 일, 업적, 사회에 대한 기여와 관련해서만 느끼자.’ 파라마운트픽처스, 디즈니를 이끌었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은 성공의 주된 원동력이 본인이라고 생각한 망상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과대망상은 자기중심적 리더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뛰어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우리의 깊은 욕구’에서 연유하는 인간 본성의 내재적 특성이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에 따르면 과대망상은 아주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어머니와 완전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분리된 나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는 나를 먹여주는 어머니의 가슴이 실제 나의 일부라고 믿는다. 우리는 전능했다. 그저 배고픔 같은 어떤 욕구를 느끼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어머니가 와서 그 욕구를 충족시켜줬다, 마치 나에게 어머니를 조종할 수 있는 어떤 마법 같은 힘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인생의 두 번째 단계를 지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마주한다. 어머니는 나와 분리된 존재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전능한 게 아니라 나약하고 작고 의존적인 존재였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깨달음이었고 이후 많은 행동의 근원이 됐다. 우리는 내 주장을 펴고, 내가 그렇게 무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내가 갖지 못한 힘을 공상하려는 깊은 욕구가 생겼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종종 벽을 통과하거나 하늘을 날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상상한다. 아이들이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 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몸집이 작지는 않지만 내가 하찮은 존재라는 인식이 더 강해진다. 내가 친척들, 학교, 이 도시뿐만 아니라 70억이라는 사람으로 가득한 지구에 속한 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의 생(生)은 비교적 짧다. 내가 가진 기술인나 지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너무나 많은 것들, 특히 내 커리어든가 글로벌 트렌드 같은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죽을 것이고 금세 잊힐 테고 영원 속에 묻힐 거하는 사실은 꽤나 견디기 힘든 진실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다. 날 때부터 조그만 존재라는 사실에 항의하고, 자아인식을 확장하고 싶다. 서너 살 때 무의식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평생 나를 괴롭힌다. 우리는 어느 순간 나의 작음을 인식했다가 다음 순간 또 그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우월성을 상상할 방법을 찾게 된다.

자신이 비교적 작은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이 두 번째 단계를 유아기에 겪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나중에 더 깊은 형태의 과대망상에 취약해진다. 응석받이로 자라 버릇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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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인간은 이런 과대망상적 욕구를 종교에 쏟을 수 있었다. 고대에는 부모에게 오랜 세월을 의존한 후에만 내가 작다는 인식에 이르는 게 아니었다. 서슬 퍼런 자연의 힘과 비교했을 때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느낄 때도 그런 인식이 생겼다. 신이나 정령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힘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하는 자연의 광포한 힘을 대표했다. 그 힘을 숭배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나 자신보다 훨씬 큰 무언가와 연결됨으로써 내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어쨌거나 내 부족이나 도시의 운명은 신이나 하느님이 돌봐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라는 개인의 영혼도 돌봐주었고, 이것은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는 신호였다. 우리는 단순히 죽어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수백 년 후 비슷한 식으로 우리는 이 에너지를 우리가 숭배하는 리더들에게 쏟아부었다. 대단한 대의를 대표하거나 미래의 유토피아를 홍보하는 사람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프랑스 혁명,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같은 것들에 쏟아부었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는 종교나 훌륭한 대의가 그런 구속력을 상실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믿기 힘들어졌고, 더 큰 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과대망상적 에너지를 충족시키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더 크고 중요한 존재처럼 느끼고 싶은 욕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이 욕구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다른 분출구가 없다 보니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한다. 그들은 스스로 훌륭하고 우월한 사람처럼 느끼고 자아인식을 확장할 방법을 찾아낸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들이 이상화하고 숭배하기로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때문에 우리 중에는 과대망상적 경향을 가진 개인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 외에도 과대망상이 증가하는 데 기여한 요인들이 있다. 첫째, 어릴 때 응석받이로 관심을 독차지했던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 둘째, 상대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훈련과 경험을 가졌고 스스로 그것들을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종류의 권위나 전문성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 ‘ 왜 저들의 의견이 내 생각보다 더 타당해야 해?’ …… 셋째, 기술 덕분에 인생의 모든 게 온라인에서 긁어모으는 정보처럼 빠르고 간단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과대망상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린 것은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나의 존재를 확장할 수 있는 거의 무제한적인 힘을 갖게 됐다. 내가 수천 명, 수백만 명의 관심과 예찬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생겼다. 과거의 왕이나 여왕이 누리던, 혹은 심지어 신들이 누리던 그런 명성을 가지고 언제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 균형 잡힌 감각이나 현실적인 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ㅡ 「law 11. 과대망상의 법칙 ? 나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평가한다」  

 

과대망상을 높은 수준의 만족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욕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키우기보다 간단히 달성할 수 있는 목표나 단일 프로젝트로 에너지를 집중한다.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현실 속 피드백과 비판을 통해 더 높은 단계를 모색한다. 우리의 능력치보다 살짝 높은 도전을 찾아내는 성취할 때 훌륭해지고 싶은 욕구는 만족된다. 그다음은 더 좋아질 테고.

 

인간 본성의 12번째 법칙은 나에게 맞는 성 역할 찾기이다. 우리는 누구나 남성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을 갖고 있다. 사회에서 일관된 정체성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그런 속성들을 억누르고 우리에게 기대되는 역할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우리 성격을 구성하는 귀중한 축을 상실하고 사고와 행동 방식이 경직된다. 내 안의 다양한 측면을 끄집어낼 때 창의력이 방출되고 사고가 유연해진다. 젠더 투영의 여러 유형은 책 속에서 확인해 보시라.

 

정교한 본능에 의존해 행동하는 다른 생물과 달리 타고난 본성상 인간은 방향성을 갈망한다. 인간 본성의 13번째 법칙은 지루함, 불안, 초조, 스트레스, 우울 같은 기분, 남들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표류하지 말고, 인생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침 삼아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나 전태일 열사 같은 사람들이 그런 예이다. “내부의 가이드 시스템을 따라갈 경우 목표를 상실한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중화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긍정적 감정으로 바뀐다. …… 목적의식이 있으면 우리는 덜 ‘불안’하다. 내 잠재력의 일부 또는 전부를 실현하면서 전체적으로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크든 작든 내가 이뤄놓은 다양한 것들을 뒤돌아볼 수 있다. …… 내면의 회복력이 생겨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고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이런 자각이 인생의 닻이 되어준다. 이렇게 가이드 시스템이 생기고 나면 ‘초조함’과 ‘스트레스’를 생산적인 감정으로 바꿀 수 있다. …… 목적의식이 있으면 ‘우울함’에 덜 빠진다.” ‘쾌락, 돈과 지위, 관심, 권력, 그저 가담하는 대의, 사이비 종교 같은 과도한 신념, 세상에 대한 냉소주의는 ’가짜 목적‘이다. “더 우월하고 덜 우월한 소명이란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욕구와 성향에 맞는 소명을 찾아서 힘을 내어 개선하고 경험으로부터 꾸준히 배우는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것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만약 사람들에게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것을 모두 빼앗아버린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절망 속에 죽을 것이다. 인간에게 헤아릴 수 없는 것, 무한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작은 행성만큼이나 꼭 필요하다.”

ㅡ 표도로 도스토옙스키

 

 

우리는 자신의 성격 속에 녹아 있는 사회적 인격을 잘 모른다. 소속감 속에 빠져들고 싶어 하고 그 속에서 연기하며 쉽게 감정에 전염되고 과잉 확신에 빠지는 등 집단 속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가 속한 첫 번째 집단 ‘인류’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 본성의 14번째 법칙은 집단의 영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집단 내에서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이나 남들을 흉내 내려는 성향은 우리 본성의 가장 원시적인 뿌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문명화되고 교양 있으며 자유의지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집단행동은 이런 신화를 산산조각 낸다. 마오쩌둥이 선동한 ‘문화대혁명’은 인간 본성을 바꾸려고 한 시도였다. 이 실험은 인간 본성을 뿌리 뽑을 수 없고 인간 본성을 바꾸려고 하면 다른 모양, 다른 형태로 다시 출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마오쩌둥이 바랐던 새로운 혁명 사회는 그를 숭배하는 가장 억압적이고 미신적인 중국의 봉건 체제를 더 닮아 버렸다. 외부인에 대한 불신이나 그들을 악마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와 차별 행동 등은 선조들 시대에는 전염병의 위험이나 공격적인 부족 경쟁에서 비롯됐지만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리더를 둘러싼 모사꾼, 말썽꾼, 게이트 키퍼, 배후의 조종자, 궁정 광대, 공감의 여왕, 총신과 동네북 유형들이 가득한 집단이 아니라 협업하며 의사 결정을 내리는 ‘집단지성’이다. 

 

인간 본성의 15번째 법칙은 따르고 싶은 리더십 기르기이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적개심과 반항심을 가지듯이 인간은 늘 양면적인 감정을 느낀다. 권력자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면서도 얕보는 이중적 감정이 작동한다. 권위나 리더를 업신여기는 풍토는 우리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데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 주었다.

 

“이렇게 양면성을 느끼는 데는 강력한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게 겁이 나는 탓도 있다. 강력한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것은 일시적으로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내 의지가 부정될 것만 같아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반대되는 혹은 상충하는 감정으로 균형을 잡는다. 또 일부는 우리의 기분이 계속 바뀌고 중첩되는 탓도 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우리는 내 감정의 양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복잡한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단순한 설명에 의존하는 편을 선호한다. 주위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감정을 최대한 소화하기 쉽게,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한다. 실제로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감정의 양면성이 작용하는 순간을 포착해내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아주 정직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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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최근의 성공이나 실패에 따라 금세 리더에 대한 평가가 뒤바뀐다는 것, 순식간에 지지와 존경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은 뉴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변덕이 현대에 와서 생긴 현상이라고 믿고 싶을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극히 민주적인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 조상들은 현대인들보다는 훨씬 더 순종적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참 옛날로 돌아가 토착 문화나 초기 문명을 살펴보더라도 한때는 존경받는 족장이고 왕이었던 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노쇠한 신호가 보여서, 전투에서 져서, 갑자기 가뭄이 들어서(신이 더 이상 그에게 은총을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혹은 집단을 희생시키고 그의 핏줄만 편애했다는 것이 죽임을 당하는 이유였다. 이런 처형식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리더에 대한 적개심을 마음껏 방출하는 축제의 순간이었다. 이에 대한 수많은 예를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가 쓴 《황금가지》 에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한 개인이 권좌에 오래 머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했을 것이다. 참신하고 새로운 리더가 더 조종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복종 아래에는 어마어마한 경계심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우리가 족장의 목을 베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선거를 통해 혹은 미디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그들을 처형한다. 권력자의 의례적 추락을 목격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권력자를 탓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경제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그들을 탓할 것이다. 경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신의 은총이나 행운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이중성이나 불신이라는 측면만 살펴본다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리더 중에는 이런 변덕에 맞서 보호막을 쳐둘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공고한 존경과 지지를 얻어내서 오랜 기간 동안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고대 인도의 아소카 황제,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1장 참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엘리자베스 1세가 바로 그런 리더들이다. 좀 더 현대로 와본다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워런 버핏, 앙겔라 메르켈, 스티브 잡스 같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권력은 본래의 의미에 맞게 ‘권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권위(authority)’라는 단어는 ‘늘리다, 증강시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uctoritas’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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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이 시대의 비생산적 편견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권위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경멸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사람들은 권위와 리더 일반을 혼동한다. 세상의 너무나 많은 리더들이 본인의 권력을 지키고 자신의 잇속만 채우는 데 급급해 보이기 때문에 권위라는 개념 자체에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우리는 아주 민주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대체 왜 우리가 권위 있는 자를 따르며 열등한 역할을 자처해야 하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자문할 수도 있다. ‘권력자들은 맡은 일만 하면 돼. 권위란 왕이나 여왕 시대의 유물이야. 우리는 거기서 한참이나 더 진보했어.’

이렇게 권위나 리더를 업신여기는 풍토는 우리 문화 전반에 퍼져 있다. 우리는 예술에서 더 이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비평가고 개인이 기준이다. 그 누구의 취향이나 판단도 우월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육아가 권위의 표본으로 여겨졌으나 더 이상 부모는 자녀에게 특정한 가치관이나 문화를 심어주는 권위자로 보여지길 바라지 않는다. 부모는 자신이 약간의 지식과 경험을 더 가진 자녀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역할은 아이의 감정을 인정해주고 아이들을 계속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나이만 더 많이 먹은 친구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평등을 추구하는 관계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학습은 재미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리더들은 마치 자신이 관리자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뒤에 서서 집단이 옳은 결정을 내리게 도와주고, 모든 것을 합의에 따라 실행하는 사람 말이다. 혹은 요즘 들어 이용 가능하게 된 대량의 정보를 흡수해 숫자를 해석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이자 진정한 권위자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나 아이디어는 모두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예술에 권위가 없다면 반항할 대상도, 전복시킬 운동도, 동화되거나 거절할 깊은 생각도 없다. 점점 더 빠르게 점멸하고 사라지는 무정형의 트렌드가 있을 뿐이다. 권위자로서의 부모가 없다면 부모의 생각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춘기의 반항이라는 중요한 단계를 경험할 수 없다. 방향을 상실한 채 어른이 되고 그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를 탐색할 것이다. 나보다 우월하고 존경할 가치가 있는 선생님이나 대가가 없다면 그들의 경험이나 지혜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나중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더 나은 생각으로 그들을 넘어서려는 시도조차 할 수가 없다.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트렌드를 예견하고 우리에게 장기적 해결책을 안내해줄 리더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 그리고 그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리면 늘 안내자로서 어떤 권위를 필요로 해온 우리 인간은 가짜 권위에 쉽게 빠져버린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급증하는 그런 가짜 권위 말이다.”

ㅡ 「law 15. 변덕의 법칙 ? 권위란 따르고 싶은 모습을 연출하는 기술이다」

 

 

 

 

‘리더인 척, 방향성이 있는 척, 착각을 만들어내지만 실제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비전은 없는 독재자’, ‘그들이 가진 아니디어나 행동은 모두 본인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본인이 통제한다는 느낌을 높여주는 것들뿐’, ‘대중이 듣고 싶은 것을 영리하게 흉내 냄으로써 본인이 집단을 잘 보살피고 집단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착각을 만들어내는 리더’라는 말에 트럼프가 생각났다. 

 

인간 본성의 16번째 법칙은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간파하는 일이다. 대기업가로 성장한 존 D. 록펠러는 상대에게서 그것을 잘 간파했고 그 힘을 행사하는 데에서는 더욱 노련했다. 인간의 공격성은 단순히 남을 해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원적 불안으로부터 유래했다.

 

“만성적 공격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자질들이 있다. 첫째, 공격자는 무력감이나 초조함을 잘 견디지 못한다. 우리에게 좌절감이나 불안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 종종 감정의 방아쇠가 되어 그들에게는 훨씬 더 강력한 반응이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 만성적 공격성이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훨씬 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보다 의존성이나 무력감이라는 감정을 잘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남자 유아를 통해 목격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직장 혹은 다른 곳에서 본인의 지위를 더 불안해한다. 남자들은 또한 끊임없이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고 타인에게 끼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가늠하려고 한다. 이들의 자존감은 권력이나 통제, 자기평가에 대한 존중의 감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종종 남자에게 공격적 반응을 자극하는 것이 더 쉽다. 어찌 되었든 공격자는 우리보다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가 그런 유형임을 알게 되면 그들의 자존감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들을 비판해서 무심코 그들의 분노 반응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한다.

또 하나 공격적인 행동의 흔한 측면은 쉽게 중독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노골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본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본인의 조종을 통해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공격자는 아드레날린이 한껏 분비되는데 이게 중독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자극과 흥분을 느낀다. 그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쉽게 용인되는 방식으로 지루함을 달래는 것은 뜨뜻미지근하게 보일지 모른다. 쉽게 돈을 버는 데서 오는 스릴은 분명 미심쩍은 투자를 하는 월스트리트 브로커나 무언가를 훔치는 범죄자처럼 대단히 중독적이다. 언뜻 보면 이는 자기파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각각의 공격적 폭발로 인해 더 많은 적과 의도치 않은 결과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자는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점점 더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데 능한 경우가 많다.”

ㅡ 「law 16. 공격성의 법칙 ? 상냥한 얼굴 뒤의 적개심을 감지한다」 

 

 

수동적 공격자들은 본인이 교묘하게 어떤 식으로든 당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가 있다. 이런 공격자들에 대하는 전략은 교묘히 그들의 행동을 반사해서 보여주거나 그들이 동요할 상황을 만들어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공격자, 의존적인 공격자와는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고, 독한 말을 뱉어놓고 “농담도 못하냐?”라는 말을 하며 의심을 심는 공격자에게는 그들의 발언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자신이 잘못해놓고 내게 책임 전가하는 공격자, 독재적 공격자와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17번째 법칙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루이 16세와 조르주 자크 당통은 같은 시기에 최고의 지위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루이 16세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왕실의 권위만 내세웠다가 비극을 맞았다면, 당통은 본인이 시작한 공포정치가 실수였고 멈출 때라는 것을 알았지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라이벌들에게 제거된다. “지식인들은 종종 제일 마지막에 가서야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보곤 한다. 이론과 관습적 틀에 너무나 깊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당신은 전체적 분위기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과거와 어떻게 멀어지고 있는지 감지해야 한다. 시대정신을 느끼고 나면 배후에 있는 것이 뭔지 분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정말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왜 이 새로운 형식을 향해 몰려드는가?” 

 

인간 본성의 18번째 법칙은 죽음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삶의 모든 측면을 더 강렬히 경험하는 일이다. 메리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로 떠오를 즈음 관절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전신 홍반성 루프스 진단을 받았다. 사랑하던 아버지도 같은 병으로 마흔다섯 나이로 요절했던 터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죽음에 대한 고민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고 자신의 에너지를 작품에 집중하려 했다. “인생에서 많은 것을 바랄 수 없으니 그녀가 얻는 모든 것이 무언가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불평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죽어가며 심각한 육체적 고통 속에 있는 그녀는 친구들과 방문객, 서신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람들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궁극의 현실을 철저히 이해한 그녀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더 깊어졌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자각을 요리조리 피하며 내 앞에 시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는 태도는 우리가 다른 불쾌한 현실이나 역경을 대처할 때도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쉽게 히스테리를 부리고 균형감각을 잃고 우리의 운명에 대해 남 탓을 한다. 분노하며 나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각종 오락으로 눈을 돌려 그 통증을 빨리 무디게 만들 방법을 찾는다. 이런 회피는 곧 습관으로 만들어져 전반적 불안과 공허함을 가져온다. 이것이 평생의 패턴이 되기 전에 우리는 실질적이고 지속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우리도 움찔하지 않고 내 죽음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 금방 사라질 죽음에 대한 추상적 명상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죽음이 대표하는 불확실성에 제대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른 역경이나 이별처럼 죽음 역시 바로 다음 말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자각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내가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다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기로 더 깊은 공감을 느끼고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음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다.”

ㅡ 「law 18. 죽음 부정의 법칙 ?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생각한다」

 

 

1665년 런던에 페스트가 돌아 거의 10만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다섯 살이었던 대니얼 디포는 60여 년이 지난 후 많은 조사와 삼촌의 일기,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역병의 해 일지 Journal of Plague Year』을 썼다. 전 세계 사망자 38만 명이 넘어가고 있는 코로나19 영향인지 2020년 4월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 (부글북스)란 제목으로 국내 번역되었다. 전염병은 많은 혼란과 적개심이 나타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료 시민과 더 높은 수준의 공감을 나누며 우리 사이의 반목을 제거하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도 만들어줬다.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한 나의 처방전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다. 있는 그대로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히. 필연적인 일을 단지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ㅡ 니체 

 

코로나19라는 죽음의 문지방을 넘으며 우리는 어떻게 바뀔까. 불안과 망상과 중독은 좀 줄어들까. 사람들은 서로를 좀 더 사랑하게 될까. 인생이 나한테 가하는 고통과 남들이 나를 위해 해주지 않는 일들을 불평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면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가는 반복을 재차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서.

 

 

 

에필로그)

로버트 그린의 3부작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 『전쟁의 기술』을 다 읽고, 『인간 본성의 법칙』은 두 번 읽었다. 매번 엄청난 분량에 힘들었는데, 저자의 저술 특징인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통한 스토리텔링으로 가독은 수월했다. 다른 책에서도 공통으로 느꼈던 점인데, 이 책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기대를 사람들 눈앞에서 흔들어라” 같이 자기 계발 특유의 선동적인 표현이 좀 거슬렸다.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세상이 더 나아지고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걸 바라는 저자의 맘이 이번 책에서 잘 느껴져서 큰 우려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유혹의 기술』을 요점 정리해 나온 『인간관계의 법칙』(2020.2, 웅진지식하우스)처럼 내용을 좀 더 압축해서 전달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린 선생님이 길게 쓰려는 법칙을 고수하시는 게 아니라면. 인물 사례를 소설처럼 상술하시는데 그 부분이라도 줄여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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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의 고고학 - 로마 시대부터 소셜미디어 시대까지, 허위정보는 어떻게 여론을 흔들었나
최은창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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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디지털 굴뚝에서 매연과 소음이 무럭무럭 뿜어져 나오는 디지털 시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저자는 우리들이 부지불식간에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앨리스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의 상황은 모험을 겪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오는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아비규환의 현실이라는 게 문제다.

 

 

 

이 책은 “수많은 형태의 ‘거짓’이 어떤 이유에서 생산되고, 누가 어떻게 전달했고, 어떤 혼란과 피해를 주고, 어떤 방식의 규제가 제안”되었는지를 살핀 가짜뉴스 현상의 고고학적 탐색이다. 국내 학계는 가짜뉴스 개념을 “형식과 내용을 모두 기만하는 가짜 정보”로 좁게 보지만, 저자는 ‘악의적 유언비어’, ‘거짓 소문’, ‘정치 프로파간다’, ‘왜곡된 뉴스 보도’, ‘뉴스 정보의 파편’까지 포함시켰다. 가짜뉴스와 허위정보는 그 목적에 따라서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다. ①자극적 제목으로 노출시켜 클릭을 유도해서 광고 수익을 얻는 가짜뉴스, ②정치적 여론의 향방을 인위적으로 이끌기 위한 ‘온라인 프로파간다’ ③알고리듬, 봇넷botnet 등 허위정보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자동화 기술의 활용, ④광우병 보도, 기후변화, 백신 접종 거부, GMO 식품 등 대중의 공포를 자극하는 ‘과학적 위험성’을 다룬 뉴스가 그렇다.

 

 

 

 

 

 

 

“거짓과 허위정보는 대중의 관심을 이끌고 분노 감정을 유도하기 위한 사실의 날조, 왜곡하는 전언傳言, 증오심 부풀리기, 적군과 아군을 나누는 선동의 요소였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낯선 침입자가 아니라 정보 생태계의 오랜 주민이었고, 우리 자신이기도 했다. 인쇄술, 라디오, 무선 전신, 웹브라우저, 모바일 인터넷 등 기술 발전에 힘입어 미디어의 힘이 강력해지는 동안 허위정보도 그림자와 같이 진화를 거듭했다. 미디어의 역사는 허위정보 전파의 역사이기도 했다. 16세기 팸플릿의 시대부터 1930년대 라디오의 전성기, 1960년대 TV 뉴스 방송에서도 오보와 허위정보는 흘러나왔다. 완전한 사실만이 뉴스로 전달되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중략)… 소문이나 발언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가를 지배 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때 생겨나는 해악은 중세 가톨릭 종교재판소, 18세기 청나라의 저혼 사건, 반대자를 가혹하게 탄압한 나치의 비밀경찰, 중국의 국가인터넷판공실이 실시하는 강력한 단속이 보여준다. 교황권은 이단 척결을 내세워 마녀사냥을 가톨릭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게르만 민족주의 자긍심을 고취시켰고, 미국의 적색 공포 프로파간다는 반공산주의가 곧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동가가 거짓으로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는 많은 희생양들이 뒤따랐다.

왕권제와 교황의 지배력이 사라지고 민주적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취약한 제도였다. 대중의 심리는 언변을 갖춘 선동가가 제공하는 표면적 명분을 갖춘 반복적 메시지에 쉽게 흔들릴 수 있었다. 허위정보의 생산자들이나 프로파간다의 선동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 여론의 흐름이 쏠리면 소떼몰이가 가능했다. 선거의 승리가 모든 것을 잠재우고 권력을 부여하는 시스템에서는 유권자를 분노하게 만들든지, 속이든지, 선동하든지, 위협하든 승리하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뉴스 정보는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웅변술과 연설은 정보의 전달이나 공적인 토론이 아니라 대중의 ‘설득’에 사용되었다. 긍정성의 이웃으로 부정성도 따라다니듯 인쇄술은 라틴어 성경, 지식의 전파, 팸플릿을 통한 사회 비판뿐 아니라 마녀사냥의 방법과 지침을 담은 정보를 퍼트리는 데도 기여했다. 혹스(Hoax, ‘괴담 또는 속임수’)와 도시전설, 만우절 뉴스는 사회적 해악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언비어나 근거 없는 소문은 권력자나 집단 광기와 만나 1768년 저혼 사건,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 같은 폭력 행위를 낳기도 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는 미국 옐로 저널리즘의 전성기였다. 페니 프레스 penny press 시대 신문사들은 괴담, 모험담, 엉터리 의료 지식, 괴물 이야기, 가짜 인터뷰 등 독자들이 원하는 흥밋거리를 신문에 실었지만 독자를 노골적으로 우롱하거나 정치 뉴스를 조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고 수익을 얻기 위해 미확인 뉴스 정보를 뿌리거나 허위정보를 사실처럼 퍼뜨리는데 일조하는 소셜미디어나 유튜브는 옐로 저널리즘을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로 만들었다.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추측성 뉴스의 역사도 반복되고 있다. 1898년 2월 쿠바 하바나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전함 메인호가 스페인 군대의 공격 때문에 침몰했다는 보도 행태는 한국의 천안함 사건을 다룬 뉴스들과 비슷했다. 미국 해군은 메인호 침몰 원인을 1974년 재조사해 메인호가 탄약고에서 시작된 화재로 폭발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한국 천안함 사건은 어찌 될까.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은커녕 가짜뉴스로 곡해되고 있는 상황인데. 1912년 4월 타이타닉 호 사건에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과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사고 당시 누군가 무선전신으로 송신한 가짜뉴스로 인해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일제히 타이타닉 호 승객이 전원 무사하다는 헤드라인을 앞다투어 올렸다. 이 가짜 무선은 신문 역사상 가장 많은 헤드라인에 실린 가짜뉴스로 기록되었다. 코로나19 음모설이 한창인 요즘, 1980년대에 “에이즈AIDS는 미국이 만들어낸 질병”이라는 가짜뉴스를 전 세계 언론에 뿌린 KGB의 공작은 냉전시대 허위정보전으로 눈길을 끈다. 2014년 에볼라 감염 때는 러시아계 방송 《RT America》가 에볼라와 에이즈가 서구 제약회사와 미국 국방부가 합작한 무기라는 의혹이 라이베리아에 퍼지고 있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2017년 프랑스와 독일 선거, 2016년 브렉시트 투표,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도 러시아가 끊임없이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CIA가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미디어 홍보 캠페인(앵무새 작전)을 전개했듯 여론을 움직이려는 허위정보전은 ‘정치적 도덕성을 결여한 자’와 ‘진실을 지키려는 선한 자’의 대결로 보기 어렵다. 가짜뉴스가 가장 급증하는 때는 선거 시즌이다. 대선 경우 한국의 후보자는 안보관, 이념적 정체성, 5·18 정신 등을 검증받고, 미국에서는 출생, 이민자와 무슬림을 대하는 관점, 낙태 합법화, 총기 규제 등에 대해 정치 공세를 받는다. 이와 관련해 허위 정보, 가짜 뉴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뉴스들이 대거 유포된다. 한국은 뉴스 기사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접하는 게 압도적이지만 미국은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전달받는 비중이 높다. 미국과 한국은 뉴스 소비 상황이 다르지만 네트워크 프로파간다에 흔들리는 건 동일하다. 독립 미디어 복스Vox의 분석에 따르면, 온라인을 통한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는 여론을 조작하고 선거 캠페인의 결과를 뒤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가짜뉴스 웹사이트의 날조와 가짜 이야기는 극단적 정치적 관점을 가진 집단의 확증편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이다. 진정한 문제는 주류 미디어의 뉴스 편집 비중이다. 데이터 과학과 결합한 허위정보에 집중적으로 노출된다면 대중은 뉴스의 인물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가지거나 그를 불신하게 될 수도 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원인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미디어의 강력한 지지 덕분이었다. 1983년 미국 미디어 시장은 50개 미디어 기업이 지배했으나 201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폭스, 컴캐스트, 타임 워너, 월트 디즈니, CBS 코퍼레이션, 바이어콤 등 여섯 개 기업들이 90퍼센트를 통제하고 있다. 4개 지상파 방송사 CBS, Fox, ABC, NBC도 모두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미국 내 언론의 전체적 판세는 보수 언론이 진보 언론에 비해 세력 면에서 우세하다.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달받은 뉴스의 ‘내용’이 정확한가는 관건이 아니고 ‘누가’ 그 메시지를 전하느냐가 뉴스의 신뢰도를 결정하게 된다.” 한국은 2009년부터 신문·방송 교차 소유를 허용하면서 종편 방송 시대가 열렸다. 일부 언론사들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당파성을 드러내놓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과 추측성 논평과 보도를 계속해 가짜뉴스의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 “미디어 학자 제임스 케리는 ‘저널리즘’과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같은 이름’이라고 보았다.” 외신을 통해 팩트체킹까지 하는 지금 한국의 언론은 ‘공적인 삶’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기능을 못하고 있다. 외신이라고 다 믿을 수 없다. 페루의 퀴노아 가격 통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빈곤 국가들의 식량 부족 악화를 연결한 잘못된 해외 뉴스도 있었고, 뉴스 전재 계약을 타고 부정확한 정보가 국문 뉴스로 보도되는 구조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이 암을 일으킨다는 뉴스가 그대로 전해지는 오보 해프닝도 자주 있다. 가짜뉴스가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데이터는 “경제 성장률, 피해 규모, 사상자 수, 실업률, 범죄율, 물가 인상률”인데 한국의 언론들이 부정확을 넘어 데이터를 악의적으로 제시하는 걸 자주 본다. 데이터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전달할 기자도 부재하고, 책임 있는 기사가 아니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나 어뷰징 기사로 대중을 끌어들이기 바쁜 한국의 언론이 공신력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가짜뉴스와 허위정보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악의적 소문, 허위정보를 동원한 선동, 날조된 뉴스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공통점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적 요소 또는 불만을 강조하여 공포와 분노를 합리화하는 데 있다.

 

2. 경제적·정치적 인센티브가 존재하는 한 허위정보와 가짜뉴스의 생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 인쇄 시대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떠도는 비공식적인 뉴스 정보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가를 판정하여 공식화하는 것은 언제나 권력자의 권한이었다. 지금은 이 권한의 범위와 책임이 광범위해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례로 반복되고 있다.

 

4. 언론과 비언론, 진실한 정보와 허위정보의 이분법으로 복잡한 가짜뉴스 현상을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5. 정보 과잉으로 인한 혼돈과 피로, 무질서 속에서 허위정보를 꿰뚫는 가시성 확보가 어렵다.

 

6. 올드 플랫폼(지상파 방송, 케이블 TV, 라디오, 신문)과 뉴 플랫폼(검색 엔진, 포털 사이트, 소셜 미디어) 모두 허위정보와 가짜뉴스의 증폭에 사용된다. 2019년 기준으로 미국 성인 가운데 69퍼센트는 페이스북으로, 한국은 10명 중 8명이 포털 사이트에서 디지털 뉴스를 본다. “진실한 뉴스 정보이든, 거짓 소문이든 가장 효과적인 증폭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7. 허위정보는 생산적 토의를 위한 전제를 망가뜨리므로 소모적 논쟁만이 겉돌게 되고 불신만 더 악화된다.

 

8. 미국 연방대법원과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 규제 대상이 분명하고, 해악성이 구체적이어야만 표현의 자유 규제가 헌법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고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 ‘규제 대상’의 명확한 설정, ‘해악성·위험성’의 유형, 중립적 판단의 주체를 정하는 일이 요구된다.

 

9. 허위정보를 유포하는 활동이 외주화·자동화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의 힘이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다. 2019년 영국 하원이 펴낸 ‘허위정보·가짜뉴스 보고서’는 페이스북을 법을 초월하며 행동하는 ‘디지털 갱스터’로 표현하며, ‘민주주의’, ‘데이터 프라이버시’, ‘시장 지배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에서 극단적 콘텐츠를 찾아내 차단하는 것은 머신러닝으로는 한계가 있다. 플랫폼마다 운영하는 ‘정책’ 또는 ‘가이드’를 통해 자율규제가 이뤄지고 있지만, ‘가짜뉴스 또는 허위조작정보’ 는 위반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와 ‘유해·위험한 콘텐츠, 폭력적·노골적 콘텐츠, 폭력·범죄 조직, 증오 표현, 권리 침해, 사이버 폭력’ 사이에서 많은 허위정보들이 전파되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 차단을 요청한 신고는 전 세계에서 2019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1,000만 건이 넘었다. 예일대학교 로스쿨에서 헌법을 가르쳤던 토머스 에머슨은 “진실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거짓을 억누르는 방법은 없다”라고 했지만, 그는 ‘의견의 허위’만 예상했지 악의적 ‘사실 조작’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이란 과소한 정보의 교환으로는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과도할 정도로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면서 경쟁을 펼치고 서로를 무너뜨리도록 그 과정을 지켜보자는 것”으로 경제학에서 온 아이디어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사상의 자유시장도 아무런 규제가 없다면 다양한 문제가 나오기 마련이다. 소셜미디어나 온라인상 익명의 행위자들이 행하는 집단적 프로파간다가 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들고, 미디어 산업의 소유권이 과도하게 집중된 구조 또는 뉴스 정보를 전달하는 디지털 플랫폼이 거짓 발언의 가시성을 증폭시키는 상황에서 여러 국가의 자정 역할이 필요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요구는 갈수록 많아지지만 그만큼 우리가 허위와 진실을 가려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뉴스들이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최은창 『가짜뉴스의 고고학』 체크 포인트 잡느라 포스트잇 플래그 한 통이 장렬히 전사했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 밑줄이 많아 포스트잇 플래그를 적게 쓰긴 했지만 『가짜뉴스의 고고학』 에 예상치 못하게 정말 많이 썼다. 주석 빼면 본문은 유발 하라리 책이 더 긴데! 예상대로 리뷰 정리하는데 300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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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 - 질문하는 문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폴 김 외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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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일상을 살아가지만 전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도 체감한다. 인류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도 전후가 다를 큰 사건이다. 실시간으로 각국 정부의 대처와 사람들 행동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치 판단과 개념의 허상도 깨닫고 있다. 20세기 초에 사라진 줄 알았던 파시즘적 성격의 정부가 속속 재등장하고 인종차별, 민족주의, 젠더 문제가 들끓는 현재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까.

 

인류사의 도약은 빅 퀘스천(big question)의 등장으로 가능했다. 신화적 세계관을 자연과학적 세계관으로 전환했던 탈레스, 중세 신학적 사회를 인간 중심적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데 기여한 데카르트나 다윈, 인간 노동의 창조성과 고유성을 발견한 마르크스 등 많은 역사적 위인들은 전환적 질문과 비판적 사고를 제시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관점 전환적 질문이 중요한데 질문하는 능력은 ‘교육’의 역할이 가장 크다.

 

한국 사회가 질문 없는 교육과 사회였다는 게 크게 드러난 일화가 있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내한했을 때 초대에 감사하며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청했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 중국 기자가 아시아 대표로 자신이 질문을 하겠다고 나서 오바마가 제지하고 한국 기자에게 재차 질문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우리에게 기레기 소리 듣는 것과 차원이 다를 한국 기자들의 세계적 굴욕이었다. 박근혜와 오바마의 한미 공동 기자회견에서 박근혜가 취재진의 질문을 잊고 엉뚱한 답변을 한 망신까지 덧붙여 한국인 모두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일체의 질문을 차단하고 수첩만 보고 측근만을 포용했던 박근혜 정권은 국정 농단의 파국까지 내보여 우리 사회를 아프게 돌아보게 한 거울이었다.

 

정치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인간들이 도덕적이라도 그들이 구성하는 사회는 다른 집단적 정체성을 이룬다고 말했다. 집단이 추구하는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시스템의 역학이 비합리적이며 정의롭지도 않은 정치적 파워 게임을 만들어내고, 도덕적 개인들마저 그 정치적 특수성에 가둔다. 그렇기에 사회 진화를 위해서는 개인의 선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현실적 메커니즘을 개선하는 실천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현시대에는 혁명과 같은 분노를 통한 사회체제의 감정적 전환은 불가능하며, 합리적 장치들을 디자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제목이자 전달하려는 주제인 ‘컬처 엔지니어링’이 그 과정이다. 기술혁명과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사회문제 속에서, 상황에 대처하는 사회 구성원 전반의 사고방식, 대응 방식, 의식의 고착화 현상은 정부가 교체되어도 잘 바뀌지 않는다. 네 명의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컬처(‘개인과 조직의 사고·대화·행위 양식을 강제하는 의식적·무의식적 토대·구조·맥락’) 변화를 촉구한다. 인문학자 함돈균, 교육공학자이자 교육행정가 폴 김, 국제개발협력가 김길홍, 국제경제기구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교육 분야 대표이자 남아시아 인간 사회개발 디렉터 나성섭은 사회 인프라를 설치해도 이 하드웨어를 제대로 사용하고 유지·관리하는 것, 거기에 따르는 관습·제도·정책·규정·법을 바꾸는 것이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그 사회의 컬처, 사람들의 문화·인식·태도 같은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강변했다. “‘사회적 합의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합의 능력에 따라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회를 잡는가, 못 잡는가가 나눠질 것‘(김길홍)이다.

 

한국에서 광우병, 4대강 사건이 불신과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던 것처럼 네팔의 멜람치 물 공급 사업은 정부군과 마오이스트 무장 반군 세력이 내전 중인 상황, 많은 NGO(민간단체가 중심인 비정부(非政府) 국제 조직)까지 고려해야 해서 사업 추진 20년이 걸릴 만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생활하기 위해 물이 필수 불가결한데, 가난한 사람들은 물 저장 시설이 없어서 더 크게 영향을 받아요. 물탱크로 가져와야 되니까 물값이 더 비싸져서 힘들어지고요. 물은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사회가 겪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프로젝트가 사실상 ‘실패’하게 되면 두 번째 고통이 발생하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프로젝트 비용이 굉장히 올라간다는 거죠. 시간과 인력과 자원이 더 들어가게 되니 비용이 몇 배로 뜁니다. 또한 더 나쁜 점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믿을 게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사회적 불신이 더 커지는 거죠.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과정에서 사회 지도층이나 와페드 등 누구도 사업 지연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사업 지연의 고통은 온전히 시민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이죠. 한 번 크게 추락한 사회적 신뢰는 복구가 굉장히 어렵고, 계속해서 불신을 증폭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심화하게 됩니다.」(나성섭)

 

「갈등의 해소라는 게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거나 합의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준을 어떻게 해서든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건 사회적 담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얘기와는 반대로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이 낮을 때에 사회적 무갈등의 상태에서 기술적 개발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환경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적당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경기장 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고 거기에 다른 구조물이 들어설 때 한국의 일반 시민들은 이 사안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그 자리에 지어진 건물이 설령 멋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별개로 이렇게 큰일들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별 거슬림 없이 수용된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폴 김 선생님 말씀은 사회개발 프로젝트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교육적 프로세스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의 질을 생태계 수준에서 총체적으로 진화시킨다는 관점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죠.」(함돈균) 

 

 

4대강 사업이나 용산 참사 등 한국 정부는 강제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후진적 사회의 모습을 자주 보여 왔다. 사회적 갈등이 만연하면 실행 기능이 떨어진다. 앞에서는 혁신을 말하면서도 노소, 계층, 개인·기업·공기관 할 것 없이 한국은 리스크 회피 사회다. 정부 보호 아래 기업은 단기 지대 추구를 최대화하려는 기회를 벌고자 해 스마트폰과 자동차 산업에서 새로운 기술 도입이 늦어진 게 대표적이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하는 공무원 직업도 리스크 회피 컬처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건 실패를 감싸 안는 사회시스템이 안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실리콘밸리는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스탠퍼드대학교가 있고 그런 적극적 환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한국의 새로운 산업은 획기적인 산업 재편성이 이루어진 미국이나 중국과 큰 차이가 있다. 게임 산업(넥슨, 넷마블 등), 인터넷 비즈니스 산업(카카오, 네이버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BTS 등)으로 부상한 시장은 재벌 기업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진출하지 않은 분야였다. 새로운 산업으로 빠르게 움직이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도 필요한데, 고용 안정이나 보수-진영의 이념 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생산적 전환이 가능한 재교육 시스템 디자인을 구축해야 한다.

 

‘글로벌global’이라는 단어는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의 희망을 반영하는 시대적 키워드였고 경제 중심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다. 두 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시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화하는 불신의 키워드가 되었다. 앞으로의 키워드는 도시city다. 도시는 이제 하드웨어 인프라의 집적이 아니라 인재 가 집적하고 사회혁신과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플랫폼이다. 뉴욕, 워싱턴 시애틀(아마존), 캘리포니아 마운틴뷰(구글), 중국의 선전深?, 싱가포르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지역 사회 육성 사업은 보여주기식 행정이나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단순한 이벤트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될 수 없다. 기업과 공장을 도시에 유치함으로써 인재가 모이는 게 아니라, 인재를 도시에 모이게 함으로써 기업과 공장과 문화가 만들어진다. 미래의 도시 전략은 인재들이 모이는 복합적 도시 생태계를 디자인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도시 개발을 한다고 할 때는 ‘도시 진화의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하는 핵심 진화에 대한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도시들은 첨단 기술 직종들을 유치해 투자를 유도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많은데, 젠트리피케이션이라든지 중간 직종의 몰락이라든지 젠더 이슈라든지 이 상황이 파생할 수 있는 문제적 이슈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어떻게 함께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시화정책에서는 가치 지향이나 행정제도 실행 권한을 지닌 단체장 또는 정단이 누가, 어디가 되는가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경제적 이익만 바라볼 게 아니라 이처럼 핵심 진화를 생각할 수 있는 도시계획 모델이어야 한다는 거죠」(폴 김)

 

인간은 생산 도구인 ‘노동자’가 아니라 인적자본(노동자 개인이 보유한 능력, 숙련도, 지식을 아우르는 개념이자 기술 혁신을 위한 질적 노동)의 존재다. 경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축적하는 것과 기술 진보가 필요한데 이 두 개를 모두 이끄는 힘은 인적자본에서 나온다.

 

「저는 싱가포르도 인재 전쟁에 대해 수준 높은 문제의식을 지닌 나라라고 생각해요. 싱가포르는 2014년 국가 어젠다로 스킬스 퓨처Skill’s Future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한국말로 하면 미래 인재 로드맵이에요. 스킬스 퓨처의 목적은 모든 국민을 어느 시기 어느 곳에 있든 간에 평생 교육의 주체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25세 이상의 모든 싱가포르 국민에게 500싱가포르달러에 해당되는 ‘스킬스 퓨처 크레디트’를 지원하여 정부가 승인한 직업훈련 기관에서 온·오프라인 훈련을 받는 데 쓸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바우처 제도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기 주도로 학습을 하여 자기의 역량을 최대로 고양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거예요.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직능을 배우고, 직업 전환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엔지니어였는데 스킬스 퓨처를 통해서 건축가가 될 수 있어요. 그것을 정부가 도와줘요. 게다가 어떤 시기에든 할 수 있다는 거죠.

주목할 점은 이 스킬스 퓨처는 국가 최상위 정책이라는 말이죠. 보통 인력개발 정책이나 교육 정책은 국가 산업개발 정책을 지원하는 지원 정책입니다.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인재를 키운다는 발상에서죠. 그런데 싱가포르는 그게 아니에요. 앞서 제가 모토로라 사례와 싱가포르의 MRO 사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재 주도형 산업개발 정책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인재 우선, 즉 인재가 있으면 그다음은 뭐든지 가능하다는 거죠. 다시 말해 인재를 키우면 그 인재가 새로운 혁신을 통해 새로운 산업을 개척합니다.」(나성섭)

 

 

새로운 기술혁명 사회로 진입하며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일자리 창출이 능사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한국에 시급하다. 일사불란함과 효율성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하던 시절은 분명 지났다. 함돈균은 ‘계층, 지역, 세대 등 사회 갈등이 극심한 한국에서 사회적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사회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는 문화 형성’을 위해 시민성(시티즌십)의 교육과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학교에 방글라데시인이 총장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고 고위층 인사나 대기업 임원진 대부분이 남성인 한국 사회가 다양성과 수평적 관계, 위계와 나이와 서열이 아닌 능력 중심의 사회로 변화할 의지가 엿보이는가.

 

민주주의가 경제 번영을 보장하지 않는다.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은 민주주의여도 경제적으로 어렵다. 스탠퍼드대학교 프랜시스 후쿠시마 교수는 사회적 신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신뢰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가치와 원칙의 공유가 작동하고, 저신뢰 사회는 개인적 연고, 혈연적 연고에 의한 사적 신뢰에 기반한다. 한국은 OECD 기준으로 신뢰 정도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사건, 삼성 백혈병 문제,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감옥까지 간 전직 대통령들 등 일련의 사건과 그 처리를 보며 국민들은 행정부, 사법부, 모든 공권력, 국가 운영시스템에 사회적 신뢰가 많이 깨졌다. 방송과 언론까지 망가져 개인 팟캐스트 같은 미디어를 통해 공적 정보를 얻고 신뢰하는 문화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정부든 실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신뢰를 위해 구축해놓은 객관적 시스템이나 제도적 프로세스가 작동을 제대로 못하니 청와대 국민청원은 늘 문전성시다. 새로운 기술 매체의 등장과 대중문화의 압도적 양상과 전문가의 몰락 현상도 사회적 신뢰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가짜 뉴스는 여러 형태로 진화하며 점점 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가 발달해갈수록 기계를 통해 인격적 관계를 맺은 아이들은 감각 프로세스도 그런 식으로 코딩될 것이고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도 떨어질 텐데 사회적 신뢰까지 추락된 상황이라면?

 

우리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매뉴얼 없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걸 자동화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 해도 인간이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다. 매뉴얼을 넘어서거나 매뉴얼이 무용지물인 상황이 오히려 늘어나는 구조적 ‘위험사회’(울리히 벡)로 향하는 만큼 종합적이고 전체를 보는 눈을 키우며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이 필요하다. 후쿠시마의 쓰나미에서 매뉴얼대로 따르지 않고 상황 판단을 해 산으로 간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많이 살아남은 사례는 자율적 판단 능력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이 책이 제안하는 컬처들은 가장 기본이었어야 할 것들이라 새삼 놀랍다. 모나지 않게 처신하며 안정적인 사회적 틀에 맞춰 사는 패턴이 한국인이 바라는 삶이고 행복인가. 진실을 말하자면 사회안전망이 불충분하니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두려움으로 평균적 삶을 살기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악전고투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한국은 미래학교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성숙한 미래 사회로 향한다면 나는 비판적인 시선, 질문과 함께 그 실패에 동참할 의지가 있다. 무수한 실패와 가까스로 얻는 성공은 끝없이 계속되겠지.

 

 

「미래학교라는 건 아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학교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수능에 전부 쏟아붓는 게 아이의 대입을 결정할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학벌로 결정되는 사회가 끝나가고 있어요. 취직했던 회사가 없어지고 직업군 자체가 없어지는데, 일시적 취직이 평생을 보장할 수가 없죠. 자기 주도성은 대입이 아니라 평생을 결정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면 자기 스스로 결정을 할 기회가 많다는 것은 그런 결정을 통해서 실패할 기회를 많이 갖는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실패할 기회를 효과적으로 자꾸 만들어주는 학교가 미래학교인 거예요.

이건 동시에 컬처이기도 해요, 잘못된 결정도 해봐야 하고, 거기에서 배우고, 실패할 기회를 주고,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배우고, 더 발전된 나를 찾는 그런 기회와 환경을 제공해주는 학교가 미래학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보다 나은 미래는 실패의 계기, 실패를 학습하는 일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육 프로세스와 그런 학교를 디자인하는 것이 사회가 한 단계 진화하고 성숙해지기 위한 컬처 엔지니어링이기도 한 것입니다.」(폴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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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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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인간관계와 그 중요성에 대해 숱하게 고민하지만 성공을 약속하는 자기 계발서처럼 나를 위한 이기심에 그러할 때가 대부분이다. 나도 좋고 타인도 좋으면 좋겠지만 그게 참 쉽지 않다.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옆 사람의 맘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요즘의 행복이 각자 자기 충족에만 그치는 건 아닌지 싶을 때도 많다. 점점 더 자기 앞만 보고 내달리게 하는 사회에서 오늘 아침 풍경은 좀 달랐다. 이른 아침부터 투표를 하러 가거나 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뒤라 내 맘이 더 복잡한 건지도 모르겠다.

 

 

 

신영복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자유를 되찾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감옥에서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결심했다. 당시 교도소 규정 때문에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어 현실적인 이유로 오래 볼 책을 고심하다 그리된 것이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했다고 하겠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선생님.

이 책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고 사회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며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 변혁기였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였다. 신영복 선생은 춘추전국시대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 무한 경쟁의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은 서양 중심의 질서가 반드시 변화할 때이기도 하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흄과 칸트의 견해) 이었다. 많은 역사서들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조화된 구조여서 서양 문명이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축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게 결정적 결함이다. 비종교적인 과학과 비과학적인 종교.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는 와해되었다. 종교의 역할 축소와 함께 현재 과학은 자본 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 패권 국가의 일방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는 동양적 구성 원리에 가치를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같은 위기에 처한 지금, 차이가 아니라 공존을 위한 관계망을 강조하는 이 강의는 현실적인 공론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시작하며 많은 미래 담론들이 나왔지만, 신영복 선생은 그것들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다고 보고 새로운 담론을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아닌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는 담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중용中庸)이 특징이다. 인본주의 유가儒家와 자연주의 도가道家의 견제도 그랬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진다.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읽다) 해 읽은 『주역』의 탄생은 그런 배경이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리의 자리에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담론(『논어』)에서 보편적 개념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은 『자본론』과 『논어』가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이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이다. 한국의 문제도 바로 이것 아닌가. 경제 발전과 돈을 좇으며 사람을 함부로 대하던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목격되고 있다. 무왕불복(無往不復 :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주역』 지천태괘地天泰掛의 효사爻辭)을 우리는 더 참담하게 마주하고 있다.

 

「『노자』의 서술 방식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설辭說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제1장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입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의 첫 구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로 시작됩니다."

이 첫 구절의 차이가 사실 노장老莊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道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有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노자』를 우리는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읽었습니다만 『노자』에는 그러한 사회성과 정치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지요. 『장자』에는 이러한 차원의 정치학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자』의 정치학은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소요를 장자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궁극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노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즉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별애別愛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相利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리의 관계는 개인의 태도나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적·법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에는 겸애와 교리의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보다 진전된 논의가 없습니다. 애정愛情과 연대連帶라는 원칙적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략)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性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禮論, 제도론制度論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중략)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임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악론」편은 대체로 묵자의 비악론非樂論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화순’和順입니다. 분계와 법과 규범과 제도라는 각박하고 비정한 것들을 음악으로 화순시키는 것입니다.」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실제로 수隋 당唐 이래로 선종 불교가 그 지반을 널리 확장해가면서 이러한 의식의 무정부성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그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송대의 신유학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중략)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족의 지배 기간인 원사元史와 청사淸史마저도 각각 송宋과 명明을 계승하는 정통 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망’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중국이 불교에서 받은 충격은 이러한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것입니다. 사이팔만四夷八蠻이라는 세계 인식은 중국 이외에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며 오만이었습니다.

중국 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인 것이지요. 불교 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유학을 대신하여 사회의 이념 형태를 규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건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지요. 특히 불교 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해체 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신유학의 등장은 불교의 이러한 해체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상 영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고 통일 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철학 즉 philosophy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문화 전통에서 비롯된 특수한 문화 아이템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 이후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서양 철학은 현실과 이상, 현상과 본질 등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구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적 구조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구조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사유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철학을 인류의 보편적 문화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이 됩니다. 따라서 철학이라는 지적 활동을 보편적인 것으로 추인하기보다는 그것을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반론의 요지입니다. 철학은 서유럽 중심의 특수한 지적 활동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송대 유학이 철학화했다는 평가는 서양 철학 고유의 범주와 개념을 송대 유학에 적용하여 바라보았을 때만 부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략)

송대의 유학자들에게 불교 사상은 현실의 물질성을 제거하고 사회 제도 그 자체의 존립을 부정하는 지극히 위험한 반사회적 사상이었으며 비윤리적 사상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해탈解脫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일종의 초윤리적이고 탈사회적인 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탈에는 일체의 사회적 관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책무도 사회적 윤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송대 유학자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주자朱子로 대표되는 송대 신유학자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감으로 『중용』과 『대학』을 장구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원래 『예기』禮記 제42편이었습니다만 주자가 그것을 따로 떼어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주석했습니다. 경은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대漢代 유가儒家의 공동 저작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유가 사상 중에서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이라 평가됩니다. ……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혹은 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를 3강령三綱領이라 합니다. 그리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8조목입니다.

우리는 『대학』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주자가 왜 『예기』의 이 부분에 주목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장구하고 주를 달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자 이전에도 사마광司馬光이 『중용대학광의』中庸大學廣義를 지어 『중용』과 함께 『대학』을 따로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대학』을 주목하게 된 배경이 중요합니다. 『대학』은 일반적으로 대인大人, 즉 귀족, 위정자의 학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지식 계층의 학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덕이 있는 사회, 백성을 친애하는 사회,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해탈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송대 지식인들의 사회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反불교적이고 반도가적입니다. 불교의 몰沒사회적 성격에 대한 비판입니다.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입니다.」

 

서양철학을 좀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인용을 통해서도 보듯이 동양 사상이 인간 중심의 관계지향적 성찰이라는 게 와닿을 것이다. 동양 사상을 현실적이라거나 논리가 부실하다고 폄하하는 경향도 보는데, 서양철학의 그 치열한 이성 중심주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 말미에서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고 사상과 생각을 결정하는 것도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많은 어지러움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문제를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라고 했던 묵자,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盡心 上」)이라 엄정히 말하는 맹자,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상서尙書』,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美貌보다는 건강健康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을 『백범일지』에 쓰고 맘에 새기려 했던 백범 선생처럼 내 맘만이 아니라 많은 맘을 살피는 실천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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