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새끼 쥐. 순수, 나는 그걸 이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삶에서 얻은 생태로 사람을 보자마자 달아나는 것보다 너는 낙엽들 속에서 장난을 한창 부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너를 보며 내게 잔뜩 배어있을 습속이 조금 서러웠다. 사람들이 벤치로 몰리자 그제야 너는 달아났다. 너의 소리가 남긴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설치류의 얼굴이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자세한 연구를 통해 설치류도 양미간을 좁히고 귀를 낮추고 뺨을 부풀리는 행동을 통해 괴로움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설치류 동료는 이런 얼굴을 쉽게 알아보는데, 실험을 통해 고통을 나타내는 얼굴보다는 편안한 얼굴을 한 쥐 사진 옆에 앉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위스 과학자들은 실험실 쥐들을 매일 간질이고 함께 놀아주는 과정을 포함한 긍정적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회기가 끝날 때마다 조용한 순간에 쥐들의 얼굴을 분석했다. 그들은 단지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어떤 쥐가 긍정적 치료를 받았는지 구별할 수 있었는데, 분홍색이 더 뚜렷해지고 더 편안해 보이는 귀가 그 단서였다. 이 연구들은 설치류의 얼굴이 정적이라는 개념(동일한 포커페이스를 한 쥐들이 서로 다른 감정을 가졌다고 표현함으로써 쥐들을 조롱한 만화도 있었다)에 종지부를 찍었다.

감정은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감정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실험을 통해 사람은 감정이 충만한 사진과 이야기를 중립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잘 기억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자신이 하거나 하려고 하는 거의 모든 일을 감정적 용어로 묘사하길 좋아한다. 결혼식은 낭만적이거나 축제처럼 흥겨운 사건이고, 장례식은 눈물바다가 되는 상황이며, 스포츠 경기는 결과에 따라 아주 즐거운 사건이거나 실망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도 동일한 편견을 갖고 있다. 야생 카푸친(꼬리감는원숭이)이 돌로 견과를 깨는 장면을 보여주는 인터넷 영상은 물소들이 새끼를 구하려고 사자를 내쫓는 영상보다 조회 수가 훨씬 적다. 물소들이 뿔로 사나운 포식 동물을 물리치는 동안 새끼는 포식 동물의 발톱에서 벗어난다. 두 영상 모두 인상적이고 흥미롭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두 번째 영상이다. 우리는 새끼와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미와 다시 재회하는 장면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 사자에게는 이 결과가 전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편리하게도 눈을 감는다.
이것은 감정이 지닌 또 하나의 측면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어느 편을 들게 한다.
우리는 단지 감정에만 관심이 많은 게 아니다. 감정은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 사회를 조직화한다.

본질적으로 사람의 행동처럼 보이는 제스처가 영장류의 일반적인 패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때 처음 알았다. 진화의 연결 관계는 작은 것들에서 가장 잘 드러날 때가 많다. 그런데 두려움을 느꼈을 때 얼마 없는 우리 몸의 털이 곤두서는 방식(소름)에서부터 남자들과 수컷 침팬지들이 기쁨에 넘쳤을 때 서로의 등을 찰싹 때리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나타내는 표현 중 약 90%가 이러한 연결 관계를 보여준다.

유인원을 바라볼 때, 우리만 공통의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를 쳐다보는 유인원도 그 역사를 본다. 만약 유인원이 우리에게 타임머신이라면, 우리 역시 유인원에게 타임머신이다.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감정은 별로 쓸모가 없다. 단순히 두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그 동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이 동물에게 달아나거나 숨거나 반격하도록 자극한다면, 그 동물의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요컨대 감정은 위험과 경쟁, 짝짓기 기회 등에 적응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감정은 행동을 촉발하기 쉽다. 우리 종은 나머지 영장류와 많은 감정을 공유하는데, 모두 대체로 동일한 행동 목록에 의존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설계된 신체로 표현되는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우리와 나머지 영장류는 비언어적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우리 몸은 그들의 몸과, 그리고 그들의 몸은 우리의 몸과 완벽하게 대응하기 때문에, 상호 이해의 길은 바로 눈앞에 있다. 얀과 마마가 사람과 짐승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개체로 만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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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군! 도서관에서 빌려만 보기엔 아까운 책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훨씬 더 어두워졌다. 그 이유는 첫째, 관련된 서류들은 아카이브에 들어가 있고, 서류와 실제 사실 간에, 그리고 계획된 목표와 실제 실행 들 간에 차이가 있는 한, 이것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기밀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제 기밀서류라는 것 자체가 아예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문자와 작성자들을 배제하는 사실적 데이터 흐름이 해독할 수 이자들의 연쇄로서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 사이에서 순환하고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자를 단순히 무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소위 인간들과 함께 문자를 흡수하고 획득한 기술들은 그러한 사실적 데이터들의 묘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전에는 책들에서, 그 후에는 레코드판이나 영화 들로부터 흘러나왔던 데이터의 흐름은 점점 더 블랙홀 혹은 블랙박스 속으로 사라진다. 이 박스들은 인공지능으로서 우리와는 이별을 고하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최고사령부로 향하는 도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은 것은 단지 회상들, 말하자면 이야기들뿐이다.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어떤 책에도 더 이상 적혀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이제 책들을 위해 기록하려 한다. 한계영역까지 내몰린 낡은 매체들 또한 이러한 상황의 기호와 단서 들을 기록하기에 이제 충분히 민감해졌다. 따라서 마치 마주보는 두 개의 광학 매체의 단면에서처럼 패턴과 무아레가 나타난다. 신화, 과학 소설, 신탁과 같은.....
이 책은 그 이야기들 중 하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기술적 매체들의 새로움에 대해 예전 종이책이 기록하고 있는 구절과 텍스트 들을 모으고, 논평을 달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종이들중 많은 것들은 오래되거나 벌써 잊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적 매체들의 태동기에 그것이 야기한 충격은 너무도 굉장했기 때문에,
문학은 그것을 오늘날의 그럴듯한 매체 다원주의에서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다. 오늘날의 매체다원주의란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 같지만, 실상 세계 지배를 상속하는 과정에서 실리콘 밸리의 집적회로를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 한에서만 그렇다. 그에 반해 이제야 그 독점적 지배가 끝나가고 있는 정보기술 중 하나는 이러한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경악의 미학. 1880년에서 1920년사이에 축음기, 영화, 타자기라는 최초의 기술 매체들에 대하여 경악했던 작가들이 썼던 것들은, 그렇기 때문에 미래로서의 우리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유령 사진들로서 기능한다. 소리, 시각, 문자를 저장하고 분리할 수 있었던, 처음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던장치Gerit들과 더불어 정보의 기술화가 시작되었는데,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에서 회고해보자면 그것은 오늘닐의 자기회귀적인 숫자들의 흐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기술의 역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분 명한 사실이다. 이 이야기들은 셀 수 없이 많을지리도eahllus, 정작숫자는 빠져 있기zahlenlos 때문이다. 여기에는 모든 혁신이 기반하고 있는 실재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수의 연쇄, 설계도, 회로도로부터는 절대 다시 문자가 생겨날 수 없으며,
생겨 나올 수 있는 것은 기계뿐이다. 기술 자체가 기술의 본질에대한 경험을 방해한다는 하이데거의 멋진 문장은 바로 이런 사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와 경험에 대한 하이데거의교과서적 혼동은 불필요한 것이다. 철학적인 본질에 대한 질문 대신 단순한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는 매체에 대해 서술한 작가들의 텍스트가 기반하고 인는 기술적, 역사적 데이터들이 함께 제시될 것이다. 그래야 낡은 건과 새로운 것이, 책과 그 책을 대신한 기술적 매체들이 실제 그들의모습인 정보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매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라는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때마다의 지배적인정보기술이 모든 이해를 원격 조종하면서 자신에 대한 환상을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계도와 회로도에서는, 그것들이지금 인쇄기술을 통제하고 있는 아니면 전자계산기를 통제하고 있든 간에, 인간의 몸이라는 저 미지의 것에 대한 역사적 형상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매체가 저장하고유통시킬 수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메시지나 내용이 아니다. 어떤 기술의 시대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정보기술이 소위 영혼들을 메시지와 내용으로 장식했을 뿐이며, 정작중요한 것은 (매클루언을 엄격하게 따르자면) 단지 회로들과 그 지각 가능성의 도식뿐이다.
(중략)
(헤라클레이토스를 자유롭게 인용하자면) 대부분의 기술적 고안물들을 만들어낸 것은 전쟁이다. 그리고 늦어도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중력의 무지개Gravity‘sRainbow가 출간된 1973년 이래로, 진짜 전쟁은 사람이나 조국을둘러싸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 정보기술, 데이터흐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우리 인간들을 생략해버린, 상황의 패턴과 무아레…..

오늘날의 상태는 부분적으로만 매체연합 체계이며, 모두 아직 매클루언으로 소급된다. 그가 기술했듯이, 하나의 매체의 내용은 언제나 다른 매체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연합 안에는 영화와 라디오가 있고, 라디오라는 매체연합에는 레코드판과 테이프레코더가 있다. 영화에는 무성영화와 자기 녹음Magnetton이 있으며, 텍스트, 전화, 전보는 우편이라는 매체의 절반을 독점한다. 새로운 세기의 초반, 독일의 폰 리벤Robert von Lieben과 캘리포니아의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가 제어 가능한 진공관을 발전시킨 후, 시그널을 증폭하고 전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30년대 이후 존재하는거대한 매체연합 체계는 이제 문자, 영화, 녹음기라는 세 저장 매체 모두를 장악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그널을 연결하고 전송할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 체계들 사이에는 호환되지 않는 데이터채널과 상이한 데이터 포맷이 존재한다. 전기Elektrik는 아직 전자Elektronik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데이터 흐름의 스펙트럼 안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영화와 우편은 사람들의 감각에 다가 가기 위해 각각 제한된 개별 창문을 형성한다. 접근해 오는 미사일을 감지하는 적외선이나 레이더 음향은ㅡ미래의 광섬유와는 달리ㅡ아직 서로 다른 채널을 사용한다. 우리의 매체연합 체계들이유통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전송하고 수신할 수 있는 단어와 소음,
이미지 들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데이터들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컴퓨터를 조정하여 임의의 알고리듬을 임의의 인터페이스 효과로 바꾸는, 그것도 사람들에게서 감각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렇게 바꾸어버리는 아웃풋을 생산하지 않는다. 계산되는 것은단지 연합 체계 안에서 내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저장 매체가 가진 송신의 질質뿐이다. 텔레비전의 음질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극장 화면이 얼마나 자주 깜빡거리는지, 혹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사랑스런 목소리가 어떤 주파수 대역에서 줄어드는지는, 기술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각각의 타협에 의해 규제된다. 우리의 감각은 이러한 규제들에 좌우되는 종속변수들이다.

 축음기 Phonograph와 영상기록기Kinematograph – 그 이름이 문자에서 기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에 이르러 비로소 저장할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은 청각적인 것에서는 소음의 주파수 혼합체로, 광학적인 것에서는 연속되는 단일 이미지들의 운동으로 저장되었다. 모든 예술은 시간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 일상의 데이터 흐름이 이미지나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이 그 흐름을 정지시켜야 한다. 예술에서 스타일이라 불리는 것은 이러한 탐색과 선택의 접속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사용하 여 연속적인, 즉 시간적으로 배열한 데이터 흐름을 운영하는 예술들도 이러한 접속 작업의 지배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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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6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AgalmA님의 글을 북플에서 못봐서 바쁘신가 했는데, 제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네요. 과거보다 기술이 발전해 매체들의 음질과 화질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보다 분명한 화질과 음질이 우리의 감각을 더 자극하면서 실재계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상징계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계의 암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 우 힘이 모두 작동하게 되는 것인지 물음을 던져 봅니다.^^:)

AgalmA 2019-10-16 01:06   좋아요 2 | URL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나꼼수 등을 필두로 팟캐스트가 한참 붐이다가 요즘은 유튜브가 압도적이 되었잖아요? 예전 팟캐스트가 페이스북 같은 문자 체계 서브 수단을 짝으로 했다면 요즘은 영상 체계의 유튜브로 아예 다 넘어가려고 하죠. 이건 단순히 유튜브라는 매체의 성질 때문만은 아니죠. 우리는 되도록이면 좀더 쉬우면서 즉각적인 매체를 더 선호하는 거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더 강력한 ‘통합매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도 매체의 분화라기보다 통합의 성질이라 봐야겠죠.
아마 우리는 상징계와 실재계의 통합을 바라는 게 아닐까요.
이 세계를 신이 만든 아름다운 세계로 본 것처럼, 내가 사는 이 세계를 그리 만들고 싶은 지도요. 지상에서 (나의) 천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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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종이책으로 다시 재독.
읽을수록 씹는 맛이 나는 책.

˝시간은 공간 기하학과 함께 구성된 복합적인 기하학의 일부가 된다. 아인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과 뉴턴의 시간 개념을 합성한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갑자기 머리에 섬광이 번쩍이듯 아인슈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 두 사람이 다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단순한 사물 외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뉴턴의 예상은 옳았다. 뉴턴의 참된 수학적 시간은 실제로 존재한다. 탄력 있는 종이, 휜 시공간, 중력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시간이 사물과 관련이 없으며 규칙적으로 꾸준히, 그 어떤 것과 아무 상관없이 흐른다는 추측은 틀렸다.˝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궤적마다 다른 시간의 기간이 있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각각 다른 리듬으로 흐른다.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세부적인 것들은 간과하고 사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양상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의 과거는 신기하게도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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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6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공간에 관한 설명이 기존 설명과는 다르게 새롭게 보여집니다.^^:)

AgalmA 2019-10-16 01:08   좋아요 1 | URL
cyrus님의 리처드 뮬러 <나우 시간의 물리학> (사놓고 저는 아직 다 읽지를 못해서ㅎㅎ;;) 리뷰 보니 로벨리의 이 책과 비슷한 내용이 많더군요.
겨울호랑이님도 재밌어하실 내용일 거예요^^
 
[eBook]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지음, 이지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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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중. 재독하며 더 뚜렷이 느껴졌는데 로버트 그린은 내용을 좀 더 압축해야 한다. 책을 두껍고 무겁게 만드는 비슷한 내용의 문장이 너무 많다. 그의 모든 책에서 느껴지는 단점.

이 분야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 사고나 심리 작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대니얼 카너먼은『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제1형 사고 - 자동적이고 기계적이며 때로는 무의식적이고, 연상적인 일관성”을 띤 지각과 직관, “제2형 사고 - 통제되고 의식적인 노력이 더해지며 규칙에 지배받고 논리적인 일관성”을 띤 종합적 사고를 소개했고, 개리 마커스는 『클루지kluge』에서 빠르고 자동적이며 주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첫 번째 종류의 사고를 ‘선조 체계ancestral system’ 또는 ‘반사 체계reflexive system’, 신중하고도 판별력 있게 천천히 진행되는 두 번째 종류의 사고를 ‘숙고 체계deliberative system’라고 나눴다. 로버트 그린『인간 본성의 법칙』에서는 ‘저차원적 자아와 고차원적 자아‘의 구분이 그와 유사하다.

˝수많은 신경과학자들이 확인해준 것처럼 이런 진화의 결과 고등 포유류의 뇌는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그중 가장 오래된 부분은 ‘파충류 뇌’다. 파충류 뇌는 신체를 조절하는 모든 무의식 반응을 관장한다. 즉 본능의 영역이다. 그 위로는 ‘대뇌 변연계’라고 하는 오래된 포유류 뇌가 있어서 느낌과 감정을 관장한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신피질’이 진화했는데 이 부분이 인지 능력과 인간의 언어를 통제한다.˝

개리 마커스가『클루지kluge』에서 적확하게 설명한 바지만 인간과 같은 고등 포유류의 뇌가 하나로 합쳐져 진화되지 않고 ‘본능, 느낌과 감정, 인지능력과 언어‘를 담당하는 세 부분으로 나뉜 채 진화한 사실은 구조적 문제로 우리의 성장만큼이나 허점과 실수도 불가피하다는 걸 시사한다.

인간의 내면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있다. ‘저차원적 자아’와 ‘고차원적 자아’가 바로 그것이다. 보통은 저차원적 자아의 힘이 더 세다. 저차원적 자아는 감정적 반응을 보이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려는 충동을 일으킨다. 나만 옳다고 느끼고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각적 쾌락과 오락거리를 찾으며 언제나 저항이 가장 작은 길을 택하게 한다. 남들의 생각을 그대로 채택하고, 집단 속에 나를 상실하게 만든다.
반면 우리가 고차원적 자아의 충동을 느끼는 순간들은 나 자신을 벗어나서 남들과 더 깊이 교감하고 싶을 때,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싶을 때,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 싶을 때, 인생에서 나만의 길을 가고 싶을 때, 나만의 개성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싶을 때 등이다.

내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나 반응이 집단 내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얼마나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지금 상대가 경험하는 욕망이나 실망감은 나를 만나기 수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시작된 것들이다. 그러다가 때마침 나를 만나 내가 그들의 분노나 좌절의 편리한 타깃이 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어떤 자질을 내게 투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나라는 개인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이 진화를 거듭해온 이유는 인지 능력이 진화해온 것과는 사뭇 이유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한 형식이기는 해도, 뇌 안에서 두 가지가 서로 매끄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동물의 경우는 몸으로 느낀 감각을 추상적 언어로 변환해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감정이 원래 의도된 대로 무리 없이 제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과 인지능력이 서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내부에서 끊임없는 마찰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두 번째 감정적 자아’까지 만들어진다. 동물은 잠시 공포를 느껴도 이내 그 감정이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느낀 공포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공포를 점점 더 심화시키면서 위험이 사라진 한참 후까지도 계속해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러다 급기야는 상시적 불안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지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인간이 이토록 진보했으니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이 감정적 자아를 잘 길들이지 않았겠냐고 믿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선조들만큼 폭력적이거나 육욕에 휘둘리거나 미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진보나 기술이 우리의 본성을 바꿔놓지는 않았다. 기술과 진보는 그저 감정의 형태와 그에 따른 비이성적 행동의 유형을 바꿔놓았을 뿐이다.

이성을 획득하는 일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3단계로 된 과정을 잘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첫째, 앞으로 우리가 ‘약한 비이성’이라고 부를 것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약한 비이성은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기분이나 느낌이 작용한 결과로서 의식보다 아래에 있다. 계획을 세우거나 의사결정을 내릴 때 기분이나 느낌이 사고 과정을 얼마나 깊이 왜곡하는지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다. 기분이나 느낌은 생각의 편향을 만들어내고, 그 편향은 역사의 모든 단계, 모든 문화권에서 증거가 발견될 만큼 우리 안에 깊이 배어 있다. 생각의 편향은 현실을 왜곡해 실수나 잘못된 결정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삶을 어렵게 만든다. 이들 편향을 알아두면 그 영향을 상쇄할 수 있다.
둘째, 앞으로 우리가 ‘강한 비이성’이라고 부를 것의 성질을 알고 있어야 한다. 강한 비이성이 나타나는 것은 흔히 어떤 압박으로 인해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다. 분노나 흥분, 원망, 의심 등을 생각하고 있으면 그 감정이 점점 격화되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상태가 된다. 보고 듣는 모든 게 그 감정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중략)
셋째, 뇌의 사고 부분을 강화해줄 몇 가지 전략 및 연습을 실천해서 감정과의 끝없는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생각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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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1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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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3 2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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