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끝나가는데 가장 마음에 걸리는 책이 세월호 관련 서적이다.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오디오북으로 먼저 접할 수 있어 반가웠다. 책도 곧.

팟캐스트 [세월호 공감] 금요일엔 돌아오렴
http://m.podbbang.com/ch/10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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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4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4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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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화

2015년 11월 14일 일어난 프랑스 테러 사건과 한국 민중 총궐기 대회 물대포 진압 사건을 보며, 나는 ˝상대화˝와 ˝테러리즘˝의 상관성을 오래 생각했다. 한국 정부가 그 시위를 IS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우리들은 국가(법)의 폭력성을 보았다.
˝상대화˝는 쉽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로 거론된다.
우리에게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의거, 3.1 운동은 혁명이지만, 어떤 관점은 그것을 ˝테러˝로 규정한다.
모! 정당 출신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5.16은 쿠테타인가, 혁명인가˝ 질문은 빠지지 않는다. 대법원과 해외 언론이 공식적으로 ˝쿠테타˝ 라고 밝혔는데도 시원하게 답변하는 인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입법과 행정을 맡기는 웃픈 일이 계속 되어 왔다. 1961년 5. 16 사건에서부터 54년이 지났는데도 역사는, 사람은 왜 이런 것 일까. 사는 내내 목도하는 부정의(不正義). 세상은 그런 거지, 나 살기도 바쁘지~ 뭐 좋은 거, 재밌는 거 없나? 돌림 노래가 지상 가득하다.

 



 

# 상반성


흄의 인성론에서 이런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사건에서 상반되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확고한 개연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지 않는 무수한 심상들의 충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사건은 과거를 수렴하며 다시 발생한다.

테리 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이런 ˝상반성˝의 충돌과 전이를 고찰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는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대립을 다룬다. 디오니소스는 실용성과 실리에 상관않는 문화(성교와 연극, 술과 춤)와 죽음 충동을 상징하는 신이다.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이방인/욕망)를 이성과 법으로 누르려 하지만 여성으로 복장도착을 하는 광기로까지 치닫는다. 위반과 법 사이에서 펜테우스와 디오니소스는 서로 자리바꿈 하며 ˝왕과 범죄자, 법의 제정자와 법의 위반자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p22)임을 보여 준다. 에우리피데스는 극을 통해 위반 속에 자체 규범성이 있음을 표현하며, ˝우리의 본성을 넘어서려는 것, 그것 자체가 우리의 본성˝(p39)이라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자에는 자로>에서 독재자 안젤로가 통치자에서 범법자가 되는 상황을 그려냈다. 에우리피데스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 등을 통해 `역사 형성과정 전체에 이러한 자기 모순이 존재함`(p27)을 피력했다.

테리 이글턴은 정의를 `공정한 주고받기의 논리`(p41)라고 말한다. <바쿠스>에서도 보았듯 테러리즘(디오니소스)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펜테우스)이 결정적으로 유사함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비동질성을 배격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당한 처사로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처럼 무한한 자비를 베풀기 보다 우리는 무자비한 복수를 행하기 바쁘다. 합당한 처벌보다 대개 자기만족적 감정의 처벌이었다.


테리 이글턴은 예수의 가족주의 비판과 실행(광야를 떠돎-붓다의 수행과 유사), 무에서 창조된 우주를 말하며, 우리의 인과적 삶의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위 흄의 인성론에서도 살펴 보았듯 우리는 개연성을 만들어 쉽사리 합리화에 빠진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무엇보다 우연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무능력인데, 우주의 존재 자체가 이런 종류의 교조주의에 설득력 있는 반박 근거가 될 수 있다.˝(p65)

11.14 프랑스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 청년들의 군입대가 늘어났다는 소식은 IS 규모가 커지는 것과 유비를 보여준다. IS 태동에 중요한 산파였던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 프랑스 등이 군사 연합으로 뭉칠수록 IS 문제는 더 커질 것이다. 시리아 폭격을 근거로 IS가 프랑스 11.14 테러를 가한 것은 미국 9. 11 테러의 벤치마킹이기도 하다. 개연성과 인과성을 거듭 만들어 인간이 얻는, 아니 잃는 게 이러하다는 것은 진정 비극이다. 여러 명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전쟁을 인류 역사 내내 목격해야 한다는 건 더 비극이다.
나는 지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능력 부족...) 현상을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는 상황은 계속 되겠지. *과 **은 폴 서루 에세이 <아프리카 방랑>의 내용이다.

*
한 남자가 말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달래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이스라엘이야 미국의 일부니까요.”

한 여자가 말했다. “맞아요. 이스라엘은 미국의 쉰한 번째 주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서루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대답했고, 레이먼드가 통역했다. “내 생각에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동을 바라보는 창문입니다.”

마푸즈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상당히 작은 창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창문이 너무 작아 모든 나라를 명확히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이집트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나라입니다. 또 가난하지만 해롭지 않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에게 자기들의 창문을 통해서만 아랍 전체를 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의 창문이 아닙니다.”

레이먼드가 마푸즈와 다른 참석자들을 위해 통역하는 동안, 나는 쓸데없는 정치 토론에 끌려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요점이 뭐냐는 질문도 받았다.

“부족전쟁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하튼 마푸즈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마푸즈가 말했다. “내 생각엔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텐데.”

**
오시리스의 얼굴은 뭉개져 이목구비가 구분되지 않았다. 호루스의 얼굴도 마찬가지여서 매의 얼굴이 지워지고 없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광기가 빚어낸 파괴였다. 담에는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남긴 낙서들이 눈에 띄었다. 따라서 이집트 유적들을 지나는 나일 강 유람 여행은 소멸과 낙서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150여 년 전, 젊은 플로베르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유적의 파괴에 대해 한탄했다. “신전들에 여행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 유치하고 무익한 짓에 놀랄 따름입니다. 저희는 이름을 새기지 않을 겁니다. 돌에 얼마나 깊이 새겼던지 꼬박 사흘은 걸렸을 법한 이름들도 있었고, 우리가 어디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워지지 않는 어리석음의 극치일 것입니다.”

인간의 얼굴들은 지워지고 신의 얼굴들은 도려내졌다.




 

# 자아와 외부

미치오 카쿠 <마음의 미래>에서도 보았듯 인간의 뇌는 ˝미래 예측 도구˝로서 인과성을 끝없이 계산하는 구조이다. 자기 존재의 필연성(정체성, 자기 보존)을 확신하는 메커니즘이 나온다. 희생도 그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테리 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예수의 희생이 테러리즘과 만나는 접점을 말하며, ˝자아˝와 ˝숭고˝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아의 치명적 손상으로 고통받는 순간이 더 풍요로운 자아를 회복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숭고는 죽음과 부활의 반복을 포함한다. 이 두려운 힘은 우리를 일종의 비존재로 용해시키지만, 개별적 특징들을 상실한 후에야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는 황량한 공허가 아니라 신의 그것처럼 충만한 공허이다. 위협받고 억압받는 개별 자아들이 그 바닥에 이르러 정반대의 존재로 변한다. 이런 저런 공격에 노출된 취약하기 그지없는 대상이 무한한 주체로 변신하는 것이다.˝(p83~84)

위 내용은 한병철과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재발명˝과 상통한다. 타자를 통해 주체가 거듭나는 과정. 타자성을 IS는 부정적으로 흡수했다. 자살 폭탄 테러를 영웅적이며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하며 타자를 투쟁할 적으로만 상정한다.
개인과 국가의 폭력, 공인된 폭력과 비공인된 폭력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테러리즘˝을 ˝악˝으로 단순화해서 외부로 해석하는 건 위험하다. 상대화, 상반화를 낳는 우리 내부의 특성으로 신중히 살펴야 한다.
˝폭력의 내재화 - 타협의 부재˝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만큼 이 시대 중요하게 고민해 볼 문제다.




#공정성

프랑스 테러 사건에 대한 추모 이미지들은 어쩐지 선정성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이미지의 선정성과 폭력성, 바라보는 자의 관음증을 비판했다. ˝상상력과 공감의 실패˝의 결과처럼 도착하는 사진들. `군국주의와 종교적 파시즘 세력의 신념을 강화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그것과 싸우는 데 어떤 기여도 못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타인의 고통> p25)을 남기는 사진들. 표현 영역이 그때보다 넓어진 지금, 이미지는 초과와 부재를 더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우리는 모두에게 최대한 공정한가.
중동 아프리카의 수많은 테러와 전쟁에 대해서도 그 만큼 연대하는가.
먹고사니즘을 앞세워 서방 선진국 행태에 동조자이거나 방관자이진 않는가.
뉴스와 사건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을 대비는 갖추고 있는가.
세계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외부로 내보내기 전 무엇을 점검하는가.
세계에 무엇을 던지는가.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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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2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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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100가지 법칙 - 하인리히에서 깨진 유리창까지
이영직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법칙에 연연하면 단견을 갖기 쉽거나 휘둘릴 수 있지만, 삶에 두루 대입해 볼 때 숲을 볼 수도 있는 법. 책도 그래서 있고 읽는 거 겠지요.

피보나치의 수열이 황금비율과 만나는 지점이 특히 재밌었고, 펭귄 효과에서 뜻하지 않게 펭귄 생태에 대해 감동. 혹한기에 새끼를 낳는 건 따뜻한 여름철 새끼가 독립해 나가기 쉽게 하려는 것. 진화는 이토록 눈물겨워야 하는가...

그 유명한 다윈의 비글호 항해 일화를 또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드는 이 항해에서 창조론을, 다윈은 진화론을 확신하게 되는데,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은 얼마나 다른가. 그게 삶의 재미인지, 어려움인지 가늠하는 게 또 삶이고...


ㅡAgalma

(Agalma) 최근 한국은, 간디가 본 망국의 징조와 하인리히 법칙의 징후가 수 차례 겹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세월호 사건 때 안전불감증 운운하던 뉴스 기사가 생각난다. 간디가 말한 "원칙 없은 정치"와 "도덕심 없는 경제"가 곧바로 대입된다.

p80 <하인리히 법칙> 중
간디는 망국의 징조로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나라가 망할 때면 원칙 없는 정치와 노동 없는 부자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양심 없는 쾌락이 만연하는가 하면 인격 없는 교육, 도덕심 없는 경제,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 희생을 모르는 종교가 만연한다는 것이다.
1991년에 있었던 구소련의 붕괴를 보자. 직접적인 붕괴 원인은 미국과의 무기 경쟁으로 인한 경제난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 붕괴를 알리는 좋지 못한 징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1986년에는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같은 해 8월에는 흑해에서 소련의 정기 여객선 한 척이 침몰하여 400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1988년에는 지진이 일어나 2만여 명이 죽었는가 하면 1989년에는 시베리아 송유관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열차 두 대가 공중으로 튕겨 나가면서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이러한 사고들이 구소련의 붕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지만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 몇 가지가 우연처럼 겹칠 때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Agalma) 선량하지 않은 중립자들도 많은 것 같은데, 어쩐다. 법칙은 역시 유연성이 좀 부족해...

p92 <단테의 법칙> 중
`에드먼드 버크의 법칙`도 있다. 그는 말한다.
"악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오직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다."
선량한 방관자를 미워한 사람 중에는 케네디 대통령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인 위기에서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그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서 선량한 방관자들이 갈 곳은 바로 뜨거운 지옥불이라며 미워했다. 이를 단테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Agalma) 장점이 많아도 단점을 생각하며 고민해 볼 때...내 단점은 @&;&₩~~ 진화는커녕 생존도 어렵겠다(....)

p93 <최소량의 법칙> 중
식물의 성장에 질소, 인산, 칼리의 3가지의 영양소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인산, 칼리가 아무리 풍부해도 질소 성분 하나가 부족하면 식물은 질소를 소진할 때까지만 성장한다는 것이다.
식물의 광합성을 보자. 광합성에는 이산화탄소, 태양광선, 온도 등이 필요하다. 식물의 광합성이 이루어지는 속도는 3가지 요소 중 가장 적은 요소에 의해 제어된다. 탄소가 부족한 곳이라면 부족한 탄소를 소진할 때까지만 광합성이 이루어진다. 아주 쉽게 생각하면 남자가 수백 명 있어도 여자가 10명뿐이면 결혼은 10쌍밖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p100 <적자생존의 법칙> 중
다윈과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다.

(Agalma)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지는 이유로 대입해보다.

p142 <광속 불변의 법칙> 중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빛이 달린 거리S는 빛의 속도 v X 시간 t이다. S=vt, 이것을 속도에 대해서 풀면 v=S/t가 된다. 빛의 속도 v가 어떤 상황에서도 30만km로 일정하다면 S/t 역시 일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S가 커지면 t도 커지고, S가 작아지면 t도 작아져야 한다. 즉 공간과 시간은 맞물려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빛이 이동하는 우주공간은 절대적인 시간도, 절대적인 공간도 아닌 상대적인 시공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상대성 이론이다.

(Agalma) 낮은 곳에 임하소서....이 말이 생각난다.

p198~199 <빅뱅의 법칙> 중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며, 그 반대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열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다면 한번 끓기 시작한 물은 영구적으로 끓어야 한다. 뜨거운 물체는 점점 더 뜨거워져서 마침내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져 버리게 되고, 차가운 물체는 점점 더 차가워져서 마침내는 절대온도인 영하 273도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우주에는 차가운 얼음덩어리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없을까?
단 하나가 있다. 바로 중력이다. 중력은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기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무거운 물체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일단 더 무거워진 물체는 중력 또한 더 강해져서 주위의 물체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우주공간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존재하는 것이다. 블랙홀이란 거대한 중력공간이다.

(Agalma) 올림픽에서 금은동 수상자 중에 은메달 수상자 안색이 가장 안좋은 것과 마찬가지로 2인자들은 슬프다..

p204~205
인류 최초의 우주인은 구소련의 유리 가가린이었지만 두 번째 우주인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두 번째 우주인 역시 구소련의 티토프였다. 그는 가가린보다 4개월 늦은 1961년 8월 6일에 우주선 보스토크 2호를 타고 25시간 18분 동안 지구를 선회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이지만 첫 번째 우주인 가가린에 가려져버렸다.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의 이름은 모두가 기억하지만 두 번째로 발을 디딘 버즈 올드린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구나 달까지 함께 갔지만 달에 발을 딛지 못한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콜린스는 후일 <Fly to the moon>이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달까지 우주선을 조종했던 자신이 완전히 잊힌 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Agalma) 배멀미 약 문장. 배를 타면 꼭 써 먹어야지! 그런데 내가 멀미를 하던가a;

p209 <원근의 법칙> 중
"배를 탔을 때 사람들이 멀미를 하는 이유는 너무 가까이 보기 때문이다. 수 킬로미터 밖의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광경을 보고 있으면 멀미를 할 이유가 없다."
일본 소프트 뱅크 손정의 시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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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11-17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쪽 분야를 통 안 읽었어요 ㅎㅎ 슬짝 장바구니 담아 봅니다.

AgalmA 2015-11-17 07:02   좋아요 1 | URL
자기계발 비스므리한 냄새나는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교양상식 쉽고 재밌게 쌓긴 좋은 책 같아요^^ 중고책으로 종종 나오기도 하니 구매하신다면 중고알림 신청 해 놓으시는 걸 추천드리고, 도서관에서 빌려보셔도 금방 읽습니다. 집에 두면 갑자기 생각 안 날 때 들춰보고 찾는 수월함은 있겠죠ㅎ 법칙들을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어 앞뒤 파악하며 읽으니 맥락 파악하는 맛도 있어요. 이 책 저 책에서 산발적으로 알았던 법칙들 정리가 되더군요.

cyrus 2015-11-17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윈과 링컨이 정말 생일이 같습니까? 처음 알았습니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인물이 같은 날에 동시에 태어나는 상황이 신기합니다.

비운의 2인자의 또 다른 사례로 전화기의 발명자 벨과 라이스가 있어요. 라이스가 벨보다 먼저 전화기를 발명했음에도 특허를 늦게 인정받는 바람에 전화기 최초의 발명자는 벨이 되고 말았어요.

AgalmA 2015-11-18 02:14   좋아요 0 | URL
정말 날짜까지 같더군요. 인간의 지표를 바꾼 두 인물이 같은 날 태어나다니....

네, 벨 일화 들어봤죠. 테슬라가 전화로 무선 수신하려던 시도 등등 미국의 방해를 안 받았다면 2001 오딧세이를 더 빨리 만났을지도요ㅎ
에디슨 때문에 테슬라가 계속 빛을 못 본 게 안타깝더군요. 에디슨의 방해 공작으로 교류 전기 저작권도 찢어버리고 무료 라이센스로 돌린 게 인류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 것인지...
 

盡心章句
45.
孟子曰 君子之於物也에 愛之而弗仁하고 於民也에 仁之而弗親하나니 親親而仁民하고 仁民而愛物이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물건에 대해서는 사랑하기만(아끼기만) 하고 仁하지 않으며 백성(사람)에 대해서는 仁하기만 하고 親하지 않으니 , 친척을 친히 하고서 백성을 仁하게 하고 백성을 仁하게 하고서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註. 愛之而弗仁 ... 仁之而弗親 : 愛, 仁, 親은 모두 사랑하는 것으로 仁에 해당하나 이것을 구분하여 말하면 愛는 아껴주는 것이고, 仁은 人道로 대우하는 것이고, 親은 친척으로 대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처자식을 사랑하는 따위를 이른다. 그리하여 愛보다 仁이 더 간절하고 仁보다 親이 더 간절하므로 親親을 하고서 仁民을 하고 仁民을 하고서 愛物을 하는 것이다. 齊宣王이 벌벌 떨며 죽으러 가는 소를 차마 보지 못하여 羊으로 바꾸게 한 것 같은 것이 바로 愛物이다.


*
제선왕에서 齊宣이란 낱말의 뜻을 찬찬히 곱씹어 봤다.

齊:
1. 제사(祭祀)
2. 제사(祭祀) 지내다
3. 서로 접하다
4. 사귀다
5. 미루어 헤아리다
6. 갚다, 보답하다(報答--)


宣: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은혜 따위를)끼치어 주다
2. 널리 펴다
3. 떨치다, 발양하다(發揚--)
4. 밝히다
5. 임금이 말하다, (임금이)하교(下敎)를 내리다
6. 머리가 세다, 머리털이 희끗희끗하다
7. 밭을 갈다
8. 쓰다, 사용하다(使用--)
9. 통하다(通--), 통해지다(通---)
10. 조서(詔書), 조칙(詔勅)
11. 임금의 말
12. 궁전(宮殿), 임금이 거처(居處)하는 곳



왕의 이름답다. 이름답게 행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행하는 아래 마음은 어떠한가.
盡心은 과연 전체로 올곧게 있으며 전달될 수 있는 것인가.
<에로스의 종말>은 그걸 의심하게 했다. 우리가 재단(裁斷)한 사유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진실하며 현실을 관철할 수 있을지. 나는 공감을 곧바로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어는 선언과 단언(斷言)의 성격을 지닌다. 앞서 나가는 말들. 그러다보니 그렇게 되는 말들. 경주(競走)하는 말들. 불화(不和)하는 말들. 말이 악하면 악한 인간으로 보이고, 유머를 잘 쓰면 유머스러운 사람이 되며, 말이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이 모든 게 동시에 될 수도 있다. 상대에 따라서 더 많이도. 여기서 나도 자유롭지 않다.
언어로써 삶을 살지만 현실은 너무도 괴리스럽고 부조리하다. ˝안녕하십니까˝에는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 있는가. 그리고 또 이어지는 말, 말, 말. 실수와 번복과 터득... 다시 반복. 몸이, 사람이 기계 같이 느껴진다. 나는 거기서 愛物을 본다. 親愛가 아닌 不和하는 나를.

사랑은 재발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실패하고 다시 원점이 될 거라고 말해야 할까. 여지껏 재활용만 되어 왔는데, 재활용도 잘 하지 못했다. 다윈, 아인슈타인, 예수가 나타나도 전면적인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 인간의 욕망 근원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사후적으로 파악하기 급급하다. 나는 순수한 無作爲, 無目的은 없다고 본다.

˝위반˝(바타유, 사드)이 나타났을 때 에로스의 재발명은 더 소통 불가능, 도달 불가능으로 보였다. 가까울수록 멂, 낯섦을 극렬하게 느끼듯.
위반의 전시(展示)성은 아우라와 시뮬라크르의 관계처럼 에로스와 포르노의 혼재를 야기하는 작동 기제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강렬함 속에 쉽게 환상에 빠지듯. 주체의 문제 보다 인간 본성의 문제다.

불교에서 와 세속화 된 이심전심 (以心傳心)은 매우 어려운 경지이다. 알랭 바디우와 한병철이 꿈꾸는 `타자로서 만나 이루는 에로스`, `정치와 사랑이 만나 만드는 신비로운 공명`이 이 경지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부정성, 타자성은 불완전한 사다리 같다. 변증법을 말하면서도 대상화만 강조된 논점. 상태의 흔들림, 불완전성, 불안을 외부 사회(주로 소비자본주의)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만든 인간 자체가 이미 그러하며 에로스도 그러할 수 있음을 고찰하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가 왜 주체의 죽음을 부르는가. 그것은 다분히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타자성`과의 만남,`부정성`의 획득이 아니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흔들림을 조성한다. 생성과 파괴는 에로스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겪는 상태이자 숙명이다.
일례를 보자. 종교 속에 개인성이 와해되었을 때 만들어내는 극단적 현실을 보라. 유대인에 대한 수천 년의 박해.
페미니즘이 단순히 시대적 요구인가. 이 혁명은 울분 속에서 터져 나왔다. 인간은 늘 차별과 구분의 잣대 속에서 문명을 형성해왔는데, 충일한 에로스의 상태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에로스의 종말>은 이론과 사유로 그쳐 있다. 현실적으로 돌파해 갈 예시가 충분하지 않다. 한병철은 이론을 예찬하면서 데이타 중심의 실증 과학을 불신하는 뜻을 밝히기도 했는데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정도는 철저히 제시해야 했다.
알랭 바디우와 한병철의 사유는 인간의 이런 현실적 추동 속성을 배제한, 초극하라는 이성적 함성만 가득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임을 진정 포기한 적이 없다. 사랑에도, 신에게도 경영상 위임했을 뿐이다. 마음의 평온을, 구원을 바라며.
`자본주의 사회 산송장`만큼이나 `정신적 산송장`도 지상에 가득하다. 사랑의 충실함에서 행복을 바라는 인간이여, 스스로 언어를, 정보를, 정신을 얼마나 떼어내고서 바로 설 수 있을지.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다. 더 더 쌓을 테지. 재발명 해야 하니까!
바디우, 한병철 당신들이 말한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인식의 본질은 결론적으로 인간의 선택적 취합이었다. 종합적이길 바랐던 무수한 이론들이 그랬듯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백지 어음이 되지 않길 바라며 계승되어 왔다. 현실을 말하면서 그것에 적극적으로 맞부딪히지 않고 이론과 관념에 치우친 재활용도 여전한데, 사랑의 재발명이라... 정말 난관이다.
에로스, 에고의 방황은 자신의 종말까지 건재하리라.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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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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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1-14 21:51   좋아요 1 | URL
임금이 祭를 올바로 하지 못하고 宣을 못하니 나라 전체가 이 모양이지요...

사람 속에서는 진심이라 해도 나올 때는 착오와 사심이 끼어 들게 마련이라고 봅니다. 당시에는 구분도 사실 어렵고.

그렇죠? 제가 진화론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화론이 현실과 직연결되는 부분이 많으니까 말이죠.

무작위성은 복잡계 이론과 연결해서 볼 부분이 있습니다. 복잡계 이론을 들여다보면 그 우연적인 것들이 통계가 잡히니 괴이하죠. 이건 외부적인 고찰이고, 내부적으론 인간이 무작위로 행하는 것 속에 과연 마음이 없을까? 본능과 유전자 정보에 기인한 것도 분명 있죠. 전체를 아직 종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여하간 진화론적 의문이 끼어 듭니다. 컴퓨터 뇌라는 무작위성을 강조한 해석도 이건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다 제 추론입니다...

2015-11-14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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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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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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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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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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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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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11-16 2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발명은 이미 랭보를 통해 말해졌잖아요. 그것이 Agalma님이 소개해 주시는 바디우나 한병철이 말하는 ˝사랑의 재발명˝과 같은 이론으로 볼 수 있을지 저는 알 수 없지만, 표면적으로 생각해 보았을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재발명 되는 것에 인간이 자신의 경영을 위임하길 희망하고 싶습니다. ㅠㅠ

AgalmA 2015-11-16 23:27   좋아요 1 | URL
하얀이에게님 안녕요/
같은 걸 말할 순 없겠죠~_~바디우, 한병철도 ˝재발명˝이라는 가치를 가져와 그렇게 쓰려 한 거 겠고...
생성이 소멸로 간다는 걸 생각하면, 어떤 발명도 가치 하락과 같이 가겠죠. 끊임없이 재발명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는데... 인간에 대해 생각할수록 저는 참 비관적이 되는 요즘입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비로그인 2015-11-18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저에게 사과를 하시나요~_~ 인간에 대한 비관적 사고들이 지금의 문학들을 있게했다고 믿는 저는 인간에 대한 부정은 긍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만^-^;; 하하하~ 물론 이 사실을 어디가서 자랑스럽게 떠들지는 못합니다 ㅜㅜ

그래도 모든 감정이 타당하다는 것과 어떤 인간이든 자신의 세계관에서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고 어줍잖게 편들고 싶어요>_<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하니깐요.


AgalmA 2015-11-20 08:50   좋아요 2 | URL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무얼까.
긍정과 부정 사이를 숱하게 오가며 이 삶의 저울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 일까. 무엇이 있기는 한 건가. 단지 우린 관념의 단풍놀이나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속에서 말을 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무엇을 위한다는 것..... 다가갈수록 모든 것이 공포에 가깝고 그 무게감에 짓눌려 버릴 거 같아요.
온세계 곳곳의 죽음을 내 집안 일처럼 감당하기도 버겁고, 인류애, 사랑 그걸 매순간 재발명할 능력은 있는 것인지...매일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뭐라뭐라 그순간에 북받쳐 떠들지만 눈감고 그저 틀어박혀 지내고 싶은 순간도 얼마나 많은지....
이 댓글에선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 댓글에선 나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온라인에서의 이 무수한 대화 속에서 나는 무슨 다중인격자 같아요. 이 말들을 나는 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그러면서 누군가에겐 또 모질게 따지고 있으니....그래서 미안한 겁니다.

2015-11-22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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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0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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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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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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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아비뇽 연극 페스티벌 무대에서 관객 대상으로 진행된 대담이다. 팟캐스트 인문학 특강 같다고 보면 된다. 
몰랐는데 알랭 바디우는 ˝연극은 몸으로 이루어진 사유˝(p94)라고 칭송하는 대단한 연극인이었다. 희곡, 오페라 집필도 하고, 젊은 시절에 몰리에르 <스카팽의 간계> 주연을 맡기도! 운동권 지식인들이 이런 경향이 많긴 했지만 철학자로만 알고 있던 터라 신선했다. 연극 속 극적 사랑, 연극계의 열정을 아는 바라, 알랭 바디우가 ˝사랑 예찬˝을 할 만 하겠군 했다. 
대담은 고전과 연극을 예시로 들며 설명해서 어렵지 않다. 해제가 거의 3분의 1이라 본문은 100페이지 조금 넘는다. 본문을 잘 따라가면 개념 이해는 쉽다. 가까이 가기에 두려운 철학(그/그녀)이 아니다^^; 무엇보다 주제가 사랑이니 집중될 수밖에 없다ㅎ!

1. 철학에서 사랑을 규정한 `낭만적 개념`, `계약적 개념`, `회의적 개념` 중 지금 시대는 `회의적 개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사랑을 욕망과 섹스로 덮어버린 재난 지경이라고나 할까. 나는 라캉의 `결여의 욕망`도 `회의적 개념`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런 철학적 사랑 개념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사랑은 연애 or 결혼이라는 관계 등식으로 굳어져 있다. 불확실한 속성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기 보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확실한 사랑만 찾는다. 
온갖 법칙에 불구가 된 사랑의 상황들을 고쳐 보자는 게  바디우의 사랑 담론이다.


2. 바디우가 사랑에 가지는 낙관의 기원은 플라톤 `사랑ㅡ>진리(이데아)`다. 플라톤의 이 논리를 그저 외우기만 해 오다가 바디우의 설명을 들으니 쉽게 잘 다가왔다. 너무 속성으로 배워 미안할 지경. 바디우 씨 감사~
열정을 불신하는 철학자들의 우정 예찬과 빈번했던 동성애(*생물학적 동성애를 말하는 게 아님)는 `회의적 개념의 사랑`과 `진리 추구로서의 사랑`이 묘하게 얽힌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3.`노아의 외투`(필리프 쥘리앵 <노아의 외투>, 한길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대항마로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지 못한 게 의아스럽다. 
`노아의 외투` 는 창세기에서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웃음거리로 만들려던 아들과 외투를 덮어 가려주었던 아들의 이야기다. 전자는 `반항하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적 아들이고, 후자는 아버지의 `결여를 메우려는` 아들이다. 후자는 계승, 동맹적 관계로 볼 수 있을 텐데,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적 아들을 더 지지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자아를 강조하고 타자화를 양산해내는 시대가 그걸 더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프로이트 이론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에 있어 나르시시즘, 이기주의가 가장 골칫거리인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4. DNA 특성들, 행동심리학이 인간에 대해 많은 걸 드러내주고 있는 상황에서 바디우의 이 사랑 담론이 어느 정도나 힘이 실릴까 싶지만, 파편화된 현대의 사랑을 다시 재발명 해보려는 마오주의자의 철학이 위안과 힘을 준다. 말만 했다하면 ˝헤어지세요!˝만 외치는 어느 철학자보다 낫군. 헌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사랑이 상품화되어 만남 사이트가 광고되는 현실, 좋은 대상을 만나기만 바라는 보험 심리, 이렇게 모두가 사랑을 협소하게만 생각하고 자기충족만 추구하는 상황이라면 그 관계는 더 나아갈 수 없다. 
바디우가 사랑의 위기를 진단한 이 난국 속에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은 어떤 해법을 말할까. ˝종말˝이란 단어가 매우 불길하지만, 바디우가 강조한 공동체적 사랑 ˝박애˝는 당연히 등장하겠지. 그리고 68혁명이 ˝섹슈얼리티와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시도˝(p107)했듯 그럴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을까.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갈망, 이것도 사랑의 어떤 모습 같다.
<에로스의 종말>이여, 어서 내게 오라~ 이 세계를 진리의 눈으로 보게 하라~ 삶을 긍정하기 위해.



ㅡAgalma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ㅡ 아르튀보 랭보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 ㅡ 페르난두 페소아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할 것" ㅡ 알랭 바디우가 하이퍼-번역(자신의 철학적 관점에 따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한 플라톤 <국가> 속 소크라테스의 말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지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지, 종의 재생산을 확보하는 데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의적 모랄리스트들은 가족이라는 체제 안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염세주의의 정당화, 다시 말해 사랑이란 결국 종의 영속을 위한 하나의 술수이자 기득권을 확고히 물려받기 위한 사회적 계략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만을 보려 할 것입니다.

*역자 주) 지점(point)은 양자택일의 형태,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관련된 선택과 장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는 주체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간격두기와 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점` 개념은 주체의 선택과 장소를 동시에 가리킨다.(`선택이 있는 곳에 장소가 있다`) 지점을 다루는 것은 결국 영원한 진리의 국지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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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5-10-26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란 상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궁금해하는 감정이 유지될 때 가장 뜨거운 것 같아요. 내 편의나 필요대로 지레짐작하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말이죠. 알고 싶은 욕망을 사랑의 한 모습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책에 대한 갈망 역시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AgalmA 2015-10-26 20:27   좋아요 1 | URL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많은 문학과 예술 경우 사랑의 뜨거움에서 자멸하는 게 많아 정작 사랑의 진짜 승화를 잘 보여주지 못한다고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런 면이 있긴 하죠. 문학과 예술이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 특성상 극적인 전개와 갈등이 주요 요소이기도 하고, 그것이 다시 현실로 반영되는 순환을 만들기도 하죠. 단적으로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당시 많은 이들이 자살했죠. 이건 위 본문에서 말한 `낭만적 개념`에서 진행되어 `회의적 개념`으로 도착한 사랑이기도 한데, 환상 속에서 사랑을 실현하려고 할 때 실패와 좌절은 당연할 겁니다. 환상과 현실이 맞아 떨어지긴 지극히 어려우니까요. 나 혼자도 아닌 두 사람이 그러긴 더 어렵죠. 그래서 바디우는 (어떻게보면 이상적일 수도 있지만) 모든 `지점`을 거치는 두 사람의 사랑을 말한 거고요. 이걸 한정된 방식으로 구현하긴 어렵죠.
그러고보면 참 재밌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꾸지 못해 환상에 빠지지만, 또한 환상이 결코 주지 못하는 걸 이 현실에서 구할 수도 있다는 것...

책에 대한 사랑, 물고기자리님이 확실히 동감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2015-10-26 2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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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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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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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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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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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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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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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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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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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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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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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0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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