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을 측정하는 장비로는 버펄로보다 가이거계수기가 훨씬 정확하다˝
(리언 레더먼, 딕 테레시 《신의 입자》)

《컨택트》 영화에서 헵타포드 우주선에 갈 때 방사능을 두려워해 카나리아를 가지고 간 장면은 하나의 미장센이기도 하지만(고요 속 새 울음소리!) 아날로그성, 생물성을 더 우위에 두는 인간 습성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도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간의 의심과도 연결할 수 있다. 수학, 물리학 등에 사람들이 어려움 내지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도 유사할 텐데, 보통 사람들은 이해가 어려운 계산적 수치보다 기존의 양상 - 경험, 물질적 결과를 더 선호한다. 신뢰가 선호에 끌려다니는 건 늘 안타까운 일이지. 기계의 오류, 한계를 늘 지적해왔지만 알파고 능력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기 시작했다. 급속히 데이터화 되어가는 현실에서 디지털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어도 인간은 언제나 마지노선을 가지고 싶어 하지. 마지막 마지노선이 늘 자신이라는 걸 잊고서. 안 보이는 신을 믿듯이. 신의 유무에 대한 인식은 과학자들이 끝없이 원자를 깨고 들어가듯 우리가 철저히 자신을 깰 때 가능할 것이다. 니체는 19세기 식으로 깨려 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식은 다윈?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적어도 인문학자는 아닌 거 같다. 21세기 방식은 누구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궁금하다.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 키가 198센티미터였다니... 왜 그림들은 그를 왜소하게 그렸단 생각이 들지. 워싱턴 링컨 기념관의 링컨 동상이 거대해 보여도 198센티미터면 업적이 아니어도 수긍할 만하다!

《신의 입자》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딴 생각 순환선... 갈 길이 멀군.
하지만 전자기학(전자)과 상대성이론(빛의 속도), 양자역학(플랑크상수)의 핵심이 담겨 있다는 ‘미세구조상수‘ 137 하나는 잊지 않게 배웠다. 저자는 언어가 안 통하는 곳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137이라고 쓴 푯말을 들고 있으면 물리학자나 물리학 학생들이 이 중요한 숫자를 알아보고 도와줄 거라고 말한다.
너무 오지에 가면 소용없을 텐데. 언어도 안 통하는데 숫자 표기를 알아볼까 싶지만; 137이 666처럼 악마를 상징하는 숫자라고 생각하는 원시 부족을 만나면 어뜩해! 헤이조그 영화 《피츠카랄도》 생각나네. 피츠카랄도의 하얀 증기선을 부족의 구원자로 예언된 하얀 신의 모습이라 생각해 부족이 배가 밀림을 통과하도록 온갖 희생을 감수했던 이야기가. 믿음, 인간의 심리 작용은 우릴 너무 쉽게 움직인다. 그러니 자유의지도 늘 의심스럽지. 배움, 앎 또한 인간의 집단 최면 작용이라면? 인간 종은 세상에 불가해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비주의자들 같다. 암튼 또 신 얘기. 무슨 얘기만 하면 신 얘기로 도돌이표...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에서 damn을 빼면 쉽게 신의 입자(God Particle)가 되지만, 신 얘기는 신나는 얘기는 아니지. 어쩌면 질소만 가득한 과자봉지 같을 수도 있다는.... 이 과자가 네 고..아니 과자냐. 산신령을 등장시키지만 산신령을 갖거나 되고자 하는 건 아니고 내가 과연 도끼를 얻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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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7-03-1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념이 자연스럽고 성찰적이시네요.,, 제 리뷰의 무미건조함을 반성하게 하는 글입니다. 다시 한번 읽고 새 리뷰를 쓰고 싶어지네요...자연스러운 연결, 참 좋습니다...^^

AgalmA 2017-03-10 01:15   좋아요 1 | URL
서로 쓰는 성향이 다른 것이지 벤투님이 반성까지 하실 정도의 글은 아닌데요;; 페이퍼식 글쓰기는 벤투님이 더 많이 잘 쓰시잖습니까~
분명 허점 많겠지만 이런 식으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게 습관이라...

겨울호랑이 2017-03-10 0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순간 신(神)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깊이 들어가도 신을 발견할 수 없고, 멀리 바라봐도 신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러다가 틸틸(치르치르)와 미틸(미치르)의 ‘파랑새‘처럼 주변에서 발견하거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AgalmA 2017-03-12 19:49   좋아요 1 | URL
서양철학에서 이오니아 학파(그리스 자연철학자들)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진보적이고 혜안이 밝았는데도 묻혔죠. 그들의 직접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가장 문제적이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들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변형이 또 있었죠. 저자는 <신의 입자> 2장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원인‘ 분석적 사유자였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 ‘목적‘적 사유에 치우쳐 신을 상정할 수 밖에 없는 철학틀이었다고 말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리스 철학자도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자도 원인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게 3000년 넘게 지속되었고요. 중세 때는 퇴보하기도 하면서.
현재도 끝없이 쪼개고 들어가는 과정 중이죠. 과거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원소라 통칭하던 걸 ‘쿼크와 렙톤‘까지로 발견한 상태이지만 어찌 될 지 또 모르죠. 천동설과 지동설 경우처럼 오늘의 탄핵 인용처럼 새로운 관점이 나오면 우린 또 새로운 배치를 시작할테니... 아, 이러다 댓글로 리뷰쓰는 식이 될 거 같아 여기서 마무리할께요^^
겨울호랑이님, 좋은 댓글 늘 감사드립니다^^/ 박 길라임 탄핵도 되고 오늘은 좋은 날~

겨울호랑이 2017-03-10 12:26   좋아요 1 | URL
과학의 발전이 과거의 ‘추상적 사유‘를 보다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과학의 발전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추월하지는 못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빛‘보다 빠를 수는 없는 것처럼요.ㅋ Agalma님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생각의 속도‘와 ‘빛의 속도‘ 중 어느 것이 더 빠를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아직 읽지 않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포인트로 저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좋은 독서 포인트 제공에 감사합니다.^^: Agalma님 행복한 금요일 오후 되세요!

AgalmA 2017-03-10 12:42   좋아요 1 | URL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니 사유의 틀에 갇히면 오도가도 못하는 거죠ㅎ;;
기술에 대해선...지금까지는 효용적인 것으로 많이 운용되었다면 현재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그럴 테고요. 핵 경우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격이잖아요ㅎ; 멀리 보지 않는다는 게 대다수 인간의 문제. 쯧쯧....

신의 입자 읽으면서 쿼크와 렙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 무엇이든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걸 생각할 때 인간의 사유 속도는 당연히 더 느릴 거란 생각을 저는 하게 되네요^^ 우리의 생각이 그 물질의 모임 속에서 만들어진 2차 가공물이라는 현실적 추론 아니더라도.

아,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책 좋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봐서 다 못 읽고 반납했는데 소장하려고 벼르고 있는 책 중 하나요^^ 루크레티우스 글은 현상학을 벌써 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해줬어요/

겨울호랑이 2017-03-10 15:19   좋아요 1 | URL
^^: 저는 기술의 발전 속도만큼 인간의 마음/제도가 못 따라가서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현대의 재앙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여러 면에서 균형적인 발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 저는 ‘생각(사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에 1표! ㅋ ‘빛의 속도‘는 일상의 속도보다 상대속도는 느려지게 되지만 결국은 실현되는 속도인 반면, ‘생각‘의 속도는 다른 차원으로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면, 지금 탄핵한 박근혜 이후 세계에 대해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빛‘의 속도로는 그런 미래의 여러 차원에 가기 힘들지 않을까...하는 근거없는 상상을 해봅니다.ㅋ

AgalmA 2017-03-10 13:24   좋아요 1 | URL
우리의 지금 시간 개념은 선형적이라 한계가 있죠. 시공간을 나눈 것도 역시나 한계일텐데, 어찌 되었든 다중 우주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실현된 우주도 있을 겁니다. 즉 우리의 현재 사유는 늘 뒤따르는 현상이 아닐지. 기술 재앙에 대해서 우리 맘이 못 따라갔듯이 말이죠.

속도라.... 갈릴레이에서 이미 결론났지만 같은 조건에서는 모든 물질의 속도는 같다고 하죠. 여러가지 요인들이 섞이는 이 땅에서는 무거운 것이 마찰력 때문에 더 빨리 떨어질 뿐이지만. 즉 생각과 빛이 정확히 같은 상황이라는 설정이 필요합니다. 단순 매칭 비교는 인문학적 추론이지 과학적이라고 보긴 어려워요. 하지만 겨울호랑이님 추론은 매력적이죠^^

겨울호랑이 2017-03-10 15:19   좋아요 1 | URL
^^: 제 생각이 즉흥적인 생각이라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네요.ㅋ Agalma님 덕분에 이 부분에 대해 더 재밌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시간‘과 ‘속도‘라는 문제가 지금은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만 들지만요.. 저의 개떡 같은 질문에 ‘찰떡‘같이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galma님 행복한 오후 되세요^^:( Agalma님과 댓글을 쓰다보면 책나오겠어요...ㅋ)

AgalmA 2017-03-10 13:5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사유는 이미 찰떡 같으심^^ 저도 덕분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어 유쾌하고 유익합니다. 이런 친구 만나는 거 어려운 일인데, 겨울호랑이님 존재가 참 고맙습니다^^/
우리 둘 다 공부가 부족하다! 매일 한탄하니 책이 언제 나올 지는ㅎㅎ;;;
 
하나일 수 없는 역사 - 르몽드 역사 교과서 비평
고광식 외 옮김, 김육훈 해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모두 유와 행복을 꿈꾼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같은 속성의 다른 양태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누릴 권리. 역사 속에서 이것은 늘 투쟁의 핵심이었다.

가장 가까운 1968년 68 혁명 외에도 파리에서는 중요한 혁명이 여러 차례 있었다. 1792, 1830, 1848년, 그리고 다른 혁명과 구별되는 1871년 리 코뮌은 투쟁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의 새로운 혁명이었는데, 자취권 쟁취를 위한 민중 봉기였다. 파리 코뮌에 대해 역사학자 자크 루즈리는 ‘민주주의에서 절대 자유의 문제‘를 제기했다. 파리 코뮌은 권력관계를 변화시켰지만 남성 위주의 지배 구조를 바꾸지 못했고, 착취를 근절하고자 했으나 사적 소유는 예외로 두었다. 이것은 여러 혁명에서 여전히 발견되는 딜레마이자 투쟁 논점이다. 약 1만 명의 사망자가 나온 파리 코뮌은 ‘피의 일주일‘로 불리며 19세기 유럽에서 민간인에 대한 폭력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파리 코뮌 이후 선포된 공화국은 민주적이지도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 여겨지는 스파냐 내전(1936~1939)은 사망자가 50만 명이 넘는데,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개혁을 촉구하는 민중운동과 보수파들의 군사 쿠데타가 대치되는 상황이었다. 에스파냐 내전은 우익세력의 ‘백색 테러‘가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는데, 그 수장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명분은 무시무시하다. ˝에스파냐를 구하기 위해 해야만 했다면, 나는 에스파냐 국민의 절반을 총살했을 것이다. ˝
에스파냐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보수파 쿠데타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도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을 내세웠다. 이 태도는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 프라하를 점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를 견제하고자 독일의 ‘자력 회복‘을 허용하는 실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키우지 않았던가. 소련과 나치스가 ‘독소불가침협약‘을 했을 때도 유럽은 안일했고, 유럽 연합국과 독일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도 눈치만 살폈다.
1943년 인도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처칠 영국 총리가 식량 비축분을 인도 주민에게 보내지 않고 식량이 풍부했던 영국군 부대에게 보내고도 뱅골 주민 300만 명의 죽음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은 것을 정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의 동부 전선 전투가 아니라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헐리웃 영웅주의,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 전승국 중심의 잘못된 착각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군 165개 사단이 동원되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독일군 76개 사단에 불과했다.

오늘 한국은 건국절과도 같은 3·1절.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아직도 참혹하게 겪고 있는 이들 중 팔레스타인 난민을 생각했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 이후 본격 대두된 시오니즘과 서구의 협조로 1948년 창설된 이스라엘 국가, 나라를 잃고 분쟁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어느 한 쪽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여기서 사라지는 쪽은 또 약자일 것이다.
세계대전 종전 후 회담을 통해 대재앙의 근원은 ‘개별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국제연맹의 무능‘이라고 연합국 사이에서 반성이 있었지만, 이 점은 파리 코뮌이 해결하지 못한 저 두 결론(지배 구조와 사적 소유)처럼 아직도 여전하다. 1945년 이후 이어진 냉전 체제와 그 산물인 세계 연맹 기구들의 설립 배경들을 보면 대재앙의 근원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내부도 좀먹어 들어갔는데,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매카시즘과 소련의 즈다노비즘(즈다노프의 주도로 시행된 소련 문화 통제정책)은 자기 체제의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자국의 기술을 과시하던 미-소 대결에서 어부지리는 과학 발전이라 볼 수 있을까. 모든 걸 날려버릴 핵 무장을 확산시킨 걸 생각하면 전혀 득이라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냉전의 종식까지 역사를 ‘단의 시대‘라 부른 에릭 홉스봄의 취지를 이어받아 산업화, 식민화, 대중의 정치 참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830년대부터 현재까지 파노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이 흐름들을 따라오며 식민지를 쟁탈하는 제국주의가 가장 문제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토 확장에 따른 수많은 문젯거리는 2차 세계 대전의 파시즘과 전체주의 속에 더 첨예해졌다. 서구 열강이 제 욕심에서 나눈 국경선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프리카 분쟁, 한국의 분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을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 독립 전쟁들, 서구 원조체제를 통한 또 다른 식민지화. 지금도 세계적인 긴장 요인은 영토 문제 같다. 한국에 사드 배치로 인한 긴장 구조만 봐도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30년대 대공황이 요인이기도 했지만 에 있어 문제는 더 심층에 있다. 유럽과 트럼프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와 자국 보호주의는 자국 경제의 위기 때문이라고 보는 건 표피만 보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신자유주의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하며 노동조합과 개혁주의 정당을 약화시켰다. 소위 선진국들은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등 거대 국제금융기구를 통제하며 자기들 이익에 기여하는 규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국제적인 금융기관이 긴축정책, 금융 규제 완화, 세계 무역을 지휘하면서 예전 식민지 강국-선진국, 특권층들의 부만 늘릴 뿐이었다. 피해는 크고 광범위했다.(1980년대 초 제3세계의 부채 위기, 1990년대 말 신흥공업국의 금융 위기, 2007년부터 미국의 ‘서브 프라임‘ 위기에 의해 촉발된 심각한 경제 침체) 오늘날 다국적 기업은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틴 아메리카의 좌파 정치 지도자들의 행보는 의미 있었으나 2008년 세계적 경제 위기로 독자적 행보에 더 탄력을 받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굴레 속에 빠진 세계에서, 빈민 청소년을 위한 베네수엘라 음악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의사와 석유를 서로 교환하는 시스템은 얼마나 멋진가!

경제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 네트워크마저 강자 패권주의로 치닫는 현실에서 진정한 평화는 어떤 식으로 구축될 수 있을까. 19세기 말 첫 번째 세계화는 구 제국과 신흥 경쟁국들 사이의 첨예한 경쟁 및 민족 분열 속 경제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 상황과 비슷하다. 우리는 계화된 자본을 어떻게 현명하게 조율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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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01 04:02   좋아요 1 | URL
네. 어제 전시 가느라 일을 많이 못해서ㅜㅜ... 서평도 올려야 하고 너무 바빴음ㅜㅜ;;

2017-03-01 0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01 04:19   좋아요 1 | URL
스케치, 소장품 같은 건 복사하기 어려운데 온 거 보면 그림도 원화로 온 게 아닐까 싶은데요^^

AgalmA 2017-03-01 0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담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 패러디한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자유시장맨˝ 카툰 너무 재밌었음ㅎ! 이런 경제 만화가 국내에 필요하다~

서니데이 2017-03-01 05:38   좋아요 1 | URL
이 만화 아깐 없었던 것 같은데요??

AgalmA 2017-03-01 05:41   좋아요 1 | URL
깜빡하고^^; 매력적인 사진, 놀라운 통계, 방대한 지도들이 이 책에 한가득이라 뭘 중점 소개해야 하나... 정리가 무척 힘들었습죠;;

2017-03-01 0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01 05:47   좋아요 1 | URL
그래서 더 바쁜지도 모르죠ㅎ; 낼모레쯤 <신의 입자> 도착하면 그 책 서평도ㅜㅜ....서평 도서 연달아 하자니 읽고 싶은 책 못 읽어서 그게 좀 안 좋네요^^;; 여러 책을 병행해 읽는 습관이 있어 한 책을 오래 읽고 오래 고민하자니 좀이 쑤셔요ㅎ;; 그럴만한 책이었지만^^...덕분에 필수 공부는 하는 셈~ 전 공부책을 서평신청하는 편이니까^^

2017-03-01 0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01 05:49   좋아요 1 | URL
스스로 만들어하는 과제물이라 의미있죠^^

겨울호랑이 2017-03-02 0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Agalma님의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를 관통하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마치 스타워즈 시리즈 5편 <제국의 역습>을 생각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역습에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하나 과제를 제시한 의미있는 책이라고 느껴지네요. 어제 밤을 새우신 듯하니, 편히 쉬는 하루 되세요.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AgalmA 2017-03-02 02:48   좋아요 1 | URL
어후, 겨울호랑이님 정리력 잘 압니다만 이리 서평 정리도 멋지게 해주시다니 어찌나 멋진지^^! 지난번엔 ˝제갈공명 출사표˝로 근사하게 장식해 주시더니 이번엔 ˝제국의 역습˝! 이 글 제목으로 바꾸고 싶어지네요ㅎㅎ;;
언제나 그렇지만 부족한 글에서 의미를 캐서 가져가 주셔서ㅎ 감사합니다^^
그리고 겨울호랑이님 건강 정말정말 잘 챙기시길~ 그래야 제게 이런 알토란 같은 빨간펜 댓글을 주시죠! ㅎㅎ*
 

제임스 글릭 《카오스》에서 중요한 단락 중 하나이고 최근 내가 쓴 글( http://blog.yes24.com/document/9263149 )과 관련 있기도 하며 더불어 인류의 꺼지지 않는 관심이자 질문거리(세계의 질서, 원인, 미래 방향성, 그것을 보는 우리의 인식 한계와 태도 등)에 대해 말하고 있어 가져왔다. 과학에서 철학으로 넘어가는 광경 혹은 상호 침투적이라고 봐야 할까.


˝우리 모두를 끌어모은 것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결정론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 도인 파머가 말했다. ˝우리가 배웠던 고전적인 결정론적 계가 무작위적 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6~7년간 정규 물리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초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고전적 모델이 있다고 배웠지요. 물론 양자역학적 모델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 결정론적이고 초기 정보를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감수해야만 합니다. ‘비선형‘이라는 말은 책의 맨 뒤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과 학생이 배우는 수학 교과서에는 맨 마지막 장에 비선형 방정식이 나옵니다. 때문에 학생들은 대개 이를 배우지 않고 학기를 끝내거나, 배운다 하더라도 고작해야 비선형 방정식을 선형 방정식으로 바꿔 근사적 해답을 얻는 것을 배울 뿐입니다. 그저 좌절을 훈련하는 것일 따름이죠.˝
˝우리는 어떤 모델에서 비선형성이 만들어내는 진정한 차이점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방정식이 일견 무작위적으로 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무작위적 운동이 비롯될까? 방정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치 거져 얻는 것 혹은 무에서 유가 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크러치필드가 말했다. ˝현재의 틀에 맞지 않는 물리적 경험의 전체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우리가 배웠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가까이 있는 세계ㅡ너무 일상적이어서 경이로운 그 세계ㅡ를 둘러보고 무엇인가를 이해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런 생각에 빠진 멤버들은 결정론, 지성의 본질,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의 방향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 교수들을 당황케 했다. 패커드가 말했다. ˝우리를 함께 묶어두는 끈은 장기적 전망이었습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보통의 물리계에서 매개변수의 영역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그처럼 거대한 분석 구조가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무언가에 부딪힌다는 사실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카오스 현상은 아주 오래전에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규칙적인 운동의 동역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가 그쪽 방향을 향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상황이 이렇습니다. 이는 우리가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관찰에 의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깨닫게 해줬습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동역학에 대한 탐구를 진정으로 복잡한 동역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파머가 말했다. ˝철학적 차원에서 결정론과 화해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정의하는 데 카오스가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는 결정론적이지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동시에 저는 항상 이 세계에서 중요한 문제는 생명이든 지능이든 유기체의 창조와 관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어떤 방식으로 연구했을까요? 생물학자들은 너무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연구했습니다. 물론 화학자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수학자와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자기조직화의 자연발생적 출현도 물리학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양면을 가진 동전이었습니다. 무작위성이 출현하는 질서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숨겨진 질서가 있는 무작위성이 있는 그런 동전 말입니다.˝

제임스 글릭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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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20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규 물리학을 ㅡ배우지 않아 , 더 놀라운 1인은 어쩌라공~^^;; ㅎㅎㅎㅎ
머릿속이 카오스~ 음..그렇죠. 양면을 가진 동전 !!

AgalmA 2017-02-23 20:11   좋아요 0 | URL
me 2 ㅎㅎ

박람강기 2017-02-20 1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포메이션도 잘 읽었는데 카오스도 언제 읽어봐야겠습니다..제임스 글릭의 내공이 장난아니네요..^^

AgalmA 2017-02-23 20:12   좋아요 0 | URL
이 책 때문에 <인포메이션>이 무척 궁금해졌죠^^ <카오스>도 읽어보실 만한 책입니다.

cyrus 2017-02-20 1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다른 분이 쓰신 <카오스> 리뷰를 읽었어요. agalma님의 리뷰까지 보게 되니까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개정판을 미리 사두길 잘했어요. 책을 사놓고 여태까지 안 읽었어요. ㅎㅎㅎ

AgalmA 2017-02-23 20:32   좋아요 0 | URL
<카오스> 리뷰 쓰고 다른 리뷰도 한 번 봐야 겠습니다^^ 저도 개정판 사두고 오래 묵혀 뒀죠ㅎ;;
 
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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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자기 구축의 과정이라는 것. 종교, 특히 기독교의 속죄 메커니즘은 그걸 정확히 파악했고 죽는 순간까지 종부성사로 만족시키며 죽은 후에는 천국까지 보장해 준다. 지옥행은 계약자의 잘못으로 인한 보험 손실처럼 말한다. 종교는 자기 구원의 안정된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희망을 송두리째 내다 버리는 행위 같은 진화론에 대해 창조론자들이 분노하는 게 이해된다.

인류에겐 다른 존재 방식도 있다. 종교의 말씀을 따르는 것과 비슷하게 언어의 연금술을 통해 자기 구원을 찾는 행위가 있다. 연금술은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과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질적 부활로 확대된다(“너희들 스스로를 죽은 돌에서 살아 있는 현자의 돌로 변신시켜라.”).

푸코가 자기 배려라는 표현하며 분석한 것에 따르면 우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주체가 아니다. 고정불변의 형상으로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자기 바깥의 활동(놀이, 창조)을 통해 스스로를 생각하고 행복과 평화를 얻는 형성 과정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을 관조할 때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의 흥미로운 사례들을 살펴보자. 서기 42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재론으로, 1888년 말~1889년 초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로 자신의 책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재차 분석했던 일, 후기 인상파 화가 피에르 보나르(1867~1947)가 박물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계속 손봤던 행각, 존재하지 않는 책을 설명하는 조르조 망가델리 새로운 해설과 파솔리니 석유, 말라르메 의 메모지와 문장들의 재배치로 책을 낸 자크 셰레의 말라르메의 》, 1927년 프란체스코 모론치니가 자코모 레오파르디 시집 《노래》에 대한 평과 주석, 시의 수사본, 시의 수정사항과 메모와 초안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여준 것  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 반영[*]이면서 획일성을 거부하는 재창조 과정 속에 주체이자 저자가 지워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매우 역설적이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가 쓴 자기 반영에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스스로의 존재 속에 자신을 보존하려는 코나투스(성향)와 욕망으로 정의한 스피노자의 해석도 포함된다. 아감벤은 창조 행위의 잠재력에서 이 표현을 썼다. )

 

어떤 잠재력을 관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작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관조를 통해 작품은 해체되고 무위적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사용을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에 의탁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삶이나 작품이 아닌 행복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삶의 형태란 한 작품을 위한 작업과 자기 연단을 위한 작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화가, 시인, 사상가는(일반적으로 예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창조 활동과 작품의 저자라는 이유로 주권을 지닌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름 없이 살아간다. 언어가, 시선이, 몸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매번 무위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관조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험을 시도하고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삶의 형태로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다.(p218~219)

 

(신비, 잠재력)과 글(서사, 창조행위)에 대한 핵심적인 설명이며 창조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다. 아감벤의 의견과 그가 쓰는 개념(저항, 무위, 잠재력)들을 이해하고 동참해야 접근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는 윤병언 번역가의 말에 동의한다.

노발리스는 철학에 대해 하나의 회상이라고, 아감벤은 문학에 대해 잃어버린 신비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노년의 아감벤이 강연 속에 남긴 말들은 그리고 책이 된 이 언어들은 내게 신비와 침묵 사이에 만들어진 오솔길을 보여주고 있다. 문맹자를 위해 시를 썼다 말하는 세사르 바예호나 수용소에서 모든 지각 능력을 잃어 증언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 글을 썼다고 말하는 프리모 레비를 예로 들었듯이 아감벤 또한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향해 가는 철학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호모 사케르를 읽을 때는 감지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도 그의 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역사를 탐구하는 일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사실상 동일한 행위라면, 작가 역시 하나의 모순된 과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변함없는 자세로 오로지 문학, 불의 상실만을 믿을 줄 알아야 하고 그가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대가를 치러야 가능한 일이지만, 망각의 바닥에서 사라진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빛의 조각들을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p18)

 

마지막으로 그가 학자연한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글로 갈음하며 이 리뷰를 닫아야 할 거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이 되지 않으려면.

 

철학의 말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철학이 어떤 지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일종의 무지에 대한 의식에서, 즉 모든 종류의 앎과 기술의 유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삶과 지식 분야에 느닷없이 생기를 불어넣고 스스로의 한계와 충돌하도록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강렬함이다. 철학이란 모든 지식과 학문 세계에 공표된 하나의 예외 상태를 말한다. 이 예외 상태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진실이란 이름이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한 명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진실은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이다. 우리는 진실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단지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p109)

 

 

※ 조르조 아감벤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2012년 12월 로마의 중소 출판사 도서 박람회에서)와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2010년 베네치아의 치니 재단에서) 강연 내용은 사사키 아타루 저작과 공통된 관점(독서의 불가능성, 문맹에 대한 고찰과 기독교로부터의 책의 탄생과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noesis, 생각하는 행위)는 생각의 생각이다(noeseos noesis)". ㅡ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
"지성은 잠재력 외에는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지성이 생각하기 이전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ㅡ 아리스토텔레스《영혼에 관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들의 예들이 대부분 인간의 기술과 지식의 영역에서(문법, 음악, 건축, 의학 등등) 발견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인간이 ‘능력’의 차원에서, 즉 능력과 무능력의 차원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원천적인 차원에서 무능력과 일치한다. 인간이 무언가로 존재한다거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축적인 차원에서 그것의 결핍 상태와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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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1-27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유는 메타-씽킹이군요. ^^

AgalmA 2017-01-31 09:59   좋아요 2 | URL
조르조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한 이중적 해석‘을 재미나게 풀어놓고 있죠. <형이상학>에서는 사유를 하나의 행위로, <영혼에 관하여>에서는 하나의 잠재력으로 말하고 있는데,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드러남으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야 할 텐데요. 드러난 사유 활동을 통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자유롭고 무위적인 잠재력도 같이 발견됩니다.
이건 질베르 시몽동의 표현과 맞닿지 않나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두 단계의 존재, 즉 무분별하고 무인칭적인 요소와 개인적이고 사적인 요소 사이의 변증법에서 기인하는 두 단계의 존재˝.
무인칭적인 잠재력과 개인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상태, 이 두 상태의 끝없는 순환과 공존의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감벤은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타계(1925년 11월 19일 - 2017년 1월 9일)

 

《액체근대》를 읽고 사회학의 쓸모를 강하게 느꼈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그때도 지금 쯤이었네요ㅜㅜ. 리뷰를 2015년 1월 10일에 썼습니다. 하나하나 온통 옮겨 적었던 시간. http://blog.aladin.co.kr/durepos/7326256

제게 더 넓고 깊은 공부의 장을 열어주신 지그문트 바우만 선생님의 명복을 깊이 빕니다.

우리에게 남기신 가르침이 이토록 많은데 어찌 다 따라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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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7-01-1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ㅜㅜ 험할 때 툭툭 사유를 털고 갈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요. 마음의 빚을 많이 안고 있어요.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ㅜㅜ

표맥(漂麥) 2017-01-11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그문트 바우만 선생님의 책을 몇 권 읽었지요... 상당히 감명깊이 읽었는데...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에 가셨겠지요... 음...

cyrus 2017-01-11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바우만의 진가를 처음 알게 된 책이었습니다. 군 제대 이후 독서 인생에서 많은 영향을 준 책들 중의 한 권입니다. 그의 이름이 미래의 사회 교과서에 소개되었으면 좋겠어요.

AgalmA 2017-01-13 06:00   좋아요 1 | URL
바우만을 처음 접하게 된 책에 대해서 누구나 인상적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요. 네, 좀더 보편적으로 알려져서 사회 변화에 큰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7-01-11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3 0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6: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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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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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6: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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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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