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
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 에코리브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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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캐슬과 교육 불평등,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

요즘 SKY캐슬이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높은 교육열을 특징으로 하는 교육공화국, 입시공화국인 것을 여러분들도 쉽게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최근 통계들도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장학재단의 통계에 의하면 소위 명문대로 갈수록 저소득층이 현격히 줄어든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통계청에서 발표한 가계지출 항목을 보면 소득분위에 따라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출 차이를 보이는 항목은 교육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교육 불평등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경제력에서 차이가 시작될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미국의 사회학자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입니다.

전통사회에서의 개인의 지위는 세습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신분과 혈통에 의해 사회에서의 위치가 정당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양반자식은 다시 양반이 되고, 노비의 자식은 노비가 되는 것이었고, 이 과정 자체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위에 싹튼 근대사회가 도래하면서 혈통에 의한 지위의 세습은 정당함을 얻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근대적 평가체계, 그리고 교육제도입니다. 근대 교육제도 위에서 우수함을 평가받은 사람들은 전통사회에서의 귀족과 같이 정당함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근대 교육제도는, 학교는, 교육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현대사회에서는 정말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우수한 교육적 성과를 얻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이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입니다. 아네트 라루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것은 바로 내가 노력만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그 신화입니다. 라루는 이 책에서의 연구를 통해 노력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부모의 지위가 자식의 지위로 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경험적으로 증명합니다.

라루는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경제력이 좋은 중산층 가정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저임금 노동을 하거나 기초생활수급이 아니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는 저임금 노동자·빈곤층 가정의 아이들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합니다. 중산층 가정은 집중양육 방식을 통해서 자녀의 재능과 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지원하고 노력하고, 다양한 교육활동에 참여합니다. 반면 저임금노동자·빈곤층 가정에서는 자연적 성장, 즉 자녀의 교육과 능력에 관심을 갖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 가정 배경이 다른 아이들의 일상생활은 어떻게 다른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떻게 다른지, 이들은 학교교육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이 있는 책이 바로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입니다. 책 자체가 어렵지 않고, 번역자체도 전문번역가가 참여해서 매끄럽게 되어 가독성이 좋습니다. 교육과 교육불평등에 관해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꼭 보실만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서평은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 링크는 댓글에 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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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윤동주 전집
윤동주 지음, 홍장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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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첫사랑, 윤동주와 그에 관한 책들.

강하늘이 주연한 영화 <동주>가 나온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시인들의 마음 속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27세의 청년 윤동주가 있습니다. 백석이 시인들의 시인이라면 윤동주는 모든 시인들의 첫사랑인, 그런 시인일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윤동주의 삶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윤동주에 관한 책들을 소개합니다. 한 권은 홍장학 선생님이 엮은 <정본 윤동주 전집>이고, 한 권은 윤동주의 삶과 윤동주의 글들을 소개하고 있는 김응교 선생님의 <처럼>입니다.

윤동주의 시는 당시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가 어렵게 발굴됐습니다. 윤동주 사후에 윤동주의 지인이 출판한 책이 윤동주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그렇습니다. 이런 까닭에 아쉽게도 시중에 나온 많은 윤동주 시집들이나 초판본은 윤동주 시 원본이 손상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오류들을 잡아내고, 윤동주가 쓴 그대로를 옮겨놓은 책이 바로 <정본 윤동주 전집>입니다. 기존 시집들에 크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시인은 시의 사소한 배열자체를 고민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그 사소한 감각까지 느끼기를 원하시는 분께서는 이 책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다음 책은 숙명여대 국문학과 교수인 김응교 선생님의 <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입니다. 이 책은 우선 믿을 수 있는 윤동주 전문가 중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응교 선생님(사진에 무한도전에도 출연하신)이 쓰셨고 그래서 내용자체가 정확하면서도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 사진 자료도 많고 어렵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윤동주의 일생을 다루는 평전이면서 동시에 그의 글들을 깊게, 그리고 쉽게 설명하는 좋은 책입니다. 윤동주의 글들을 풍성하게 맛보고 싶은 분들께서는 꼭 함께 읽으시면 좋은 책입니다. 이외에도 송우혜 선생님이 쓰신 <윤동주 평전>도 윤동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들을 통해서,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나라를 슬퍼한 일도 없었지만 항상 괴로웠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맑았던 청년,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고 슬픔을 안고 살아갔음에도 반짝이고 생동감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고자 했던 윤동주의 삶과 그의 작품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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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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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썸과 사랑 사이에서

심리학자,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일상생활의 여러 부문들이 소유와 존재의 양식을 가지고 있음을 분석합니다. 프롬이 처음으로 다루는 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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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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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랑의 항목에서 프롬이 처음 언급하는 말입니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오해와 달리 엄밀히 말해 사랑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일 뿐이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일 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능동적인 것, 하나의 능동성입니다. 그것은 강아지나 사람, 나무 등을 존중하고 그에 반응하며, 그 대상을 알아가고 긍정하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그 대상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에게 사랑은 가질 수 있는 것,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시대에 "넌 내 거야"라는 말은 곧 "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소유로 할 때에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어버리고, 이에 따라 사랑의 대상은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소유적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프롬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대상을 목 조르고 질식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프롬은 사랑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중에 구애(求愛)기간, 쉽게 말해 '썸' 탈 때의 사랑과 결혼 후의 사랑에 대한 분석은 재미있습니다. 구애기간, 즉 썸탈 때 사람들은 아직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는 서로의 흥미를 끌고 매력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상대방을 자극하려고 애씁니다. 서로가 서로는 소유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서로는 '존재'한다. 상대방이 상대방 자체로 나의 매력을 느끼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구애의 기간이 끝난 다음, 결혼에 접어들 때, 또는 너무나 독점적인 연애가 시작될 때 사랑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결혼이란 보통 계약이고 내용은 상대방의 육체와 감정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거나 독점적인 깊은 연애 관계가 될 때에 흔히 빠지는 것은 상대방이 이미 나의 '소유'라는 착각입니다.

이런 까닭에 더이상 서로는 서로의 존재를 자극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랑스러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권태'를 느끼고 그로 인해 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실망은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변했다고 생각하고 변화하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를 찾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사랑'만을 가지고 싶다는 고귀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고귀한 사랑은 '상대방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다시 말해 '상대방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혼의 당사자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허탈한 마음을 채웁니다. 돈이나 좋은 집, 자식의 성적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으로 시작된 남녀의 연애는 이기주의가 뭉쳐진 하나의 조합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소유지향적인 삶과 존재지향적인 삶을 분석하고 대비시키면서, 존재지향적인 삶을 촉구하는 책입니다. 프롬의 책은 고전 중에는 쉬운 편에 속합니다. 그래도 독서가 익숙치 않은 분들께서는 박찬국 선생님이 지은 소개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차경아 번역의 <소유냐 존재냐>에 해제가 실려있기도 해서 그것을 보고 본문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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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유기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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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성에 관한 소고

현재 청년세대에게 꽤 영항력있는 목회자, 유기성의 책을 봤다. 왜 사람들이 유기성에게 열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마 10만 부는 팔렸을 것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종교지도자의 유형을 다양하게 나누는데, 그중에는 제사장(사제)형 지도자와 예언자(선지자)형 유형이 있다. 제사장적 종교인은 인간의 운명을 신에게 위탁함으로써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지지와 위로를 제공하며, 신과의 관계를 통해 안전과 확신을 그리고 세속의 가치규범을 성화시키고, 사회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반면 예언자형 종교지도자는 기존 사회의 제도화된 가치 규범의 진위를 추적해서 그 가치규범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가치규범을 제시한다.

언뜻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은 세속적인 자아인 '나'를 죽이고 새로운 규범인 '예수'를 제시하는 예언자적 유형의 책으로 느껴지고, 저자인 유기성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에서는 세속적 평가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유기성은 예수로 살게되면, 세속적 가치가 전복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책의 전체 내용을 보면 주장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유기성은 예수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기성이 말하는 '예수로 사는 사람'은 그가 말하는 여러 예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유기성이 말하는 예수로 살아서 성공한 삶의 전형들, 결과는 결국 세속적 성공들과 다름이 없다. 예를 들어 나를 죽이고 예수로 살기로 하는 사람은 병이 들면 병이 낫고, 돈이 없으면 사람은 돈이 생기고, 사고를 당하면 결국 극복한다. 또 예수로 살기로 하면 교회는 무조건 부흥한다. 교인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다시 코린토스를 방문하기 전 바울은 이미 코린토스에 퍼진 자신의 적대자들의 비방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향한 비방에 논박하고, 자신의 사도적 정당성을 변호하고 옹호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바울은 본인이 구태여 자랑을 해야한다면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한 뒤, 코린토스에 두 번째 편지를 쓰기까지 약 20년이 가까운 시간을 예수운동에 투신했던 바울은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적대자를 물리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일명 '바보연설'을 시작한다(고후 11:16 이하).

그는 자신의 약함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고후 12장). 그는 기존의 가치체계에서 자랑이 될 수 있는 '강함'이 아닌 병듦, 약점, 연약함, 곤란, 궁핍을 자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기성의 예수로 사는 삶에는 이런 가치의 전복은 실질적으로 없다. 종교적 성공이 세속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예화가 압도적이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중에 병들어 죽고, 가난하게 살다 죽고, 사고 당해 죽고, 궁핍하게 사는 삶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유기성의 책이 얘기하는 예수로 사는 삶은 심각하게 추상적이다. 그러니까 자아를 죽이고 예수로 살자. 기도하자. 말씀 읽자. 이것이 이 230여 페이지 책의 전부이다. 이런 추상적인 원리는 결국 예수로 사는 삶의 구체적인 수준을 개인의 선택에 맡기게 된다. 본인이 믿는대로 사는 것이 곧 예수로 사는 삶으로 긍정된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면 종종 교회에서 두 사람이 연애를 결정할 때, 기도해보고 사귀는 걸 결정한다고 할 때가 있다. 흥미로운 건 둘이 똑같은 신에게 기도했음에도, 서로 다른 결론을 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랑 사귀라는 마음을 주셨어", "나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런 웃긴 일이 종종 발생한다. 결국 자기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추상수준에서 자아를 죽이고 예수로 살자는 말의 실질적 의미는 그냥 너 살고 싶은대로 살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기성이 잘못된 삶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곤, 싸움, 욕심, 음란함 정도가 없는 삶인데 이는 세속적 윤리와 별다를 것이 없다.

막스 베버는 불평등한 세상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신이 정당한지 묻는 신정론이 감당한다고 지적하는데, 유기성도 이와 같다. 그는 현실이 불공평하고 어렵더라도 결국 죽으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현세에서의 불평등과 고생이 천국에서 더 크게 보상 받는다고도 이야기한다. 전형적인 종교적 수사인 것이다.

그리고 유기성은 믿음으로 살게되면, 결국 열등감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이는 사실 자기계발담론과 매우 유사하다. 긍정심리학이나, 자기계발의 원조격인 미움받을 용기의 아들러 심리학과 다름 없는 예수로 사는 삶인 것이다.

결국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서 말하는 '예수로 사는 사람'은 신앙으로도 세속으로도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개인은 자신은 삶과 가치를 전복시키는 불편함 없이도 예수 믿는다는 안심을 얻고 지금껏 살아온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는 그 삶을 응원해준다. 그리고 종교적인 효능감도 얻게 해준다. 환원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람이 아니라 예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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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현상학
단 자하비 지음, 박지영 옮김 / 한길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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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현상학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책이다. 역자 선생님도 전문가이시기에 더욱 신뢰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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