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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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침에 일어나는데 벨소리 2번이나 들어도 일어났다 다시 자고, 어머니 몇번이나 오셔서 겨우 일어났다. 조금 늦은 것 같아 아침을 거르고 갈려다 겨우 끼니만 때우고 지하철을 탔다. 피곤에 쩌든 많은 사람들이 위로해준다. 다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사람은 그나마 잠으로 피로를 풀고 서 있는 사람은 겨우 남은 체력 언제 자리가 빌지 온 힘을 다해 준비한다. 왜 사람은 이렇게 피곤하면서 꾸벅꾸벅 겨우겨우 대충대충 사는듯 마는듯 살아야 할까? 꽤 심각하게 생각하면 살았다. 조금 벌어도 잠 많이 자고 아침도 여유롭게 먹으면서 지하철도 사람없을때 타고 신문도 읽고(지하철 무료일간지 말고) 살면 안될까? 그러나 대답은 뭔가 이유가 있으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살겠지라는 것이었다.

 게으름이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을 구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본능적인 수면욕을 통한 행복을 다른 것들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이 구하는 것이다. 조금 더 잔다는 것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낀 내 자신이 불쌍해 보였다. 여기서 그 동안 읽고 싶었는데 왠지 통속적일 것 같아서 시대영합적인 기독교서적일 것 같아서 망설였던, '게으름'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단순하다. 그래서 더욱 좋은지 모르겠다. 게으름은 죄성이고, 그 게으름 영적이고 육적인 게으름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명료하고 감동적인 글이란 말인가. 이 책에서는 글자글자를 보지 않고 내 자신의 나태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촉매제로써 이미지를 봤다.

 남보다 게으르다는 것은 세상 경쟁에서 지고, 약육강식의 시대에 먹히기 쉬운 좋은 먹이가 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퇴출 1순위의 사람이 되기 싶다. 게으름은 곧장 실력과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자가 게으름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는 세상에서 실력을 쌓아 잘먹고 잘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독자들에게 왜 게으름이 죄가 되고, 게으름이 영적생활에 왜 나쁜 것인지, 쉬운 예화들과 더불어 설명해준다.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다. 없는 이론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탁월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해주는 책도 아니다. 기적을 소개하는 책은 더욱더 아니다. 하지만 오직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20세기가 이념논쟁으로 싸운 캐피탈리즘과 맑시즘의 시대라면, 21세기는 게으르티즘의 시대같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러셀같은 사람이 나와서 게으름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게으름 그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피에르 쌍소가 나와서 느리게 산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만, 게으름은 삶의 여유가 아닌 오히려 속박되고 쫒겨사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면성실을 강요한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기독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고 특히 영적으로 열심히 살아야함은 당연한 것 같다. 근면성실의 목적이 무엇에 있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피곤하기도 하고, 잠처럼 평안한 것에서 나가기도 싫지만, 게으름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람들마다 게으름에 대한 개념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다. 그 중에 나는 게으름은 나쁜 것라고 명확히 말하며 삶에서 내 자신의 말을 실천해 가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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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모색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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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세계적인 지식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노암 촘스키다. 그는 먼저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언어학자로써 큰 공헌을 했다고 하는데 언어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큰 감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언어학자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심리학, 정치학, 철학, 인지과학 등에 영향을 끼친 석학이다. 그의 지식은 한 분야에만 편중된 것이 아닌 통합적인 지식이다. 그리고 그가 지식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그와 상관없는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침묵할 때 그는, 동티모르의 인권유린과 베트남전쟁 반대, 니카라과 내전 개입 반대, 그리고 지금 이라크 전 반대에 누구의 목소리보다 앞장서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교수, 박사님들은 자신의 분야에만 편향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오직 다른 분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정치적인 분야에서 출세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고위관료, 국회의원, 정당인 등에 교수출신, 박사출신 등이 많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지식인의 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어용이론으로 쓰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 학계도 상당히 썩어있고, 그런 물이 고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촘스키 같은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지적인 자극이 되었다.

촘스키의 글을 읽으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이 세계가 어떠한 패턴에서 흘러가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노암 촘스키의 글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로 인한 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 기업에게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때론 그의 글 중에 일제 식민지하의 한국이 일본과 같이 성장을 하기도 했다고 주장하면서 나의 마음을 아쉽게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이라 그가 가진 지식에서 그나마 목소리가 큰 일본경제사학자들의 의견을 무분별하게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치하때 한국의 경제성장이 이뤄졌는지 지금도 많은 논쟁거리라고 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등으로 인해, 식민치하로 인해 받은 우리 민족의 피해는 물적, 인적, 정신적으로 수치로 말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그의 글이 미국을 중심으로한 쿠바, 멕시코 등지로 한정된 것도 그가 가진 지식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본다면 '이익'이라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미국을 영원한 우리의 우방이라고 하는 것일까? 과거 미국이 한국 근대화에 이바지 하고, 해방도 시켜주고, 먹을 것도 주고, 6.25로 부터 지켜주고, 민주주의에 도움을 준 고마운 나라라서 그런 것일까? 어느정도는 맞고 또 어느정도는 틀리다. 그건 그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한 것 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미국인의 냉철한 미국비판도 도리어 보면 엄연한 미국사랑같은 모습같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닌데, 그가 원하는 국가는 지금 미국같은 나라가 아닌데 하는 느낌이다. 미국도 정말 해야할 일이 많은 것 같다. 특히 그가 말한 파수꾼들의 역할이 클 것 같다. 파수꾼처럼 세계화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네트워크 게릴라'즉 우리의 네티즌들이 힘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미 그 힘은 우리도 알고 있다. 앞으로는 왠지 한국이 미국보다 더 민주적인, 사람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 같다.

 끝으로 이 책의 편집 상태가 상당히 불만이었다. 이렇게 좋은 지식인의 글을 동화책처럼 편집해놨다. 억지로 분량채울려고 글자 크기 키우고, 행간늘리는 이러한 행태 비판 받아야한다. 좋은 책을 망쳐놓은 듯하다. 이런 책 사기 정말 싫어진다. 차라리 노암 촘스키의 블로그나 방문해서 그의 따끈 따끈한 글이나 읽어야겠다.
http://blog.zmag.org/t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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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인가? 정부인가?
김승욱 외 지음 / 부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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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경제학에서 가장 주된 논점인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아니 이것이 거의 현대 경제학의 대부분일 수도 있다. 주류경제학에서 케인즈주의 인가 신고전학파인가? 시장인가 정부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평등인가 자유인가? 이 책에서 논하는 것은 이렇게 다양하게 나눠질 수 있다. 이것을 두 가지 대립이라고 가정했다. 물론 사회를 2분법적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 수많은 변수들과 수없이 많은 다른 예외사항들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를 옹호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사상을 옹호하기도 한다. 유시민처럼 말이다. 누구는 어떤 사항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어떤 사항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세상을 2분법적으로 특히 경제정책을 나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련지 그것 또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학문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조금 유사하게라도 정의해서 사용하려고 하니 문제가 많지만 경제학자들의 강한 무기 '가정'을 사용해 보자! 즉 우리 사회는 2가지로 나눌 수 있다라는 가정하에 시작해보자.

경제학원론 책중에 3인공저라고 흔히 부르는 책이있다. 방대한 양과 그리고 빠짐없이 꼼꼼한 개념정리와 서비스로 연습문제까지 들어있는 책이다. 누구는 이 책을 보고 경제학을 싫어지게 만드는 책이라고 하고, 누구는 이 책의 명확한 개념들에 반했다고 한다. 이 책이 조금 그와 비슷한 모습이 있어 보인다. 4인공저 저술이다. 그리고 책 규모에 비해 방대한 자료들과 내용들을 제시한다. 각 파트 마지막마다 도표로 간결하게 요약도 서비스로 넣어준다. 때로는 이렇게 방대한 양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 간결성과 현실정책과의 비교를 통해서 2가지 시점에서 보여준다. 신문보면 나오는 많은 경제, 사회 문제에 관한 통찰력을 늘려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신문도 어떻게 보면 편향적으로 자신의 색채에만 맞게 쓰곤 하지만 그에 반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2시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해주지만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하지 않는 아주 중립적인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황희정승 일화가 떠 올랐다. 집안의 다툼에 누가 옳으냐는 말에 '개똥이도 옳고, 소똥이도 옳고, 당신도 옳고.'라는 예화다. 그 말처럼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에게 이제 자신도 왜 그런 정책이 나오는지, 또는 당대 사회문제에 대해서 읽을 수 있는 눈을 길러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해야한다. 선택하지 않고 모두다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선택하는 기준은 당신이 무엇을 더 가치있게 두느냐에 달려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명확하지가 않다. 절대로 옳은 것이 없다. 다만 가정할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많은 사실들을 더 알게 되었지만 판단을 내리지 않고 우리에게 판단의 몫을 돌린 저자들이 조금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할까 생각해봤다. 현실경제를 조금더 이해하기 위한 경제학도나 경제학을 교양으로 더 쌓고자 하는 사람이 좋을 듯 싶다. 경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은 다면 다소 어렵고 지루할 듯 싶다. 경제도 미술품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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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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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였다. 그 책을 통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인간을 만났다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나에게도 살아간다는 것의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번역한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책에서도 체제는 다르지만 역시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이었고, 번역자를 보고 그 책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최초의 책이었다. 그리고 '사람아 아 사람아'랑 비슷한 말투의 이 책을 통해서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서 세상을 자유롭게 거닐때 그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말하면서 그의 여행기, 아니 '여행지에서의 사색'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그의 사색의 편지를 가족에게 보내주었다면 이번에는 중앙일보에 보내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내 어찌 그분의 큰 뜻을 비판하겠는가. 하지만 출판사가 돌베개라는 친근한 곳에서 발행함이 감사했다. 중앙일보에서 이 책이 나왔다면 그를 좋아하는 한 독자로서 서운했을 것이다.

갇혀본 자만이 그 자유를 알고 진리에 목마른 자만이 진리가 얼마나 귀한지 아는 것처럼 그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어렵지만 그는 희망을 볼 수 있고, 우직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그는 편지를 보낸다. 중앙일보가 아닌 이 글을 읽는 젋은 당신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한다. 때로는 허준에게 자신의 늙어 죽은 몸을 맞긴 유의태처럼 자신을 밟고 가라고, 때로는 자연속에서 기품을 잃지 않고 언제나 동일한 나무들처럼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었던 어느 여자후배는 허난설헌의 무덤을 보고 쓴 글이 가장 감명깊었다고 한다. 얼마전 강릉 경포 초당동에 가서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에 다녀왔다.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앞에는 경포호수가 있고 뒤에는 소나무들이 있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집안도 소박했다. 그 집안을 채우는 것은 지금 집안에 적어놓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시처럼 그들의 학문과 인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내가 아는 허난설헌은 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까지 그의 글이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지식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찍 죽었다고 해서 나는 미인박명과 천재박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이야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어선 그녀가 재주를 다 펴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쉬움보다는 한 여인으로서, 여자로 태어나서 겪은 그녀가 애설프게 느껴졌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그녀에게 이러한 고통이 있었던 것일까? 시대를 잘못타고나서, 여자이기때문에. 신사임당처럼 현모양처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자가 나서서 집안이 망한 것일까? 그리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자후배에게는 허난설헌이 어떻게 다가왔던 것일까? 허난설헌이 너무 똑똑했기때문에 그녀의 남편은 부담스러워 그녀를 괴롭히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것일까? 그녀의 짧은 인생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었던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힘들지만 이겨내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 없는 현실이 가슴이 아프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여성들을 보면 허난설헌은 부러워할 것 같다. 나 또한 이 땅의 허난설헌들이 비극이 아닌 해비엔딩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꿔 본다.

세상에는 많은 사색이 있다. 사람들은 올바른 사색의 길로 독서와 여행을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에게 여행은 사람을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나도 여행을 갔지만 깊은 사색보다는 그곳에서 경치구경과 경험에 한정된 사색을 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한 시간이었지만 값되게 쓰지 못한 아쉬운 시간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이런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다듬어지지 않았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순수하고 희망찬 그런 생각을 하는 그런 여행을 가고 싶다. 푸른 경치도 좋고, 파란 하늘과 바다도 좋고, 황금 들판도 좋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자연이 있고, 사람이 주인공인 그곳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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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 -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
피터 퓨 지음 / 이두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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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인즈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최근 주류경제학에서 신고전주의학파와 케인즈학파로 나눌만큼 그의 이름은 한 학파를 대변하고, 오늘날 그는 자본주의를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런 그에 모습은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어서 알고 싶지 않아도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단편적인 한 부분이었다. 이 만화책같은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시리즈를 통해서 그의 인생을 쉽고 간결하지만 전체적으로 깊이있게 볼 수 있었다. 만화책도 이런 만화책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멋나라 이웃나라처럼 지식을 부담스럼지 않게 전달해주는 책같다. 이 시리즈가 꽤 있는데 그것도 시간 되면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케인즈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똘똘한 아버지와 역시 똘똘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의 제자였고, 또 케임브리지에서 상급 윤리학자라 칭호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케임브리지 시장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풍부한 재산과, 부모님께 물려받은 똘똘한 머리, 그리고 풍부한 문화자본 등 아주 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케인즈 또한 수학에 탁월하고 국왕장학생으로 선발되 이튼 스쿨에도 들어가는 등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풍부한 영어구사력까지 가졌다고 한다. 그의 부모님이 대단한 독서가였다고 한다. 역시 훌륭한 사람에게 성공비결중 독서는 끊이지 않는가보다.

 이러한 탁월한 케인즈는 공부벌레로 얽메이지도 않고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면서 사교클럽에서 인기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야 말로 누가 보기에 부러운 삶이다. 공부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하고 케인즈는 정말 천재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윤리적으로 당시 범죄였던 동성애를 하였다고 한다. 천재들중에 의외로 동성애자들이 많은 것같다. 요즘은 성적소수자라는 용어도 쓰는데 케인즈같은 경우는 성적소수라기 보다는 무식한 이성보다는 똘똘한 동성에게서 더 사랑을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이성에게서 채우는 것이 아닌 자신과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동성에게서 호감을 갖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도 여성 발레리나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꽤 재미있게 살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성적소수자라고 옹호해줘야 하는지 참 의문이다. 동성애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로 어쩔수 없이 동성을 사랑하게 된다고 내세우는데 그것도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때문에 전체 동성애에 대한 비판을 없앨수는 없을 것 같다.

 케인즈는 그 동안의 화폐주의(고전주의)에서 벗어나 시장실패를 깨닫고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는 주장을 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주장덕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공산주의자라고까지 비판받은 케인즈가 자본주의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충실한 부유층이었고, 대공황과 더불어 잃어버린 재산도 미국경제가 그의 주장의 채용으로 살아나듯이 그의 재산도 같이 살아났다. 여기서 사람들은 또 부러워 한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경제학자라고 극찬을 하곤한다. 그러나 어떤 정책을 쓸지 아는데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케인즈는 대공황에서 자본주의를 구원한 구원투수뿐만 아니라 1970년까지 전세계 자본주의국가들의 정책으로 그의 주장이 채용돼 호황을 이루고 완전고용을 목표로하는 그의 주장 덕분에 사회적으로도 윤택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후 신고전주의학파들 주장이 전세계를 강타하면서 실업의 공포가 다가오고 오로지 시장질서만을 강조하기때문에 약자들이 고통받게 되었다.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에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국가의 고용인들에겐 밥그릇(일자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케인즈는 너무 좋게 과장되었다. 그는 윤리학자도 아니고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옳은 경제를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이런 의도하지 않은 정책으로 마치 시장의 질서에서 의도하지 않은 각 개인의 활동이 사회적 선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되었다. 지금도 세계는 케인즈의 정부냐 고전주의학파의 시장이냐를 두고 논쟁중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이 시기에 케인즈라면 어떤 주장을 할지 생각해 보는 것 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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