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 하나님께로 가는 거침없는 믿음의 길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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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학을 좋아했다. 수학에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답이 있다. 수학 문제의 답과 같이 나는 세상 일에 있어서도 정답을 원했다. 어느 대학을 갈 건지, 어떤 직장을 가질 것인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에서부터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지, 택시를 탈 것인지 버스를 탈 것인지, 몇 시에 집에 돌아갈 것이며 언제 잘 것인지 등 하루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나는 정답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정답 여부를 알 수 없이 단지 선택을 할 뿐이었다. 때때로, 선택이라는 자유로부터 도망갈 수 있기를 바랬다. 왜냐면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히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면서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 안에는 내 선택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과 불안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정답을 알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성과 판단력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모든 발생 가능한 일을 예측하지 못한다. 내 결정의 영향력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선택권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이라면 정답을 아실 것이다. 나는 기도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에서 나의 많은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결재를 내려주시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내 스스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벼랑 끝까지 몰려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나온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했다. 분명히 그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기도의 열을 올렸다. 나는 철저하게 나의 최선을 다해 기도했다. 하지만, 나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나는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주춤거리게 되었다. 누구는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데 나는 나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기도에도 응답의 조짐조차 받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랜 시간 많은 부분을 생각했고 하나님과 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와중에 내 인생은 여전히 부족한 나의 결재를 받으며 내가 원하는 멋진 모습과는 많은 거리를 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 책, 브래넌 매닝의 '신뢰'를 읽으며 나는 또 다시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내 삶이 불완전한 이유, 나의 모습이 내가 상상하는 모습과 다른 이유, 좌절된 기도의 이유,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 고통과 아픔의 이유 등에 대해 수긍할 만한 대답을 얻고 싶었다.

처음에는 나는 신나서 책을 읽었다. 내가 이제껏 찾았던 이유들과 흡사한 대답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 그 흐름은 끊기기 시작했다. 내 상식과 이해를 넘어선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책의 흐름을 좀 더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논리의 흐름과 매닝이 내 머릿속에 그려놓는 수많은 이미지들로 인해서 놀랐고, 즐거웠고, 마음 깊이 감동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책을 훑어보고 난 후 나는 그의 통찰력과 지혜 앞에서 잠잠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내가 조각조각 알고 있던 대답들이 하나의 흐름 속에 이어졌다. 나는 매닝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책을 거듭 읽을수록 나의 대답의 깊이 없음과 단편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의문이 대상이었던 고통의 문제, 한동안 나의 기도제목이었던 '가봇(주님의 영광)'의 가치, 예술적 작품과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대한 존재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 기도 응답의 하나님의 주체성, 겸손의 방법,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민감함, 가차없는 신뢰를 가능하게 하는 법 등이 개별적인 진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커다란 진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더불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뢰의 중력장’ 안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삶의 난제들이 해결 궤도를 찾아 질서있게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작은 책 한 권에 수많은 문제를 다 풀어 넣었을까? 까불거리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나는 'Ruthless Trust'라는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나는 처음에 이 제목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Ruthless'라는 단어는 로마서 1장에 나온 타락한 사람들의 최악 정점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신뢰(Trust)는 기독교 최고의 가치임에 분명한다. '연민없는 신뢰' 이 말 자체가 모순적인 말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 의문점이 풀리는데 연민없는 신뢰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의미한다. 그 두 단어의 조합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끊임없는 자기 연민에서 나온 것임을 그리고 나의 시선이 내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고통과 보잘것없는 현재 모습에 대한 자기 연민, 좌절된 기도에 대한 자기 연민, 성장기를 지나 점차로 나이 들어 가는 나의 모습에 대한 연민, 경제적 능력의 부족함에 대한 자기 연민, 그 모든 나에 대한 연민의 시선은 신뢰의 장애물이었다.


나 자신의 연민으로 인한 내부 시선의 시간을 제한하고 하나님을 향한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결정적 단어가 바로 이 단어 'Ruthless Trust'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앞에서, 처절한 실패와 좌절 앞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앞에서, 나는 내게 이 단어로 말을 걸 것이다. 그리고, 떨리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싱가폴에 선교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싱가폴 대학에서 한 학생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가 내게 "당신은 Brainwash 당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 뜻을 물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두뇌를 어떤 특정 지식으로 자꾸 씻어 내려서 그 지식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단지 그 지식을 믿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제서야 그 말이 '세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7년 정도 지난 일인데 나는 아직도 그 단어 'Brainwash'가 가끔 생각난다. 세상의 가치관과 제한적인 지식, 손상된 의로움으로 나는 물들어 가고 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우주의 CEO다. 선과 악은 내가 판단하고 응징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모든 것은 내 통제 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거침없이 살아가다가 때때로 내게 'Brainwash'가 필요함을 느낀다. 나 자신을 복잡하게 만드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가치관, 모든 신비의 가능성을 말살시켜버리는 유물론적 세계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하는 자본주의 사상에서 내 삶을 단순하고 겸손하며 깨끗하게 해 줄 정신적인 청결화 작업이 필요함을 느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분명 'Brainwash'의 경험을 했다. 편견과 선입관, 잘못된 인식과 오해의 많은 부분을 씻겨내고 단편적 이해와 깨달음의 조각들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청결화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안다. 살면서 죽을 때까지 사는 방법을 배우고, 삶의 문제에 대한 정답들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종종 '브래넌 매닝'의 '신뢰'와 같은 책을 다시금 만나는 행운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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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
칼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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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무의식 세계의 개척자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는 사나운 용과 질퍽질퍽한 늪지대 표시가 대부분이다. 분명 의미가 있는 곳일지는 몰라도 별로 내키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융이 그려낸 무의식 세계의 지도인 이 책은 내게는 '보물 지도'처럼 보였다. 대개의 보물 지도가 그러하듯이 이 지도도 신비스러운 문자와 수수께끼로 뒤덮여 있다. 무의식 세계는 미지의 세계이며 극도로 위험하고 이해하기 힘든 곳이지만 그 위험과 고생의 경험을 한 방에 날려버릴만한 눈부신 보물의 존재를 융은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융은 프로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단지 융을 집단 무의식의 창시자로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이유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마 그의 책이 워낙 난해한 것이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몇 번 그를 이해해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단지 문자를 읽어내는데 만족했을뿐 그의 사상의 기반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 융을 읽는데 큰 실마리를 제공하였고 나는 이 비밀의 문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먼저, 집단 무의식의 논리적 근거를 알게 되었는데 그의 과학하는 방법이 놀랍고 대담하다고 느꼈다. 융은 인간 육체의 진화론적 관점을 인간의 정신의 영역으로 가지고 왔다. 인간의 정신 역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상의 형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천적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물의 본능과도 같은 선천적 의식이고 그것을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작은 곤충까지도 본능에 의한 이미 습득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인간만이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논리적 모순이라는 그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즉, 집단적 무의식이 혹은 선조들의 지식과 정신이 인간에게도 정신적인 본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할 '절박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종교를 현실에서 분리해냈지만 결론적으로 더 못한 결과를 이끌어 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어떤 것이든지 가능하다라고 생각하며 미지의 세계를 인간의 삶에서 분리해낸 결과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현대 사회처럼 인간의 소유물과 소비행위가 인간 자체를 규명하게 된 시대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미개인들이나 원시인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신에 불과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삶과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원시인들이 더 풍요롭고 가치있게 인생을 영위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존재적 의미 상실은 분명 생명 현상이 지니는 복잡한 속성을 무시해버린 태도에 기인한다. 


"융 박사가 생명 현상이 지니는 복잡한 속성을 존중한 것은 그러한 현상 자체가 그에게는 신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생명의 현상이라는 것은,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설명이 끝난> 현실은 결코 아니었다. " - p.311


프로이트에 의해서 무의식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책을 통해 나는 무의식을 존중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왜 수많은 신화가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한 개인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지 왜 화가들은 그토록 이상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심취하게 되는지 단서를 얻게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의 영역을 넓혀주거나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내적 성장에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성장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우리는 조각을 맞추어 나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건이나 사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하여 의미있는 삶을 이루기 위한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신중하게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융이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그의 무의식의 영향이었다. 아마도, 이 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면 많은 여행자들이 인간 무의식의 세계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무의식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이 복잡한 현실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 미지의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지도는 인생을 진지하고 가치있게 살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한 융의 무의식에 감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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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박사 2004-10-1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재미있는 책이었음.... Thanks for comment. ^^

심천 2006-11-2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비밀의 내용을 담은 것처럼 흥미를 끄는 책같아요. 담아갑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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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이 몇 권이나 팔렸을까? 아마 전세계적으로 몇 백만권 정도  팔렸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이제서야 읽어보았다. 사실, 안 읽어봐도 거의 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었으나 보통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괜한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기웃거리다가 까치발을 딛고 훔쳐보게 된다. 그러나 보통 그렇게 보고 난 후엔 '아... 저거 별거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모여있었지'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곤 한다.


이 책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다. 예상대로... 재밌으면 짧아서 아쉬운 느낌이 들텐데 그렇지도 않다.우화 속에 엄청난 비유가 숨겨져 있지도 않다. 함축적이고 예리한 풍자도 없다. 우화라기 보다는 우화의 탈을 쓴 교훈서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저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단순하다. 치즈는 옮겨지게 마련이고 그것을 준비하고 그것에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즉, 변화에 민감하고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아마, 다른 주제를 골라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책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려고 했으면 낭패다. 실상 독서란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럴 때도 많이 있지만... 궁극적인 독서의 목적은 내적 성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에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지식이 교만하게 한다면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지식은 구원을 베풀 수 없다. 아는 것이 힘이기는 하지만 아는 것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20세기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독서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석학 피터 드러커는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생각하게 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책의 가치를 단지 눈에 보이는 이야기 그 자체로 매겨서는 안 될 것이다. 친절하게 3장에서는 토론하는 예시까지 보여주었는데, 바로 저자의 목적은 이 우화를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대로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은 잘못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누가 치즈를 옮겼는지 나와 있지 않다. 제목만 보면 그 '누구'가 나올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왜 치즈를 찾아야 하는지도 안 나와 있다. 단지, 누군가 치즈를 옮겼고, 우리에겐 치즈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혹시 물음표가 없이 'Who moved my cheese.(누군가가 내 치즈를 옮겼다.)' 이렇게 나왔으면 낫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명 치즈를 가져간 존재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기 쉬웠을 것 같다. 아마도 저자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래도 오해를 받기 쉬운 제목이라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여튼 각자에겐 저마다의 치즈가 있을 것이다. 돈일수도 있고, 물질적이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다. 치즈를 찾아다니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세상에는 무소유를 주장하며 세상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이 물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그냥 유유자적 흘러다니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나름대로 멋있기는 하지만, 별로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물론, 끊임없는 소유욕은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있지만, 뭔가 나만의 치즈를 찾으러 열심히 돌아다니는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는 '허'와 함께 빈 창고에 주저앉아버린 '햄'을 머릿속에 남겨두면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변화가 두려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햄이구나'

아마, 십중 팔구는 햄의 자리에서 박차고 나올 것이다. 뭐, 분명 "그래 나 햄이야" 이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나에게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예언자가 한 말을 할 것이다. 이렇게...

"You can ch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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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박사 2004-10-0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700번째 리뷰 ^^

진주 2004-10-0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어려움 중에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도 큰 것 같아요.
흐흐...우리 아들이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군요. "난 절대 안 옮겼다구용~."

설박사 2004-10-0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ㅜ...감사합니다. 제 리뷰에 코멘트가 거의 여섯달만에 달렸습니다.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네요. ^^
제 아들도 안 옮겼는데...ㅋㅋㅋ 그렇다면... 과연 누가 치즈를 옮겼을까요?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지호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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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카오스 이론은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카오스의 기본적인 개념은 가장 단순한 것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 영향력을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사고관으로 카오스 이론을 세상에 접목시켜본다면 개인의 가장 작은 행동 하나도 인류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에디의 천국' 등과 같은 소설도 이러한 영향력을 받은 것 같다. 카오스의 대표적 사례인 나비 효과는 CF를 통해서도 소개된 바가 있고, 오죽하면 카오스 세탁기라는 것도 있을까?


카오스, 즉 혼돈 이론은 그 이름에서부터 연구자들에게 좌절감을 준다. 그리고 역시나 그 연구 결과도 아직 미미하다. 뉴턴이래로 발전되어온 기계론적, 결정론적 사고관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아마도 혼돈 이론에 의해 거의 붕괴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세상은 복잡해서 알 수 없다.'


물리적 세상이 그렇다면 인간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카오스가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법칙과 규칙을 발견해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책이 바로 그런 노력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카오스는 단순한 예측 불가능성을 설명하지만 격변 가능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p.32-


그래서 저자는 세상의 '격변 가능성'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여기서 '임계상태'라는 것을 정의한다. 임계상태란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조건 사이에서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를 말한다. 안정화된 상태나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격변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풍선안의 나비가 수십만년 날개짓을 해도 풍선안에서는 태풍이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태풍 속의 나비가 영원히 날개짓을 해도 태풍이 사그러드는 일은 없다. 안정화된 상태나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격변의 가능성은 없고 바로 그 중간인 임계상태에서만 격변이 가능하다. 재밌는 사실은 임계상태에서 일어나는 격변은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임계상태에서 일어나는 대표적인 현상으로 모래더미 게임과 지진을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전혀 규칙이 없을 것 같지만 묘한 멱함수 법칙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산불, 도시의 크기, 전쟁의 사망자 수, 심장 박동 패턴, 역사적 사건 등 전혀 규칙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것에서도 이런 법칙이 성립한다.


그런 임계 상태의 법칙을 사회나 역사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멱급수 법칙이 어떤 사건들에 대해서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법칙이 물리적 세계 뿐만이 아니라 인간사, 세상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개개인의 미래는 결정할 수 없어도 인류 역사나 사회라는 큰 틀은 일정한 법칙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지 인류의 미래가 역사와 현재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혼돈 그 자체여서 전혀 알 수 없이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하는가? 과학은 현대 사회에 가장 추종자가 많은 종교라 할 수 있다. 전혀 규칙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곳에서 규칙을 찾아내는 것은 과학자들의 믿음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분명히 규칙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과학계의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 법칙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는 했다. 과학적 물리적 법칙이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렌즈 역할을 해온 것이다. 과학적 발견과 혁명의 영향은 단지 과학의 영역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현대인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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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기회 3C 혁명
강영우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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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박사가 연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직접은 아니고, TV로... 분명히 별 말 안했는데, 그리고 영어도 서투른데 끝나고 나서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강영우 박사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문만 들었는데, 더듬더듬 서투른 영어로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 '어.. 뭐야? 이상한데.'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연설 끝의 박수에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어머니가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서 나에게 사라고 명령(?)하셔서 사게 되었다. 시각 장애인으로서 백악관 정책 차관보가 된 사람이 저자이고 책의 제목이 '도전과 기회'라면 안 읽어도 뻔한 스토리가 아닌가? 책의 제목 밑에 '3C 혁명'이라고 쓰여 있는데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책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내 예상은 빗나갔다. 차라리 '3C혁명'이라는 제목만 가지고 나왔다면 내가 오해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다. 미국의 최고의 공직자 선정 기준인 최고의 능력, 최고의 도덕성, 최고의 전문성을 교육학적으로 Competence(실력), Character(인격), Commitment(헌신)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살 것을 독려하는 책이다.


저자의 환경이나 가지고 있는 조건 때문에 편견 없이 책을 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이 책은 교육학 박사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한 '우리의 자녀들, 후배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가적인 식견을 적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논리적이고 정교해서 빠져나갈 틈이 없는 그런 류의 책이 아니다. 그리고 학술적인 자료나 분석적인 설명도 부족하다. 그러면서도 문체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식의 독자들의 거부감을 줄이는 문체가 아니다. '이거다', '저거다' 이렇게 딱 잘라서 이야기한다. 사실, 그래서 나도 좀 거부감이 있었다. 아마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이 책은 더 큰 거부감을 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슨 토를 달 수 있으랴. 그가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마, 누구보다도 포기할 만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 강영우 박사였을 것이다. 중학교 때 시력을 잃고,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강박사를 포함한 세 명의 고아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 정도면 인생 종친 것이다. 그러한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의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키울 수 있었던 이유가 실력과 인격과 헌신이라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라고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카리스마는 하늘이 내려주시는 능력이 아니다. 바로 강영우 박사의 연설을 보라. 정말 어줍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다. 그의 말 한 마디에 한 마디에 힘과 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이론이 아니라 그의 경험이고 인생이다.


솔직히 나는 잘난 사람들의 글을 잘 안 읽으려 한다. 스스로를 비교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꼭 이런 책을 읽으면 저자의 나이를 유심히 본다. 몇 살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몇 살에 차관보가 되고... 그리고 내 나이를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꼭 이렇게 생각한다. '아... 늦었구나.' 훌륭한 사람들은 뜻도 일찍 세우고 배우기도 일찍 배우고 그러는데, 그래야 성공하는 것 같은데 '나는 늦었네'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작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 생각을 뒤집을 힌트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Compassion', 즉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마음이다. 내가 지금 가장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이 스스로를 작게 느끼고 뒤처진 자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지만, 바로 내가 느끼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강영우 박사. 나는 그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의 카리스마가 부럽다. 말 한 마디에 담겨져 있는 힘을 느끼게 하는 넘치는 카리스마. 인생을 누구보다 진실하게 살아온 그의 정직함이 부럽다. 나도 그의 나이 때 쯤이면 그런 카리스마를 갖게 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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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8 0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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