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만난 하나님 - 세상에 가득한 창조의 증거
리처드 A. 스웬슨 지음, 송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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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때 한참 동안 물리에 빠져 지냈다. 남들 다 입시 준비하는데 나는 하루 종일 물리책을 들여다보고 즐거워하곤 했다. 왜 그렇게 물리가 좋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엉뚱한 대답같지만 F=ma와 같은 단순한 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자연 현상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조화로워보였다. 법칙이 없는 곳 같은 데서 발견되는 법칙을 통해 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비법같은 것을 깨닫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매트릭스 세상을 간파하는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조화 속에서 움직이는 세상이 경이롭고 신기하고 놀라웠다. 마치 멋진 음악이나 영화에 매료되듯이 나는 이 세상이라는 커다란 시스템에 반했다. 내가 늘 보아오고 살아오던 세상이었지만, 물리는 나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었다.

 

스웬슨이 과학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이제는 관심의 대상에서조차 벗어난 물리적 세계에 대해 새롭고 신선한 시선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감을 통한 체험만으로 이 세상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별히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하는 우리 몸에서 외부로 열린 창인 눈은 그 기능이 놀랍기도 하지만 너무 제한적이기도 한다. 우리의 눈은 물체에서 반사되서 나오는 가시광선만을 분별해낼 뿐이다. 세상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다. 스웬슨은 우리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영역 이상에서 과학이 발견해 온 수많은 놀라운 정보를 통해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고 또한 그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스웬슨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의 영역은 실로 방대하다. 소립자 세계, 심장을 비롯해 우리 몸의 내부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기관들, 놀라울 정도의 성능을 보여주는 뇌와 감각 기관, 하나의 세포 속에 존재하는 무한한 정보의 DNA, 에너지와 네가지 힘, 고전 물리 법칙에서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초끈 이론에 이르는 현대 물리의 기본적인 개념, 시공간과 빛의 연관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과 성경, 혹은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스웬슨은 지금까지 과학이 밝혀낸 세상에 대한 경이로운 정보들을 우리에게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이 놀라운 수많은 정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그는 과학과 신앙은 상충하고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스웬슨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니 오히려 과학과 친구가 되십시오. 그 친구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줄 것입니다. " 외과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스웬슨의 이 권면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어떠한 과학의 세계와 영역에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더 넓은 이해의 폭을 제공해준다. 과학은 단순하게 보이던 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복잡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에서 가장 단순한 법칙의 존재를 증명한다. 스웬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며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과학은 우리를 '단순히 그냥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세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고 새로운 정보를 캐내도록 한다. 스웬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하는 이 과학이라는 녀석은 참으로 성가시면서도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과학을 하기에 더 적합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게 되면 과학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닌 아주 확률이 낮은 가능성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종교가 되거나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혹은 아주 상식적인 전제를 뒤집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고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세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에 그러한 마음가짐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스웬슨은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과학자로서 모든 것을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쉽고 친절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과학은 신앙을 말살시킬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다. 오히려 과학은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런 좋은 친구를 외면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을 더 알고 이해하고 싶다면 그리고 더 경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한다면 과학을 놓쳐선 안된다. 그동안 과학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스웬슨을 통해 그 오해를 풀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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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1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에 빠지셨군요. 전 이과계통엔 영 젬병이었는데...이상해요. 지금 중고등학교 공부를 하라고 하면 잘 할 것 같아요. 그 시절엔 지겹고 따분하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데...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기억하겠슴다!^^

설박사 2006-03-1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은 아주 쉽게 쓰여진 책이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한입에 덥석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44
키소 히데오 글 그림, 한수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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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가 만 한 살이 될 즈음에 즐겨 읽던 책이 '사과가 쿵', '달님 안녕' 등이었다. '사과가 쿵'은 책이 정말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한 살도 안 된 아기가 무슨 내용인줄 알고 듣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사과가 쿵'은 아이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사실 그 무언가가 너무 신기해서 책을 읽어주고는 했었다. 그리고 아기가 있는 집에는 모두 '사과가 쿵' 하나 정도는 필수적인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사과가 쿵'을 읽고 있는 사진을 페이퍼에 올렸다. 그 페이퍼를 보고 한 서재지인-조선인님-이 '한입에 덥석'이라는 책을 소개시켜 주었다.


'한입에 덥석'을 처음 봤을 때 그다지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림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내용이 참신하지도 않았다. 아이들 동화책을 보면 사실 어느 정도 스토리가 빤히 보인다. 그 빤한 스토리에서 벗어나는 책은 아주 드물다. 예를 들어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보자. 각종 동물들이 한 마리씩 등장하고 그 동물들이 검피 아저씨에 배에 타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한입에 덥석'도 마찬가지이다. 수박이 나오고 그 수박을 각종 동물들이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게 이야기의 거의 전부이다. 물론, 각종 동물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수박을 먹는다.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다면 우리 아이가 1년 전에 산 이 책을 아직도 가끔 찾아서 읽어달라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요새 말을 좀 하면서 책을 읽는 방식이 조금 바뀜에 따라 나는 이 책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 책을 읽는 방식은 이렇다.

나 : "호리호리 두루미는 한 입에"
아이 :  "쭉"
나 : "불룩불룩 하마는 한 입에"
아이 : "덥석"

나만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같이 책을 주거니 받거니 읽는 것이 참 재미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아이는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대답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글씨는 늦게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나는 글자를 읽고 있지만 아이는 머리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읽는다. 아이는 그림을 보고 내가 읽어주는 말에 듣고 다음말을 생각해서 말한다. 컨텍스트-주위 환경-를 통해 텍스트-내용-를 추론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뇌는 일종의 근육이다. 즉, 쓰면 쓸수록 발달하게 마련인데 글자를 너무 일찍 알아버리면 오히려 두뇌 발달에 해를 끼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글자를 알고 싶어하고 알게 되겠지만 굳이 글자를 일찍 깨우치도록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 입에 덥석은 거의 독보적인 책 중 하나이다. 아이와 함께 읽으면서 아이의 뇌를 자극시켜줄 수 있고 아빠에게 깨우침을 주는 책은 흔치 않다. 이제 막 말하는데 재미가 들려 밤에 자기 전에도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노래부르는 아이가 옆에서 뒹굴거리고 있다면 '한입에 덥석'을 같이 읽어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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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4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박사 2006-01-0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요. ^^

진주 2006-01-1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 축하드려요^^

설박사 2006-01-1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진주님. ^^
 
영혼의 기도
P. T. 포사이스 지음, 이길상 옮김, 유진 피터슨 서문,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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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인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노동이다." 기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실제적 행동이나 경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내일 시험이 있다면 우리는 공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를 해야 하는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기도가 참되고 행복한 삶의 충분조건인가?


기도의 본질을 꽤뚫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이지만 기도에 대한 그다지 이롭지 않은 책이 기도 응답에 관련된 책이다. 일시적으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만 기도보다는 응답에 집중시키게 마련이다. 당연히 응답이 더뎌지거나 없다고 생각되면 기도는 끝이 난다. 물론, 기도는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고 난 후 마음이 심란해지고 부담감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평화만을 원한다면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포사이스의 '영혼의 기도'는 기도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서이자 기도의 특성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균형잡힌 기도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책이다.


포사이스는 먼저 기도의 내면성에 대해 언급한다. 사실 이 부분이 기도가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주된 이유이자 기도가 필요한 가장 절실한 이유이다. 나는 한참 동안 기도의 내면성 부분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동감했고 기도하면서 철저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기도하면서 느끼는 가장 특이한 점은 '내가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나는 기도하기 전에 생각하고 있던 나와 기도하면서 알게되는 나의 모습이 같지 않음을 보게 된다. 기도할 때 나는 하나의 힘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기도하기 전에는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힘이다. 이 힘은 '철저한 자기애'이다. 이 힘은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고 결국은 나와 이웃을 파괴한다. 포사이스는 기도하는 것을 날개를 다는 것으로 비유했는데 내게는 이 자기애라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기도였다. 우리는 기도로써 참된 자아를 얻을 수 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나는 참된 자아를 갖기 전에 이웃과의 진실한 관계도 존재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포사이스는 기도의 내면성을 중심에 두고 다음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인간의 가장 원천적인 본능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세를 '기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설명했고 기도가 단지 내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것으로서 '기도에 따른 도덕적 반응'과 '현실에 충실한 기도'에 대해 살펴본다. 또한 참된 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를 '쉬지 않는 기도'와 '중보하는 기도', '집요한 기도'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각 장별로 내용이 너무 독립적인 경향이 있어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각 장들은 기도가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 이해되는 것을 막아준다. 예를 들어 2장 기도의 자연스러움을 너무 강조하면 사실 기도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은 배제된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포사이스는 7장 집요한 기도에서 전쟁같은 기도에 대해 말한다. 문제를 내는 것도 하나님이지만 그 문제를 풀기를 원하는 것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부딪치고 그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각 장들이 서로를 보충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기도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 기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게 답변을 할 수 없는 정말 신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포사이스는 가장 큰 죄는 기도를 쉬는 죄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비를 모두 밝혀낼 필요는 없지만 그 신비 속에서 살아야할 필요는 절실하다. 예수 그리스도도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 가장 강조한 특성 중에 하나가 바로 '끊임없는 기도'라는 것이었다. 5장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었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헤아려볼 수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쉬지 않는 기도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서 그에게 순종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 이것은 삶과 기도가 분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포사이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릎꿇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경계한다.


유진 피터슨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이 책을 오랜 벗과 동반자로 삼았다고 한다. 기도에 대한 책은 많이 있지만 두고두고 읽을만한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포사이스의 기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영혼의 기도'가 바로 오랫동안 읽고 생각해볼만한 책이다. 기도에 대한 허약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기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기도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하게 이 책을 읽는다면 분명 체할 것이고 이 책은 방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게 될 것이다. 천천히 음미하고 시간을 들여 사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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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제럴드 L. 싯처 지음, 마영례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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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진정한 철야 기도'라고 불렀다. 고등부 교사로 섬기던 2002년, '새생명 축제'라는 집회를 준비하면서 매주 금요일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몇 명의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를 했다. 몇 달 정도 그렇게 기도회를 이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집회 당일 단 한 명의 결실도 맺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입 안이 쓰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정을 다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기미조차도 보여주시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보다는 내게 크게 실망했다.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나의 자격 미달 탓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나름대로 긍정적인 이유들을 찾기는 했지만 기도 응답에 대한 나의 태도는 냉소적으로 변해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었다. 내가 열등한 신자이거나 혹은 부적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침묵하실 때가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내 경험상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실 때보다 침묵하실 때가 더 많았다. 아마, 하나님의 침묵은 나뿐만이 아닌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겪고 있고 궁금해하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아닌 응답일 것이다. 따라서, 응답을 받는 기도 방법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제럴드 싯처 교수의 진지하고도 정직한 질문과 깊은 고민이 담긴 치열한 답변은 기도에 대한 가장 난해한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제럴드 싯처의 책에 항상 가장 중심에 있는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은 바로 그의 아내와 아이와 어머니를 한 순간에 잃게 한 교통 사고이다. 그 사고로 싯처는 홀로 남은 아이 3명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 역시 그 사건으로 싯처는 질문을 시작하고 고민을 이어간다.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문제인가, 그 자신이 문제인가? 나 역시도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였다. 수많은 기도 관련 서적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문제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내 잘못이라는 확인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싯처는 그렇게 간단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싯처는 질문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대답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응답되지 않았을 때 더 심한 절망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때 우리의 감정처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리고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우리의 삶에 훨씬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들도 검토한다. 하나님의 침묵의 근본적 원인이 이기적 욕심, 원한, 의심과 같은 인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왜 끈덕지게 기도해야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제공해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싯처는 마지막으로 기도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기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에 대해 소개한다. 결국 하나님의 거대한 대서사시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도록 거시적 안목을 갖도록 도와 준다.


완벽한 사람의 완전한 기도가 아닌 부족한 사람의 솔직한 기도, 즉 개인의 문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싯처의 제안은 좀 더 용기있고 과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자책감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또한, 싯처는 하나님의 침묵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비 시간일 수도 있고 또는 기도하는 사람을 준비시키는 시간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침묵이지만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 가운데 내가 차지하고 있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변화의 바람이 시작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감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고 계신다는 것은 싯처가 제시하는 성경의 커다란 내러티브를 통해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싯처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 우리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해주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도해야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옛날에 야곱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부르셨던 것처럼 지금 내게도 그렇게 부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기도는 기도로 인해 나타나는 환경적 변화보다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더 큰 중요성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뒹굴며 씨름할 정도의 친밀함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쉬운 기도 응답은 오히려 관계의 소원함을 불러올 수 있다. 하나님의 침묵은 더 가까이 오라는 그의 언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를 한다. "하나님, 나의 마음과 생각, 말과 글과 행동, 내 모든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내 기도는 이처럼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다. 어디에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합니다와 같은 뚜렷한 계획이 없다. 종종 하는 구체적인 기도는 꼭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다. 그러고 보니 나의 수많은 기도 실패 아니 하나님의 침묵이 이렇게 나의 기도를 형성해 놓은 것 같다.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나님의 손에 어떻게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내가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내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하나님의 뒤에 바짝 따라붙기 위해 가까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손을 완전히 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끌려 가기를 바라는 나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의 과정에 있는 모습으로 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기도는 중요하다. 신학자 포사이스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기도한다는 말보다,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응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하나님의 침묵에 올바르게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전체적인 기도의 자세와 태도, 마음가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싯처가 역설했듯이 하나님의 침묵은 그 자체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분명 그것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응답은 아니다. 언젠가 기도자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무대 한 가운데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은 편안한 휴식시간이 될 수 없다. 나는 아주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침묵 속을 거닐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며 다시 한 번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비로소 나는 나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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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자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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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그냥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나니아 나라 이야기 그 여섯번째 이야기 '은의자'를 꼭 읽어봐야 한다. 은의자의 여행 안내자로 끊임없이 비관적이고 재수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퍼들글럼이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퍼들글럼의 이야기는 정말 멋졌다. 나도 순간, 유스터스와 질과 함께 "퍼들글럼 만세"를 외쳤다. 이 극적인 순간은 미리 이야기해주면 재미가 없으니까 직접 확인해보시기를.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지극히 기독교적인 책이라는 것은 여기서도 여러 가지 모습에서 드러난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5권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할 때도 되었다. "아슬란이 직접 나서면 안 되나? 왜 꼭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어려운 일을 시키는 걸까? 제대로 잘 하지도 못 하는데 말이지." 은의자에서도 아슬란은 어린 소녀 질에게 임무를 주지시킨다. 네 가지를 순서대로 해야하는데 질과 그의 일행들은 계속 아슬란의 표시를 놓친다. 그래서 결국 아슬아슬한 순간에 아슬란이 나타나서 도와준다. (헉, 그래서 아슬란인가? ^^) 아마 아슬란은 질, 유스터스, 퍼들글럼이 헤맬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슬란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왜 자주 안 나타나고 급박한 상황에서만 도움을 주는지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여름이었다. 하루는 아내과 아이와 함깨 팥빙수를 같이 먹게 되었다.  우리 아이는 아직 두 돌도 지나지 않은 상태라서 숟가락질을 잘 못한다. 그런데 아내는 아이에게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아이는 팥빙수를 떠먹다가 옷과 테이블에 흘렸다. 그러자, 아내가 "그럴 줄 알았어" 라고 말하며 아이의 얼굴과 손, 옷에 묻은 것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 상황이 흥미로웠다. (내가 이런 식으로 관찰을 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흘릴 줄 알았으면서 왜 숟가락을 쥐어주었을까?


숟가락은 참 중요한 도구이다. 잘 먹고 잘 사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가 성장하고 독립하기 위해서는 꼭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도구이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슬란도 아이들이 성장하고 독립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임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과 독립이 아슬란에게는 더 큰 관심사일지도 모른다. 아슬란이라면 한 방에 해결할 문제 아닌가. 성경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에게 숟가락을 쥐어주는데 사실 숟가락이라기보다 칼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왜냐면 위험하니까. 그것은 '자유의지'라는 칼이다. 결국 인간은 그 칼을 하나님께 들이대다가 쫓겨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자유 의지가 있어야만 인간의 사랑은 고귀해지고 인간의 노동은 숭고해진다. 원해서 하는 사랑,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일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단지, 인간은 호르몬 분비에 의해서 조작되는 화학물질 덩어리, 프로그램된 로보트 혹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유의지라는 것을 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닐까?


퍼들글럼의 태도는 기독교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용기있는 삶을 위해서 꽤 괜찮은 태도인 것 같다. 퍼들글럼이 혼자서 재수없는 소리는 다하지만 또 혼자서 용감한 행동도 다 한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얘기했다. "난 항상 최악의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 다음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오." 그래서 그런지 정말 말도 안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만을 이야기한다. 거의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 태도가 좋은 점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항상 실제 이야기는 최악보다는 나은 상황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더라도 놀라지 않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태도, 아마도 그래서 퍼들글럼이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기독교적인 책이니까 비기독교인들은 읽으면 안 될까? 나는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는 패러독스-모순인 것 같으면서 진리-가 넘치는 종교이다. 그런데 동화책은 아무래도 그게 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분명 성경책으로 보았으면 "말도 안 돼"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무리없이 넘어갈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나니아 나라 이야기들을 읽으면 성경을 표절한 줄거리 때문에 스토리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부분들이 꽤 있다.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도 예측가능하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저것을 언제 우리 아이에게 읽어줄 수 있을까? 나니아와 아슬란, 퍼들글럼을 언제 소개시켜줄 수 있을까? 흠, 우리 아이도 나처럼 퍼들글럼의 매력에 빠져들겠지? ' 우리 아이는 아직 두 돌도 안 되었는데 이런 성급한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부모로서 아이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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