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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ㅣ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이 왜 날 시원하게 하는 거야?” 네 살 된 우리 아들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까?’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응, 바람이 널 사랑하니까.” 대답하고 보니 정말 바람이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가끔은 나의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나를 쓰다듬기도 하고 내가 뒤로 밀려날 정도로 강하게 나를 끌어 안을 때도 있다. 가끔은 쉴새없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 이처럼 바람은 내게 지나치게 적극적이다. 이 정도면 바람이 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바람과 하나님은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점(?)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서 바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뿐만이 아니라 숨, 영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바람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바람을 생각하면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달려 나간다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서 바람의 근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대와 하버드를 졸업한 몽골의 선교사 ‘이용규’, 어쩐지 그의 과거와 현재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보통은 자신의 이력서는 더 좋은 현재의 상황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과거를 책제목처럼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학위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몽골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려놓은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과 재정, 생명과 안전, 경험과 지식, 죄와 판단, 명예와 사역까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어야 할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내려놓음은 몽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이익을 주는 것이겠지만 그에게는 철저한 손해이자 희생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용규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많은 분들이 내가 좋은 학력에서 불구하고 몽골을 가기로 결정한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신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내려놓은 만큼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였다.”
그가 내게 도전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과 몽골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내게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또한 그의 삶은 단지 착한 사람으로서의 살아가는 것 이상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윤리적 방향이 필요한 것은 우리는 이 세상의 구조적 모순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체제를 따라서 체제에 충실히 적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정말 잘 살 수 있는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 현사회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체제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100여년 전에 칼 맑스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소외받게 되어 있고 자본가들은 계속 자신의 자본을 바탕으로 상위 계층에 남아 있게 된다. 이 심각한 모순을 막기 위한 맑스의 방법은 “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였지만 결국 맑스의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는 역사를 통하여 성공적인 현실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가 선하고 올바른 체제라고 검증받은 것은 아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현실에 적용하기에 적합한 모델일 뿐, 인간 소외 특별히 가난한 자의 소외라는 심각한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누가 과연 이 모순을 깰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도덕 법규를 잘 지키는 것이나 친절한 이웃이 된다거나 불쌍한 몇몇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주는 정도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현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뒤흔들만한 적극적인 삶의 방법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천국 노마드-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믿음의 순례자-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이용규 선교사야말로 현시대의 필요한 윤리적 인간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은 가히 종말론적이라고 할 만큼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초대했던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체제의 강요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명 붕괴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사회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이용규 선교사의 삶을 단지 ‘선한 삶’이라고 하기에는 그 표현이 부족한 것 같다. 그는 그가 가진 것의 일부를 통해 윤리적 삶을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진 모든 것, 그의 재정, 시간, 경험, 심지어 그의 생명까지 모두 이용해서 그가 추구하는 삶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선하고 윤리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삶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된 몸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이용규 선교사의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나는 이용규 선교사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참 부럽기도 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그는 바람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용감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가깝고 강하게 경험하고 있다. 당연히 그러한 근접 체험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때의 느끼는 것과 같은 행복감을 줄 것이다. 삶 속에서 즐거워하고 행복을 느끼는 이용규 선교사의 삶은 그의 실천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어떤 이의 삶의 모습이 아무리 경건하고 존경할만하다고 해도 그 삶 자체가 그를 힘들고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의 진심은 의심받아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용규 선교사의 일기와 그의 삶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나에게 그러한 의심의 공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더불어 나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바람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참 힘든 일이겠고 또한 나의 전 존재의 헌신이 필요한 일이 되겠지만 그것이 내가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방법이라면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로 지금이 삶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잡고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