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이 왜 날 시원하게 하는 거야? 네 살 된 우리 아들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까?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 바람이 널 사랑하니까. 대답하고 보니 정말 바람이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가끔은 나의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나를 쓰다듬기도 하고 내가 뒤로 밀려날 정도로 강하게 나를 끌어 안을 때도 있다. 가끔은 쉴새없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 이처럼 바람은 내게 지나치게 적극적이다. 이 정도면 바람이 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바람과 하나님은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점(?)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서 바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뿐만이 아니라 숨, 영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바람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바람을 생각하면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달려 나간다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서 바람의 근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대와 하버드를 졸업한 몽골의 선교사 이용규, 어쩐지 그의 과거와 현재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보통은 자신의 이력서는 더 좋은 현재의 상황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과거를 책제목처럼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학위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몽골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려놓은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과 재정, 생명과 안전, 경험과 지식, 죄와 판단, 명예와 사역까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어야 할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내려놓음은 몽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이익을 주는 것이겠지만 그에게는 철저한 손해이자 희생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용규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많은 분들이 내가 좋은 학력에서 불구하고 몽골을 가기로 결정한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신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내려놓은 만큼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였다.

 

그가 내게 도전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과 몽골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내게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또한 그의 삶은 단지 착한 사람으로서의 살아가는 것 이상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윤리적 방향이 필요한 것은 우리는 이 세상의 구조적 모순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체제를 따라서 체제에 충실히 적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정말 잘 살 수 있는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 현사회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체제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100여년 전에 칼 맑스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소외받게 되어 있고 자본가들은 계속 자신의 자본을 바탕으로 상위 계층에 남아 있게 된다. 이 심각한 모순을 막기 위한 맑스의 방법은 “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였지만 결국 맑스의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는 역사를 통하여 성공적인 현실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가 선하고 올바른 체제라고 검증받은 것은 아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현실에 적용하기에 적합한 모델일 뿐, 인간 소외 특별히 가난한 자의 소외라는 심각한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누가 과연 이 모순을 깰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도덕 법규를 잘 지키는 것이나 친절한 이웃이 된다거나 불쌍한 몇몇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주는 정도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현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뒤흔들만한 적극적인 삶의 방법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천국 노마드-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믿음의 순례자-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이용규 선교사야말로 현시대의 필요한 윤리적 인간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은 가히 종말론적이라고 할 만큼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초대했던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체제의 강요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명 붕괴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사회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이용규 선교사의 삶을 단지 선한 삶이라고 하기에는 그 표현이 부족한 것 같다. 그는 그가 가진 것의 일부를 통해 윤리적 삶을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진 모든 것, 그의 재정, 시간, 경험, 심지어 그의 생명까지 모두 이용해서 그가 추구하는 삶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선하고 윤리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삶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된 몸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이용규 선교사의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나는 용규 선교사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참 부럽기도 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그는 바람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용감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가깝고 강하게 경험하고 있다. 당연히 그러한 근접 체험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때의 느끼는 것과 같은 행복감을 줄 것이다. 삶 속에서 즐거워하고 행복을 느끼는 이용규 선교사의 삶은 그의 실천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어떤 이의 삶의 모습이 아무리 경건하고 존경할만하다고 해도 그 삶 자체가 그를 힘들고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의 진심은 의심받아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용규 선교사의 일기와 그의 삶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나에게 그러한 의심의 공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더불어 나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바람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참 힘든 일이겠고 또한 나의 전 존재의 헌신이 필요한 일이 되겠지만 그것이 내가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방법이라면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로 지금이 삶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잡고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할 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로부터 분리된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독교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것은 나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비기독교인에게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매트릭스 세계를 진짜라고 믿고 있는 네오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불행하게도 나는 네오를 매트릭스에서 빼내 줄 알약이 없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의 영역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을 어떤 사람에게 알려주시는데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그러니 계시가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다. 나는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참 맥이 많이 빠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매트릭스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인 모델을 갖는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좋은 학교에 들어간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럴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 중 하나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결국 죽어야 하는 걸까? 사실 이 부분보다 사람을 더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고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고통당할 때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한 세계로 가는 하나의 출입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정말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출입구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낸시 피어시를 통해서 또 다른 입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라는 입구였다.
 
 이 책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기념비적인 책이 될 것이 분명한데 이유는 그 동안 무기력증에 빠져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고 내 안에 계속 담아만 두었던 나의 태도의 180도 변화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해서 그냥 속으로 '그건 아닌데요'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었다. 피어시는 "복음전도는 불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과 실제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돕는 데서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전도할 때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그렇게 꽁꽁 숨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믿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 이야기는 나도 하나님께 종종 요구하는 내용이다. "아니 사람들한테 짠 나타나시면 될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무식한 전도라는 방법으로 나를 고생시키십니까?" 결국 나의 이런 짜증 섞인 불만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그냥 사람들에게 침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나게 하나님을 이야기해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도는 너무 무식하고 계시 외에는 사람을 일깨워줄 방법이 없는데 보통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언젠가는 혼란스러운 인생의 때가 오면 그 때는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표를 하나 그렸는데 그것은 가치와 사실 영역에 관련된 표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으로 대표할 수 있는 자연주의는 가치 영역에서는 의미가 없고 유익하지 않지만 사실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는 가치 영역에서는 너무나도 유익하고 실용적이고 의미가 있지만 사실 영역에서는 그 진위 여부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피어시가 이 책의 제목을 완전한 진리(Total Truth)라고 정한 이유는 그 동안 기독교가 가치 영역에서만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사실 영역을 자연주의에게 완전히 내어준 듯한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가치적인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라 사실적인 영역에서도 절대적인 진리임을 그래서 하나님의 이야기, 성경의 이야기는 완전한 진리임을 주장하고 있다. 즉, 가치 영역과 사실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진리여야만 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낸시 피어시가 위험하다고 말한 바로 그 위치에 내가 서 있었다. 즉, 기독교가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기독교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가치적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피어시가 예를 든 미국의 실용주의를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기독교가 상층부의 영역 즉 가치 영역에서만 위치하려는 경향은 신학적인 흐름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결국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온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이라는 가치 뿐이라는 주장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장이다.


 나의 위치를 알게 해 주고 나의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지도와 좋은 책의 공통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내가 있어야 할 올바른 장소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잘못된 장소에서 헤매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해서 창피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세계관을 통한 복음 전도 방법은 '아니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왜 한 번도 해 본적인 없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당연하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복음 전도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나의 삶의 한 부분만 차지하고 전체적인 삶의 방법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향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앞으로도 '완전한 진리'라는 낸시 피어시의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견해는 내게 삶의 방향을 일러주고, 나를 격려해주고 힘을 줄 것 같다. 내가 나중에 쉐퍼처럼 시골 촌구석에 살면서 하나님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집에 온 사람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쉐퍼의 제자인 '낸시 피어시'와 이 책 '완전한 진리'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jh21power 2007-09-2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에게 좋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완전한 진리 읽고 가치와 실제 세계 사이에의 연결성...즉 완전한 진리에 대한 외침을 준비하겠습니다. ^^

설박사 2007-09-2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
 
기다림 - 내 영혼을 새롭게 빚어가는
수 몽크 키드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 한참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오락실에 다녔던 적이 있다. 그 때 우리가 열심히 한 오락 중에 "원탁의 기사"라는 것이 있었다. 제목을 보면 예측할 수 있듯이 원탁의 기사의 여러 주인공들 중 한 명을 선택해 적들을 물리치는 그런 게임이었다. 이 게임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적들을 계속 물리치다 보면 경험치가 쌓이게 되고 일정한 경험치가 쌓이면 "Level Up!"이라는 표시와 함께 파워도 올라가고 무기도 좀 더 험악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 게임은 "Level Up"의 재미가 솔솔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레벨업이 재밌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게임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고 어려운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난다. 인간이 완전히 레벨업된 상태에서 태어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인간은 덜 창조된 듯한 상태로 지구에 떨어진 것 같다.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내가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진화에 대한 믿음이다. 즉, 지금은 불완전하지만 인간은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나마 지금의 모습은 몇 만년 전 인간의 모습보다는 훨씬 나아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과도기적인 현실이고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인간의 진화가 더 완벽해지는 날에는 지금의 불완전한 모습들이 극복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설명 중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훼손되었고 인간의 고귀한 완전성이 붕괴되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원래 모습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이런 고민에 해답을 주지는 않았다. 왜 우리가 이런 레벨업 게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키드는 단지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기다림'이라는 주제는 성장을 위한 그녀가 제안하는 최고의 기술이다. 덕분에 기다림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기다림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토록 깊이 있게 묵상한 책을 만나본 적이 없다. 성장과 성공을 위한 수없는 행동 강령을 열거한 책은 많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다림에 대해서 이토록 훌륭한 책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키드가 기다림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번데기의 모습이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화려한 변신을 위한 대기실이다. 나는 번데기 속의 기다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의 질문의 요점을 바꾸었다. 왜 나비가 처음부터 나비로 태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어떻게 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말이다. 기다림으로 가능할까? 기다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다림이 꼭 있어야만 획기적인 발전이 가능한 걸까?


 나의 시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머물렀다. 기다림의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다시 생각해봤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기다렸고 그 기다림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했다.  예수는 30년간 목수의 아들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고, 그가 사역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면서도 성급하지 않았고 그의 때를 기다리며 매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십자가 상에서 그의 생명이 흐릿해지는 순간에도 그의 능력을 발휘해 곤경에서 빠져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덤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기다렸다. 이러한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가 부활할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기다려야 했고 그 순간들을 통해서 성장했다면 나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가 기다렸다면 나도 기다려야 하고 그것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불평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하나님이 나를 불완전하게 이 땅에서 시작하게 한 것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인간의 불완전함이 오직 죄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불완전한 시작은 죄가 없다고 알려진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사람이었고 고통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유혹을 받는 존재였다.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는 마치 내가 내 스스로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공동 창조자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창조는 태어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더 나은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며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소설가가 쓴 소설이 소설가에게 영감을 주고 화가가 그린 그림이 화가에게 다시 영감을 주고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가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글쎄 그런 분들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이 리뷰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만의 격언을 하나 만들었다. "Boys! Be patient." 여기서 Boys는 성장하고 발전하기 원하며 애벌레에서 나비의 모습을 갖기를 원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인내심을 가지라,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라.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 혹은 그 이상을 이루는 것은 단지 야망을 갖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내와 끈기의 기다림의 정신이다. 책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내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인생살이의 놀라운 기술, 레벨업의 노하우를 전수해준 키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 얼굴을 엿보다 - 우주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최요한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며칠 전에 "Superman returns"를 봤다. 지금 보니 조금 촌스러운 의상에 어색한 머리스타일에 약간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릴 때 봤던 수퍼맨이 돌아왔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기억을 먹고 사는 것 같은데 수퍼맨 영화는 내게 좋은 식사였다. 재밌었고 감동적이었고 뜻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대사도 내게는 그 의미를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자는 아니지만 수퍼맨같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긴, 나는 수퍼맨보다 더 능력이 많은 한 사람을 알고 있기는 하다. 글쎄 그런데 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수퍼맨은 거대한 대륙을 들어서 우주로 던져버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이 사람은 기다란 두 개의 나무를 이어 만든 것도 들지 못해 들고 가다가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수퍼맨은 하늘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주로 걸어 다닌다. 한 번은 물 위를 걸었던 적도 있지만 별로 그런 것을 즐기는 것 같지 않다. 수퍼맨은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만 이 사람은 병들고 아픈 사람, 소외된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 짐작했겠지만 수퍼맨에 비해 너무나도 허약해 보이는 이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책은 수퍼맨에 비해 한없이 기운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교회와 교리가 필요한지를 설명한 책이다. 이런 책을 한 마디로 ‘기독교 변증서’라고 한다. 즉,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기독교의 필요성과 영향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분석과 논리에 의해 기독교를 설명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변증서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기독교를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는 결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 1+1=2와 같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열등하거나 이해력이 모자란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그렇게 증명될 수 없다. 이 책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열심히 설명을 하지만 마지막에 독자들은 이 설명들을 통해서 완전한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질문과 도전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시작도 약간 특이한데 '별을 바라봄'으로 인해 생기는 우리의 묘한 감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한 탐구의 첫발을 내딛는다.
 
 완전한 정답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필요한 이유는 허약한 예수 그리스도, 냉정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인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왜 우리에게는 고통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영문도 알 수 없이 이 땅에 태어났다. 창조자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이 우리가 살다가 죽게 될 우리 삶의 전부인 곳인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안위 따위는 별로 관심이 없는 기계적이고 냉정한 분이다." 이 책은 위의 질문들에 여러 가지 대답을 제안하면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쉬운 대답으로 질문에 대한 고민이 그치지 않기를 유도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쭉 설명해 나가면서 이 책의 중반부 쯤에 이런 여러 가지 질문에 하나님이 제시한 답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맥그래스의 이야기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 설명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이 부분이 하나님의 딜레마였을 것 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이걸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수퍼맨이 우리의 구세주라면 사람들이 금방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봐도 그다지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다니면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큰 곤경에 빠질 것 같아 보였다. 마치 골고다로 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얼떨결에 대신 구레네 시몬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지구라고 하는 이 거대한 행성은 기적처럼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고 있고 중력이라고 하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힘은 우리가 지구에 꼭 붙어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고 있다. 비록, 인간이 만든 구조물들에 의해 도시는 마치 인간이 창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밤하늘을 보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 속에 먼지같이 작은 땅덩어리인 지구에 살고 있다. 맥그래스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우리를 만든 창조자가 우리가 결코 만들 수도 도달할 수도 생각하기도 힘든 별을 드넓은 우주 공간 속에 매달아 두신 분이라면 그런 정도의 힘과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가 바로바로 해답을 주지 않는 것 같더라도 성급한 판단의 자리에서 물러나 한 번 쯤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도시의 야경 속에 보이는 수많은 붉은 십자가처럼 흔해 빠진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기 때문에 전혀 수퍼맨이라고 의심받지 않았던 클라크처럼 우리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맥그래스는 단서를 제공했다. 그 다음 선택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6-07-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설박사님 덕분에 좋은 기독교 서적을 많이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시죠?^^

설박사 2006-07-1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스텔라님. 오랜만입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지요. ^^ 스텔라님도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지금 처갓댁에 와 있습니다. 내일 다시 서울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하나님의 관점
토미 테니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잠이 오질 않는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전에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음성과 다름이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별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해변을 거닐 때마다 나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리곤 했다. 꿈만 같던 약속이 이루어졌건만 하나님은 그 약속의 선물을 지금 스스로 버리라 명령하신다. 오랜 세월 하나님을 알며 나는 이제는 하나님을 의심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그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꼭 그의 약속을 지키신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으리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했다. 그리고, 일어나 아들을 불렀다. "이삭아. 일어나거라.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 부분에서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바보이거나 아니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나를 좌절케 하는 인물이었다. 죽어도 그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끔은 믿음은 이성과 반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믿음의 행동을 취할 때 이성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싫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동로봇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싫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이성을 심어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그 선물을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모순이다. 분명 아브라함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나는 토미 테니를 통해 아브라함의 결정을 도왔던 아주 특별한 근거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었다.


토미 테니를 처음 만난 것은 'The God Chasers' 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아직도 그 책에 나온"Do you want me?"라는 하나님의질문을 가끔 내게 던져 본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민할 때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닐 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질문에 "네? 그래야 하나요?"로 대답할 때가 많았다. '하나님의 관점'은 왜 내가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원할 때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관점'은 정말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아빠의 팔에 들어올려진 어린 아이의 경험처럼 말이다. 그러나,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쩌면 관점의 변화는 내 몸을 밝히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제사로 나의 몸을 드리기 위해서 내가 경험해야 할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예배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많이 하지만 너무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이렇게 매주 예배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테니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어쩌면 우리의 예배는 나아갈 방향을 잃고 낮은 수준에서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상과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압도되어 버린다. 예수님은 내게 능력을 주지 못하는 연약한 어린양이며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용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용을 쫓아다닐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러한 사람들을 따라다닐 때가 많다. 테니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 때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도마뱀 한 마리와 그것을 쫓아가는 많은 무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일러 준다.


토미 테니는 내게 예배의 가치를 가르쳐준다. 때로는 너무 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보이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다.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나는 테니의 책이 좋다. 테니가 책에서 언급하는 영점의 가치는 그의 책 자체 내에서도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 예배에 대한 관심으로 나는 세상을 살기 시작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산을 모래더미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의 여러 가지 소리로부터 벗어나 나를 사랑하시는 한 분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배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통해 나는 세상을 간단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그 길이 쉬운 길은 아님을 안다. 열정단속반에 의해 식어버린 나의 마음과 열정에 다시금 불이 붙어야 함을 느낀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 의지와 이성 또한 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가장 똑똑한 상태에서 가장 이성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통해 가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선택은 정말 탁월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테니로 인해 나의 기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하나님 없는 부흥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해주세요. 우리의 눈을 밝혀서 우리의 온 몸이 밝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인생은 쉽지 않다. 때로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향해 치닫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치게 빠르고 정신 못차릴 정도로 치열하다. 그러나 우리의 비명이 즐거운 비명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과 함께 상승기류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비명을 지르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소리는 즐거운 외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런 감탄을 듣게 될 것이다.


'오! 신나는 인생이여.'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06-02-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놀람과 갈등과 번민 등의 갖가지 약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그가 믿었다고 해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이성과 항상 상반되는 것일까요? 상반되는 듯하게 보여도 저는 믿음의 기초가 이성이라고 생각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속성을 인지하는 이성을 먼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거지요. 모리아산에 이삭을 데리고 올라가면서 사환들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할 때(정확히 몇 장인지는 모르겠음 창 20장~25장 사이), 아브라함은 <아이와 경배하고 함께 돌아오리라>라고 대답했어요. 이 대답이 사환과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고 그의 믿음에서 나온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당장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게 무슨 이유인지 확실하게 모르나 하나님은 분명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이심을 그가 믿었기에 산을 내려 올 즈음에는 다시 아이와 함께 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믿었고 또 행했던 거죠, 행동과 말로써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치 대단한 사람인건 확실하지만,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도저히 발뒷꿈도 못 따라갈만큼 위대한 인물이라고는 성경에서 말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도 그저 약하디 약한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는데, 아주 조금 남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데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고 말 한마디에 덜컥 바쳤다면 그에게 믿음(?)의 점수를 훨씬 후하게 줬겠지만,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믿음의 행위도 자연스럽게 뒤따랐기 때문에 설박사님같이 신실하신 분이 혀를 내두르며 도저히 못 따라갈 인물은 아니라고 봐요^^
설박사님 아버님께서 " 의겸애비야, 급해서 그러는데 너희들 전세 자금 좀 빼서 나한테 융통 좀 해주라." 하셨다면 설박사님께서는 불안해서 거역했을까요? ㅎㅎ 물론 제가 님의 집 사정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비유를 해서 적절할지 모릅니다. 의겸이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기업 회장님쯤되신다고 가정한다면(그러니까 자금 능력이 충분히 되시는^^;;) 이사하는 수고야 따르겠지만 전세금 정도는 아버지를 믿고 융통해 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다시 그 돈은 돌려 주실 거고, 어쩌면 이자까지 쳐서 더 좋은 집을 주실 수도 있으니..^^(여기서 효에 관한 건 좀 접어두고서라도요)
님의 리뷰의 주제인 하나님의 관점과 얼마간 차이가 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믿음과 이성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고,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믿음이 약하다..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하나님의 속성을 아주 제대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요^^;
그리고 조상이란 건-우리가 도저히 못 따라 갈 존재가 아닙니다. 나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지요. 나의 근원이 조상이기 때문에 조상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도록 그런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다고 우겨 봅니다. 안 우겨도 돼요. 의겸이가 님을 쏙 닮은 것처럼 우린 조상을 닮게 되어 있다고요. 결론은 우리도 아브라함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아자!

설박사 2006-02-28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댓글은 추천할 수가 없을까요? ^^
진주님의 귀한 생각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06-03-07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