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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고민이다.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이 분은 20년간 내가 알아온 사람이고 이미 20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아마 나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에는 이 사람 이름이 꼭 들어갈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 사람 생각을 하고 이 사람이 했다는 말을 날마다 읽는다. 밥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이 사람은 나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고민이 생기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는 ‘과연 이 사람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잘 알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람을 더 알고 싶고 이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친구고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말 많이 오해되어 왔다. 나와 이 사람을 따르는 무리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거의 다 눈치를 챘겠지만 이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이 책의 주인공 매티는 바로 내 주위에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내 주위에서 나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그녀는 아마 내가 못마땅할 것이다. 지금도 살아 있지도 않은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정작 살아서 바로 옆에 있는 그녀에게는 그런 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보일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충분히 매티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다. 그러나 매티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내가 아니다. 물론 나도 필요하지만 나와 매티 사이에 있어야 하는 한 분이 있다. 매티는 비행기에서 그 분-a perfect stranger 원어 제목이기도 하다-을 만난다. 제목에 예수라는 말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누군지 약간의 궁금증을 갖고 이 책을 읽었겠지만 제목에서도 나온 것 같이 이 사람은 예수이다. 매티의 오른쪽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앉았고 왼쪽에는 예수가 앉았다. 매티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그녀에게 종교 이야기를 꺼내자 매티는 짜증을 낸다. 당연하다. 그녀는 나와의 결별을 생각하고 있다. 바로 내가 믿는 그 기독교라는 종교 때문에 말이다. 왼쪽에 앉은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종교는 항상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죠. 나도 종교를 싫어해요.” 예수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자, 매티는 예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예수가 한 이야기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억압하는 종교(religion)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만족을 주는 관계(relation)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티를 구원(save)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출장으로 비행기에 오른 매티에게 구원은 천국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그녀의 이혼의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관계가 이혼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도 당사자와의 관계가 아닌 아주 낯선 사람-a perfect stranger, 예수-과의 관계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매티의 입장에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나는 매튜의 남편인 닉의 입장이었고 예수의 입장이었다. 어떻게 나를 설명하고 예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종교가 아닌 관계-relation, not religion-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전도를 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때는 의로운 마음으로 가득해서 예수의 이름을 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자세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이 사람을 자유케하고 구원을 주는 소식이었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종교적 형식과 의무를 지우려는 것이었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나는 종교인인가, 아니면 자유인인가? 전자라면 종교를 말할 것이고 후자라면 자유를 말할 것이다.
나는 요새 종교를 걷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종교라는 매개체를 벗겨내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라는 틀을 걷어내려고 하는 이유는 종교에는 폭력성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8글자의 말이다. 이 말은 성경에 있는 말도 아니고 예수가 할 만한 말도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만들어 낸 폭언이다. 아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의 의도가 싫어하게 되었다. 왜냐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신앙이라는 거짓 가면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준 것에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 의지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자유를 다시 빼앗아 하나님의 종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종교의 폭력이다. 강요된 신앙, 두려움에 의한 신앙은 진정한 신앙일 수 없다. 예수는 깡패가 아니다. “너 나 믿으면 좋은 데 데려다 주고, 안 믿으면 확 죽는다.” 종교는 이런 말을 하는 예수를 만들어 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예수는 이런 모습이었고, 내가 전했던 예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또한 종교라는 매개체를 벗어나 하나님과의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 예수가 매티한테 한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최종적으로 매티를 위한 것이다. 내가 매티에게 예수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와 사랑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완전히 누리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설령 내가 그것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 내가 그러한 삶을 누리면 누릴수록 나는 이 책에 나온 아주 낯선 사람, 예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고백이 아니라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지금 나의 삶을 도우시는 하나님, 나에게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싶다. 이 책에 나온 예수처럼 말이다.
이 책의 한글 제목은 원제(a Day with a Perfect Stranger)랑 큰 차이가 있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자면 ‘완전히 낯선 사람과 함께 한 하루’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믿음을 강요하며 무조건적으로 교회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지쳐 있는 사람이라면 이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싶은 사람도 내가 지금 무엇을 전해야 하고 어떻게 전해야 할지에 대해 이 책은 좋은 모델을 제시해 줄 것이다. 매티의 내일이 궁금하다. 어쩌면 오늘은 그녀의 새로운 생일이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