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좋은씨앗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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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얀시는 질문맨이다. 수없이 질문한다. 얀시의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금기시되는 질문도 서슴없이 하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그는 마구마구 쏟아낸다. 그 모든 질문에 그가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정답을 써내려가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인터뷰도 하고 책도 읽고 사색도 한다. 그런, 노력의 과정들이 그의 책에 나와 있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아.. 시원하다'라는 느낌과 '아.. 그래그래.'라는 느낌이 든다. 수업시간에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 이거 질문했다가 무시당하거나 웃음거리 되는거 아냐?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라에 다른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바로 그 질문을 해 주면, 마음 속으로 엄청 고마운 느낌이 든다. 얀시는 내게 그런 고맙고도 용감한 친구이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시행 착오도 겪고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의 결론을 내어놓기도 한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아는 척하지 않으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책이 쉽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대상 독자는 신앙의 경계지대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다. 얀시는 기독교인이지만 이 책은 기독교를 선전하는 책이라기보다는 무신론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가 이야기하는대로 무신론자이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마 제목이 너무 기독교적이어서 이거 '기독교 서적'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원제는 'Rumors of Another World'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말 저자가 이 책을 읽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목도 아쉽다. 그냥 원제의 뜻을 살려 '또 다른 세계에 관한 소문'으로 했으면 더 좋았을 듯 하다. 기독교 출판사에서 기독교 서적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내놓으니 제목이 이렇게 정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얀시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이 세상을 어떻게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많은 예시와 질문들이 이어진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면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행동한 사람들이 결국 옳았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들도 열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존재합니다.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정신적이고 신념적인 견해에 대한 추상적인 설득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단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도 이 책을 읽고 모든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으로 자신의 견해를 바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또 다른 세계의 소문에 대하여 그 진위를 알아보고자 더 접근하려는 발걸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인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았다.  일단 제목에 속은 것이 크다. 그러나, 원제와 목차를 보고도 나는 계속 책을 읽어 내려 갔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를 알기 위한 일종의 스파이짓을 하고 싶어서였다. 얀시라면 분명히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탕자 체험'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부자 아빠를 둔 탕자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 곁을 떠나서 겪는 체험을 몸소 할 용기는 없고, 그렇게 했을 때 어떤 느낌과 어떤 해로움이 있는지 체험해보고 싶었다. 일종의 정신적인 가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얻은 유익 외에 이 책이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균형잡기 기술이다. 보이는 세계만을 살아가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현실 감각이 무너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인식하면서 보이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기술이지만 얀시 자신도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쉽고도 친절하게 그 방법을 제시한다.


얀시는 거의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늘 새로운 질문과 신선한 견해로 나의 머리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이다. 자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담무쌍한 그의 질문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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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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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나는 이 위대한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리뷰를 쓰려고 며칠을 벼르고 별렀으나 어떤 말도 어떤 설명도 이 책의 가치를 알리기에 너무 부족했다. 이것은 마치 너무 멋진 광경을 보고 감탄사 외에는 할 말을 잃는 것과도 같고 너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어서 가슴이 찌릿찌릿할 뿐 그 감동을 설명해 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이 눈물나도록 나를 감동시킨 첫번째 이유는 저자인 스캇 펙 박사의 용기이다. 이 책은 정신적인 기행문과 같다. 여행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고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도전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여행이 어렵고 힘들수록 그 성장의 정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곳을 정복하는 사람을 우러러 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그 극한 어려움을 견딘 사람들로서도 존경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도전했다는 자체, 그 용기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이 책은 스캇 펙 박사의 정신적인 성장의 과정을 그린 자서전적인 기행문이다. 스캇 펙 자신의 이야기도 있고 그가 치료한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는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도 과감하게 발을 내딛었다. 그가 생각하지 않았던 결론을 얻을까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그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까봐 생각을 멈추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변명하지도 않았고 그가 기적적으로 구출받은 사실이 있을 때 솔직하게 시인했고 그것이 기적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용기있게 나아갔고, 솔직했고, 그가 얻는 모든 경험을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이해하고 분석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뭔가를 숨기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러한 스캇 펙 박사의 태도는 책의 처음부터 시작된다. "삶은 고해다" 인생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로 그는 글을 시작한다. 결코 아는 척하지도 않고 이미 많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제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토록 어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에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 - p.108 -


스캇 펙은 삶에 이와 같은 훈련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훈련에 사용될 힘으로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가 정의하는 사랑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 p.113  -


그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일종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성장을 하면서 자신이 믿었던 종교에서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멀리했던 종교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극적으로 그를 혹은 환자들을 도왔던 은총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이 그는 훈련, 사랑, 종교와 성장, 은총에 대해 모든 가능성과 사건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 나름대로의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의 두번째 가치는 이 책은 나를 착각과 환상 속에서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랑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 사랑에 빠지는 행동은 일종의 퇴행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와 하나가 되었던 기억과 같은 것이다. " - p.121  -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빠지는 것도 아니고, 빠지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이 퇴행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이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불륜이 아닌 이상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황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마치 세상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고 마법의 양탄자가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앉으면 날 수 있을 것도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서로의 자아의 영역이 무너지고 너와 나의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 사실은 퇴행이고 유아기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라니... 나는 스캇 펙이 사랑을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고 '이심이체'라는 말. '당신은 활이 되어 살아 있는 화살인 당신의 아이들을 미래로 날려보내야 한다'는 칼릴 지브란의 시 인용. 성장함에 따라 부부간의 결합은 서로가 분리된 개체라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 사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사랑을 통한 일치가 오히려 서로의 성장에는 해가 된다는 것인데... 수긍하기 힘들었다. 사랑은 모든 종교와 철학과 소설과 영화의 영원한 최고 가치가 아니던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과 같이 여기는 것이 사랑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사랑은 흡수를 하는 것도 흡수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나는 게걸스럽게 다른 사람을 흡수해버리려는 욕망이나 또는 정반대로 나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했는가? 흡수도 희생도 진정한 사람이 아닌데, 나는 두 가지를 통해 사랑을 하려고 했었고 그 두가지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내가 없어지는 것도 다른 이가 나를 의지하도록 만들어 그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는 것,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하며 스캇 펙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인생과 우주를 바라보는 태도로 인해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캇 펙의 정신적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고백한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p.413 -


"우리는 더 이상 우주의 길잃은 미아가 아니다." -p.452-


"오히려 은총의 실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 p .452


"우주라고 하는 이 도약대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뛰어넘어야 한다. " - p.452


그는 정신분석을 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과학자로서의 차가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그는 처음에는 지구라는 곳을 우주라는 곳을 차갑게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우주의 미아가 아니라고 하지만, 아마 이 정신적인 여행을 하기 전에는 우주의 미아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는 갈 곳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엄마, 아빠가 누군지 몰라 헤매는 어린 아이처럼 세상에 떨어뜨려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용기있는 방황을 통해 그는 길을 발견했고, 존재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다. 나는 아직 스캇 펙 박사와 같은 정신적인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에 정신 연령에 비하면 나는 이제 걸음마를 뗀 아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신적인 아기로서의 두려움이 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내가 가는 여행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절벽에 떨어지게나 되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뭔가 더 알면 거짓임이 밝혀질까봐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나로 하여금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아직도 여행은 남았다고 이야기하며 동참하라고 내게 손짓한다. 그가 보았던 세계,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이 여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용기있게 그를 따라나서려고 한다. 거짓과 착각 속에서 깨어나는 일이 힘들 수도 있고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 내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나 자신을 확대하고 그것을 위해 결정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때로는 내가 알 수 없는 은총이 나를 도울 것이다. 그는 아직도 가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계속 가야한다고... 그렇다. 나는 나의 여정이 끝나는 날이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날이 되도록 성장의 길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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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Wind 2010-07-22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북 리뷰를 상당히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 제약때문에 북리뷰를 통해서라도 책을 접하고 싶은 마음에서죠. 제가 아마 이 블로그의 리뷰들을 가장 꼼꼼히 읽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ㅋㅋ 책에 대한 내용도 재밌었지만, 책에 대한 관점과 생각의 표현들이 참신했어요. 읽고 조용히 사라질까 했지만, 그러면 설박사님의 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위의 책에 큰 영향을 받으신것 같아 이곳에 글을 답니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신나는 모험 계속 하시길... 신선한 바람 드림

설박사 2010-07-2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쿨윈드님^^ 진짜 오래간만에 북리뷰에 댓글이 달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북리뷰 쓴지 몇 년 된 것 같습니다. 요새는 통 못 쓰고 있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 책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 중에 한 권이고요... 에릭 프롬의 글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약간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존 R. 스토트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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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쓰여지도록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하나인 버트란드 러셀이다. 그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20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지성인 중 한 사람인 존 스토트에게 충분한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존 스토트의 명성을 알고 있었고 그의 저서에 친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존 스토트가 러셀의 철학과 논리에 도전장을 내밀고 반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책에 그런 의도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철저히 논증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감동적이거나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과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이다. 만약에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강요하는 책이라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는가?' 또는 '왜 기독교가 진리인가?' 정도의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신비와 논리와 감정이 결합되어 있다. 한쪽으로 치우쳐있지 않고 균형을 잡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혹은 세상이라는 곳이 바로 그런 것 같다. 늘 설명할 수 없는 신비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분명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어느 책에 쓰여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성적으로 절대 할 수 없는 것도 감정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분명 감정은 철저히 배제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사실, 어떤 이는 이 책이 C.S. 루이스나 프란시스 쉐퍼가 쓴 변증적이고 논리적인 글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할 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다지 감동적인 이야기가 없다는 이유로 밀어내 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별 흥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가치이다. 논리만으로도 감정만으로도 신비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고 인간이다. 어떤 한 가지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복합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이 책의 시작은 신비이다. '천국의 사냥개'라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소제목으로 시작한다. 웬 뜬금없는 개이야기? 천국의 사냥개라는 표현은 존 스토트가 프란시스 톰슨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천국의 사냥개는 하나님을 비유한 말이다. 사실 이 부분만으로 이 책은 끝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천국의 사냥개로 인해서 존 스토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책의 뒷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인간, 자유에 대한 질문과 진지한 대답이 기술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인의 시각으로서 가능한 판단과 대답이지만 저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최선의 결과는 바로 천국의 사냥개 덕분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독자들이 1장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이후는 편견이고 오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의 사냥개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사람과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과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굳이 그것을 배제할 이유는 없다.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성능 좋은 망원경이 발명되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이 별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생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렌즈가 있다면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이 좋은 렌즈임을 충분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볼 것 같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이 질문 말이다. 이 책이 그 대답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대답은 아마 개인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정해진 답은 없다. 천국의 사냥개. 나는 이 존재의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는 추적보다도 이 존재가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천국의 사냥개가 추적하고 있는 것은 정말 한심한 무리이다. 쫓고 있는 천국의 사냥개에게 끊임없이 돌을 던지고 덫을 놓는 무리들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약간은 덜 떨어진 무리들, 무식하고 이기적인 무리들이다. 이 무리들을 위해서 천국의 사냥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면서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는 덜 떨어진 짓들을 자행한다. 그리고, 물론 그 안에 어린 아이같이 우와좌왕하는 내가 있다. 나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내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심한 떨림이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절망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폐기해버리고자 하는 나의 쓸쓸한 마음을 온 몸으로 감싸안은 그의 상처 때문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이다.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부족하고 때로는 악한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나 또한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부족함을 인하여 나를 버리는 분이라면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완벽한 사람만 골랐다면 나는 결코 그 무리안에 끼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는 미완성 공동체라는 것. 나는 그것으로 인해 희망을 갖고 용기를 얻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미완성 작품이지만 아무도 그 작품이 가치없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미완성 작품이다. 나도 그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부족함을 느끼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또 다른 이유를 이 책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러셀의 책을 읽었다. 내가 러셀의 책을 읽은 이유는 기독교를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아마, 러셀의 책은 기독교를 거부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줄 것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할 말이 좀 있었지만... 내가 러셀의 책을 읽은 것처럼 많은 비기독교인들도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물론, 할 말도 많고 이해안되는 부분도 인정하기 싫은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책을 읽는 비기독교인 중 몇몇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뒤쫓고 있는 '천국의 사냥개'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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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박사 2004-09-13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것은 원래 그 당시에는 그게 유행이어서 스스로 뽑은 거라네요.
그니까 원래 눈썹이 없다는....
눈썹이 없어서 미완성인 것은 아니고... 그냥 미완성이랍니다. 뭔가 덜 그렸나보죠 뭐.
내가 보기엔 눈썹외에는 완벽한 것 같은데. ^^
 
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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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도덕률은 존재한다.
- 도덕률과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힘이 있다.
- 악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적인 개입하시는 날은 인류 최후의 날이다.
- 이유를 알 수 없어도 그 효과를 체험할 수는 있다.


1. 도덕률, 인간 본성의 선한 법은 존재한다. 모든 사물이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듯, 관습이나 교육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 아닌 인간 본성의 선한 법이 존재한다. 어느 누구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유영철의 살인 사건에 대해 그것이 '악한 행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공정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혹은 본성 속에 '인간이 따라야만 한다'라고 생각되는 선한 법이 존재한다. 


2. 도덕률과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우주의 존재 근원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유물론적인 견해와 종교적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유물론적인 견해는 모든 사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으며 존재하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종교적인 견해는 우주의 배후에 하나의 정신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의 목적에 따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판단해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인간 자신이다. 인간 스스로를 관찰할 때 옳은 일을 하도록 강요받으며 옳지 않은 일을 할 때 불안감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볼 때 우주는 어떤 정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가 아는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번의 도덕률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는 명제와 연결)


3. 우주 배후의 어떤 힘을 하나님이라고 정의하자. 인간의 본성 속에 선한 법을 심어 놓은 존재라면 분명히 선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선한 존재라면 이 세상의 부조리와 악과 가난과 질병과 전쟁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자유의지는 악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선함, 기쁨 등을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이다. 그 자유의지의 악용이 악을 만들어냈다. 악은 선의 남용이며 반란 세력이지 선의 대립 세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생존을 이어주는 기본적이며 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악용될 경우 심각한 악을 초래할 수 있다. 가장 선한 것도 악용되면 가장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즉, 악은 하나님의 책임은 아니다.


4. 그렇다면, 왜 악한 세상을 혹은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서 심판하고 올바르게 고치지 않는가? 이것는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이다. 부조리하고 악한 상황이나 사람이 선한 하나님을 대면한다고 하는 것은 '끝'을 의미한다. 연극에서 작가가 나오는 시점은 연극이 끝난 시점이다. 이 세상의 선한 창조주가 나오는 시점은 바로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우주가 꿈처럼 사라지는 그 시점에 하나님 편으로 돌아선다는 혹은 선하게 변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악인이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세상에 직접 개입하시지 않는 것이다.


5.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알고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설명할 수 없는 '일단 믿으라'라는 근거없는 말만을 되풀이한다. 이는 음식이 어떻게 영양을 공급하는지 몰라도 저녁식사를 하고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한 일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를 받아들이고 효과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나 방법은 알 수 없어도 그 효과를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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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박사 2004-08-3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서평이라기보다는 요약... 혹은 재구성... 정리? ㅋㅋㅋ 아무튼 좋은 책이다.

놀자또놀자 2004-11-1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요약을 보고 감명(?) 받아서 주문한 사람입니다. ㅎㅎ

설박사 2004-11-1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제가 쓴 요약문이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
 
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토르 프랑클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이서브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캐스트 어웨이'는 특급운송업체 Fedex의 직원 척 놀랜드(톰 행크스)가 무인도에 갇혀 겪게되는 일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화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 영화가 결코 유쾌한 영화가 아니었다. 무인도에서의 몇 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연락을 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런 기분을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배구공에 눈, 코, 입을 그리고 Wilson이라는 이름의 친구로 만들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자살 시도도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그나마,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그의 약혼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인도를 탈출하자마자 그녀를 찾는다.


보통의 영화라면, 감격의 재회를 하며 이야기는 끝나겠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 인생이란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를 버티게 해준 그의 희망과 기대는 '물거품'에 불과했다. 허구였다는 말이다. '캐스트 어웨이'의 감독은 인생이란 해변에 앉아서 파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무엇이 떠내려올지 모르는. 그것은 사람의 노력이 관여하지 않는다. 단지 바람과 파도의 힘에 의해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냥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좋은 것이 올 수도 있고, 전혀 쓸모없는 것이 올 수도 있다.


이거 너무 심한 이야기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더 심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책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3년을 보낸 사람들이 자유를 얻은 후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야속함과 절망감이었다고 한다. 수없이 꿈꾸던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 그러나, 그것은 단지 꿈이었을 뿐이다. 사랑의 꿈과 기대가 인생의 의미를 가진 견고한 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고통이 끝나면 그것에 대한 보상이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고통이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은 빅터 프랭클의 3년 동안의 아우슈비츠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탄생한 로고테라피라는 의미 치료법을 이야기한다. 아우슈비츠를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겪어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안다.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제 28명 중에 1명 꼴로 살아나왔다고 하니, 죽음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날, 어느 때 자기 옆의 동료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저 그들에게는 무감각한 일이었다. 끔찍한 일도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면 그것을 인식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 외에는 다른 모든 외부 환경에 대해 믿기 힘들 정도로 무감각해졌다. 수용소 입소 직후에 특사 망상, 적응기에 있어서 수없이 꿈꾸는 미래의 희망,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후의 절망감에 대해 의사로서 과학자로서 분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용소의 현실이 얼마나 끔찍했냐면 일례로 옆의 동료가 악몽을 꾸는 것처럼 보여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지금의 현실보다 더한 악몽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랑도 희망도 무너질 수 있다면 인간은 무엇이며 인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빅터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좋다. 그럼, 사람들은 왜 사는 걸까? 빅터 프랭클은 우리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기보다는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자유'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말이 바로 '책임'이다. 그리고, 바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내가 꼭 책임져야할 일이 분명 삶 속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은 개인적으로 내면에 존재하는 삶의 이유와 의미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이 진정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자기 초월을 통해서 즉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도 고통 자체의 의미가 없다면 고통 받다가 죽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무엇이냐고 빅터 프랭클은 묻는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며 그들의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보았고 그래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상황과 조건에 따른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의지가 있고 결단할 수 있다. 동전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기계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누군가가 사람을 만들고 생명을 주었다면 그는 장난으로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보고 그에 대해 절대적인 실망을 했다. 그는 세상과 인간이 장난으로 우연스럽게 창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간하면 그의 책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인생을 희극적으로 볼 수도 있고, 멋진 드라마나 영화에 자신을 몰입시키며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인생이다. 어디로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없다. 파도에 밀려오는 것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이 신의 장남감 정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없이 약하지만 한없이 위대하기도 하다.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지라도 인생에는 위대한 의미가 있다. 빅터 프랭클이 대답을 주느냐하면... 주지 않는다. 그 의미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미여야 할 텐데, 개인마다 발견하고 찾아야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암벽 타기나 스카이 다이빙을 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삶을 혹은 존재를 인식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이 경험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노력은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조언자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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