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명희 지음 / 북로드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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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랑이 뭔지도 모른 채 고독을 껴안게 된 여자와, 고독 속에서 살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원했건 원치 않았던 단절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방향적인, 그야 말로 PC통신 시대스러운 관계의 이야기다. 02로 시작하는 집전화로 설레임을 건네고 싶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을 때, 그 설레임은 유보될 수 있고 오히려 더 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연결되지 않은 전화가 가져오는 고독은 단지 잠깐의 기다림일 뿐이며 분명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그와 그녀는 기다림의 즐거움을 믿고 더 큰 보답을 기대한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소위 모바일 유비쿼터스 시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나를 ‘씹는’ 것이기에 설레임은 곧 바로 ‘1’이라는 숫자와 함께 분노로 나타날 것이다. 받지 않는 전화는 나의 고독을 잠시 연장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나아가 사랑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어떻게 견뎌내야 할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영리하게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대 초반, 아직 우리가 ‘스마트’해지기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스마트’한 연애보다 더 큰 사랑은 고독과 기다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물론 그 보답은 아무도 기약할 수 없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드라마 작가 하명희가 쓴 본 소설은 원포인트의 따뜻한 감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시점에서, 극히 미미한 순간에 반짝이는 감수성은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마치 족발 집에서 일하는 프랑스 유학파 요리사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이렇다. 일방향 사랑을 하는 세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을 응시한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세 번째 사람만을 쳐다본다. 이 시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고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며시 비치는 세 번째 사람의 얼굴 결정적 포인트다. 그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다. 일방향 사랑의 종착역이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곳에도 마음이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은 모른다.

 

내가 오래 전에 버렸던 이름을 그가 다시 불러 주었다. 그는 나의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남자처럼 내게 다가왔다(p.139)

 

꽃은 원래 그대로인데 이름 붙이고 의미 붙이고 애착한 건 나다. 꽃이 내게 이름을 붙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의미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순전히 내 뜻이었다 (p.178)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가 생생함이 떨어지고 균형이 맞지 않다는 점이다. 사랑을 하면 유치해지거나 바보가 되기 때문일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라던지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해서 유독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지나칠 정도의 가벼움 혹은 오글거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역시도 애절한 사랑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아래 문장에서의 ‘홍아’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똑 같은 드라마를 봐도 사람에 따라 그 감상이 다르다. 홍아가 리얼리티가 없다고 평한 드라마가 정선에겐 가슴을 두드리는 울림이 있었다. (p.210)

 

"해당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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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세실 앤드류스 지음, 강정임 옮김 / 한빛비즈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판화스러운 글씨체 아래에 두 사람이 악수하는 그림.
무엇보다 강렬한 노란 바탕에 검정 인쇄.
표지를 보는 순간,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 올랐다. 
'작당'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어감이 뭔가 비밀스러우면서도 통쾌한 구석이 있는 데다가 무려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라니.


저자는 행복이 4C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4C란, 관계 connection, 소명 calling, 유희 celebration 그리고 통제 control를 뜻한다.
4가지 모두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모두가 연관되어 있는 요소이긴 하지만 
특히 관계와 유희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즉, 즐거운 관계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즐거운 관계는 어디서 오는가? 바로 대화다. 대화는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끄는 '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유쾌하고 배려할 줄 아는 대화"를 설명하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대화의 목적은 이기심과 탐욕 넘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즐거운 관계를 누리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함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대화의 의미는 이처럼 중요하며, 저자는 책의 본론에서 이러한 대화의 여러가지 방법과 가능성을 설명한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폭 넓은 학술적 배경을 논하고 있다. 심리학, 법학, 사회학, 여성학, 생물학, 경제학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논거를 들면서 본인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은 풍부한 글읽기의 즐거움을 전달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국내 번역판에는 풍부한 참고문헌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의 주장이 담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 뿐만 아니라 저자가 참고한 책들과도 만나는 체험이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아마 분명 원서에는 참고목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생략된 참고문헌 목록은 무척 아쉽다.

이 책에서는 대화를 위한 원칙과 방법에 대해서 다양하게 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행복을 위한 대화의 원칙이 인상적이다.

제 1원칙: 생각하고 느낀 것을 당당하게 말하라
제 2원칙: 경청하라
제 3원칙: 친절하라
제 4원칙: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말하라
제 5원칙: 다른 사람을 인정하라
제 6원칙: 좋은 질문을 하라
제 7원칙: 평등하라
제 8원칙: 당신의 이야기를 하라
제 9원칙: 거침없이 웃어라
제 10원칙: 삶을 모험이라고 느껴라
제 11원칙: 자유롭게 말하라

그 외에도 변화를 위한 3가지 대화 원칙, 곤란한 상황을 돌파하는 대화법, 갈등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등 마치 CNN의 전설적 앵커 래리 킹이 썼을 법한 '대화'에 관한 다양한 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나아가 교육제도와 민주주의까지 확장되어 그 의미를 논하고 있다. 작은 대화에서 출발한 불꽃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와 공동체 전체의 이슈로 타오르고 변화를 이끌었을 때, 결국 이는 다시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책의 큰 구성이다. 이쯤에 이르면, 대화의 가치는 단지 나와 너의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만, 후반부에 가서는 지나치게 흥분하여 말하는 것이 아쉽다. 책 자체가 마치 독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전개되고 있는데, 문제는 스스로의 속도감에 매몰되어 앞부분에서의 날카로움과 균형감각를 잃어 버렸다는 점이다. 스스로가 밝힌 원칙 중에서 경청하며 친절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라는 원칙이 후반부로 갈 수록 조급함과 당위성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점차 사라져 버리고 있는 점이 이 책의 두 번째 아쉬운 점이다.

책의 원제는 거실 혁명 (Living Room Revolution)이다.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거주 문화 자체가 다른 한국 현실에서, 요즘 '거실'을 드러내놓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가족끼리도 거실에서 공유하는 시간보다 각자의 방에서 5인치 화면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으며 거실 공간도 50인치 괴물이 중심을 차지한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함께 웃고 떠들며 작당하라. 우리 집 거실에서부터 유쾌한 혁명이 시작된다."라고 하지 않던가.

 
세상이 팍팍하다고, 재미 없다고,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불평하기에 앞서 
가장 가까운 '세상'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해보자. 정말 진부하게 들어 왔지만, 막상 그 의미를 깨닫고 체득하기 쉽지 않은 말이 떠오른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라고. 지금 마우스와 터치스크린에서 손을 떼고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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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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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인문학과 거리가 먼 편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인문학이 싫다. 그건 마치 플레밍의 법칙 대신 락커인 마냥 손가락으로 peace를 그리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물리학에 대한 감정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작 학생 때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전부 경제학과 경영학에서 나오는 줄만 알았었는데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사회에 나와보니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정작 인간의 존재 이유, 사유의 방식, 심리적 동기 등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경시해왔던 인간자체에 대한 경외감이 깊고 또 깊어지면서 예전보다 더 멀어지고 더 어려워졌다는 게 사실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문학이 싫다. 마치 존 앰브로즈 플레밍 경(Sir)을 이해하려고 들면 들수록 정작 더 싫어졌던 것처럼.
  
그런데, 정말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보르헤스를 말하고, 라깡을 말하고, 아도르노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사람들이 떼거지로 등장하기 때문에 플레밍 경과 동급으로 취급한 것인 것이었을까?
 
여기 한 국문학 교수이자 스스로 인문학 과격주의자라고 칭하는 40아줌마가 있다. 주로 하는 일이라고는 최백호부터 장기하까지 노래를 들으며 센치한 감상에 빠지거나, <연애시대>부터 <신사의 품격>까지 드라마를 청승 맞게 본방사수하는 게 특기이다. 어디 그 뿐이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부터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이르기까지 책을 논하고, <러브 액츄얼리> 부터 <은교>까지 다양한 영화에 대한 을 푼다.
 
 
 
소소한 일상에 숨겨진 인문감성
 
온갖 수많은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처럼 문어발, 백화점 식의 소재로 논하고자 하는 목적은 결국 단 한 가지 인문감성을 채우고자 함이다. 소소하게 지나가는, 돌이켜 곱씹어 봐야지만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순간들. 그 순간 순간 속에서 나를 나답게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인문감성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자 이 책의 목표이다.
 
인문감성이란 마치 이런 순간을 뜻할 것이다. 내 애인의 스마트폰에 어떤 앱이 깔려 있는지에는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을지언정, ‘가장 최근에 재생한 노래또는 가장 많이 재생한 노래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핍된 그 것말이다 
[500일의] 썸머가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을 물은 남자였다. 참으로 별것도 아닌 희한한 일로 결혼까지 한다고 생각할 줄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자기 애인이 읽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물어보는 일은 대단한 사건인 것이다(p. 214)
 그러니, 일상에서의 사소한 의미부터 재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하라고 주장한다.
 
 
공주의 망상이 진실로 빛나는 때 
사랑이 사유로 반짝이는 순간
나에게서 낯선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
고독이 명랑해지는 순간
상처가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
우리가 기꺼이 환대할 순간 
5개 챕터의 제목들이다. 제목을 처음 보는 순간 소녀 또는 공주스럽다…’ 내지는 낙관주의 혹은 망상주의자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저자 한귀은 교수는 솔직하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야 말로 자기 자신을 찾는 첫번째 단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애인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거짓말을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이 속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했을 경우, 내 애인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 자산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p. 87)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비록 겉으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여성을 위한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40대 아줌마 선배가 20대와 30대 후배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시각을 풀어서 설명해주는 느낌이랄까? 보편적 감성으로서 남성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는 반면, 일부 글에서는 약간 망설여지고 머뭇거려지는 순간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 명의 남성 독자로서는 조금 아쉽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진실된 단점 중 하나를 꼽자면, 짧은 감상과 치유는 될 수 있어도 그 울림의 소리가 내면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문화를 통해 가볍게 풀어나가고자 했던 이 책의 장점이 동시에 단점이 되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 스쳐가는 모든 순간 속에서 새로운 감성을 느끼고 자기 자신에게 충만하고 싶다면 일독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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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의 경제학 - 모방은 어떻게 혁신을 촉진하는가
칼 라우스티아라 & 크리스토퍼 스프리그맨 지음, 이주만 옮김 / 한빛비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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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패션, 요리, 코미디, (미식)축구의 공통점은?

결론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베끼기를 통한 혁신”이 있는 분야이다.

 

책에는 서로 상충되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개념이 소개된다.

1.   혁신의 독점 이론: 창작자들에게 복제 권리나 라이선스를 판매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창작자를 보호해야 혁신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주장.

2.   베끼기의 역설: 경우에 따라 오히려 베끼기가 창작 활동을 촉진하는 경우.

 

 이 책은 혁신의 독점 이론을 반박하고 오히려 베끼기의 역설을 옹호하는 여러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지적 재산권법이 ‘모든’ 창의적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모방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며 이를 권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베끼는’ 길이 산업 전체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번성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두 줄로 요약하자면,

 

특정 산업에는 베끼기가 많더라.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이 잘 일어나더라! 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서론부터 돌직구를 던진다. 상당한 흡입력을 지닌 채 관심을 끈다. 일단 서론을 읽으면서 주어진 몇 개의 질문을 곱씹어보면 책의 나머지를 안 읽고는 못 배기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주방장들은 다른 사람들이 조리법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새로운 요리를 계속해서 창작할 수 있는 것일까?”


“미식축구 감독들은 경쟁 팀들이 자신의 새로운 전술을 베끼고 연구할 것을 알면서도 왜 계속해서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에 대한 상세한 답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 책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법대 교수가 쓴 이 책은 지적재산권 전문가답게 다양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며 검증하여, 여러 분야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도출해내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되는 사례를 끊임 없이 질문하고 왜 그럴 수 있는지 WHY 질문을 던지며, 반대 사례를  궁긍적으로 반박하며 본인의 주장을 채택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상당히 단계적으로 지적(知的)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각 사례에 대해서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을 하거나, 비슷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다소 지나치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다만, 분명히 이 책은 결코 쉽거나 친절한 책은 아니지만 ‘법’ 자체를 딱딱하게만 여기거나 일반인의 삶에 동떨어진 것이라고만 여겼던 사람이라면 요리, 패션, 스포츠 등의 친숙한 분야에서의 사례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을 팝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작가로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마릴린 몬로, 마오쩌둥의 초상화부터 캠벨 수프 깡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오브제를 가지고 작품을 표현해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 특히 최근에 들어서 - 이러한 팝 아티스트들은 원작이 되는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본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오히려 저작권을 주장하고 법적인 보호를 요구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면, 그/그녀 자신도 겸허하게 본인의 작품이 또 다른 누군가의 영감을 위한 밑거름이 될 법도 한데 정작 그런 개방과 관용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방을 통한 혁신과 창조는 당신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개방이 있다면, 혁신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인 CTRL+C, CTRL+V도 물론 곤란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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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들이 이긴다
모기룡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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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가?

…… 그런데 왜 당신은 그만큼 인정 받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한가?

혹시 당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아닌가?

어쩌면 당신은 착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온 사람들이 정작 왜 불행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만약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행복하고 나아가 성공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접근 방식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독특한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새로운 윤리사상이라 할 수 있는 ‘덕윤리’를 통해서 개인이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접근의 책이지만, 아쉽게도 저자 서문을 넘기고부터는 흥미를 유지할 만한 요소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의 구성은 1. 착함이란 무엇인가, 2. 당신은 이성적인가 감성적인가, 3. 어떻게 덕을 실천할 것인가 라는 3장 아래에서 15개의 챕터가 있으며, ‘덕윤리’가 어떻게 21세기의 새로운 선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일관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현 방법이나 표현 내용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느껴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기존의 도덕 관념 혹은 상식에 대해서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하나하나 반박을 하면서, 그 대항마로 내세우는 ‘덕윤리’는 실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덕윤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어디 시골 동네 이름인지도 모르겠다만, 덕윤리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덕윤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할 작업은 덕윤리의 정의를 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핵심 과정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마치 당연히 덕윤리에 대해서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출발하는 기분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기존의 의무론과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약점을 들어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면서, 덕윤리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한사랑에 가까운 방어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덕윤리는 마치 완전무결하고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저자 본인이 덕윤리에 대해서 속된 말로 꽂혔다고 해서 너무 지나치게 아전인수격으로 높게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는 첫번째 문제점에서의 당위성에서 파생된 것이라 생각한다. 덕윤리의 도래 자체가 너무나 당위적이기 때문에, 덕윤리를 비판하는 모든 논리에 대해서 방어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그 방어의 도가 지나쳐서 마치 용비어천가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세 번째 위험한 부분은 편파적 사랑의 가치에 대해 주장하는 부분이다. 국수주의와 민족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에 걸쳐 입증된 사례인데, ‘나쁜 동기’를 지닌 공동체에 대해서 반대하고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공동체를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될 것인가? 만약 이게 정말 보편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 인류가 초인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믿는 책상머리 연구자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이 없었던 것은 5절 오타쿠는 착할까, 착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이다.

오타쿠는 결과적으로 해롭다고 비판하면서, 공리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오타쿠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해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는 착각이며, 덕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해로운 존재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공리주의적 주장에 대한 비판을 약간 비틀어 보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덕윤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덕윤리는) 좋은것’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저자 역시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공리주의적 관점에 빠져서 덕윤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불필요하게 오타쿠를 꺼내어 들어서 본인의 설익은 주장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저자는 오타쿠를 변태 또는 역겨움의 존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논리 전개 자체의 미흡함은 차치하더라도, 너무나 편협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철학과 윤리를 논하는 '논리적인' 책은 거의 읽지 않은 나로서는 그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읽은 기억나는 책이라곤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조금 확대하자면) ‘만들어진 신’ 정도일 것이다. 비교 대상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가? 각자 자기 분야에서 30년 이상의 내공을 쌓은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불공평한가? 똑같은 한 권의 책을 두고 읽어야 하는 ‘독자’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평등하다고 생각된다. 모기룡 씨는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논리에 있어서 불필요한 부연설명이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정작 본인의 핵심 메시지도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책’은 저자의 주장만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이도 저도 아닌 방어논리가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정작 저자의 논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편이다. 이는 인터넷 글쓰기, 블로그 포스팅 성격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 같다. 만약 저자가 덕윤리의 가치에 대해서 주장하고 싶다면 끝까지 밀어부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자기 소신이 필요한 곳에서는 한없이 움츠러들면서 (마치 악성 댓글에 미리 ‘쉴드’를 치듯이) 정작 자기 소신이 불필요한 곳에서는 과잉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소신과 내공이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일관적으로 펼쳐 나가기에는 아직 미흡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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