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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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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이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소로가 말한 것처럼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런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또 그런 나라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p284, 맺음말 '훌륭한 국가를 생각한다' 중에서  

 국가, 그리고 국민. 단적으로 정의를 내리려고 할수록 난해한 문제가 되어버리겠지만, 한편으로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뭐라고 선명하게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국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를 차지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의지할 곳이 있으며, 국민인 우리들의 보호와 안전을 책임지고,  그 국가는 우리에게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부여한다는 것 등의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우리의 피상적이던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듯이, 이 책의 제목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그렇듯 막연한 생각의 틀 속에서 국가를 생각하던 평범한 우리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좀더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싶은 열망과 함께 말입니다. 

 저자는 크게 네 가지 국가론을 중심으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첫번째 물음을 헤쳐 갑니다. 첫째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표현되었던 국가의 형태로, 국가를 사회계약에 근거하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은 주체로 생각하는 '국가주의 국가론'입니다. 둘째는 로크에서 애덤 스미스를 거쳐 소로에까지 이르는 사상으로, 국가를 공공재 공급자로서 국한하여 시장경제와 대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한 '자유주의 국가론', 셋째는 국가란 단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마르크스주의 국가관', 그리고 넷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선과 정의를 펼치는 국가를 이상국가로 상정했던 것과 같은 '목적론적 국가관'입니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국가관에 대한 정리하고 할 수 있겠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 가지 국가론에 바탕을 두고 저자가 자신의 생각- 독자들에게 국가라는 주제와 연관시켜서 현실 정치인으로서 하고 싶었을 이야기- 을 펼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일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순수한 학문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기 보다는 현실 정치인인 저자가 자신이 처한 현실 정치를 고민하고 그 안에서 이끌어 낸 논지를 펼치고자 한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뒤에 네 가지 국가론을 펼쳐 설명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연이어 던지며 국가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갑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어떻게 국가를, 국가의 기본 질서를, 국가권력의 기능과 작동방식을 바꿀 것인가?', '진보와 보수는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진보 정치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어떤 것인가?', '정치인이 지켜야 할 윤리 또는 도덕법은 무엇인가?' ...... 순수하게 접근하더라도 관심이 가는 주제들이지만,  저자가 현실 정치인임을 주지한다면, 앞의 네가지 국가론을 바탕으로 물음을 하나씩 더해가면서 국가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저자의 의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처한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이 책이 말하는 지향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 아니 역으로 현실정치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곳을 이 책을 통해서 미래의 유권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첫머리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현실의 때를 깨끗이 표백한 이상을 담은 멋진 문장으로 치장-물론 마음 속의 진심이 담긴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심하게 왜곡되기가 쉬운 감성적인 표현이기에 하는 말입니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이리 대담하게 세상에 드러내어 놓고 평가를 기다린다는 점은 우리가 이전에 대하지 못했던 현실 정치인-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의 모습인 듯 합니다.  

 정치를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활동'으로, 진보정치를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정치'로 규정하는 저자의 생각은 처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현재 우리 정치세력의 판도 안에서 진보세력의 연합의 필요와 당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국가에 대한 고찰을 담은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자신이 정치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이러한 진보연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전하고 그 당위와 필요에 대한 이해의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었을 듯 싶습니다. 그런 면을 들춰내서 생각한다면, 이 책이 독자에게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멋진 물음을 던지기는 했지만, 결국은 현실 정치인이 현 정치판도에서 진보 세력이 다시 집권할 수 있는 길에 대한  돌파구를 설파하는 방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는 면에서 현실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상한(?)  정치 팜플릿의 한계를 벗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을 밀실이 아닌 열린 공간으로 들고 나와서 공론화시키려고 하였다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고, 결국 저자의 주장에 얼마만큼 공감하는지, 또는 유권자로서 저자의 정치행보를 얼마나 지지하고 있는지가 이 책이 가지는 한계와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진보연합에 대한 다양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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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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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글쓰기를 통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계속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일본 사회의 모습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다. 우파의 야비한 욕설이 울려 퍼지고 리버럴 세력은 공허한 양비론을 중얼거리며 방관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무참한 사회를 젊은 세대에게 남겨주게 되었다. 이 황량한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에서 무거운 마음을 북돋아 이 글을 썼다.... 나는 우에느 지즈코, 하나자키 고헤이, 이양지, 박유하, 와다 하루키,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 주제넘게도 '가혹하게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나라는 인간이 타인을 비난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소심한 평화주의자다. 내가 '가혹한 것이 아니라, 재인 조선인이 -모든 조선 민족이- 처해 있는 상황이 가혹한 것이다..... 구일본의 병사도천황 히로히토도 개인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응답은 빗나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식민주의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인 것이다. -p14-15, 저자의 말  

 모어와 모국어. 우리에게 두가지의 구분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모어와 모국어는 동일한 언어이고 그것이 당연시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모어(일본어)와 모국어(조선어?)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불일치가 간단치 않은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일본어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한 것을 예로 들어 그러한 불일치가 가져오는 폐해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역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한이 서린 저항 정신을 '보편적인 실존 응시의 사랑'이라는 그저 감수성이 가득한 서정시 정도로 읽히게 만들어 버리는데, 윤동주 시인의 시가 서정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사랑이나 화해의 언어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 안에서 가득한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과 한을 토로하는 그의 내면의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재일 조선인의 경우에는 모국어의 느낌 그대로가 아닌 모어(일본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를 읽고 감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고로, 번역과정에서 오는 번역자의 의도적인 -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오역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결국 모어를 통해 이 시를 감상할 수 밖에 없는 재일 조선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해자(일본인)의 방식으로 이 시를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괴리는 모국어가 아닌 모어를 통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재일 조선인이 겪게 되는 또다른 폭력이요, 지속되는 식민지배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1부에서 저자가 다루는 내용은 이러한 모국어와 모어의 괴리에서 오는 재일 조선인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이야기요,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국어의 권리'-일본인에 대하여-와 '모어의 권리'-남한 또는 북한에 대하여- 에 대한 주장이며, 이러한 식민지배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국어 내셔널리즘을 극복하고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새로운 다문화, 다언어 공동체를 지향하는 앞서가는 사회를 제안하는 글입니다.   

 프리모 레비.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의 체험기인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입니다. 저자는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데 힘이 되었던 것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신념에서가 아닌 '살아 돌아가 증언하겠노라'는 의지, 외부에서 자신의 증언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으며, 생환하여 그러한 증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는 너무도 생생한 증언을 듣는 이들의 피상적인 태도가 가져온 증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지 모르며 인간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자신을 지탱하던 '증언하겠노라'는 의지가 허무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증언의 불가능성'의 위기감이 그의 삶에 서려 있음을 지적하며, 그가 자살로서 그러한 증언의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그러한 경험과 자살에 이르는 비극이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었던 식민지 지배와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던 군사정권 시대의 종말과 민주화의 성취에 이르는 경험에도 그대로 투영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가 남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계속하며 그의 삶을 되새겨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또한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담은 <태양속의 남자들>이라는 작품을 통해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팔레스타인의 해방투쟁과 우리의 민주화 투쟁의 본편적인 동시대성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차원의 '우리들'이라는 연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고통스럽지만 성실하게 임하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와 전방 견학의 경험에서 시작된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선의 의미와 분열을 안고 사는 것의 아픔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3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은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의 사상적 퇴락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내에는 일본 우파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리버럴 세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호적인 면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리버럴 세력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오해나 호의는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조차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서 현대의 일본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저자는 그러한 과거의 역사에서 파생된 문제들에 대해서 현재의 일본인들이 책임지는 자세, 성실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데, 리버럴 세력은 내셔널리즘이나 패전후론과 같은 얍삽한 논리로 바로 이러한 집단으로서의 책임을 부정하거나 양비론적인 자세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의 리버럴 세력을 향하여 전후 세대의 일본인에게는 지금까지 여전히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게을리하고 있는 국가의 주권자로서'의 정치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국가를 통해서 유지되는 식민지배와 침략 전쟁의 열매는 누리면서, 그 국가를 통해서 자행된 악행에 대해서는 '죄가 없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현재의 전후세대가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현장에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법적인 의미의 죄는 없다고 하더라도,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부가 모두 피해자들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 현 상황에서 국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책임은 주권자인 일본 국민에게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을 일본인들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으로까지 연장하고 있는 면에서는 저자의 주장에 담기 진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다루는 주제들이 한반도라는 울타리에서 태어나 한국어라는 언어에, 한민족이라는 틀에서 길러진 나에게는 익숙한 것들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나를 둘러싼 저자와는 다른 그러한 환경이 저자가 제기하는 의문을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쉽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는 저자의 주장이 생생하게 귓가를 때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서 성실하고 일관된 지적 성찰을 마다하지 않는 저자의 진정성이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성찰을 마주 대하면서, 현대 우리 역사를 대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얼마나 안이하고 피상적인 것이었는지, 내가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게 마주하고 있었는지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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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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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개인적인 꿈과 사회적인 꿈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에 도움이 되며, 통찰의 순간들을 통해서 갈수록 세속화되어가는 시대에 지혜를 제공할 것을 꿈꾼다. 사회적으로는 개개인이 마음껏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토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가 창조되는 모습을 꿈꾼다. 나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고, 제아무리 참혹한 세상도 나를 흔들어 대지 못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 '후기', p247 

 Bertrand Arther William Russell. 수학자이자 논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였으며, 한편으로는 사회비평가이자 반전반핵운동에 정열을 불사른 사회운동가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던 사람..... 그의 삶의 여정이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20세기의 지성으로 추앙받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루어 내기 위해 몸소 행동할 줄 알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잃고 핍박을 받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꿋꿋하게 앞장섰던 열정에 가득 찬 삶을 살았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에 사로잡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러셀은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삶을 이끈 세가지 열정에 대한 이러한 언급과 자신이 추구하며 살던 개인적, 사회적인 꿈에 대한 자서전 후기의 글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들여다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제가 <Bertrand Russell's Best>인 이 책은 러셀의 저작물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모은 글이고 초고를 러셀이 직접 수정하기는 하였다고 하지만, 엄격하게 말한다면 러셀을 지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고 차라리 편집자에 의한 러셀의 글모음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러셀의 저작 한 권, 한 권이 주장이나 논리에서 있어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부분 부분을 발췌하여 모아 놓은 것이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온전하게 표현해 내지는 못할 것이고, 더더구나 글을 발췌한 사람이 작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글을 발췌하고 편집하는 과정에 편집자의 취향이나 생각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테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러셀의 열정적인 삶이나 인류에 대한 연민을 행동으로 표현하던 사상 자체가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고, 다만 이 책이 숲을 보지 못한 많은 독자들에게 숲속의 도드라진 나무 몇 그루만 보여주는 근원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덧붙이는 말입니다. 이 책은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그리고 윤리라는 주제하에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그에 어울리는 내용의 글들이 러셀의 저작에서 발췌되어 채워져 있는데, 전체적인 주제의 통일성 아래 배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글 전체가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수록된 발췌문 하나 하나가 그 나름의 독립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한 주제의 글들을 다 읽고 나서도 정리된 느낌보다는 여러 조각을 머릿속에 집어 넣은 듯한 느낌에 혼란스러움이 생기는데, 다행히도 각 주제의 말미에 '해설자의 닫는 글'이라는 글을 통해서 읽는 이가 러셀의 삶과 사상의 진수를 놓치지 않게 해당 주제에 대해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버트런드 러셀 최고의 재치와 지혜, 풍자를 모은 결정판' 또는 '러셀의 정수를 모은 책'이라고 표현되기는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의 진면목을 모두 체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한계점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러셀이라는 인물이 가꾼 커다란 숲을 이 책을 통해서 기어이 모두 보고자하는 욕심을 버리고, 숲속에서 눈에 띄는 나무 몇그루만이라도 진지하게 감상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그리 인정하고 읽노라면, 세상에 대한 식견과 통찰력이 담기고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진실과 열정이 담긴 구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블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권태는 약물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고, 삶을 황폐하게 하는 권태는 활기찬 행동이 없는 곳에서 자라난다', '신념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증거가 있는 것을 신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2 더하기 2는 4" 혹은 "지구는 둥글다"를 두고 신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증거를 감정으로 대체하고 싶을 때 신념이라는 말을 쓰는 것 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과학이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자의 과업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이 글들을 통해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라는 질문으로 진지하게 되돌아 간다면, 읽는 이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러셀의 글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리는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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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 - 인간의 외모를 바라보는 방식을 리디자인하다
데버러 L. 로드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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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권리 옹호단체의 개혁 아젠다에서, 외모는 맨 윗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도전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한 때 우리 영혼의 상태를 향해 쏟아준 관심, 그런 종류의 관심을 이제 사람들은 육신의 상태를 향해 쏟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거의 대부분 전혀 건설적이지 못하다. 아름다움은, 그래, 한낱 한 꺼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훨씬 더 두텁다. 외모라는 것의 금전적, 육체적, 심리적 대가는 우리에게 좀 더 지대한 관심을 쏟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불의를 다 제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지만 틀림없이 조금 더 개선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외모를 단순히 심미적인 이슈로만 취급할 게 아니라 법적-정치적 이슈로도 취급해야 할 것이다. -p230~240   

 "'예쁘다'거나 '잘 생겼다' 혹은 '매력적이다'란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때, 각 개인이 지닌 주관적인 척도가 그 답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기에 '아름다움은 보기 나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척도가 존재하는 것 같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기준이 나름대로 통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은 아닐 것입니다. 인터넷 등을 통해서 세계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이 그러한 기준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인간의 외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합의하면 진실 (truth in consensus)' 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그러한 기준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신뢰성을 확보했다고 자신하는 듯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동안', '꿀벅지', '베이글녀', '~의 종결자' 등의 용어를 통해서 외모에 대한 평가가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현상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가지지 않고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눈에 보기 좋은 음식이 또한 맛있어 보인다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주목을 받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닐 것이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도 자아 실현의 한 방편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가치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자연적이고 순수한 의도를 넘어선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정상적인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듯 하고, 저자는 바로 그 경계선에서 현대 사회가  아름다움에 집착하면서 발생하는 외모를 가꾸기 위해 치르는 대가와 결과, 일상화된 외모에 의한 차별 등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미의 추구는 수치심이나 사회적 강압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 여자들이 머리카락의 염색이나 보톡스의 사용 여부를 마음대로 선택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든지 직업적 능력이 부족한 걸로 간주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여자라고해서 남자들보다 한층 더 높은 미의 기준을 적용받아서도 안되며, 그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고 해서 허영이라고 조롱받아서도 안된다는 것. 남자들이 얼굴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도 늙어가면서 존경을 받을만하다면, 여자들 역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 -p34

 저자가 다루는 주된 문제는 아름다움 자체라기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해서 사람들을 차별하고 옥죄이는 도구로 변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이 한 사람의 취향이나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노력 등으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의 권력이 되고 차별의 이유가 되는 현대 사회 -또한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되는 외모에 대한 기준을 사회적 기준을 가진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거나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는 점, 그런 사회적인 현상을 부추기면서 부당하게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고 돈을 뜯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 외모에 의한 차별이 일상화되었지만 이 문제를 시정하려는 노력은 지극히 미약하며 그 자체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점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를 통한 외모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킨 여러가지 요인들을 살펴보고, 고착화되어 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이라는 간단치 않은 주제에 집중하여 현대 사회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노력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외모 지상주의에 취한 현대 사회의 추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은연중에 외모에 대한 허영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고, 또한 제기된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는 매력적인 외모가 선사하는 이점들, 그런 매력을 추구하는 데 드는 비용,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부당함을 과소평가한다. 수많은 인간들이 시간이나 돈이나 육체의 건강이라는 형태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 물론 외모로 인한 차별대우가 결코 인간의 가장 심각한 편견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공평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모와 관련되는 노력의 긍정적인 측면을 -예컨대 자기표현에서 오는 즐거움 같은 것을- 깍아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섹스 어필의 생물학적 역할이라든지, 미적인 고려에서 비롯되는 행동이 가져오는 건강상의 혜택을 과소평가하즌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목적은 외모를 터무니없이 중요시하느라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밝히고, 이를 시정하게 우해 필요한 여러 가지 전략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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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 - 명사와 함께하는 커피 1
스탠리 웰스 지음, 신우철 옮김 / 라이프맵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선한 친구들이여, 부탁하노니 / 여기 묻힌 유해를 파헤치기 삼가시오. / 이곳의 돌들을 귀히 여기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 / 그리고 내 유골을 건드리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 -p24, 셰익스피어의 비문 

 '지난 400년 동안 셰익스피어는 천재적인 시인이자 극작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로 모든 감정을 표현했다. 정작 본인은 상상치 못했겠지만 그는 교양, 정치, 윤리 등 여러방면에서 대가로 칭송받았고, 이제는 셰익스피어라는 이름만으로도 성공, 도전, 논쟁, 광기, 재능 등이 연상된다....' 후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와같은 평가를 수긍할 것입니다. 1564년에 태어나 1616년 사망하기까지, 서른 몇 편의 희곡과 서너편의 시집을 남긴 영국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출신의 이 작가는 이제 단순한 극작가가 아닌 인류의 문화적인 상징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책과 연구서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가 이룩한 '세익스피어의 왕국'은 지금도 영토를 확장중이며 그 토대 또한 더 굳건히 다져가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한 열기가 수그러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에나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러한 찬사와 열광에 시간이 만들어낸 퇴적물일 뿐이라거나 당시에는 그렇고 그런 대중작가였을 뿐이라고 폄하하거나, 그가 그의 작품을 쓴 진짜가 아니라는 등의 호사가들의 목소리도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에도 그의 동료 작가였던 벤 존슨이 셰익스피어를 기리며 '한 시대가 아닌 만세를 위한 작가', '에이번의 달콤한 백조'라고 불렀고, 당대의 유명한 극작가며 시인이었던 로버트 그린이 약간은 질투심이 담긴 듯한 '벼락 출세한 까마귀'라고 평가한 것을 보면, 당대에는 대중을 상대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극작가였을 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작품들 속에 지금과 같은 위대함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그냥 시류를 따라하는 천박한(?) 짓거리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던 셰익스피의 생애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그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손바닥만한 크기인 이 책의 앞 몇 페이지에 기록하면 될 정도의 수준이겠지요. 하지만 이 책만 하더라도 그의 생애에 대해서 140여 페이지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고, 셰익스피어의 전기나 그의 삶을 다룬 책들은 수백 페이지에 이르기도 합니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의 작품집을 제외하고는 셰익스피어의 삶을 다룬 대부분의 책들은 글쓴이의 상상력이 담긴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셰익스피어와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그의 일생과 작품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상상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획의 본래 의도가 깊이 있는 지식의 전달보다는 간단한 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대화 중에 등장하는 여러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셰익스피어의 일생과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소개서로 간단하게 훑어보는 정도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커피 한잔을 조금 길게 마신다고 생각하고서 말입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도 셰익스피어의 일생에 대한 알려진 사실에 입각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노력했겠지만, 일생에 대한 균형있는 기록을 위해서는 저자가 고백하듯이 해석과 상상력에 기대어 대화를 이끌어 간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는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변명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개인들의 추측이 쌓여 알려지지 않는 셰익스피어의 일생을 한없이 복잡하게 얽히게 만들었고, 이런저런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어디서는 마치 사실인양 기록되고, 어디서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고 비판받는 경우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읽는 이로서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한다면 셰익스피어를 깊게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디더라도 그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여기에 덧붙여 번역서보다는 원서를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듯 합니다...... 

 부득이하게도 이 책에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셰익스피어의 삶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상당 부분을 상상력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이 인터뷰는 최대한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합리적인 추측으로 채워 넣으로 노력했다. 또한 사료에 나와 있는 셰익스피어를 인간적으로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셰익스피어를 생각이 깊고, 현명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성격 좋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되살려냈기를 바란다. -p11,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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