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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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가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였던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 p123-4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과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 풍기는, 정확하게 무엇인지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속 감정 한자락을 자극하는 퇴폐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로 인해 언젠가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한구석에 억눌려 있을 나 자신과 사람들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그래서 그러한 어두움이 내 자신의 삶에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해방감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실격자'..... 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수십여년의 삶속에서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는' 또는 '스스로가 정상적인 사람들의 삶속에 녹아들지 못한 실패자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절망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는지..... 삶을 돌아보면 그런 나약함(?)에 허우적이던, 내면에 꼭꼭 숨겨진 상처의 흔적을 누구나 한두개 쯤 가지고 있지 않을는지.....

 주인공 요조는 스스로를 '안팎 구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서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 그리고 결국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인간 실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마음이 너무 순수하여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익살을 통해서 세상과 스스로를 연결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또한 그것은 세상에서 자신을 꽁꽁 숨기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철저한 연기에 불과한 익살의 배후에 있는, 세상이 주는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상처받는 나약한 내면에게는, 자신의 비밀이 언제 탄로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그가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술과 담배, 창녀,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약한 심성에 그런 것들은 잠시 자신을 잊게 해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한 자책과 좌절의 악순환에 빠뜨리고 마는 듯 합니다. 그의 삶은 술과 여자, 자살과 마약, 가족과 아는 이들에게서의 외면당함, 정신병동에의 입원 등 파멸로 향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는 결국 자신에게 '인간 실격'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인간이라고 태어났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의 자격이 없다는 자기 인식에 이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아마도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이 자살..... 또는 살아 있으되 아무 의미가 없는 삶..... 그런 것일 듯 합니다. 삶과 죽음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역자가 소개하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면, 소설속의 요조와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요조가 말하는 수기속의 많은 사건들은 작가의 삶속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듯, 삶에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모습까지도 그대로 닮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이 작품속에 자신의 생각과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 세상과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이 작품만큼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시회에 융화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렵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 그런 뜻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요조를 통해서 분명 인간사의 허위와 잔혹함, 배신과 사악함의 그림자들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저런 이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소개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런 삶을 지지해 줄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아무도  감히 적나라하게 파헤쳐 표현하지 못하던 인간의 허울을 한겹 벗겨내 보였다는 것, 우리 내면에 숨겨진 나약함과 어두움에 대한 진솔한 대면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이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긍정에도 불구하고, 요조의 파멸을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위선과 잔인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작가 다자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를 부정하는 쪽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자는 작품해설에서 '요조의 고뇌를 인정할지 하지 않을지가 다자이를 받아들일지 부정할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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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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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막 1장의 중간에 등장하는 햄릿의 독백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을 지금까지는 당연하게 '사는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저자는 '<To be or not to be>가 <사느냐 죽느냐>를 포함하는 존재와 비존재를 대비시키고 있기 때문에, 또 이 독백이 살고 죽는 문제를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명시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모호하며 지극히 함축적인 일반론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사의 선택으로 옮김은 미흡하다고 생각된다.'고 말하며 자신은 '원문의 뜻과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순우리말 <있다>와 <없다>의 변형인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번역하였고, 한자 개념으로 쓸 경우 <존재하는냐 마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고 말한다. 또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과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삶이냐, 죽음이냐> 등의 다른 이들의 번역도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가 이 독백에 담긴 햄릿의 갈등에 대한 세심한 고려후에 나온 것들일 것이고, 읽는 이로서도 이의 의미를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들여다보게 만드는 대목인 듯 하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도 고전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되지 않을는지.....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많은 명작들을 나이가 들어 새로이 읽노라면, 실제로는 본문을 읽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한 느낌이나 감상보다는, 과거의 학습을 통해서 미리 만들어진 감상의 틀속에서 읽고 있는 모습을 매번 느끼게 된다. 처음 배울 때, 배움과 책읽기가 함께 동반되었다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느낌은 없었을텐데, 나 역시 고스란히 우리 교육이 속성으로 찍어낸 붕어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이에게 연극과 셰익스피어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 어린이용 햄릿과 함께 읽을 수 있다면 한번 읽어보라는 의미에서 구입했던 이 책이 결국은 내손에 먼저 들려 읽히게 되었지만, 읽으면서 내용보다 먼저 앞서 달려가는 것은 햄릿의 우유부단함, 오필리아와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마지막에는 햄릿과 레어티즈, 왕과 왕비까지 모두가 죽게 되는 비극을 넘어선 참혹함, 그리고 그들의 갈등 속에 자리잡았던 악행과 속임과 광기 등 교과서적으로 배웠던 내용들이고, 결국 그러한 선입견은 작품자체를 나의 방식대로 순전히 느끼고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만다. 아마도 그러한 방해를 극복하게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저자의  <To be or not to be>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각주와 같은 세심한 설명이나 아니면 조금더 여유를 가지고 각 배우들의 대사에 대해서 좀더 주의깊게 생각하며 읽어가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만에 손에 든 <햄릿>이 많이 이야기를 내게 하기를 원하지만, 이번에는 <있음이냐 없음이냐,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독백 속에 담긴 인간 존재에 대한 고뇌를 스스로 되뇌이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다음에는 또 그때의 이야기가 내 가슴속에 남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 Frailty, thy name is woman. 약한 자여, 네 이름은 여자로다. (1막 2장) 

- 난 그저 북북서로 미쳤을 뿐이야. 바람이 남쪽으로 불면 뭐가 발인지 톱이지 분간할 수 있다고. (3막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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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출간 15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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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서로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길모퉁이 식품점의 남자, 자동차 정비소의 수리공, 주치의, 선생님, 이웃, 동료들이 그렇다. 항상 '거기에' 있는 좋은 사람들, 작은 일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매일 우리를 가르쳐주고 축복해주고 용기 내게 해주고 지지해주며,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을 하지는 않는다. /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를 의지하고, 우리를 지켜보며, 우리에게 배우고 뭔가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누가 그러는지 우리는 결코 모른다. /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자신이 중요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여러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늘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새롭게 복간되는 개정판을 받아 들고서 20여년전에 보고 책꽂이에 그대로 놓여있던 구판을 먼저 펼쳐보았습니다. 그때는 내게 어떤 느낌으로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희미하기만 하지만, 아직까지 제목만큼은 그 당시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첫번째 이야기 '나의 신조'에 나오는 저자가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말하는 여러 내용의 대강과 '너구리'편에 나오는 낭만적이지 않은 너구리 부부의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가 어렴풋이나마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릅니다. 처음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저자가 말하는 핵심이니 당연하겠지만, 다른 것은 다 망각속으로잠겨 버렸는데, 왜 너구리 부부의 소란스러운 사랑 이야기만 그런 망각의 늪에서 구원받았는지는 내 자신도 모를 일입니다.  

 첫머리에 옮겨적은 본문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16년간이나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손질해 주던 이발사를 생각하며 저자가 우리 인생의 한 단면에 대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넓은 세상에서, 우주 만물을 둘러보다보면 한없이 하찮은 것 같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삶의 의미가 되듯이, 또한 우리 각각은 누군가가 의지하고 만나고 싶어하고 안아주고 싶어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는 이 부분이, 이번에는 내 눈길을 한없이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았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다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앞의 두 이야기와 더블어 기억의 수면위로 모습을 들어내 보이며 내 지나온 삶이 어떠했는지를 돌이켜보게 하는 내용이 될 듯 합니다. 한편으로는 어린시절, 파란 하늘을 눈망울 가득히 담을 줄 알던 시절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어도 마음으로는 금방 알았을 것인데, 이제는 누군가가 이리 글로 써서 눈앞에 보여주고 나서야 '아 정말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더 많은 돈과 물질과 명예를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어린시절 그때만큼 만족함을 가지지 못하고 한 구석에 무언가 허전함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잊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들을 세상의 가치와 바꾸고 잃어버린 연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은이가 말한대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갈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아주 어린시절에 모두 배우고 익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으로서의 삶이 복잡해지기는 하였어도,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이지에 대한 지혜는 어릴 때 배웠던 '무엇이든지 나누어 가지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아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등의 가르침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주변을 세심히 살핀 이야기와 통찰들은 나의 삶속에 담겨 있는, 내가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던 작고 사소한 것들, 잊어버렸지만 잊어버리지 말아야 했던 것들, 그리고 알면서도 어른이 되면서 배우게 되는 위선이나 속임수들에 의지해서 회피하던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을 사심없이 들여다보고,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배운대로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 자신부터가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는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보았다면 아마도 내 주변은 훨씬 밝고 활기차고 살만한 곳이 되었을텐데..... 하지만 언제부턴가 어린 시절 배웠던 단순하고 명료한 가르침이 우선하기보다는 어른이 되면서 배우게 되는 속임과 무관심, 적절할 때 쓰기위해 숨기고 있던 가면과 변장술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사는 방법 또는 지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금 세상에 정말 희망을 주고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그러한 삶의 지혜는 대학의 상아탑이 아닌 유치원의 모래성, 어릴적 코를 훌쩍이던 시절에 배웠던 아주 단순하지만 명료했던 가르침들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그리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러한 가르침을 들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용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해야 한다는 것도 그 시절에 배움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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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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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과 외로움.... 이러한 시간들이 낭만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듯 합니다. 물질적으로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을지로도 마음에 여유가 있었고 삶에 여유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기억입니다. 언제 어디서쯤엔가 잃어 버린줄도 모르고 내 삶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버린 것들인데,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내게도 기다림을 가슴에 새길 줄 알고, 외로움 또는 혼자있음을 스스로 즐길 줄 아는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모두가 문명의 발전을 말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는 이 시절에 저자는 다시 그러한 것들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이 있지 않느냐고 이 책을 통해 물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얻은 것들을 단순히 발전이나 진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한 사람의 존재로서 세상을 더 살만하게 해주던 어떤 것들을 포기한 댓가는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에서 말하던 만큼의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비틀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이 책을 통해서도 저자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의 삶에서 빠져나가버린 것들은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지 않는 친구, 아니 이제는 다시 곁에 올 수 없는 친구를 기다리는 것,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고 미래를 쫒다 과거를 잃어 버린 친구에 대한 단상 등....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인생에 켜켜히 쌓여가는 손때 묻은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 또는 소중함에 대한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또한 도주를 꿈꾸며 기차에 오르는 것, 조용히 술집에 앉아 다른 사람들의 소란함을 느끼는 것, 선술집에서 함께 텔리비젼 보기 등에서는 세상에 함께 휩쓸려 조용히 눈길을 보내고 바라보고 느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소통과 융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은 효율만을 앞세워서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이 시대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면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기도 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한 흑인 여성의 에피소드는 부모가 또는 누군가가 알려준 자신의 생일이나 고향에 매여 사는 우리 삶의 피상성에 대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내 삶에 시가,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담긴 에세이들이 풍요로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삶속에서도 시가 보이고 에세이들이 풍요롭게 담겨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삶속에서도 그들의 삶속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입니다. 미래만 바라보고,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과 깔끔함과 편리함 만을 누리다가 과거속에 묻힌 손때 묻은 시간의 소중한 흔적들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그것들이 소중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내 삶의 과거를 만지작거리며 되새김질 할 수 있는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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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시 - 시인 최영미, 세계의 명시를 말하다
최영미 / 해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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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가 있으면,/ 사랑이 없더라도 / 황야도 천국이 되니" 

  인생을 살며, 시집 한 권과 빵 한 덩이, 그리고 포도주 한 잔만으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세상에 둥지를 튼 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삶 어느 순간엔가는 그러한 충만함을 가슴에 담고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을 얻고, 자녀를 얻고, 간절히 소망하는 무언가를 이룬 순간에..... 아마도 많은 이들은 마음속에 그러한 충만함도 함께 지닐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을지라도, 자녀가 품을 떠나버렸을지라도, 그리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더라도 시집 한 권과 빵 한 덩이, 그리고 포도주 한 잔으로 천국의 기쁨을 누리노라고 고백하는 영혼이 있다면, 우리의 눈에 아마 그 영혼은 대단히 불행하거나 대단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는지..... 그래서 결국 첫머리에 언급한 “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가 있으면, 사랑이 없더라도 황야도 천국이 되니”라는 말은 삶의 지난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 인생의 쓰디쓴 뿌리를 소화시켜 본 적이 없는 영혼이 인생의 겉멋을 그럴 듯하게 과시하기 위해 읊조릴 말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주 멋져 보이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한 사람의 시인이 사랑하고, 그 시인을 키웠던 시들을 모아놓은 시집. 이러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의 작품집을 읽는다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일입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시인의 고된 노역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삶 어느 구석에 박혀있었을 가시를 치료하고 보석들을 닦아서 빛낸 앞서간 선배들의 선물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또한 같은 글이라도 읽는 이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깊이와 넓이의 차이가 있을 터인데, 거기에 덧붙여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여로에서 함께 보듬고 살며 반복해서 되새기던 시어들이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하루 또는 며칠 만에 후다닥 읽고 나서 감상을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듯합니다. 그의 말과 느낌을 듣고, 시인이 이 시들을 골라 모은 사연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것이 시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보여야 할 예의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한 사람이 시를 읽고, 그 안에서 삶의 감춰진 충만함을 얻으며 걸어가기에는 너무 바쁘고 각박한 것일지 모릅니다. 내일 양식을 걱정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미래를 힘겨워하는 현실에서는 시 한 구절을 읊조리는 여유가 사치라고 여겨질 만합니다. 하지만 시인의 바람처럼 그녀가 차린 '언어의 성찬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더 깊고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게' 된다면, 사치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힘겨운 현실을 보듬고 일으켜 세우는 지주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이러한 계기를 통해서 직접 ‘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시를 알아보는 맑은 눈들이 늘어’날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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