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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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오 선생, 여러 차례 여러번/ 당신께선 내 돈과 고리에 대하여/ 리알토 안에서 날 꾸짖었지요./ 그래도 난 그걸 묵묵히 떨치며 참았어요/..... /당신은 날 오신자, 무자비한 개라 하고/ 내 유대인 저고리에 가래침을 뱉었는데/ 그 모두가 내 것을 사용하는 대가였죠./ 근데 이젠 내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오./ 아, 그래서 당신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샤일록, 돈이 좀 필요하오."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침을 내 수염에 쏟아 놨던 당신께서,/ 이 몸을 낯선 개 내차듯이 문지방 너머로/ 발길질한 당신께서 돈을 간청합니다./ 뭐라고 답할까요? 이런 말은 안 될까요?/ "개가 돈이 있나요? 개가 삼천 다카트를/ 꿔 주는 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아니면/ 몸을 낮게 구부리고 노예 같은 어조로/ 숨소리를 죽이고 겸손하게 속삭이며/ 이렇게 말할까요?/ "선생께선 지난번 수요일 제게 침을 뱉었고/ 어느 날은 저를 발로 찼으며 또 한번은/ 개라고 부르셨죠. 그러한 예우의 대가로/ 이만큼 돈을 빌려 드립니다." 라고요? - 1막 3장 106-130행, 샤일록 

  자신의 수염에 침을 뱉고, 개처럼 내차던 사람이 돈을 빌려 달라고 나타난 장면에서 나오는 샤일록의 이 대사에는 그동안 안토니오와 그의 동료들-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사를 바로 맞받아치는 안토니오의 대사 -난 너를 다시 한 번 그렇게 부르겠다. 다시 한 번 침을 뱉고 차기도 하겠다. 이 돈을 빌려 줄 거라면 친구에게 빌려 주진 마라. 우정이 그 언제 친구에게 불모의 쇠를 주고 새끼 쳐서 받았더냐? 그보다는 차라리 적에게 빌려 줘라, 그가 만약 어기면 더 편한 얼굴로 벌금을 강제할 수 있을 테니-를 보면 샤일록의 말들이 과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 갈등의 배경 속에서 샤일록은 안토니오와 '정한 기한에 돈을 되갚지 못할 경우에 벌칙으로 안토니오의 살 일파운드를 도려내겠다'는 계약을 맺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상대의 신체에 상해를 가하는 계약의 내용에 문제가 있으므로 이러한 계약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상해를 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계약 자체는 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됩니다. 결국 안토니오는 배가 파선함으로 인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샤일록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고 계약대로 하자고 주장하면서 이야기는 갈등을 향해 치달아 갑니다. 공작과 바사니오 등의 회유와 타협안에도 미동도 않는 샤일록의 굳은 마음은 법정에서 안토니오의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위로 살 일파운드를 떼어내고자 하고, 안토니오도 체념한 듯 계약을 이행하려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알듯이- 이야기의 반전은 그러한 계약 내용의 문자적인 헛점을 파고드는 포셔의 명철함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잠깐만 멈추시오, 다른 게 있소이다 - 계약서는 당신에게 피 한 방울 주지 않소. 명시된 문구는 "살덩이 일 파운드"요. 그러니 계약대로 살덩이 일 파운드 가지시오. 하나 그걸 잘라 낼 때 기독교인 핏물을 한 방울만 흘려도 당신 땅과 재물은 베니스 국법에 의하여 베니스 정부로 몰수될 것이오. 언제 읽어도 이 장면에서의 극적 반전은 안토니오의 환호와 샤일록의 당혹감을 생생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법리적으로는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차가운 법의 심장으로 판단한다면 이 판결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고, 상해를 가하고자 하는 계약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파기하는 것이 더 옳을 듯 하지만, 이 작품에 몰입해 있는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복수의 일념으로 굳어진 샤일록의 마음과 문자적으로 적시된 살덩이 일 파운드라는 문구의 견고함을 유연하게 헤집고 그 허점을 파고든 포셔의 판결문에 더욱 큰 공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법리적으로는 명확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분명 문학적으로는 유쾌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에는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갈등과 포셔의 개입으로 인한 극적 반전이라는 줄거리 외에도,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우정, 포셔가 남편을 고르는 과정, 바사니오와 포셔의 결혼, 반지를 통한 사랑의 재확인, 샤일록의 딸 제시카와 로렌초와의 사랑 등과 같은 이야기들도 나름의 무게를 가지고 이 작품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포셔가 남편을 고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종차별적인 대사,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동성애에 대한 의심, 앞에서 언급한 포셔가 재판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 여부와 판결 내용의 법리적인 타당성 등에 대한 논란이 있는 듯 합니다. 또한 작품 자체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논란으로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유대인이 적어도 법적으로는 영국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주장과 함께 유대인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차별적인 시각을 반영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주요한 주인공이 되는 샤일록이 자신과 자신의 동족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차별에 대해 정당하게 가질만한 분노를 안토니오와의 계약을 통해서 분출하고 법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분노의 이면에 있을 복수를 위해서 살인마저도 개념치 않겠다는 냉철한 마음에는 결코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안토니오와 그의 동료들을 편드는 감정이 가지는 불편함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분명 살인을 감수하고서라도 복수를 행하겠다는 샤일록의 자세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포샤의 판결 뒤에 더해지는 샤일록의 재산 몰수와 기독교로의 개종에 대한 판결과정, 그리고 판결전에 안토니오를 구하기 위해서 샤일록을 회유하는 바사니오 등의 감정섞인 비난 속에는 자신들이 샤일록을 향해 가했던 횡포(?)에 대한 사과나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고, 오히려 자기 입장의 정당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또 다른 굳어진 마음의 일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금궤에는 다음 글이 적혔군요./ "선택하면 다수가 원하는 걸 얻으리라."/ 두 번째 은궤의 약속은 다음과 같군요./ "선택하면 너 자신의 가치만큼 얻으리라."/ 세 번째 둔한 납은 퉁명스레 경고하길/ "선택하면 다 내놓고 위험 감수해야 한다"/.... -p56, 2막 7장, 4-9행, 모로코 왕  

 ..... 그러므로 화려한 금이여,/ 미다스의 굳은 음식, 난 네게 뜻이 없고/ 인간들 사이의 창백한 천한 일꾼/ 네게도 뜻이 없다. 하나 너, 초라한 납이여,/ 무엇을 약속하기보다는 협박하는/ 창백한 네 모습은 웅변보다 더 감동적이다./ 난 이걸 선택한다. 기쁜 결과 있기를! -p77, 3막 2장, 101-107행, 바사니오 

 낚시밥 하지요. -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도 내 복수에 쓸모가 있을 거요. 그는 날 망신시켰고 내가 오십만 정도를 못 벌게 했으며, 내 손실을 비웃고 이득을 조롱했으며, 내 나라를 모욕하고 내 거래에 훼방을 놓았으며, 내 친구들은 냉담하게 적들은 흥분하게 만들었소.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유대인이란 겁니다. 유대인은 눈이 없어요? 유대인은 손도 기관도 신체도 감각도 감정도 정열도 없냐고요? 기독교인과 같은 음식 먹고 같은 무기로 상처를 입으며,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방법으로 치유되며, 여름과 겨울에도 같이 덥고 같이 춥지 않느냐고요? 당신들이 우리를 찌르면 피 안 나요? 간지럼을 태우면 안 웃어요? 독약을 먹이면 안 죽어요? 그런데 당신들이 우리에게 잘못하면 우리가 복수를 안 해요? 우리가  나머지 부분에서 당신들과 같다면 그 점도 닮을 거요.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 잘못하면 그는 겸손하게 뭘 하지요? 복수하죠. 기독교인이 유대인에게 잘못하면 그는 기독교인을 본받아 인내하며 뭘 해야 하지요? 그야, 복수해야죠. 당신들이 가르쳐 준 비열한 짓을 난 실행할 겁니다. 그리고 어렵긴 하겠지만 교육받은 것보다 더 잘할 겁니다. -p69, 3막 1장, 52-73행, 샤일록 

 욕설로 계약서의 도장을 지울 수 없다면/ 큰소리 쳐 봤자 네 허파만 상하지./ 젊은이여, 불치의 파멸로 안 떨어지려거든/ 머리나 좀 고치게. 난 법을 기다리네. -p103, 4막 1장 140-143행, 샤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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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이저 - 전예원세계문학선 305 셰익스피어 전집 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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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일 여러분 가운데 시이저의 절친한 친구가 있다면 그분에게 말하겠소이다, 시이저에 대한 브루터스의 우정도 그분 못지 않다고. 그렇다면 아마 그 친구는 나에게 물을 것이오, 브루터스는 왜 시이저에게 역모를 했느냐고. 내 답변은 이렇소이다. 내가 시이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여러분은 시이저가 죽고 만인이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시이저가 살고 만인이 노예로 죽는 것을 원하십니까? 시이저가 날 사랑했기에 그를 위해 울었고, 그가 용감했기에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시이저가 야심가였기에 난 그를 죽였소. 시이저의 사랑에 대해서는 눈물이 영광에 대해서는 기쁨이 있을 뿐이오.... - p86~87, 3막 2장, 광장에서의 브루터스의 연설 중에서   
 

  '브루터스, 그대마저?' -'You, too, Brutus!'- 암살당하는 순간에 시이저가 내뱉는 대사입니다. 브루터스가 배반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기도 하고,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하여 자신에게 대항하였던 그를 사면하고 중요 요직에 기용하며 그의 재능을 아꼈던 자신의 사랑을 몸을 찌르는 비수로 되갚는 것에 대한 원망어린 질책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브루터스는 그대로 자신의 대의 명분이 있었으니, 시민들에 대한 연설에서 자신이 '시이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시이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변함이 없지만 황제가 되려는 시이저의 권력에 대한 야망을 용납할 수 없어서 암살한 것이라고 변론합니다. 그러한 자세는 다른 사람들과 암살을 모의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심지어 앤토니와 옥테이비어스에게 필리피 전투에서 패하여 자살하는 순간에는 '시이저, 이젠 눈을 감으시오. 내 심정은 당신의 가슴을 지금처럼 찌르고 싶진 않았소.'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인간 시이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여전했음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공적인 영역에서의 시이저에 대한 대담한 암살 가담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시이저에 대한 여전한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는 브루터스의 이중성은 그가 로마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창건한 루키우스 유나우스 브루터스의 자손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듯 합니다. 즉 자신을 사면하여 중용해 주고 로마제국을 강건하게 이끈 인간 시이저에 대해서는 한없는 존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로마의 공화정이 유지되고 그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었을 텐데, 시이저가 그러한 공화정을 위협하고 황제가 되려고 한다는 사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브루터스는 그 두 영역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의 운명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토마스 노드가 번역한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사극에서 비극으로 옮겨가는 시기에 씌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4대 비극이나 이후 작품에서 느껴지는 복잡다단함은 훨씬 덜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하더라도 내용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 듯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미처 알고 느끼지 못한 작가의 의도가 있기도 하겠지만, 작품의 큰 줄기는 로마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는 브루터스의 일관된 삶의 모습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암살을 모의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그는 결코 사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대의명분에 충실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공화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시이저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과 흠모도 탈색되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통해서 부각시키고자 했던 인간상은, 비록 이 작품의 제목이 <줄리어스 시이저>이기는 하지만, '이상주의자이면서 남달리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 도덕적인 근엄성과 자주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 정중하고 강직하며 자신에게까지 엄격할 뿐만 아니라 '명예를 위해서는 사랑까지도 거부하는 사람' 브루터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마지막에 앤토니의 입을 빌려 그의 처절한 죽음을 이리 추모합니다.  '이 분은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고결한 로마인이었다. 브루터스를 제외한 역모자들은 모두 위대한 시이저를 증오하여 그를 시해했소. 그러나 이분만은 공명정대한 정의감과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한패가 된 것이었소. 그분의 생애는 고결하였소. 그의 인품은 원만하여 그 때문에 대자연도 숙연히 고개를 들어 "이분이야말로 인간이었다!"고 전세계를 향해 외칠 수 있을 정도였소.' - p140, 5막 5장, 앤토니 

 

  ..... 만일 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한쪽 눈에는 명예를, 또 한쪽 눈엔 죽음을 준다 해도 좋소. 공평하게 대할 거요. 하늘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영예로운 이름을 존중하는 인간인 것을 알 것인즉. - p27, 1막 2장, 브루터스 

 ..... 브루터스는 현체제가 우격다짐으로 짓누르는 가혹한 생활을 감수하며 로마의 시민임을 자랑하느니보다 차라리 일개 촌민이 되리다. p30, 1막 2장, 브루터스

 ..... 머리를 베고 팔다리마저 자른다는 건 분노에 사로잡혀 죽이고, 죽인 후에도 증오하는 격. 앤토니는 시이저의 팔다리에 불과하오. 우린 제단에 제물만 바칠 뿐, 도살자가 되어서는 안되오, 카이어스. 우리가 궐기한 것은 시이저의 정신에 맞선 때문이오. 인간의 정신에는 피가 흐르고 있지않소. 오, 가능하다면 시이저의 정신만을 해치우고, 육체는 다치고 싶지 않소! 그러나 아, 시이저가 피를 흘려야 되다니! 동지 여러분, 그를 대담하게 죽입시다. 격분해선 안됩니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그를 벱시다. 사냥개한테 던져주는 시체로서 난도질해서는 안됩니다..... p53~54, 2막 1장, 브루터스  

 어떻게 피할 수 있겠소, 위대한 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 비겁자는 죽기까지 몇 번이든 되풀이 죽지만 용감한 자는 단 한 번 죽음을 맞이하는 법이오. 내가 아직까지 들어온 많은 일 가운데 가장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요. 인명은 재천이라, 갈 때가 되면 가게 마련이오. - p62, 2막 2장, 시이저 

 잊지 마오 3월 15일을, 3월 15일을 잊어서는 안되오! 위대한 줄리어스가 피흘린 것도 정의 때문이 아니오? 칼로 그의 몸을 찌른 사람치고 그것이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악당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소? 이땅 위의 최고의 인물을 다만 노략질을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한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제 와서 비열한 뇌물에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한없이 크고 엄청난 명예를 단지 몇 푼 안되는 돈에 팔아넘기고 그러고도 좋다는 거요? 난 차라리 개가 되어 달을 보고 짖고 싶소, 그런 로마인이 되는니. - p107~108, 4막 3장, 브루터스 

 좋은 말은 악랄한 칼보다 나은 것이다, 옥테이비어스. - p124, 5막 1장, 브루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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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개의 봄 -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일기
김기협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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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분들에게 읽어달라고 책으로 내면서 이것 하나만은 꼭 강조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괴로움도 함께 나눈다는 사실. 운명이 주는 괴로움은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통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원망이 아끼는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모습을 바꿔서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주어지 인연을 등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 p11, <엄마찾아 60년> 중에서 

 노년에 이르러 쓰러진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병간호하는, 역시 노년에 이르러가는 아들 사이의 훈훈한 이야기..... 처음 책소개를 보면서, 저자가 역사학자라는 사실에 따라붙는 여러 기대는 차치하고, 딱 그 정도 만큼만 바랐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노년에 이른 부모를 둔 자식으로서, 마음 속에서 마저 흐려져가는 부모에 대한 자식된 도리를 조금이나마 다잡을 수 있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효자가 못된다고 되뇌이면서, 그리고 살아온 동안 어머니와의 갈등을 숨기지 않으면서, 저자는그렇게 쓰러진 어머니가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을 담아 주변 사람들에게 읽혔던 글을 이리 책으로 엮어 미지의 독자들에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기력을 회복하고, 식욕이 좀더 늘고, 말을 좀더 조리있게 하고, 농담과 욕을 섞어 교감하기 시작하고..... 아들의 글에는 노년의 어머니가 보이는 이런 작은 변화와 회복에도 감사할 줄 알고 감탄할 줄도 아는 순전함과 훈훈함이 담겨 있습니다.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저자의 어머니를 향한 그런 순전함과 함께, 병원에 모신 어머니를 미련스럽게 찾아가는 아들의 또 하루의 기대를 담았던 발걸음이 먼저 눈앞에 밟히기도 합니다. 요즈음 같은 시대에 많은 이들은 좋은 시설에 부모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자식으로서의 짐을 덜어 버리는데..... 분명 저자의 간병 모습은 요즈음의 세태를 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물질에 앞서는 가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식된 도리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들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가족', 저자의 생각처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언제든지 스스럼없이 손내밀고 도움을 요청하고 감싸안을 수 있는 울타리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누구보다 더 싸우고 갈등을 일으키는 아픔을 담은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운명이 주는 괴로움을 가장 통렬하게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거기에서 오는 원망과 갈등도 고스란히 서로 짊어져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간병의 시작도 바로 그런 어머니와의 갈등과 원망이라는 바탕에서 시작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쓰러지고 간병이 시작된 뒤로 씌여진 글들에는 그러한 갈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갈등이, 서운함이 있었다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노모에게 자신의 도움과 관심과 사랑이 필요함을 잘 아는 자식에겐 지난 날에 담겨 흘러가는 그런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갈등에 대한 기억들이 노모를 더 이해하고 감쌀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하니, 좀 과한 표현일지 몰라도, 노모가 쓰러진 것은 이 두 모자가 화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하늘이 준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적은 2년여의 일기속에 담긴 저자와 노모가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와 교감의 모습은 삶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늙어서도 생생하게 피어오를 수 있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 모습은 다른 어떤 거창한 생각이나 사상보다도 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섬세한 섬김을 통해 화해와 사랑을 담아놓은 이 책속에, 저자의 마음속에 박혀있는 따가운 가시가 언뜻언뜻 느껴지는 내용이 여과없이 함께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나 자신의 정치관에 대한 강단있는 표현은 그나마 저자의 개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2010년 4월 22일 일기의 처음 페이지에 담긴 모병원에 대한 감정을 정화시키지 않은 표현 -예를 들면 '년놈들'-은 이 책이 담은 내용과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야말로 시병일기로서만 머물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알지 못하는 미지의 독자들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출간되는 것이라면 표현이 좀더 순화되거나 에둘러서 표현하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단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습니다. 불쾌했던 대우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거친(?) 표현의 이면에서는 독자에 대한 배려없음도 함께 느껴지기도 하고, 훈훈한 인간적인 정과 사랑을 담은 책 전체 내용에 대한 불편한 시선마저 문득 일게 된다면 너무 과한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출판과정에서 걸러져야 했을 문제일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욕을 들어야 했던 '년놈'들만이 아니라 무심코 읽던 '분'들 중에도 기분좋게 넘어가지 못한 이들이 있을테니 말입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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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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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참으로 드문 환영을 보았어. 꿈을 꾸었는데, 인간의 머리로는 그게 무슨 꿈인지 말 못해. 그 꿈을 설명하려 든다면 인간은 나귀 같은 바보일 뿐이야. 내 생각엔 내가 - 누구도 그게 뭔지 말 못해. 내 생각엔 내가 그리고 내 생각엔 내게 - 하지만 인간은 얼룩옷 입은 바보일 뿐이야, 내게 있던 걸 말해 주려 한다면 말이야. 내 꿈이 뭐였는지는 인간의 눈으로 듣지도, 인간의 귀로 보지도, 인간의 손으로 맛볼 수도, 혀로 이해할 수도, 마음으로 말할 수도 없어. 피터 퀸스에게 이 꿈으로 가요 하나를 짓도록 해야겠어. 제목은 '바틈의 꿈'이 될 거야, 왜냐하면 거기에 바틈은 없으니까..... 4막 1장, 203~215행, '바틈'의 대사 중에서  

 문득 장자의 호접몽을 생각하게 하는 4막에서의 바틈의 대사를 보면서, 이 연극에서 가장 꿈다운 꿈을 꾼 인물이 바로 바틈이라는 생각에 듭니다. 나귀의 머리를 하고서도-요정 퍽의 장난에 의한 것- 우연에 의한 것이지만, 요정의 여왕 타타니아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불행이라기 보다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정말로 꿈같은 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숲속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통해서 맺어지는 허미아와 라이샌더, 헬레나와 드미트리우스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퍽의 실수-또는 간섭-으로 인해서 실제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는 관계의 변화를 경험하지만, 결국은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에 초청되어 함께 결혼식을 올리고 위태롭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숲속에서의 혼란스런 꿈을 낳았고 그 꿈은 더 아름다운 현실을 낳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들은 꿈같은 현실을 경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타니아의 사랑을 받은 바틈은 그야말로 신비로운 사랑의 약초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던 일장춘몽을 꾼 셈입니다. 진짜 바틈은 없고, 나귀 머리를 한 꿈속의 바틈과 현실 속에서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타타니아와 요정들이 만들어 낸 '바틈의 꿈'......  그것은 현실에서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서 꿈같은 노래 가락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나마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바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이 서로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겪는 사랑의 여러 모습과 실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바틈과 그 동료들이 테세우스의 결혼식에서 보여주기 위해 연습했던 '피라무스와 디스비'-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와 비슷한-의 이야기 같은 비극적인 사랑,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떠나서까지 사랑을 이루려고 한 허미아와 라이샌더의 사랑, 변심한 드미트리우스를 떠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헬레나의 사랑, 드미트리우스에게 비굴할 정도로 사랑을 호소하는 헬레나의 모습을 보고 정상적인 사랑을 이루어 주겠다고 나서는 요정의 왕 오베론 식의 사랑, 신비한 약초 또는 큐피드의 화살로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나귀 바틈과 타타니아 사이의 꿈같은 사랑 등..... 많은 사람들은 바틈의 꿈같은 사랑보다는 허미아와 라이샌더의 강렬한 사랑을 부러워하겠지만, 그러한 사랑 안에도 아픔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오베론의 숲속에서의 하룻 밤사이의 배신과 악몽을 통해서 멋지게 표현한 것은 아닐는지..... 아뭏든 연극은 요정의 숲속에서 겪은 꿈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바틈은 바틈대로,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그들대로, 그리고 헬레나는 또 그녀대로, 이런 저런 모습으로 만족스럽게 마무리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멋진 이야기입니다.  

 강력한 상상력은 속임수가 뛰어나서 / 그 어떤 기쁨을 감지만 하여도 / 그 기쁨의 원인이나 제공자를 떠올리오. / 또는 밤에 무언가가 두렵다고 상상하면 / 덤불은 얼마나 쉽사리 곰으로 보입니까! - 5막 1장, 18~22행, 테세우스 

 저희 그림자들이 언짢으셨다면 / 이러한 영상들이 보였을 때 /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 생각만 고치시면 다 괜찮죠. / 그리고 가볍고 시시하며 / 꿈처럼 헛것 같은 이 주제를 / 나무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 5막 1장, 422~428행,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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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일기 - 절망의 수용소에서 쓴 웃음과 희망의 일기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윤소영 옮김 / 막내집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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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결국 나는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보다 낫거나 못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 전쟁에 말려들었다. 처음에는 독일의 동맹군인 이탈리아 군인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독일군의 이탈리아 포로가 되어 버렸다. 1943년에는 영국군과 미군이 우리 집을 폭격하더니, 1945년에는 그들이 수용소에서 나를 풀어주고 깡통 우유와 통조림 수프를 선물로 주었다. 이게내 이야기의 전부이다. 흔해빠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떨어진 개암 껍데기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훈장이나 메달도 없이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승리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이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친구인 나 자신을 재발견했으니까 말이다. -p9-10, <사용설명서> 중에서 

 조반니노 과레스끼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나 <까칠한 가족>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 만의 독특한 유머와 웃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접하면서도, 비록 수용소에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발한 웃음과 유머를 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저자의 기질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다는 성급한 기대가 앞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현실을 억누르는 수용소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은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살아남는 다른 방식을 터득하도록 만드나 봅니다. 배고픔과 고립과 절망,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곁에 두고 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결코 잃지 않으려고 웃음과 유머를 찾고 있지만, 그런 삶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이야기 뒤에 담긴 어두움의 흔적들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아무런 전리품도 없이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절망속에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더 소중한 자신을 찾은 승리자'의 모습을 독자로서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작품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웃음과 즐거움보다 더 의미있는 것들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보고 느낄 만한 도량이 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1945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와서, 1943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독일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공책에 '자신이 했던 일과 하지 못했던 일, 그리고 보고 생각한 모든 것'을 적은 방대한 메모에 살을 붙여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저자는 '하지만 그때 정리한 원본과 그 복사본을 모두 난로에 던져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메모 일부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 이 책이라면서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모습 속에서 작가로서의 저자의 고집스러운 면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썼던 정리된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의 어둡고 절망스런 순간을 헤쳐 나왔던 기록의 생생함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자신과 동료들은 결코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고, 야만의 현장에서 자신들은 문명을 세우고 민주주의를 건설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저자의 자부심의 근원에 한발 더 다가서서, 삶을 긍정하고 희망을 키우는 노력들에 박수를 보내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여보고자 하는 공감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나는 배가 고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망들과 아침 풍경에, 내 위장이 품고 있는 소망과 아침 풍경이 더해진다.'-p79 / '시간의 흐름, 삶, 죽음, 저 철조망 너머 세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길가 한 귀퉁이에 버려진 것만 같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멀어져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p90 / '최소한의 음식과 담배꽁초로 이루어진 비참하고 의미없는 이런 날들 속에서 유일하고 활동적이고,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꿈일 것이다. 꿈을 꾸어야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몰랐던 가치를 찾아내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p68/ '그들이 사흘에 한 번씩 쥐여주는 감자 몇 알에는 이제 벌레처럼 축축하고 잿빛이 도는 긴 싹이 나 있다. 봄이 왔나보다'-p67.... / '하지만 진리는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견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 생각해주고, 어떻게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봐야 소용없다...... 자갈길에서 튀어나온 돌멩이처럼, 집단적인 공동 사고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자기 안에서 양심을 찾아야 한 다. 그리고 도덕적 개념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당신 자신이 지닌 의식의 체로 걸러내어 각각의 거짓을 가려내고, 진리를 찾아내야만 한다.'-p167-168 

 배고픔절망 속에서 을 잃지 않고 희망의 싹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진리를 찾아 진정한 자유로움에 도달하기 위해, 내면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가장 내밀한 이야기..... 바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아무런 꾸밈없이 민낯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며 안겨주는 삶의 진짜 모습입니다. 저자가 겪은 18개월의 삶은, 똑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도 언젠가 한번쯤은 삶의 모퉁이에서 만나게 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뒤로 물러설지도 모를 그런 악몽의 일부는 아닐는지.....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꿈과 희망, 진리와 자유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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