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셔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그녀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러셔>역시 그녀는 뭔가 잘 아는 여자다. 1994년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방에 도트프린터로 크게 프린트된 배너를 걸었다. CYBERPUNK. 당시에는 도트프린터로 뭔가 출력을 해서 벽에 걸어 놓기만 해도 사이버펑크적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2400 Mnp 모뎀으로 네트워크 게임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MUG를 즐기던... 그때였다. 사이버펑크의 가장 큰 화두를 들면, 바로 가상공간이다. 즉 현실이 아닌 것이 현실이라는 점은 최근 SF의 단골소재이지만, 그 공간을 그리는 능력은 순전히 작가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백민석의 러셔에서의 '가상'은 사막이다. 그저 현실의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한 가상의 사막은 또한 실재하고 있다. 실재하는 가상처럼 섬뜩한 것을 백민석은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가벼운 불안감을 느끼게 하면서 '그래 그건 전뇌공간이야. 그렇게 되어간다는 것은 네트워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전뇌공간과 그 연결과 유지됨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의지이며 따라서 다시 '나'의 의미인 나의 내부로 회귀한다는 지극히 심심한 결론에 다다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래도 나름대로 심심한 공간과 어두운 미래를 그렸던 사이버의 시조 '뉴로멘서( Neuromancer)'가 바로 딱 그 전형을 보여줬다. 코드네임 J나 그 외의 몇가지 영화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존재라는 점에서 끝 없이 자신의 실존을 깨닫기 위해서 자신의 혀를 깨물며(사이보그화된 주인공에게서 남아 있는 유일한 감각이 있는 기관은 자신의 혀였다.) 살인을 일삼으로 폭주를 하는 AD Police의 에피소드들처럼 처절하게 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게임을 하듯... 그 막막한 사막에 던져진 것은 바로 독자인 내가 아니었을까? 현실을 그림에도 그 생경함과 지하실의 음습함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글이기에 SF라고 던져진 것은 오히려 쉽게 읽혀졌다.

책을 잡고 한번에 쓰윽 읽어내려간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짜피 나는 팬이라서 좋아. 쓸만해. 멋지다구, 이런 따위의 말 밖에 쓸 수 없지만, 러셔는 그저 표면에 나타나 있는 중앙제어에 대한 반감을 겔러그 오락기 앞에 앉으면 당연히 적기를 격추해야하는 그런 반성이나 사고(내가 왜 지구를 지켜야하나고???)없는 형태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천형적인 아나키즘의 표현방식, 그 하나의 형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게 무슨 본격 테러리즘 만세!를 그린 소설도 아니고, 세상을 확 부숴버려! 조정하고 관리하고 하는 인간들 재수없어!라고 신나게 설파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어느날 날아가서 신나게 부셔버리고 엔딩 타이틀 끝나고 최고 점수를 기록한 것을 뿌듯하게 보면서 이름을 적어넣는 오락게임 정도의 수준이다. 그러나, 그 뿌듯함이라는 것은 어짜피 엔딩을 본 사람만의 것이 아닐까? 더이상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없애버렸을 때의 사막을 백민석은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없는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을 찾아가는 짧은 로드무비가 <러셔>를 이야기하는 가장 맞는 단어일 것 같다.

일전에 전화했을 때에 그는 이미 범죄율이 가장 낮은 도시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다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쓴 짭쪼롬한 그의 글이 또 기다려진다. 난 작가는 무슨 글 못 써서 미친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은행 대기표 뽑아주는 기계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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