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활동수칙


첫째, 의열단원은 입단한 날부터 생명·재산·명예·부모·처자·형제를 일체 희생에 바치고, 오직 의열단의 주의·목적인 조선 독립을 위해 결사 모험으로써 활동한다.


둘째, 단원은 각기 특징에 따라 다음의 기술을 실제로 연습하고 연구할 의무가 있다. 검술, 사격술, 폭탄 제조술, 탐정술.


셋째, 암살·방화·파괴·폭동 등에 대한 기밀과 계획은 간부회의에서 지휘한다.


넷째, 활동 중 체포당하는 단원이 발생할 때는 반드시 복수수단을 강구하며, 단원을 체포한 자나 단원에게 형벌을 선고한 자는 반드시 암살한다.


다섯째, 암살 대상 인물과 파괴 대상 건물은 의열단 활동목표에 근거하여 실행한다. 특히 조선 귀족으로서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의 앙화를 초래한 대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도, 의연에 응하지 않는 자는 기어이 금년 안으로 처단한다.


여섯째, 의열단 명칭을 빙자하고 금전을 강청하여 의열단의 명의를 더럽히는 자는 반드시 엄벌한다.


일곱째, 주요 기밀 사항은 간부회의에서 결의한 후 공표하지 않고 해당 단원에게 출동을 명령한다.




3·1 혁명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192392 



 아나키스트 박열(朴烈)이 도쿄에서 일왕 부자를 

 처단하려고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박열과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불령선인회원들의

 의거로 알려졌지만


 실은 의열단과 연계되어 추진된 사건이었다.

 

 

 의열단원 김한 등을 통해 중국에서 폭탄을 반입

 하여 일왕 메이지(明治)와 왕세자를 처단하려다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동지들과 함께 구속된 

 박열은 일왕을 조선은 물론 일본 국민에게도 제거

 되어야 할 악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처단하기로 

 한다


 일제의 조서에 따르면, 박열은 제10회 공판 때 

 심문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열(왼쪽)과 가네코 후미코(오른쪽) 부부>


 는 일본의 천황, 황태자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일본의 황실, 특히 천황, 황태자를 대상으로 삼은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일본 국민에게 일본의 황실이 얼마나 일본 국민에게서 고혈을 갈취하는 권력자의 간판 격이고, 또 일본 국민들이 미신처럼 믿고 있고 신성시하는 것, 신격화하는 것의 정체가 사악한 귀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고, 일본 황실의 진상을 밝혀서 그 신성함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조선 민족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본 황실은 모든 것의 실권자이며 민족의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황실을 무너뜨려서 조선 민족에게 혁명적이고 독립적인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는 침체되어 있는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에게 혁명적인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일본 천황은 병이 들었지만 황태자와 함께 황실의 표면적이고 대표적인 존재이다. 특히 내가 작년 가을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조선 민족의 일본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열은 1922년 가을에 왕세자 결혼식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때 일왕과 왕세자를 폭살하고자 불령사 회원인 김한을 통해 상하이 의열단과 접촉했다. 그러나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경찰과 총격전 끝에 자결하면서, 이 사건으로 김한도 혐의를 받게 되고, 김한이 박열에게 폭탄을 구해주겠다고 한 약속도 무산되었다.

 

 첫 번째 시도가 무산되자 박열은 다시 폭탄을 입수하기로 했는데, 이 일의 책임은 김중한이 맡았다. 그런데 김중한이 일본인 애인에게 자신이 맡은 임무를 자랑삼아 얘기했다가 사건이 노출되고 만다. 결국 이 때문에 안타깝게도 계획을 실행해보기도 전에 박열을 비롯해 그의 동지들은 검거되어 국사범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박열은 일제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요구하는데, 그중 두 가지가 수용된다. 이는 일본 사법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박열의 재판이 있던 일본 법정>


첫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너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인 이상, 나는 조선 민족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이다. 천황을 대표하는 일본의 재판관이 법관을 쓰고 법의를 입는다면, 나도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을 쓰고 조선의 왕의를 입는 것을 허락할 것.

  

둘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국 조선을 강탈한 강도 행위를 탄핵하고자 법정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나의 질문에 답변하라. 즉 내가 법정에 서는 취지를 내가 선언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셋째, 나 박열은 일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로 말하도록 해달라. 조선어로 말할 터이니 통역을 준비할 것.

 

넷째, 일본의 법정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한다고 해서 재판관은 높은 곳에 앉고, 일본의 천황에게 재판받는 나 박열은 낮은 곳에 앉는 터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소위 피고와는 다른 사람이다. 때문에 내 좌석을 너희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어달라.





 일본 대심원 심판부는 여러 날 숙의한 끝에 첫째와 둘째 요구조건을 들어주고셋째는 재판부가 여론을 들어 거부하고넷째는 박열이 철회했다이리하여 박열은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의복을 갖추고 재판에 임했다.

 

 일본 정부는 박열 의거를 대역사건으로 몰아 박열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무기형으로 감형했다박열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23년 만에 석방되었으나 가네코는 옥중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 * * * *



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단체

총과 폭탄으로 피흘려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조선의열단


 

두레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출간될 <항일의 불꽃의열단사전연재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고도 해방 후 남북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소외당해온 의열단에 대해 조금이나마 재조명 해 보려 한다.





연재일정

 6/21(금) 예고편&1화_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단체 의열단

 6/25(화) 2화_왜적을 타도하자! '7가살'과 '5파괴대상'
 6/28(금) 3화_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박열의 일왕부자 처단 기도
 7/2(화) 4화_단재 신채호. '의열단선언'을 짓다
 7/5(금) 5화_폭렬투쟁에서 민중혁명으로
 7/9(화) 6화_'셈해지지 않는'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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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2019-07-2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박열 흥미롭게 보았는데 의열단과도 연관있다니 무척 놀랍습니다.
 

                                                  <조선의용대>


19191110일 새벽, 마침내 뒷날 일제와 친일파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에 벌벌 떨던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의열단은 이날부터 1929년 해체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의열투쟁 34건을 전개했다.


이날 의열단은 공약 10를 채택했다.



공약 10

 

1.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히 하고단원의 의()에 급히 함.

5. 의백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에서나 매월 일 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

9. ()이 구()를 위하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함.





의열단은 공약 10와 함께


7가살(七可殺),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

‘5파괴, ‘5가지 파괴 대상도 선정했다


7가살과 5파괴는 의열단이 활동하는 내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먼저 ‘7가살은 다음과 같다.



7가살(七可殺)

 

1. 조선 총독 이하 고관

2. 군부 수뇌

3. 대만 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의열단은 총독정치의 우두머리와 하수인들, 그리고 민족반역자 모두를 세분화해서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파렴치한들이었다.

(※ 토호열신은 악덕 지방 유지, 매국적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남의 나라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반역자를 말한다.)


 그런데 ‘7가살대만(타이완) 총독이 포함되었다는 게 눈에 띈다. ‘7가살에 타이완 총독이 포함된 이유는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타이완도 우리나라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데, 의열단은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일본인 타이완 총독을 처단함으로써 중국과 항일연대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이 ‘7가살과 함께 선정한 ‘5가지 파괴 대상은 다음과 같다.

 


5가지 파괴 대상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파괴해야 할 핵심 기관으로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선전기관인 매일신보사, 폭압기구인 각 경찰서와 기타 중요 기관을 지목했다. 이처럼 의열단은 처단대상과 파괴대상을 명확히 적시함으로써 활동목표를 공개했다.


 의열단은 어느 독립운동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우고자 하는 단호한 결의와 치열함, 그리고 조선 민중의 소망을 ‘7가살‘5파괴에 담아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이 없었으면 크게 건조했을 것이다. 일제에게 깔보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30여 차례가 넘는 의열투쟁도 시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의열단은 우리 독립운동사는 물론 민족혼을 잇고 침략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겨레의 거룩한 독립투쟁단체였다.

 

의열단이 창단될 때에는 성문화된 단의 강령 같은 것은 달리 없었다. 1923년에 단재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쓰기 전까지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 소유를 평등하게 한다4대 목표를 최대의 이상과 가치로 삼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평균지권(平均地權, 토지 소유의 균등화를 꾀한 민생주의 정책으로, 중국의 삼민주의에 따른 민생주의적 정책의 하나)은 의열단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조항은 지주·소작 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봤을 때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의열단은 단순한 독립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지향했으며, 대한광복회의 진보적 노선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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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단체

총과 폭탄으로 피흘려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조선의열단

 

 

두레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출간될 <항일의 불꽃, 의열단> 사전연재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고도 해방 후 남북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소외당해온 의열단에 대해 조금이나마 재조명 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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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단체

총과 폭탄으로 피흘려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조선의열단


 

두레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출간될 <항일의 불꽃의열단사전연재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고도 해방 후 남북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소외당해온 의열단에 대해 조금이나마 재조명 해 보려 한다.





연재일정

 6/21(금) 예고편&1화_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단체 의열단

 6/25(화) 2화_왜적을 타도하자! '7가살'과 '5파괴대상'
 6/28(금) 3화_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박열의 일왕부자 처단 기도
 7/2(화) 4화_단재 신채호. '의열단선언'을 짓다
 7/5(금) 5화_폭렬투쟁에서 민중혁명으로
 7/9(화) 6화_'셈해지지 않는'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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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의열단(義烈團)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략한 뒤 가장 두려워한 대상은 시기마다 달라졌다.

 

침략 초기에는 홍범도의 산포수 부대,

1920년대에는 김원봉과 의열단,

1930년대에는 김구와 한인애국단을 가장 두려워했다.

 

일제가 이들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현장사살등 특단의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이 등장하기까지에는 두 갈래 큰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193~4월의 거족적인 3·1 혁명이다. 한민족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가 비록 일제의 무력 앞에 짓밟히기는 했으나 독립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두 번째는 1911년에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석주 이상용 일가 등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북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민족사 교육과 신식 군사훈련을 시켜 10년 동안 군관 3,500여 명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나중에 훌륭한 독립군의 일원이 되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의열단원 9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흥 무관 학교>


 열단 단원 대부분은 국내에서 3·1 혁명에 참여했거나 항일운동단체에 가담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민족정신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김원봉, 이종암, 이성우, 서상락, 강세우, 김옥, 한봉근, 한봉인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의열단 태어나다.


 19189, 김원봉은 중국 난징(남경)에 있는 진링대학(금릉대학, 오늘날 난징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이듬해 봄 펑톈봉천, 오늘날 선양(심양)으로 건너가 서간도 류허(유하)현 구산쯔(고산자)의 허둥(하동)에 신흥무관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다. 그곳에서 이종암 등 동지 7명을 만났다.

 

이들은 6개월 과정을 마치고 나서 19196월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급격한 직접행동을 취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19119(음력 1027), 조선의 열혈청년 13명이 지린성 바후먼(把虎門, 파호문) 밖 중국인 농민 판(, ) 씨 집에 모였다. 이 집은 이종암이 망명할 때 가지고 온 여유 자금으로 세냈는데, 이곳을 거처 겸 연락처로 사용했다. 구국모험단에서 배운 폭탄 실험을 하는 등 일종의 비밀 아지트였다.

 

 지린의 11월은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초겨울이다. 대부분 20대였고, 오로지 조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인 이들은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을 새워 토론한 끝에 


정의로운일을 맹렬히실행하자


 라는 취지에서 단체의 이름을 의열단(義烈團)으로 정했다. 김원봉이 제안하고 동지들이 동의하여 결정했다.


 이로써 19191110, 중국 지린(길림)성의 농부 판() 씨 집에서 김원봉을 포함해 동지 13명이 발기하여 일제에게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항일독립운동의 결사체 조선의열단이 창단되었다.


 


















 중국 상하이(상해) 시절 의열단원을 지켜보았던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는 의열단원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조선 의열단>




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단체

총과 폭탄으로 피흘려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조선의열단


 

두레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출간될 <항일의 불꽃, 의열단> 사전연재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고도 해방 후 남북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소외당해온 의열단에 대해 조금이나마 재조명 해 보려 한다.

 





연재일정

 6/21(금) 예고편&1화_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단체 의열단

 6/25(화) 2화_왜적을 타도하자! '7가살'과 '5파괴대상'
 6/28(금) 3화_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박열의 일왕부자 처단 기도
 7/2(화) 4화_단재 신채호. '의열단선언'을 짓다
 7/5(금) 5화_폭렬투쟁에서 민중혁명으로
 7/9(화) 6화_'셈해지지 않는'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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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2019-07-2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참으로 시의적절한 책이 출간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