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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순간 K는 생각하였다.
어제 아침 자명종으로 시작된 불가사의한 현상은 이틀 동안 계속되어 아내는 가짜 아내로 결론 내렸고, 이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K는 H로부터 두 가지의 임상실험을 권유받아 JS와 어머니의 옛 사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미스터리한 연속적인 기현상과, 정교하게 복사한 위조지폐와 같은 복제인간의 출현으로 가상현실에서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망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p.288)
‘온전한 K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알파, K를 낳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이 태어나기 전의 태초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오직 말씀만이 존재하던 카오스의 신세기이자, 오메가의 천국이었다. (p. 378)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은 뒤집으면, 건강하지 않은 육체로 정신이 쇠락하면 그 무엇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감기 몸살 한 번 걸리면 일상 생활도 어려운 사람도 있으니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비단 보통의 인간뿐만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라고 해도 큰 병에 걸리면 반 강제적인 일시적 ‘절작(絶作)’으로 가는 것이 수순입니다. 그들도 결국 육체를 두른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들과 범인(凡人)의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는 ‘열정’, 다른 말로 ‘창작욕’일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지독한 그들이 육체와 정신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세우며 만들어낸 창조물은 과연 어떤 결과물이 될지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면 될 것입니다.
평범한 중년 가장 K는 자신이 단 한번도 자명종을 미리 맞춰놓지 않았던 토요일 아침, 문득 자명종 소리에 깨어납니다. 이런 이질감은 자신이 알몸인 채로 잠에 들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쓰던 것이 아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스킨을 세면대에서 발견하면서부터 점차 커지게 됩니다. 물건 뿐 아니라 아내와 딸도, 당연히 아는 얼굴이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인공의 느낌-마치 영혼 없는 로봇을 보는 듯한-너무나 낯섭니다. 잊고 있었던 토요일 오후-이렇게 중요한 이벤트를 잊고 있었다니, 이 또한 너무나 이상한-의 처제의 결혼식에서 만난 장인과 처제를 포함한 일가 친척들도 낯설게 느끼게 된 그는 이 낯설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다, 전날인 금요일 밤의 기억나지 않는 몇 시간-단순히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던-사이에 벌어진 일 때문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그는 금요일 밤에 있었던 일을 알아내기 위한 추적에 들어가게 됩니다. 과연 그는 이 낯익지만 결국은 타인들인 이들의 도시에서 지난 몇 시간의 기억의 행방과, 이로 인해 잃어버린 자신과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각자 처한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소설입니다. 종교에 귀의한 이에게는 진실과 영적 구원을 위한 시련을 견디는 이야기로, 반복되는 복잡한 현실로 인한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는 ‘낯익은 타인’이 되어버린 가짜 자아와의 이별을 통해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악의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대리 만족의 이야기로 말이죠.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지 위로가 될 뿐으로, 현실은 그대로일 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 K가 ‘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다. 내가 가는 이 현상의 띠는 안과 밖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적어도 K의 깨달음인, 나의 인생이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은 알게 될 테니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만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2차원 회색조의 현실에 입체감과 색채감을 부여하여 소위 말하는 좀 더 ‘힙’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소설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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