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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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남의 집 불구경 않는 군자 없다’는 도덕적인 것보다 흥미로운 것에 지배되기 쉬우며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성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속담을 이렇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남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보는 이유는 타인의 고난의 원인이 되었을 ‘불행한 운명’이 나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타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도 이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운명의 장난’이 더욱 극적으로 작용하는 비극이 더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리뷰할 ‘그녀를 지키다’처럼 말입니다.

아이가 석공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미켈란젤로처러 훌륭한 조각가가 되기를 바랬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미켈란젤로(미모) 비탈리아니’. 어머니의 바램대로 당당한 성품과 천재 석공예가의 자질을 타고 났지만 ‘불행의 운명’의 화살은 그를 비껴가지 않아 그는 왜소증으로 태어난 난쟁이었고 아버지는 전쟁으로 죽고 미모의 동생을 밴 어머니는 가난에 시달리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무능력하고 폭력적인 석공예가에게 도제로 보내고 맙니다. 위대한 석공예가의 꿈을 품었으나 괴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미모는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에 일을 하러 갔다가 그의 평생의 운명이 될 비올라를 만나게 됩니다. 뛰어난 머리와 강한 탐구심,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라는 재능의 날개를 타고난 비올라는 그러나, 난쟁이라는 천형을 짊어진 미모와 같이 ‘명문가의 조신한 여성 귀부인’이라는 불행의 운명을 타고났고, 그녀의 날개는 펼쳐질 수 없는 숙명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날개를 최초로 펼칠 수단으로 당시 막 발명되었던 비행기를 손수 제작해 하늘을 날고자 합니다. 비올라와 미모는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이제 열네 살이 된 그들에게 이 맹세는 진지했고,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였습니다. ‘불행의 운명’조차 꺾을 수 없는 염원을, 두 사람은 실현할 수 있을까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티칸에 의해 첨단 경보 시스템에 의해 그 정체가 철저하게 숨겨진 피에타상과 이를 만든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년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미모와 비올라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유폐되어버린 피에타상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소설을 읽게 되며 짐작하게 된-그러나 마지막까지 분명하게 사실로 드러나지는 않은-미모가 피에타상을 조각하게 된 이유와 과정은 미천한 도제에서부터 유명 조각가이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된 그의 성공기와, 그의 영혼이자 운명이었던 비올라의 격정의 인생, 그녀가 속한 오르시니 가문의 영광과 몰락이 모두 펼쳐지고 난 이후에야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그대로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 때문에 말이죠.

제가 계속해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그들의 운명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 운명의 장난이 초래한 엄청난 결과와 이로 인한 위대한 예술의 탄생을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목도하기만 할 뿐입니다.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더라도, 남은 인생 내내 이 ‘목도의 순간’은 우리의 정신을 휘감을 것이고,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라는 소설 속 문장을 떠올리며 나에게 올지 모를 운명의 순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의연하게는 말이죠. 미모의 피에타상과도 같은, 훌륭한 예술적인 문장을, 뛰어난 번역을 통해 때로는 두근거리고 때로는 기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강하게 추천하지 않는데, 이 소설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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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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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삼은 가상의 국가 ‘화국(=조선)’과 화국을 식민 지배하는 ‘라잔 제국(=일본)’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화국인 ‘제비’는 먹고 살기 위해 라잔식 이름으로 개명(=창씨개명)을 하고 라잔 예술성(=조선총독부 기관)에서 화가(=친일파)로 활동하기를 꿈꾸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시험에 낙방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잔의 군인에게 남편을 잃은 언니 ‘봉숭아’(=독립군)에게도 절연 당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라잔 방위성의 장관 대리 ‘하판덴’(일본군 장성)의 권유로, 라잔이 비밀리에 개발중인 기계 용 ‘아라지’에 생명을 부여하는 마법 문양을 그려 넣어 전쟁 병기로 이용하려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제비에 의해 깨어난 아라지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아라지와의 교감을 통해 절친이 된 제비는 아라지를 구출하려는 계획을 품게 됩니다. 한편, 제비는 전쟁 중에 언니의 남편을 죽인, 자신의 감시자이자 방위성 소속 결투관 베이와 친해지며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본서는 박경리의 ‘토지’ 등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기존의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허구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의 유명 작품이자 한국 장르소설에 한 획을 그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해 일제강점기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SF/환타지 장르소설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허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토지’와 ‘비명을 찾아서’의 경우는 그 내용과 결말이 이미 벌어졌던 역사적 과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 소설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수 있는 더 좋은(또는 더 못한) 미래를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윤하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이 주제는 독자에게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를, 타국에 사는 한국 출신 사람이 몸소 실천한다는 것은, 소위 말해 ‘국뽕’이 차오로고 주모를 찾는 정도의 기쁨인 것이죠.

작품 속에는 구미호, 자동인형, 마법 문양 등 동양적 요소들이 SF와 판타지 장르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특히 주인공 제비와 라잔 방위성 소속 결투관 ‘베이’의 관계는 동성애적 요소를 품고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진솔하게 그려져,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두 인물 간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격랑의 시대 속에서 지배국과 피지배국인 원수지간 개인이 정체성과 사랑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는지를 묻는 서사로 이어집니다. 화국 출신 제비와 라잔 출신(이곳에서 제작되었으니) 아라지의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유머 담당 티키타카도 작품의 재미에 한몫 하구요.

이윤하는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가상의 세계를 통해 그 시기를 특별하게 재조명합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디아스포라의 감수성이 섬세하게 녹아 있는 세계는 독자에게 익숙함과 현실감을 제공합니다. 그는 아픈 역사를 가상의 세계로 단순히 그려내는 것이 아닌,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상상력을 통해 새롭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정서와 감각으로 빚어진 이 특별한 SF소설은 독자 여러분께 잊지 못할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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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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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간 K는 생각하였다.
어제 아침 자명종으로 시작된 불가사의한 현상은 이틀 동안 계속되어 아내는 가짜 아내로 결론 내렸고, 이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K는 H로부터 두 가지의 임상실험을 권유받아 JS와 어머니의 옛 사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미스터리한 연속적인 기현상과, 정교하게 복사한 위조지폐와 같은 복제인간의 출현으로 가상현실에서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망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p.288)

‘온전한 K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알파, K를 낳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이 태어나기 전의 태초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오직 말씀만이 존재하던 카오스의 신세기이자, 오메가의 천국이었다. (p. 378)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은 뒤집으면, 건강하지 않은 육체로 정신이 쇠락하면 그 무엇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감기 몸살 한 번 걸리면 일상 생활도 어려운 사람도 있으니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비단 보통의 인간뿐만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라고 해도 큰 병에 걸리면 반 강제적인 일시적 ‘절작(絶作)’으로 가는 것이 수순입니다. 그들도 결국 육체를 두른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들과 범인(凡人)의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는 ‘열정’, 다른 말로 ‘창작욕’일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지독한 그들이 육체와 정신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세우며 만들어낸 창조물은 과연 어떤 결과물이 될지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면 될 것입니다.

평범한 중년 가장 K는 자신이 단 한번도 자명종을 미리 맞춰놓지 않았던 토요일 아침, 문득 자명종 소리에 깨어납니다. 이런 이질감은 자신이 알몸인 채로 잠에 들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쓰던 것이 아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스킨을 세면대에서 발견하면서부터 점차 커지게 됩니다. 물건 뿐 아니라 아내와 딸도, 당연히 아는 얼굴이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인공의 느낌-마치 영혼 없는 로봇을 보는 듯한-너무나 낯섭니다. 잊고 있었던 토요일 오후-이렇게 중요한 이벤트를 잊고 있었다니, 이 또한 너무나 이상한-의 처제의 결혼식에서 만난 장인과 처제를 포함한 일가 친척들도 낯설게 느끼게 된 그는 이 낯설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다, 전날인 금요일 밤의 기억나지 않는 몇 시간-단순히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던-사이에 벌어진 일 때문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그는 금요일 밤에 있었던 일을 알아내기 위한 추적에 들어가게 됩니다. 과연 그는 이 낯익지만 결국은 타인들인 이들의 도시에서 지난 몇 시간의 기억의 행방과, 이로 인해 잃어버린 자신과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각자 처한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소설입니다. 종교에 귀의한 이에게는 진실과 영적 구원을 위한 시련을 견디는 이야기로, 반복되는 복잡한 현실로 인한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는 ‘낯익은 타인’이 되어버린 가짜 자아와의 이별을 통해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악의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대리 만족의 이야기로 말이죠.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지 위로가 될 뿐으로, 현실은 그대로일 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 K가 ‘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다. 내가 가는 이 현상의 띠는 안과 밖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적어도 K의 깨달음인, 나의 인생이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은 알게 될 테니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만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2차원 회색조의 현실에 입체감과 색채감을 부여하여 소위 말하는 좀 더 ‘힙’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소설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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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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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이 쓰고 정보라가 번역했다니... 그 이름값만으로도 별 다섯개도 모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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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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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그는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자식,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여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이들의 고통이 신체 절단의 후유증과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라진 다리나 팔은 한때 살아 있는 몸에 붙어 있었고, 사라진 사람은 한때 다른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절단된 일부, 자신의 환상에 속하는 부분이 여전히 깊고 지독한 통증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치료가 가끔 이 증상을 완화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 치료법은 없다.(p. 68)

‘이것은 바움가트너에게 인간의 역사에서 벌써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 서로 의존하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심지어 가장 고립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해 주는 일일 뿐이었다. 로빈슨 크루소도 마찬가지인데, 만일 프라이데이가 나타나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p.171)’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p.245)’

우연히 떠오른 오랜 기억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고인을 기리는 추도사는 낭독이 끝남과 동시에 그 애도의 중지를 강요하지만, 우연히 본 물건을 통해 환기되는 반려와의 기억은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그 생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끝없이 뻗어나가는 나무의 가지와도 같이 우리를 무한한 추억의 정원으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원은 그 대상의 부재와 상실을 메꾸고 나쁜 기억마저 윤색한 만화방창(萬化方暢)의 장소입니다. 이 소중한 정원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기 위해서는 물론 나 자신의 어떤 정신적인 수고로움도 있어야겠지만, 무의식의 윤색이 더욱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모범’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 ‘바움가트너’를 읽어야 햘 이유입니다.

어느 날 아침, 노교수 사이 바움가트너는 우연이 빚어낸 한바탕의 소동으로 두번의 신체적 고통과 자신의 집을 청소해주는 부인의 남편의 손가락이 잘렸다는 소식을 경험하고, 통증과 피로로 진이 빠진 채 자신이 망가트린 새카만 냄비를 우연히 쳐다보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그 냄비가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내 애나와의 우연한 첫 만남 때 구입했던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나긴 세월을 함께했던 냄비의 상실이 환기시킨 아내의 기억은 그를 애나의 나무로, 이 나무를 포함한 바움가트너의 추억의 정원으로 안내합니다. 이곳에서 바움가트너는 40년간 함께했던 아내와의 희노애락의 세월과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지난 시절, 양장점 주인이라는 범인(凡人)이자 실패한 혁명가인 비범인(非凡人)이고자 했던 아버지에 대한 회상 등의 꽃이 열린 나무를 관조합니다. 이 내적 사유는 그간 자신이 썼던 글과 가꾸어온 가치관과 번역가이자 시인이었던 애나의 미발표 원고들이라는 덩굴식물과 자연스럽게 뒤섞이며 더욱 풍부해지는데, 이 덕분에 바움가트너는 공과 과가 분명했던 자신의 과거를 두려움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애나가 없는 남은 삶을 살아갈 용기도 함께.

인간의 삶에 있어 크고 작은 에피소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타인들과의 관계입니다. ‘인간관계’라는 얽히고 설킨 나뭇가지가 있어야만 ‘사건’이라는 잎과 꽃, 열매가 맺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움가트너는 그 성이 의미하는 바(정원사)대로 나무를 관리하고 잎과 꽃 등의 부산물을 정리합니다. 인생을 돌아보는 이 작업은, 폴 오스터의 문장을 통해 더욱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으로 탈바꿈합니다. 죽음을 예감하고 글이기에 어떤 비장미가 느껴지기도 하구요. 평생토록 ‘우연의 미학’을 사유한 거장의 유작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제본으로 이 소설을 만나게 되었지만, 정식 출판본도 예약 구매하였습니다. 표지가 정말 이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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