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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ㅣ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평점 :
<드디어 출간되는 그렉 이건의 '쿼런틴'과 다른 소설들>
본서 '쿼런틴'은 국내 번역된 웬만한 SF소설은 거의 다 읽어 본, 나름 SF 애호가인 제가 지금까지 수차례 읽었을 정도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인스타그램에 리뷰를 꼭 써보고 싶었던 소설인데 마침 이번에 허블에서 리뉴얼하여 출간하였습니다. 작가인 그렉 이건의 다른 출간 예정 작품들이 포함된 허블의 '워프'시리즈로 말입니다.
<'쿼런틴'의 스토리>
2034년 11월, 지구의 밤하늘에서 별들이 돌연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검은 구체인 '버블'이 태양계를 완전히 감싸 안았기 때문인데, 이를 기점으로 전 세계는 극단의 혼란과 폭력의 사태를 겪게 되었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 지구에 사는 이들은 버블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를 아득히 초월한 지적 문명이 만든 구조물인 버블에 의해 태양계 전체가 우주로부터 갇히게 된 것이라는 설명만 할 수 있을 뿐, 이것이 왜 태양계를 둘러싸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구는 나노테크놀로지와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속칭 '모드'라고 하는 일종의 생체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의 역할을 하는 도구를 인간의 대뇌에 삽입하여 스스로의 능력과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직 경찰로 현재는 사립 탐정으로 활동하고 있는 주인공 닉은 익명의 의뢰인의 부탁으로 엄중한 감시와 보안을 자랑하는 병원에서 돌연 사라져 버린 지적장애를 가진 여성 로라 앤드루스의 행방을 찾나 나서게 됩니다. 자신의 머리에 깔려 있는 여러 모드들-경찰용 정신 최적화 프로그램과 워크스테이션 급 컴퓨터 및 최신의 각종 모드들-을 활용해 단서를 찾아낸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신규 독립국가인 '뉴홍콩'에서부터 로라를 추적하게 시작합니다.
뉴홍콩에서의 탐사 끝에, 이 실종 사건이 'BDI(Biomedical Development International)'라고 하는 의학 기업과 연관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닉은 BDI로 잠입을 시도하나, 첨단 장비와 모드로 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BDI의 경호를 맡은 이들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그는 BDI의 배후라 할 수 있는 '앙상블'이라는 조직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모드가 삽입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모드는 육화된 정신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생리학적/심리적 거부감을 갖지 않은 채 앙상블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잠입 능력을 인정받은 닉은 BDI에 스카웃되어 보안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수개월 후 ASR이라는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어 텔레키네시스로 추측되는 모드에 관한 모종의 임상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 포콰이의 경호를 담당하게 됩니다...
<단 한 권의 소설에서 펼쳐지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에피소드의 향연>
나름 요약을 하였지만 여기까지가 겨우 소설의 전반부인 1/3 지점입니다. 양자역학과 나노테크놀로지 등의 소설 속 첨단 과학기술과 버블에 갇힌 태양계라는 논리적 비약의 세계관에 익숙해지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약 400여 페이지라는 분량 대비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합니다. 단편 소설로서 완성도가 보장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책을 다시 읽지 않고도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에피소드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버블의 도래와 전지구적인 혼란, '모드'의 작동 원리와 다양한 '모드'의 시연, 혼란을 틈탄 '나락의 아이들'이라는 무차별적 테러 조직의 준동, '나락의 아이들'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주인공 닉의 고통과 고뇌, '앙상블'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 양자 역학의 근거한 '앙상블' 모드의 작동 원리, 최종 빌런이라 할 수 있는 '뤼'-닉이 가담한, 앙상블에 반하는 모임의 주도자-이 앙상블 모드를 탈취하려는 진짜 목적, 결말부에서의 앙상블 모드의 폭주로 인해 발생한 국지적인 확산의 역병....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 에피소드의 중심에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대표되는 반직관적인 결론 때문에 현대 과학 문명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해함과 신비로움의 너울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양자 역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쿼런틴'을 이 양자 역학의 관점에서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확률론적으로 전개되며 물질의 존재가 측정자의 주관적 관측에 의해 결정되는 양자 역학 기반의 세상에서, 인간이 자유 의지로 관측 결과(소설 내에서는 '수축'으로 표현함)를 선택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 역학의 세계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유한한 미래의 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수많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한히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슈퍼맨 이상의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읽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소설의 해설의 말마따나 '대중 소설'인 쿼런틴의 읽기 위해 특별히 전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그저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소설 속 닉과 포콰이의 대화를 잘 따라가기만 할 수 있다면 이야기를 즐기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며, '파격적인 사변을 전개'하며 이 과정에서 '황당무계할 정도로 거시적인 논리의 비약'과 '그것을 떠받쳐 주는 편집증적일 정도의 과학적 성실함'을 추구하는 그렉 이건의 글쓰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