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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아
김필산 지음 / 허블 / 2025년 7월
평점 :
*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완만한 대왕들’이라는 단편에는 글랜에 살고 있는 드랙스와 드랜이라는 두 대왕이 나오는데, 이들이 지각하는 시간의 흐름은 인간과 달라서 아주 느립니다. 두 왕은 평소처럼 하루의 시작으로 대화를 나누다 로봇 하인 진드롬에게 자신들을 섬길 우주 어딘가에 있을 지성체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이들이 ‘잠깐’ 대화를 하는 동안 100년의 시간이 흘렀고, 진드롬은 한 쌍의 인간 남녀를 데려옵니다. 대왕들은 연약한 인간들 대신 진드롬 같은 로봇을 복제하는게 어떻겠냐는 의견으로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 진드롬에게 이들이 어떻게 됬는지 물어봅니다. 이에 진드롬이 ‘왕성히 번식하여 문명을 이루었으나, 2000년 전에 핵전쟁을 일으켜 자멸’했다고 답하니, 두 대왕은 진드롬에게 자신들을 섬길 수준이 되는 지성체를 다시 찾아오라 명령하고 잠에 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이 단편을 지금껏 읽은 ‘시간’이 주제인 SF 소설 중 가장 창의적인 작품으로 평가했었습니다. ‘엔트로피아’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한 장군이 선지자를 찾아가 ‘조국을 지킬 방법’을 묻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자신은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경험하고 느끼며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져서 태어남으로 가고 있는,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선지자는 그를 의심하는 장군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강대한 나라의 왕에게 그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하는 남자와 이를 거스르고자 노력하는 왕세자, 광기의 연금술사에 의해 엄청나게 복잡한 방정식을 연쇄적으로 푸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책이 된 사람과 이 책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남자, 시간여행이 일상화되었으나 미래의 역사가 불변하다는 진리를 모두가 알고 시대에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여 미래를 바꾸고자 미래를 침공한 남자. 선지자는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했으며, ‘미래는 하나의 강물로 흘러’가며, ‘인간은 선택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단언합니다.
주인공인 선지자가 읽었거나 겪었던 3가지의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가 담긴 액자식 구성과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건의 과거부터 수백년 후의 미래를 다루는 이 작품은, 복잡한 구성과 큰 스케일로 필히 서두의 연표를 참조해가며 집중해서 읽을 것을 권합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읽어도 무방한데, 두 번째 책 이야기인 ‘책이 된 남자’는 소설의 메인 테마인 ‘시간’과 관계없는 지금의 인류에게 있어 가장 혁신적인 기술인 AI의 작동 원리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 뛰어난 작품성과는 별개로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깰 정도는 아닌데, 각각의 이야기는 그 내용과 관계없이 선지자가 과거를 향해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는 네 번째 이야기가 숨어 있는데, 바로 선지자가 어떻게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살아가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 번이나 읽은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해보자면, 선지자의 삶은 외부에서 바라보면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지만(몇천년씩 살아가는 것은 물론 기이하지만), 선지자 내면에서의 시간에 대한 인식은 그 반대입니다. 그렇기에 선지자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와 어떻게, 언제 헤어지는 지를 알고, 미래에 읽었던 책에 담긴 이야기를 장군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그는, 미래를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며, 자신의 탄생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또한 한탄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미래는 우리 자신이 층층이 쌓아가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미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말이죠. 다시 말하면, 미래는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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