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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여야,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정도전(鄭道傳-1337년 또는 1342년부터 1398년 8월)

 정도전은 고려(高麗) 말기와, 조선(朝鮮) 초의 문신(文臣), 유학자(儒學者), 시인(詩人),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였고, 호(號)는 삼봉(三峯),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냈던 정운경(鄭云敬), 어머니는 우(禹) 씨였다. 그리고 고향은 경북 영주(榮州)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개경(開京)으로 갔을 때 함께 가서 이곡(李穀)의 아들이었던 이색(李穡)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1360년(공민왕 9)에는 성균시(成均試)에,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으로 나갔다.

 1366년, 아버지에 이어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영주>로 내려가서 3년간 여묘(廬墓)를 했으며, 1370년에 이색(李穡)이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그는 개경으로 올라가서 성균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고, 이어서 예의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1374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암살당하자 그 사실을 명나라에 알릴 것을 주장해서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그리고 또 1375년(우왕 1)에는 성균사예(知製敎)가 되었으나, 그러나 또 이인임 등의 친원정책(親元政策)에 반대해서 전라도 나주(羅州)로 귀양을 갔다.

 그 후, 유배생활이 풀리게 되자 그는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그러던 중에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러다 1383년에는 함흥에 있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서 인연을 맺었으며, 1384년에는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에 복직되어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리고 또 1388년에는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그 다음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田制)개혁을 추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친했던 정몽주(鄭夢周)와 스승 이색(李穡)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1389년 11월에는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키는데 가담했으며, 그 공(功)에 의해서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그리고 1390년에는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모함을 해명하기 위해서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하지만 그 후에 정몽주(鄭夢周)의 탄핵을 받아서 영주로 다시 유배를 갔으며, 그 후에도 정몽주(鄭夢周)의 집요한 살해(殺害)시도에도 살아남았다가 끝내 공양왕의 덕분으로 1392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3월에 이성계가 낙마(落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도 탄핵을 받아서 잠시 투옥되기도 했지만 곧 풀려났고, 그 4월에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자 6월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달에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했으며, 그러자 그는 이성계의 후광을 등에 업고 모든 실권(實權)을 장악했다.

 그 후, 그는 정적(政敵) 등을 제거했던 등, 한바탕의 피바람을 불러일으켰고,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이성계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했다. 그러자 그는 새 왕조(王朝)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지만, 그러다 또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로 인해서 모든 공직(公職)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또 그 후에도 요동(遼東)정벌의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던 중, 조준(趙浚)의 강력한 반대로 난항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그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던 이방원(李芳遠) 등에 의해서 그는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이방원(李芳遠) 등에 의해서 역적(逆賊)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러나 또 나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복권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저작으로는 <삼봉집(三峯集)>과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그리고 <경제문감(經濟文鑑)>과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조선(朝鮮)하면 그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조선(朝鮮)의 성립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고, 그래서 또 나름대로 큰일도 많이 했었던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또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것은 못 미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독단(獨斷) 또는 독주(獨走)는 여러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던 면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결국 그에 위기를 느꼈던 이방원(李芳遠)이 그 해결사로 나서게 됨으로 해서 그는 말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의 원대했던 꿈들도 그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고사(故事)를 보고 느끼면서, 특히 이 험난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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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성공하라!>

 

   

 

 

 If you are successful, you will win some unfaithful friends and some genuine enemies. Succeed anyway.

 만약에 당신이 성공을 하게 된다면, 당신에게는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친구들과, 어느 정도의 진짜 적(敵)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성공하라!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1910년 8월 26일부터 1997년 9월 5일)

 <마더 테레사>의 본명은, 아르메니아(Armenia) 어(語)로는 <아그네사/안티고나 곤쟈 보야지(Agnesa/Antigona Gongea Boiagi)>, 알바니아(Albania) 어(語)로는 <아그네스 곤쟈 보야쥬((Agnesë Gonxhe Bojaxhiu)>였고, 가톨릭교회의 수도녀(修道女)로, 수도회(修道會) <신(神)의 사랑의 선교자회(宣敎者會)-별명(別名)은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의 창설자였다.

 그리고 마더(Mother) 또는 머더(Mother)는, 신부(神父)에게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도적(指導的)인 수도녀(修道女)의 경칭(敬稱) 또는 수녀원장이란 뜻이며 <테레사>는 수도명(修道名)이었다. 그리고 또 그녀는 가톨릭교회의 복자(福者-beatus 또는 Beato. 가톨릭교회가 생전의 聖德을 인정하여 공식으로 지정, 선포한 존칭)였고, 콜카타(Kolkata 또는 캘커타. 인도 중부 서쪽에 있는 도시)에서 시작했던 빈자(貧者)들에 대한 활동은 그 후에 많은 수도녀(修道女)들에 의해서 전(全) 세계로 확대되었던 바 있었다.

 그러자 그런 활동들이 높이 평가되어서 그녀는 1973년에는 <템플턴상(Templeton Prize)>을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그리고 1980년에는 인도(印度)에서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도 받았고, 그리고 또 198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우수수도회상(優秀修道會賞-Order of Merit)>도 받았던 등, 많은 상(賞)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또, 1996년에는 미국(美國)의 명예시민(名譽市民)도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그때까지 단 7명만 누렸던 극소수의 혜택이었다고 하고, 그리고 또 2003년 10월 19일에는 당시의 교황(敎皇)이었던 <요한 바오로(john paul)>로부터 시복<諡福-beatification. 가톨릭교회에서 덕(德)과 성성(聖性)이 인정되어, 성인(聖人) 다음의 복자(福者)의 지위를 주는 것)>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에 여러 가지의 문제도 많았으며, 그러자 또 그녀를 비난을 했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러나 여기서는 그녀의 좋은 점만 이야기하려는 것이므로, 그런 것은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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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The supreme happiness of life is the conviction that we are loved.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1802년 2월 26일부터 1885년 5월 22일)는 프랑스의 낭만주의의 시인(詩人), 소설가, 극작가였고, 7월 왕정시대부터 프랑스 제2공화국시대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가(作家)로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치가로서는 역경(逆境)의 연속이었고, 특히 어렸을 때부터 가정환경이 불행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동부의 도시 <브장송(Besançon)>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었던 <조제프(Joseph Le'opold Sigisbert Hugo)>의 3남으로 태어났고, 태어났을 때 몸이 아주 작았기 때문에(겨우 부엌칼정도만 했다고 함) 몹시 허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유럽의 각지로 이사를 다녀야했으며, 특히 순수한 <보나파르트주의>였던 그의 아버지와 <왕당파(王黨派)>였던 그의 어머니 <소피(Sophie-Franc,oise Tre'buchet)>는 정치사상(政治思想)의 차이로 불화(不和)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나중에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 반영되었다고 하며, 그리고 자주 집을 비웠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머더 콤플렉스(mother complex-어머니에게 강한 의지와 반발을 하는 정신상태)>에도 몹시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1812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1814년에는 <기숙(寄宿)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사이에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의 패배로 인해서 스페인귀족의 지위가 박탈되었고, 그래서 그 후에는 <프랑스군>의 1개 대대장으로 몰락했다. 그리고 그는 그 기숙학교에서 4년 정도를 다녔으며, 나머지 2년은 <리세 루이 르 그란(Lycee Louis le Grand) 고등학교>에도 다녔는데, 그러던 1816년 7월 10일의 시(詩) 습작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한다.

 <샤토브리앙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

 

 


<샤토브리앙>

 

 

 그리고 그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1768년 9월 4일부터 1848년 7월 4일)>은 이미 여러 번 소개가 되었지만, 어쨌든 <프랑스 빈체제(體制-Vienna system, Vienna Settlement. 나폴레옹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가 되었으며, 그리고 내용이 너무 길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함)> 하에서의 정치가였고, 작가였다.

 그리고 또, 그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그의 문학적(文學的)인 재능을 인정해서 그가 문학으로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의 어렸을 때 소꿉친구였고, 나중에 애인이 되었던 <아데르(Ade`le Foucher)>와의 결혼은 맹(猛) 반대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의 어머니도 1821년 6월 27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그는 열렬한 사랑으로 그 <아데르>와 결혼했으며, 그러자 또 그 후였던 1823년 7월 16일에 장남(長男-Le'opold)이 태어났다. 하지만 또 그해 10월 9일에 사망했으며, 그리고 또 1824년 8월 28일에는 장녀(長女-Le'opoldine)가 태어났다. 그리고 1825년 4월 29일, 그는 23세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레지옹 도뇌르 훈장(勳章)-프랑스최고훈장>을 받았고, 그해 5월 29일에는 <랭스(Reims-프랑스북부)>에서 열렸던 <샤를10세>의 성별식(聖別式)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그동안 소원(疏遠)했던 아버지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서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시(詩)를 쓰기도 했는데, 그런데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나폴레옹>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존경까지 하게 되었고, 그리고 또 그 성별식(聖別式)에서 들었던 것을 계기로 해서 <셰익스피어>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였던 1826년 11월 2일에는 차남(次男-Charles)이 태어났고, 창작열(創作熱)이 가속화되고 있었던 1828년 1월 28일에는 그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해 10월 31일에는 3남(Franc,ois--Victor)이 태어났는데, 그런데 그 아이는 그의 재능을 이어받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7월 혁명이 한창 중이었던 1830년 7월 28일에는 차녀(次女-Ade`le)가 탄생했다. 그 후 <에르나니(Hernani-Hernani, ou l'Honneur Castillan-drama)>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그는 많은 돈을 벌게 되자, 1832년 10월 8일에 살던 집을 떠나서 <로얄광장((Royal 廣場-현재의 place des Vosges)>에 있었던 붉은색기와의 호화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또 그 즈음에 아내 <아데르>가 자신의 친구였던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1804년 12월 23일부터 1869년 10월 13일.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 근대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렸음)>와 불륜(不倫)에 빠졌기 때문에 그는 그런 슬픔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는 8월 말경에 <생트뵈브>와 교제를 끊었고,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상트뵈브>가 그의 작품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1835>를 혹평하자, 그것으로 결렬(決裂)은 결정적(決定的)이 되었다.

 

 


<생트뵈브>

 


 그리고 그 역시도, 31세 직전의 <참회화요일(Mardi gras-프랑스어로는 肥沃한 火曜日)> 또는 1833년 2월 19일 밤에 <쥬리에트(Juliette Drouet-1806년부터 1883년. 프랑스의 배우)>란 여배우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날은 그의 작품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Marius)>와 <코제트(Cosette)>가 결혼을 하는 날이었다.(2월 16일이 아닌, 19일임)

 

 


<쥬리에트>

 

 하지만, 그 후에도 그에게는 불행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래서 또 <아카데미프랑세즈(l'Académie française-프랑스의 국립학술단체)>에 두 번이나 낙선(落選)했었다거나(1836년 2월 18일과 12월 29일), 아내 <아데르>와의 문제로 발광(發狂)했던 둘째 형이 정신병원에서 자살을 했다거나(1837년 3월 5일) 했었지만, 그러나 또 그 사이에 희곡(戱曲)과 시(詩)를 쓰면서 각지(各地)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837년에는 <루이필리프 1세(Louis-Philippe Ier)>의 장남(長男-Ferdinand Philippe d'Orléans) 결혼식에 초대되기도 했고, 38세(1840년 1월) 때에는 문예가협회장(文藝家協會長)이 되었지만, 그러나 또 동년(同年) 2월 20일에는 다시 <아카데미프랑세즈>에 낙선했다. 하지만 또 그 다음해 1월 7일에는 그렇게 열망했던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41세의 생일을 바로 앞두고는 장녀(長女)의 결혼도 목도(目睹)했다.


 하지만 또 그해 9월 4일, 그녀는 남편(Charles Vacquerie)과 함께 19세의 어린 나이로 <센 강>에서 사고로 익사(溺死)했으며, 그러자 또 그 5일 후였던 9월 9일에 그는 애인 <쥬리에트>와 함께 했던 여행 중에, 그 비보(悲報)를 접하고 9월 12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아주 큰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대단한 정력가(精力家)였기 때문에, 그 사이에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런데 1845년 7월 5일에는 화가(畵家)였던 <오귀스트 비야르(Auguste Biard)>의 아내(Le'onie Biard)와 간통(姦通)을 하던 현장이 경찰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는 귀족원(貴族院)의원의 불가침권(不可侵權)을 이용해서 곧 풀려났지만, 하지만 그녀는 당시의 법률에 의해서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그는 다른 의원(議員)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러자 또 그를 아꼈던 <루이필리프>가 화가(畵家) <비야르>에게 <베르사유궁전>의 벽화(壁畵)를 그리는 일거리를 주어서 달랬다. 그러자 결국 그녀는 수도원(修道院)에서 몇 달간 근신(謹身)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그 후(同年 8월 14일)에 <비야르> 부부의 별거(別居)판결이 내려지자, 그는 그때부터 그녀의 생활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두 사람은 사랑을 계속했고,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쥬리에트>의 상심(傷心)도 깊어졌다.

 그래서 또 그런 이유들로 해서, 그는 1843년부터 1852년까지 약 10년간, 단 한편의 작품도 출판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 후에 그는 프랑스문학사상(史上) 굴지(屈指)의 명작(名作)이라고 불려졌던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不幸한 사람들. 원래는 Les Mise'res(가난한 사람들)>의 집필을 시작했고(1845년 11월 17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또 제설(諸說)이 있지만, 어쨌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목격했던 <기요틴(guillotine-단두대처형)>에 대한 기억이 그 글을 쓰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튼 또 그는, 1845년 4월 13일에, 자신의 지지자 중 한사람이었던 <오를레앙 공작(公爵-Ferdinand Philippe d'Orléan-1810년 9월 3일부터 1842년 6월 13일) 부인(夫人-Helene Luise Elisabeth zu Mecklenburg-1814년 1월 24일부터 1858년 5월 17일)>의 후원(後援)으로 <루이필리프>로부터 자작(子爵)의 위(位)를 받았고, 그러자 귀족(貴族)이 되었던 그는 정치활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또 1948년 2월에 혁명(2월혁명)이 발발했고, 그러자 <루이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참고: 1848년 혁명 또는 2월혁명은, 1848년에 유럽 각지(各地)에서 일어났던 혁명이었으며, 그것으로 <빈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그 2월혁명은, 다음 달 유럽 각지(各地)로 전파되어서 3월혁명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 2월혁명과 3월혁명을 아울러서 <제(諸)국민(國民)의 봄(春)-Printemps des peuples, Völkerfrühling, Primavera dei popoli)>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러나 더욱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헬레네 또는 에레느>

 



 아무튼, 그러자 그는 <오를레앙 공(公)>의 유아(遺兒)였고 <루이필리프>의 적손(嫡孫)이었던 <파리 백(伯-comte de Paris) Louis Philippe Albert d'Orléans-1838년 8월 24일부터 1894년 9월 8일>을 어떻게든 즉위(卽位)시켜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프랑스는 <제2공화정(共和政)>으로 이행되었다.

 

 


<파리 백>

 

 

 그러자 또 그는 동년(同年) 6월에 입헌의회(立憲議會)의 보궐선거(補闕選擧)에 입후보했고, 그 결과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서 당선했다. 그러자 또 그는 정치가로서 1930년대부터 계속해서 사형폐지운동을 벌였으며, 교육의 개혁과 사회복지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공화파(共和派)가 되어서, 그해 12월 10일에 치러졌던 대통령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Charles Louis-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을 지지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루이 나폴레옹>이 독재(獨裁)를 시작하자 오히려 강력한 반대자로 돌변했다. 그러자 또 그 <루이>는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재(獨裁)체제를 수립(樹立)했고, 이어서 반대파의 탄압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역시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그 12월 11일에 <벨기에>로 망명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약 19년 동안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루이 나폴레옹>

 


 그 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갔던 그는, 그 즉시 <루이>의 비판을 개시했고, 그리하여 1852년 8월에는 <루이>를 탄핵(彈劾)했던 <어린 나폴레옹(Napole'on le Petit)>을 출판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때부터 왕성한 집필을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 <어린 나폴레옹>의 인기에 의해서 <루이>의 압력이 <벨기에>로 전해질 것을 염려했던 그는 <영국(英國)> 령(領) <채널제도(諸島-Channel Islands)>의 <저지 섬(Bailiwick of Jersey)>으로 이주해서 1855년까지 머물렀다.

 

 

<채널제도-노르망디 부근>

 

 

 그리고 또, 그러던 중이었던 1853년에는 계속해서 <루이>를 탄핵하는 <징벌시집(懲罰詩集-Les Cha^timents)>을 발표했으며, 1855년에는 옆의 섬 <건지(Bailiwick of Guernsey)>로 이주했고, 그리고는 1870년에 <프랑스>로 다시 귀환했을 때까지 약 15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또, 그 사이였던 1856년에는 <정관(靜觀) 또는 명상(冥想) 시집(詩集)-Les Contemplations>을, 그리고 1859년에는 <제(諸)세기(世紀)의 전설(傳說) 1부(部)-La Le'gende des sie`cles>를, 그리고 또 1862년에는 그동안 중단했던 <레미제라블>을 완성해서 <벨기에>에서 출판했는데, 그러자 아주 큰 반응을 받았다. 그리고 또 당시의 에피소드로, 그는 <레미제라블>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서 출판사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였다고 하고, 그러자 또 출판사에서는 "!"라고 답장을 보냈다는데, 그 뜻은 <아주 좋다>는 뜻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내용의 편지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였던 1870년에 발발했던 <프랑스와 프로이센왕국의 전쟁(Guerre franco-allemande de 1870)>에서 <프랑스>가 대패(大敗)했고, 그러자 <프로이센왕국>의 포로가 되었던 <나폴레옹 3세>는 실각(失脚)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귀국해서 영웅적(英雄的)인 대접을 받았으며, 그 후였던 1877년에는 <제세기의 전설 2부>를 발표했던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885년 5월 22일 <파리>에서 그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유명했던 작품들 중에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1831년)> 등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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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라>

 

 

 

 

 Each player must accept the cards life deals him or her; but once they are in hand, he or she alone must decide how to play the cards in order to win the game.

 인생(人生)이라는 게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일단 주어진 자신의 패(牌)에 만족을 해야 하며

 그것으로 어떻게든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볼테르(Voltaire-1694년 11월 21일부터 1778년 5월 30일)의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였고, 그래서 볼테르((Voltaire)는 일종의 필명(筆名)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였고, 작가, 문학자, 역사가였으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의 한사람으로서 활약하기도 했고, 또한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였다.

 그는 파리에서 공증인(公證人)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우수했던 학생으로 그때부터 시집(詩集)을 계속해서 냈다거나, 그에 대한 상(賞)도 받았다. 그리고 1716년에는 섭정(攝政)의 연애(戀愛)에 관한 시(詩)를 썼다고 해서 루아르(Sully-sur-Loire) 성(城)으로 끌려갔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몇 번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1717년 5월, 프랑스의 정치와 정부를 통열(痛烈)하게 중상(中傷)했던 시(詩)를 썼던 그는, 결국 바스티유감옥에 투옥(投獄)되었고, 그곳에서 약 11개월을 보냈는데, 그때 그의 나이 22, 3세 때였다. 그리고 또 그 즈음부터 <볼테르>란 필명(筆名)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1718년 11월 18일에는 그의 처녀작(處女作) <에디프(Œdipe-oedipus)>가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그러자 그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래서 그 후, 45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 즈음부터 그는 대작가(大作家)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그러나 또 명문귀족과의 트러블로 인해서 1726년 4월 17일에 다시 바스티유감옥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오히려 민심(民心)을 얻었으며, 그리하여 다시 풀려나서 동년(同年) 5월 11일에 영국(英國)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에는 또 뒷이야기가 있었지만 일단 생략하며, 그러나 또 어쨌든, 그 여행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철학 성립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리하여 그의 유명한 저서였던 <철학서간(哲學書簡-Lettres philosophiques)>이 1733년에 런던에서 영어(英語)로 발표되었는데, 하지만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그 다음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해적판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프랑스의 파리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그 내용상의 문제 즉, 당시의 자유스러웠던 영국에 대한 호감 등으로 인해서, 프랑스의 애국자들은 자극을 받았고, 그리하여 그 책 한 권이 불태워짐으로 해서 그에게는 다시 체포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 후, 네덜란드로 도망을 가서 당분간 지냈던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갔고, 그 후에는 집필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때, 그는 뉴턴(newton)의 책을 번역해서 뉴턴의 사상을 전파하는데도 일조(一助)했으며, 문학과 철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제1선에서 활약했던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1750년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을 방문하기도 했고, 백과전서(百科全書)에도 기고(寄稿)를 했던 등, 왕성한 저작활동을 했으며, 1762년 3월 9일에 발생했던 <카라스(Jean Calas-1698~1762) 사건-프랑스에서 일어났던 異端迫害冤罪事件으로, 가톨릭의 不寬容 狂信에 의한 迫害사건으로 알려져 있다>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발언을 활발히 전개했던 실천적(實踐的)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결과, 1763년에는 <관용론(寬容論-Traité sur la tolérance)>이, 그리고 1764년 또는 1766년에는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18세기 자유주의의 상징 중 한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파리의 교회(敎會)들은 그를 매장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래서 그는 스위스 국경근처에 매장되었지만, 그러나 또 프랑스혁명이 한창 중이었던 1791년에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서 파리의 팡테옹(Panthéon)에 이장(移葬)되었다.

 그는 생전에 소설, 시, 희곡, 일기, 편지 등, 많은 작품이나, 저서 등을 남겼고, 그 중에서도 <역사철학, 관용론, 철학사전, 철학서간, 오이디푸스,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1759)> 등이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계몽사상의 전형(典型)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또 그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신뢰(信賴)했고, 자유(自由)를 신봉(信奉)했다.

 그리고 또 그는 거의 평생 교회(敎會)의 부패(腐敗)와 크리스트교의 악폐(惡弊)에 대해서 비판했으며, 혼신(渾身)의 정력(精力)을 기울여서 이신론(理神論-합리주의종교관)의 입장에서 교회(敎會)를 탄핵(彈劾), 비판했다. 그리고 또 그는 궁정연회에서 <루소>를 만나기도 했으며, 그래서 또 한때 친교를 가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1755년에 발생했던 <리스본지진(Lisbon Earthquake)> 발생 이후, 종교적인 견해차이 등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나빠졌다.

 그리고 또 그의 유명했던 말 중에는 <나는 당신의 의견(意見)에는 반대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주장하는 권리(權利)는 내 목숨을 걸고 지킨다 또는 그 권리에는 찬성한다>라는 말이 있으며, 그것은 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서, 특히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원칙을 단적으로 표시했던 명문(名文)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사람(Stephen G. Tallentyre. 本名은 Evelyn Beatrice Hall)의 저작(著作-The Friends of Voltaire. 1906)중에서 부분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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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앙투안 마리 장 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comte de Saint-Exupéry 또는 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 -1900년 6월 29일부터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그의 성(姓)이었으며, 프랑스의 작가(作家), 조종사(操縱士)였고, 우편수송을 위해서 유럽과 남미(南美) 사이의 비행항로 개척에도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왕자-Le Petit Prince> 등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Lyon-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났으며, 예수회(會-Societas Iesu.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회의 男子修道會)의 노트르담 드 생 크로(Notre-Dame de Sainte Croix)학교를 거쳐서<또는 1909년 10월 7일에 입학했던, 父親(Jean de Saint-Exupéry)의 母校, 聖十字聖母學院 또는 학교>, 스위스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스위스의 북동쪽, 독일 슈바르츠발트(Black Forest) 서쪽의 도시)>에 있었던 성(聖) 요한(St.John-마리아 修道會) 학교에서 문학(文學)을 배웠다.(1915년 1월부터)

 그 후, 그는 해군(海軍)에 입대하기를 원했지만 2번이나 낙방했고, 그러자 또 그는 1921년 4월 9일에 자원(自願)을 해서 군(軍)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육군비행연대(陸軍飛行聯隊)에 소속된 후, 군용기(軍用機) 조종사(操縱士-士官)가 되었다.

 그 후, 퇴역(退役)해서 자동차 판매원 등의 일을 했지만, 다시 민간항공(民間航空) 업체에 들어가서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1926년에 그는 26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작가(作家)의 길로 들어섰으며, 과작(寡作) 후에 자신의 비행사(飛行士)로서의 경험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南方郵便機(Courrier Sud-1929년 6월, 夜間飛行(Vol de Nuit-1931년 10월 등)>

 

 그러자 그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세계인들에게 읽히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은 비행사들 사이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또 그를 좋아했던 독일인들 중에서는 <나중에 적(敵)으로 싸우게 되었을 때, 그가 소속되었던 부대와는 싸우지 말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39년 9월 4일에 세계 제2차 대전에 소집되었고, 툴루즈(toulouse-프랑스 남서부)에서 비행교관 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전선(前線)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고, 그리하여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 희망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정작 그 전선(前線)에서 그를 거부했고, 그러자 결국 그는 1939년 11월 9일에 샹파뉴(champagne-파리의 동쪽) 지방의 <오르콘트>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정찰대(偵察隊-II/33 部隊)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부대(部隊)는 큰 피해를 받아서 알제리(Algeria)까지 후퇴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는 동원해제(動員解除)되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 후에 미국(美國)으로 망명했다.(1940년 12월 21일 리스본출항, 12월 31일 뉴욕도착)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다시 지원(志願)을 해서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원(元) 부대(部隊)에 복귀했고(1943년 6월), 이어서 신예기(新銳機)의 훈련을 받은 후 실전(實戰) 배치되었지만, 그러나 또 금방 착륙실패로 인한 기체(機體)의 손상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해 8월에 비행금지처분을 받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제대(除隊) 당했다.

 

 하지만 또 그는 지인(知人) 등을 통한 필사적(必死的)인 노력을 해서 다시 복귀했지만, 그러나 또 폭격기조종사로서 I/22부대(部隊)에 배치되었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르디니아(sardinia-지중해 Corsica섬의 남쪽에 있는 이탈리아령의 큰 섬)에 있었던 알게로(Alghero Airport-Fertilia Airport) 기지(基地)로 간 후, 본대(本隊)였던 II/33부대(部隊)에 1944년 5월에 몰래 숨어들어갔다. 그러자 부대는 그 후에 코르시카(corsica-나폴레옹의 출생지) 섬으로 진출(進出)했다.

 그리고 1944년 7월 31일, 프랑스 동남부의 그르노블(Grenoble-프랑스 남동부 Isère 현의 주요도시) 등(Chambéry, Annecy)을 사진(寫眞)정찰하기 위해서 록히드(Lockheed) F-5B(P-38 偵察機型)를 타고 볼로냐공항(Bologna Guglielmo Marconi Airport-이탈리아 북동부)을 단기(單機)로 출격(出擊)한 후, 지중해(地中海) 상공(上空)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완전히 행방불명되었지만, 그러나 또 1988년 9월 7일에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Consuelo) 그리고 연락처(c/o-뉴욕의 Reynal & Hitchcock출판사)와 소재지(所在地-1943년에 어린왕자를 처음 출판했던 발행처) 등이 새겨져 있었던 브레이스릿(bracelet-팔찌 등)으로 보였던 은제품(銀製品)이 트롤(trawl) 선(船)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우여곡절을 겪었던 후에 그가 타고 갔던 비행기의 잔해도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또 2008년 3월 15일에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지(地方紙)에 당시 Bf109의 파일럿이었다던 사람(Horst Rippert)이, 자신이 그의 정찰기를 추격했다는 증언(證言)의 기사(記事)가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도 그 분 작품의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제가 추격시켰던 그 조종사가 제발 그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정말이지 만약에 그때 내가 그였던 줄 알았더라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의 많았던 작품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들 중 몇이다.

 동방우편기(南方郵便機-Courrier Sud. 1929년 6월)

 야간비행(夜間飛行-Vol de Nuit. 1931년 10월)

 인간의 대지(大地) 또는 땅(Terre des Hommes. 1939년 3월)

 싸우는 조종사(操縱士-Pilot de Guerre. 1942년)
 어린왕자(Lettre à un Otage. 1943년 2월 또는 6월)
 그리고 사후(死後)에 편집되어 출판된 것으로, 성채(城砦-Citadelle. 1948년, 未完)

 등이 있었고, 지금도 그는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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