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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3 '조선(朝鮮)' 침략

          

  <임진왜란 시, 일본군들의 침략노선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파란색은 주로 '유키나가' 적색은 '키요마사'의 침략도>


 그날 '조선(朝鮮)'의 남쪽 관문이었던 '부산(釜山)'의 '부산 성'을 지키고 있던 '정발(鄭撥) 장군'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 항' 입구에 가로누워있던 '절영도<絶影島-현, 영도(影島)>'에 나가있었습니다.

 

 

<부산의 중심지 광복동 일대와 영도의 모습-부산의 명물 영도대교 등이 보인다>

 


 '정발' 장군은 그날, 부하들을 데리고서 토끼 등의 사냥감이 많았던 그 섬에서 하루 동안 사냥을 하고는 저녁 무렵에나 '부산 성'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발 장군>

 

 그런데 바로 그때에, 동쪽의 수평선 위로 흰 돛을 펼친 일군(一群)의 선단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게, 뭔가?...>

 '정발 장군'은 그것을 보고 처음에는 <'일본'에서 오고 있는 무역선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바다 위에 가득 찼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대 선단이었던 것입니다.

 <무역선이라고 하기에는 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보통일은 아니다!........>

 그러자 '정발' 장군은 급히 '부산 성'으로 되돌아 와서 즉시 방어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대 선단이 바로 그때부터 족히 7년에 걸쳐서 '조선'을 짓밟았던 '일본 침략군'의 선두부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선진을 맡았던 '유키나가'의 제1군 700여척의 배들은 '쓰시마' 항을 출발했던 바로 그날에 '부산'에 상륙을 했고, 그리고는 곧장 '부산 성'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釜山城攻略/『釜山鎭殉節圖』1709年初筆1760年模寫>



 그 '부산 성' 공방(攻防)의 상황을 '조선' 측의 자료에서 보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산'에 상륙한 적들은 다음날 새벽부터 성 주위를 백 겹이나 둘러싸고는 성 서쪽의 언덕 위에서부터 마치 비(雨)처럼 총을 쏘아대면서 쳐들어왔다. 그러자 '정발' 장군은 성의 서문을 지키기 위해서 활을 쏘며 적병들을 쓰러뜨리고, 필사적으로 적의 성내 침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화살이 다 떨어져버렸다. '정발'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서 전사했고 성은 곧 떨어졌다...>

 그 싸움에서 '조선' 측의 전사자는 1200명, 포로는 200명...
 그리하여 '부산 성'은 불과 하루 만에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 * *

 그때 '조선' 측은 '일본'의 침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확실히 <갑작스러운 대 사건>이었습니다. 거기다 또 '일본군'의 주 무기는 철포(鳥銃))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그때 철포(화승총)는 거의 없었고, 주 무기는 활과 창, 칼 등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도 지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키나가'와 '요시토모'의 제1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바로 '부산 성' 침공에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산'에 상륙하고 나서도 여전히 '조선'과의 <강화>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때 '정발' 장군과 안면이 있었던 '요시토모'가 직접 교섭에 나서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우리들에게 '북경'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들은 귀국(貴國)에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정발' 장군을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발' 장군은 그에 대해서

 <가령, 우리 나라를 범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우리의 주국(主國)인 '중국'이 아닌가! 주국을 침범하려는 군대를 우리가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라고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키나가'는 그럼에도 교섭을 계속하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데 또 바로 그때 '유키나가'의 제1군 후방에는 당시 불교도(佛敎徒)로 '유키나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토우 키요마사’가 이끌던 제2군의 선단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키나가'는 더 이상 교섭을 하느라 시간을 빼앗길 수가 없어 '부산 성'을 군대로 둘러싸고는 공격으로 전환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유키나가'는 그때, 결국 후방의 '키요마사'에게서 쫓기는 느낌 같은 것이라도 받았던 것일까요...

 

 * * *

 아무튼 '유키나가'는 어떻게든 강화의 길을 찾아보려고 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곧 들이닥칠 '키요마사' 군에게 선봉을 넘기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히데요시'에게 자신은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 전에 '프로이스' 신부가

 <혹시, '칸바쿠도노'에게 그런 일을 고자질이라도 하게 되면, 그는 '칸바쿠도노'에게 반항하는 자라고 취급을 당해서는, 그 즉시 영지도 지위도 모두 몰수당하고 만다...>

 라고 썼던 것과 같이, 자신도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히데요시'의 출병 목적이 <중국과 조선의 정복>에 있었던 이상, 선두 부대로서는 어떻게든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며 진격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 등으로 '부산 성'을 함락했던 '유키나가' 군은, 그 다음날은 그곳에서 약 8킬로 안쪽에 있던 '동래(東萊) 성'을 또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유키나가' 군의 한 병사가 마상(馬上)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는 것도 좋다! 그러나 싸우기 싫다면 우리들에게 길을 열어라!>

 라고 쓴 판목(板木)을 '성' 안에서 볼 수 있도록 손으로 높이 들어서 올렸습니다.
 그러자 조금 있다 성으로부터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길을 여는 것은 그 보다 더 어렵다!>

 

 라고 쓴 반대 답장의 판목이 성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러니까...

 

 <부정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대한다!--->

 

 라고 하는 의미의 '조선' 측의 결의 정도가, 그 판목에는 그렇게 분명히 표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동래부순절도=東莱城殉節図>


 어쨌든 그때, 그 '동래 성'안(東來城內)에는 농민 등을 임시로 모집했던 7000명 정도의 병(兵)과 피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유키나가' 군은 무장을 했던 18000명의 대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그 성을 지켜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 <밀물처럼 성내로 쏟아져 들어갔던...> '일본군'들은 닥치는 대로 상대를 죽이고, 난폭이란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듯 <지붕 위로 피신해 있던 여자는 질질 끌어내려졌고, 노인들과 아이들이 잡혀있던 곳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죽임 당했다...>라고 했던 전쟁으로 '조선' 측은 3000명의 전사자와 포로 500명을 내고는 그날 안에 '동래 성'도 '일본군'의 손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출병 즈음에

 1. 비전투 자, 농민들에게 난폭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1.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1.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도 안 된다.
 1. 비전투자, 농민들로부터 물건을 빼앗는 것도 안 된다.
 1. 곤란에 처한 비전투자가 있으면 구제하라

 라고 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그런 것은 전혀 지켜지지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만이 일어났을 뿐이었고, 거기다 비전투 자였던 노인들과 여성 그리고 어린 아이들까지...
 그들은 <닥치는 대로> 마구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 * *

 

 당시 '조선'은 정치가들이 두 파로 갈라져서 권력을 다투느라 문란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던 '성' 안에서의 일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본군'들의 진공 도중에 접수했던 그 많았던 성들의 창고에서는 그 어디라도 농민들로부터 공물(貢物)로 거둬들였던 쌀들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보아서도 일반인들의 생활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그들은 빈곤하게 살면서도, 별로 큰 항의도 없이 태평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산의 금정(金井) 산성>



 어쨌든, 그리하여 '유키나가' 군은 한층 더 병사들을 다그쳐서 계속해서 성을 함락해나갔고, 그러면서 '조선 반도'의 중앙부로 통하는 길을 따라서 진공을 계속해서 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5월 3일이자 '부산' 상륙 후 21일째 되던 날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京城-漢城-서울)'에 드디어 입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때 다른 길을 택해서 올라왔던 '키요마사'의 제2군도 '유키나가'의 뒤를 이어서 곧 '경성'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산'과 '경성' 사이의 길은 보통 걸어서 20일정도의 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일본 침략 군'들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식량까지 운반해가면서도 거의 같은 일수(日數)로 '경성'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의욕으로 진공을 계속했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 *

 

 어쨌든, 그러자 '조선'의 조정(朝廷)은 왕성을 비운 채로 제2의 수도였던 '평양'까지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그곳에다 군의 본부를 설치하고, 작전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유키나가' 군(軍)은 국왕을 뒤쫓아서 '평양(平壤)'으로 가고 '키요마사' 군은 두 왕자를 뒤쫓아서 '조선'의 최북부에 있던 '오란카이(兀良哈-현재 중국 동북부. 함경북도 회령 근처. 오랑캐의 땅이란 의미)'로 진격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나머지의 부대들도 저마다 각각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지역을 향해 가는 것으로써 '조선 전토(全土) 침략 작전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6월 15일 '유키나가' 군은 별 전쟁도 치르지도 않고 곧 평양을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만, 그러나 그 후에 몇 차례에 걸쳐서 '조선' 측의 격심한 반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유키나가'는 자신의 아우였던 ‘루이스’가 '조선' 측에 포로가 되어서 처형을 당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습니다만, 그러나 더 이상의 반격만은 어떻게든 막아서 8월에 들어가자 강화(講和)를 위해서 서로 간에 50일간의 휴전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平壤中心部(1945年以前)>

 


 그러나 그 50일간의 휴전 중에 '일본군'은 '평양' 외곽으로는 나갈 수 없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부산' 상륙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진공을 거듭했던 탓으로 몹시 지쳐있었던 '일본군'들에게는 그것만큼 반가운 휴전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유키나가'가 원했던 강화는 결국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또 다시 각지에서 국지 전을 계속해서 치러야만 했고, 그러다가 드디어는 그 혹독했던 '조선'의 겨울을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쯤에는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나서 '일본군'들은 본토로부터 식량을 보급 받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미 그때 침략 부대는 너무나도 '조선'의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 또, 그때쯤에는 '일본군'들이 점령하고 올라왔던 후방의 각지에서 애국심에 불타던 '조선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용군'들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로인해 그곳에서는 '게릴라전'까지도 활발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 *

 

 그렇게 해서 식량부족으로 배를 곯던 '일본군'들은 나중에는 밥을 묽게 한 죽 같은 국물조차도 먹지 못하게 되자, 수수 같은 것도 마다않고 다 갉아먹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수수조차도 '조선'의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일본군'들은 '조선' 농민들이 식량을 숨겨놓으면, 그 집 안을 다 털어서 인정사정도 없이 그것들을 전부 강탈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히데요시'가 출병 때 경고했던 것들을 지키는 '일본군'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 * *

 

 어쨌든, 병사들은 '일본'의 겨울보다도 월등히 혹독했던 영하(零下)의 날씨가 계속되던 '조선'의 추운 겨울 속에서 입을 것조차도 없이, 공복까지 참아가며, 그리고 얼면서()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나갔습니다만, 그러나 날이 갈수록 환자가 속출했고, 이어서 대부분의 자(者)들이 전의 상실-----------------.

 

 나중에는 싸울 기력조차도 모두 잃어버리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다 또 설상가상...

 해가 바뀌었던 그 다음해 1월 '중국'의 원군(援軍)마저 '조선'에 도착을 했던 것입니다.

 

 * * *

 

 그때 '유키나가'의 제1군은 계속해서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그 '평양'을 대포 등으로 무장했던 '중국군'들이 사방(四方) 3000명, 총 12000명 정도의 대 부대로 그 '평양'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키나가'는 적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척후병(斥候兵)을 내보냈습니다만, 그러나 그 척후병의 보고를 받은 '유키나가'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습니다. 그대로 계속 있다가는 바로 독 안에 든 쥐... 군은 곧 전멸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군'은 큰 북을 울리고, 그 포성은 천지를 떨게 하고, '평양' 성문을 단번에 부셔버렸다......>

 라고 했던 상황 속에서 '유키나가'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유키나가'는 그때, 걸을 수도 없었던 수많은 부상병들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자신들만이라도 그곳을 탈출하기로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힘을 얻었던 '중국군'들은 '유키나가' 등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있던 중에도 '평양' 탈환에의 격심한 의지를 드높이면서 마구 공격해왔습니다. 그러자 대장이었던 '유키나가'조차도 입은 옷 그대로인 채로

 <구소쿠(具足-일본군들이 전쟁 시에 완전히 갖추어서 입던 갑옷) 따윈 버려라. 구소쿠 하의(下衣-아래만 두르는 갑옷) 하나만!>

 하고는, 참담한 모습으로 당시 '일본군'의 근거지였던 '경성'까지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구소쿠의 예- 甲冑>


 그러나 그 '경성'까지의 퇴각 모습 또한...

 <극심한 피로로 인해서 눈 위에 쓰러진 자는 그대로 눈 위에서 죽었다. 눈 위에는 먹을 만한 풀 한포기 보이지 않았다. 눈을 먹으면서 도망가야 하는 길... 얼음이 언 큰 강을 건너가는데, 맨발에 조우리(일본인들이 신던 신발)만 신은 자들은 동상에 걸리고, 발가락이 끊어져나간 자들도 많이 있었다......>

 라고 했었던 만큼, 그것은 실로 비참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군'들은 애초부터 겨울에 대한 대비 같은 것은 전혀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종군했던 한 병사는...

 <손발은 눈(雪)에 타서 붓고, 옷이라곤 갑옷 아래에 걸친 것밖에 없고... 산전(山田)의 허수아비와도 같이 바짝 마른 모습들이라, 서로 간에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조차도 없었다......>

 라고 그때의 퇴각 모습을 적어서 남겨놓았습니다.

 

 * * *

 

 아무튼,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 남았던 '일본군'들은 어떻게든 겨우겨우 '경성'에 도착을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에 15000의 병사였던 것이, 그 반 정도인 8000명으로 줄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마저도 부상병이거나, 영양부족으로 새 눈(鳥目)을 하고 있던 자가 거의 태반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해서 겨우 '경성'까지 퇴각을 했던 '유키나가' 군(軍)을 필두로 각 군의 대장들이 모여서 다음 작전을 세워보려고 회의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때 '일본군'의 수는 전년(前年) '조선'에 출병했을 때의 1/3이었던 53000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또

 <싸움으로 목숨을 잃은 자들보다는, 식량부족이나, 혹독한 추위로 인해서 병이 나서 죽은 자들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라고 당시의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 * *

 

 아무튼 그때, 대다수의 대명들과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진공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일본 군'으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를 열고는 '부산' 근처까지 퇴각을 해서 강화 교섭을 가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1593년(문록 2년) 5월-----------,
 '조선' 출병에 나섰던 대명들은 '부산'에서 전부 모였고, 그리고는 각자 '부산' 근처로 분산해서는, 주둔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 후 '유키나가'는 '웅천'(熊川-현재 경남 진해)에다 성을 짓고(개축), 다음해 12월에는 사자 ‘나이토 죠안(內藤如安)’을 '북경'으로 파견하는 등 하면서 '조선' '중국'과의 강화 교섭을 계속해서 해나갔습니다.


                                                                                  

<웅천읍성>



 그런데 바로 그 즈음에 '유키나가'는 전쟁으로 양친과 육친들을 모두 잃고 고아가 돼있던 <쥬리아>와 만나게 되었고, 그리고는 바로 그녀를 '히고(肥後-쿠마모토 현)'의 '우토(宇土) 성'에 있던 ‘쥬스타’ 부인(유키나가의 부인菊姫-洗礼名:ジュスタ)에게로 보냈던 것입니다.


                                             

<명치시대의 쿠마모토 성 또는 별명으로 宇土銀杏城-ぎんなんじょう>

 

<구마모토의 우토 위치도- 노란색>

 

<宇土古城址(中世宇土古城)千畳敷への虎口>

                                                                

 <고니시 유키나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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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2. '히데요시'의 욕망
                 

                                                                        

<Toyotomi hideyoshi>

 

 

 '세키가하라 전쟁'이 일어나기 8년 전이었던 1582년(天正 19년) 2월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평정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을 보좌해서 정치를 하는 이른바 <칸바쿠(關白)>의 지위를 조카 '히데츠키(秀次)'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타이코우(太閤)' 라고 칭하며 그 위에 군림하면서, 점점 더 '중국(明)' 정복의 계획을 구체화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히데요시'는 그 전부터 ['일본'을 평정하면 '조선'을 굴복시키고, 거대한 '중국'을 정복해서 '일본'의 '천황'과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거기다 '인도'와 '필리핀' '대만(台灣)'과 '유구<琉球-현, 오키나와(沖繩)>' 등을 거느리면서 동남아시아를 지배하고,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를 세우겠다...]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방법으로 '중국' 정복의 길목에 있던 '조선(朝鮮)'을 복종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히데요시'는 그때, 스스로 그러한 계획을 밀고나가는 것을 <내 오랜 세월의 꿈이었다!>라고 했습니다만, 그런데 '히데요시'의 그러한 계획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本能寺의 變>

 


 당시 '히데요시'의 주군으로 '일본' 국내 평정의 선봉에 나섰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혼노우지의 변(본능사의 변-1582년)'으로 가신 중 한 사람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서 비명으로 최후를 마감했습니다만, 그런데 그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았던 '이에즈스 회'의 '플로이스' 신부는 '노부나가'가 죽었던 바로 그해에 '로마'의 '이에즈스 회' 본부로 보냈던 '일본포교보고서' 속에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 통일을 이룬 다음에는 대 함대를 편성해서 '중국'을 정복하고, 그 영토를 자기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써두었습니다. 

 

                                                                             

<Odanobunaga>

 


 그래서 또 아마도 그때 '히데요시'가 그 '노부나가'로부터 그 계획을 전수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히데요시'는 1585년 9월에 가신 중 한 사람이었던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에게 <'일본'은 미흡하나마 '당국(唐國-중국)'까지 진격한다!...>라고 '노부나가'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 '오사카 성'이 완성되었을 때(1586년)는 '이에즈스 회'의 일본 부관구장(副管區長)이었던 ‘가스파루 코에류’ 신부와 회견했던 자리에서 또 다시 그 '중국 정복 계획'을 다음과 같이 확실히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금도 은(銀)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오직 나의 명예와 권세를 죽은 후에까지라도 계속해서 전하고 싶은 욕심뿐이다. 그리고 곧 '일본'이 안정되면 이 나라는 동생 '히데나가(秀長)'에게 양도하고, 나는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 그러므로 그 대군들을 옮기는데 필요한 배 2000척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 목재의 벌채를 명해두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고, 거기다 또 신부들에게도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저 거대한 '중국'이 나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의 예를 올리게 될 것인 바, 그렇게 되면 나는 그 나라 땅이 닿는 곳까지 크리스천 교회당을 건립하게 하고, 또 '중국인'들 전부를 크리스천이 되게 명할 것이다......>

 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히데요시'는 가히 <권력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웅대한 '오사카 성' 내를 외국 선교사들의 선두에 서서 몸소 안내를 하고, 또 <전부 황금으로 만든 이동식 다실> 등도 보여주면서,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OsakaCastle-명치시대의 모습>

 


 그러니까 그 '히데요시'의 <오랜 세월의 꿈>도 또는 '노부나가'의 그 <계획>이란 것도, 모두가 다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독재자들의 제멋대로인 호언장담이었거나, 정복욕이 낳은 망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히데요시'는 그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단시일 내에 실행에 옮겼습니다.

 1587년 '오사카 성'에서 '코에류' 신부에게 <중국정복의 계획>을 말했던 그 직후부터 '히데요시'는 당시 '쓰시마(對馬島)'의 도주(島主)였던 '소우요시시게(宗義調)' '요시토모(義智 - 그러나 요시토시로 부르는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람)' 부자(父子)에게 '중국' 정복의 길목에 있던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종할 것을 교섭하라고 명했고 <만약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군대를 파견해서 나라(朝鮮)를 멸망시켜버리겠다!>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쓰시마'는 이미 아시는 대로 현재 '일본(日本)'과 '대한민국(大韓民國)' 사이에 있는 섬으로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까지는 147킬로, '대한민국'의 남쪽 관문인 '부산(釜山)'까지는 약 5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섬입니다. 그리고 전도(全島) 약 700 평방 킬로 정도인 그 섬은 2, 3천미터 높이의 산들이 겹겹이 서있고, 또 토지가 척박한 관계로 과거부터 경작지가 적지 않아도 농산물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15세기 초부터는 '조선'으로부터 매년 쌀과 콩 등을 지원받거나 '부산'에 관청을 설치해서 '일본'과 '조선'의 통상, 무역의 교섭을 하거나 하며 살아왔던 그런 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던 그 '조선'에 갑자기 <복종하지 않으면 멸망시키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그 섬에서는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때 도주였던 ‘소우요시시게’는 '히데요시'의 그런 명이 나오자 깜짝 놀라서 어떻게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 해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조선'의 왕에게 <현재 '일본'에 새 왕(히데요시)이 탄생했기 때문에 우호의 인사차로 사자를 보냅니다...>라는 위조 서장(書狀)을 써서 사자와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소우(宗) 부자(父子)'는 자신들의 가신을 '일본' 국왕(히데요시)의 사자로 위장시켜서 '조선'에 보낸 다음, 그 답례 차로 오게 될 '조선'의 사자를 '히데요시'에게로 바로 보내서 그들끼리 뭔가를 서로 해결하게 해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아무 사정도 모르는 '조선'의 사자를 '일본'으로 불러 들여서는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일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소우 부자'로서는 아주 큰 연극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의 생각대로 '조선'의 사자가 결국 '일본'으로 오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는 그때 '조선'의 사자들이 가져온 '조선 국왕'의

 <멀리서 전해온 바에 따르면, 대왕(히데요시)이 '일본' 전 국토를 통일하였다고 들었는데, 이 차에 서로의 평화를 확보하고, 이후에도 인접국의 우호를 돈독히 하면 좋겠소......>

 라고 섰던 인사 서장을 보고는, 분명하게

 <나는 '중국' 거기다 '인도'까지도 정복하고, 나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은 무조건 '일본'에 복종해라!>

 라고 하는 아주 거만하고도 무례한 답장을 써서는 '조선'의 사자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의 서장에서 '히데요시'는

 <나의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어머니는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그러므로 나는 태양의 아들이다!>

 라는 것도 같이 써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단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틀린 사람이다. 그런 기적에 의해서 태어난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동양의 모든 나라들뿐만 아니라, 서양의 나라들도 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라는 것도 써서 '필리핀'과 '대만' 등지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어쨌든, 그리고 비록 인사 차로 오기는 했었지만, 그런 무례한 답장을 본 '조선'의 사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국왕'의 사자를 '일본'으로 불러들여서 '히데요시'와 만나게 하려했던 '소우 부자'의 연극은 어떻게든 성공을 하였으나, 그러나 아무 사정도 모르고 왔던 '조선' 측에는 그야말로 폐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러자 '조선'의 사자들은 그때 <이것은 도(道)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을 깔보는 자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는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만, 하지만 이어서 열렸던 화려한 '교토'의 '취락제(聚樂第)'에서 거행되었던 회견 모습 또한 크게 예의에 벗어났던 것이었습니다.

 

                                                                             

<聚樂第風圖>


 그날 '조선'의 사자들은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결국 회견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꿇어앉아 있던 '조선'의 사자들과 줄지어 있던 중신들 앞에 갑자기 유아였던 후계자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평복차림으로 나타나서는 그 '츠루마츠'를 어르면서 회견장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갑자기 '츠루마츠'가 '히데요시'의 옷에다 오줌을 싸버리고 말았는데, 그러자 '히데요시'는 <야, 야, 야, 이거, 이거...>하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 '츠루마츠'를 시종에게 건네주고는 그곳에서 바로 옷을 갈아입었던 것입니다.

 그것까지 본 '조선'의 사자들은 <전부가 실로 제멋대로다. 우리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면전을 가리지도 않고. 그것은 우리를 얕본 태도였다!>라고 글로 써서 남겨놓았습니다.

 ※ 참고 - 히데요시는 그때, 안하무인하게 특히 조선의 사신들 앞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으로도 일본의 야만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특히 히데요시의 비 인간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으로 생각함.

 그러니까 아무리 <자신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국의 국왕이 보낸 사자를 영접했던 태도는 아니었지요.
 거기다 또 '히데요시'의 요구는 예의에도 벗어났고 또 도(度)를 지나쳤던 이상 그것을 '조선' 측이 받아들일 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사자들이 돌아간 후에도 '히데요시'는 여전히 '쓰시마'의 '소우 부자'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종할 것을 교섭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1585년에 ‘소우 요시시게’가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히데요시'는 후계자였던 젊은 '요시토모(義智)'의 보좌역으로 크리스천 대명 ‘코니시 유키나가’를 붙여서 계속해서 교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코니시 유키나가'는 당시 상업의 도시로 알려졌던 '사카이(堺)'의 유력자로, 친교가 있었던 ‘프로이스’ 신부로부터 <대단히 선량한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코니시 류우사(小西隆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부친이라고 전해지는 그 '류우사'는 당시 도시 외곽에 많이 있었던 '한센 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짓는다거나 하면서 '일본'의 '크리스트교'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유아 때 세례를 받아서 크리스천이 되었던 '유키나가'도 청년시절 한때 상인으로 활약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후에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 되어서, 무장으로써 크게 활약을 했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유키나가'에게 어떠한 생각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유키나가'는 그 즈음에 자신의 딸이었던 '마리아'를 ‘요시토모’에게 시집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요시토모'는 23, 4세 '유키나가'는 34, 5세 정도였기 때문에, 고도(孤島) '쓰시마'로 시집을 갔던 '마리아'는 당시 아직도 어렸던 15, 6세 정도... 아마도 소녀 같은 천진스러움이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남편이었던 '요시토모'도 나중에는 크리스천이 됩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부자(父子) 관계가 되었던 '유키나가'와 '요시토모'는 그때부터 함께 '조선'과의 교섭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그 두 사람의 교섭 행태를 잠시 보게 되면, 그때 그들은 어떻게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과 침략을 저지하려 했던 고심이 역력히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호국 '조선'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사위의 생각에 '유키나가'는 깊은 이해를 표시하고 또한 그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유키나가'와 '요시토모'는 어떻게든 '조선'과의 교섭을 계속해서 펼쳐나가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거대한 '중국'을 주인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의 요구 따위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조선'은 <주인의 나라인 '중국'을 버리고 어떻게 '일본'과 손을 잡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거절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나가'는 '조선' 측과의 교섭을 연장시켜가면서 어떻게든 '히데요시'의 출병을 중지시켜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러나 조급해하던 '히데요시'는 급기야 '조선'과의 교섭을 중단하고는 결국 '조선'에의 일방적인 침략을 개시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히데요시'는 '유키나가'와 '요시토모'에게 교섭을 계속해서 시켜가면서 뒤에서는 '조선' 출병 준비를 척척 진행해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1591년(天正15년) 10월에는 '히젠<사가(佐賀) 현>'의 '마츠우라(松浦)반도' 북쪽 외곽에 있던 구릉지에 '조선'과 '중국' 침략 목적의 본진이었던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성을 대명들에게 명했고, 그리고는 또 5개월도 되지 않아서 주변 16킬로의 땅을 확보했으며(쓸 수 있는 땅으로 평지를 만듦), 이어서 5층 7계(階)의 천수각(天守閣)이 하늘로 치솟았고, 그리고 또 그 성 주위에는 대명들의 진영들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축성 전에 그곳은 인가도 별로 없었던 아주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곳이 반년도 되지 않아서 <천수각이 하늘 높이 치솟은, 직경 4킬로도 더 되는 신도시>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아무리 권력자의 권세라고는 하지만, 실로 무서운 것을 보여준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그런데 그때의 공사 모습은 또 어떠했을까요?...                                                 

 

 

 

 <Nagoya Castle-名護屋城天守跡>



 <'히젠'의 '나고야 성' 축성>에 관해서 '프로이스 신부'의 글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곳은 산간 벽지로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식량뿐만이 아니라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공급되어야할 전 필수품이 부족한 상태이고, 또 산도 많은데다 한쪽은 늪지인 아주 황량한 곳입니다. 그렇지만 '칸바쿠도노(關白殿)'의 명령이 아주 엄해서 대명들은 사람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개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그런 것은 아예 머리에서 지워 없애버린 듯) 할당받은 일들을 인수해서는 4만, 5만의 사람들을 모았고, 그리고는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노동으로 인한 피로와 고통으로 죽어갔지만, 그러나 어쨌든 불과 수개월 안에 그곳에는 거대한 궁전과 성의 여러 건축물들이 아주 멋지게 완성되었으며, 그리하여 허허벌판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공사에 참여했던 대명들은 누구라도 마치 '다른 대명들에게는 뒤질 수 없다'는 듯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혹시라도 공사에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했을 시에는 공사감독자들 <그 중에 한 사람은 '히데요시'의 친척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로부터 사람의 면전(面前)에서도 서슴지 않았던 수모를 당해야만 했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 혹시라도 '칸바쿠도노'에게 그러한 일에 대해서 고자질이라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금방 '칸바쿠도노'에게 반항하는 자라고 취급을 해서는 영지도 지위도 모두 몰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명들은 스스로 자신의 군사나 영내(領內)에서 모집했던 많은 수의 인부들을 데리고서, 일부러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숲이나 산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서오거나 '칸바쿠도노'의 성벽이나 대문에 사용할 거대한 돌들을 운반해오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히데요시'의 야망을 위해서 혹사당했던 각 대명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성이 완성 되자 이번에는 겨우 일 개월 정도의 휴식기간을 가진 후에 '조선 출병'을 위한 준비에 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음 '프로이스' 신부는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기와 탄약을 조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산(遺産)과 전답을 처분해서 채비를 단단히 하는 등, 그것은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아내의 눈물, 내버려두고 가야하는 자식들, 그리고 또 그 가족들... 너무나도 비정한 이별들이 생기고, 깊은 마음속 저 안에서부터 번지는 슬픔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것은 얼마나 많은 말을 한다고 해도 족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축성(築城)에 끌려가서 중노동을 부과 당했던 그 많았던 무명(無名)의 병사들과 농부들은 그런 고단함을 치유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육친들과 헤어져서는 바다를 건너고, 또 그 생사조차도 알 수 없을 저 '조선(朝鮮)'의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서 '히젠'의 '나고야 성' 아래로 모두들 다시 모여들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 '조선' 출병을 위해서 편성되었던 부대는 제1군의 '코니시 유키나가' '소우 요시토모' '히젠(나가사키 현)' '아리마'의 '아리마 하루노부' 마찬가지로 '오오무라(大村)'의 '오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등, 주로 크리스천 대명들로 이루어졌던 18,700명과 이하, 제9군까지 158,000명이라는 대 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유키나가'가 이끌었던 '제1군단'은

 700척도 더 되었던 배에 올라타서는 '조선'으로의 침략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592년 (분로쿠-文祿 元年) 4월 12일----------------------- .

 '유키나가'의 제1군은 대기하고 있던 '쓰시마'의 항구로부터
 은은히 섬 그림자처럼 보이고 있었던 '조선'의 항구 '부산(釜山)'을 향해서
 차례로... 차례로... 출범해 나갔던 것입니다 -----------------------------





                                                                   

 

 

                                                                         

< 쓰시마의 Aso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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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1. '쥬리아 오타아'의 등장

 

<Tokugawa Ieyasu>

 

 

 어쨌든, 그리하여 천하의 실권을 손에 거머쥐었던 '이에야스'는 1603년(경장 8년) 2월,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 받아서 정식으로 '에도'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어서 '일본'의 정치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는 관동의 일개 변두리 촌에 불과했었던 '에도'도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장군의 성 아래 동네에도 대규모적인 시가 조성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1605년에, 장군의 지위를 재빨리 후계자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해 '이에야스'는 63세였고 '히데타다'는 36세였습니다.

 그런데 그 <정권교체>는 '이에야스'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서 '도쿠가와 막부'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그때, 죽을 때가 임박해 있던 노령의 '히데요시'가 어린 후계자의 장래를 걱정해서 노심초사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교훈 삼아 자신이 아직 충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을 때, 후계자를 확실히 키워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에야스'는 실제 권력은 끝까지 자신의 손에 쥐고 있으면서, 이후 자신을 <오오고쇼(大御所)> 라고 칭하고, 이어서 '후시미(伏見)' '순부(駿府)' '에도(江戶)' 등으로 바쁘게 옮겨 다니면서 장군 '히데타다'의 뒤에서 '일본'의 정치를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에야스'가 장군직을 '히데타다'에게 양도했던 바로 그해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교토'에 이어서 그 근처 '후시미'에 새로운 천주당(성당)이 세워졌고, 그리하여 약 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세례를 더 받아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때 '일본어'를 특히 잘했던 '이에즈스(jesus-예수)회'(1534년 '스페인' 출신의 ‘이구나치오 요로라’가 ‘프란시스코 자비에루’와 함께 창설했던 그리스도교의 포교 회)의 통역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로드리게스' 신부가 그 방문했던 '후시미'에서 '이에야스'의 '오오오쿠(大奧-성 안에 장군의 부인들이 기거하던 장소-아주 깊은 내실)'의 시녀들 중에서 '조선(朝鮮)' 출신의 어린 여성 신자가 한명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일을 '로마'의 '이에즈스 회' 본부에 보냈던 '포교보고서' 안에 다음과 같이 적어서 보냈습니다.                  

 

 

<Ignatius Loyola>

​ <'쿠보우사마(公方樣-이에야스)'의 '오오오쿠'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 중에 ‘아구스치노 츠노카미도노(코니시 유키나가)'의 부인에게 시중 들었던 '고려(高麗=조선)' 태생의 여성이 한명 있습니다. 그녀는 낮에는 '오오오쿠'의 일로 바쁘고, 이교도('그리스도교' 외의 교를 믿는 신자들)들 속에 있기 때문에 밤의 대부분은 성서를 읽는다거나, 신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는 진실로 열성적인 신자입니다. 그녀는 성 안에 아무도 모르게 잘 숨겨둔 조그마한 예배당(신단)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주 지인들을 찾아뵙는다는 구실로 허락을 받아서 성을 나와서는 교회로 찾아와서 마음을 정갈히 하고, 성체도 배령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뜨거운 신앙심에는 주위 사람들도 모두 다 감동할 정도입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데다 아직 어리고 한창 때라 악에 전혀 물들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순결을 잘 지키고, 영혼을 가다듬으면서 신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크리스천 시녀들에게도 언제나 신앙을 다지고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녀는 궁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교회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가시나무 속에 핀 장미꽃"과도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그런 여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바로, 나중에 '이에야스'의 특별한 은총도 거절하고, 또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외로운 고도(孤島)로 유배를 떠났던 <크리스트 교도(敎徒)의 모범 또는 거울>이라고 칭해졌던 <쥬리아 오타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직 어리고, 한창 때...>라고 했으므로 '쥬리아'는 그때 17, 8세 정도의 처녀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런데 왠지 그때 ‘로드리게스’ 신부는 그녀의 이름을 그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2년 후였던 1607년에, 이번에는 '에도'로부터 나온 '프란시스코 회(1209년 '이탈리아'의 '아시지'에서 태어났던 '프란시스코'가 창설했던 '크리스트교'를 이어받은 회)'의 ‘무뇨스’ 신부의 보고서에서 그 <쥬리아>란 이름이 확실히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그 '무뇨스' 신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쥬리아'는 1606년 말년의 '이에야스'를 따라서 '후시미 성'에서 '에도 성'으로 따라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코우테이(皇帝=쇼군=장군)'의 왕궁(에도 성)에 교인들 중 '쥬리아'라고 불리는 부인이 한 분 계십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신앙심이 깊고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교인으로, 우리들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줄 뿐만 아니라, 환경이 좋지 못한 크리스천들을 스스로 찾아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먹을 것들을 베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녀는 자주 교회로 찾아와서 열심히 미사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상, 두 신부의 보고서에서 당시 '쥬리아'가 믿음이 아주 깊고 또 '조선' 태생의 여성이었으며, 그럼에도 '이에야스'에게 시중들었었다는 것과 '코니시 유키나가' 부인의 시중 또한 들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코니시 유키나가'로 말하자면,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에 가담했던 탓으로 '교토'에서 처형을 당했던 바로 그 유명했던 크리스천 大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야스'와는 적과 아군의 관계에 있었던 그 '유키나가' 밑에 있었던 '쥬리아'가 그럼, 어떻게 해서 '이에야스'의 성 안에 있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또 '조선' 출신의 '쥬리아'가 어떻게 해서 이국인 '일본'으로까지 오게 되었고, 또 그 후에 '일본'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하지만 그 <쥬리아 오타아>에 대해서는 자료가 너무 공소(空疎)하고 또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쥬리아'가 살았던 그 당시의 '일본'은 '히데요시'로부터 '에도 막부'를 열게 된 '이에야스'에게로 천하가 막 넘어가려던 시대가 아주 크게 변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에야스'에 의해서 '크리스트교'의 극심했던 탄압이 행해졌던 시대였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와 같았던 당시 '일본'의 움직임을 더듬어보면서 <쥬리아 오타아>의 반생을 추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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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 처음에 >

  "日本은 지극히 평온합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세상을 떠나고, 그 2년째였던 1600년(慶長 5년) 9월 15의 일이었습니다. '미노<美濃-기후 현(岐阜縣)>'의 '후와 군(不破郡)'에 있는 '세키가하라(關ヶ原)'의 분지에서 '히데요시'의 가신 중 한사람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이끌던 '서군' 8만의 병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끌던 '동군' 10만의 병사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 갈림길의 싸움>이라고 말해지는 <세키가하라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이름도 없는 농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몸을 일으키고, 타고난 재치로 천하를 손에 거머쥐었던 '히데요시'는 나중에 병이 깊어져서 죽을 날이 임박해지자 '이에야스'와 '카가<加賀-이시카와 현(石川縣)>'의 대명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의 원로들에게 당시,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秀賴)'의 장래를 부탁했습니다.


 

<Maeda Toshiie> 

 

 

 그러나 '히데요시'에 이어서 그 다음 해에 '토시이에'가 죽어버리자, 원로(大老)의 필두 격이었던 '이에야스'는 차제에 천하를 겨누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그에 반대했던 '미츠나리'와의 사이가 험악해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양자는 앞 다투어서 각지의 대명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가며 동서로 분열이 되어서는, 곧 천하를 다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에야스'의 '동군'에는 크리스천 배척주의자로 유명했던 '히고(肥後)'의 '카토우키요마사<加藤淸正-쿠마모토현 북부(熊本縣北部)>'를 처음으로 '오와리(尾張)'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아이치 현(愛知縣)>' '가르시아 부인'의 남편이었던 '탄고(丹後)'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쿄토 부(京都府)>' 그리고 또 크리스천 대명으로 '히젠(肥前)'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나가사키 현(長崎縣)>' '부젠(豊前)'의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오오이타 현(大分縣)>' 등이 가담했습니다.

 한편 '미츠나리'의 '서군'에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스오우, 야마구치 현(周防, 山口縣)>'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사츠마, 카고시마 현(薩摩, 鹿兒島縣)>'를 처음으로, 크리스천 대명으로 유명했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히고, 쿠마모토 현 남부(肥後, 熊本縣南部)>' 등이 가담해서 크리스천 대명들은 동서 양군으로 갈라져서 교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 갈림길의 싸움>이라고는 했지만, 참으로 싱겁기 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승패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결국, 끝나버리고 말았던 때문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 古戦場>
 

 

 그때 '동군(東軍)'의 수장이었던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분지를 서쪽에서 내려다보는 '모모쿠바리 산(桃配山)'에다 본진을 두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동군' 대부분의 대명들은 4 평방 킬로도 되지 않았던 분지의 아래 쪽에서 개미처럼 집중해서 포진을 하고 있었고, '서군(西軍)'은 또 그 주위의 고지로부터 협공자세로 포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포진의 형태로만 말하자면 '동군'은 지극히 불리했던 상황이었고 '서군'은 지리의 이점을 충분히 살렸던 유리한 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일 아침에는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비도 그치고, 해 뜰쯤에는 분지의 바닥으로부터 아침안개가 끓어오르고 있어서 백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오전 8시 경 '동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선두부대와 선봉을 다투던 '마츠헤이 타다요시(松平忠吉)'의 진으로부터 갑자기 총성이 울렸고, 그것이 신호가 되어서 드디어 세기의 합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동서(東西)' 서로 간의 진지로부터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끓어오르던 안개 속에서 소라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고, 병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주위 산들에서 메아리쳤으며, 이어서 여기저기에서 소규모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전황은 일진일퇴------------------,

 정오가 되어서도 승패는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분지의 서남쪽에 있던 '마츠노우 산(松尾山)'에서 진을 치고 있던 '서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군사 1만 3천명이 옆 진지를 지키고 있던 같은 편이었던 '오오타니 요시노부(大谷吉繼)'의 진으로 향했고, 그리고는 갑자기 총을 쏘면서 쏟아지듯이 한꺼번에 그 진내로 돌입했던 것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그러나 그 '히데아키'로 말하자면, 그는 '히데요시'의 처 '네네'의 친정 사람으로, 나중에 '히데요시'의 양자까지 되었던 무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처음부터 '서군'과 함께 움직였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그 전부터 '이에야스' 측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어도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전황만 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高台院(코우다이인)=네네. 히데요시의 정실>


  

 어쩌면 그때 '히데아키'는 '서군'을 배신했으면서도
 혹시라도 다시 '서군'이 유리해지면 '서군' 측에 붙으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小早川秀秋>

​ 

 하지만 어쨌든 '이에야스' 측이 진내로 총을 쏘면서 들이닥치자 '히데아키'는 놀라 일어서서는 같은 편이었던 '서군'의 '오오타니' 군의 진지로 갑자기 공격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또, 그런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천군만마를 얻게 되었던 '동군'은 일제히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서군'은 곧 혼란을 일으키며 삽시간에 흩어져서 패주하기 시작했고, 오후 2시가 지나면서 승리를 확신했던 '이에야스'는 그에 '동군'의 각 무장들을 불러서는 정전을 명령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천하 갈림길의 전투>는 6시간도 되지 않아서 싱겁게 막을 내렸고, 천하는 '히데요시'가 죽고 그 2년 만에 '이에야스'의 손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패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부키 산(伊吹山)'의 숲에 숨어 있다가 수일 후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크리스천 대명이었던 '코니시 유키나가'도 '이부키 산'에서 자수를 했고, 그리고는 '미츠나리'와 함께 '쿄토'로 끌려가서 '로쿠조우가와라(六條河原)'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Ishidamitunari> 

 <끔찍한 처형의 장소 六條河原의 평화로운 모습-2014년 5월>

  아무튼, 그리하여 '일본'의 정치는 그로부터 머지않아 '이에야스'에 의해서 '에도(토쿄)'에 막부를 열게 되었지만,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의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금지시켰던 '히데요시'에 이어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던 '이에야스'는 '크리스트교'에 대해서 또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아무튼, 그 '세키가하라 전쟁'은 각지의 대명들이 양분되어서 대립했던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패했던 '서군'의 장수 '이시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아서 봉행 직을 맡아서 열심히 일할 때부터 '크리스트교'에는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또 '서군'에는 크리스천 대명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코니시 유키나가' 등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일본'에 와있었던 '유럽'의 선교사들 중에서는 '서군'에 호의를 보였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런 선교사들이 있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자 그런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무리들을 벌하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에야스'는 자기가 천하를 완전히 손에 쥘 때까지는 그런 선교사들과도 기회가 있으면 만나기도 했고,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였던 1601년에는, 1587년(天正 15년) 이래 발표되었던 '히데요시'의 <난반(南蠻-남쪽의 야만인- 외국을 칭함)의 선교사들은 일본을 떠나라!>고 했던 <바테렌츠이호우레이(伴天連追放令)>를 완화해서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나가사키(長崎) 등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도록 허가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또 '이에야스'는 1603년(경장 8년)에 동남아시아의 '마카오'로부터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던 '일본' 포교 목적의 자금을 실었던 '포르투갈'의 무역선이, 당시 '유럽'에서 적의 관계에 있었던 '폴란드' 배에 나포되었을 때도, 그 피해가 있었던 선교사들에 대해서(부탁도 하지 않았는데도) 5000량(兩)(현재 금액으로 약 8600만 엔-1983년 기준) 정도의 보조금까지 주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천하를 거머쥐게 된 '이에야스'는 그렇게 선교사들과 '일본' 교회에 대해서 아주 큰 호의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했던 호의는 교회에 대한 이해에까지도 해당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그때 '유럽'과의 무역을 확보하고, 순전히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을 <통상 목적의 안내자> 정도로만 보고 호의를 보였던 것뿐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일본'에는 평화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는 더 이상 교회에 대한 박해도 없었고, 그래서 선교사들 또한 열심히 포교를 펼쳐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결과로 큐슈(九州)와 키나이<畿內-교토에서 가까운 오사카, 야마토(大和), 효도(兵庫) 등>' 등, 서쪽 지방에 한정하지 않고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개부에 편승하여 토우카이(東海)와 칸토우(關東) 그리고 오우우(奧羽)지방<옛날의 무츠(陸奧), 데와(出羽) 두 지방-현재의 아오모리(靑森), 이와테(岩手), 야마가타(山形), 아키타(秋田), 미야기(宮城), 후쿠시마(福島)의 6縣>까지, 거기다 바다를 넘어서 에조<옛날, 오우우 지방에서 홋카이도(北海道) 지방에 걸쳐서 살았던 인종. '아이누족'이라는 설과 '일본인'의 일부라는 설이 있음>의 땅(北海道)에까지도 그것은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Franciscus de Xabier>
 * 1622년 이후 '일본'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으로 '오사카'의 어느 신도의 집에서 1919년에 발견됨
    현재는 '코우베(고베-神戶)'의 시립박물관 소장


  그리고 사실 '일본'에 처음으로 '크리스트교'가 전해지게 되었던 것은 1549년<텐붕(天文) 18년) <동양의 사도>라고 존경받았던 '프란시스코 자비에루'에 의해서였습니다만, 그러나 그해 '일본'에서 탄생되었던 신자의 수는 불과 150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것이 33년이 지난 1582년에는 15만 명에 달했고 '세키가하라 전쟁'이 있었던 1600년에는 30만 명, 그리고 1605년에는 7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그러니까 '세키가하라 전쟁' 후 5년간, 신자의 수는 두 배 이상이나 증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수치(數値)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일은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아득히 먼 지구의 반대편인 '유럽'에서 왔던 선교사들에 있어서도 무척 기뻤던 일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때, 그 선교사들에 의해서 '유럽'으로 보내졌던 편지들에도 <현재 '일본'은 지극히 평온합니다. 신자들의 수도 증가하고 있고, 새로운 성당들도 여러 도시와 촌에서 계속해서 세워지고 있습니다...>라고 기쁨으로 적었던 글들도 아주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하여 그때는 새로 지은 성당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다투지도 않고, 평화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뻐하면서, 神에게 감사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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