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앙투안 마리 장 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comte de Saint-Exupéry 또는 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 -1900년 6월 29일부터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그의 성(姓)이었으며, 프랑스의 작가(作家), 조종사(操縱士)였고, 우편수송을 위해서 유럽과 남미(南美) 사이의 비행항로 개척에도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왕자-Le Petit Prince> 등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Lyon-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났으며, 예수회(會-Societas Iesu.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회의 男子修道會)의 노트르담 드 생 크로(Notre-Dame de Sainte Croix)학교를 거쳐서<또는 1909년 10월 7일에 입학했던, 父親(Jean de Saint-Exupéry)의 母校, 聖十字聖母學院 또는 학교>, 스위스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스위스의 북동쪽, 독일 슈바르츠발트(Black Forest) 서쪽의 도시)>에 있었던 성(聖) 요한(St.John-마리아 修道會) 학교에서 문학(文學)을 배웠다.(1915년 1월부터)

 그 후, 그는 해군(海軍)에 입대하기를 원했지만 2번이나 낙방했고, 그러자 또 그는 1921년 4월 9일에 자원(自願)을 해서 군(軍)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육군비행연대(陸軍飛行聯隊)에 소속된 후, 군용기(軍用機) 조종사(操縱士-士官)가 되었다.

 그 후, 퇴역(退役)해서 자동차 판매원 등의 일을 했지만, 다시 민간항공(民間航空) 업체에 들어가서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1926년에 그는 26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작가(作家)의 길로 들어섰으며, 과작(寡作) 후에 자신의 비행사(飛行士)로서의 경험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南方郵便機(Courrier Sud-1929년 6월, 夜間飛行(Vol de Nuit-1931년 10월 등)>

 

 그러자 그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세계인들에게 읽히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은 비행사들 사이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또 그를 좋아했던 독일인들 중에서는 <나중에 적(敵)으로 싸우게 되었을 때, 그가 소속되었던 부대와는 싸우지 말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39년 9월 4일에 세계 제2차 대전에 소집되었고, 툴루즈(toulouse-프랑스 남서부)에서 비행교관 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전선(前線)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고, 그리하여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 희망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정작 그 전선(前線)에서 그를 거부했고, 그러자 결국 그는 1939년 11월 9일에 샹파뉴(champagne-파리의 동쪽) 지방의 <오르콘트>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정찰대(偵察隊-II/33 部隊)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부대(部隊)는 큰 피해를 받아서 알제리(Algeria)까지 후퇴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는 동원해제(動員解除)되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 후에 미국(美國)으로 망명했다.(1940년 12월 21일 리스본출항, 12월 31일 뉴욕도착)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다시 지원(志願)을 해서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원(元) 부대(部隊)에 복귀했고(1943년 6월), 이어서 신예기(新銳機)의 훈련을 받은 후 실전(實戰) 배치되었지만, 그러나 또 금방 착륙실패로 인한 기체(機體)의 손상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해 8월에 비행금지처분을 받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제대(除隊) 당했다.

 

 하지만 또 그는 지인(知人) 등을 통한 필사적(必死的)인 노력을 해서 다시 복귀했지만, 그러나 또 폭격기조종사로서 I/22부대(部隊)에 배치되었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르디니아(sardinia-지중해 Corsica섬의 남쪽에 있는 이탈리아령의 큰 섬)에 있었던 알게로(Alghero Airport-Fertilia Airport) 기지(基地)로 간 후, 본대(本隊)였던 II/33부대(部隊)에 1944년 5월에 몰래 숨어들어갔다. 그러자 부대는 그 후에 코르시카(corsica-나폴레옹의 출생지) 섬으로 진출(進出)했다.

 그리고 1944년 7월 31일, 프랑스 동남부의 그르노블(Grenoble-프랑스 남동부 Isère 현의 주요도시) 등(Chambéry, Annecy)을 사진(寫眞)정찰하기 위해서 록히드(Lockheed) F-5B(P-38 偵察機型)를 타고 볼로냐공항(Bologna Guglielmo Marconi Airport-이탈리아 북동부)을 단기(單機)로 출격(出擊)한 후, 지중해(地中海) 상공(上空)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완전히 행방불명되었지만, 그러나 또 1988년 9월 7일에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Consuelo) 그리고 연락처(c/o-뉴욕의 Reynal & Hitchcock출판사)와 소재지(所在地-1943년에 어린왕자를 처음 출판했던 발행처) 등이 새겨져 있었던 브레이스릿(bracelet-팔찌 등)으로 보였던 은제품(銀製品)이 트롤(trawl) 선(船)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우여곡절을 겪었던 후에 그가 타고 갔던 비행기의 잔해도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또 2008년 3월 15일에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지(地方紙)에 당시 Bf109의 파일럿이었다던 사람(Horst Rippert)이, 자신이 그의 정찰기를 추격했다는 증언(證言)의 기사(記事)가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도 그 분 작품의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제가 추격시켰던 그 조종사가 제발 그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정말이지 만약에 그때 내가 그였던 줄 알았더라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의 많았던 작품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들 중 몇이다.

 동방우편기(南方郵便機-Courrier Sud. 1929년 6월)

 야간비행(夜間飛行-Vol de Nuit. 1931년 10월)

 인간의 대지(大地) 또는 땅(Terre des Hommes. 1939년 3월)

 싸우는 조종사(操縱士-Pilot de Guerre. 1942년)
 어린왕자(Lettre à un Otage. 1943년 2월 또는 6월)
 그리고 사후(死後)에 편집되어 출판된 것으로, 성채(城砦-Citadelle. 1948년, 未完)

 등이 있었고, 지금도 그는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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