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婦人)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分子)입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라고 왜 못하나?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김마리아(金瑪利亞. 光山 김씨. 1891년6월18일부터 1944년 3월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고, 그 모진 일제(日帝) 하에서 여성운동을 주동했던 분이었다. 그래서 <애국부인회장>과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으며, 본명은 김진상(金眞常) 또는 김근포(金槿圃)로도 불렸다. 그리고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김순애(金淳愛. 1889년6월10일부터 1976년5월17일.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도 친척이었으며, 그런 것을 보아서도 소위 <집안 내력> 또는 <뼈대 있는 가문>이란 것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또 여기서 한 위대한 <여성독립운동가> 한 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김순애 20세경>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 사이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학자였으며, 서상륜(徐相崙-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인물.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마리아는 1895년에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해서 4년만에 졸업했다.

 선생의 집안은 원래 서울의 명문양반가문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그래서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생전에 많은 사업을 할 수 있었으며, 친척들도 모두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도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참고로 선생의 셋째 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신민회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만주 등지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이었으며, 역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그렇듯 애국지사의 가문에서 성장했던 선생은 그러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서 서울로 올라가 190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다시 학교를 옮겨서 1910년에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후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당시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교사로 있었다>에서 교사를 지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18년에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28년에는 <2·8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 후, 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졸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귀국했고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했다. 그러나 모교(母校)에서 체포된 후(3월5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수감 때의 모습>

 

 그 후, 석방된 선생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여성항일운동>에 힘썼으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다시 체포되었고, 그때 선생은 <조선인이 조선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든가 <나는 일본의 연호 같은 것은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피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남자들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그런 것으로도 선생의 위대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선생은(1920년 5월 22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그 후에 조선을 탈출해서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몸이 조금 완쾌되자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고, 1923년 6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1924년 9월에 <파크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파크대학 졸업 관련 사진>

 그 후였던 1928년에 선생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0년에는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인이었던 <황에스터(황애덕)>와 <박인덕(朴仁德)> 등을 만났으며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추대된 후, 일제(日帝)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그리고 1933년(또는 1932년 7월)에 귀국한 후 원산으로 가서 기독교 전도와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그것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나름대로 일제(日帝)에 항거했지만,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그런데 그때가 광복을 거의 1년 앞 둔 시점이어서 그 안타까움은 더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와 같이 선생은 확고한 민족 정신을 가진 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처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뒷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관순 열사>와 당시에 日帝에 의해 고문을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선생도 <추악하고 더러운 왜놈>들에 의해서 고문을 당하면서 <한 쪽 가슴을 잃어야> 했고 <여성의 상징을 인두로 지짐 당하는> 천하가 공노할 고문을 당했던 수치심에 스스로 여성으로서 떳떳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도 <한국인이라면> 저 <일본놈>들을 <왜놈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공감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 <강도에다, 저질의 족속이며, 천박한 난쟁이>들을 영원히 증오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친일(親日) 쓰레기>들은 모두 불에 태워서 소각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 나라를 다시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더러운 강도 왜놈들>을 보면서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도 <소박한 원함><가장 최소한의 우리의 자존감>을 위한 것으로, 다시 그 <인간 말종>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짐승들>의 손에 의해 온갖 <욕보임>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은 생전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더라면 한국은 벌써 독립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고 하고, 그리하여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선생의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서, 우리 후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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