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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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의 해학과 현명한 처세법은 물론 조급하고 멍청한 남자와 약아빠지거나 영리하고 신중한 아내들, 그리고 교회와 신에 대한 맹목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책.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중세를 체감하는 매우 적절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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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 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심하게 썩어 가던 사랑니를 빼고 원인 모를 몸살로 앓아 누웠다가 귀신을 봤다.

이를 뽑은 뒤에 점점 오한이 나서 몸을 덜덜 떨면서 방에서 혼자 잤다. 그렇게 앓아 누운 지 닷새 정도 되는 날이었다. 무언가 선득한 느낌이 들어 실눈을 떠 보니 침대 발치에 커다랗고 어두운 형상이 밑에서부터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 형상은 마치 건장한 남자가 도롱이를 입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도롱이는 짚을 엮어 갓 만든 게 아니라 만든 지 너무나 오래 되어서 짚들이 새까맣게 썩어가는, 짚과 짚 사이에는 더러운 것들까지 끼어있는, 그러니까 살아 있는 인간이 걸칠 만한 도롱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머리 위에 삿갓으로 보이는 것을 쓰고 있어서 그 밑으로 가린 얼굴에 짙은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래서 그 존재의 표정이나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렇게 나 혼자 앓아 누운 침대 발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고열과 오한으로 신음하면서 그것의 눈빛을 살피기 위해 뒤척였다. 누구냐, 넌? 내 이 구차한 육신을 거둬가려는 사신이냐, 아니면 이 낡은 집에서 살다가 죽은 원혼이냐.

이상하다. 이곳이 예전에 무덤 위에 지었다는 얘긴 듣지 못했는데. 혹 이삼십여 년을 내 잇몸 속에 파묻혀 겨우 머리만 내놓고 연명하다가 음식찌꺼기와 함께 썩어가던 사랑니의 영혼이냐. 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안 가던 그 때, 어마어마한 고통을 거스르며 그것을 겨우 노려보았고, 이내 그 음산하고도 슬픈 존재는 아무런 대답도 남기지 않은 채 자기가 올라왔던 방바닥 쪽으로 도로 가라앉으며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것이 그렇게 사라지자마자 내 몸의 오한(惡寒)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정녕 나를 '사악한 추위'로 떨게 만든 악귀였나? 아니면 내 낡은 잇몸에서 떠나는 걸 아쉬워하던 동갑내기 치혼(齒魂)이었을까. 죽을 듯이 앓던 이맘때 쯤이면 가끔 그것이 생각나고, 그 썩어가는 도롱이의 감촉이 어떨지 지금도 궁금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그 음습하고 불행했던 월셋집을 떠나왔기에 도롱이 귀신을 다시 만날 방도가 없다.


- 김인선의 괴담을 읽다가 옛 생각에 젖어 쓰다. 2019.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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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사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 추가) 알라딘 싱글즈 특별 기획 3
대한민국 / 알라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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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왜 아직도 북플에 ‘읽고있어요‘로 나오는지....

앗 아아!
이 구절 때문이었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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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김인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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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다가 무섭고 한없이 궁상스럽다가도 느닷없이 야하더니 처연함으로 눈가를 적시는 이야기들. 오뉴월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11월의 구르는 낙엽처럼 슬펐던, 연암이나 백석이 이 시대를 살았다면 써냈을 듯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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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치려는 사람이 말을 어렵게 쓴다"는 유시민의 언급은 대체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문심조룡>의 몇몇 구절이 떠올랐다. 말 나온 김에 한 번 옮겨본다.

 

두독과 가구와 같은 무리들이나 유진과 반욱의 일파들은 진주를 꿰어보려 했으나 대다수는 물고기의 눈깔을 꿰는데 그쳤다. (제14장 雜文)

교훈: 물고기 눈깔이나 꿰고 앉아 있지 말자.

 

옛날에 秦나라의 처녀가 晉나라의 공자에게 시집을 갈 때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옷을 입은 시녀들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그 공자는 시녀들만을 사랑하고 그 처녀는 박대했다고 한다. 또한 초나라의 상인이 정나라의 상인에게 귀한 구슬을 팔게 되어 향기 높은 계수나무로 만든 보갑에 구슬을 넣어 보냈더니, 정나라의 상인은 보갑만을 사고 그 구슬을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만일 언어적 표현이 주장하는 바의 도리를 매몰시켜 가지나 잎이 자기의 뿌리를 초과해 버린다면, 그것은 진나라의 처녀나 초나라 상인의 구슬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제24장 議對)

교훈: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사색의 길이 막힌 이들은 빈약한 내용을 풍부히 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쓸모없는 수식이 범람하는 이들은 언어 표현의 혼란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광범위한 학식과 폭넓은 경험은 내용의 빈곤을 해결해 주는 유일한 자양분이며 일관성과 통일성은 혼란을 치유해 주는 유일한 약처방이다. 식견이 넓고 중심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창작 구상에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이다. (제26장 神思)

교훈: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할 얘기를 분명히 하고, 버릴 건 버리자.

 

꿩이 화려한 깃털로 치장하고 있지만 한 번에 백 걸음 정도의 거리밖에 날지 못하는 원인은 살은 쪘으나 힘이 부족한 데 있고, 매가 아름다운 깃털을 지니지는 못했어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원인은 골력이 강건하고 그 기세가 맹렬한 데 있다. 작품에 나타난 재주와 능력 역시 이러한 사정과 매우 유사하다. 만일 風과 骨은 있으되 文采가 없다면 그러한 작품은 문학의 숲 속에서 맹금과 같은 존재일 것이고, 문채는 있으되 풍과 골이 없다면 그러한 작품은 문학의 숲 속에서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꿩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아마도 화려한 문채도 있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도 한다면 그러한 작품은 문학의 숲 속에서의 봉황이리라. (제28장 風骨)

교훈: 내용만큼이나 스타일은 중요하다. 설득의 힘은 문채에도 있다.

 

다채로운 사고의 소유자는 일반적으로 부연을 잘 하고, 논리적 재능의 소유자는 일반적으로 압축을 잘 한다. 압축을 잘 하는 사람은 말을 빼버려도 그 글의 사상과 내용이 줄어들지 않고, 부연을 잘 하는 사람은 말을 늘일수록 그 글의 사상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빼버림으로 인해 사상의 명료함에 곤란이 생기게 되면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논리성 대신에 사상의 빈곤일 것이다. 그리고 수사적 부연으로 인해 언어의 중복이 야기된다면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사상의 다채로움이 아니라 번잡함과 애매함일 것이다. (제32장 鎔裁)

교훈: 문장이 짧다고 다 무식한 게 아니고, 길다고 다 사기꾼은 아니다.

 

* 한 줄 요약: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어렵게 써도 된다.

 

위 인용에 사용한 번역본은 올재클래식스 <문심조룡>(2016)인데, 이외에도 몇 개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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