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개장했다는 알라딘 중고서점 신천점에 가서 몇 개 필요없는 책들을 팔고 이런 책들을 사왔다.

거의 새책같은 책들이 많아서 좀더 있다가는 거덜날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애들 책과 함께 다섯 권 정도만 사고 서둘러 나왔다. 밥 먹고 집에 가려는데 (얼핏 봤던) 김원중 <손자병법>은 나중에 애들도 읽을 만하니까... 하면서 도로 들어가 구입했다.

대원사에서 나오는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는 분야별 또는 취향대로 모으면 사전 구실을 하고도 남을 책들이어서 보이는대로 구입하려고 한다. 각 권은 얇지만 모두 해당 전공자들이 집필한 것이어서 거의 오류가 없다.  

 

신천은 과거엔 젊은이들이 모여 사교와 유흥을 즐기는 장소로 유명했지만, 최근에는 인근에 고가의 아파트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이 알라딘 잠실신천점은 양질의 도서들이 유입될 가능성이 큰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앞으로 중고책 사냥꾼들의 비장의 구매장소가 된다는 데에 오백 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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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7-17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ㅂㅋ오백원~~!
가까이에 중고서점이 있다는건 정말 좋은 일일것 같아요 제가 사는 지역에는 없어서 늘 아쉽거든요 ㅋ

돌궐 2015-07-17 09:05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새로 생겨서 좋타꼬 갔다 왔습니다. 예전에는 오다가다 있는 분당점을 들렀었거든요.^^

만병통치약 2015-07-1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역별로 어떤 책이 매물로 나오나 데이터화면 재미있겠네요 ^^

돌궐 2015-07-17 13:06   좋아요 0 | URL
그런 자료가 뜨면 절대비급을 찾아나설 알라딘 `도서원정대`가 결성될지도 모르겠네요.ㅋㅋㅋ

cyrus 2015-07-1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좋은 책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

돌궐 2015-07-17 22:54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럴 거 같네요. 그래도 가까이 있으니까 시간 날 때 들러보려구요. 얻어걸리는 책들이 있겠죠.ㅎㅎ
 
논증의 탄생 - The Craft of Argument

 

아래는 <학술논문작성법>에서 옮겨 온다. 이 책은 <논증의 탄생>의 전문가 버전인 듯하다. 

<논증의 탄생> 앞 부분에서는 저자의 에토스를 강조했는데, 이는 일반 독자들은 글쓴이가 그 글을 쓸만한 사람인가를 중시하기 때문일 거다. 반면 학술논문은 어차피 '선수들'끼리 돌려보는 글이므로 <학술논문작성법>에서는 에토스 관련 부분이 빠져 있다(계속 읽어 보니 중간 쯤에 에토스가 짧게 언급되긴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확인시키는 자료와 주장은 쉽게 찾아낸다. 그렇지만 우리의 주장을 반대하는 자료는 쉽게 무시하거나 왜곡시킨다. 우리가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단지 인간의 속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편향을 경계해야 하는데 당신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자료들이 당신의 주장과 일치할 때 주의해야 한다. (129-130)

 

가능하다면 중요한 자료들은 두 번 읽으라. 첫 번째 읽을 때는 관대하면서 당신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에 민감해지라. 잘 모르는 것이나 혼란스러운 부분은 다시 읽으라. 즉시 반대의견을 갖지 말라. 자료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읽으라. 자료가 당신의 주장을 반대하는 입장이면 당신은 그것의 약점을 강조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런 유혹을 적어도 처음에는 물리치라. 자료가 중요해 보이거나 당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것 같으면 그것을 천천히 더 비판적으로 두 번을 읽으라. 마음속으로 어떤 부분을 요약할 수 없다면 그것을 반대할 정도로 충분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주장했다고 해서 그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라. 수십 년 동안 연구자들은 북극의 이누이트족이 눈의 종류에 대해 많은 용어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인용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가 오직 3개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서로 싸우는 전문가들을 조심하라. A라는 전문가가 어떤 것을 말하면, B는 반대를 주장하고, C도 전문가라고 주장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학생들은 전문가들이 서로 반대하는 것을 들었을 때 냉소적이 되어 전문가의 지식을 단지 의견으로 치부한다. 정당하게 논쟁하는 문제에 대해서 유식하고 사려 깊게 토론하는 것을 단순한 의견으로 혼돈하지 말라. (133)

 

경험 많은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개선시키기 위해 반대되는 견해를 이용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왜 이성적인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차적 자료를 찾을 때 단지 당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들만 찾지는 말라. 당신의 주장을 논박하는 자료들을 주의 깊게 보라. 왜냐하면 그것들이 바로 당신의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142)

 

 

 

 

 

 

 

 

 

 

 

 

 

 

관련 없는 자료의 가치
우리는 답과 가장 관련 있는 자료를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나중에 관련이 없는 자료로 드러났다고 해서 그런 자료를 읽는 것이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실은 당신이 이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읽고 기록할 때 당신은 좋은 사고(good thinking)를 연습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기초를 쌓고 있는 것이다. 좋은 사고는 배울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좋은 사고를 연습하는 것은 당신이 깊고 넓은 사실, 자료, 지식의 바탕이 있을 때이다. 따라서 당신이 오늘 묻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만 자료를 읽지 말고, 당신이 계속 연구를 하면서 묻게 될 모든 질문에 관해 더 잘 생각하게 되기 위해서 자료를 읽으라.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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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읽기
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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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을 가끔 챙겨보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사실과 정보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사실과 정보를 얻으려면 역사책이나 논문을 보면 되니까. 하지만 소설은 인물 사이의 갈등이나 구체적 상황들을 재현해내어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과 정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흡입력 있는 줄거리와 현실성 있는 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연성 있는 사건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만 생겨나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일반 소설처럼 역사 소설에서도 줄거리와 그 구성(플롯)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잘 갖춰지면 소설의 흡입력은 저절로 생기고, 재미도 뒤따르게 될 것이다.

 

김선우 소설 <발원>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그저 줄거리만 나열한 게 아니라 사건의 구성을 매우 치밀하고 적절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원효가 화랑이 되기를 포기하고 출가하게 되는 계기라든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김춘추의 요청으로 원효를 신라에서 내보내려는) 의상을 떼어내기 위한 원효의 술책으로 서술한 부분이 그랬다. 

 

또 혜공이 죽는 장면에서는 매우 격한 감정을 느끼면서 살짝 눈물까지 나더라. 이 사건은 원효가 백제 병사를 구한 행동이 기화가 되어 발생한 것이어서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런 설정은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장치였고 그런 서사 속에서 독자는 안타깝고 북받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 없는 우연, 그리고 훌륭한 인물의 숭고한 죽음을 통해 공포와 연민을 불러온다는 비극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드라마였다. 바로 이런 게 내가 역사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역사, 종교와 사회에 관한 저자 나름의 철학과 소신들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사상과 철학이 없이 줄거리만 있는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맹탕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원효라는 대사상가의 촌철 대사를 읽는 즐거움이 컸다.  

 

(황룡사 백고좌법회의 원효 연설 중)

부처님께서는 단 한 명의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세상 한가운데 머문다 하셨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황룡사 불제자들의 상구보리는 귀족과 황금입니까? 이곳의 하화중생은 게으름과 배척입니까? 여래가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 하더군요. 저기 장경각에 가득 쌓인 숱한 경전들에 말입니다! (1권, 134)

#

저자는 시인으로 먼저 알려졌다. 시인이라면 문장 하나 낱말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을 터. 이 책에서도 저자는 문장과 어휘에 공을 많이 들인 게 역력했다. 어설픈 문장으로는 서사가 아무리 교묘해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지 못한다. 감정이입이란 건 결국 몰입에서 오는 것일 텐데, 잘은 모르지만 이 몰입은 사건과 동태 묘사의 리얼리티가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결국 이 리얼리티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좋은 문장일 것이다. <발원>은 문장을 읽는 즐거움도 큰 소설이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말고는 저자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읽는 내내 김선우라는 시인을 문장 속에서 만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던데, 이 소설도 아주 좋은 페미니즘 관련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석이 원효라는 남성을 자극하고, 각성하게 하며,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지켜내면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은 구중궁궐 안에서 원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만 서술됐던 <삼국유사> 속 요석의 수동적 이미지와 전혀 다른 점이었다. 나는 <유사>의 저 얼척없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석(瑤石)'이라는 이름만 겨우 알고 있었을 뿐, 그녀의 이념과 감정을 짐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요석을 아름다운 정신과 감정을 지닌 신라 여인 '요석(曜夕)' 으로 재해석하였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저녁'으로서 '가장 어두운 새벽'인 원효(元曉)를 이끌어내는 존재로 탄생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페미니즘을 가장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원효와 요석의 로맨스이다. 특히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상황들은 매우 여성적인 시선으로 묘사된다. 원효의 성격과 행동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는 민감하고 치밀한 성격이지만 소설에서 묘사되듯 예민하거나 지나치게 신중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여인에게 순정적일 것 같지도 않다. 나로서는 원효가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주인공들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설정된 것이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살짝 나쁜 남자, 호방한 성격의 남자로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여성주의적 시각 때문에 오히려 서사 속에 전개되는 로맨스가 어색하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문학을 영상으로 바꾸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원효와 요석의 동침 장면은 화면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가치를 완전히 잃을 게 뻔하다. 그들의 섹스는 언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이 만약 화면으로 변환된다면 그야말로 감각적이고 말초적 이미지로 바뀔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과 범주가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다.

 

강신주는 해제에서 원효가 요석과 자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나는 원효가 자고 안자고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이미 사랑과 성욕으로부터 무애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김선우는 두 사람이 나눈 섹스를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하였다고 본다. 요석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아버지인 김춘추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원효는 자신의 존엄과 권위마저도 포기한 것이고, 이 결정적 시간을 저자는 두 사람의 절정의 장면으로 승화하였다.

나 역시 원효가 요석의 아픈 사랑을 흔쾌히, 어쩌면 아주 대범하게(어차피!!)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은밀한 비유와 개념적으로 수식된 문장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남자가 여자를 안을 때는 훨씬 직접적이고 말초적이다), 그 문장들은 역사 소설에서 보기 드문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자.

 

단애를 흠뻑 적신 불붙은 물의 시간, 서로의 몸속에서 목숨으로 태동하던 완벽한 합일이 수차례 거듭되며 벼랑이 무너지고 온몸의 뼈와 살이 공기처럼 흩어졌다. … 원효가 지나온 시간과 요석이 지나온 시간이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원효의 몸속에서 요석은 처음으로 자신의 나신을 보았다. 뭉클한 노을빛 구름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스러졌다. 저녁노을과 새벽노을이 한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 님이여.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습니다. 이런 말이 요석의 입속을 맴돌 때, 요석은 깨달았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요석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아,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요석을 꽉 끌어안은 채 아끼고 아끼며 쓰다듬던 원효가 그 탄성을 들으며 안도했다. 원효의 가슴 위로 요석이 몸을 포갰다. (2권, 252)

 

이 문장들은 내게 요석의 벅찬 심정과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 결합의 시적 표현들은 저자가 작심하고 써냈다고 밝힌 바도 있다. 아무래도 이 소설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며 모든 갈등과 슬픔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이만큼 원효와 요석의 동침을 도발적으로 묘사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읽은 지는 너무나 오래 됐지만 이광수가 쓴 <원효대사>에는 이 같은 ‘적나라한 베드신’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석가모니는 사랑하는 것은 고통의 하나임을 설파했다. 생로병사를 포함한 '팔고(八苦)' 가운데 하나가 애별리고(愛別離苦), 즉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다. 사랑은 곧 고통이다. 그것이 고통인줄 알면서도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사랑조차도 고통의 시작이요 원인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것을 몸소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효는 김춘추와 그의 정치판에서 요석을 구해내기 위해 흔쾌히 자신을 고통 속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 고통조차 감내하고자 했을 거다.

석가모니를 유혹하던 마라의 딸들은 석가모니에 의해 ‘똥오줌으로 가득찬 가죽주머니’로 비하되었지만 요석은 다르다. 그녀는 깨달은 자를 유혹하려는 마녀가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 아닌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 가슴이 아플 만큼 사랑해줄 수 있는 여인이 바로 요석이다. 빛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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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양화편에서 한 구절 옮긴다.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對曰 未也.” “.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자로)야, 너는 여섯 가지 말과 [그것들의] 여섯 가지 폐단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자로가] 대답했다.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앉아라, 내 너에게 들려주마. 인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어리석게 된다. 지혜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페는 방탕하게 된다. 신의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남을] 해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곧은 것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박절하게 된다. 용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혼란하게 된다. 강한 것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병폐는 잘난 체하게 된다.” (김, 318)

 

이 구절의 의미 전달은 신창호 <한글 논어> 번역이 좀더 나은 것 같다.

 

“… 베풀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다. 지혜롭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허황함이다. 믿음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해침이다. 곧음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각박함이다. 용맹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동이다. 굳셈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광기이다.” 
(해설) 여섯 가지 덕을 나타내는 말에 숨겨져 있는 여섯 가지 폐단에 관한 언급인데, ‘육언육폐’라고도 한다. 세상일은 이중적인 경우가 많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듯이 말이다. 포용, 지혜, 신뢰, 정직, 용기, 강직 등 여섯 가지는 유학에서 매우 중시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것을 오용하거나 지나칠 때 심각한 폐단이 생길 수 있다. 무엇이건 적절하게 적용하지 않고 지나치게 고지식하거나 제멋대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신, 417)

 

#

베풀기 좋아하고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다. 쓸데없이 남에게 퍼주고 온갖 오지랖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이 만족하기 위해 그런다는데, 이것도 지나치면 진상이고 병폐다. 자기 실속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베풀기만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인가?
어떤이들은 지혜롭고 그럴 듯한 말이나 근사한 경구를 사랑하고 스스로 곧잘 하기도 하지만, 배워서 절제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이 모든 말들은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믿음이 너무나 강하여 그 믿음을 관철시키려다 보면 누군가를 해치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일에는 절대적인 게 없지 않은가. 굽히지 않고 대쪽처럼 곧은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상황에 맞게 처신을 해야할 때도 있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변한다는 말이다.

용맹한 자는 그 혈기와 용기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난동이나 다름없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적절한 다스림이 필요하다. 배움이란 다스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하고 굳센 것은 숭고한 덕목 가운데 하나지만 이것도 잘못하면 맹목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盲目’이란 게 무언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다. 배운다는 건 내 주위를 두루두루 잘 살핀다는 말이다.

 

갑자기 "책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읽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떤 폐단이 생길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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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창호 교수의 번역이 좋았습니다. 이을호 교수의 번역도 마치 대화를 하는듯이 생생한 느낌이 드는데 약간 과장스럽게 느껴져서 어색한 것도 있어요.

돌궐 2015-07-09 19:52   좋아요 0 | URL
세 논어 번역본의 장점을 합친 책이 있으면 좋겠어요.ㅎㅎ
 

나는 여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이 아르주나인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맏형 유디스티라였구나.

그가 겪은 갈등과 번뇌가 어땠을지 짐작도 안 된다. 백 명이 넘는 이복 형제들과 스승과 할아버지까지 다 죽이고도 왕이 되어야만 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모든 적들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뒤 유디스티라가)
“우리의 적은 공덕을 얻어 지금 천국에 있지만, 우리는 살육을 후회하는 이 참회의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 슬픔만이 우리가 받은 보상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이 크샤트리아의 의무라는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살육만이 인생의 규칙이라면 나는 크샤트리야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나는 사문(출가수행자)이 되겠다. 내가 동정과 용서를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승리를 얻은 것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고기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들처럼 우리는 피를 나눈 친척들과 싸워서 그들을 죽였다. 우리는 두르요다나의 무분별한 증오심 때문에 그런 처지로 내몰렸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보다 오래 살면서도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 네가 이 나라의 왕이 되어라. 나는 숲으로 떠나야겠다. 고행과 무소유의 은둔 생활을 하면서, 숲속의 천진난만한 동물들과 나무들만 벗으로 삼아서 살겠다.”


유디스티라가 사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 노래했기 때문에, 아르주나는 화가 나서 그의 말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하면 됐어.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많은 생명을 희생하고 왕국을 얻었으니, 그 왕국이 형보다 못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 고통받지 않도록 왕국을 다스리는 게 형의 의무야.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희생적인 행위를 후원하고 통치자로서 신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이 형의 의무야. 형은 크샤트리야에게 허용된 정당한 수단으로 얻은 왕의 권력을 갖지 않고는 절대로 이것을 해낼 수 없을 거야. 형이 번영하고 부유하지 않으면 이 점에서 형의 의무를 절대로 수행할 수 없을 거야. 거지는 남을 도울 수 없고, 약골은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없어. 금욕적인 생활은 우리가 아니라 오로지 거지에게만 어울리는 생활이야. 재산은 더 많은 재산을 가져다줘. 종교 활동, 쾌락, 즐거움, 인생의 모든 성취는 재산에서 생겨나는 거야. 재산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경멸당해. 다툼과 의견 차이는 천상의 신들 사이에도 존재해. 천계에서도 그런데, 우리 인간 사회에도 의견 차이와 싸움이 존재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영광은 싸워서 얻고, 인생의 좋은 것들은 모두 그 영광에서 생겨나는 거야. 그건 모두 락슈미 여신의 선물로 알려져 있고, 그런 선물을 퇴짜놓는 사람은 여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남을 해치지 않고 얻은 재산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잊지 마.”


그래도 유디스티라는 고행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되풀이했다. 그의 금욕적 사고방식에 화가 난 비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형, 그런 말은 제발 그만둬. 형의 정신은 균형을 잃었고, 형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형은 경전을 앵무새처럼 암송만 해대는 자들과 마찬가지야. 그들은 아무 관련성도 없는 말을 계속 지껄이지. 왕의 의무를 그처럼 나쁘게 생각한다면, 형이 우리에게 드리타라슈트라의 가족을 몰살하게 한 것은 불필요한 짓이었어. 이게 형의 철학이라는 걸 알았다면 우리는 싸울 상대가 누구든 무기를 드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거야. 적을 죽였으니 이 왕국의 고삐를 잡고 진정한 크샤트리야답게 다스리는 것이 형의 의무야. 형이 아무리 싫어해도 이제 와서 형의 신분을 바꿀 수는 없어. 형의 행동은 우물을 파느라 젖은 진흙으로 온몸을 더럽힌 뒤 물이 막 솟아나고 있을 때 물러나는 사람과 비슷해. 형은 적들을 모조리 죽인 뒤 결국 자살하는 사람과 비슷해. 우리는 형을 추종했지만, 이제 형의 지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깨달았어. 제발 우리 입장도 생각해줘.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야. 은둔 생활은 불치병에 걸렸거나 실패로 괴로워하고 있는 왕들만 선택해야 돼. 극기와 수동성이 최고의 미덕이라면 산과 나무가 가장 고결한 피조물이어야 해. 산과 나무는 항상 초연한 생활을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니까.” (266-269)

 

 

 

#

축약본으로 읽었을 뿐이지만 대단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갈등과 미덕들이 이야기 속에서 끝없이 발견된다. 선악이나 미추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사건과 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위선적 인간과 추악한 인간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영원불멸한 선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지도자로서의 책임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같은 심각한 질문들이 이 거대한 드라마 속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칠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문들이 이 <마하바라타>에 이미 나왔던 거라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마하바라타 원본을 죽기 전에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좋은 번역본으로 이 대서사시를 완독한 것에 큰 만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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