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 가보려고 채비까지 했다가 문득 열어본 날씨앱에 미세먼지가 매우 나쁘다고 하여 포기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특별전을 보러 갔다. 그나마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여가 생활이라곤 전시나 영화를 보는 것 정도니까.

항간에 유명한 영화 <위플래쉬>도 보고 싶었지만 얘기를 해도 반응이 시큰둥하여 일단 다음으로 미루었다.

 

전시관에 들어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데, 몇몇 작품 옆에 어떤 시인이 그림을 재해석하여 쓴 시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김경주'라는 이름이 낯익어서 찾아 봤더니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고래와 수증기>를 쓰고, 만화 <골리앗>을 번역한 작가였다.

그는 난해한 시를 쓴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 그림과 함께 전시된 시들은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초현실주의 그림에서 많이 사용되는 데페이즈망이 현대시에서 차용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짐작컨대 김경주의 시에도 그럴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아무튼 전시회에 그림과 함께 걸린 그의 시들이 도록에도 함께 실려 있어서 거금 이만오천 원을 주고 샀다.

서점에서는 못 산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한 지출이었는데,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전시를 보면 눈물을 머금고 도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객들이 좀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시편을 붙인 작품들만 모은 도록을 좀 저렴하게 시집처럼 제작해서 판매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아래에 도록에 실린 작품 몇 점 옮겨 본다. 인용한 시는 해당 작품에 부친 시편들이다.  

 

 

 

<바람(Wind)>, painting on canvas, 104×81.3cm

 

 

바람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자정에 불러주어서

셔츠만 입고 날아왔어요

미안해요 너무 큰 셔츠를 입고 왔네요

정말이지 이 셔츠만 벗을 수 있다면

당장 당신 옆에 누울 수 있을 텐데

나의 헐렁한 셔츠만큼이나

당신의 집은 너무 춥네요

(118)

 

 

아래 사진은 전시회 도록 표지 부분이다.

여기에 사용된 그림은 <플라워선박의 입항>이란 작품인데, 19세기 영국에서 카리브 해안의 타히티로 향하는 '바운티 선박(Bounty)'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고 한다. 도록의 설명을 옮겨 보면 이렇다.

 

회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태니컬 회화의 '보태니컬'의 모험에서 착안하여 표현한 작품으로 그림 속의 '플라워 선박'은 19세기 영국에서 카리브 해안의 타히티로 향하는 '바운티 선박(Bounty)'을 모티브로 하였다. 독재적인 함장에 반란한 선원들은 타히티 섬에 상륙하여 영주하게 되었다. 노역으로 피폐해져 있던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은 빵과 과일들이 가득했던 바운티호와 그 선원들을 환영하였다. 플라워 선박은 그들이 염원하던 "파라다이스"이자 그곳으로의 항해를 의미한다. 섬의 원주민들은 종려나무 가지로 인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14)

 

 

 

 

플라워선박의 입항

 

스페인 여왕과 군대는 남미로 향했다

그곳에 황금의 땅 엘도라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엔 황금의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노예로 쓰기위해 배에 태웠다.

바다위에서 굶주림과 항해에 지친 아이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피를 토하고 배위에서 하나씩 쓰러졌다.

그리고 그 피 위에서 식물 같은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 그 꽃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스페인 여왕은 황금대신

이 꽃을 따왔다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114)

 

위 그림이 이른바 '바운티호의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타히티에 상륙하는 모습을 그린 게 사실이라면 김경주의 시에서는 왜 스페인 군함이 남미에 원정 갔다가 원주민을 싣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일까?

어찌 보면 둘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인데, 이것을 그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곡해로 보아야 할지 조금 아리송하다.  

 

 

 

<해돋이 해변(Sunrise by the Ocean)>, painting on canvas, 63.5×53.4cm

 

 

해돋이 해

 

해는 매일 아침 자신의 나이테를 땅에 숨기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해를 숨길 수 없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거래요.

 

갈매기는 매일 아침

수평선을 물고 가서

해에게 떨어뜨리고 있어요

(117)

 

 

수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어른들이 볼만한 그림도 조금 있긴 했다.

2부 '욕망' 파트에서 그런 작품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 아래 그림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오른쪽에 쌓인 책들의 모서리 부분을 주목하자.

 

 

<에로틱 동화(Contes Erotique)>, painting on canvas, 20×25cm

 

 

에로틱 동화

 

학은 학의 하늘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하늘이 있고

 

수 천년간 살아온 늑대에게는

수 천년간 살아온 바람이 있어요

 

내게는 도저히 떠나지 못하는 시가 있고

우리가 만든 우주의 비밀이 하나 있어요

 

눈을 기다리는 악어처럼

그건 악어만의 비밀

 

물범처럼

밤에 해변으로 몰래 올라와

가만히 나는 당신 옆에 누웠죠

(78)

 

 

 

 

<잠자리에서 읽는 책(Pillow Book)>, painting on canvas, 51×51cm

 

나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딸내미가 좋아할 거라는 예상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고, "근데 왜 벌거벗고 자냐"고 했다더라.

 

 

 

 

<달빛 소나타(Moonlight Sonata)>, painting on canvas, 51×40.7cm

 

딸내미는 이 작품을 보고 엄마한테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왜 다 돌돌 말려있는줄 알아?" 하더란다.

왜 그러는 거냐고 묻자 딸내미는

"애벌레(번데기겠지)라서 그래. 나비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이제 나비가 될 거야." 라고 했단다.

옆에서 듣던 관객들이 모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내가 다시 봐도 과연 그런 거 같다.

김경주 씨가 시편을 붙인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의 메타포도 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비상(Flight of the sun)>, painting on canvas, 28×38cm

 

재미 있는 그림이다. 아이들은 이 그림과 앞에 나온 <해돋이 해변>을 보고 계란이라고 하더라.

쿠쉬는 하와이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하와이가 포함된 폴리네시안 문화에서 태양은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렇게 태양을 계란 노른자로 비유한 모티프가 그림 중에 자주 나온다.

도록 해설에서는 우주 창조와 관계된 난생 신화와 연결하고 있는데, 사실 그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관람자는 저마다 갖춘 경험과 언어와 논리로 그림의 뜻을 해석할 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수준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수준에서.

해석에 반대한다고, 스타일이 전부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런 그림 앞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만차의 동물상(Fauna in la mancha)>(부분), painting on canvas

 

위 그림은 돈키호테를 읽은 사람에게는 재미 있는 그림이겠지만,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같이 보던 큰애한테 옛날에 풍차를 괴물이라고 착각해서 그것을 향해 창 들고 돌진한 미친 기사가 한 명 있었다고 해줬다.

 

 

#

전시작품 명제표에서 이상했던 건 'painting(oil)' on canvas를 'printing' on canvas라고 써 놓았다는 사실이다(전부 다 그렇게 표기되었는지는 다 확인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눈여겨 보는 사람이야 많지 않겠지만, 유화가 분명한 작품에 'printing on canvas' 라고 명시해 놓으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 진품이 아니라 '찍어낸' 작품이 아닌가, 그러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이 복제품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도록에는 분명히 'painting on canvas'라고 나온 걸 보면 실수인 것 같은데 왜 그대로 둔 채 전시하는지 모르겠다.

인력도 부족하고 입장료도 안 받는 화랑 전시라면 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는데, 꽤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간 전시회에서 이런 허술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김경주의 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꽤 알려진 시인인가 보다.

최근 그가 번역한 <골리앗>은 조만간 구입하려고 장바구니에 넣어 두긴 했다. 하지만 번역자가 '김경주'란 건 오늘에서야 그 이름을 검색해 보고 알았다.

 

큰애한테 물어보니 아직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모르던데, 그런 애한테 골리앗 이야기를 던져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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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23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해설보다도 아이의 번데기 해설이 가장 인상적이였어요 가끔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을 관찰하고 들려줄땐 어른들의 상상력보다 아이들이 더 뛰어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두 전시회 갈일있을땐 조카들과 함께 가고 싶네요 멋진 그림과 시 잘보고 갑니다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요^~^

돌궐 2015-03-23 09:27   좋아요 1 | URL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가끔은 그런 아이들의 직관력이 부럽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되시면 좋겠네요. 작품들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3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벌레 해석 정말 탁월하네요. 읽다가 놀랐습니다.

돌궐 2015-03-23 12:35   좋아요 1 | URL
늘 재미난 글로 놀라게 해주시는 곰곰생각 님마저 놀라셨다니 저희가 놀랄만한 일이 맞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3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로틱 동화`라는 유화`를 보면 왜 종이를 접어서 돌출된 그림 있잖습니까.
자꾸 보면 이 그림에서 나오는 책 이미지`가 여성 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종이를 접어 툭 튀어나온 부분은 마치 클리토리스 같다고나 할까요..ㅎㅎ
왼쪽 그림 하단에 보면 꼬마 조개가 보이는데 딱 보면 여성 성기`입니다.

글구. 오른쪽 책 모서리를 가만 보면 사람 얼굴 형상이에요. 그림이 재미있네요...

돌궐 2015-03-23 14:04   좋아요 1 | URL
과연 그렇군요. 게다가 그 책 저자는 무려 사드로군요.
오른쪽 그 사람들은 죄다 남자가 맞는 거겠죠? 음흉한 표정에다... ㅎㅎㅎ

oren 2015-03-23 2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네요. 돌궐 님 덕분에 블라디미르 쿠쉬의 그림을 다른 데까지 날아가서 찾아보게 되는군요.. 거기엔 그림마다 자세한 설명글까지 달려 있더라구요.
그림이든 영문 설명이든 `해석`이 문제네요.. ㅎㅎ
(☞ http://vladimirkush.com/Editions/Page-3)

* * *

Contes Erotique

The Marquise de Sade wrote volumes about his daring study of the sphere where sensual pleasures, sex, and uncontrolled desire reign. However, de Sade invented nothing; he just showed us ourselves. This is, as they say, the naked truth. For the artist there are no unsolvable mysteries, he is occupied not with moralizing, but with the quest for beauty. In nature there is no dirty spot, only we have introduced it in her. We have treated this ˝dirt˝ too superficially. Friedrich Nietzsche The image in some way reproduces the biblical theme Susanna and the Old Men, to which artists from different epochs showed interest – such as Rembrandt, Goya, etc. The old men – here are, obviously, the books, that display a keen interest in the ˝woman˝ who reveals to them her beauty secrets.

돌궐 2015-03-23 22:49   좋아요 1 | URL
oren 님 알려주신 사이트에 가봤습니다. 전시에서 봤던 작품들이 많이 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옮겨주신 <에로틱 동화> 영문 해설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그장소] 2015-03-23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나들이였네요^^

돌궐 2015-03-24 00:06   좋아요 1 | URL
네 다행입니다.^^

yamoo 2015-03-2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라디미르 쿠쉬...제가 정말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입니다..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오렌님이 알려주신 사이트로 고고~^^

돌궐 2015-03-24 21:29   좋아요 0 | URL
쿠쉬 그림은 달리 같기도 하고 마그리트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자유도비 2015-03-2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틱 동화 그림과 그 아랫 그림, 책갈피에 깃털이 꽂혀 있네요. 의미심장합니다. <레다와 백조> 가 생각나네요.

돌궐 2015-03-25 12: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것 참... 하면서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ㅎㅎ
말씀대로 레다와 백조와 연결하면 더 의미심장하군요. 그것 참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불경에서는 정말 탁월한 비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법화경>에 나오는 '三車火宅'의 비유는 정신 없이 노느라 집에 불난 줄도 모르고 안 나오는 어린 아이들을 장자가 대문 밖에서 장난감으로 가득 찬 수레로 유인하여 무사히 빠져나오게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으면 저절로 거기에 따르게 된다는 비유이다.

속세의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방편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법화경 변상도> 부분 '삼차화택', 고려, 1340년, 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소장 

 

 

가만히 생각하면 나 역시 저 불타는 장자의 집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서까래 밑에서 집착과 욕망에 사로잡혀 아둥바둥 살아가는 중생일 뿐이다. 

아래 옮기는 인생에 대한 비유는 처음 들어본 것인데 이또한 적절함을 넘어서 섬뜩할 정도가 아닌가.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어 급한 나머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 내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칡넝쿨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는데 마침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꿀을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의 비유이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五慾樂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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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2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야기 정말 오래만에 읽어요.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은 서재 이웃님도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었어요. 아마도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4, 5년 전이었을 거예요. 그 분의 글 덕분에 법화경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돌궐 2015-03-20 22:45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선배님이 계셨었군요. 경전 중에 게송들이 너무 길거나 지루하게 반복되어 나오는 경우에는 좀 건너뛰면서 읽으니까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아, 물론 한글경전이요.ㅎㅎ
 

 

 

 

 

 

 

 

 

 

 

 

 

여성의 미모라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 것인가.

자현 스님의 <붓다순례>에서 연화색 비구니 이야기를 옮겨 본다.

 

 

연화색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미모만큼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순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할 수 없는 기구함이 그녀의 삶에 존재한다.


처음 연화색은 울선(鬱禪)으로 시집을 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해산하러 와 딸을 낳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연화색의 어머니와 남편이 불륜 관계를 맺게 된다. 연화색은 이 사실을 여종에게 듣고는 안고 있던 딸을 집어 던졌다. 이때 아이의 머리에 상처가 생긴다. 얼마 후 연화색은 모녀가 한 남자와 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자탄하면서 집을 떠나게 된다.


이후 바라나시로 갔다가 그곳에서 연화색의 미모에 반한 상인을 만나 재혼한다. 그런데 상인은 후일 울선으로 무역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 현지처를 두게 된다. 이후 연화색은 이를 눈치 채지만, 자신도 재혼이었으므로 울선의 현지처를 데려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 이렇게 두 부인이 형님, 동생하면서 살게 되는데, 하루는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의 상처를 보고는 그녀가 자신의 친딸임을 알게 된다.


결국 연화색은 운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집을 뛰쳐나가, 정처 없이 떠돌다 반쯤 실성해서 도착한 곳이 우연찮게도 왕사성의 죽림정사였다. 연화색을 본 붓다는 이 여인의 문제를 한눈에 파악하고, 수행자를 만들어 교화한다. 연화색은 현실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깨달아 비구니 중 신통제일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출가한 이후 연화색의 미모는 또 다른 장애가 된다. 홀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모에 반한 일반인과 실랑이가 발생하고, 과격한 다툼 속에서 결국 눈이 빠지는 상처를 입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모두가 원하는 미모의 가치가 때론 슬픔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은, 인생의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붓가가 상카시아로 내려오실 때, 연화색은 지상의 제자로는 자신이 가장 먼저 붓다를 맞이하고자 했다. 이때 이곳에는 목건련이 없었기 때문에 연화색을 능가하는 신통의 비구는 없었다. 그래서 비구 교단이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붓다께서 3개월 만에 오시는데, 비구가 아닌 비구니가 가장 먼저 맞이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이때 왕사성 영취산의 수보리는 가사를 깁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잠시 붓다는 형상의 존재가 아님을 관상한다. 그러고는 다시금 가사를 마저 기웠다. 이때 연화색이 붓다를 맞이하면서 자신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고 하자, 붓다께서는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수보리’라고 답하신다. 『증일아함경』 권28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연화색의 일생을 생각하면 왠지 서글프다. 이렇게라도 해서 인정받고 싶어 했던 연화색을 붓다가 용인해 줬다면,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더라도 더 따뜻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를 위한 애틋함을 보이기 위해 도리천으로 가신 붓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수보리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부가된 것은 아닐까? 특히 수보리가 상카시아가 아닌 왕사성에 있었다는 점에서, 왠지 남성 우월주의에 의한 왜곡의 그림자가 느껴지곤 한다. (284-286)

 

 

#

붓다는 멀리 있던 수보리가 가장 먼저 붓다를 맞이했다는 말을 굳이 연화색한테 했을 리가 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 부분은 스님의 말씀대로 후대에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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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서 파는 토종순대를 삼천 원어치만 포장해달라고 했다.

오천 원어치를 사면 꼭 먹다가 남겼기 때문에 삼천 원어치만 달라고 했다.

집에 반 병 남아있던 소주와 함께 혼자서 순대를 먹었다. 허파와 간도 먹었다.

오늘 내가 굳이 순대를 사서 먹은 이유는 아무래도 아까 식전에 이런 시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식물성 곱창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

석쇠 위 둥글게 몸 말고 있는,

한때 초원 하나쯤은 거뜬히 소화시킨 기관들

성급한 젓가락을 찌르고 누르고 뒤집는다

달구어진 쇠에 찰싹 달라붙어 불을 버티는

초식기관들 그러나 생전의 소가 그러하였듯

길길이 날뛰는 막무가내의 고집,

토막난 채 흘러나오는 누런 콧물 눈물

깍지를 풀고 노릇노릇 익는 동안

한결 부드러워진다

이제 참나무는 죽어 숯불이 되고

죽은 소의 일부가 안주로 남았다

입속에서 잘게 톱질당한 곱창들

찬 소주와 함께 빈속으로 내려갈 때마다

화하게 피어나는 풀냄새,

왕성한 위액이 또 입맛을 다신다

 

- 이재무, <저녁 6시>, 85쪽

 

 

#

시인들은 음식을 소재로 시 쓰는 일이 많은 듯하다.

나는 그저 게걸스럽게 먹기 바쁜데 그들은 곱창을 앞에 두고 이런 낱말들을 떠올린 것이다.

 

혼자서 곱창집에 가긴 뭣 하고 그렇다고 불러낼 이도 없었다.

순대를 사서 소주와 함께 먹은 걸로 만족한다. 

뇌수조차 얼어 터질 것 같은 추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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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 6시
    from 突厥閣 2015-03-20 01:26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시집 두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하나가 <저녁 6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시집인데, 이제서야 겨우 읽었다. 몇 년 전에 신문(아마 한겨레였을 듯)에서 '갈퀴'를 읽고 나서부터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저녁 밥을 먹고 자려고 누운 자리에서 읽기 시작하여 내처 해설까지 다 읽었으니, 이건 시집 한 권 읽으려면 한참이 걸리는 나로선 전례가 없는 일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cyrus 2015-03-10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운 날에는 술과 따끈한 안주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집에 시원한 막걸리를 마셨는데 영 만족스럽지 않군요. 친구들 불러서 포장마차에 가고 싶은 날입니다. ^^

돌궐 2015-03-10 21:38   좋아요 0 | URL
뜨끈한 술국과 소주 한 병 정도면 딱 좋지요. 포장마차 대합탕도 괜찮겠어요.^^

transient-guest 2015-03-13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끈한 국물과 데운 술도 빼놓을 수 없지요..

돌궐 2015-03-13 01:26   좋아요 0 | URL
정종에 오뎅국물도 정말 좋지요^^

돌궐 2015-03-19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본 시는 <저녁 6시> 85쪽에 나온 시였다. 지금 읽고 있다가 `식물성 곱창`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서점에서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와 함께 들춰봤는데, 페이퍼 작성하다가 출처를 헷갈린 것이다. 나원참.
 

 

 

 

 

 

 

 

 

 

 

 

 

 

 

 

벽화를 그리는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고증하여 쓴 글이 있어 옮겨 본다.

 

 

발원을 마치고 담징이 일어섰다. 맨 먼저 미륵불부터 벽에 옮기기로 했다. 다른 그림이야 어려울 턱이 없었다.

담징은 뒤에서 지켜보고 서 있고, 도리가 화공들을 지휘하며 벽에 고령토와 백포를 섞어 발랐다. 며칠 기다렸다가 한 화공이 벽 위에 다시 황토와 백아를 섞어 칠을 했다. 도리는 북벽에 담징이 그린 미륵정토와 밑그림을 붙였다. 중안이 밑그림 윤곽선을 촘촘하게 바늘로 찔러놓고, 숯가루를 넣은 주머니로 바늘구멍을 따라 종이를 두드렸다. 중안이 밑그림을 떼어내자 벽 위에 그림 윤곽이 나타났다.

도리가 밑그림 위에 먼저 석채(石彩)로 주홍색을 칠했다. 도리가 호분에 갠 장단, 양록, 삼청, 진녹, 석연지, 하엽, 석자황, 석간주 등을 그림에 맞추어 발랐다. 도리가 그림의 먹 선을 그었다. 차례로 분선, 황선, 금선을 그려 넣었다. 도리는 특히 금선을 긋는 데 혼을 쏟았다.

 

늦겨울에 작업을 시작했으나 계절이 바뀌어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벽화 작업은 쉼 없이 이어졌다. 어언 두어 달이 더 지나 네 벽화 가운데 미륵정토화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미륵의 얼굴이었다. 윤곽은 그려져 있었으나 채색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초가을 어느날이었다. 도리가 돌아보았다. 담징이 퀭한 눈으로 벽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눈길이 섬뜩했다. 이윽고 담징이 빙긋이 웃었다. 벽화가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스님께서 안채(顔彩)를..."

 

담징은 고개를 저었다.

 

"불자께서 하세요."

 

도리는 뜻밖이라는 듯이 담징을 쳐다보았다. 담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가 사다리에 올라가 붓을 들었다. 낯과 이목구비를 석간주로 채색했다. 안채를 마치고 사다리에서 내려온 도리가 담징에게 붓을 내밀었다.

 

"점안(點眼)만은 직접 하셔야 합니다."

 

담징은 앞으로 나아가 붓을 받아들었다. 힘들여 사다리로 올라가서 미륵불 눈 근처로 붓을 가져갔다. 손이 떨렸다. 담징은 손을 내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물에 젖어 있던 여인의 눈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눈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담징은 붓을 들어 미륵불 그림에 눈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자위를 칠하고 나서 눈동자를 그려 넣고 마지막으로 한가운데에 점을 찍었다. 그렇게 하여 미륵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눈은 웃는 듯이 울고, 우는 듯이 웃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관능적이지 않고 기품이 밴 그런 미소, 그런 얼굴이었다.

점안을 마치고 담징이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도리와 중안이 담징을 부축했다. 담징은 고개를 들어 미륵상을 바라보았다. 미륵이, 아니 여인이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담징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제자들도 그를 따랐다. (32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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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만 보아도 저자가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꽤 많은 자료들을 조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책 뒤에 소설에 참고한 문헌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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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호류지 금당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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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07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징,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봅니다. 국사 시간에 금당 벽화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정말 안타까웠어요.

돌궐 2015-03-07 23:25   좋아요 0 | URL
사실 소실된 벽화가 담징이 그린 것이 맞다 아니다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 불화가 대단한 명작이란 평가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일본 기록에 ˝담징이 스이코여왕 18년에 고구려에서 건너 왔고, 오경에 능통하고 그림과 공예에 정통하여 종이와 먹, 채색 및 맷돌을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저자는 이처럼 짧게나마 기록된 사실을 소설의 줄거리 속에서 충실히 재현하려고 노력한 거 같습니다.
담징, 쇼토쿠태자, 혜자, 도리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 나와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AgalmA 2015-03-08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불화그리는 걸 엄청 배워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삶에 쫓겨...
만다라 전승처럼 담징의 예술이 명맥이 이어져왔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런 게 어디 한둘이겠는가 싶지만...

돌궐 2015-03-08 07:41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참 많아요. 저도 그렇습니다.ㅜㅜ
그리고 먹고 살면서 배우기까지 하려면 정말 하루하루는 짧은 시간이더라구요.

만병통치약 2015-03-0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스코와 비슷하군요(맞나요?) 실제 벽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궁금하네요.

돌궐 2015-03-08 14:28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럴 거에요. 일본 사이트에 벽화에 대한 개설과 그림들 볼 수 있는 페이지가 조금 있어요.
구글에서 horyuji temple wall paintings 치셔도 좀 나오구요.
제가 찾아보니 이런 곳이 있네요(일본 개인사이트 같습니다).
http://reijiyamashina.sakura.ne.jp/horyujif/horyuji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