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부두에서 내가 탈 배를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잠깐 한눈을 팔다간 놓칠지도 모른다.
지난번 항해 때는 어느 여인이 가족들과 작별인사 하느라 잠시 지체하여 배를 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언제나 이처럼 허둥거리다가 배를 놓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뒤늦게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이미 떠난 배를 되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 자비로운 뱃사공이 던져 준 밧줄을 용케 붙들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서쪽나라까지 갔다고 한다. 용맹심과 끈기가 대단했던 그 여인은 십만 억 나유타 국토를 지나가는 긴 여행 내내 악착스럽게/ 밧줄에 매달려 버텼다고 한다.
모두 행복한 여행, 그 여인이 그토록 악착같이 가려고 했던 그곳, 그곳이 우리가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이라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신나는 여행을 예약해 두었다고 속삭인다면?
불교에서 죽음은 이처럼 밝고 건강하며 때로 익살스러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아미타불이 서원을 세워 만들어 놓은 서방 극락정토까지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여행. 얼마나 즐거우면 나라의 이름이 즐거움이 있는 곳, ‘극락’이라고 했을까? 대성인로왕보살이 앞장서 길을 안내해 주고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을 대동하고 맞이하러 온다. 얼마나 중생을 어여삐 여겼으면 직접 마중 나오기까지 할까? (94-96) 

 

반야용선은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극락정토로 갈 수 있는, 한 명만 아니라 여러 명을 함께 데려가는 좀 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불교가 쇠퇴했던 조선 시대에는 염불수행이 대중화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반야용선도>가 많이 그려졌다. 누구든지 배를 타기만 하면 모두 극락으로 데려가 준다는 반야용선 이야기는 종교적 수행을 하기 어려웠던 일반 백성들에게 더 큰 호소력이 있었다.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은 통도사에 소장된 <용선접인도>와 김해 은아사, 신륵사, 안성 청룡사에도 남아 있다. 큰 범선에 돛대를 높이 달고 출발하는 반야용선 중앙에 작은 바람막이 막사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누각 같이 큰 건물이 있는 경우도 있다. 앞뒤로 인로왕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서 보호하는 모습이고 배를 탄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아예 법당이 곧 세상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배이기 때문에 ‘법당이 곧 반야용선’이라는 생각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기단부터 천장까지 반야용선의 모티프가 반영되어 있다. 주춧돌에 새겨진 거북과 바닷게의 문양은 반야용선이 떠 있는 바다를 상징하고, 건물 내부의 들보에 그려진 불보살들은 배를 타고 가는 중생을 호위한다. 건물 밖으로 뻗어 나와 서쪽을 바라보는 두 개의 용머리는 서방정토를 향해 나아가는 반야용선의 뱃머리를 상징한다. 특히 미황사는 불교가 바닷길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찰로서, 부도탑에 새겨진/ 바다 상징물들과 함께 대웅전의 반야용선 모티프는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반야용선에 타지 못해 밧줄에 매달려 가는 악착보살의 모습은 운문사 대웅보전과 영천 영지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101-103)

 

 

 

(사진 출처: 『미술관에 간 붓다』, 95쪽) 
 

운문사에 여러 번을 갔어도 이 악착보살은 못 봤다.

아니, 내 눈에 저 악착보살이 보이질 않은 거다.

모르면 코 앞에 있어도 안 보일 때가 있다.

 

명법 스님은 이 책에서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는 것이 보는 것을 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58)

고 하시지만 이 경우는 알아야 '면면장(免面牆)'이라도 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알게 된다.

이게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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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05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도사 엄청 크더군요. 자체박물관도 볼만하고. 거대탱화로 소문난 삼신불 탱화 가끔 행사 때 보여준다던데 때 맞추기가 쉽지 않더군요. 통도사 숲길에 맛있는 비빔국수집도 있어요! 스님들 맛집ㅎ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운문사는 새벽예불도 들었음에도, 유홍준씨 때문에 자판기 율무차만 열심히 먹었던. 정말 맛있었...내 댓글엔 왜 절에 가서 먹다 온 기억만 가득한가...

돌궐 2015-02-05 18:03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 가봤는데 아직 비빔국수는 못 먹었어요. 나중에 기억했다가 먹어볼게요. 감사합니다.^^

2015-02-06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2-05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법 스님의 말씀에 공감해요. 아는 것을 믿다가는 자신의 오류나 새로운 지식을 보지 못하니까요.

돌궐 2015-02-05 22: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스님 말씀이 와닿더라구요.
 

 

 

 

 

 

 

 

 

 

 

 

 

 

 

 

 

일연 스님의 센스가 드러나는 문장 하나.

의상의 저술이 하나밖에 없다고 한 뒤에 이렇게 썼다.

 

한 솥의 국 맛을 아는데 고기 한 점이면 충분하다.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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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 읽었지만 아직도 다 못 읽었다
    from 突厥閣 2015-02-22 15:04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는다는 건 그저 역사를 읽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알에서 난 왕과 닭부리 입술을 하고 태어난 왕비의 신화를 읽는 것이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라고 읊었던 애절한 향가를 읽는 것이며, '괴력난신(怪力亂神)'이란 이유로 말해지지 못했던 수많은 기이하고도 재미있는 옛이야기들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넜고, 무왕
 
 
2015-02-05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5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159-160.

 

네 가지 덕을 지녀라

 

경계한다. 너는 교만하지 말라.

교만하면 덕을 손상하게 된다.

어찌해야 교만하지 않을까?

핵심은 겸손에 있다.

 

경계한다. 너는 게으르지 마라.

게으르면 직분을 망치게 된다.

무엇으로 게으름을 없앨 것인가?

요점은 부지런하고 삼가는 데 있다.

 

경계한다. 너는 성글게 하지 마라.

생각이 성글면 새게 마련이다.

무엇으로 성근 것을 다스릴까?

자세히 살피면 된다.

 

경계한다. 너는 경박하게 굴지 마라.

기운이 뜨면 날리게 마련이다.

어찌해야 경박함을 누를까?

고요 속에 잠기면 된다.

 

풀이한다.

겸손은 덕의 기초다.

근면함은 일의 줄기다.

꼼꼼함은 정사(政事)의 핵심이다.

고요함은 마음의 본체다.

 

군자가 겸손을 지키면 덕을 높일 수 있다.

능히 부지런하면 하는 일을 넓힐 수 있다.

자세하고 신중하면 정사를 세울 수 있다.

차분히 고요하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다.

군자가 이 네 가지 덕을 행한 뒤에야 자신을 간직하고 사물에 응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을해년(1695) 겨울, 존소자(存所子)가 쓰노라.

 

 

(2009년에 썼던 초록 중에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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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부님, 교만하지 않으려고 북플왔는데, 북플 때문에 고요할 수 없어 경박하게 됩니다...이런 댓글이나 쓰는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으흑.

돌궐 2015-02-04 19:36   좋아요 0 | URL
북플 알림설정을 다 꺼버리세요.^^
그게 힘드시면 효과를 무음으로 하시고 댓글 달렸을 때만 알림이 오도록 하시면 좀 낫더라구요.ㅎㅎ

AgalmA 2015-02-04 19:51   좋아요 0 | URL
작성한 글에 댓글 달렸을 때랑 관심 서적에 친구가 리뷰 썼을 때 2개밖에 알람 안 켜놨는데(무음), 뭐가 잘못 됐는지 제가 이웃에 남긴 댓글 꼬리가 아니어도 그 글에 다른 이웃이 글 남기는 것도 자주 도착;...상관않다가 아무래도 이건 도움말 드리면 좋지 않을까 하다가 또 가고;;...말씀대로 일괄 다 끄고, 하루 한 번만 체크하는 걸로 정리를 해야겠어요.

cyrus 2015-02-04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석정이라면 어마어마한 형태의 마방진이 생각납니다. 혹시 인용한 글을 쓴 사람이 제가 아는 그 수학자 최석정과 동일인물입니까?

돌궐 2015-02-04 19:40   좋아요 0 | URL
예, 바로 그 최석정이라네요.^^
찾아보니 숙종 때 문신이었다는데 수학에도 매우 뛰어났다고 하네요. <구수략>이라는 책에 벌집마방진이 나온답니다.
질문주셔서 저도 하나 또 알았습니다. 감사드려요.^^

만병통치약 2015-02-04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리는 듣고 보면 참 간단해요. 지키지 못하고 따르지 못할뿐이죠^^

돌궐 2015-02-04 21:25   좋아요 0 | URL
아이구... 정말 그렇네요.ㅎ
 

<논어> 옹야편을 보니 이런 말이 나오더라.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자왈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

 

 

 

 

 

 

 

 

 

 

 

 

 

 

 

김원중 역 <논어>에서는 위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텅빈 듯하다. 꾸밈과 바탕이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난 뒤에야 군자인 것이다. (123)

 

한편 신창호 역 <한글 논어>에서는 이 부분을 좀더 자세하게 번역했다.

 

사람의 본바탕이 자라나면서 후천적으로 꾸민 것보다 강조되면 촌스럽다. 꾸민 것이 본바탕보다 강조되면 사람 됨됨이가 텅 빈듯 공허하다. 본바탕과 나중에 꾸민 것이 함께 어울려야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해제에서는

 

실질적 내용이나 도리, 사실적 바탕만을 강조하고 외형적으로 꾸미거나 문화적으로 수식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천박한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외형을 꾸미거나 문화적 수식만을 강조하고 실질적 내용을 소홀히 하면 알맹이는 없고 수다스런 사람이 된다. 따라서 문화적 꾸밈과 실질적 내용이 잘 어울려 빛을 발휘해야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온전한 인성을 갖추게 된다. (184)

 

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바탕'과 '꾸밈'에 대한 생각은 사람 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학문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유명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던 칸트의 말도 결국 비슷한 얘기 아닌가 싶다. 

철학이란 학문이 서양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구석은 있지만 비슷비슷한 생각들은 동양에서도 얼추 발견할 수 있는 거 같다. 철학에 동서양을 나누는 것도 어찌 보면 웃기는 일인 듯싶기도 하고.

정말 그런지 죽기 전이라도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동양 고전을 조금씩 읽으려고 한다.   


김원중 선생 책은 논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문장을 곱씹으며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장점이 있고(물론 각주도 충실하다), 신창호 선생 책은 이해하기 쉬운 번역에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기 때문에 두 권 다 저마다 장점이 있다.

그래서 요즘 이 두 책을 번갈아 조금씩 읽고 있는데, 구절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백효, <논어집주>는 가끔 참고만 한다. 주석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본문에 집중이 잘 안되는 편이다.

옛날에 논어 읽어보겠다고 그걸로 시작했다 끝을 못봤었는데, 이번에는 기어이 완독할 수 있겠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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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논어로 풀어 놓으니 쉽고 좋네요. 예전에 이렇게 설명해 주었을까요?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너무 멋진 문장인데요?!

돌궐 2015-02-02 14:27   좋아요 0 | URL
네.. 읽다가 정말 새삼 아 이런 문장이 논어에 있구나.. 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AgalmA 2015-02-0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궐님, 논어랑 다산이랑 비교 좀 해주세요ㅎ
아까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잠재적인 것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곧 잠재적인 것 자체가 잠재적일 수도 잠재적이 아닐 수도 있다˝ 문구를 한참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건 동양사상이랑 다를 바 없잖아 하면서....

돌궐 2015-02-02 15:20   좋아요 0 | URL
제가 무슨 깜냥으로 그런 어려운 걸 하겠습니까... ㅎㅎ
Agalma 님이야말로 <형이상학>의 그 문장과 동양 사상을 자세하게 비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yamoo 2015-02-02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동서양 철학쪽을 공부해보니 동양과 서양은 확실히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더군요. 니스벳도 이점을 아주 잘 지적해 줬지요. 그래서 동서양 철학이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한 것 같습니다. 서양철학은 근대 이후 이원론적 사고가 확고히 자리잡았지만(그 전에 논의되어 온 것들이 확고해 졌다랄까요) 동양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일원론적이라는 거...주역과 노장 사상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지요. 유교철학보다 훨씬 상보성을 강조한 걸 보면..그리고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더 사변적이었던 거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확실히 `개인`이 철학의 주요 대상이 된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돌궐 2015-02-02 16:07   좋아요 0 | URL
아이구 yamoo 님 제가 어쭙잖게 동서양 철학 운운해서 얕은 지식을 드러냈습니다.^^; 말씀해 주신 내용은 잘 새겨들어서 앞으로 공부할 때 참고하겠습니다.
인용한 구절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아서 어설프게 칸트와 비교해 봤는데, 결국 ˝나는 칸트도 안다˝라고 잘난체한 결과밖에는 안됐네요.ㅜㅠ 따뜻한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누가 말했다면서 권위에 의존하는 글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인용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더라구요.ㅎㅎ

2015-02-02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2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2-0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재 클래식스에서 나온 이을호 선생의 논어는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일상의 대화를 나누듯이 번역했어요. 성백효 선생의 논어집주는 제외하면 김원중, 신창호, 이을호 역, 이 세 권을 번갈아가면서 읽어요.

돌궐 2015-02-02 23:26   좋아요 0 | URL
이을호 선생 한글논어는 저도 서점에서 분명히 봤는데,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안되는군요.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석 시에 나오는 나귀, 옛 물건들, 여러 가지 음식들은 거의 다 사소하고 심지어는 처량하기까지 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백석은 이 모든 사물들한테 사랑을 담아 노래했다.

 

소래섭이 지은 <백석, 외롭고 높고 쓸쓸한>(우리학교, 2014)에서 글 몇 줄 옮겨 본다.

아무래도 안도현 <백석평전>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누군가는 이 작품에서 백석이 왜 하필 ‘흰 당나귀’를 타고 싶어하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백석은 나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함흥에 간 지 얼마 안 돼 발표한 「가재미·나귀」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이 헐리지 않은 중리(中里)로 왔다. 예서는 물보다 구름이 더 많이 흐르는 성천강이 가깝고 또 백모관봉(白帽冠峰)의 새하얀 눈도 바라보인다. 이곳의 좌우로 긴 회담들이 맞물고 늘어선 좁은 골목이 나는 좋다. 이 골목의 공기는 하이야니 밤꽃의 내음새가 난다. 이 골목을 나는 나귀를 타고 일없이 왔다 갔다 하고 싶다. 또 예서 한 오 리 되는 학교까지 나귀를 타고 다니고 싶다. 나귀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그래 소장 마장을 가 보나 나귀는 나지 않는다. 촌에서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서 수소문해도 나귀를 팔겠다는 데는 없다. 얼마 전엔 어느 아이가 재래종의 조선말 한 필을 사면 어떠냐고 한다. 값을 물었더니 한 오 원 주면 된다고 한다. 이 좀말로 할까 하고 머리를 기울여도 보았으나 그래도 나는 그 처량한 당나귀가 좋아서 좀 더 이놈을 구해 보고 있다.

 

당시에도 나귀는 구하기 어려운 동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백석은 굳이 나귀가 갖고 싶어 시장을 찾기도 하고 주변에 수소문도 해 봤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백석은 나귀를 타고 한가롭게 왔다 갔다 하고 학교에도 다니고 싶어 하지만 나귀를 그런 용도로 부리는 사람은 당시에도 없었습니다. 탈 것이라면 나귀보다 더 나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예로부터 나귀는 짐을 싣기 위한 동물이었고, 교통수단으로 쓰일 경우에도 주로 신분이 초라한 사람들이 이용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백석은 더 나귀를 타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동차가 오가는 대로부다 좁은 골목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백석은 늘 버려지고 소외되고 감추어진 것들에 주목했습니다. 처량한 동물이라서 오히려 백석에게는 나귀가 더욱 소중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려는 자의 처량한 심정을 알아줄 길잡이로도 나귀는 제격이지요. (121-122)

 

 함윤덕, <기려도>, 조선 16세기

 

 

『사슴』 속의 시간은 근대화되기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과거일 뿐 특정한 어떤 시기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는 「목구」라는 시에서 제사에 쓰이는 그릇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 정주백촌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이처럼 그가 『사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자손손 살아왔던 어떤 장소와, 그 장소에서 변암없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석이 사투리에 특히 관심을 보인 것도 그가 시간보다는 장소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요. 사투리는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를 부각시킵니다. 또한 전설과 같은 옛 이야기, 연중 행사 때마다 되풀이되는 독특한 풍속 역시 시간보다는 장소의 특수성을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슴』 이후의 시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소개한 연작들뿐만 아니라 「산중음」, 「물닭의 소리」, 「서행시초」 등의 연작을 통해서도 그는 그 지역만의 색깔을 시에 담기 위해 애썼습니다. 특히 그의 기행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지역 특유의 음식들입니다. 그의 기행시에는 빠짐없이 음식이 등장하고, 음식은 그 지역 특유의 ‘맛’을 드러내지요. 1940년 이후 해방 전까지 일제의 강압을 피해 만주에서 생활할 때도 음식과 장소에 대한 그의 집착은 여전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만주에서 민족의 터전이었던 장소를 탐색하기도 하고, 음식을 통해 고향이라는 장소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모든 시들은 대부분 어떤 시간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며, 음식은 그 장소의 성격을 이야기하기 위한 핵심적인 매개이지요. 그는 자신이 음식과 장소에 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와 지렁이」라는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141-142)

 

참고로 「목구木具」 전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목구木具

 

五代나 나린다는 크나큰 집 다 찌그러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 해에 멫 번 매연 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지르터맨 늙은 제관의 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우 우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촛불 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 위에 떡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 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끊는 통곡과 축을 귀에 하고 그리고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 줌 흙과 한 점 살과 먼 녯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정본백석시집』, 문학동네, 131쪽) 

 

국수를 생각하는 마음
백석은 여러 음식들 중에서도 특히 국수에 애착을 느꼈던 듯합니다. 「국수」 외에도 백석 시에는 국수가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그의 시 중에는 ‘메밀국수 연작’이라고 불릴 만한 것도 있습니다. 원제는 「산중음」 연작으로 함경도를 여행한 후에 발표한 기행시인데, 연작 네 편 중 세 편에 메밀국수가 등장하지요. 이 연작 중에서도 특히 울림이 큰 것이 「산숙」이라는 작품입니다.

 

산숙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윗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어 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그는 여행 중에 국숫집을 겸하는 여인숙에 묵었던 모양입니다. 백석은 국수를 만드는 분들과 함께 누어 때 묻은 목침들을 바라보며 그 방에서 묵었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국수 가닥처럼 그의 생각은 그 방에 묵었을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로 이어집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국수 가닥처럼, 얼굴과 생업과 마음도 긴 역사를 관통해 지속됩니다. 어쩌면 역사를 지탱하는 것은 그렇게 가느다랗고 사소한 것들일 것입니다. 산골 벽지를 오가며 좁은 여인숙 방의 목침에 때를 남긴 사람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도 언젠가는 죽고 휘황찬란한 건축물도 끝내는 퇴색하지만, 얼굴과 생업과 마음만은 유구한 세월이 지나도록 이어져 내려가지요. 사소하지만 질긴 것들의 생명력, 백석이 국수에 그토록 애착을 보였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51-152)

 

백석은 과거의 풍물을 골동품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풍물을 골동품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에 담긴 과거의 역사와 문화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골동품의 가치를 숫자로 표시되는 가격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반면 「북방에서」를 보면 백석은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에 거주했던 옛 종족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을 보면 그가 우리 역사에 관해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애정이 그를 과거의 풍물들로 이끌었습니다. 그에게 사투리와 과거의 풍물들은 골동품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찾기 위한 흔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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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단아하고 안정을 주는거 같아요 이웃님들께 자주 언급되는 백석이란분이 참 궁금해지네요ㅎ

돌궐 2015-01-25 10:30   좋아요 0 | URL
안도현 <백석평전>이 새로 나와서 더 많이들 언급하시는 거 같아요. 해피북 님도 한 번 읽어보세요.^^

AgalmA 2015-01-2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귀와 국수는 매니아가 있기로 유명하지요. 특히나 글쓰는 사람들은 유독 나귀를 좋아하더라고요. 말 좋아하는 작가들이 좀 호기롭다면 나귀 좋아하는 작가들은 은둔자 스타일들...참 재밌는 인간사예요.

돌궐 2015-01-25 10:31   좋아요 0 | URL
말과 당나귀... 정말 말씀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ㅎ

돌궐 2015-01-25 13:51   좋아요 0 | URL
닭칼국수, 수제비, 짜장면, 짬뽕, 사천탕면, 잔치국수, 쌀국수, 냉면, 쫄면, 나가사키 우동, 그리고 라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도 국수를 참 좋아하네요.ㅎㅎ

AgalmA 2015-01-26 03:04   좋아요 0 | URL
저는 빵 매니아인데 국수매니아까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ㅎ 한번씩 된통 걸리기도 하지만요. 간짬뽕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사먹었던지;;

만병통치약 2015-01-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눈에 급속히 많이 띄는 시인이네요 재평가인가요?

돌궐 2015-01-25 10:37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밖에 몰랐는데, 시를 읽어보니 시집도 사게 되고... 울림이 크고 중독성 있는 시들입니다.ㅋ 어디서 봤는데 시인들이 뽑은 역대 시집 중에 김소월, 서정주에 이어 3위가 백석 <사슴>이라네요.

AgalmA 2015-01-26 07:36   좋아요 1 | URL
백석은 월북시인으로 간주돼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 얼마되지 않았죠. 평안/함경 북쪽 사투리가 많은 그의 시를 반공시대에서 좋아할 리도 만무했죠. 월북작가로 취급되는 문인들 더 잊혀지기 전에 연구 좀 진행됐음 싶은데 이눔의 남북상황이 늘 발목을 잡는군요. 하여간 백석은 암암리에 문인들에게 칭송되어온 시인인지라 후계자라 자처하는 안도현시인이 작년 백석평전 내고, 이동진/김중혁 빨간책방에서 백석 방송하는 등 최근 급속히 재평가를 받고 있죠.

cyrus 2015-01-25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시집을 읽고 허기를 느낀 적이 있는데 그 시집을 쓴 사람이 바로 백석입니다. ㅎㅎㅎ

돌궐 2015-01-25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오늘 저녁으로 국수를 먹을까 어쩔까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