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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 가보려고 채비까지 했다가 문득 열어본 날씨앱에 미세먼지가 매우 나쁘다고 하여 포기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특별전을 보러 갔다. 그나마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여가 생활이라곤 전시나 영화를 보는 것 정도니까.

항간에 유명한 영화 <위플래쉬>도 보고 싶었지만 얘기를 해도 반응이 시큰둥하여 일단 다음으로 미루었다.

 

전시관에 들어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데, 몇몇 작품 옆에 어떤 시인이 그림을 재해석하여 쓴 시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김경주'라는 이름이 낯익어서 찾아 봤더니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고래와 수증기>를 쓰고, 만화 <골리앗>을 번역한 작가였다.

그는 난해한 시를 쓴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 그림과 함께 전시된 시들은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초현실주의 그림에서 많이 사용되는 데페이즈망이 현대시에서 차용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짐작컨대 김경주의 시에도 그럴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아무튼 전시회에 그림과 함께 걸린 그의 시들이 도록에도 함께 실려 있어서 거금 이만오천 원을 주고 샀다.

서점에서는 못 산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한 지출이었는데,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전시를 보면 눈물을 머금고 도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객들이 좀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시편을 붙인 작품들만 모은 도록을 좀 저렴하게 시집처럼 제작해서 판매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아래에 도록에 실린 작품 몇 점 옮겨 본다. 인용한 시는 해당 작품에 부친 시편들이다.  

 

 

 

<바람(Wind)>, painting on canvas, 104×81.3cm

 

 

바람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자정에 불러주어서

셔츠만 입고 날아왔어요

미안해요 너무 큰 셔츠를 입고 왔네요

정말이지 이 셔츠만 벗을 수 있다면

당장 당신 옆에 누울 수 있을 텐데

나의 헐렁한 셔츠만큼이나

당신의 집은 너무 춥네요

(118)

 

 

아래 사진은 전시회 도록 표지 부분이다.

여기에 사용된 그림은 <플라워선박의 입항>이란 작품인데, 19세기 영국에서 카리브 해안의 타히티로 향하는 '바운티 선박(Bounty)'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고 한다. 도록의 설명을 옮겨 보면 이렇다.

 

회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태니컬 회화의 '보태니컬'의 모험에서 착안하여 표현한 작품으로 그림 속의 '플라워 선박'은 19세기 영국에서 카리브 해안의 타히티로 향하는 '바운티 선박(Bounty)'을 모티브로 하였다. 독재적인 함장에 반란한 선원들은 타히티 섬에 상륙하여 영주하게 되었다. 노역으로 피폐해져 있던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은 빵과 과일들이 가득했던 바운티호와 그 선원들을 환영하였다. 플라워 선박은 그들이 염원하던 "파라다이스"이자 그곳으로의 항해를 의미한다. 섬의 원주민들은 종려나무 가지로 인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14)

 

 

 

 

플라워선박의 입항

 

스페인 여왕과 군대는 남미로 향했다

그곳에 황금의 땅 엘도라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엔 황금의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노예로 쓰기위해 배에 태웠다.

바다위에서 굶주림과 항해에 지친 아이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피를 토하고 배위에서 하나씩 쓰러졌다.

그리고 그 피 위에서 식물 같은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 그 꽃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스페인 여왕은 황금대신

이 꽃을 따왔다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114)

 

위 그림이 이른바 '바운티호의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타히티에 상륙하는 모습을 그린 게 사실이라면 김경주의 시에서는 왜 스페인 군함이 남미에 원정 갔다가 원주민을 싣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일까?

어찌 보면 둘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인데, 이것을 그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곡해로 보아야 할지 조금 아리송하다.  

 

 

 

<해돋이 해변(Sunrise by the Ocean)>, painting on canvas, 63.5×53.4cm

 

 

해돋이 해

 

해는 매일 아침 자신의 나이테를 땅에 숨기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해를 숨길 수 없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거래요.

 

갈매기는 매일 아침

수평선을 물고 가서

해에게 떨어뜨리고 있어요

(117)

 

 

수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어른들이 볼만한 그림도 조금 있긴 했다.

2부 '욕망' 파트에서 그런 작품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 아래 그림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오른쪽에 쌓인 책들의 모서리 부분을 주목하자.

 

 

<에로틱 동화(Contes Erotique)>, painting on canvas, 20×25cm

 

 

에로틱 동화

 

학은 학의 하늘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하늘이 있고

 

수 천년간 살아온 늑대에게는

수 천년간 살아온 바람이 있어요

 

내게는 도저히 떠나지 못하는 시가 있고

우리가 만든 우주의 비밀이 하나 있어요

 

눈을 기다리는 악어처럼

그건 악어만의 비밀

 

물범처럼

밤에 해변으로 몰래 올라와

가만히 나는 당신 옆에 누웠죠

(78)

 

 

 

 

<잠자리에서 읽는 책(Pillow Book)>, painting on canvas, 51×51cm

 

나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딸내미가 좋아할 거라는 예상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고, "근데 왜 벌거벗고 자냐"고 했다더라.

 

 

 

 

<달빛 소나타(Moonlight Sonata)>, painting on canvas, 51×40.7cm

 

딸내미는 이 작품을 보고 엄마한테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왜 다 돌돌 말려있는줄 알아?" 하더란다.

왜 그러는 거냐고 묻자 딸내미는

"애벌레(번데기겠지)라서 그래. 나비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이제 나비가 될 거야." 라고 했단다.

옆에서 듣던 관객들이 모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내가 다시 봐도 과연 그런 거 같다.

김경주 씨가 시편을 붙인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의 메타포도 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비상(Flight of the sun)>, painting on canvas, 28×38cm

 

재미 있는 그림이다. 아이들은 이 그림과 앞에 나온 <해돋이 해변>을 보고 계란이라고 하더라.

쿠쉬는 하와이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하와이가 포함된 폴리네시안 문화에서 태양은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렇게 태양을 계란 노른자로 비유한 모티프가 그림 중에 자주 나온다.

도록 해설에서는 우주 창조와 관계된 난생 신화와 연결하고 있는데, 사실 그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관람자는 저마다 갖춘 경험과 언어와 논리로 그림의 뜻을 해석할 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수준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수준에서.

해석에 반대한다고, 스타일이 전부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런 그림 앞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만차의 동물상(Fauna in la mancha)>(부분), painting on canvas

 

위 그림은 돈키호테를 읽은 사람에게는 재미 있는 그림이겠지만,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같이 보던 큰애한테 옛날에 풍차를 괴물이라고 착각해서 그것을 향해 창 들고 돌진한 미친 기사가 한 명 있었다고 해줬다.

 

 

#

전시작품 명제표에서 이상했던 건 'painting(oil)' on canvas를 'printing' on canvas라고 써 놓았다는 사실이다(전부 다 그렇게 표기되었는지는 다 확인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눈여겨 보는 사람이야 많지 않겠지만, 유화가 분명한 작품에 'printing on canvas' 라고 명시해 놓으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 진품이 아니라 '찍어낸' 작품이 아닌가, 그러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이 복제품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도록에는 분명히 'painting on canvas'라고 나온 걸 보면 실수인 것 같은데 왜 그대로 둔 채 전시하는지 모르겠다.

인력도 부족하고 입장료도 안 받는 화랑 전시라면 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는데, 꽤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간 전시회에서 이런 허술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김경주의 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꽤 알려진 시인인가 보다.

최근 그가 번역한 <골리앗>은 조만간 구입하려고 장바구니에 넣어 두긴 했다. 하지만 번역자가 '김경주'란 건 오늘에서야 그 이름을 검색해 보고 알았다.

 

큰애한테 물어보니 아직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모르던데, 그런 애한테 골리앗 이야기를 던져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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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23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해설보다도 아이의 번데기 해설이 가장 인상적이였어요 가끔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을 관찰하고 들려줄땐 어른들의 상상력보다 아이들이 더 뛰어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두 전시회 갈일있을땐 조카들과 함께 가고 싶네요 멋진 그림과 시 잘보고 갑니다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요^~^

돌궐 2015-03-23 09:27   좋아요 1 | URL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가끔은 그런 아이들의 직관력이 부럽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되시면 좋겠네요. 작품들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3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벌레 해석 정말 탁월하네요. 읽다가 놀랐습니다.

돌궐 2015-03-23 12:35   좋아요 1 | URL
늘 재미난 글로 놀라게 해주시는 곰곰생각 님마저 놀라셨다니 저희가 놀랄만한 일이 맞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3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로틱 동화`라는 유화`를 보면 왜 종이를 접어서 돌출된 그림 있잖습니까.
자꾸 보면 이 그림에서 나오는 책 이미지`가 여성 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종이를 접어 툭 튀어나온 부분은 마치 클리토리스 같다고나 할까요..ㅎㅎ
왼쪽 그림 하단에 보면 꼬마 조개가 보이는데 딱 보면 여성 성기`입니다.

글구. 오른쪽 책 모서리를 가만 보면 사람 얼굴 형상이에요. 그림이 재미있네요...

돌궐 2015-03-23 14:04   좋아요 1 | URL
과연 그렇군요. 게다가 그 책 저자는 무려 사드로군요.
오른쪽 그 사람들은 죄다 남자가 맞는 거겠죠? 음흉한 표정에다... ㅎㅎㅎ

oren 2015-03-23 2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네요. 돌궐 님 덕분에 블라디미르 쿠쉬의 그림을 다른 데까지 날아가서 찾아보게 되는군요.. 거기엔 그림마다 자세한 설명글까지 달려 있더라구요.
그림이든 영문 설명이든 `해석`이 문제네요.. ㅎㅎ
(☞ http://vladimirkush.com/Editions/Page-3)

* * *

Contes Erotique

The Marquise de Sade wrote volumes about his daring study of the sphere where sensual pleasures, sex, and uncontrolled desire reign. However, de Sade invented nothing; he just showed us ourselves. This is, as they say, the naked truth. For the artist there are no unsolvable mysteries, he is occupied not with moralizing, but with the quest for beauty. In nature there is no dirty spot, only we have introduced it in her. We have treated this ˝dirt˝ too superficially. Friedrich Nietzsche The image in some way reproduces the biblical theme Susanna and the Old Men, to which artists from different epochs showed interest – such as Rembrandt, Goya, etc. The old men – here are, obviously, the books, that display a keen interest in the ˝woman˝ who reveals to them her beauty secrets.

돌궐 2015-03-23 22:49   좋아요 1 | URL
oren 님 알려주신 사이트에 가봤습니다. 전시에서 봤던 작품들이 많이 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옮겨주신 <에로틱 동화> 영문 해설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그장소] 2015-03-23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나들이였네요^^

돌궐 2015-03-24 00:06   좋아요 1 | URL
네 다행입니다.^^

yamoo 2015-03-2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라디미르 쿠쉬...제가 정말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입니다..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오렌님이 알려주신 사이트로 고고~^^

돌궐 2015-03-24 21:29   좋아요 0 | URL
쿠쉬 그림은 달리 같기도 하고 마그리트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자유도비 2015-03-2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틱 동화 그림과 그 아랫 그림, 책갈피에 깃털이 꽂혀 있네요. 의미심장합니다. <레다와 백조> 가 생각나네요.

돌궐 2015-03-25 12: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것 참... 하면서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ㅎㅎ
말씀대로 레다와 백조와 연결하면 더 의미심장하군요. 그것 참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이이화 선생이 '호남'이란 명칭에 대해 쓴소리를 한다.

다음은 책에서 인용.

 

 

* * *

 

 

이중환은 또 각도의 인심을 이렇게 품평했다.

 

 

“평안도의 인심이 순박하기가 첫째이다. 다음은 경상도로서 풍속이 진실하다. 함경도는 지역이 오랑캐 땅과 잇닿았으므로 백성의 성질이 굳세고 사납다. 황해도는 산수가 험한 까닭에 백성이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 백성이어서 많이 어리석다.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에 쉽게 움직인다. 경기는 도성 밖의 평야 고을은 백성의 재물이 보잘것 없다.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만을 좇는다.”

 

이중환은 생활환경과 인문지리를 중심으로 유교 가치관에 따라 평가를 내렸으나 인상 비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폐단은 헤아리지 않고 단순한 관념으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안정복은 『임관정요』(臨官政要)에서 각도의 인심과 교화 방법을 제시하였다.

 

“경기의 풍속은 인색하고 이익만을 따르므로 마땅히 돈후와 성실로써 교화해야 한다. 호서의 풍속은 방탕하고 체모를 거짓으로 지으므로 마땅히 진중하고 근실함으로 교화해야 한다. 호남의 풍속은 기교를 부리고 거짓 성실한 체하므로 마땅히 엄격과 성신으로써 교화해야 한다.”

 

서북 지방과 강원도에 대한 견해는 이중환과 비슷하다.

각 지방에 대한 이상의 평들은 오늘날의 지리학에서 말하는 환경과 인문에 근거하지 않고 주로 풍수설에 토대를 둔 것으로, 유교 문화를 기준으로 재단하여 비록 생산, 문화 등을 언급하였지만 다양성보다는 결정론의 관점에서 평가를 내렸다.

각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이 아닌 다른 이름을 알아보자. 서북은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함경도는 동북면으로, 평안도는 서북면으로, 황해도는 해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강원도를 관동, 평안도를 관서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는 임금이 있는 도성 주변이라는 뜻으로 기전(畿甸)이라고 하였다. 전라도를 호남, 충청도를 호서, 경상도를 영남이라 한다. 강원도 북쪽을 영북, 동쪽을 영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용어들은 조선조 모화주의자들이 중국의 지역 호칭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끝자락에 있는 산해관의 동쪽인 만주 일대를 관동, 그 서쪽의 만리장성 아래 일대를 관서라 한다. 동정호의 남쪽을 호수의 남쪽이라 하여 호남, 그 북쪽을 호수의 북쪽이라 하여 호북이라 한다. 강원도를 관동이나 영동이라 부르는데, 영동은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할 수 있으나 관동은 그 중간에 관문이 없으니 억지로 붙여진 것이다. 호남, 호서는 경기 아래에 큰 호수가 없으니 전혀 자연지리에 맞지 않는다. 김제의 벽골제를 중심으로 삼아 호(湖)자를 붙였다는 말은 억지이다. 다만 동북이나 서북 따위, 위치와 방향에 따라 붙인 호칭과 추풍령과 조령에 막혀있는 영남의 호칭은 그런 대로 사리에 맞는다. (154-155)

 

 

 

 

 

 

'호남'에 대한 이야기가 5권에도 나온다.

 

 

왕건은 신라의 진골귀족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관료적 신분사회를 열었으나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역사적인 과오를 범하였다. 유훈을 통해 지역 차별의 꼬투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왕건은 ‘훈요십조’의 여덟 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車峴의 남쪽과 공주강(금강)의 바깥은 산지의 형세가 거슬리게 뻗어 있어 인심도 그와 같다. 그곳 아래의 고을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고 왕실 인척과의 혼인도 금하라. 일찍이 官寺의 노비와 나루와 驛의 雜尺에 속하였던 무리들 가운데는 더러 권세에 의탁하여 권력을 부리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앙을 불러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들일지라도 벼슬을 맡기지 말라.

 

학자들은 ‘차현’은 태백산 줄기에서 서쪽으로 가로 누운 차령산맥, ‘공주강’은 금강의 물줄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지세를 가리킨다고 보아왔다. 다시 말해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고 핑계대고 있으나 사실은 후백제의 지배세력과 그 주민들에게 오래 시달림을 받은 감정을 씻지 못해 이런 교훈을 내렸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이곳 주민들이 고려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버티자 禾尺, 揚水尺과 같은 천민으로 만들어 도살업을 맡기고 버들고리를 만들어 팔게 하였으며, 집단마을인 部曲에 살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진의 포로 따위 북방계 민족을 천민으로 만들어 부곡에 살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들을 새로운 지배집단에 끼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그뒤에도 호남 인물들이 적잖이 등용되었음을 지적하고,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나주로 피란하였던 顯宗이 이 지방에서 우대를 받고 이곳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려 하자 신라계 사람들이 미연에 방지하려고 이를 조작하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왕건이 두 번째 왕후로 목포 출신인 장화 오씨를 맞이하였고, 오씨의 아들인 혜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정황으로 보아 이 지역 차별론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근래에 이재범(李在範)은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차현의 남쪽과 공주의 바깥’ (車峴以南 公州江外)을 좁은 범위로 보아 차현은 차령산맥이 아니라 공주 북쪽에 있는 고개를 지칭한 것이고, 공주강 바깥은 넓은 남쪽 지대를 포괄한 표현이 아니라 공산성 북쪽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웅주(공주의 옛 이름) 주변 고을 30여 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차현 남쪽과 공주강 바깥’을 좁은 범위로 볼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뒷날의 풍수학자들은 별로 의심 없이 이를 호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풍수설에 따라 재해석하였다. 어쨌든 뒷날 이 유훈이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토의 3분의 1이나 되는 지역을 차별해서는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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