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역자후기에 따르면 리처드 세넷은 어렸을 때 첼리스트를 꿈꿨다고 한다.

그런데 손목뼈에 이상한 병을 얻고 활을 당길 수조차 없게 되자 아쉽게도 연주가의 꿈을 포기했다.

그런 그에게 하버드의 한 사회학 교수가 입학을 추천했고, 세넷은 사회학자로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13살에 연주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젊은이가 최고 대학의 사회학과에 입학 추전을 받으려면 그 재능과 지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알 만하다.

 

나는 세넷의 이 개인사를 읽고 나니 두 가지가 갑자기 이해됐다.

하나는 그가 이 책과 2년 뒤에 쓴 <장인>에서 장인들에 대해, 특히 예술가들의 훈련과 그 과정의 어려움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이유와,

또 한 가지는 젊은이(퇴출자)들의 실패와 좌절에 대해서 공동체(조직)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재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어 사대주의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목이 <뉴캐피털리즘>인데, 원제는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신자본주의 문화)이다.

'신자본(신자유)주의 문화'라는 제목은 '뉴캐피털리즘'이란 생소하고 잘은 모르지만 뭔가 있어보임직한 제목에 비해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면 그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천박한 신자본주의 문화의 세례를 제대로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좋고나쁘고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게 바로 뉴캐피털리즘 문화의 속성이라는 것 뿐이다. 실속은 없고 겉치레만 번드르한 문화.

다만 이 책은 '뉴캐피털리즘'이란 막연한 제목 위에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이라는 원서에도 없는 부제를 붙여 책 내용을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매우 세련된 작법인 거 같다.

그러니까 한줄로 요약하면 '하마터면 욕할 뻔했는데, 알고 보니 좋은 제목'이란 얘기다.

 

어쨌든 ​<뉴캐피털리즘>이란 제목은 이 책을 신자본주의 개설서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데, 사실 이 책의 진짜 주제는 '(신자본주의의)문화'지 '신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아니다. 

물론 1장에서 저자는 사회자본주의가 신자본주의로 변화한 과정을 관료제 변모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다.
피라미드형 관료제의 구조를 충실히 구현하던 사회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는 자본과 복지의 효율적인 분배보다는 제도 자체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주의 이익이 최우선 과제가 되던 시대에 신자본주의가 탄생했고, 이 과정에서 관료제의 구조가 흔들렸단다.

쉽게 말하면 중간 단계가 거의 없고 상부와 그 지시를 따르는 하부로만 이루어진 시스템이 정착되였으며, 권력의 중심도 경영자에서 주주로 바뀌면서 장기적인 이익보다는 단기적으로 내는 이익이 더 좋다는 인식이 만연하게 됐다는 거다.

또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도 달라졌다. 어느 한 특정한 분야에 장점을 보이는 사람보다는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에 대처를 잘 하는 사람이 선호된 것이다. 특히 첨단부문 기업에서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졌다고 한다.

 

세넷은 기업이 이런 임기응변에 강한(그러나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인재들을 추구하고 그들을 고용하면서 내세운 것이 '능력주의', '잠재력', '능력' 같은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결국 신자본주의에서 만들어낸 허울 좋은 추상적 개념일 뿐이고 실제로는 '알맹이 없는 능력' 또는 개인에 대한 (인격적) 편견 또는 선입견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2장 말미에서 세넷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연한 제도들은 컨설턴트처럼 여기저기, 이 문제 저 문제, 이 팀에서 저 팀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지적활동을 중시한다. 팀원들 스스로는 진행중인 작업에 대해서만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들은 때가 되면 조직 내의 다른 팀으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에서 요구되는 진정한 재능이란 맥락과 연관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일의 결과만을 전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좋게 말하면 상상력을 발휘하는 재능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재능을 선호하게 될 경우 경험이나 주변 환경과의 관련성이 사라지고, 오감을 통한 감흥이 배제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분석하는 것과 믿는 것이 따로 놀게 되고, 정서적 소속감이 희박해지며, 사물이나 사안에 대한 천착도 사라진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성 근대성’이라고 했던 순수한 과정 속의 삶의 방식들이 배제된다는 의미다. 바로 이것이 첨단 조직의 노동을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이다.
(144-145)

 

곧이어 저자는 '상상력'과 대비되는 '장인정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장인정신의 핵심은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업무조차도 뭔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실수가 허용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그 일을 물고 늘어질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잠재력의 유무를 떠나 기능이란 노력하다 보면 단계에 따라 때론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경이로운 신동이라 할지라도 실수를 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만 완숙한 예술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속도가 강조되는 조직에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배우는 과정을 제공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빨리 결과물을 내도록 압박이 가해지는 탓이다. 제한된 시간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빡빡한 업무 일정에 쫓기는 노동자들은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기보다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건성건성하기 십상이다. 조직들이 미래를 중시한다며 과거의 소중한 경험들을 헐값 취급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같이 알맹이 없는 능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151)

위에서 말하는 '장인 정신'은 책의 끝 부분에서 신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가치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세넷은 이 책을 쓴 뒤에 곧바로 <장인The Craftsman> 집필에 들어간 것 같다.

 

신자본주의의 가벼움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제3장에서 세넷은 정치인도 개인의 '소멸하는 열정'을 이용하여 판촉을 한다고 평가했다.

유권자들은 상품을 사듯이 정치인에게 투표한다는 것이다. 

기업에서 상품을 판매할 때 그것을 구입한 뒤에는 소비자들의 열정이 소진되고 또 다른 상품, (프레임은 그대로지만) 포장만 바꾼 신상을 갖고 싶은 열망으로 찬다는 것을 이용하듯이 정치인들도 자기들 이미지를 새롭게 포장하는 데 급급하다는 이야기다.

 

정치도 연극적이긴 마찬가지다. 특히나 진보적인 정치에는 특별한 수사법rhetoric이 요구된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 쌓아둔 진보 정치에 대한 불신을 잠시 접어두게 하기 위해 수사법을 동원한다. 나는 이제껏 정치적 수사법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중시해왔다. 하지만 상품의 판촉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판촉 행위도 훨씬 더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고 있다.
시민들은 진보적인 변화를 바라면서도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환상이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큰 비중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심각하게 갉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가는 수동성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91-192)

 

통상 언론은 장인처럼 완벽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가에게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반면, 정치가의 겉으로 드러난 개성만을 부각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언론들의 관심이 왜 그런 쪽으로 쏠리게 되었는가이다.
노동의 경우 훌륭한 장인은 기계를 잘 다룬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장인은 나뭇조각이든 컴퓨터 소프트웨어든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안에 관여하고, 객관적인 애착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고 이상적이다. 이는 악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장인의 세계에서나 현대의 과학 실험실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물론 잘 굴러가는 기업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회사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기려 하지 않고 누구나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201-202)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인간들이 이라크가 어디 있는지도 어떤 나라인지도 알려고 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가 줄기세포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나는 사람들이 게을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 경제 상황이 시민들로 하여금 예전의 장인들처럼 사고하기 힘든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의 유연성이 강조되는 조직에서 팔방미인형이 우대받게 되면서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한우물파기형은 불필요한 인물로 몰릴 수 있다. 능력 평가 시험에서도 특정 문제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거나 골몰하다가는 시험을 망치기 십상이다. 더구나 첨단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전문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에게는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203) 

 

신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행태를 정의한 다음과 같은 단락은 군침 도는 상품들과 책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모니터 위에다 적어두어야 할 구절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아이팟이나 SUV, 불필요한 소프트웨어들로 꽉 찬 컴퓨터 따위의 기계들은 여전히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월마트와 같은 대형 유통매장도 마찬가지다. 근검절약하는 청교도들은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신중함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우리는 쾌락을 원할 뿐이다. 소비자는 스스로 물건 속에서 ‘만들어낸’ 쾌락을 좇는다는 얘기다. 제정신을 가진 공리주의자라면 의심해야 마땅한 강요된 쾌락을 말이다. (186)

그간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들었고, 또 나도 어쭙잖게 하고 있지만 이런 건 세넷 같은 학자가 얘기해야 더 권위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책 읽지를 않고 생업에 바빠 읽을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지만.

 

4장에서 세넷은 이 변화의 시대에 필요한 개인의 자질에 대해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사건과 경험, 즉 내러티브(서사)를 축적할 것, 둘째 개인 유용성을 발휘할 것, 셋째 장인정신을 가질 것.

이 세 가지는 따로 독립된 사항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일 하는 사람이 실패가 있더라도 이를 극복하고(또 조직은 이것을 넘어가 주고) '사건과 경험'을 쌓다 보면 나름의 '유용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며, 그 유용성의 궁극에는 어떤 일을 '틀림없이',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장인정신'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틀림없이correct나 올바로right란 단어를 쓸 수 있으려면 자신의 바람이나 외부에서 받을 보상 따위와 무관하게 별도의 객관적 기준이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뭔가를 제대로 해낸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인정신의 요체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득실을 초월한 그러한 헌신만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런 헌신이 없다면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살벌함 앞에 무릎 꿇고 말 것이다. (230-231)

 

마지막으로 세넷은 이 시대 문화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가 말한 '반란'은 이미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문화가 권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우물을 파기 위해 다른 가능성들을 닫아버리지 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공들인 시간의 고리를 끊고 한우물파기를 포기하라.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나의 역설, 즉 새로운 권력 구조가 대단히 천박한 문화를 통해 생겨났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제대로 해내려 노력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삶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의 천박함이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고 분명히, 지금의 새로운 질서 그 다음 단계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이처럼 깨지기 쉬운 문화에 대한 반란이 장식하게 될 것이다.
(232)

 

 

책을 번역본으로만 읽었음에도 세넷의 명쾌하면서도 유려하고 종횡무진하는 논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깊이 있는 내용과 적절한 인용이 곳곳에 나오지만 만연체로 길거나 수사로만 채운 것도 아니다.

달변이지만 가볍지 않고 해박하지만 편협하지가 않다. 

 

이 책이 2006년도에 쓴 것이라 좀 철 지난 얘기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세넷의 어조는 많은 영감을 주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전의 사회학 저서라 현 시점에서 냉정하게 따지자면 별4개가 적당하겠지만, 빠심으로 별 하나 더 준다. 어찌 보면 세넷은 리먼사태를 그 이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왜 그를 일컬어 '사람을 좋아하는 사회학자'라고 하는지, 또 세계적인 석학이라 하는지 알 것 같다.

 

 

새로운 조직에서 소속감과 비공식적 신뢰, 제도에 대한 정보의 결핍은 불가피하다.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지만 노동 자체의 도덕적 위신은 예전과 다르다. 새로운 조직과 제도에서의 노동은 노동 윤리의 두 가지 요소, 즉 보상의 지연과 장기적 관점의 전략적 사고라는 틀을 해체한다.
요컨대,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죽은 셈이다. 불평등은 점점 더 소외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처럼 이상한 변화를 요즘 정치인들은 공공부문 개혁의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하고 있다. (100)

경험이 늘어날수록 그 가치가 떨어지는 공식은 오늘날처럼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진 경제에서 보다 더 현실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다. 기술 발전은 특정 기술의 유효기간을 단축시킨다. 자동화의 진전으로 경험의 축적도 무용지물이 된다. 시장경제는 기존 노동자의 재교육에 돈을 들이느니 참신한 기술을 지닌 젊은이들을 고용하는 게 더 싸게 먹힌다고 압박한다. 게다가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오랜 경험을 혁신한다고 해도 유능한 개도국 노동력의 장점과 매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119)

장인정신은 대상화objec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탈리아 현악기의 장인 니콜로 아마티가 바이올린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바이올린을 만들었을 뿐이다. 어떤 느낌으로 만들었는가와 상관없이 그는 그 대상 속에 자신을 쏟아부었고, 바이올린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여부로만 스스로를 평가했다.
우리는 아마티가 작업할 때 우울해했는지 즐거워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단지 그가 바이올린 몸통의 ‘f’자 울림구멍을 얼마나 정교하게 팠는지, 도장을 얼마나 잘했는지를 눈여겨 볼 뿐이다. 대상화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125-126)

이와 같은 대상화는 사회 밑바닥의 비숙련(그렇게 보일 뿐이지만) 노동자들에게도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 나의 제자였던 보니 딜은 미국 뉴욕 할렘의 파출부들을 연구했다. 가난한 흑인 여성 파출부들의 노동환경은 때로 일하러 간 곳의 백인 남자에게 능욕을 당하기도 할 정도로 열악했다. 그렇지만 흑인 여성 파출부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깔끔해진 집을 보며 나름대로 일말의 만족감을 얻는 것으로 조사됐다. 집주인에게서 한 마디 감사의 말도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집은 깨끗해졌던 것이다.
몇 해 전 내가 미국 보스턴의 빵집을 조사한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가족이 운영하는 한 빵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한 젊은이는 허드렛일을 시키고 잠시도 한눈팔지 못하게 닦달하는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이 구운 근사한 빵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장인들이 얻는 위안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라보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그 일 자체를 위해 잘해냈을 때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126)

잠재능력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능으로 부각되면서 오랫동안 쌓은 업적과 숙련의 가치는 소멸하고, 업적과 숙련에 깃든 지식의 맥락과 내용은 덩달아 소진되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경험을 보완하고 정당화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소비다. 물건을 사려고 가게를 찾았을 때 바람직해 보이는 마케팅전략은 열정의 소멸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방면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직설적이고 다른 방식은 은밀하다. 상표를 앞세워 열정의 소멸을 자극하는 것이 직설적 방식이라면, 제품의 효능과 드러나지 않는 기능을 부각해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것이 은밀한 방식이다. (169)

영국의 슈코다의 광고는 자동차 자체를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차의 안과 밖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광고의 말미에 차에 관한 상세한 정보도 소개한다. 고급 모델인 아우디의 광고는 이와 대조적이다. 광고 영상은 주로 운전석에서 바라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아우디 광고에는 자세한 안내 문안도 없다. 차종이 컨버터블 쿠페냐 세단이냐에 따라 차 안에 탄 모델과 차창에 비치는 풍경이 바뀔 뿐이다. 아우디를 타면 사하라 사막에서든, 쇼핑몰에서든 어디서나 한결같이 안락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듯 광고에서 시각적 차이를 강조하는 속셈은 분명하다. 슈코다와 아우디가 기계적으로 10퍼센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여지를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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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3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가였다가 소설가가 된 파스칼 키냐르 생각도 나네요.
음악가이자 그 자신이 장인이었으니 사회학자가 되어 음악처럼 세상의 조화를 얼마나 바랐을까 싶으니 더욱 공감됩니다.
애정깊은 리뷰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돌궐 2015-01-31 13:09   좋아요 0 | URL
˝음악가이자 그 자신이 장인이었으니 사회학자가 되어 음악처럼 세상의 조화를 얼마나 바랐을까˝
와 정말 그 말씀이 딱 맞네요. 최근에 <투게더>라는 책도 나왔더라구요.^^

AgalmA 2015-01-3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최근에 세넷<무질서의 효용>도 사 놓고 경제학 공부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제목이 강렬해서 저자 이름은 까맣게 잊음;; 난 바보ㅜㅜ

돌궐 2015-01-31 13:33   좋아요 0 | URL
저도 <장인>은 읽었는데, 리뷰는 아직 못 썼어요. 나머지 책은 못 봤고요.
Agalma 님도 읽어보시고 리뷰 써 주세요.^^

AgalmA 2015-01-31 13:38   좋아요 0 | URL
장인, 투게더는 돌궐님이 쓰시고 저는 무질서의 효용 리뷰를ㅎ?
본문이 265페이지밖에 안 되고 생활권 얘기니 쉽겠지 하고 접근했은데 왠걸요 문장 하나하나마다 담지하는 게 많아 공부 좀 하고 읽어야겠다 싶어 호모사케르 읽고 있는데, 아니 여기도 만만치 않아 진퇴양난입니다;;
25살에 <무질서의 효용>을 썼다고 하니 음악뿐 아니라 역시 천재라 모든 걸 잘 하는 거였어! 읽는 이는 억울...

돌궐 2015-01-31 13:44   좋아요 0 | URL
장인은 나중에 시간내서 써보려구요. 투게더는 Agalma님 최근 글들과 연계되어 있으니까... 흠...(먼 산)

만병통치약 2015-01-31 15:03   좋아요 1 | URL
북플을 통해 Agalma, 돌궐님을 만나 좋은 책 알게 되고, 책만큼 좋은 리뷰를 보니 즐겁습니다. 다만 이 책도 봐야되겠고 저 책도 봐야도겠고 정신 없네요 ㅋㅋ

AgalmA 2015-01-31 17:07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님이 절 만난 것보다 제가 만병통치약님 만난 게 더 이득인 거 같은데요! 아니다. 만병통치약님이 보시는 책이 더 매력적이고 많아서 제가 더 정신없어요ㅎ 기본이 700페이지 이상;; 정말 대단하신 분.
(여기서 내가 이래도 되나 모르겠지만... 돌궐님 제 주책을 이해부탁드립니다)

돌궐 2015-01-31 17:31   좋아요 1 | URL
만병통치약 님, 이건 수십 말을 베풀고 겨우 한두 되 얻어 가면서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ㅎㅎ

AgalmA 2015-01-3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돌궐님을 매우 신뢰합니다(버튼 꾸욱)
유통기한 저 죽을 때까지(이 정도면 압박은 아니겠지요ㅎ)

돌궐 2015-01-31 14:51   좋아요 0 | URL
책 제목도 마침 투게더니까 함께 쓰심이... ㅎㅎ

AgalmA 2015-01-31 17:05   좋아요 0 | URL
돌궐님의 유머에b
제가 일단 무질서의 효용부터 읽어야;

양철나무꾼 2015-01-3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대딩때 미샤 마이스키에 홀라당 발라당 빠져서 첼리스트를 꿈꾼적이 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그 꿈은 몇개월만에 접어버렸지만,
암튼 번역된 책의 제목은 구린데 (좀 경박했나여? 헤에~^^) 저 장인정신도, 장인도, 님의 재치만발 리뷰도 다 매력적이라는...ㅋ~.

돌궐 2015-01-31 20:4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 님, 감사합니다. 저는 첼로를 잡아본 적도 없습니다만 그 소리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다 보셨을 거 같지만 좋아하실 것 같아서... 유튜브 주소 하나 적었습니다.
http://youtu.be/mGQLXRTl3Z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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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무슨 반기독교 사상서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법과 종교 개혁의 발단과 전개에 대해 호의를 담아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코란』을 읽어 이슬람의 혁명을 이끈 무함마드의 이야기도 소개된다. 결론은 읽고, 쓰고, 혁명하라는 얘기다. 혁명은 읽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쳐 읽고, 고쳐 쓰는 과정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열정적인 문체다.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수단으로써 독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기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 민족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전체 300건 가운데 11건이 우리 기록유산이다. 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거니까 무조건 대단하단 건 아니지만, 아무튼 등재된 기록유산의 면면을 살펴 봐도 우리 기록물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너무 분량이 방대해서 아직 번역도 다 못한 걸로 알고 있다. <훈민정음>이나 <팔만대장경판>, <실록>과 <의궤>의 가치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록물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쌓여가는 나라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거기엔 수많은 블로그와 카페, 그리고 이곳 서재도 포함되겠지.

 

(아래부터는 본문 인용)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을 ‘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99)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도 힘도 없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
반대로 무척 단정하지 못한 형태로 “내가 말하는 것이 성서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코란』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불전이다”라는 정말 꼴사나운 모습에 자족한 채 지칠 줄을 모릅니다. 따라서 텍스트를 향하는 잔혹한 체험에 자신의 죽음과 광기를 무릅쓰고 몸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적이 세계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텍스트와 자신이 구별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근거나 전거는 모두 자신입니다. 준거는 자신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것이 모두 성서나 불전에 쓰여있다는 하찮은 망상에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외부성과 타자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 ‘읽다’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까요?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하는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원리주의적 사고의 함정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153-154)

 

(트리보니아누스 편, 『로마법 대전』) 여기서 유럽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한없이 정치한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대량으로 입수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과거의 거대한 유산인 로마법을 교회법에 주입하여 전대미문의 규모로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179-180)

 

피에르 르장드르의 독창적인 사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국가의 본질을 폭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줄여버리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제도적·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해 절멸할 테니까요. 이런 것을 ‘저출산 문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를 하찮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로마법과 교회법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실증적이고 착실한 연구를 계속해온 역사가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교회법은 재상산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성실하고 혁명적인 사상을 전개하는 사람이 어쩐 일인지 프랑스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반동이니 보수니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게 왜 안 되는 걸까요? 어떤 부분이 안 되는 걸까요? 그 근거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185-186)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한 가지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들립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만 말해왔으니까요. 우리는 ‘문학’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시를 잃었습니다. 춤을, 연극을, 노래를, 음악을, 회화를, 복식을-한 마디로 말하면 예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법이나 규범, 정치와는 관계없는 장소에 몰려 질식하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오락’, ‘장식물’,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법이나 규범, 정치도 질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실, 상실이라며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결정적으로 손에서 놓아버린 적이 있을까요. 그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예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210)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271)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105)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 (193-194)

도스토옙스키 등은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이 99.9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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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2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기.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돌궐 2015-01-22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읽고 쓰고 다시 쓰는 게 바로 혁명이란 얘기가 정말 참신했어요.
게다가 cyrus님은 저 말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cyrus 2015-01-22 21:09   좋아요 0 | URL
말은 이렇게 하지 머리는 안 따라줘요. 자고 일어나면 새책이 몇 권씩 늘어나는데 여기에 관심이 쏟다보니 다시 읽고 쓰는 기회가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24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필사 분량이 많습니다. 필사의 필사` 같습니다..ㅎㅎ

돌궐 2015-01-24 15:04   좋아요 0 | URL
제가 읽는 책마다 초록을 꽤 많이 남겨둡니다.^^
 
모든 '갑질'하는 분들께 일독을 권함
장계향 조선의 큰어머니 - 나눔과 사랑으로 세상을 치유하다
정동주 지음 / 한길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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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17세기)라는 시대와, 사대부의 철학(성리학)의 일면을 이해하기에 괜찮은 책이다.

장계향의 일생을 사건만 나열하여 연대기식으로 서술한 소설이 아니라 치밀한 인물 평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장계향 시대의 문화와 역사까지도 필요할 경우에는 매우 꼼꼼이 언급하고 지나간다.

따라서 중간중간 따로 설명하는 철학이나 문학 설명에서는 지루해지면서 흐름이 끊기는 면은 있는데 그건 정말 잠깐일 뿐, 이내 파란만장한 삶과 긴박감 넘치는 사건들이 전개된다. 

다 읽고 난 지금에 와서는 곁가지 설명들이 오히려 저자의 성실함을 대변한다고 본다.

 

물론 나로서는 책에 나오는 철학이나 문학을 다 알아들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경당과 이시명의 학문적 문답을 읽으며 솔직히 무슨 얘긴지는 모르겠더라. 성리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의 적절한 가르침과 제자의 깨우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새삼 '나는 스승님께 무엇을 배웠고, 스승의 어떤 말씀을 지금 내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새길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승이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페이퍼에다 장계향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화를 인용했었는데 이것 말고도 적어둔 것이 많다.

몇 개 더 옮겨보자. <음식디미방>에 관련된 구절은 밑줄긋기로 삽입했다.

길고 번잡하지만 좋은 건 나누면 배가 된다 하니 아래에 애써 옮긴다.

 

 

(장계향 아버지 장흥효는) 한결같이 자신을 감추고 겸양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임천에 은거하여 세상일을 사절하였다. ‘敬’ 자를 자리 오른쪽에 크게 써놓고 스스로 敬堂이라 하였다. 매일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고는 가묘에 절한 다음 물러나서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명상했다. 종일토록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좌우에 있는 책들을 머리 숙여 읽고 골똘하게 명상하였다. 생각으로 터득하지 못하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았으며, 와 닿는 것이 있으면 비록 한밤중이라도 불을 켜고 그것을 써두었다. 또 일찍이 책자를 만들어 자리 곁에다 두고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일이 적어두었는데, 날마다 점검하여 공부의 정도를 가늠하였다. (79-80)

 

(장흥효는 딸의 자질을 알아보고는) 그날부터 계향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딸이라 하여 『예기』와 『소학』 등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가사노동에만 국한해 교육시키고 싶지 않았다. 계향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식을 모두 가르치고 싶었다. 계향은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했고 그만큼 자신감이 커져갔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은 매우 든든한 심리적 의지처가 되었다. 정신적·심리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한 자기 존재의 인정은 여유와 포용을 키우고 넉넉한 품성을 성숙시키는 근원적 힘이 되는 것이다. (117)

 

(『예기』 중에서) 樂은 같음을 위함이요, 禮는 다름을 위함이다. 같다는 것은 서로 친하게 하고, 다르다는 것은 서로 공경하게 한다. 악이 심하면 질서가 없어지고, 예가 극에 달하면 이질감을 낳는다. 그러므로 적당히 사용하여 인정에 맞게 하고, 예의로서 몸에 붙게 하는 것이 예와 악의 효용이다. 예의가 지켜지면 귀천의 구별이 명확해지고, 악으로 같게 하면 아래위가 서로 친하게 된다. (220-221)

 

(『예기』 계속) 현자는 사람에 대해서 친해져도 공경함을 잃지 않으며, 두려워하나 사랑하며, 사랑하나 그의 악함을 알며, 미워하나 그의 선함을 알며, 재물을 쌓아서는 흩어 쓸 줄 알며, 편안한 곳을 편안하게 여기지만 옮겨야 할 때에는 능히 옮길 줄 안다.
재물에 대하여는 구차하게 욕심내지 않으며, 어려움을 당하여 구차하게 모면하려 들지 않으며, 싸워 이기려 하지 않으며, 자기 몫을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으며, 의심스러운 일에 대하여 자신이 바로 잡아 결정을 내리려고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게 개진할 뿐 자신의 견해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223)

 

장계향은 (남편 이시명에게) 다시 질문했다. 아무리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삶이 있을 것이며, 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퇴계의 경우를 말했다. 인격적 하늘에 경배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인격을 닦는 것이 修身이고, 明德으로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治人의 궁극적 꿈이다. 아무리 수신과 명덕을 강조하더라도 결국 자신을 닦고 다스리는 修己에서 시작되어야 옳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시명은 깜짝 놀랐다. 스승(장인 장흥효)한테서 독서가 좀 있었다는 말은 얼핏 들었지만 정작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혼인한 지 불과 몇 달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이시명이 느끼는 것은 아내가 나이 어린 여자가 아니라 이시명이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학자 같다는 것이었다.
“퇴계 선생도 수기치인의 도리를 잊은 적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을 다스리기 위한 몸 닦기란 결국 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퇴계 선생은 그런 정치를 통해서는 치국도 평천하도 한갓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학 정치의 꿈이 그래서 안타깝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철저하게 깨달아서 지혜로 바꾸는 修己와 爲己之學 으로 救聖成仁함이 끝내는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데 더 좋은 공부라고 들었습니다. 바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자신의 내면 아니겠습니까. 하오니 부디 안을 살피는 데 더 분발하셨으면 싶습니다.” (306-307)

 

장계향은 충효당으로 와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하여 노비들과 심부름을 하는 사라들에게 거듭 일러주었다. 얻으러 온 사람은 누구든지 빈손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의 자존심을 다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 작은 것이나마 도움 받는 이들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감을 키워 돌아가도록 진심어린 말과 행동을 하도록 가르쳤다. 얻으러 온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내준다고 여기지 말고, 기꺼이 나눈다고 여기면 더 좋다는 것을 알았다. 나눈다는 것은 소유의 탐욕에 갇혀 사는 독선의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느껴졌다. 또한 기꺼이 나눔은 나누는 것만큼 깨끗하고 존경받는 기쁨이며, 무한한 영혼의 성장을 돕는 것임도 거듭 느꼈다.
나누는 일은 자유를 알게 하며, 세상을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도 깨닫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것이었다. (326-327)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인 군자의 길을 가자고 시아버지 운악에게 건의)
운악은 물었다.
“수기지학하여 구인성성하는 것 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도를 열어가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성인의 도는 세상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데 그 궁극이 있는 것이지, 도를 닦는 한 개인의 성취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 욕심이라 배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문이 私慾을 여윈 義仁을 행할 수 있겠느냐?”
“베푸는 일을 상례常禮로 하고, 그 내용을 더 성실하게 갖추어야 할 줄 압니다.”
“더 자세하게 말해보거라.”
“우리가 매일 끼니를 거르지 않듯이 저들에게도 먹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예절을 지켜서 주며, 먹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입고 신는 것도 챙겨주며, 병든 이한테는 약을 주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은 머물러 살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정녕 어진 마음에서 우러난다면 이 또한 충효당의 광영이 아니겠습니까.” (336-337)

 

병 들어 누워 있는 독거 노인의 경우 장계향이 직접 죽을 끓여서 갖다주라고 심부름을 시키되, 반드시 다 먹는 것을 보고 오라는 당부를 했다. 양식이며 사는 형편을 알아오도록 시키기도 했다. 삼베로 적삼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보내는 집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외로운 이와 나누고 돌봐주는 일은 재물이 많이 축나는 일은 아니지만, 정성을 더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이어서 재물을 나눠주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가난에 빠진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가진 자들이 거들먹거리면서 교만을 떠는 일이다. 가진 자와 그런 자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모두가 가진 자가 될 수 없고 모두가 가난한 사람이 되지 않는 한, 그것은 고통 그 자체이다. 인간의 사회는 그런 고통의 현장인지도 모른다. 나눔은 그래서 인류 최초의 소망이고, 인류 최후의 소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눔’은 ‘仁’의 실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360-361)

 

… 장계향은 자식들에게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말했다. 사람마다 걱정 없는 사람은 없고 인간으로 생겨난 이상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왜 걱정이 생기는지 설명했다.
인간은 정신적·물질적 존재로서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고뇌가 생기는 것이다. 두 존재는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관계를 지속하는데 그것을 인간의 삶이라 부른다. 그것이 인간이며 삶의 본질이다.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선과 악·도덕규범·윤리 그리고 이런 것을 총괄하는 상위 개념으로서의 하늘을 늘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이를테면 죽음·불행·천재지변·생로병사 같은 것 때문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지속적인 포만감과 편리함 그리고 소유와 상실의 방어에 대해서 집착하려 한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행위를 통해서만 삶의 정당성을 영위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예가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예를 유지해가는 방법이 敬이라 할 수 있다. (432-433)

 

(빈민구제 하다가 집안 식구들도 힘들다는 원망이 있자 장계향이)
“알고 있다. 하지만 저토록 난감한 처지에 몰려 있는 저들을 어찌 외면하고 우리 식구 살자고 문 닫고 돌아앉아서 목구멍에 죽물 넘길 수 있겠느냐. 저들이 살아남지 못하면 이 세상인들 어찌 무사하겠느냐. 종내는 나라도 망하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우린들 어찌 살아남겠느냐. 설령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사람 사는 도리이겠느냐.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차등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저렇게 고통 받으면서도 서로 작당하여 패거리를 지어서 가진 자의 집을 공격하고 불을 지르거나 더 큰 덩어리로 작당하여 죽창이며 농사짓는 연장을 들고 반역을 시도하지 않고 저렇게 견디는 것은 저들 안에 들어 있는 ‘仁’을 믿고서 참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저들이 차마 거기까지는 하지 못하는 마음이 ‘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렇다면 우리의 ‘인’은 어떤 것이냐. 나 살자고 저들을 외면하는 것이 ‘인’이냐. 아니다. 그것은 ‘인’이 아니다. 사악한 欲일 뿐이다. 저들을 가련하게 여기지는 못하더라도 미워하지는 말아라. 다 하늘이 내린 목숨이고, 저들 안에는 우리와 똑같은 天理가 들어 있느니라. 다만 가련케 여겨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인’이니라.” (536-537)

 

 

장계향은 『중용』 제4장의 ‘인막불욕음식야 선능지미야’(人莫不欲飮食也鮮能知味也)의 핵심철학을 담고 있는 ‘음식’과 맛을 안다는 ‘지미’를 하나의 독립된 문장으로 조립했다. ‘飮食知味’라는 새로운 말을 만든 것이다. ‘지미’는 ‘예민한 미각으로 맛을 잘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임금이 먹을 음식을 미리 맛을 보는 일을 ‘지미하다’라고 말한다. (521)

1670년 나이 73세 여름에 완성된 『음식디미방』에서 장계향은 맨 먼저 자신이 책으로 써서 남기려는 음식들의 모든 재료가 조선 땅에서 나는 것들임을 생각했다. 풀잎·뿌리·줄기·잎·꽃과 열매는 조선의 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햇볕과 비·바람·이슬·눈·서리·달빛을 받고 자란다. 계곡 물소리, 산짐승 울음소리, 풀벌레 울음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웃한 모든 것들이 조선의 밤낮과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먹고 자란다. 따라서 그 이름은 언문으로 부르고, 적는 것이 마당하다고 결론지었다. 것모밀(겉모밀)·녹도(녹두)·개아미(개미)·고두밥·중발·토장(토장국)·녹도다화(녹두수제비)·상화(밀가루로 만든 만두)·석이편(석이버섯떡)·수교애(물만두) 등 17세기 조선의 중세언어는 물론 한문으로 표기되어온 고유명사들까지 한글로 표기하기로 했다. 언문에 깃든 절제된 아름다움과 도덕적 용기가 내포된 조선문화의 정체성이 음식으로 만들어져, 정치의 이상세계와 음식이 지닌 인류학적인 의미가 절묘하게 조화될 수 있었다. (523)

『음식디미방』을 언문으로 적어야 하는 이유는 더 있었다. 음식의 재료 모두가 조선의 산과 들, 물에서 나는 것들이며 토지·종자·거름, 농사짓는 사람 모두가 조선의 것이므로 당연히 언문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는 사람도 조선 사람이며 조선의 여성이고, 음식을 만들고 밥상을 차려 조선 사람을 먹여 살리는 여성·아내·딸·며느리·어머니도 모두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음식 만드는 방법도 옛적부터 조선 어머니들 마음에서 우러나 손끝으로 다듬고 만들어져 정성과 예의로 차려져 먹고 살아온 것들이다. 조선의 마음이며, 조선의 정신이고, 조선의 혼이 담긴 것이 조선의 음식이므로 언문 외의 그 어떤 문자로도 씌어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음식 담는 그릇도 조선 사기장이 빚었고 그릇 만드는 데 드는 흙과 물, 장작도 조선 땅이 품어 키우고 낸 것이므로 당연히 언문이어야 옳은 것이다.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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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 -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보는 법 너머학교 열린교실 8
김남시 지음, 강전희 그림 / 너머학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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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을 우리가 경험이나 교육을 통해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해석은 나만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또 망원경과 현미경, 사진, 스마트폰 등 다양한 시각 도구들이 ‘보는 것’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며 마치고 있다. 본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행위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는 관음증과 노출증 같은 병리적 현상들, 그리고 그렇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노출하고 공개하는 행위와 그에 동조하며 열광하는 반응들은 마치 나치가 유태인을 핍박하고 모욕하면서 이를 대중과 함께 공유했던 행태와 다를 바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와중에도 포털과 언론 누리집에는 여배우와 걸그룹 가슴골을 ‘함께 보자’고 번쩍이는 기사와 이미지 배너들이 판을 치고 있고, 블로거들은 어제 산 명품과 속옷만 착용한 직찍 사진을 올려놓고 자뻑하고 있으니 오늘날 우리들의 공동체 시선이 가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과연 알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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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크는 인문학 2 : 아름다움 - 못생긴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를 받았을까? 생각이 크는 인문학 2
한기호 지음, 이진아 그림 / 을파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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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이 지니는 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깊이 성찰할 수 있어야한다.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것인가. 시대와 장소와 무관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는가. 피타고라스가 말하듯 아름다움이란 ‘조화’와 ‘질서’ 같은 사물의 존재 방식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데이비드 흄이 말하듯 “아름다움은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오로지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을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피타고라스-플라톤-아퀴나스 등이 아름다움을 유발하는 보편적(객관적)인 요소들에 대해 언급했다면, 인간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학자들도 있다.

 

 

과학자 울리히 렌츠는 《아름다움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아름다움의 원리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으로 그 뿌리가 자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례가 맞는 몸매의 아름다움이나 황금 비율을 지킨 그림이나 조각 등의 조화와 균형을 갖춘 아름다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으로 그 뿌리는 인간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화는 인류가 만든 것이지만 인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조화와 비례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심지어 기괴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71)

 

 

캐나다의 심리학자 주디 앤더슨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를 연구했는데, 날씬한 몸매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곳은 식량 걱정이 없는 지역이었으며 풍만한 몸매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곳은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식량이 부족해 먹지 못한 사람들이 보기에 풍만한 몸매는 아름답고 동경하고 싶은 몸매였던 것이죠. 즉,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처지와 문화,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끌림의 과학》을 쓴 애드리언 펀햄과 바이런 스와미도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8~19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귀족과 왕족 여성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여성들의 피부는 유난히 백옥처럼 희었고 흰 피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실내에서 일을 하며 보내야 했고, 햇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얀 피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난과 병약함의 상징이 되었죠.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아름다움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인간들에게만 존재하는 문화라는 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진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입장이 바로 아름다움을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74-77)

 

 

아름다운 사람은 남다른 힘을 가지지만, 질투와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4장의 얘기는 누구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부하 직원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매력적이지 않은 부하 직원의 경우에는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부하 직원이 업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93)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이 유리할 때도 있지만, 불리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에게는 선망이라는 감정도, 질투라는 감정도 있기 때문에.

 

 

1970년대에 미국에서 행해진 한 실험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러 남녀 대학생이 방을 구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결국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빼어난 미인들이었다고 합니다. (94)

 

 

5장 <예술 작품은 모두 아름다워야 하나요?> 에서는 피카소, 뒤샹, 존 케이지 등이 만들어낸 ‘아름답지 않은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이제는 예술이 더 이상 옛날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결론을 던져놓고 황급히 마무리되었다. 하기야 본격적으로 예술론을 논하는 책은 아니니까 일단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정도의 질문으로 끝내는 게 현명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아쉬운 건 사실이다.

 

6장에서 동물들도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과, 아름다움은 좋은 유전자의 증거라는 논의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소개한다. 갓난쟁이도 예쁜 얼굴 모니터만 바라본다지 않아?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남성적인 면보다는 여성적인 면에 더 치우쳐 있고, 이것은 인간의 생존과 진화와 직접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의 여성은 자녀를 오랜 기간 돌보아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남성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아름다운 외모는 남성의 도움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겉모습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끝에서는 역시 모범적이고 무난한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성질들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만일 아름다움이라는 성질이 한 가지라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는 사물이 가진 여러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어떤 것은 색깔이 진해서 아름답고 어떤 것은 색깔이 연해서 아름답죠. 어떤 것은 커서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작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선이 굵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고, 선이 가늘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성질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양한 성질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것이죠. 마치 훌륭한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맛’은 하나의 맛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쓰고, 맵고, 달고, 고소하고, 짠맛이 절묘하게 결합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처럼, 사물의 다양한 성질 중에서 어떤 사람은 색깔에 주목해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모양에 주목해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46)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학 입문서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본격적인 미학 탐구서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함이 있다.

‘못생긴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를 받았을까?’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청소년들이 관심이 많을)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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