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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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 오에 겐자부로가 하고자 했던 얘기는 어떻게 읽고, 언제 읽으며, 왜 읽는지다.

 

그에겐 장애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들과 살아가면서 블레이크를 읽고, 단테를 읽었단다. 온 몸으로 읽었으며 살아가면서 읽어나갔다는 말이었다. 그에게 책은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촉매였을 뿐이다. 그러니 이 책 <읽는 인간>에서 언급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라든지 단테의 <신곡: 연옥편>, <신곡: 지옥편> 따위를 차근차근 읽어나간다고 해서 내가 오에 겐자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삶의 여정에 맞는 책을 그때그때 읽으면 된다.

 

부록에서 사이드를 회상하면서 저자는 "사이드 문장의 거장다운 면모는 그답게 언어를 선택하고 정교하게 의미를 둔, 즉 고심한 흔적의 결과물들로 가득한 글을 쓴다는 점에 있기에, 솔직히 제 어학실력으로는 대단히 읽기 어려웠습니다"라고 했는데 진짜 나에게도 사이드 문장은 번역문조차도 넘사벽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해서 책에게 거부당한 건 아니고 거꾸로 강하게 이끌려 계속 읽지 않을 수 없다고 할까요…."(216)라고 한 얘기도 공감이 되었다. 말하자면 버겁기는 했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사이드의 저술과 그 문장들을 통해서 한 시대의 거장을 만났던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읽는 인간에 대해 오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두 문장 속에 거의 담겨있는 듯하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을 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그런 기회를 움켜쥘 독서법이 있다는 것을, 사이드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49-50)

사이드의 컬럼비아 대학 동료인 마이클 로젠타르가 말하는 부분입니다.
병 때문에 몸이 많이 마르고 쇠약해졌는데, 그는 결코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그의 죽음이 현실로 나타나니…… 그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에드워드가 불사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도 병마를 극복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며칠 전에 만나러 갔더니, "몸이 쇠약해져서 쓰고 싶은 걸 쓸 수가 없어, 말하고 싶은 걸 말할 수가 없어"라며 대단히 분개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인물이었어요. (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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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1-0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책이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책인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 면에서도 저는 돌궐 님께서 인용해 주신 부분 가운데 특히 앞서 인용하신 대목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독서`가 아닌 활동을 통해서도 나 자신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독서보다 쉬운 일은 아닌 듯해요. 아무 때나 기분 내키는 대로 `걸출한 인물들`을 골라 만나면서도 `나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는 점`은 사실 따지고 보면 어마어마한 행운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가끔씩 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책들을 내 기분에 따라 골라 읽으면서 말이지요...

돌궐 2016-01-04 12:45   좋아요 0 | URL
사실 동서고금 모든 책들의 저자는 모두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가 그들의 사상을 따라가기가 버겁습니다. 그 문장 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조금이라도 맛보려면 더욱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고, 써야될 거 같습니다. 제 소박한 희망이 있다면 위대한 저자의 말들을 `알아먹을 만한 독자`가 되는 것입니다.ㅎ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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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들. 내 삶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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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와 연금술사 - 신화상징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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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저명한 종교학자이며 『샤머니즘』이나 『聖과 俗』, 『종교형태론』 같은 책을 썼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 책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그의 초기 저작 가운데 하나라고 하니까 나중에 다른 책들을 더 읽으면 엘리아데의 학문이 어떻게 변모하고 발전하는지도 알 수 있겠다 싶어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다. 원문과 비교해 본 건 아니지만 번역도 나쁘지 않았고, 내용도 좋았다.

지금까지 나는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대의 대장장이는 지배층이거나 지배층과 밀접한 신분이었으므로 오늘날의 대장장이보다 신분적으로 훨씬 높았다는 정보만 머리에 담고 있었을 뿐, 그들의 ‘정신’이나 ‘종교’가 어떤 형태와 내용이었는지를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웃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이 책은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고대 장인의 내면세계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처음에 나오는 운석과 금속(철·금)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에 대한 해석부터 새로웠다. 운석이나 금속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추출된 물질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이 신성한 물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고 땅이 ‘낳아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원시인들로서는 과연 그렇게 여길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사람은 이렇게 쉽게 수긍하지만, 이런 결론을 얻기까지 엘리아데가 살펴본 문헌들과 연구업적들은 상당할 것이다. 일견 참 쉬워 보이는 일반화를 주장하려면 철저한 증명과 설득이 필요하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들의 작업 속에는 완전한 물질(철, 금)을 만들고자 하는 단순한 욕심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나 제의(祭儀)의 과정이 담겨있었다. 채광 작업이나 야금 기술에도 신성성과 연계하는 의식이 있었으며, 이것은 광산과 산에 관한 동서양의 많은 신화들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철을 제련하는 용광로 신화 중에는 인신제물에 관한 것이 많이 나타난다. 싱-봉가의 기만에 넘어간 문다 족 여자들은 남편들이 불에 타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신나게 풀무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녀들이 모르고 그랬을까 싶다.

 

11장과 12장에서 엘리아데는 중국 도교도나 인도의 요가 행자의 수행을 ‘정신적 연금술’로 해석하였는데, “신체와 심리적 정신적 삶에 대해서 조작을 가하는 요가 행자와 물질에 대해서 조작을 가하는 연금술사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으며 “그 어느 쪽이나 ‘불순한 물질’을 ‘정화’시키고 ‘완성’시켜, 최종적으로는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132)고 하였다. 그러니까 야금술이나 연금술은 경제적·물리적 이익을 얻기 위한 기술만이 아니었고, 종교적 목적을 포함한 제의 또는 비의(秘儀)였다는 주장이다. 연금술은 결국 금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신에게 다가가고, 시간을 지배하며, 물질을 변환시키기 위한 기술이었다는 말이다. 연금술의 목적은 완전한 물질인 ‘금’을 창조해내는 데에 있었고, 자연을 변형시켜 ‘현자의 돌’을 획득하는 것에 있었다. 종교학자로서 제시할 수 있는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연금술사들의 꿈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자연을 변환시켜 ‘시간을 정복’하고 완전한 물질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던 연금술의 이상은 사라지고, 산업화 사회 속에서 ‘노동이 세속화’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 과학은 자연을 세속화함으로써만 성립될 수 있었”으며, “유효한 과학 현상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신성 현현의 소멸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188)

 

산업사회는 기능의례와 관련이 있는 예전적(禮典的) 작업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있을 법한 통과의례를 무시하는 일이든 산업적인 ‘전통’에 위배되는 일이든 간에 어쨌든 공장에서는 그런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188)

 

#

과거의 유물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론과 해석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철과 금을 제련하여 무기와 위세품을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하여 살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지배층의 무기 또는 장신구로서 그 (행위의)결과물들을 규정했을 따름이다.

장인들의 노동과 그들 나름의 긍지에 대해 감상적인 동경을 느낀 적은 있지만, 그들의 작업 ‘과정’에 대해 심리적으로 분석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단편적이고 사전적 정의와 서술에만 익숙하던 내게 엘리아데가 ‘유물’과 ‘기술(技術)’에 대해 보여준 종교적 해석은 매우 참신했으며, 관련 공부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거의 쫓아가기 버거울 만큼 현란한 지적 통찰과 결론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아직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만한 비의적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고대 신화나 그와 관련된 의례 속에는 합리적 인식이 아닌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개념들, 심지어는 시적 영감마저 담겨 있는 듯하다

 


이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지식의 소비자로만 머무르지 않게 다양하고 참신한 해석들을 읽어나가야 한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건 그것을 쓴 저자들과 마주 보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훌륭한 저자와 나눈 대화가 머리와 공책 속에 쌓이면 내 사상과 표현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다. 그러면 훌륭하지 못한 저작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길 것이며, 논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도 저절로 갖추어질 거라고 믿는다.

 

 

광부들이 접촉하게 되는 신성성은 일상적인 종교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훨씬 심오하고 위험한 신성성이다. 그들은 대지모의 뱃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광물학적인 잉태의 신비를 품고 있는 지하세계에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그들은 보다 높은 법칙에 지배받고 있는 자연법칙에 간섭하고 어떤 신성한 비밀 과정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통과의례에서 필수적인 모든 주의를 다하게 된다. 광부들은 인간의 존재를 감싸오는 어떤 신비를 어렴풋이 예감한다. 사실상 금속을 발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흔적을 남겨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채광과 야금 작업에 몸담음으로써 자신의 존재 양상을 변화시켜왔다. 광산과 산에 관한 모든 신화, 거기에 나타난 무수한 요정, 정령, 귀신, 유령 들은 생명의 지질학적 차원에 접근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신성한 존재’의 다양한 현현이다. (62)

대장장이들은 싱-봉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인간제물을 바쳐야 하오."라고 말했다. 자신해서 희생을 치를 사람을 구하지 못하자, 싱-봉가가 스스로 나섰다. 그는 백열 상태의 용광로 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뒤 금, 은, 보석과 함께 다시 나왔다. 대장장이들은 신이 부추기는 대로 그를 따라했다. 아내들은 풀무를 조작했고 산 채로 불태워진 대장장이들은 용광로 속에서 울부짖었다. 싱-봉가는 남편들이 보물을 나눠갖느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라며 아내들을 안심시켰다. 아내들은 대장장이들이 완전히 재가 되도록 일을 계속했다. 이제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여자들이 묻자, 싱-봉가는 그녀들을 언덕과 바위의 정령인 부트로 바꾸어버렸다. (69)

요가, 특히 탄트라교의 하타요가와 연금술 사이의 어떤 일치 현상은 정신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체와 심리적 정신적 삶에 대해서 조작을 가하는 요가 행자와 물질에 대해서 조작을 가하는 연금술사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다. 그 어느 쪽이나 ‘불순한 물질’을 ‘정화’시키고 ‘완성’시켜, 최종적으로는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금은 불사성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완전한 금속으로서, 그 상징성은 불멸의 자유롭고 순수한 정신의 상징성과 합치된다. (132)

리플리Ripley(1415~1490)는 이렇게 썼다. "철학자들은 새와 물고기가 현자의 돌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누구나 그것을 소유하며, 그것은 도처에, 그대 안에, 내 안에, 사물 속에,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저속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도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영생수가 솟아나온다." (169)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시간을 대체하기에 이른 것은 물리학, 화학과 산업의 약진이 지배하는 19세기에 와서이다. 바로 이 19세기에 광산, 탄광, 유전을 점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개발함으로써 그때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로 시간적 리듬을 가속화시키려는 인간의 욕구가 실현되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때에 생명이 광물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비밀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원된 유기화학이 무순한 ‘합성’ 제품의 길을 열게 된다. 그리고 이들 합성 제품이 시간을 소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자연에서 만들어지려면 수천 년이 소요될 분량의 물질을 작업실과 공장에서 제작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또한 몇 개의 원형질 세포 같은 작은 형태로라도 ‘생명의 합성 제작’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과학이 품었던 최고의 꿈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또한 연금술사의 꿈이었던, 호문쿨루스를 창조하려는 꿈이기도 했다.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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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도비 2015-05-1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궐님, 읽으셨군요!
전 이 책을 읽고 많이 놀라고, 한편 속 시원해졌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 1권 제목도 그렇고, 화덕에 아이를 구워 치료하는 마녀 민담이나 연금술로 예수 일생을 표현하는 중세 비의서적 등등,,, 그동안 궁금한 것이 많았거든요. 인간 영혼의 성장, 성숙이라는 점에서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의 이미지가 설화나 문학의 바탕이 되어 있는 경우가 참 많잖아요. 아, 그랬구나, 이 책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돌궐 2015-05-18 11:45   좋아요 0 | URL
껌정드레스 님 덕분에 좋은 책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내용 중에 중국 도사들 관련된 부분은 중국쪽 문헌들을 더 살펴보고 싶게 하더군요. 안 그래도 신선사상이나 방중술이 궁금했었는데 언젠간 한번 공부해 보려구요.ㅎㅎ
 
불교개론 조계종 신도전문교육 필수교재 1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엮음 / 조계종출판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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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불교 사상에 관한 대략의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개설서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 이어서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이르는 불교의 역사와 주요 경전들이 소개되고 있다. 각각의 불교 경전들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저술되었고 그 내용들은 어떠한지 개관할 수 있었다.
수많은 경전의 단편적인 인상들이 계통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마침 적당한 책이었다.

3장 초기불교부터 6장 선의 세계까지 특히 정리가 잘 되어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초록을 작성해 두자.

 

조계종 종단에서 교재로 출판한 것이어서 포교와 교단의 지향점을 염두에 둔 서술이 조금 있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가 맹목적 신앙을 강조하는 신학이 아닌 ˝인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문제 삼다가 결국 인간의 문제로 회귀하는˝(272-273) 인간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밉상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요 여자이다. 아무리 먹기 좋은 음식도 배부른 사람이나 아주 심한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쓰레기나 진배없다. 이와 관련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가 있다. 똑같은 물이 아귀에게는 피고름의 더러운 물로, 물고기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집으로, 사람에게는 마시는 물로, 하늘에 사는 신들에게는 보석으로 가득 찬 연못, 즉 보엄지(寶嚴池)로 보인다는 것이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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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궐님은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저 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어볼 수 있는 불교 서적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아주 쉬운 금강경? 과 같은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책을 봐야할지 잘모르겠어요^~^

돌궐 2015-03-29 12:35   좋아요 0 | URL
불교 개론서에서는 이 책도 괜찮겠고, 조계종출판사의 <부처님의 생애>가 감동도 있고 좋았습니다.
경전 중에서는 <숫타니파타> 같은 초기 경전류를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사찰 문화재에 관해 궁금하시면 명법스님 <미술관에 간 붓다>나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이 좋겠습니다. 불교 건축 쪽으로는 김봉렬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1,2권을 추천합니다.
금강경 관련 쉬운 책은 제가 과문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가 가장 좋다고 들어서 저도 그걸 읽어보려고 합니다.
 
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469
박문현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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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어> 3종(김원중, 신창호, 이을호)을 갖추고 천천히 읽고 있다.

구구절절 무릎을 치는 곳도 있지만 갸우뚱하게 만드는 내용도 있었다.

글이란 것은 그 흐름에 따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자의 논지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래 그런 걸 찬성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따라서 이 사람과 다른 의견을 가진 또 다른 저자가 있으면 함께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마침 유가에 반대했던 묵자에 관심이 가길래 살림지식총서에 있는 짧은 개설서를 찾아 읽어 보았는데, 묵가 사상의 전반적인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묵가는 대단히 진보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권위적이고, 틀과 체계를 중시한 사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묵자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을 조금 옮겨본다.

 

묵자는 유가의 이념에는 나라를 망칠만한 네 가지 정책(四政)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첫째, 하늘과 귀신의 존재와 작용을 믿지 않는 것. 둘째, 장례를 후하게 하고 상기(喪期)를 오래 하는 것. 셋째,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음악을 즐기는 것. 넷째,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묵자는 ‘사정’이 사회를 해롭게 하고 천하를 망치는 것이라 확신하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네 가지 병폐를 고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천지’ ‘명귀’ ‘절장’ ‘비악’ ‘비명’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정’을 포함해 묵자가 유가에 대해 비판하는 사상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가의 비생산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이다. 묵자는 말하기를 “유자들은 예악을 번거롭게 꾸며 사람들을 음탕하고 어지럽게 하고, 오랜 상기 동안 거짓 슬퍼함으로써 부모를 속인다. 운명을 믿어 가난에 빠져 있으면서도 고상한 척하고, 잘난 체하고, 근본을 어기고 할 일은 버리고서 태만하게 편안히 지내며, 먹고 마시기를 탐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게으르다. 그래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빠지고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위험에 놓여 있으면서도 이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묵자는 부잣집에 초상이 나기를 기다리며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유자들을 가리켜 “거지와 두더지, 숫양, 멧돼지와 같다”고 공격한다. 『묵자』의 다른 편에서는 묵자가 유자들을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유가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유자들은 말하기를 “군자는 반드시 옛 의복을 입고, 예스런 말을 써야만 인자(仁者)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묵자는 반문하기를 “이른바 옛 말, 옛 의복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날에 와서 옛것이 된 것이지, 처음에는 모두 새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옛 사람이 입었던 의복과 옛 사람이 사용했던 말은 모두가 새로운 것이었으니 옛 사람은 모두 군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의복은 반드시 군자의 의복이 아니요, 말 또한 군자의 말이 아니어야만 비로서 어진 사람이라는 것인가?”라고 한다.

유가는 예악을 중시해 당연히 복장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묵자는 하는 일을 중시해 형식주의를 배척한다. 따라서 군자가 되고 안 됨에 있어 복장이나 언어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뚜렷한 근거도 없는 유가의 형식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셋째, 유가의 ‘술이부작(述而不作)’에 대한 비판이다. 유자인 공맹자(公孟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창작하지 않고 옛것을 계승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묵자가 이에 대해 “옛날의 훌륭한 것은 계승하고, 지금 필요하고 좋은 것은 창작해야 좋은 것이 더욱 많아진다”고 반박한다. 공자는 “옛 것을 배워 권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하니 속으로 나를 노팽(老彭)에 비기는 바이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공자는 전통을 고집한 보수주의자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비해 묵자는 『詩』와 『書』의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형식적인 예와 악을 반대할 뿐 『시』와 『서』에 대해서는 이것들을 자주 인용하고, “옛 성왕의 사적(事蹟)에 근본을 둔다”고 하여 옛 것을 숭상하면서도 현재 백성들의 이목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문제를 찾아내 개선하고, 마지막으로 실용화하려 한다. 이는 곧 ‘술이차작(述而且作)’이라 할 수 있다.
묵자는 유자들이 “군자는 옛 사람의 뒤를 쫓을 뿐 창작하지는 않는다(君子循而不作)”고 말한 데 대해, 활이나 배, 수레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모두 소인이라면, 그 발명자들의 뒤를 좇아 지금 그것들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소인이라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넷째, 유가의 수동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발분하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으면 일러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즉, 공맹자가 묵자에게 “군자는 자기를 건사하고 기다리다가 물으면 말을 하고, 묻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종과 같은 것이니 두드리면 울리고,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임금이나 부모가 “좋은 일을 하면 칭찬하고, 허물이 있을 때는 잘못을 고치도록 직언하는 것이 어진 사람의 도리”라고 말한다. 묵자는 이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임금이나 부모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묵자는 유가의 공리적인 면이 부족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가가 도덕적인 예와 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 경험적인 지식은 경시하는 태도, 즉 이지적 태도의 결핍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또 유가는 이상을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그 이상에 접근하는 방법에는 비교적 소홀하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묵자는 이지적이고 진보적인 실용주의 원칙에 입각해 유가를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7-21)

 

가만히 앉아 남이 알아주길 기다리고만 있으니 유가들은 죄다 게을러 터졌단다.ㅋ

따지고 보면 그것도 맞는 말 같고... ㅎㅎ

 

왜 춘추전국시대에 유가와 묵가가 서로 경쟁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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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논어를 제대로 파고난 뒤에 도가, 묵가 사상 순으로 진도를 나가야겠습니다. ^^

돌궐 2015-02-09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노장은 읽고 싶은데 묵자까지는 엄두가 안나요.^^;
뭐 죽기전에는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합니다. 읽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