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드러머 걸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치는 작은 소녀는 슬픈 이야기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동일한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땅이 없이 유랑하던 유대인들은 나치의 탄압을 받으며 팔레스타인에 들어왔고,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주해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전수한다. 즉 가해의 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 가해의 전도로 부터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처음부터 적대적이었을까? 이 두 집단은 이 좁은 땅에서 영원히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땅이 없던 민족과 국가가 없던 민족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싸우면서 두 민족은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화해할 수 없는 두 집단은 서로를 죽이며 정당성을 인증받으려 하였다. 두 집단이 폭력에 의존할 수록 그들의 윤리성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윤리성이 부서진 자리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락이었다. 
정당한 대의를 위한 폭력에 응징은 또 다른 정의라고 확신하는 두 집단은 서로 공존했던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풍요로운 올리브와 무화과 그리고 오렌지와 시원한 우물을 공유했던 시절을 애써 부정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 공존의 과거를 부정하고 지금 자신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현재를 강요하는 것이다. 
현재의 강요를 위한 수단은 폭력이다. 이 폭력은 서로에게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두 집단은 그 부당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 폭력 사이에 한 인간이 끼여들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두 집단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폭력이 정당함을 중간자에게 강요하고 주입한다. 중간자는 두 집단 사이에서 갈등도 혼돈도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두 집단의 프로파간더의 부도덕함을 깨닫게 된다. 두 집단의 부도덕함이 극점에 이르렀을 때 중간자는 자신이 북을 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싸우는 자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북을 치는 소녀. 과연 그 북소리는 이쪽을 위한 것이었을까 저쪽을 위한 것이었을까. 
먼 옛날 이 비극이 싹튼 땅에서 한 인간이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었다. 하느님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너의 사랑하는 아들, 너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어린애의 젖을 떼어야만 할때, 어머니는 자기의 유방을 검게 물들인다.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서는 안 될 때, 어린애가 유방에 미련을 갖게 한다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유방을 검게 물들여 놓으면 어린애는 그 유방이 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눈길은 여전히 인자하고 부드럽다. 자식의 젖을 떼기 위하여 이런 무서운 수단을 쓸 필요가 없는 자는 복이 있을지어다."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공포와 전율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용광로 - 유럽을 만든 이슬람 문명, 570~1215 신의 용광로 1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신의 용광로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이야기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아랍의 침공으로 아랍화하면서 전개되는 7백년 간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사실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중세의 역사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솔직히 무지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스페인이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이런 우리의 생각을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수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크게 다루는 두 가지 사건은 푸아티에 전투와 론세스바예스의 이야기이다. 하나는 아랍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진출하려다 저지당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이 피레네를 넘어 이베리아로 진출하려다 패배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이 이 책의 큰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흥망사에서 푸아티에 전투를 유럽을 구한 엄청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번은 만약 유럽이 아랍의 침공에 맞서 푸아티에에서 패배하였다면 유럽의 현재는 코란과 뮤에진의 기도알리는 소리로 뒤덮였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런 가정은 렌 데이턴이 히틀러가 영국 침공에 성공하였다면 어떠하였을까하는 가정에서 쓴 추리소설과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칼 마르텔의 이베리아 침공에서 벌어진 비극을 극대화한 로랑의 노래에 나오는 론세스바예스 사건이다. 칼 마르텔이 푸아티에 승리 후에 이베리아 반도로 침공한 이 사건은 패배의 기록이었다. 그럼데도 유럽 사가들은 이 사건을 비극적 위대한 패배로 기록하였다. 사실 이 사건은 무모함과 무질서의 결과로 이루어진 패배였지만 이를 유럽인들은 극적인 사건으로 왜곡함으로서 현재의 유럽을 규정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유럽인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유럽을 구한 전투로 묘사하고 론세스바예스의 패배를 장엄한 비극으로 설명한다. 여기에는 타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무찌르고 살륙하고 승리하는 유럽만이 존재한다. 론세스바예스의 패배는 제국주의 시대의 카르툼의 고든인 것이다. 야만에 대적하는 문명의 숭고한 일시적 패배.  

저자는 이 두 사건을 제시한 다음 용광로라는 주제로 접근한다. 과연 아랍과 유럽은 푸아티에의 승리과 론세스바예스의 승리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저자는 아주 간단하게 답하고 있다. 유럽은 극대화 했고, 아랍은 무시했다고.  

유럽이 푸아티에의 전투를 극대화하면서 인종의 용광로인 유럽대륙을 기독교화 하는데 어떻게 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무자비한 살륙과 복종만을 강요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 론세스바예스의 승리로 유럽의 진출을 저지한 아랍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였을까. 그것은 콘비벤시아convivencia-협동-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유럽보단 아랍이 자신들의 도가니에 모든 것을 융합시켰다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유럽은 이 시기에 프랑크의 칼 마르텔이 중부유럽의 이교도를 개종하던 야만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미래의 제국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아랍과 유럽의 대결에서 아랍의 콘비벤시아는 여러곳에서 드러난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후에 보여준 관용적인 태도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보여준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실 아랍의 콘비벤시아가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고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면 현재의 유럽은 피레네와 라인강 사이에 존재하는 미미한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번역자가 말했듯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학설이 아니라 소수가 주장하는 새로운 학설이다. 그럼에도 그 호소력은 현재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이 순간 큰 호소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1-30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흑단 - 카푸시친스키의 아프리카 르포 에세이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지음, 최성은 옮김 / 크림슨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아프리카의 비극은 그 다양함과 복잡함을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이 50여개의 단순한 국경선을 통해 획일화 시킨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아프리카 대륙이 강력한 정치력이 있어 유럽이나 미국처럼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체제-이를테면 아프리카합중국USA-를 지향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다. 솔직히 아프리카의 역사는 사하라 이북의 북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문자를 가져본 적이 없djT다. 그러기에 그들의 역사는 구전의 역사이며 기억의 역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인들의 관점이 개입되었을 때 아프리카는 무지한 세계이며 검은 땅이고 교화의 대상이 된다. 이는 문자가 정신을 압도한 유일한 예외라할 수 있다.  

흑단의 시작은 가나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한 국가이다.(그 이전 거대한 대륙의 독립국은 에티오피아, 리베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뿐이었다. 나머지 땅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의 소유였다.) 가나의 국기에는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검은 별이 그려져 있다. 그 검은 별은 독립의 영웅 응크루마의 원대한 꿈이면서 아프리카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사그러졌고, 별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프리카의 가장 마지막 독립국인 에리트리아에서 끝난다. 저자는 여명의 새벽에 바오밥나무에 기대어 아프리카의 히미함을 바라본다. 바오밥 나무의 전설을 아는지... 하늘의 신이 그 나무를 거꾸로 심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그래서 바오밥 나무의 윗부분은 뿌리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가나에서 시작해 에리트리아서 끝나는데 마치도 바오밥 나무처럼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 에리트리아의 그 히미한 여명은 아프리카의 시작을 알리는 가나의 그 강렬함과 희망 그리고 열정과 비교가 된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시작과 희망, 좌절을 그리고 변질되는 문명을 서구인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의 눈으로 세심하게 그려간다. 비아프라, 콩고에서 드러나는 서구제국주의의 원죄와 리베리아에서  흑인 아프리카의 좌절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아프리카는 원래 무지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었을 뿐이다. 저자는 이 왜곡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리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 왜곡을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 자신도 알고, 배우고, 전진해야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아프리카의 좌절이 서구 제국주의라고 규정한다면 아프리카는 원래 고유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골이 되고 말테니까, 즉 서구의 고정관념인 암흑의 대륙이라는 그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원래 아프리카는 그곳에 태초부터 있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게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존재방식을 우리들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무지하게 생각될 뿐이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아프리카는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뼈와 살과 피를 절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결코 포기되어진 적이 없다. 그 본질은 지금도 그 대륙에 흑단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리네 디트리히, 세레나 허...!!!...???

검은 벨벳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무대, 담배연기 자욱한 무대, 조명이 검은 벨벳커튼을 비추면 실크햇에 연미복, 그리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가수가 검은 벨벳커튼을 가르고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릴리 마를렌'을 부른다.  

밝은 무대, 조잡한 커튼, 그 빨강색이란... 조명도 없다. 다만 사회자가 말할 뿐이다. '전직 에로 배우 세레나 허...'빨간 커튼이 갈라지고-성적인 의미일까-베티붑처럼 차린 타이트한 가수가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목소리로 '어린 송아지가..'를 부른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윈치 않아도 하나의 '섹스'로 다가왔다. 그것은 갈망이었고, 환상이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이 원한다해도 결코 '섹스'의 이미지는 갖지 못할 것이다. 세레나 허의 신음 소리는 섹스라는 단어 대신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단어 하나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섹스'가 된다.   

마리네 디트리히와 세레나 허를 가르는 경계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또 하나의 절대적인 문구가 읊어진다. '두려움!!!!'.  

릴리 마를렌은 다양한 형식으로 불리워졌다. 애닮은 곡조, 군가의 행진곡, 폴카, 왈츠... 등등등. 이렇게 다양하게 릴리 마를렌이 불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 다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두려움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상징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하나로 왜곡 혹은 착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두려움은 하나의 상징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와중에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섹스'였을까? 그래서 마를렌 디트리히의 목소리를 그리워한 것일까? 그것밖에 없을까?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김세원의 밤의 플렛트 폼'이란 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늦은 밤 김세원씨의 목소리는 우리 군바리들에게는 하나의 '수줍은 섹스'였다. 무엇 때문에... 여성의 목소리 하나가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레나 허의 목소리는 디트리히와 유사하지만 듣는 사람을 파괴시킬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을 개그화함으로서 '섹스' 혹은 '어머니'의 상상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트리히는 '섹스'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그 자체를 무화시키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 혹은 남성의 영원한 우상인 '구원의 여인'을 구현하고 있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원치않았지만 릴리 마를렌을 통해서 하나의 아이돌로 해석된 것이다. 디트리히는 마돈나이고, 창녀이며 어머니이고 여동생이며 애인인 것이다. 그러나 세레나 허는 우리의 확대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을 비우지 않고 특정한 상상으로 왜곡해서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레나 허를 보면서 왜곡의 잔상을 읽고 그것 때문에 웃는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을 무화함으로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리스 신화에서 비극의 시작은 항상 인간의 의지 때문이다. 신의 손길로 그 인간의 운명이 결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든지 피해보려는-혹은 이겨보려는  인간의 의지는 결국 비극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보자. 천상의 신탁은 '라이오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고 한다. 라이오스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죽이지 않음으로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시종은 '측은지심'에 아이를 죽이는 대신 뒤꿈치를 꾀뚫어 묶은 다음 버린다. 신탁의 운명은 이 아이가 짐승의 밥이 되는 대신 목동부부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길러진다. 오이디푸스가 성장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듣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그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목동부부를 떠난다.  

오이디푸스에게 이 떠남의 결행은 신탁의 거부라는 명백한 의사표시이며 신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거부를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간 의지의 표현이 바로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교만'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나 테베로 가는 도중 한 노인을 만나 시비가 붙었고, 죽이고 만다. 그 노인이 바로 자신의 부친인 라이오스였다. 이 시대는 이렇게 사소함으로 살인이 저질러지는 시대였다.  그리고 스핑크스와의 대결에 승리한 다음 테베로 들어가 영웅이 되어 미망인이된 요카스타와 결혼한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의지와 용기가 신의 신탁을 완벽하게 이루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확실하게 시종이 오이디푸스를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번 양보하여 목동부부가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너는 우리의 아들이 아니라 주워온 아이이다. 비극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어짜피 비극은 카타르시스라고 했던가? 우리가 금기시하는 것이 비극이라는 장르속에 녹아들어 대리 만족을 이루는 것일까?  금기에 대한 배설이 어쩌면 비극의 심층 저 밑바닥에 있는 것이 아닌지... 

이끼의 천용덕은 이런 의미에서 그 뿌리가 그리스 비극에 접목되어 있다. '두려움이 너를 구원하리라'라는 그 단어는 이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의 세계에서 모든 영웅들은 두려움을 거부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야만스러우며, 욕정적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나약함의 표시일 뿐이다. 헤라클레스는 독이 묻은 옷을 입고 뜨거움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허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하인에게 장작을 쌓으라고 명령한 다음 스스로 그 장작위에 누워 불을 당긴다. 그에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오이디푸스 역시 마찬가지 이다. 그에게 모든 진실이 밝혀지자 그는 두 눈을 뽑고 딸에 의지한 채 길을 떠난다. 그 떠남은 순례의 혹은 참회의 떠남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 떠남을 통해 도시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그 떠남 역시 영웅적 행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용덕은 류목형이 죽은 다음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 순간 그는 영웅이 되려한다. 그 소소한 고집으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그동안의 모든 행위에 대한 과거가 드러난다. 천용덕은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물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영웅의 행위가 아니라 보조자의 행위이다. 영웅은 자신의 움직임으로 주변을 제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끼에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류목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된 '댓가'라는 단어 이다.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부탁을 통해 '철의 시대'에는 진정한 영웅이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와 유사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는 없다는 사실... 

결국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댓가를 받아들인 그 순간 영웅이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 원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그는 류목형이 한 말을 그대로 자신의 수하들에게 사용한다. '두려움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것은 신의 주먹 혹은 섭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용덕은 해석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을을 감시하고 지배한다. 그의 집 담장에서 보는 마을의 모습을 보라. 마치 거대한 탑 , 아니 거대한 감옥의 감시탑 같지 않은가? 천용덕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왕국에 구현할 수 있었다. 류목형이란 대리자를 통해서.  

그리고 류목형이 죽은 순간 그는 그렇게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신-류목형-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을 짖눌러왔던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감히 그는 그림속의 용에게 눈을 그려 넣어 하늘로 올려보내려 한다. 그 사소함이 그를 밑바닥으로 내리친다. 악마가 아니라 신은 바로 천용덕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탐욕을 버리고 어쩌면 오이디푸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시종이 자신의 인간적 잣대로 그것을 거부하였을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처럼, 천용덕 역시 사악함 그 자체로 남았다면, 그것은 완벽한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그만 틈으로 인해 '이끼'는 비극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악마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