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 - 전예원세계문학선 316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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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5년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런웨이 트레인runaway train이란 영화를 통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존 보이트가 설원을 달리는 폭주기관차에 서서 죽음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짐승에게도 자비가 있는데 그것도 없는 나는 짐승도 아니다'라는 대사가 자막으로 나오며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라고 나타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뜻이 좋아 리처드 3세를 사서 읽으며 이 대사를 찾았다. 대사는 2장의 헨리 6세의 장례식에서 미망인 앤과 리처드가 나누는 대화의 한 구절이다. 번역본에는 난 동정심같은 건 전혀 없소. 그러니 짐승도 아니지.라고 되어있다. 영화속의 장엄한 번역과는 차이가 있는 것에 감흥이 많이 식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차이가 리처드 3세의 진실이 아닌가 싶다. 역사 속의 리처드 3세와 희곡속의 글로스터 공작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희곡 리처드 3세는 철저한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사 속의 리처드는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승리자였음에도 관대했고 정의로웠다. 그 관대함은 배신으로 보답받았고 정의는 불신으로 보상받았다. 그는 화합을 추구했지만 철저하게 배신당하였고 보스워스의 벌판에서 마지막으로 인간 세상의 참 모습을 보아야 했다. 그 결과는 패배였고 죽음이었다. 그는 죽은 뒤에 승리자인 튜더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인 헨리 튜더에 의해 시신이 능욕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헨리는 리처드의 시신을 사냥감처럼 말 등에 옷을 벗겨 묶어 끌고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국의 왕이었던 사나이가 말 등에 벌거벗은 시신으로 묶여 요크 시내로 들어갔을 때 시민들은 죽은 국왕에 대해 예의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와는 다른 리처드의 모습은 이언 매켈런이 주연한 현대적 형태의 리처드 3세에서 더 그럴듯하게 보인다. 약간 굽은 모습과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기형의 리처드, 교활함과 시기심 그리고 권력에의 의지는 세익스피어가 그리고자 했던 리처드 3세의 변형을 잘 보여준다. 리처드 3세는 아마도 권력에 의해 가장 심하게 왜곡된 역사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지 아이 제인이란 영화에서 시작부에 교관이 훈련병들을 다그치며 하는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라는 말도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시 self-pity라는사실이다. 시가 가정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특수부태 훈련소의 교관 입에서 튀어나온 다는 그 자체도 어찌보면 스테레오 타이프에 대한 왜곡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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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
조너선 펜비 지음, 노만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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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介石, 장개석, 장카이섹, 장제스. 그의 이름 표기 만큼이나 복잡한 인물이었다. 소금장수의 유복자로 태어나 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Generalissimo가 되고 결국 최후의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 그에 대한 평가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집결된다. 그의 경쟁자 모택동 역시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되듯...

장개석의 성공과 실패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공간의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소유하고자 한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는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1937년 상해 전투는 장개석의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군이 석 달 안에 중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하자 '그렇다면 석 달 만 싸워보자'고 담담하게 말하며 일본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상해에서 국민당군의 집요한 저항은 일본을 놀라게 했다. 이에 일본은 남경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저항의지를 꺽기위해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의 이런 여유로움과 집요한 저항은 무수한 중국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승리자가 되게 하였다. 

그가 공간보다 시간에 집착했던 이유는 전쟁 후에 발생할 중국의 분할 때문이었다. 연합국 -미국과 영국-은 중국도 독일과 베트남, 한국처럼 양분할 뜻도 있었다. 소련 역시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강대국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기 위해 양자강을 중심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도 용인할 의지가 있었다. 장개석은 미국과 소련의 이런 의중을 알고 있었기에 줄기차게 저항하였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동안 중국의 군 지휘권을 빼앗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개석은 노련하게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중국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장개석은 미국의 원조는 받되 중국에서의 전쟁은 중국인이 수행한다는 대국적인 원칙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결과 중국에서의 전쟁은 미국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8년 동안 도망 다니기 바빴다고 자조하던 중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군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일본군과 전쟁을 하면서 '하나는 본전이고 둘 이면 남는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 후에 만주에 진주한 소련에 대한 태도 역시 장개석 다운 선택이었다. 소련의 만주 점령을 희석시키기 위해 모택동의 공산당과 평화협정을 시작하며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양분하려는 기도를 좌절시켰다. 장개석은 소련의 의중을 알때까지 만주에서 공산당과 전투를 하려하지 않았다. 소련의 의중을 모르고 전쟁을 벌일 경우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그곳을 공산당에게 넘겨준다면 중국은 분할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런 혜안은 정확했고 장개석과 스탈린이 협정을 맺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를 하자 그때서야 공산당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정점이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을 점령한 것이었다. 모택동 역시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과감히 연안을 버리고 장개석과 정면 대결을 선택하였다. 장개석은 분할보다는 하나의 중국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은 대만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대단치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능력보다는 충성심을 우선으로 한 용인술을 펼쳤다. 이는 능력만 있다면 실수도 적당히 용인한 모택동과 다른 점이었다. 장개석은 현실을 장악하려 했지만 모택동은 미래를 움켜쥐려 했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천하를 차지한 뒤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제왕의 의지이기 때문에 과정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현실을 장악해야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장개석은 모택동에 뒤졌지만 모택동 역시 장개석이 그토록 집착했던 하나의 중국이란 화두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개석의 이런 심중을 최대한 이용하여 중국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이 어느 정도 무능하고 부패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단점의 뒤에는 결코 분할 될 수 없다는 중국이라는 화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중국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는 멀리 보는 자가 승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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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과 도끼 1 - 해석 위주의 러시아 문화사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48
제임스 빌링턴 지음, 류한수 옮김 / 한국문화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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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과 도끼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의 돈키호테가 무모함과 침울함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심信心으로 도배되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위치한 러시아의 바보 이반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두 나라 모두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스페인은 피레네 산맥 너머 저쪽은 아프리카라는 비아냥을 받아야 했고 러시아는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두 나라는 유럽이 갖지 못한 광기와 신심을 보유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로마가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를 가졌다면 서쪽 끝의 스페인은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가졌고, 동쪽의 러시아는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를 가졌다. 스페인은 야고보를 선택하므로서 영원히 서자庶子의 위치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안드레이를 선택함으로서 다른 로마, 제3의 로마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콘과 도끼 1편은 바로 이 야만의 러시아가 광기에서 신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자신이 러시아이면서 유럽이기를 바랬다. 그 이중성은 종교를 상징하는 이콘과 러시아의 심성을 대표하는 도끼로 표현했다. 도끼는 언제나 광할한 동쪽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고자 하였다. 이 도끼는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야만이었다. 세련되지 않고 거친 러시아는 유럽이 되기 위해서는 교화되어야만 했다. 그 교화의 과정이 이콘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콘을 선택하면서도 도끼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대표적 건축물인 양파돔의 건물이 바로 그 타협점의 산물인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이 성령의 불꽃을 어둠 구석 구석까지 퍼지는 빛으로 볼 때, 타오르는 주님의 열정으로 보았다. 그 열정의 표현이 양파돔인 것이다. 

이 책은 너무 방대하여 어떻게 읽고 요약하기가 심히 곤란하다. 결국 느낀 소감을 간략하게 적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것으로 내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전체를 관통하는 러시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읽다 보면 주석을 따라가는 것 조차 벅찰 때가 있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독서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요즘 다시 이 책을 뒤적거리며 이곳 저곳을 드러다 보다 다시 간략하게 소감을 적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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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양장본)
베르코르 지음, 조규철 옮김 / 범우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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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마지노선을 무력화 시키고 벨기에를 돌아 프랑스를 2주 만에 굴복 시켰을 때 프랑스인들은 독일의 반칙을 저주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무력함을 한 없이 슬퍼했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라인 강 저편의 독일은 야만인이었고 문화적 열등생이었다. 프랑스인들은 문명은 결코 야만에 굴복할 수 없다고 자신들을 합리화 시켰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우월감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었다. 독일은 승리했고 프랑스는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패배한 프랑스는 독일의 승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독일의 군화 아래 짖밟혀 있는 프랑스가 있을 뿐이었다. 독일은 끊임없이 프랑스를 달래려고 하지만 프랑스는 거절하였다. 독일은 프랑스의 키스를 받아야 인간으로 환생 할 수 있는 야수bete이기에 프랑스를 신사적으로 다루려 노력하였다. 독일의 끊임없는 구애는 프랑스를 조금 흔들리게 한다. 하지만 독일의 구애가 뜻하는 저쪽의 진실을 알게 될 때 프랑스는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독일 장교 베르너는 끊임없이 저 옛날 독일과 프랑스가 하나였던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음악과 문학을 이야기 한다. 베르너는 정말로 프랑스와 독일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진실성은 침묵으로 일관하던 화자와 그의 조카 딸의 마음을 희미하게 흔들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치묵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려 할 때 베르너가 파멸하고 만다. 베르너는 독일의 정책이 자신이 믿었던 것처럼 독일과 프랑스의 진정한 협력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저한 파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사실을 느꼈을 때 베르너는 그 동안 자신이 주장했던 음악과 문학과 역사의 동일성이란 진실이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전초가 아니라 프랑스의 완전한 굴복을 위한 함정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베르너는 자신의 선의가 프랑스인의 파멸에 일조함을 알게 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것은 러시아 전선을 자원하는 것이었다. 베르너가 러시아로 가기 위해 그동안 지냈던 프랑스 인의 집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던 조카가 나즈막히 인사한다. 그 나즈막한 울림은 히미하지만 인간에 대한 마지막 믿음을 확인하는 표시인 것이다. 바다는 깊고 넓다.표면이 흔들리고 솟아오를 때도 심연 저 깊은 곳은 언제나 잔잔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 깊은 바다의 침묵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진정한 저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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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15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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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은 분량 만큼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고래잡이의 이야기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소설 전체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소설은 부분이 전체를 갉아먹은 대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멜빌의 시대에 고래는 풍부한 자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래는 멸종위기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고래는 아메리카 대륙의 들소처럼 잡아도 잡아도 고갈되지 않는 자원처럼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고래에 대한 경외감은 없다. 오직 고래에 대한 정복욕만이 있을 뿐이다. 정복은 확장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들소를 바라보는 인디언과 백인의 시각이 다른 것처럼 고래를 향한 아메리카의 벌거벗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디언에게 삶의 자원인 들소가 백인들에게는 모피 한 장으로 계산된다. 고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다의 제왕이었던 고래는 해체되어 윤활유나 등불의 기름으로 변환될 뿐이다. 이 순진한 바다의 제왕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오직 희생의 원인만을 제공해야 할 뿐이다. 결국 백색의 공포로 과장된 이 동물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아메리카 미국에게 바다는 대륙과 마찬가지의 세계였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대서부란 영화를 보면 해양 사나이 그레고리 펙이 서부에 도착하여 광할한 서부를 마차로 달릴 때 마부가 물어본다. 이렇게 크고 광할한 곳을 본 적이 있냐고. 마부의 자부심은 신사가 봤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마부는 묻는다. 어디냐고. 신사는 대답한다. 바다라고.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백인들이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열차로 상징되는 과학을 강조하였다. 이 과학 앞에 인디언과 들소는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백인들은 과학으로 대륙의 전설인 인디언과 들소를 도륙하려고 작정하였다. 이 결과 백인이 들어오기 전 6천만 마리가 넘던 대륙의 들소는 1천 마리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들소의 학살로 이를 주식으로 삼던 인디언들은 저항 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덤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래 역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확장해 나가던 아메리카에게 꼭 필요한 대상이었다. 기계를 돌리고 거리를 밝히는 문명을 위해 바다의 전설은 사라져야만 했다. 다만 이 광할한 바다에는 인디언이 없었기에 이를 대체할 증오의 표적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흰색으로 대표되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거대한 흰색의 공포를 정복해야만 하는 필연은 과학과 문명 앞에서 다시 각색되어야만 했다.

산업사회가 성숙되어 가면서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윤활유는 고래기름과 야자유를 거쳐 석유로 이어지게 되고 유럽의 식민주의는 완성되어 간다. 자본주의의 완성에서 희생자는 고래가 아니다. 고래는 문명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이 도구를 얻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는 이스마엘로 대표되는 모험가들이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모험가는 역설적으로 바다의 역습에서 식민지 세계의 원주민이 만들어 놓은 관을 구명보트 삼아 살아남고 다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것이다. 불행하게도 순환의 끝은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이다. 이 탐욕의 확장은 고래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래-황마-커피-코코아-면화-석유.... 모든것의 끝은 언제나 "나의 이름은 이스마엘(방랑자)이다"로 끝나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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