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권력의 역사 - 인간 문명 그리고 시간의 문화사
외르크 뤼프케 지음, 김용현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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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권력이라는 등식은 약간 생소하지만 학교에서부터 '시간은 금이다'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에게 히미하게 그 말 뜻이 무엇인지 다가올 수 있다. 

시간은 공간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을 관통하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시간이란 개념은 막연하게 아주 먼 옛날부터 중요한 것이었다. 원시인들도 무리지어 동굴 속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그 동굴을 지나가는 시간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춥고-따스하고-더워지고-다시 추워지는 순환의 사이클을 그들은 가장 먼저 느낀 시간의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아기-젊은이-늙은이로 변해가다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 시간은 영속하지만 자신들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추상적인 시간이 개념적인 시간으로 바뀌게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유럽에서는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명확한 수의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초를 이용한 시간계산이나 물 또는 모래를 이용한 시간의 분류는 시간을 양(量)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양에서도 왕조가 바뀌면 가장 먼저 역(曆)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일년의 초하루를 정하고 제사의 시간을 정하는데 이전 왕조의 역법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법을 갖추는 것이 바로 왕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시간의 등식화를 가장 원했던 집단은 종교세계였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종교가 되면서 시간의 개념은 아주 중요한 것이 되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라틴어를 기반으로 코르도바에서 크라코프가지 웁살라에서 예루살렘까지 하나의 종교를 기반으로 하나의 종교적 세계를 형성하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였고 종교의 전례역典禮曆은 통일되어야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날짜는 명확해야만 했다. 이 날짜는 온 유럽이 동시에 함께 찬미하고 슬퍼하고 기뻐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끊임없이 케사르가 만든 태양력의 달력을 더욱더 정교하게 수정하여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대체한 것은 이런 필요에 의해서였다. 즉 시간을 장악한 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런 종교정치적인 시간의 역사는 종교개혁을 통해 큰 변화를 격게된다. 로마를 반대하는 집단은 로마의 력법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역법을 고수하였다. 특히 로마와 대립각을 세웠던 정교회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역법개혁을 거부하고 이전 케사르의 역법을 준수하고 있었다. 이 양자간의 차이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역법을 개혁할 때 정교회가 동참하지 않으면서 라틴 세계와 그리스 세계는 11일의 날짜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적인 것은 종교개혁 이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에는 정치적인 면에서 시간의 통일성이 중요했다.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해양강국들은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위도는 적도를 중심으로 위아래로 정확하게 나누어지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경도는 권력의 문제였다. 어디를 중심으로 경도의 시작을 나누느냐에 따라 시간은 변화무쌍하게 요동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전쟁사에서 유명한 과달카날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솔로몬 제도가 위치하는 것에 큰 의문을 느끼기도 한다. 왜 예루살렘과 동떨어진 곳에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의 이름이 붙여졌는지. 솔로몬 왕은 아기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아이를 정확히 둘로 가르라는 판정을 내린 왕이었다. 대항해 시대를 처음 연 스페인의 탐험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곳을 솔로몬 제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여기가 자신들이 떠난 곳에서 정확히 지구의 반이 되는 180도 되는 지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정확한 반보다 더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험난한 작업은 제국주의의 선봉장인 영국에 의해 완성되면서 시간은 정확하게 인간을 시각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 결과 영국은 지구의 반 이상을 식민지로 삼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형성하였다. 

시간의 권력이 종교에서 경제 혹은 정치로 넘어가면서 이 시간은 엄격한 기준을 갖게 되었다. 시간의 엄수는 바로 규칙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든 관료들은 정시에 출근하여 정시에 퇴근해야 했고, 노동자들 역시 시간에 맞춰 자신들의 일을 해야만 했다. 즉 시간을 통제하는 자가 권력의 실세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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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눈물을 떨구다 - 성서 속에 나타난 매춘과 종교적 순종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체스터 브라운 지음, 이원경 옮김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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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에서 아벨과 카인으로 시작하여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비범한 아들, 통상적으로 돌아온 탕자로 알려진 우화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신은 역사의 명령에 반항하는 이들을 흠모하고 아끼며, 신이 그들을 위해 창조한 질서를 과감히 거슬러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자들을 좋아한다'는 이스라엘 철학자 요람 하조니의 말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섯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탕자의 이야기를 배치하여 '네 동생은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살아있느니라. 반면 너는 불만을 억누른채 복종함으로써 죽어있느니라. 시키는 대로만 할 줄 아는 맹목적 숭배자를 과연 주님께서 원하실 거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아버지의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이 말을 실천한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이 창녀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매춘보다 간음을 더 큰 죄악으로 보았다. 그래서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반면 현대의 관점에서 간음, 보통 간통이라 부르는 행위는 매춘이란 행위보다 도덕적으로 덜 비난 받는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아예 간통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춘을 하다 걸리면 법률적 제재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에 이런 텍스트를 이해할 때 현대의 잣대로 그 시대를 검토하다 보면 많은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신은 한분이지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여러갈래이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세상이 하나의 빛으로 모아지는 것을 주목했다. 하지만 성토마스는 하나의 빛이 다양하게 지상으로 투사되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하나의 태양을 이렇게 다르게 보았던 것이다. 이 책도 보고 읽다보면 기존의 종교적 해석과 다른 것이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과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절대자를 찾는 다양한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하지만 진실로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해석을 통해 하나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이라 하겠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호르헤 수사는 예수님은 결코 웃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그 단정을 통해 예수님이 웃지 않았기에 우리의 즐거움은 죄악이라고 판단한다. 정말일까? 루카 19장 1-10의 자케오 이야기를 보자. 키가 작은 자케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앞질러 달려나가 돌무화가 나무에 매달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아마도 예수님도 그런 자케오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렇게 행간을 통해 우리는 성 베르나르가 말했듯이 거인의 어께에 올라타고 더 멀리 더 높이 볼수있는 것이다.

이 책도 보고 읽으며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하고 내가 알았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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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의 이콘 신학
레오니드 우스펜스키 지음, 박노양 옮김 / 정교회출판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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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티나에서 태동된 그리스도교는 에우로파가 황소를 타고 보스포로스를 건넜듯이 사도들을 통해 유럽세계로 전파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아드리아해를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토착화된다. 서구 유럽의 가톨릭과 동부 유럽의 정교회가 그것이다. 이 두 집단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구원자를 믿으면서 자신들을 부르는 명칭조차 다르게 정착하였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집단은 자신들을 보편적인 종교집단이라 해서 Catholic으로 불렀지만 동방의 정교회는 정통이란 의미의Orthodox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명칭부터 상이한 두 집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미사의 형태나 미사를 드리는 성전의 형태도 아주 상이하다. 가톨릭이 성전의 중심이 감실龕室이라면 정교회는 이코노스타시스로 양분되는 저 너머의 祭壇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코노스타시스란 생소한 단어가 나오는데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성상벽聖像壁, 성상 칸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코노스타시스는 말 그대로 구세주와 성 마리아와 성인, 성녀들의 화려한 성화가 들어차 있는 공간이다. 이 벽을 중심으로 정교회의 성전은 하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분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콘은 구세주인 하느님께서 자신이 계시던 곳을 벗어나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으로 나올 때 취했던 우리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제임스 벌링턴, 이콘과 도끼에서).

그러므로 이코노스타시스는 우리가 지상에서 천상을 바라보는 창문이면서 거룩하게 변용된 하느님의 외적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바로 이콘은 하느님의 단일함이 여러 갈래의 빛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듯 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방의 가톨릭은 이런 이콘에 대항하여 성당의 외부 창을 형형색의 스테인드글래스로 장식했는데 그것 역시 이코노스타시스와 같은 의미라 하겠다.

정교회와 가톨릭은 서로 외형적인 모습이 다르다 해도 이콘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본질이 동일한 것이란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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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문서로 본 조선과 일본의 의사소통 경인한일관계 연구총서 46
이훈 지음 / 경인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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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외교의 기본은 사대외교와 교린외교였다. 사대외교는 조선과 중국(명과 청)과의 외교이고, 교린외교는 조선과 일본, 유구와의 외교였다.

조선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말 그대로 책봉을 바탕으로 한 사대외교였기에 조선이 중국의 아래에 위치한 외교였다.

반면 교린 외교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국가간의 대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러나 일본은 고대로부터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은 국가였기에 조선으로서는 일본과의 외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일본의 실정막부의 족리의만이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음으로서 비로소 조선과 일본의 외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은 5백여년 간 지속적인 외교를 펼치게 된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통신사로부터 시작되는 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 펼쳐진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생략되어 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국가 대 국가로서 외교를 펼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동아시아에서 자신들과 외교관계를 튼 유일한 왕조였기에 이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하려 하였다.

조선 역시 전반기 교린외교라도 일본을 하대한 기미교린에서 일본의 무력을 실감하고 난 이후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있음에도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국격을 최대한 조선과 맞추려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명청 교체기 속에서 청에 굴복하는 최대의 국치를 맛보았지만 일본은 덕천가강의 강호막부가 시작되면서 국가적 자신감에 차 있던 시기였다. 일본은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들은 당唐 이후의 중국 문물을 그대로 보전한 국가라는 소중화주의가 대두하였다. 즉 일본은 한당漢唐 이래 끊어진 중국의 고유한 전통을 그대로 보전한 국가라는 자부심이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은 명의 멸망과 청으로부터의 굴욕을 받은 이후 조선만이 명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느 소중화小中華로 침잠하였다. 조선이 명의 후계로 자처하는 사이 일본은 일본, 인도, 중국이라는 고대 세계관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았고, 네덜란드와의 접촉을 통해 일본, 오란다, 중국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교린을 바탕으로 외교가 전개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직접외교가 아니라 대마도를 통한 간접외교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리고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여 덕천막부가 있는 강호까지 통신사가 간 반면 일본은 부산과 동래의 왜관에 한정하여 외교를 펼쳤다는 점이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조선국왕과 일본막부의 장군간의 외교가 아니라 막부의 지시르 받는 대마도주가 외교서신을 조선의 예조에 보내는 형식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형식은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조선과 일본의 유일한 외교적 통로였기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런 간접 외교방식은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막부가 물러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조선국왕과 일본 막부의 장군간의 외교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장군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 위에 형식적인 천황이란 존재가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자와의 외교관계를 지속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막부장군을 축출한 뒤 천황의 통치체제가 실현되면서 조선국왕과 일본천황의 관계가 재 설정되어야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이런 조선과 일본의 후반기의 여러 외교 문제를 외교서식을 통해 재미있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처럼 복잡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우리는 지금 사대외교를 하고 있는 것인지 교린외교를 하고 있는것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외교란 자신의 자만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하자 일본은 조선을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한쪽 벽을 허물었다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실행하려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과 일본 모두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후계자란 소중화사상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는 점은 재미있는 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일본은 소중화를 통해 근대적 세계관으로 나아간 반면 조선은 소중화속으로 자신을 침잠沈潛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 복잡하고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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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서 문명텍스트 38
우사마 이븐 문끼드 지음, 김능우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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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서는 제목처럼 심오하고 어려운 책이 아니다. 오히려 재미있게 읽히는 한 개인의 역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전 레바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아민 말루프는 유럽 중심의 십자군 전쟁의 시각을 아랍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아민 말루프는  우사마 이븐 문끼드라는 저자의 책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가 인용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아민 말루프는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에서 실제로 아랍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지금까지 유지해온 유럽 편향적인 십자군 전쟁의 맹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우사마 이븐 문끼드의 이 책 역시 서구 편향적 십자군 이야기에 맛을 들인 우리들의 시선을 교정해 줄것이다.

성찰의 서는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시기에 태어나 쿠르드의 위대한 영주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해방하는 것을 본 인간의 이야기이다. 십자군은 이름처럼 종교적으로 거룩한 전쟁이 아니었다. 탐욕과 배신과 위선이 십자군의 실체였다.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의 행복을 무너뜨린 십자군의 실체는 예루살렘이란 상징으로 인해 너무도 왜곡되었다. 실제로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은 성지의 탈환이 아니라 피의 기록이었다. 그 무모한 학살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해방했을 때 보여준 아랍의 관용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예루살렘 함락의 비극은 이 당시 태어난 우사마를 비롯한 동시대의 아랍인들에게 서구의 야만성을 각인시켰다.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거룩한 성전에 자신을 바쳤다. 하지만 그 당시 아랍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다.  분열된 아랍세계는 단일한 지도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독립적으로 유럽의 침입자들과 싸우거나 유대를 맺어야 했다. 우사만의 기록에도 나타나듯 유럽의 병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용맹스런 존재였다. 이런 존재를 분열된 아랍은  감당할 수 없었다. 

우사마가 이런 분열된 아랍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언제나 한결같다.  '알라의 위대함'이 그것이다. 아랍이 이렇게 된 것은 알라의 좀 더 큰 뜻이 작용하기 위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즉 알라의 의지에 의해 자신들의 성지를 야만족에게 빼앗겼다면 그 역시 알라의 의지에 따라 다시 해방시킬 것이란 믿음이 그것이다. 그의 이런 관점은 인생을 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알라의 뜻이 그러하다면 죽을 수밖에 없고 아니라면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살고 죽음의 세계를 떠나 언제나 알라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이책은 이런 인생의 교훈적인 것 외에도 당시 유럽 기사들의 행태나 군사전술, 아랍 세계의 뛰어난 문명수준과 유럽의 후진적인 모습, 그리고 이국 땅에 눌러앉은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랍 세계에 동화되어 가는지를 담담히 운명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사마는 훌륭한 전사이면서 문장가였다. 그는 이 책을 기술하면서 아랍의 유려한 싯귀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아랍어는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이지만 운율적으로 아름다운 언어라고 한다. 특히 싯구를 읖는데 있어 아랍어의 리듬감을 따라올 언어가 없다고 한다. 차갑고 어둔 사막의 밤에 모닥불 주위에 앉은 아랍의 전사들이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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