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과 깡통의 궁전 - 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
강희정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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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檳榔이란 도시는 아주 애매한 위치에 존재한다. 푸켓과 싱가포르 사이에 있는 이 도시는 숨겨진 중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인도를 점령한 영국과 동인도-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네덜란드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지금의 말레이시아 반도이다. 제국주의 원칙이 그렇듯이 두 세력이 충돌될 때는 타협한다는 원칙에 따라 영국과 네덜란드는 태국 아래 있는 코끼리 코같은 이 지역을 아주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 영국은 네덜란드가 자바에서 수마트라로 올라오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네덜란드 역시 영국이 인도에서 태국 남부로 내려오는 것을 허용하였다. 단 그것은 싱가포르까지 였지만... 이렇게 해서 오늘날 말레이시아 영토인 페낭에 영국의 식민 사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적한 섬이었던 페낭을 영국이 차지하였지만 그곳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력이 필요하였다. 이 결과 이미 동남아시아로 진출해 있던 중국인들을 이용하였다. 섬의 개발을 위해서는 다량의 인력이 필요했고 이곳에 진출해 있던 중국인들을 통해 무한한 인적 자원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영국이 이용한 것은 아편 전매권이었다. 페낭을 중심으로 대서양에서 일어났던 삼각무역이 재현되었다. 대서양은 노예-설탕-럼이라는 도식이펴었지만 이곳에서는 쿨리-아편-노동재생산의 과정이 반복되었다. 영국은 직접 개입이 아니라 아편 전매권을 이곳에 자리잡은 화교 거상들에게 전매하여 이들을 통한 간접 지배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화교 거상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냉소적이게도 중국인이 중국인을 착취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아편의 시대에서 주석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화교 거상들에게 전매한 액수를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맡ㅏ기는 방식이었다. 이 결과 이곳에 진출한 중국인들은 화교 자본의 수탈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인력을 바탕으로 한 전근대적인 착취를 통해 이 지역의 화상들은 부를 축적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런 시대는 아편과 주석의 시대가 고무의 시대로 대치되면서 바뀌게 된다. 고무는 제국주의 시대에 근육과 같은 존재였다. 시멘트와 강철이 제국주의의 뼈대이고 석유가 혈액이라면 고무는 근육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무의 쓰임새는 아편과 주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처음 나오기 시작했던 자동차의 등장으로 고무의 쓰임새는 아편과 주석을 뛰어 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영국과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자들은 아편과 주석에서 방임주의를 취했던 것을 버리고 자신들이 직접 경영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아편과 주석으로 부를 축적했던 페낭의 화인 사회는 재편되게 된다. 인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화인 사회는 기계와 자본을 바탕으로 진출하는 제국주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제국주의자들은 화인 사회를 분리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즉 우유와 거품의 분리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자본을 가진 화교와 하층 중국인의 분리였다. 이것은 시민권이라든가 직책의 부여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인 사회의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즉 이민 사회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 여기서도 발생하였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과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의 차이가 일어난 것이다. 

중국은 그시절부터 지금까지 속인주의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가 중국인이면 이 세상 어디에서 태어나도 중국인이란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 이 속인주의의 강요에서 동남아시아 화인사회는 동요하게 된다. 즉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심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중국인이란 의식을 갖게하려 여러가지 작업-공자의 사상 학습-을 하였다. 이것은 현재 공자학원을 통한 중국공산당 학습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현지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하지 못하고 현지어를 하거나 영어를 하는 세대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고심하게 되면서 결국 현지화 작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라고 지은 것은 아주 핵심을 짚은 것이라 하겠다. 가진게 사람밖에 없는 중국이 인력을 통제하기 위해 아편을 어떻게 동남아시아 화인 사회에서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인력중심의 중국 전술은 고무나무를 통한 기계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결과 동남아시아 화인 사회는 순응, 반항, 동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 책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현재의 중공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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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덴칭거 :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 - 신경편람
덴칭거 책임번역위원회 옮김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BCK)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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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껍고 큰 책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가톨릭의 역대 교황과 공의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서양 중세를 알고자 한다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몇번이나 꺼내어 읽어볼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내용에 비해 대중성은 없는 책이다. 

초세기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은 수많은 사회현상과 대면해야 했다. 이때 가톨릭은 이 현상을 회피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공의회를 소집하여 위기를 대처하고 극복하고 전통을 고수하였다. 

여기에는 그 수많은 가톨릭의 투쟁과 정화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종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정확하게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 소소함으로부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학적인 책이지만 가끔 인간적인 모습도 드러난다. 중세 스웨덴의 주교들이 오랜 가믐으로 물이 부족하자 물이 부족한 곳에서는 맥주로 세례를 줘도 되냐는 물음에 교황청은 그 고통은 이해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것, 근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답을 한다. 이것은 원칙속의 재량이라고 할까... 이런 종교의 모습을 보면 엄겨함이란 껍질 속에 인간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서양 중세에 관심이 있다면 그 시대를 지배했던 가톨릭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헌이기 때문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처음부터 읽지 말고 역사책에서 어떤 사건을 보고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교화의 교서나 공의회 문헌을 읽어보면 어떤 기본적인 틀을 잡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사슬릭이란 꼬치 요리를 먹을 때 고기를 꾄 쇠꼬챙이는 먹지 않는다. 그것은 남겨두고 다시 거기에 새로운 고기를 꽃아 불에 굽는다. 이 문헌집은 어쩌면 이런 꼬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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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 - Book of the Dead
뉴욕 타임스 지음, 윌리엄 맥도널드 엮음, 윤서연 외 옮김 / 인간희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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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께서 제자들에게 '삶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를 쉽게 대답한 제자들은 없었다. 사실 '죽음의 철학'이 없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저 피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죽음이 무엇인가?'라고 거창하게 질문하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대답하기란 힘들다. 

제자들이 머뭇거리자 석존께서 '호흡지간呼吸之間'이라고 짧게 알려주었다. 그렇다! 삶이란 숨을 쉬고 있는 그 순간인 것이다. 

여기에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부고문이 있다. 그들의 삶이 어찌되었건 사람의 일생을 글로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람의 공과를 한 마디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의 선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나갈 때 그 사람의 삶을 기록한 만장輓章을 상여 뒤에 따르게 했다. 만장이 많을 수록 그 사람의 공적이 드러났음은 물론이다. 

시편의 첫 장은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종교는 사람의 삶을 선과 악의 행위로 평가한다. 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다릉 아킬레우스의 분노를..'로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삶이란 그 사람의 영웅적 행적의 기록인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을 떠나 행위만을 볼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행위를 무시하고 선과 악만을 고집할 때 그 또한 그 사람의 실재를 보기 힘들다. 구약의 아합이란 왕은 예언자들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왕이다. 그는 이방인 여인과 결혼했고, 그 여인이 가지고 온 이방의 종교로 이스라엘을 혼탁하게 만들었다고 예언자들은 성토하였다. 하지만 그 아합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정치적으로도 역량을 발휘한 시대였다. 아합은 종교적 잣대로 보았을 때는 악인이었지만 민생의 척도로 보았을 때는 훌륭한 왕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글로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지만, 이 마저 없다면 그 사람을 한쪽으로만 볼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질 것이다. 그나마 부고를 신문에 남기는 사람의 삶은 종이에 남지만 우리와 같은 필부들은 칠성판이 우리를 덮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이다. 

'주님, 이 밤을 거룩하게 하시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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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가 되는 법 - 히틀러부터 김일성까지, 20세기의 개인숭배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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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폭군 칼리쿨라는 잘 웃었다. 그가 웃은 이유는 원로원 의원들을 보면서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목이 잘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칼리쿨라의 이 심리는 모든 독재자의 심리이기도 하다. 

독재자는 자신이 가해자이면서 시혜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좋은 일은 하지 않지만 결코 나쁜 일에 나서지도 않느다. 하지만 나쁜 일의 근원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다는 점이다.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는 것. 바로 이것이 독재자들이 가장 먼저 만들어내는 가면이다. 언제나 상냥하고, 인자하며, 공명정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려지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독재자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독재자는 자신을 우상화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동등해지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존재하고 싶어한다. 그럴때 그들은 안심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높고, 빠르고, 강하다고 느끼지만 언제나 주변을 경계한다. 물리적인 힘은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언제나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에 시비를 건다. 이는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지만 실은 공동체를 찟어발기는 행위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분열시키면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한다. 주변의 혼란에서 오직 자신만이 믿을 수 있는 권력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므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한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불구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불구이기 때문에 주변을 불구로 만들므로서 안심한다. 

우리는 책임이 없을까? 있다. 우리의 맹목성은 독재의 온상이 되고 효모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비판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 독재는 우리를 자양분으로 삼아 점점 커지는 것이다. 이 현실을 느끼고 주변을 보면 이미 늦은 것이다. 우리는 그 부풀어 오른 허상의 세계 속에 함몰되어 다른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재는 허상이다. 모든 것이 세심하게 연출되는 하나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것이다. 문제는 독재를 현실이 아니라 허구 속의 실재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착각의 악몽이 깨지면 자신은 드라마의 세계가 현실이 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상태이기에 우리는 그 거대한 감옥의 수감자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뉘른베르크에서 빛의 기둥이 하늘로 쏘아졌을 때 우리는 독재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 빛의 기둥은 오늘날에도 계속 하늘로 쏘아 올리고 있다. 오늘날의 빛의 기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의 형태로 지구를 돌고 있다. 우리는 이 전파를 무차별적으로 듣는다. 독재자는 이 무차별을 자신의 지지로 이해한다.  

결국 독재자는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재자는 우리의 협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재발 독재자의 말로가 어떻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자. 반대로 독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끝이 어딘지를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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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과 작가들 - 위대한 작가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음주열전
그렉 클라크.몬티 보챔프 지음, 이재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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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 술과 담배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담배는 안의 울분을 내뿜고, 술은 밖의 모순을 간직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예술가들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작품을 이 세상에 내놓았을까 궁금해 진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신의 아그네스'란 영화를 보면 정신과 의사와 수녀원 원장이 수녀원 정원에서 담배를 피우며 흰소리를 하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담배를 피웠을까 하는 소재를 놓고 두 여성이 희희덕 거린다. 베드로는 물론 시가, 바오로는 파이프...

마찬가지로 작가들은 어떤 술을 마셨을까 생각하며 상상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와인을 마시는 작가들은 약간 쁘띠-부르조아 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포도주가 약간 고급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반면 맥주를 마시는 작가들은 왠지 소탈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독일 작가들의 작품은 맥주와 함께하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하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제격일 것이다. 하지만 하드보일드한 탐정소설을 읽을때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버본을 마셔야할까?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을 볼 때는 무조건 압생트를 마셔야 한다. 진한 쑥과 파란색은 인상파와 입체파와 점묘파 등이 떠오르게 한다. 

도스토에프스키를 읽을 때는 무조건 보드카, 그것도 하얀 자작나무 상표가 있는 보드카가 제격이다. 추운 러시아의 작가를 읽으며 혈관 속으로 하얀 부동액을 넣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섬세한 여성 작가들을 읽을 때-캐서린 몽그랑같은 작가들에는 보드카 마티니 젓지않고 흔들어서 마시면 어떨까**

그레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은 무조건 메스킬이나 데킬라이다. 판쵸 비야의 전기나 자파타의 글을 읽을 때도 소금과 데킬라는 찰떡 궁합일지도 모른다.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읽을 때는 럼이겠지. 진한 럼을 상온에서 보관하여 마시면 대양의 열기와 뱃사람들의 고된 삶이 저절로 생각날지 모른다. 

*靑州從事 平原督郵란 말은 좋은 술과 나쁜 술을 말한다. 청주에는 제현齊縣이 있고, 평원에는 격현鬲縣이 있는데 좋은 술은 배꼽臍까지 내려가고 나쁜 술은 가슴膈에서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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