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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글에는 굉장한 동양철학의 통찰력이 숨어 있다.
역술적인 면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운명을 '간파'하고 그것을 헤쳐나가라는 것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자기 운명과 직면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명리학을 앞서 놓았던 저자는, 명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인연조건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인간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는 인간도 없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늘 길한 것도 없고 늘 흉한 것도 없다는 것. 받아들이려고만 하면 반드시 비워내야할때가 오고, 욕망을 쌓으면 반드시 분출해야할 때가 온다. 그것은 우주적 관점에서 모든 것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모복이 없다는 말은 자신의 운명이 드세다는 것과 같은 말, 재물복이 많다는 것은 정신세계에 대한 보완이 더 필요하다는 말.
당연히, 이런 풀이에 '좋은 사주'란 없다. 그것을 운명처럼 믿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해서는 안될일. 왜냐하면, 인간의 운명은 원래 돌고 돌게 되어 있으며,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도 반드시 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궁합을 맞춰본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상보가 있을 뿐 -충이라는 개념도 결국 상충, 그러니까 당연히 오행의 한쪽이 먹히는 관계에 있으면 한쪽은 먹는 관계에 있는 법이라는 거다.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은 매우 적절하게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해 소개된다.
신탁이 예언한 바대로, 자신이 아비를 죽이고 엄마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먼 길을 떠난다. 눈을 찌른다는 건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해주는 바는 인간이란 결국 출가出家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출가, 곧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 탈주할 때만이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길찾기가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 인간의 운명이란, 환경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자신의 것.
인간은 원초적으로 출가자이며 이주민이라는 주장이 매우 탁월하고 논리적이다. 배후에는 양자역학!과 동양의 철학사상, 무와 공 같은 개념들이 깔려있는데, 신기하게도 불교와 명리학, 동양철학사상과 지금의 최첨단 물리학인 양자역학이 여기에 모두 한 궤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1.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아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 버린다.
결론적으로, 사주 명리학의 이치는 '육친법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 생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별들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덫을 박하고 나오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름아니다. 이 것은 모두, 사주팔자를 능동적으로 구현하는 내면의 힘이 갖춰질때 비로소 가능하다.
요컨대, 좋은 팔자란 길한 것을 맞이하고 흉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흉에 대한 인식과 욕망의 배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생명의 바다, 음양오행의 매트릭스에 길흉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