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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ㅣ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주홍글자.... 어린 시절 문고판 축약본으로 읽었을때가 선명하다. 간통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아해는 왜 저 아름다운 여인이(삽화에 나온 여자는 긴 머리에 오똑한 코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미녀였을 것이다.) 모진 핍박을 받는지 궁금해 하다 책을 던져 버렸거나 누나에게 물어 봤다가 머리통에 알밤을 쥐어 박히거나 불온한 단어 발랑 까진 놈이라는 억울한 소리를 듣거나, 그런고로 주홍글씨에 대학 막연한 적개심은 꽤 오래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후에 머리가 좀 굵어지고 사전을 뒤적여 보고 신문이나 잡지에 시시콜콜 드러났던 간통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때의 생각 또한 변함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간통죄란 아직도 천륜을 버린 범죄 취급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적당한 사랑의 관점에서 너그러이 용서한다면 결혼의 숭고한 가치(?)가 무너져 버릴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남성적 관점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주홍글자를 다시 읽어보고 느낀 것은 'A'의 글자란 한정된 의미의 보다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야 모호하게 얽혀있는 세명의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로저 칠링워스의 경우
-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나오는 비극의 히로인으로써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에 나오는 버사 메이슨처럼 타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랑도 아닌 것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를 파멸의 늪속에 던지는, 별로 호감가지 않는 음울한 인간일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공감이 컸던 인물이 바로 헤스터 프린의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 였던 것 같다. 재미없는 책이라 생각되어 지는 것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중의 하나가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스스로 그 편이 되어 상상하며(지어내며) 따라 가는 것인데 찌질한(?) 막장의 남편 복수극은 사실 그리 재미있는 편은 아니지만 위치를 바꾸면 꽤 재미있는 상상놀이가 되어 버린다. 난 이딴 식으로 복수할테닷... 치사하게 저렇게 괴롭히지는 않을꺼야.. 머 이런..
로저 칠링워스의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 헤스터 프린에 대한 단순한 집착이었을까 ? 그닥 사랑을 하지 않았지만 나의 아기가 아닌 남의 아기를 가지고 낳은, 헤스터 프린에 대한 애증이었을까. 아니면 허한 사랑의 종착점을 찾기 위한 스스로의 처절한 절규였을까. 그가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한 짓을 보자면(적어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그렇게 이해할 것 같다.) 정상적인 사람이 저리 비열하게 상처를 주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복수하겠다.... 하지만 로저 칠링워스의 사랑의 대상은 모호하다. 이것도 저젓도 복잡하고 엉켜있다. 심지어는 자기애까지 드러내 보이는 개방성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복수의 대상이 일견 헤스터 프린과 딤즈데일에 한정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스로를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에 관한 많지 않는 분량속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 보인다.치밀하고도 교묘하게 헤스터 프린과 딤즈테일 목사에게 행하는 복수를 나는 로저 칠링워스식 사랑의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좀 끔찍하지만 현 시대 막장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별반 차이는 없지 않는가. 나름대로 로저 칠링워스는 끝까지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게다. 문제는 대상이 누군지 모호해져 버려 결국은 속된 말로 맛이 가 버린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나약한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였나 싶기도 하고....
헤스터 프린의 경우
- 어찌 보면 사랑이라는 좁은 관점에서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헤스터 프린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홍글자라는 치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모진 세월을 살아 나아갔다는 쪽에선 역시 불행한 여자였지만 말이다. 헤스터 프린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살았던 시간을 증오하기까지 했지만 로저 링워스는 헤스터 프린을 여러 복잡한 심정으로 사랑했었던 것 같다. 이는 헤스터 프린 주위를 끝까지 벗어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도 어느정도 이해 할 법하고. - 아.. 사랑은 왜 이토록 복잡하고도 단순한 것이더냐.... - 거기에 하룻밤 풋사랑이었든 딤즈데일 목사의 순간적 욕정이었든(나다니엘 호손의 모호성으로 인해 딤즈데일과의 하룻밤 사랑 내지는 관계가 최소 한달이 지났든) 팜므파탈적인 헤스터 프린은 이 독실한 성직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니였던가. 거기에 에로스를 넘어선 아가페적 사랑은 엄숙하다 못해 완고하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까지 그 치욕스런 주홍글자에 담아내었기에 가슴에서 뜯어내어 버렸던 것을 다시 붙이지 않았던가.
사실 나다니엘 호손은 헤스터 프린에게 완벽한 신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위대함을 완성하기 위한 곁가지 장치, 시대에 용서받지 못할 범죄, 그 치욕과 고통을 견디어 내어 가는 과정.... 인간적인 고뇌 조차도 절대적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이 점에선 보통의 개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강요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작품 말미에 딤즈데일과의 단란한 사랑의 도피로서의 꿈은 말 그대로 잔인하게 산산히 부서지지 않았던가. 극적 카타르시스로 풀어내기엔 사랑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들에겐 안타깝고 불쾌하고 찝찝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읽는 이 마다 느낀 점은 다르겠지만 호손이 작품이 지닌 잔인한 결말은 인간의 허무한 사랑을 위대한 신의 사랑으로 돌리기 위한 잔인한 수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을 헤스터 프린은 당연하게도 받아 들였고 마침내는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 그 사랑이 되어 버렸다.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고 특정 종교관을 가진 이가 바라본다면 당연할지도 모르겠고...... 여하튼 히로인 답게 그 과정마저도 아름답게 맺어지는 사랑의 종결자 인듯 싶다.
딤즈데일 목사의 경우
- 나다니엘 호손이 가장 경멸했을 - 여기에 호손의 조상이 퀘이커교도를 혹독하게 탄압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룬 개인적인 이유도 들어 있을 것 같고.... 청교도주의에 대한 비난을 살짝 비틀어 야유했다고하나 할까. - 딤즈데일 목사는 인간적인 사랑도 절대적 신의 사랑도 모두 실패한 자기 파멸적인 인물이다. 곁들여 로저 칠링워스의 끔찍한 증오로 그 가중치가 배가 되어 힘없고 나약한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기까지 한다. 성직자임에도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헤스터 프린은 목사보다 더 강건한 신앙의 힘을 보여주어 그 비교를 격하게 당하기까지 한다. 호손은 아마도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진실의 사랑과 믿음은 아니다라는 것을 딤즈데일 목사로 하여금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한다.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 보여준 죄 앞에서의 나약한 방황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스스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 역시 호손의 그 이상스런, 모호한 설정으로 인하여 과연 딤즈데일 목사와 헤스터 프린은 사랑을 했는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 셋의 얽힌 사랑은 명확한 것이 없는 터라 읽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도 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성직자가 동시에 인간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 아... 사랑은 독점해야 하는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 커다란 죄악임을 알기에 그 둘 다에 모욕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직자의 사랑은 고통스럽다.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하는 고달픈 숙명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인내하고 감수하여야 하지만 딤즈데일 목사의 경우처럼 한순간 실수로 헛되이 무너지기도 한다. 물론 감성이 예리하지 못한 일부의 종교인은 모멸차게 인간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걷어차 버리고 그 분의 품으로 달려가기도 하며 대담하게도 그 둘이 사랑을 모두 소유하려 하시는 분들도 계시긴 한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딤즈데일의 목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지만 어쨌거나 나다니엘 호손이라는 작가에 의해 그 분에게 용서를 극적으로 빈다는 점에서 잘 마무리가(?) 된 것도 같다. 물론 목사의 친구들이 그의 인격을 옹호해 주고자 강한 의리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로 간주한다는 호손의 일갈로 살짝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말이다.
논외로 주홍글자에서 바져서는 않되는 헤스터 프린의 딸인 펄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펄의 경우
- 펄이 보여준 엄마의 사랑과 아빠의(?) 사랑은 인간 이전의 가장 본능적이고도 원초적인 사랑이 아니였나 싶다. 헤스터 프린에게도 펄의 사랑은 이성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고 딤즈데일의 목사는 두렵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잠시나마 그 둘의 헛된 사랑을 꿈을 꿀때 단호하게 몸으로 반대한(?)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랑은 아마도 태초 본연 그대로의 사랑의 모습이 아니였나 싶다. 이것은 나다니엘 호손이 의도하였는지 아니면 소설을 쓰는 도중에 우연치 않게 그런 방향으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펄의 사랑은 간결하고 깨끗하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죄를 사랑으로 씻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무서우면서도 매력적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든다.
극단적으로, 사랑을 초단편적으로, 주홍글자를 다시 한번 읽어 본다면 어느 시대고 사랑은 언제나 같다는 씁쓸한 현실의 벽을 쳐다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교대상으로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랑은 분명 복 많은 것이지만 심심하고 매력없고 금방 식어져 버린다는...... 그래서 우리는 하지도 못할 극단적인 사랑놀음을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연극에서, 그리고 오래된 고전에서 찾는지도 모르겠다.
아.... 사랑은 이리도 어렵고 힘든 것이냐 !!
- 펭클 코리아 클래식에서 도서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