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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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홍글자.... 어린 시절 문고판 축약본으로 읽었을때가 선명하다. 간통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아해는 왜 저 아름다운 여인이(삽화에 나온 여자는 긴 머리에 오똑한 코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미녀였을 것이다.) 모진 핍박을 받는지 궁금해 하다 책을 던져 버렸거나 누나에게 물어 봤다가 머리통에 알밤을 쥐어 박히거나 불온한 단어 발랑 까진 놈이라는 억울한 소리를 듣거나, 그런고로 주홍글씨에 대학 막연한 적개심은 꽤 오래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후에 머리가 좀 굵어지고 사전을 뒤적여 보고 신문이나 잡지에 시시콜콜 드러났던 간통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때의 생각 또한 변함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간통죄란 아직도 천륜을 버린 범죄 취급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적당한 사랑의 관점에서 너그러이 용서한다면 결혼의 숭고한 가치(?)가 무너져 버릴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남성적 관점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주홍글자를 다시 읽어보고 느낀 것은 'A'의 글자란 한정된 의미의 보다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야 모호하게 얽혀있는 세명의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로저 칠링워스의 경우 
 

  -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나오는 비극의 히로인으로써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에 나오는 버사 메이슨처럼 타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랑도 아닌 것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를 파멸의 늪속에 던지는, 별로 호감가지 않는 음울한 인간일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공감이 컸던 인물이 바로 헤스터 프린의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 였던 것 같다. 재미없는 책이라 생각되어 지는 것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중의 하나가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스스로 그 편이 되어 상상하며(지어내며) 따라 가는 것인데 찌질한(?) 막장의 남편 복수극은 사실 그리 재미있는 편은 아니지만 위치를 바꾸면 꽤 재미있는 상상놀이가 되어 버린다. 난 이딴 식으로 복수할테닷... 치사하게 저렇게 괴롭히지는 않을꺼야.. 머 이런..
 

  로저 칠링워스의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 헤스터 프린에 대한 단순한 집착이었을까 ? 그닥 사랑을 하지 않았지만 나의 아기가 아닌 남의 아기를 가지고 낳은, 헤스터 프린에 대한 애증이었을까. 아니면 허한 사랑의 종착점을 찾기 위한 스스로의 처절한 절규였을까. 그가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한 짓을 보자면(적어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그렇게 이해할 것 같다.) 정상적인 사람이 저리 비열하게 상처를 주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복수하겠다.... 하지만 로저 칠링워스의 사랑의 대상은 모호하다. 이것도 저젓도 복잡하고 엉켜있다. 심지어는 자기애까지 드러내 보이는 개방성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복수의 대상이 일견 헤스터 프린과 딤즈데일에 한정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스로를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에 관한 많지 않는 분량속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 보인다.치밀하고도 교묘하게 헤스터 프린과 딤즈테일 목사에게 행하는 복수를 나는 로저 칠링워스식 사랑의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좀 끔찍하지만 현 시대 막장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별반 차이는 없지 않는가. 나름대로 로저 칠링워스는 끝까지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게다. 문제는 대상이 누군지 모호해져 버려 결국은 속된 말로 맛이 가 버린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나약한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였나 싶기도 하고....
 

 

헤스터 프린의 경우
 

  - 어찌 보면 사랑이라는 좁은 관점에서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헤스터 프린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홍글자라는 치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모진 세월을 살아 나아갔다는 쪽에선 역시 불행한 여자였지만 말이다. 헤스터 프린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살았던 시간을 증오하기까지 했지만 로저 링워스는 헤스터 프린을 여러 복잡한 심정으로 사랑했었던 것 같다. 이는 헤스터 프린 주위를 끝까지 벗어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도 어느정도 이해 할 법하고. - 아.. 사랑은 왜 이토록 복잡하고도 단순한 것이더냐.... - 거기에 하룻밤 풋사랑이었든 딤즈데일 목사의 순간적 욕정이었든(나다니엘 호손의 모호성으로 인해 딤즈데일과의 하룻밤 사랑 내지는 관계가 최소 한달이 지났든) 팜므파탈적인 헤스터 프린은 이 독실한 성직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니였던가. 거기에 에로스를 넘어선 아가페적 사랑은 엄숙하다 못해 완고하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까지 그 치욕스런 주홍글자에 담아내었기에 가슴에서 뜯어내어 버렸던 것을 다시 붙이지 않았던가. 
 

  사실 나다니엘 호손은 헤스터 프린에게 완벽한 신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위대함을 완성하기 위한 곁가지 장치, 시대에 용서받지 못할 범죄, 그 치욕과 고통을 견디어 내어 가는 과정.... 인간적인 고뇌 조차도 절대적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이 점에선 보통의 개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강요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작품 말미에 딤즈데일과의 단란한 사랑의 도피로서의 꿈은 말 그대로 잔인하게 산산히 부서지지 않았던가. 극적 카타르시스로 풀어내기엔 사랑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들에겐 안타깝고 불쾌하고 찝찝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읽는 이 마다 느낀 점은 다르겠지만 호손이 작품이 지닌 잔인한 결말은 인간의 허무한 사랑을 위대한 신의 사랑으로 돌리기 위한 잔인한 수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을 헤스터 프린은 당연하게도 받아 들였고 마침내는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 그 사랑이 되어 버렸다.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고 특정 종교관을 가진 이가 바라본다면 당연할지도 모르겠고...... 여하튼 히로인 답게 그 과정마저도 아름답게 맺어지는 사랑의 종결자 인듯 싶다.
 

 

딤즈데일 목사의 경우
 

  - 나다니엘 호손이 가장 경멸했을 - 여기에 호손의 조상이 퀘이커교도를 혹독하게 탄압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룬 개인적인 이유도 들어 있을 것 같고.... 청교도주의에 대한 비난을 살짝 비틀어 야유했다고하나 할까. - 딤즈데일 목사는 인간적인 사랑도 절대적 신의 사랑도 모두 실패한 자기 파멸적인 인물이다. 곁들여 로저 칠링워스의 끔찍한 증오로 그 가중치가 배가 되어 힘없고 나약한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기까지 한다. 성직자임에도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헤스터 프린은 목사보다 더 강건한 신앙의 힘을 보여주어 그 비교를 격하게 당하기까지 한다. 호손은 아마도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진실의 사랑과 믿음은 아니다라는 것을 딤즈데일 목사로 하여금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한다.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 보여준 죄 앞에서의 나약한 방황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스스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 역시 호손의 그 이상스런, 모호한 설정으로 인하여 과연 딤즈데일 목사와 헤스터 프린은 사랑을 했는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 셋의 얽힌 사랑은 명확한 것이 없는 터라 읽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도 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성직자가 동시에 인간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 아... 사랑은 독점해야 하는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 커다란 죄악임을 알기에 그 둘 다에 모욕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직자의 사랑은 고통스럽다.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하는 고달픈 숙명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인내하고 감수하여야 하지만 딤즈데일 목사의 경우처럼 한순간 실수로 헛되이 무너지기도 한다. 물론 감성이 예리하지 못한 일부의 종교인은 모멸차게 인간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걷어차 버리고 그 분의 품으로 달려가기도 하며 대담하게도 그 둘이 사랑을 모두 소유하려 하시는 분들도 계시긴 한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딤즈데일의 목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지만 어쨌거나 나다니엘 호손이라는 작가에 의해 그 분에게 용서를 극적으로 빈다는 점에서 잘 마무리가(?) 된 것도 같다. 물론 목사의 친구들이 그의 인격을 옹호해 주고자 강한 의리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로 간주한다는 호손의 일갈로 살짝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말이다.
 

 

논외로 주홍글자에서 바져서는 않되는 헤스터 프린의 딸인 펄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펄의 경우
 

  - 펄이 보여준 엄마의 사랑과 아빠의(?) 사랑은 인간 이전의 가장 본능적이고도 원초적인 사랑이 아니였나 싶다. 헤스터 프린에게도 펄의 사랑은 이성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고 딤즈데일의 목사는 두렵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잠시나마 그 둘의 헛된 사랑을 꿈을 꿀때 단호하게 몸으로 반대한(?)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랑은 아마도 태초 본연 그대로의 사랑의 모습이 아니였나 싶다. 이것은 나다니엘 호손이 의도하였는지 아니면 소설을 쓰는 도중에 우연치 않게 그런 방향으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펄의 사랑은 간결하고 깨끗하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죄를 사랑으로 씻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무서우면서도 매력적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든다.

극단적으로, 사랑을 초단편적으로, 주홍글자를 다시 한번 읽어 본다면 어느 시대고 사랑은 언제나 같다는 씁쓸한 현실의 벽을 쳐다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교대상으로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랑은 분명 복 많은 것이지만 심심하고 매력없고 금방 식어져 버린다는...... 그래서 우리는 하지도 못할 극단적인 사랑놀음을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연극에서, 그리고 오래된 고전에서 찾는지도 모르겠다. 
  

아.... 사랑은 이리도 어렵고 힘든 것이냐 !!
 

 - 펭클 코리아 클래식에서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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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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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 

완벽한 서사, 정갈한 문체, 강렬한 주제의식, 스토리의 힘, 그리고 여운을,감동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결말. 이런 모든 것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사람들은 재미있다, 읽을만 하다. 하고 인색한 평가를 내리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은 이런 완벽한 구성을 지니지 않는 태생적 반항기가 있다. 소위 미니멀리즘 소설이라 하는 - 단편소설과는 조금 다른 -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연작집과 같은 것은 논외로 치자고 하자면 생태주의 소설의 원조 격인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 혹은 존 바스나 토머스 핀천의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같은 장편 소설인 경우에도 저 위에서 나열한 어떠한 것 하나 정도만 겨우 보일 뿐이지 도무지 소설로 보기엔(전통적인, 우리가 늘상 알고 있는) 일반 독자들로서는 영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소위 고급독자께서 주제 넘게 주위에 권유를 잘못했다가 " 그래 너 잘났다 새꺄." 하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인 것이다. 그중엔 사실 상당한 지적 능력이 동반되지 않는 상태에서에서는 도무지 읽혀지지 않는 것들이 꽤 많은데 대표격인 것이 바로 고전 소설이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는 즐길 수 없는 이런 것들은 굳이 소설 따위를 읽는 데 그 배경지식을 미리 보시기엔 시간이 너무나 길고 아까워( 그 시간엔 보통 딴 짓을 하기 일쑤이지만 ) 그리하여 외피만 두른 줄거리에 탐닉하게 되고 그 이유 하나로 재미 있다 없다를 판단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 마냥 - 물론 자신에겐 주관적이고도 절대적인 진실이겠지 - 주위 사람들에게 떠들어 댄다. 대부분이 그렇다. 나도 그렇다. 너도 그러할테고. (그냥 개인적으로 주절거린 것이니 오해 말길. 요건 이책과 다른 책을 같이읽어 나가다 든 생각이다.)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
단순한 재미, 흥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 말초적인 주제(대부분..), 그리고 뜻밖의 반전으로 머리를 아득하게 만들어 주는 결말. 이런 것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우리들은 좋았다. 강렬했다. 하고 겨우 만족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한치의 오차라도 생기게 된다면 비참하게 버림받고야 만다. 장르란 그렇다. 자체로 소설은 태생적으로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소설가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 현역 최고의 추리소설가. 작품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미야베 미유키(발이 어디까지 뻗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이 필요없는 일본 대표추리 작가 아닌가)와는 달리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작품에 별로 실패하지 않음에도 꽤 다작인 것은 의외이다.  그만큼 그의 소설을 추리소설에 관한 한 완벽하다는 칭송으르 듣는다. 1985년 [방과 후]로 제31회 에도가와 란포상, 1999년 [비밀]로 제5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제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걸 보니 말이다. 우리 나라에선 [백야행]이 영화화 되기도 했다 - 결과적으로 망하긴 했지만 소설이 망한 것은 아니였다. - 어쨌거나 올해 벽두부터 꽤 쌈박한 이야기 꺼리로 우릴 또 찾아왔다. 이름하여 [플래티나 데이터]는 영화 <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아이덴티티>의 부분 데자뷰를 보는 듯 살짝 클리셰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스토리 셀링으로 극복해 내어 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뛰어 넘는데 (소재 고갈로 인한 것일까. 아니면 필립 딕에 대한 오마쥬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얼추 어찌하다 보니 비슷해져 버린건지 알 수는 없지만) 동 서양 사람들의 마인드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근래에 읽었던 정유정님의 "내 신장을 쏴라" 와 이 책의 결말(내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운명론적 사고 방식에 아직도 꽤 얽매어져 있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트라우마에 의한 다중 인격은 추리 소설이나 범죄소설에서 제법 흔하게 되어 버린 소재다. 또한 DNA를 이용하여 국가가 개인의 정보를 무단으로 - 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이거나 상관없이 - 사용하여 범죄자를 잡아 내는 행위 또한(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범죄 예방을 위해 예비 살인자를 미리 찾아내는 것이라면 플래티나 데이터는 이미 벌어진 범죄에 대해 범죄자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체포하여 누구든지 범인은 잡히니 저지르지 말아라 식의 예방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하던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것을 교묘하게 씨줄과 날줄을 촘촘하게 엮어 훌륭한 스토리셀링을 만들어낸다. 
 

  추리소설 특성상 줄거리든가 결말을 얘기해 버리면 김이 쑥 빠져 버리듯 - 단물 다 빠져버린, 그런 얘기 혹시 소개하자면, 누군가 모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쳇!! - 어느 아해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를 예매하고 극장에 들어가려는 순간 영화를 이미 본 또 다른 녀석이(욕을 반드시 해줘야 하는데 쩝...)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라고 소리치는 통에 영화 보는 내내 맥이 쭉 빠졌다는 말처럼 소설에 관한 줄거리는 내버려두고 히가시노 게이고가 과연 재미로만 요런 추리소설을 썼는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보듯 문명의 발달과 감성의 쇠퇴가 낳는 비극을 통해 전체주의 속에서 소수 가진자만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이 특기할만 한데 관리라는 측면에서 볼때 프랑스 만화인 어둠의 도시들 연작 중 <우르비캉드의 광기>에서 도시를 완벽한 대칭으로 설계하고 싶은 도시 설계가이자 건축가인 주인공 유겐 로빅이 위원회로 부터 새로운 통로애 관한 허가를 얻기 위해 설득을 하다 위원회의 수장이 로빅에게 한 말이 기억에 선명한데 다음과 같다 " 새로운 통로는 항상 새로운 틈새를 만들어 내고 그러면 다시 새로운 통치 체제가 필요하게 되는 법이오. 우리는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싶지 않소. "  권력의 속성상 플래티나 데이터 처럼 새로운 정보의 독점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거나 위의 경우처럼 아예 정보 자체의 통제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전자는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민주주의(정확하게 말하자면 천박한 공리주의 겠지만) 권력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지배의 모습이고 후자는 북한의 김정일 체계에서처럼 정체되고 부패된 오래된 권력에서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관계가 먼 경우이니 제외하고 전자의 경우 정보의 독점은 부의 마찬가지로 있는 자들에게로 계승되어지고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문제는 단순히 소설을 떠나 먼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끊김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민주시민의 허울 속에 전체주의라는 수렁에 빠져 나도 모르게 기계의 부속처럼 쓰이다 용도가 다해 폐기되는 것은 아닌가 -이 부분은 소설 내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듯 하지만 본질적인 면을 벗어날 수 없다 - 그 부속이 갖는 정보란 얼마나 얕고 쓸모가 없는가. 주인공인 가구라는 뒤늦게 나마 겨우 이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영웅이 세계를 구하거나 정의를 바로 세우거나 하는 따위의 결론은 없다. 이건 일본인 특유의 숙명론 기질을 살짝 엿보는 듯해 착잡한 기분이기도 하지만 (아... 결국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작금의 돌아가는 소설이 아닌 현실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어쩌라고 수긍하면서 살아야지 가 결론인가 ? - 라고 제발 시비걸지 마시길. 이건 시크한 것도 체념 어린 것도 아니다. 성찰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현실 따위. 어쩌라고!!! 해봐야 그건 각자가 찾아야 할 답은 아닌지 싶다.
 

 결론은 그렇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운치 않는 듯 묘한, 500페이지를 훌렁 훌렁 읽으며 스토리 놀이에 흠뻑 빠져 시간으을 보냈지만 다른 책처럼 후딱 덮어버리고 바로 아.. 이제 다른 책이나 읽어 볼까나 하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자꾸 되뇌이고 생각하게 끔 한다. <소문, 나를 파괴하는 정체불명의 괴물>을 사실 같이 읽어나가면서 참말로 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 살지 않으면 무지몽매한 수메르의 노예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함이 온 몸을 휘감아 돌아나갔다. 

 사실 이런 생각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재미있게 읽으면 장땡이다 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 참 책 읽는 보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어떤 것을 취함이냐에 따라 남는 것이 있고 건질 것이 있는 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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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 크로스로드 SF컬렉션 4
이영수(듀나) 외 지음 / 사이언티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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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크로스로드 SF컬렉션 네번째 창작집이 나왔다. 2007년 황금가지에서 "얼터너티브 드림 - 한국 SF 대표 작가 단편 10선"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래로 일년마다 한권씩 출판해 왔으니 상대적으로 척박한 한국 SF문학에 단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과학 웹 저널 <크로스로드>에서 기획한 " 우리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 과학으로 세상 읽기·세상에서 과학 읽기"를 읽다보면 일반 대중들이 과학이란 것에 얼마나 무지한지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절감하게 되는데 대다수는 고등학교때 지구 물리의 아주 얄팍한 지식을 시험용으로 익히고는 곧바로 필요없는 망각의 늪속으로 밀어버리는 현실에서 판타지나 무협지를 깔깔대고 읽어대지만 과학전 사실에 기초한 SF소설은 어렵다는 이유로(그리하여 지루하다는 이유로) 독자들 한켠에 밀려 있다. 인간세계를 발전시키는,획기적인 패러다임은 순수한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늘 출발하였다는 점을 감안할때 자라나는 아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서 무한한 꿈을 키웠으면 싶다.

  박상준 교수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새로운 세상에서 만나는 새롭고도 익숙한 이야기는 기존 판타지의 천편 일률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 과학이 살아 숨쉬는 미래로의 도약점을 위해 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하는 현실속 상상의 이야기들이다. 서구 SF 소설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이는 이미 세대가 한참 지난 - 검증되고 휴고나 네뷸러상을 수상한 작품이나 작가의 전성기적인 7~80년대의..- 것이 대다수이다. 물론 그런 소설은 재미있고 아직까지도 유효가치가 상존하며 늘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작품이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그 이후에 외국에서 주요 작가가 발표한 SF소설은 아예 번역조차 되지 않으며 실제 근래의 엔솔로지 형식의 외국 단편 SF소설 하나도 구경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 이리하여 원서 읽어내는 능력자를 부러워 하는 것이다 - 시대를 읽어내는 최신의 작품들을 목말라 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년 꾸준히 발간하고 있는 크로스로드의 단편집은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비록 세계 유수한 작가가 써 내놓은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은 수준이 기대이하니 바라던 바에 미치치 못했다 말을 하지만 한국 비주류 문학에서도 변방에 밀린 우리 작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겠다. 

 "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 "는 모두 11편의 창작 SF단편 소설을 싣고 있는데 그 면면을 보아하자면 오랫동안 활동해 왔고 꾸준히 작품집을 내고 있는 듀나님을 비롯하여 SF번역가로도 이름이 높으신 김창규님, 박성환님 - 죄송스럽게도 그 외의 작가분들은 잘 모르겠다 - 등 잘 단련되어진 글들로 무장되어 있다.   한국형 SF소설답게 그 배경은 우리가 친숙한 동네 - 예를 들자면 듀나의 '수련의 아이들'에서 그녀가 도망가는 곳은 부평에서 인천이고 표제작인 '목격담...' 은 서울 시청 숭례문 광장이며 '달에는 의지가 없다'에서 K의 집은 영등포구 신길동이다 - 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고< 인구 감소와 빈민층의 월면 이주로 지구의 주택란이 해소되자 아파트나 오피스텔같은 다가구 주택은 값이 폭락했고 중심가 인근의 낡은 오피스텔에는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P.262> 처럼 근 미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듯한 여러 한국적 상황이 세세한 상상력으로 서술되어 진다. 또한 단편소설마다 각기 다양한 주제가 유기적으로 엮어져 독특한 스토리를 이끌어 내는데 비록 젤라즈니의 유려한 문체나 필립 딕의 매끈한 결말같이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잔잔하고 공감할만한 생활밀착형 SF소설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다만 아쉬웠던 사실은 처음 대하는 독자가 무섭게 모일 생경한 언어를 늘어놓아 꽤 부담스러는 것들이 가혹 눈에 띄였는데 예를 들자면 <시간관광이란 결국 텔레포트와 마찬가지로 플랑크 시간 1단위동안 스캔한 플랑크 단위의 정보 집합에 대한 전송과 복구이다. 대상 존재의 낱낱에 대한 총체적 확장성 스캔은 대상 존재를 해체- 무화하여, 물질은 정보로 다시 전화(轉化)되고, 전송된 정보는 스캔의 역과정을 거쳐 다시 물질로 복원된다. P.325> 일반 하드SF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형식의 문장은 좀 난감하다. 물론 작가가 달리 표현할 적당한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썼다 하더라도 사실 [총체적 확장성]을 해석하기란 무리일 것 같다. SF개념을 어느정도 잡고 있는 독자들이야 그런대로 넘어간다 하지만 역시 이런식으로라면 이 책은 대중들에게 선뜻 다가서기엔 어려우리라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단편소설은 흔한 주제지만 가볍게 넘기기엔 어려운, 근미래에 반드시 도래할 김창규님의 "백중(百中)" 이었는데 인공지능과 짝인 된 형사의 이야기는 아시모프의 로봇에서 차용한 듯한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그것 보다는 정교하고 재미가 있으며 무엇보다 어렵지 않고 대중적인(?)- 일반적으로 쓰이는 서술이라고 해두자.. - 문장으로 입문서로는 제격이(이 정도는 마눌께 권해도 되겠더라는...) 아닌가 싶다. 여하튼 다양한 시도와 여러 주제들이 얽혀 읽는내내 재미가 있었다. 독창적이기도 하고 한없이 우울하기도 한 소설도 있었으며( 달에게는 의지가 없다.. 참 암울하게 결론을 내는 작가에게 경의를... ) 추리소설을 가장하기도 했고(전화살인... 중간에 범인을 짐작해서 약간 김이 샜고 결론은 좀 의아했는데 거의 추리소설이라고 봐야겠다.) 따뜻한 사랑이야기, 섬뜩하고 이기적인 사랑이야기도 있다. 

  모든 이야기는 신화적 원형이고 신화는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전해진다는 그 누구의 말처럼 현세계의 무한한 상상력은 어떤 것이든 모티프의 확장형이다. 인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깊숙히 이것이 내재되어 있는 한, 풍요로운 이야기의 세계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발전은 계속되어 지리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한국형 SF소설이 많이 나오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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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위의 불길 1 - 휴고상 수상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8
버너 빈지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아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뒤척이고 있다.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며 - 제 나이에 비해 난이도가 있는 책인데 꽤 재미있게 읽어대는 듯 하다. 한 서너번은 읽어서 설핏 머리속에서 장면 장면이 그려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근 삼 십분을 꼼짝않고 앉아 있다. 기실은 마눌께서 밀린 학습지를 하라고 압박을 가했더니 책 좀 보고 할께요... 요런 핑계를 대고 앉은뱅이 책상 머리 내 맞은편에 앉았던 것이다. 요즘 아해 녀석들은 우리 세대보다 훨씬 재미없게 (사실은 선행학습에 치여 산다고나 할까..) 사는 것 같다. 
 

  오전에 택배로 날아 든 책을 거의 반 이상 읽어나간다. 간만에 행책이다. 행복한 책읽기의 열 일곱번째 책인 '이계의 집'이 재작년 8월에 나왔으니 근 18개월 만인가.  간간히 sf단편선만 읽다가 -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장르라고 부르면 대답함' 이었고 이 후엔 약간의 인문학 관련 책과 밀린 순문학 쪽을 서너달 뒤적였는데 행책 싸이트가 좀 이상하여 한동안 들어가지 않아 출간되었는지 모르다 간만에 들렀다가 소식을 듣고 바로 GET !

 버너 빈지는 꽤 생소한 작가이지만 스페이스오페라 류의 SF를 좋아라 하는 나로서는 일단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싶었다. 사전 준비(?)를 착실히 이행하고 읽기 시작한 덕분으로 막힘없이 죽죽 읽혀나간다.  뒷장에 언급한 용어 사전을 꽤 오랜시간 동안 봐 둔 보람이 있었다. 외계 종족인 다인족(The Tines)에 관한 명칭의 (가구가락 적인 음차표기라... 이 부분에서 꽤 유쾌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시겠지만 코카콜라의 중국어식 발음이다. 곁가지로 펩시콜라는 ?  XX가락이다. XX가 뭔지 궁금하신 분은 검색해서 찾아보시길~) 
 

  "심연위의 불길"은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대략 난감하게 초반에도 죽고 중반에도 죽고 하여 몇의 인물들로 이야기가 응축되어 재미가 배가 되어 가는데 각 장의 단락마다 인물의 시점에 따라 상황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미 다른 여러 책에서도 이런 다양한 시점 변화를 선보여 왔지만 스피디하게 각 단락당 장면 전환을 보여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스토리셀링 능력이 대단한 듯 싶다. 이를테면 다인족에 사로잡힌 요한나와 예프리가 박피사와 목각사 영역에 각각 살면서 묘사하는 시점과 다인족의 위크래크스카와 강철경, 암디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시선 등 등. 거기에 감히 상상하지 못할 범 우주론적 은하계 내에서의 역외건과 초월계의 묘사는 기존에 나왔던 어떤 SF소설과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광대하다. 아예 지구란 단어 조차 한 두번 나올가 말까 한 철저한, 은하계 중심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진다.
 

  92년 발표한 시점 덕분인지 지금은 거의 사멸하다시피 한 각종 [뉴스그룹]이 통신의 매개체로 나오는 것이 나에겐 좀 아쉬웠지만 당시엔 월드와이드웹의 초창기라고 볼 수도 없을만큼 열악한(지금에 비해서) 환경에서 당시 소수의 인원들이 모여 만든 바이너리 그룹이 - 대략 새로운 소식이나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 폭발작으로 증가해 이후 대세로 굳어질지 모른다는 작가의 생각은 존중할만 하다. 간혹 세월이 약간 지난 - 물론 지금도 많이 쓰이긴 하지만 - 용어도 나와 재미있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 별로 스포일러 될 것이 없어요. - 어느날 인류의 먼 후손들이 고대 지식이 담긴 양자레벨의 정보가 뭍혀 있는 행성을 발견하고 발굴하던 중 소위 역병(2급 기형체라고 하지만 후엔 초월계의 신선까지도 죽일 수 있는 막강한 신 같은 존재)이라고 하는 무의식의 초자아가 50억년 전 지배자로서 다시 부활을 꿈꾸고 이를 알아챈 발굴팀의 소수 인원들은 이 어린 존재가 더 커나기 전 대항체를 들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성공하나 낯선 원시 문명체가 살고 있는 행상에 불시착하게 되고 이 곳에 살고 있는 개를 닮은 지성체가 습격을 가해 부모님은 목숩을 잃고 아들과 딸은 각기 적대적인 국가인 박피사와 목각사에 의해 본의아니게 헤어지는데..... 한편 초자아는 단시일내에 성장하여 역외건의 모든 문명을 초토화 시키며 릴레이 항성계까지 침범하고 이 녀석의 대항체가 불시착한 우주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브리니미 기구의 인류 연수생 라브나는 신선이 재미삼아 만든(?) - 차후에 아마도 신선의 파편이 되어 무엇인가 중대차한 일을 하겠지만 - 팸과 스크로드라이더족 교역상인인 블루셀과 그린스토크와 함께 조난 신호를 보내오고 있는 예프리를 구하러 간다. 다인계에 살고 있는 집단 지성체인 두 무리는 인류의 지혜를 빌어 서로를 정복하려 하고 드디어 원시 문명체에서 화약을 이용한 대포가 만들어지게 되며 그 둘의 싸움은 목전에 이르게 된다... 2 권에서 계속..  

  사실 줄거리로 보자면 꽤 단순한 내용이지만 실제 읽어보면 그리 녹록치 않다.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쿼런틴' 이나 '중력의 임무' 처럼 하드한 SF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랑말랑하지 않는 적당한 수준이다. SF가 가야할 길.... 즉, 은하계에 엄청나게 다양한 지성체의 당연한 존재와 그들과의 어울림, 그리고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여기에선 Power라고 불리우는 [신선] 초월체의 이야기는 마음을 열고 읽지 않으면 안되는 무한한 상상력의 산실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 탓도 아니고, 여기서 지낸 시간이 너무 짧아서도 아녜요. 일생동안 공부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물고기가 인간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래 공부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 물론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안전에 도움이 되어 준다는 면에서는 유일무이한 비유일지도 몰라요.<초월계>에 사는 <신선>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멍청한 동물이 맞으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동물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하는지를 떠올려봐요. 장난을 치거나, 학대하거나, 돌봐 주거나, 멸종시키죠 - <초월계>에서는 원한다면 이런 일들을 실행할 방법이 셀 수도 없이 존재해요. <권역>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천연의 보호막 역할을 해 주는 건지도. 그런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생명은 아마 존재하지 못했겠죠"    P 155.  라브나의 말 中에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신성 모독이 또 어디있을까... 거기에 신선들.. 이라니 이런 종류의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혹은, 몇개의 몸이 모여 하나의 지성을 이룬다는 것.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수 많은 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인데 이에 대해 열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으려면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인지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심연 위의 불길"은 한번은 꼭 읽어봐야 할 필수요소 SF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재미도 빠질 순 없고... - (온 세상의 소설책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진리는 당연한 거고요.)  어쨌거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아울러 2권이 빨리 좀 나왔으면 싶다. 작가가 도대체 어떠한 현란한 솜씨로 독자를 녹여내 결론에 이르게 할지..  - 결말은 설핏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님은... 그 과정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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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김항.이혜령 기획,인터뷰,정리 / 그린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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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인문학적 담론이란 어떤것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진수성찬 같은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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