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어디에서 착각을 했던 걸까요? 저는 강헌님이 책을 여러 권 내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는 제가 음악 관련 책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에 비해 제가 강헌이라는 이름을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 꽤 익숙해 있었다는 건데 가끔 방송매체나 벙커에서 들었던 코딱지 만큼의 관심도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워낙 말을 잘하시는 분이라 기대에 걸맞게 책이 너무 재미있어 다소 놀랐습니다.

 

 

 일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즈를 속칭 고급진(?) 음악으로 로큰롤, 락을 10대나 즐기는 천박한 - 아이들이 즐기면 천박하다는 논리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 음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음악에 정통하지 못한 저 같은 사람에게 재즈와 로큰롤은 한 뿌리이며 노예의 후손인 하층게급인 아프리칸 아메리칸에서 연유되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더불어 전복의 역사로서 재즈의 탄생과 더불러 재즈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 개념을 콕 잡아 줍니다.  간단하게 말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은 그냥 엄격한 음악이요. 재즈는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에서 기인하다고 하는데 사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더군요. 재즈의 고향이라 일컫는 항구도시인 뉴올리언스에는 스토리빌이라는 매춘 밀집 지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새로운 도시에 욕망을 찾아 나선 젊은이들을 속칭 삐끼가 데리고 가 오랫동안 머물수 있게 하는 정말 처절하게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음악 - 강헌님은 여기에서 재즈를 우리말로 꼴림이라고 번역하려고 합니다만.. -

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악기... 이 슬픈 미시사 음악역사를 읽노라면 꽤 가슴이 메어집니다... 

 

아,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막연하게 알고 있던 재즈의 스윙에 대해 강헌님은 명쾌하게 설명해 줍니다. 어디 음악이나 그 느낌을 몸으로 체득하지 못하면 표현해 낼 수가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흑인들의 음악이었던 재즈를 돈이 될만하니 백인들이 쓸어가는 이상한 구조의 역사 - 뭐 어느 나라도 대부분 그렇지만... - 의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일예로 1970년대 전 세계를 뒤흔든 디스코는 흑인 게이의 공동체 문화였지만 돈을 번 이들은 비지스와 존 트라볼타와 같은 백인들이고 그것은 힙합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 입니다. - 힙합은 이후 그나마 흑인들이 영역을 거의 확실하게 잡아가긴 했다는 재 생각이지만 역기 그 시스템에서 돈은 버는 것은 백인이지요. 이건 인종차별 발언하고는 다른 이야기 입니다만...

 

 

여튼 재즈가 슬슬 예술로 승화(?) 하며 대중들과 멀어지는 순간 나타난 로큰롤은 순식간에 어른들의 세계를 무너뜨리게 되는데 - 뭐 그러한고로 아직까지 옛날 어른들은(아... 이 범위가 참 애매합니다만... ) 아직도 본인의 가진 기득권의 세력을 저해하는 사탄의 음악이라고도 하더군요 - 그 기반에는 1950년대 풍요와 번영을 누렸던 백인 중산층의 자녀들이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로크롤이 일부 유행하지 못하고 사그러져 간 대신 통기타의 시대가 열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린 그 당시 졸라 가난해서 씨바 그 비싼 악기를 사고 앰프를 달 수가 없었다는...)  뭐 아시는대로 강헌님이 주제로 잡은 마이너리티가 문화의 주인이 된 시대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이여기를 맛나게도 잘 풀어 재낍니다. 멋진 형님이시네요 ^^     

 

 그리고는 슬쩍 1970년대 우리나라 청년문화의 바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 요즘 아이들이 정말 부러워할만한 속칭 현재는 꿀빠는 세대였다고 하는 삼촌세대.... 정말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  지금은 의외로 팝을 듣는 아이들이 거의 없지만 1960년대 말 이후부터 슬슬 과열되기 시작한 입시경쟁으로 심야 FM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문화가 생긴 덕에 당시에는 팝송만 주구장창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이들이 당시 가요라고 하던 노래들이 흔히 말하는 뽕짝 이외에는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말도 못 알아먹지만 뭔가 근사해 보이고 흥겨운 비틀즈나 밥 딜런의 노래를 들을 수 밖에 없었을 듯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흔히 세시봉 세대라고 일컫는 통기타 문화가 급속도록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도 이제 겨우 뭔가 청년들이 들을만한 노래가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 당시 정권에 찍혀 노래가 금지되고 가수들의 핍박에 시달린 사연을 읽다 보면 아... 우리 윗 세대들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왔는지 다시금 깨닫게도 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강헌 선생만의 독특한 시대적 문화에 대한 평이 맛깔나게 들어 있는데요. 가령 1980년대 10대 여고생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수용 형태(성적 정체성)를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가령 내가 남자를 밝히는 여자가 아니고 진짜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스타가 필요했는데  좋아하는 오빠의 사진을 방 안에 붙여 놓았을 때 엄마가 들어와서 음.. 괜찮네. 우리 딸년이 미친년이 아니구나 하고 어른들이 인정할만한 수 있는 - 예를 들어 변집섭. <- 제 의견은 아닙니다 - 스타만 크게 성공했고 박혜성이나 김승진같은 잘생긴 꽃 미남은 크게 성공하지 못한 못했다고 정리합니다. 당시 시대상 분위기상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당시에는 그렇게 은폐해야만 어른들에게서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깬 세대가 바로  X세대 - 씨바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해 -라고 정의 하는데 딱딱한 평론이 아닌 당시 대중들의 생홯상을 그대로 들여다 보면서 쓰는 글이라 흥미와 더불어 재미도 있습니다.

 

 3장은 클래식 속의 안티클래식을 주제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 인데 솔직하게 저는 클래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술술 읽혀 읽혀졌습니다. 클래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는 계기도 되었고 그 둘의 숨은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4장인 두개의 음모 <사의 찬미>와 <목포의 눈물> 속에 숨은 비밀에 관한 이야기 - 예전에 모 TV에서 이에 관한 음모론적 이야기인 윤덕심이 과연 자살을 했는가에 대한, 혹은 둘은 연인관계였는가에 대해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는 터라 관심있게 읽어보았는데 강헌 선생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배후와 그 배경에 대해 폭로(?) 하였는데 사실 관계를 떠나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나와 씁쓸하기도 하고 여튼 가볍게 한 꼭지씩 읽어 나가자 마음 먹었는데 한번에 쭈욱 읽어내릴만큼 재미가 있었습니다. 강헌님의 팟 캐스트를 들으신 분이라면 당시 기억을 상기하여 페이지를 넘기는 맛도 꽤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휴가에는 에어컨 틀어 놓고 늘어지게 누워 이런 책을 읽는 맛이 개인적으로 최고라 생각이 듭니다.

비싼 돈 들여가며 더운 곳에서 낯설은 곳에서 숙박하고 부대끼느니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고고학 - 미셸 푸코 문학 강의
미셸 푸코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읽은, 인상 깊의 푸코의 일화 한토막이 어렴풋이 기억이나 나서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2012년 2월 경향신문에 한 기자가 문화란에 쓴 글이 검색이 되어 나오네요. 뭐 이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푸코에게 ‘너 어디 가니?’ 하고 묻자 그는 ‘목을 맬 줄을 사러 베아슈베(염가상품 백화점)에 간다’고 대답해 놀라게 했다.” 고등사범학교 시절 20대 초반의 미셸 푸코는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정신치료기관을 찾기도 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깨닫고 혼란을 겪었던 탓이 컸다. 푸코가 ‘광인’과 ‘정상인’을 가르는 불확실한 선을 처음 접한 순간이다. - 아마 그린비에서 출간한 인물 시리즈 중 <미셸 푸코, 1926~1984> 의 내용 일부를 가져온 듯 싶습니다.

 

 

미셸 푸코는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푸코를 격렬히 비판한 위르겐 하버마스조차도 “우리 세대의 철학자 집단 가운데 시대정신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니 말입니다. 하지만 푸코의 책은 만만치 않은 내공이 필요 합니다. 그의 책은 우리나라 말로 옮기기에 알맞은 단어를 찾기가 어렵고 문장 자체도 그러하여 많은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을 하여도 늘 오역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도 합니다. 사실 푸코의 책은 원서 읽기도 만만찮은 품이 들어가는 고생스러운(?) 시간의 품 안에 놓여 있지요.

 

 

난장이라는 꽤 괜찮은 출판사가 푸코 사후 1997년부터 계속 발간되고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1970~1984)를 2011년부터 꾸준히 번역 내놓고 있습니다. 푸코는 1976년 <성의 역사> 1권을 내놓고도 8년이나 지난 1984년에야 2·3권을 출판하였는데 1권과 사뭇 다른 주제와 문제의식으로, 그 사이 푸코가 어떤 사유의 변화를 보였는지 추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강의로 전체 13강의 강의록을 계속 발간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등 현대 정치철학을 주도하는 사상가들이 공공연하고도 은밀하게 이 강의록을 참조해 왔다고 합니다. 어쨌든 국내에 푸코의 책은 꽤 꾸준히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데요 2013년 프랑스에서 푸코의 또 다른 강연의 수고(手稿)들과 녹음테이프의 전사본들 중 몇 몇을 모아 만든 책이 바로 [문학의 고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푸코 사유의 '잃어버린 고리'를 드러내어 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는데요. 김현선생은 문학에 관한 푸코의 논문들을 묶어 옮긴 자신의 연구서에 푸코의 1960년대를 푸코의 사유에 있어서의 '문학 시기'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1969년~70년경 이루어진 이중적 사유의 퇴조 이후 푸코는 이전처럼 문학과 미술을 그 자체로 다루지 않았는데 출판 자체로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이 책들은 대부분 그의 사후 연구자들이 개별적으로 취합하여 나왔는데 문학과 미술에 관한 그의 사유는 수많은 잡지와 논문에 파편적으로 뿌려져 있어 극소수의 전공자를 제외하고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문학의 고고학]이라는 책에는 바로 푸코가 '문학'에 대한 관념을 단 한번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스스로의 문학에 대한 '전복적, 위반적' 정의를 제출하고 있는 2부의 '문학에 대한 강의'가 들어 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편인 '광기의 언어'는 1963년 프랑스 방송에서 강연한 5회 방송분 중 '광인들의 침묵'과 '광기의 언어' 두 편을 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꽤 괴로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휴가지에서 읽은 터라 아무래도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기도 했었던 이유도 있고 사실 저는 빨리 책장을 넘기고 3편인 '사드에 대한 강의'를 보고 싶어서 였습니다. 사드의 작품은 범인의 눈으로 보이는대로만 해석하기에는 꽤 높은 담벼락이 존재하고 있어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책에 수록된, 푸코가 1970년 버팔로 뉴욕주립대학에서 강의한 것을 읽고 나니 어렴풋이 그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 특히나 사드의 글쓰기에 대한 해석은 이전에 제가 읽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안이하게 접근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사드에 있어서의 진실과 욕망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룬 첫번째 강연을 읽고 난 뒤 사드의 책을 푸코의 관점으로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주 정도에는 <미덕의 불운>을 재독할 예정입니다. 두번째 강연에서는 사드의 텍스트에서 '장면'과 '담론' 사이의 교차작용에 대하여 나긋하게 설명해주는데 역시 강의라는 구술언어의 특성상 꽤 편안하게 들립니다.

 

 

"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 혹은 설명은 물론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결국, 에로틱한 장면과 교차하는 이 담론은 이 에로틱한 장면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그곳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장면은 사태. 행위를 재현할 것이고, 연기는 희곡(dramaturgie)과 연극 안에 나타나는 섹슈얼리티를 재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담론은, 결국에는 혹은 이미 사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이전 혹은 다음의 문장에서 장면으로 연출된 것을 보여주고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p242"

 

 

기존에 읽었던 푸코의 다른 책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마 대중들을 위해 좀 더 자연스럽고 쉽게 풀어 설명한 구술어라 그런듯 싶습니다. 2편은 <말과 사물>을 읽어본 분들 이라면 편안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강의여서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텀을 두고 1편을 다시 재독하였는데 한번 훑은(?) 내용이어서 그런지 눈에 들어와서 모처럼 휴가기간에 즐겁게 푸코의 책을 즐긴 것 같습니다.

 

 

[문학의 고고학]인 푸코의 강의록을 읽다 보면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적절하게 섞어 이해도를 높여 주는데요. 라캉의 욕망이론을 접해보신 분이라면 더욱 더 재미있게(?) 읽어보실만 할 듯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다르거나, 튀거나, 어쨌거나
김홍민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포 김사장의 지령을 메일로 받은 이들은 아실 것이다. 그가 얼마나 무모하며 파격적인 마케팅을 어떻게 소화해 내고 성공을 거두는지..... 결론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다. 그는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기민한 CEO이며 책을 너무도 사랑하는 진짜백이 업자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젊은 날을 지배했고 그리하여 나는 잊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월 10일
조지 손더스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출퇴근길에 지하철 풍경은 지극히도 클리셰 합니다.

저 역시도 그러하지요. 제법 거리가 먼 편이라 종착역에서 가뿐하게 앉은 채로 출발하면 보통은 10여분 정도는 인터넷을 뒤적거리거나 메일을 확인하고 40여분 정도는 책을 읽고 10분 정도는 까무룩 졸다 내려야 할 때 즈음에는 용케도 눈이 번쩍 뜨여 내리는 짓을 십 몇년 째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떨 때에는 저 세 가지의 시간이 맞바뀌는 경우도 다반사이긴 하지요. 인터넷을 하다가, 졸다가 책을 10여분 서너장도 못 보고 내리는 경우도 있으며 책을 읽다가, 졸다가 웹서핑을 하다 끝내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로 이 시간대에는 단편소설집을 들고 다니곤 합니다. 한 꼭지씩 끊어서 읽기도 편할 뿐더러 딴짓(?)을 하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서 가만히 보면 늘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인터넷이나 카톡을 하지 책을 들여다 보는 이는 거의 없어 어떨 때에는 책을 대놓고 읽기가 왠지 쑥쓰러워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12월 10일]을 처음 만난 날은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보통의 퇴근 길은 무척 혼잡합니다. 출근 때에는 앉아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퇴근 때에는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고 대부분은 앞에 앉은 이가 자리를 내어줄때까지 꼼짝없이 선채로, 가방을 메고 - 책을 읽기란 몹시도 짜증나는 기분에 집중도 되지 않지요- 졸수도 없어 쓸데없이 웹페이지만 이리저리 배회하기 일쑤였는데 그 날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늦은 저녁이어서 그랬는지 앞 전철이 다들 태우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앉을 곳은 넉넉했고 제일 선호하는 중간자리도 남아 있었습니다. 느긋하게 유머 게시판에 들어가서 업데이트된 글을 키득대며 읽다가 옆자리의 아가씨가 책을 펴고 읽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서야 마지못해 이 책을 꺼내들었지요. 그리고는 곧 한 페이지를 읽었을때 막연한 불안함이 순간적으로 엄습해 왔습니다. 뭐지 ? 이 느낌은 하고 말입니다. 졸음은 순식간에 달아났고 눈에는 책이 활자만이 온전히 들어왔던 그런, 흔치않는 경험은 오랫만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마음은 빙산과 같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의 일부만이 물 위로 노출된 채 떠다닌다.'라고 하였지요. 그 유명한 빙산이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조지 샌더슨의 단편소설 대부분은 끊임없이 밖으로 표출되고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내면의 소리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첫장부터 선언합니다. 그것들은 너무 다양해서 사실은 미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것도 있었으나 인류의 보편적인 것, 사실과 환영, 부조리에 관해 정제된 언어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 그 불편함은 불안감으로 고스란히 옮겨 가지요. 거기에는 특정한 줄거리를 따라 흘러가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른 형식도 한몫을 합니다.

 

 

 첫번째로 실려있는 <승리의 질주>는 납치를 당해 죽을 뻔한 앨리슨 포프의 내밀한 욕망을 처음부터 거리낌없이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작가는 의식의 흐름이 몽상으로 이어져 얕은 잠을 자면서 꾸는 꿈처럼 정돈되지 않는 산만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나타나 주인공의 상태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독자를 매 순간 순간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야기가 어디로 어떻게 갈지 감 잡을 수 조차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안 좋은 일이 분명히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간, 이야기는 앨리슨 포프를 구할(앞으로) 카일 부트의 내면으로 넘어갑니다. 제한된 정보를 조금씩 조금씩 내어주는 문장을 읽을수록 읽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지요. 그리고는 이 불안함의 정체가 급작스럽게 드러나는데 앨리슨 포프를 좋아했던 소심하고 착한 카일부트가 납치범을 어떻게 그리 잔인하게 죽였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이야기를 하려니 어쩔 수 없는 스포일러가 되어 버렸군요. - '역사시간에 본 비디오에 나왔던 포로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가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철모 쓴 군인 같은 사내가 칼을 내리치기를 기다리는, 그런 포로로 말이다. p36' 라는 문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아니면 10대 소년의 압제의 해방의 분출구로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사실 이것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 작가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워낙 여러 각도로 해석이 가능한 계층적인 소설이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여지도 상당히 많습니다. - 앨리슨의 부모가 아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라고 하던 것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 앨리슨이 말한다. 난 밖으로 달려 나갔어요. 소리를 쳤죠, 아빠가 대꾸한다.

그래, 맞아, 넌 소리를 쳤어. 챔피언처럼 소리쳤지.

그래서 카일이 어떻게 했지? 엄마가 묻는다.

돌을 내려놨어요. 앨리슨이 말한다. 너희 둘한테 나쁜 일이 일어났어. 하지만 그 정도에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아빠가 말한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엄마가 거든다.

하지만 너희들이 잘 대처해서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아빠가 말한다.

정말 잘했어. 엄마가 말한다.

장하다. 아빠가 말한다. p37'​ 

 

 

 이 이야기를 온전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엄마 아빠가 말한 '잘했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잘 대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오싹하게도 인터넷뉴스에 달린 어떤 댓글과도 몸서리치게 닮은 이 현실을 이렇게 잔인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전쟁터에서 누명을 쓰고 불명예 제대 후 돌아온 병사의 귀환 후 이야기를 다룬 <집>또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 자리의 부재가 몰고 온 피폐해진 삶을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짧은 단편으로 흡인력있게 써 내려간 조지 샌더슨의 문장을 보노라면 '자본주의 문화의 부조리하고 비 인간적인 면을 가장 잘 관찰하는 눈을 가진 작가'라고 평한 주노 디아즈(우리 나라에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알려진 소설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미국적인 소설임에도 가장 공감이 갔던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인상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처럼 어찌할 수 없는 길버트의 마음이 떠올랐지만 어찌할까요. '좋아, 좋다고, 당신들이 나를 보냈으니 이제 나를 다시 대려와. 나를 다시 데려올 방법을 찾으라고, 빌어먹을 인간들아.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개자식들이야. p236' 재앙의 윤곽을 겨우 잠재우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짠하네요. 

 

 또한 이 단편선집의 표제작인 <12월 10일>은 기묘한 감동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공상적인 상상을 하며 산책하다 추운 겨울 호숫가에 빠진 약간 모자란 소년을 얼어 죽기로 결심하고 옷을 벗은 말기 암 환자가 구한다는 이 이야기는 조지 샌더슨의 열 편의 단편소설 중 가장 희망적이고 따스한 눈길을 담고 있습니다. 냉철한 눈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마음을 지닌 작가의 심성을 여기에서 살짝 맛볼 수 있었지요.

 

 커트 보네거트를 소설을 연상케 하는 <셈플리카걸 다이어리>은 SF소설의 경계소설이면서 유쾌한 풍자로 웃기면서도 슬픈 부조리의 극치를 맛보게 해 줍니다. 가난에 허덕이다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된 소시민 부부가 딸의 생일 축하를 위해 벌이는 소동을 다룬 이야기로 정원에 배치한 셈플리카걸이 - 뇌에 미세한 줄이 꿰여 높은 곳에 매달린 채 바람에 흰옷을 휘날리며 부자들의 잔디밭을 장식해주는 여성들로, 다양한 제3세계 국가들(몰도바, 소말리아, 라오스 등)에서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온 이주민들을 지칭 -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머리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 내심 섭섭했으나(아무리 생각해도 그 미세한 줄로 무게를 어떻게 지탱을 해줄지에 대해 의문이 떠나지 않았으나 그려려니 포기를...) 막판의 소소한 반전으로 인해 - 전반적으로 소지 샌더슨의 단편소설은 읽는 내내 불안함을 안겨 주기 때문에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가도 뒤통수를 깜찍하게 갈겨주는 반전도 있어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 즐거움과 씁쓸함이 기묘하게 뒤섞이는 묘한 감정을 들게도 하고 말입니다. <나의 기사도적인 대실책>은 풍자소설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럴테면 정직한 내부고발자에 대한, 혹은 행동하는 양심의 기사도 발현이 어떤 식으로 매장되어지는가에 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원서를 보지는 못했지만 조지 손더스가 꽤 독특한 문체라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역시 군데 군데 한번 읽어서는 언뜻 들어오지 않는 문장들이 보였고 한국어로 적당히 대체할 말이 없었는지 <거미머리 탈출기>의 경우 "말이술술 ™" 이던가 "꼿꼿이서™", "우울폭포™" 등 -개인적으로 코믹해서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 재미난 의역이 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을 하나 더 꼽자면 역자후기를 저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어떠한 것을 중점적으로 이해하면서 번역하였는지 역자의 느낌이라던가 어려웠던 점 등 등을 읽으면 더욱 더 역자의 수고스러움에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원서 읽기의 괴로움과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운 독자들에게 쉽게 읽게 도와주니 이렇게 고마울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편집자가 일부러 뺀 것인지 아니면 역자가 쓰지 않은 건지 모르겠으나 없어서 은근 섭섭 했습니다~

 

 

어느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성찬을 맛보면서 - 그 외 <거미머리 탈출기>에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고 <강아지>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당신도 그걸 겪었지만 외면하는 잔인함에 마음이 아팠으며 <권고>에서는 직장인의 실적으로 인한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초 엽편소설인 <막대>는 아버지의 집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지요. - 사실은 지하철에서 간간히 보려고 했는데 두 꼭지 읽고 나머지는 집에서 완전 몰입해 하루만에 끝장을 내고 말았습니다.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았기에 한번 더 재독을 하였는데 역시 두번째 읽을때에는 처음에 보이지 않던 여러 느낌들이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자연스럽게 정독하면서 생각을 정리 하는데 오랫만에 이런 어렵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만나니 놀랍고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좋은 작가의 소설이 이렇게도 늦게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쪼록 조지 손더슨의 다른 단편소설집도 국내에 번역되어 읽어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