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대선 이후 힐링용영화라는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퇴근 후 집에 가다 문득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신촌의 한 극장 뒷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앤 해서웨이의 표정연기에 감탄했고, 휴 잭맨의 부실한 노래실력에 실망했지만, ‘Do you hear people sing’, 이 노래가 합창으로 흘러나올 때 나도 눈물 몇방울 흘렸다. 어떤 집단적 열망의 표현을 감성적으로 극대화시키는 것은 뮤지컬/오페라 같은 장르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승리의 기억보다는 패배의 쓰라림이 정서적 울림이 더 컸다. 언제나 현재의 성취는 좌절되고, 미래는 유보된 채로 남는 것.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프랑스 혁명은 종종 성공하기도 했지만, 기실 끝없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흔히 근대 프랑스의 혁명이라면 1789년의 대혁명과 1830년의 7월혁명, 그리고 1848년의 혁명을 꼽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1832년의 6월봉기는 1789년 혁명의 시작에서 1875년 공화국 헌법 채택에 이르기까지 80여년 혁명 역사의 소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민중들의 봉기는 파리콤뮌의 비극이 잘 보여주듯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시체와 무덤으로 쌓아올린 비극의 역사가 근대 프랑스의 공화정이다. 공화정, 총재정, 왕정, 입헌군주제 등 혁명 이후의 정치체제 변동도 현란하다. 그러니, 18세기 말 ~ 19세기의 프랑스는 영화로도, 소설로도 그만한 소재가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영화를 보면서 빅토르 위고가 왜 소설 <레미제라블>의 첫 대목에서 성인의 경지에 오른 미리엘 주교와 늙은 국민의회 의원을 등장시켰는지 깨달았다. 소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을 회개와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일흔 다섯 살의 주교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된다. 장발장의 이후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이 소설의 주제를 삶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위고는 이 소설의 1부 앞 부분에서 그와 늙은 국민의회 의원과의 만남을 꽤 길고 상세하게 풀어놓는다.

 

국민의회는 구체제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귀족과 성직자에 맞서 제3신분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공화주의 의회다. 주권이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한 국민의회는 바로 그 자체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1812년 이후의 상황은 국민의회도 국민공회도 붕괴되고 나폴레옹도 물러간 왕정복고 시기로, 루이 왕가인 부르봉 왕조(1814-1830), 그리고 오를레앙 왕정(1830-1848)이 지배하던 시기다. 그러니, 옛 국민의회 의원은 몰락한 혁명가요,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일종의 후일담인 셈이다. 그는 혁명이 가져온 혼란과 분노에 대해 지적하는 미리엘 주교에게 이렇게 말한다.

 

루이 16세로 말하자면, 난 반대했소. 나는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내게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러나 악을 절멸시킬 의무는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소.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는 매음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 상태의 종말, 아동에게는 암흑의 종말이오. 나는 공화제에 찬성함으로써 이와 같은 것에 찬성한 거요. 우애와 화합, 여명에 찬성한 거요. 편견과 오류의 붕괴를 도운 거요. 오류와 편견의 붕괴는 광명을 가져오지. 우리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렸소. 그리하여 비참의 도나기였던 낡은 세계는 인류 위에 나동그러짐으로써 기쁨의 항아리가 된 거요.”

 

프랑스 혁명은 이유가 있었소. 그 분노는 미래에 용서를 받을 것이오. 그 결과는 더 나은 세계요, 그 가장 무시무시한 타격으로부터 인류에 대한 책무가 나오는 거요. (...) 그렇소. 진보에 대한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단말마처럼 내뱉은 웅변이다. 보수적인 프랑스 시골의 농부들에게조차 악당 G’라는 이름으로 외면받은 이 늙은 혁명 투사의 말을 듣고 미리엘 주교는 공감과 경탄의 감정을 느낀다. 주교-장발장, 프랑스 혁명-마리우스가 연관되는 방식은 그러할 것이다. 장발장은 혁명의 동참자이자 열혈 투사는 아니지만, 혁명을 통해 인간애와 자기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역시 왕정에 반대하다 추방당한 공화주의자였고, 1848년 국민의회 의원이자 자유와 진보의 신봉자였다. 망명지에서 대작을 써냈던 자신의 심정은 시골에 홀로 쳐박힌 이 늙은 국민의회 의원에게 투영되어 있었던 것.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하면서 사막의 열기에 시달리고, 밤의 추위에 떨며 사기가 땅에 떨어진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4천년의 역사가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연설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폴레옹의 연설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위의 국민의회 의원처럼, 당시의 프랑스 인들에게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를 인류와 역사의 움직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제왕정의 타도는 인류를 지배하는 앙시앙 레짐의 타도인 것이고, 그들의 혁명은 일국 혁명이 아닌 인류사적 혁명이었다는 인식 말이다. Viva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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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김종인 지음 / 동화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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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김종인을 두고 세가지 측면에서 우리 경제학계의 마이너리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남이 아닌 호남 출신이고, 서울대가 아닌 외대 출신이며, 미국 박사가 아닌 독일 박사라는 것. 이는 한국 사회의 주류는 아닌 것이 분명하고, 더구나 경제학계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이너리티적 측면이 김종인에게 그리 큰 약점으로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독일 유학후 서강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책수립에 깊숙하게 관여했으며, 전두환의 국보위에도 참여했고, 국회의원을 네 번 지냈으며, 노태우 정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그리고 박근혜 캠프에서는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냈다. 어느 모로 보나 마이너리티로 살아온 것은 아닌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런 주류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가족적 배경으로 풀이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이고, 그의 처는 박정희 대통령을 9년이상 보좌한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의 조카다. 출신의 마이너리티는 의 메이저리티로서 충분히 커버 가능한 것이었던 것.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동화출판사)는 김종인이 그 자신의 전매특허인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학문적 저서라거나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써내려간 역저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그도 4선을 지낸 정치인이고 보면,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이 펴내는 흔한 이벤트용 저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읽을만한 까닭은 독일 경제와 미국 대공황을 깊이 있게 천착했던 김종인의 학문적 배경과 한국사회의 중심부에서 줄기차게 경제민주화 혹은 대기업집단의 개혁을 부르짖어온 경험이 녹록찮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경제학계와 관료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미국 유학파들의 신자유주의 경제학과는 시각을 달리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야말로 마이너리티 경제학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 김종인의 그것을 마이너리티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상대적인 것일 따름이다.)

 

그는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 줄곧 분배의 요구를 수용하여 경제질서를 재편해야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모두가 성장을 외칠 때 그는 재벌중심의 성장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고, 노동자들의 분배요구를 외면할 때 한국사회가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노동자에게 무슨 대단한 애정이 있어서 이런 주장을 펼쳤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하여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시장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배의 요구를 수용하여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경계를 절대로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보와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체제내적 개량주의인 셈이다. 그런 정도의 입장임에도 그의 주장은 줄곧 재계의 반대에 부딪쳤고, 정치권에서는 외면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수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테오도르 루즈벨트가 록펠러가 소유한 거대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강제분할 시켰다든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부자증세, 저소득층 감세를 했다거나 미국의 연금제도인 소셜시큐리티를 실시했다는 역사적 사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기업가 세력이 막강해지면 이를 상대하는 세력으로서 노동조합이 커져야 하고, 정부는 그런 약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갈브레이드가 말한 대로, “카운터 베일링 파워기 존재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시장에 맡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고, 하나의 세력이 커지면 반대로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지원되어야 시장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 못하면 보이는 손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만든 헌법119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은 양극화 등으로 경제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거나 흔들릴 우려가 커질 때 정부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 원용할 수 있는 비상 안전장치.

 

그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그가 만든 헌법1192항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가 규제를 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얻었던 것이고, 70년대의 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 도입을 통한 중산층 육성, 의료보험 도입, 노태우 정부 때의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통한 부동산 시장 안정 등 굵직한 개혁들이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는 그런 제도들이 도입되는 과정의 우여곡절과 그의 경험이 상세히 나와 있다. “정치민주화가 된지 25년이 지났는데, 경제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라는 약간은 지겹도록 반복되는 주장보다, 이런 야사들이 더 흥미로웠다. 한국의 여야정치권, 권력의 핵심부 인물들과 얽힌 가계가 그로 하여금 막후의 역할을 하도록 길을 터주었을 것이고, 김종인 특유의 치밀한 논리와 지식, 할아버지 김병로에게 내림받은 배짱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대목들은, 그가 경험으로 터득한 통찰을 풀어놓을 때이다. 가령, 부마항쟁을 부가가치세의 졸속 도입에 따른 소상공인들의 저항으로 해석한 대목이나 연금개혁을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의 개혁보다 세대부양론으로 제시한 대목 같은 것이 그렇다. 연금재정의 고갈문제는 연기금을 주식에 투자해 수익을 높이는 것보다 연금을 계속 불입할 수 있는 사람을 늘리는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이 연금개혁의 가장 근본적인 대안인 셈이다. 클린턴 정부 때 시작되어 우리 정부도 도입한 근로소득장려세제(EITC)를 두고 미국과 한국의 도입 배경이 다르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미국은 노동을 기피하고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이들 때문에 EITC를 도입했지만, 우리는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에서 이 정책은 타당성을 잃었던 것. 이 대목을 읽으면서 EITC 도입 당시에 이걸 대단한 제도라고 떠들었던 기재부 공무원들이 떠올랐다.

 

이 책으로 보건대 김종인은 좌파는커녕 코포라티즘론자쯤 되는 것 같다. 이 정도가 우리사회의 주류 시각으로 좌파로 분류된다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정작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거대기업집단에 대응한 사회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의 해결을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에서 찾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이 책이 대선을 앞두고 급하게 출간되었다는 사정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박근혜 캠프에 가담하며 밝힌 이유도 박은 어느 이익집단에게도 혜택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의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 주목해 본다면, 김종인은 박정희 시대부터 최고권력자와의 내부거래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경로를 보여왔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능력이 없다거나 모자란다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인연과 우연이 겹쳐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경제권력보다 정치권력이 더 강했던 시절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처삼촌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인 김정렴을 통해서 자신의 경제구상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었고, 전두환 신군부의 국보위 참여, 그 연장선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도 지냈다.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이라는 과감한 조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노태우의 신임과 그때까지도 이 있었던 청와대 권력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거의 모든 언론은 지금 그를 대선과정에서 토사구팽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는 자연인 김종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문제는 그가 주장했던 경제민주화, 비정규직 해결, 양극화 해소, 재벌개혁, 노동자 배려의 노사관계, 성장과 복지의 균형, 조세 및 재정개혁이 얼마나 이뤄질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별로 희망적일 것 같지는 않다.

 

蛇足) 이 책에서 읽은 일본의 에피소드. 일본은 1992년 장기경기 침체에 빠져들자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썼는데, 그 중의 하나가 큰 강 113개 가운데 무려 110개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자금을 투자한 것. 강둑을 온통 시멘트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경제효과는 없고 재정적자만 커졌다. MB는 일본에서 배우지 말아야할 것을 배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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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1-2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시스템과 사람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보다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강력한 명령체계를 바탕으로 한 개혁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듭니다. 그가 살아온 시대, 그리고 개인적인 배경과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스타일 - 온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 이 박근혜 당선자의 주변인물들의 대체적인 성향이라면, 큰 기대를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사이 2013-01-3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민주주의를 민중운동 진영이 아닌 자유주의 세력이 실질적으로 진전시켰듯 역사에는 역설이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보수에게 기대할 것도 없지만 보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듯 합니다. 김종인 정도를 박근혜와 재벌이 수용한다면, 그 매커니즘의 반동성에도 분구하고 실질적으로 민중의 삶은 개선될 수 있을거라는 실낱같은희망이 있습니다. 뭐 부질없는 가망일수도 있지만...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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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카치는 소설을 ‘근대의 서사시’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매우 깊은 울림을 준다. 기껏 종이쪼가리에 쓰여진 글자더미에 불과한 ‘소설’이 어떻게 인류사의 발전과 조응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하나의 예술장르에 불과한 소설 따위에 거창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루카치의 이 호언장담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숱한 젊음들이 ‘문학’이라는 모닥불을 향해 불나방처럼 몸을 던졌다. 소설을 읽고/쓰는 행위는 밀실에 갇힌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근대적 주체의 집단적 열망의 표출이었다.


황석영의 새 소설 <여울물 소리>는 일찍이 소설에 부과되었던 역사적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근대 소설의 맹아적 형태를 근대초의 이야기꾼에서 찾고, 그의 삶을 통해 근대의 서사시로서 소설의 ‘운명’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루카치가 인류의 보편사라는 측면에서 소설의 지위를 말하고 있다면, 황석영은 그것을 지극히 한국적인 근대 상황속에 접목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근대초기에 등장했던 방각본 소설을 낭송하는 이야기꾼이면서 동시에 동학혁명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이다. ‘양반의 서자’라는 봉건체제의 주변부에서 태어나 나레이터로 ‘이야기꾼’의 자질을 얻고, 동학혁명이라는 봉건체제 극복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운명은 근대의 소설가(근대적 소설가의 탄생 이전이겠지만)가 소설이라는 근대적 예술형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근대를 향한 투쟁에 가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 근대의 소설가는 예술과 혁명이라는 두 과제를 필연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근대 주체인 셈이다. 너무 거창한 독법인가.


이 소설을 보니 황석영은 역시 아직 녹슬지 않았다. 근대초의 풍경과 습속의 세목을 알뜰하게 복원해내는 솜씨며, 주인공 연옥과 이신통의 사랑을 살뜰하게 그려내는 재주 또한 그러하다. 연옥은 세상의 바람이 들어 전국을 떠도는 ‘오딧세이’ 신통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그의 흔적들을 좇는 여인이다. 그녀는 부실한 제 서방을 박차고, 하룻밤의 사랑이었던 신통을 선택하는데, 세속과 대결하는 그녀의 강단과 신통에 대한 애정의 곡진함이 눈물겹다.


연옥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바로 전날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둘은 수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시 만난다. 연옥과 신통은 서로 말없이 술을 따르고 마신다.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소”라는 신통의 말에 그녀는 “야속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방바닥에 똑똑 떨어졌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런 여인상을 그려내는 것을 보면, 황석영은 마초다. 그것도 고급 마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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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1-0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가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개인적으로 황석영 작가의 책을 그리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그의 팬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이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일단 황작가의 책을 좀더 많이 - 초기부터 현작까지 - 읽어본 후에 결론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이지, 저는 제가 모르는 딱 그 만큼만 떠들어대는 것 같습니다. 조금 부끄럽네요. (물론 MB와 함께 한 여행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철학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였기에, 더욱 비판적인 마음이 들긴 했습니다만)

모든사이 2013-01-07 15: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제가 너무 오버해석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그래도 황석영 만한 작가가 없는 거 같습니다. 그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한계(?)는 제쳐두고라도 말이지요.. 방문 감사드립니다..
 
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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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는 말은 소설이라는 형식과 현실이라는 내용의 관계를 말한다. 소설은 이런저런 미학적 장치를 통해 ‘현실’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낸다. 그 현실이 형식화의 요구를 압도할 때, 소설이라는 미학적 장치는 별 쓸모가 없다. 형식화하지 않아도 그 ‘현실’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지 않아도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르뽀가 바로 그런 것일 텐데, 김애란의 <비행운>이 그런 현실을 다룬 소설이라면, 한겨레 기자 임지선의 <현시창>은 김애란이 형식화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담은 책이다. 전자를 읽고 나선 김애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되지만, 후자를 읽고 나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사연들은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들이면서 지금 우리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어떤 ‘질서’가 바뀌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생생한 증거들이다.

 

이 책의 표지 안 쪽에는 “내 젊은 날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고, 사회변화와 개혁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했던 한 권의 책은 <70년대>라는 르뽀였다”라는 송호창 변호사(민주당 의원이었다가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국회의원, 바로 그 사람이다.)의 말이 인용돼 있다. 그의 기억은 좀 부정확한데, 그 책의 이름은 <70년대 현장>(한마당)이고, 저자는 당시 동아일보 해직기자였던 이태호다. 어쨌거나 송호창의 이 말은 박정희 시대의 사회현실을 담은 르뽀집 <70년대 현장>과 이명박 시대의 현실을 담은 <현시창>간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각기 산업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실을 현직 기자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70년대 현장>이 출간된 1982년은 언론통폐합 이후 언로가 꽉 막혀 있던 시대였고, <현시창>의 시대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인해 언론이 폭발하고 있는 시기다. 현장의 목소리가 제도언론을 통해 가로막혀 있을 때 분출되었던 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자유언론이 만개한 시대에 분출되고 있는 목소리다.

 

그러니까, 언론에 최대한의 자유가 부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시창>에서 다룬 사건과 사고들은 언론에 의해 주목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자명하다. 이들 사건들이 언론에 이렇다할 수익을 가져다주는 ‘정보상품’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들이 발딛고 선 이데올로기와 상업적 기반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최대 공약수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고발하는 ‘휴머니즘’일 진대, 오늘날의 언론(특히 보수언론)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노릇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쓴 임지선 기자와 그녀가 속한 한겨레가 나는 참으로 고맙다. 이런 시대를 견디는 힘은, 우리 시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지금 왜 다시 이런 ‘르뽀의 시대’가 도래했는지를 음미할 필요도 있다. 어떤 수사와 분칠로도 미화될 수 없는 '팩트'들이 우리 삶의 척박함과 비극성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극복되지 못한 채 지난 5년 동안 역사적 퇴행이 한층 더 심화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 퇴행의 극단적 결과가 이 책에 담긴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들.

 

“황 씨가 죽을 때까지 걱정했던 학자금 대출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제 학자금 대출 이자 내는 날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라고 여동생은 물었다. 늘 자랑스러웠던 성실하고 착한 오빠가 남긴 것이 빚뿐이라는 사실을 동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승원씨를 짓누르던 학자금 대출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사망 직후 3개월 안에 법원에 ‘상속 포기 신청’을 해야 한다. 현실은 냉정하다.”

- 2011.7.2 경기도 고양시 이마트 탄현점에서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서울시립대생 황승원씨가 질식사로 사망했다.

 

"사고가 나던 날 새벽 1시 20분께, 어김없이 스프레이 보수작업은 시작됐다. 김씨는 전기로 주변 청소를 맡았다. 당시 전기로에는 쇳물 15톤 정도가 남아 있었다. 새벽 1시 40분, 김씨의 동료는 김씨가 전기로 입구 옆에 걸쳐 있는 철근 조각을 치우려고 파이프를 들고 애쓰는 모습을 봤다. 그 다음으로 본게 김씨가 쇳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김씨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동료들은 김씨가 빠진 사실을 알고도 이글대는 전기로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 2010년 9월 7일 충남 당진의 ㅎ 철강에서 일하던 김모씨가 야간 작업 중에 섭씨 1600도의 쇳물에 빠져 사망했다.

 

“현대자동차 파견업체에서 소장으로 일하는 아버지에게 회사쪽이 “딸이 농성을 그만두게 하라”며 압박해왔다. 불안해진 아버지는 홧김에 딸에게 전화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네가 부끄럽다”고 화를 냈다. 잠시 뒤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부녀에게 가혹한 겨울이다. 힘든 마음을 달래려 김 대의원은 농성장에서 매일 밤 일기를 썼다. “500명의 조합원들 중 단 한명의 여성 대의원인 나, 내가 한 결정이기에 후회는 없다”고 쓰고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 현대자동차 농성장의 여성 대의원 서른 한 살의 김미진씨.

 

"딸의 병명은 급성골수성 백혈병이었다. 백혈병 판정을 받은지 1년도 안되어 딸은 하얗게 말라갔다. 바스라질 것 같은 딸이 또 고열로 쓰러져, 그날은 수원의 아주대학교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강원도 속초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먼 길을 아비의 택시로 달렸다. 이천까지 왔을 때 유미는 덥다고 했다. 횡성쯤 왔을 때 유미의 숨이 가빠졌다. 운전을 하던 황상기 씨가 이상한 기분에 뒷좌석을 돌아봤을 때 딸은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아비는 죽은 딸을 뒷좌석에 태우고 울면서 택시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 2007년 3월6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23살의 어린 여성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최씨는 의식불명의 상태로 열흘을 버텼다. 12월 21일 정오,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다. 비싼 대학 등록금과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려고 피자 배달에 나선 지 5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피자가 식기 전에 배달을 하느라 오토바이 가속 페달을 밟다가 세상을 떠났다.”

- 스물 네 살의 대학 4학년 생 최모씨가 삼십 분 피자배달제를 운영하는 피자 체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숨졌다.

 

“영미씨는 장문을 이메일을 통해 내게 “기사를 읽고 너무나 공감이 돼 슬펐다”며 “식당 노동자의 자녀가 공부를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기자는 ‘그래도 희망은 존재한다’고 써주면 안되냐”고 항의했다. 뒤이어 자신이 바로 공장노동, 식당 노동 등 빈곤노동에 시달리는 엄마의 자식이며 자신의 가족이 기초생활수급권자라고 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힘든 삶을 살아왔으며, 지방에서 외국어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한 지금도 너무나 괴롭다고 했다.... “저는 서울에 와서야 제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저들과 비슷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요. 왜 하필 공부를 잘 했는지, 이제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요”

- 명문대에 진학한 기초생활수급권자의 딸

 

“갈 수록 바빠졌지만 이 모든 일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내야 했다. 싸움이 커지자 “문제제기를 하면 도와주겠다”던 동료들도 증언을 기피했다. 회사에서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는 그를 보며 “선배를 응원하지만 선배처럼 살 수는 없다”고 말하던 후배도 있었다. 성희롱 문제 제기를 끝으로 그의 승진도 멈췄다. 2005년 성희롱을 당할 당시 대리였던 은의 씨는 소송이 끝난 2010년까지 ‘만년 대리’로 살아야 했다.“

- 삼성전기 대리였던 서른 한 살의 이은의씨는 회사측과 5년여의 싸움 끝에 승소했다.

 

“최 아무개씨도 그날을 기억한다. 아무 것도 모른채 7월 30일 저녕에 유리방으로 ‘출근’한 최씨는 화장실에 갔다가 사방에 튀어 있는 피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유리방은 이웃한 여러개 업소가 공동으로 화장실을 사용한다. 화장실에는 몇 시간 전 숨진 박씨가 흘린 피가 사방에 묻어 있었다. 경찰은 박씨가 일하던 유리방에만 폴리스라인을 치고 돌아갔을 뿐, 피묻은 화장실은 그대로 뒀다. 최씨를 비롯한 성매매 여성들은 이날 그 피를 제 손으로 닦아낸 뒤 영업을 했다. 동료가 손님에게 죽임을 당한 날에도 덜 덜 떨면서 낯 선 남자와 단 둘이 방에 들어갔다.”

- 2010년 8월 588에서 일하던 성매매 여성이 쉰 두 살의 사내에게 살해당했다.

 

“남편의 폭력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남편은 부인은 물론 아기와 시부모까지 폭행했다. 폭력적인 잠자리가 이어졌고 출산 뒤 곧바로 둘째를 임신했다. 남편은 ‘아침에 깨운다’는 이유로 임신한 아내를 때렸고 갓난 아이를 집어 던졌다. 남편과 이혼을 하겠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너 캄보디아에서 데려오느라 들어간 돈이 얼만 데 이혼이냐”며 반대했다. 만삭에도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캤다. 둘째 출산 직후부터 펭소티씨는 몸져 누웠다. 눈이 튀어 나왔고, 목이 부어올랐다. 갑상선 이상이었다.”

- 캄보디아에서 온 펭소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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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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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의 뒷표지에는 이 책에 실린 단편 ‘서른’의 한 대목이 광고 문구처럼 쓰여 있다. 불문과를 졸업하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피라미드 판매조직인 ‘거마 대학생’이 된 주인공이 자기를 따르던 고삐리에게 하는 말이다. 거마대학생은 자신의 후배이자 제자를 다시 거마 대학생으로 끌어들인다. 그녀 역시 선배에 이끌려 피라미드 조직에 왔다. 이 비루한 운명의 사슬은 우리 시대 88만원 세대의 숙명처럼 보인다. 그러니, 피라미드 조직원은 또다른 피라미드 조직원을 낳고, ‘잉여’는 또 다른 ‘잉여’를 사슬처럼 엮고, 비정규직은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이어진다. 비하만의 ‘삼십세’와 최승자의 ‘서른’은 청춘기를 벗어나 삶의 새로운 단계(그것이 희망적이든 비관적이든)에 진입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은 그 성숙으로 가는 길을 애시당초 차단당한 젊음들이다. 이 소설집에서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간 젊은 부부가 등장하는 ‘벌레들’에서처럼, 그들의 삶은 주변부에서 버려진 채 그 자리를 맴도는 것일 뿐. 김애란은 자신이 속한 세대(30대 초반)가 처한 현실과 그들의 운명에 관한 세밀화를 그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피기도 전에 이미 시든 이들 꽃같은 청춘들은 김애란의 소설에서 가망없는 희망으로 그려져 있다.

 

과연 그렇다. 신입 직원 모집 때마다 나는 우울증이 도진다. 수북히 쌓인 그들의 이력서를 보면서 그들보다 앞선 세대로서 나는 도대체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과 서글픔이 가시지 않았다. 그들 보다 좀 더 앞선 세대이고 좀더 나은 환경 속에 처했다는 이유로 능력 이상의 자리를 보장받은 세대의 위선적 자책일지도 모른다. 그 이력의 내력은 대부분 1-2년짜리 인턴과 계약직이고, 그들이 원서를 내는 자리도 1-2년 짜리 비정규직이니, 이들 세대의 불우한 숙명은 우석훈의 ‘세대착취’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것이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달리 이들에게는 ‘수업시대’가 없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대학시절 선망했던 ‘오빠’가 비정규직 AD가 되어 그 인연을 근거로 비만 프로그램이 출연자로 비만한 후배를 이용해 먹듯이(‘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정규직이라는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로맨스가 허용될 자리는 없다. 이들의 삶은 탈낭만화된 속화된 질서 속에 놓여 있고, 희망은 언제나 '비정규직'이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청소부인 기옥씨가 등장하는 ‘하루의 축’도 그러한데,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손꼽히는 이 공항의 직원 중 비정규직이 80%에 이른다는 실제의 ‘팩트’ 앞에서는 삶에 대한 연민을 넘어 우리시대의 질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점에서 김애란이 공을 들여 그리고 있는 이 세밀화는 적어도 내게는 성공한 셈이다. 그녀가 리얼리스트의 시선으로 우리시대의 문제들과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설령 그것이 소설의 상업적 전략이 개입된 것이라 할지라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어설픈 위무와 공허한 수사학이 판을 치는 마당에,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황석영이 개발독재 시대의 삶에 주목했다면, 김애란은 신자유주의 절정기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존재의 근원적 고통이거나 멜랑콜리한 감성이거나. 어느 중견 여성 소설가의 그것처럼 그저 가족애만이 살길이라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건강하다.(아, 이런 구태의연한 수사라니!)

 

이 소설을 사무실에 근무하는 20대 여성들에게 “당신들 세대의 이야기”라며 선물을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러면 안될 것 같다. 페이스북에 열심히 음식 사진을 올리고, 유튜브로 K 팝스타들의 동영상을 시청하고, 빅토리아 시크릿과 SKⅡ 피테라 에센스에 더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김애란의 소설 따위가 과연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하루키 소설보다 더 재미없을 것이 분명하고, 아멜리 노통브보다 덜 말랑말랑하니, 읽어내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번 읽어보라고 해야 하나. 소설을 통해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내 믿음이야말로 19세기적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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